1  어느 큰 도시와 꼬마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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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먼 옛날, 인간들이 전혀 다른 말을 쓰던 옛적에, 따스한 나라들에 이미 굉장히 화려한 큰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임금님들이 사는 궁전이 우뚝 솟아 있었고, 널찍한 도로, 좁은 도로와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나 있었고, 황금과 대리석으로 조각된 신상(神像)들이 서 있는 웅장한 사원(寺院), 여러 나라에서 모아 들인 상품이 쌓인 흥청대는 장터가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연설을 하고 듣고 하는 아름다운 널따란 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엔 커다란 극장이 있었다. 

 그 극장들은 오늘날의 서커스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한 가지, 온통 바위 덩어리로 짜여진 것이 특색이었다. 관객들이 앉는 좌석은 커다란 깔대기 모양으로 계단을 이루며 둥글게 줄지어 있었다. 위에서 보면 이 극장의 구조는 어떤 것은 원형이었고, 어떤 것은 타원형이었고, 또 어떤 것은 커다란 반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 극장들은 원형극장이라고 불리었다. 

 그 중에는 축구 경기장만큼 커다란 극장도 있었고, 겨우 몇 백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는 아담한 극장도 있었다. 또, 기둥과 조각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것이 있는가 하면, 소박하게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있었다. 이 원형극장에는 지붕이 없었다. 모든 행사는 확 트인 하늘 아래서 벌어졌다. 그래서 화려한 극장에는 좌석 위로 높다랗게 금실로 짜여진 융단이 처져 있어서, 뜨거운 햇볕이나 소낙비로부터 관객을 가려 주었다. 소박한 극장에서는 갈대와 짚으로 짜여진 차일이 같은 구실을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극장들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런 극장을 갖고 싶어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열정적인 관객이요, 청중이었다. 

 뿐 아니라, 무대에서 벌어지는 감동적인 또는 코믹한 장면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들은 그 곳에서 상연되는 삶을, 신비스럽게도 자기들 자신의 일상적인 삶보다도 더 현실감 있게 느끼었다. 그들은 이러한 또 하나의 현실에 귀 기울기를 사랑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옛날의 큰 도시들은 몰락했고, 사원과 궁전들도 무너져 버렸다. 비바람과 추위와 태양의 열기가 돌덩이를 침식하여 구멍을 만들었고, 거대한 극장엔 폐허의 잔해(殘骸)만이 남게 되었다. 폐허가 된 금 간 벽 틈새에서 지금은, 잠든 대지(大地)의 숨결처럼, 여치들만이 단조롭게 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커다란 옛 도시 가운데에는 오늘날까지도 대도시로 남아있는 곳이 있다. 물론 그 안에서의 삶은 전혀 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전차를 타고 달리고, 전화랑 전등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신식 건물의 틈바구니에 군데군데 여전히 여전히 몇 개의 옛날 기둥들, 하나의 성문, 한 조각 성벽, 또는 그 옛날의 원형극장이 하나 남아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도시에서 우리의 모모 이야기는 비롯된다. 


 이 큰 도시의 남쪽 끝 교외(郊外)에 어디부터선가 논밭이 시작되고 갈수록 점점 가난해 보이는 오두막과 인가(人家)가 보이는 곳에, 소나무 숲에 가려진 작은 원형극장의 잔해가 남아 있다. 이 극장은 그 옛날에도 호화로운 극장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극장이었다.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극장이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즉 모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시기에 즈음해서, 이 폐허의 터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다만 고고학(考古學)을 전공하는 몇몇 학자들만이 이 극장을 알고 있었지만, 실상 거기에서 더 연구해 낼 거리(素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도 이 극장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 극장은 큰 도시에 있는 다른 명승지에 댈 만한 관광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다가 몇몇 관광객이 거기 들러, 잡초로 무성하게 뒤덮인 좌석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떠들썩하게 기념 사진을 찍고 떠나곤 하였다. 그리고 나면 돌덩이로 된 원형의 터는 다시 정적에 휩싸이고, 여치들은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끝없는 노래의 다음 귀절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 묘한 둥근 건축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그곳에다 양 떼를 놓아 풀을 뜯게 하였고, 어린애들은 가운데 둥근 터를 공놀이터로 사용했다. 또 간혹 밤이면 사랑하는 남녀들이 그곳을 밀회 장소로 이용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사람들 사이에, 요즘 누군가가 그 폐허 속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것은 어린 아이, 어쩌면 어린 소녀라는 소문이었다. 아이가 약간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닌게 아니라 확실히는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모모라던가, 그와 비슷한 이름이라고 했다. 

 모모의 겉차림은 사실상 약간 기묘했고, 청결과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들한테는 필시 약간 어처구니없게 보일 수도 있었다. 모모는 작고 굉장한 말라깽이였다. 그래서 기껏 잘 봐 줘도 겨우 여덟살쯤 될까, 아무튼 벌써 열 두살이 되었다고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모모는 지금껏 한번도 빗질이나 가위질을 한 적이 없는 것같은, 헝크러진 까만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아름답고 커다란 새까만 눈을 갖고 있었다. 그의 발 역시 새까만 빛깔을 하고 있었다. 모모는 거의 맨발로 돌아 다니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에만 어쩌다 신발을 신었지만, 그것도 짝짝이인데다가 자기한텐 너무 큰 것이었다. 

 사실 모모는 어디서 주운 것이든가, 누구한테 선사받은 것 말고는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색색의 알록달록한 누더기로 기워진 꼬마의 치마는 복사뼈에까지 치렁거렸다. 그 위에다 꼬마는 낡아빠진 헐렁한 남자 웃도리를 걸치고는 손목께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을 잘라 내려고 들지를 않았다. 자기가 더 자랄 것이라는 점을 미리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언제 다시 그렇게 근사하고 실용적인, 주머니 많이 달린 웃도리를 갖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극장의 옛터, 잡초로 뒤덮인 무대 밑으로, 바깥 성벽에 있는 구멍을 통해 들어 설 수 있는, 반쯤 허물어진 몇 개의 방이 있었다. 그 속에다 모모는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어느 한나절 이웃 마을의 몇몇 남녀들이 모모한테 와서 꼬마에 관해 알아 내려고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모모는 마주 서서 걱정스런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쫓아낼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그들이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들은 실제로 가난하고 삶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 남자들 중의 한 사람이 입을 떼었다. "여기가 네 마음에 드니?" 

 "예." 모모는 대답했다. 

 "자, 그렇긴 해도 너는 아직 어리잖니." 한 부인이 말했다. "누구인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지 않겠니." 

 "제가 보살피지요." 모모는 기분이 가벼워져서 대답했다. 

 "너 혼자 감당할 수 있니?" 부인이 물었다. 

 모모는 한참 말이 없더니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저는 별로 필요한 게 없어요." 

 다시금 사람들은 눈짓을 주고 받더니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 모모," 다시금 맨 처음 말을 꺼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 생각엔, 네가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네 집에 같이 살면 어떨까 싶은데. 사실은 우리 모두가 별로 여유는 없어. 대부분 먹여야 할 애들이 벌써 잔뜩 있거든. 그래두, 우리 생각엔 한 아이쯤 더 있는 건 별로 문제가 없는 것 같아. 그렇게 하면 어떻겠니, 응?" 

 "고마와요." 모모는 그제야 처음으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정말 고마와요! 그렇지만 저를 그냥 여기 살게 내버려 두실 순 없으세요?" 

 마을 사람들은 한참 동안 서로 얘기를 주고 받더니, 결국 그렇게 하는 데 뜻을 모았다. 이곳에서도 결국 꼬마는, 그들 중 누구 한 사람 집에 가 있는 것 못지 않게 잘 지낼 수 있으리라는 의견이었던 것이다. 그 대신 그들 모두가 힘을 합해 모모를 보살피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느 한 사람이 보살피는 것보다 한결 더 간단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장, 모모가 살고 있는 반쯤 허물어진 돌로 된 방을 정리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수선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 중의 한 미장이가 심지어 조그만 돌 부뚜막까지 만들어 주고 녹슨 연통까지 달았다. 어느 할아버지 목수는 나무 상자 몇 개를 가지고 작은 책상이랑 두 개의 의자를 두들겨 맞추었다. 마침내 부인들은 낡았지만 꽃무늬로 장식된 철침대랑, 약간 헤어진 메트리스, 두 장의 담요를 가져왔다. 이렇게 해서 폐허의 무대 밑, 바위 구멍 안에 작지만 아늑한 방이 마렸되었다. 예술적 재능을 가진 미장이 아저씨는 벽에다 예쁜 꽃그림까지 그려 끝내 주었다. 하다못해 그림이 걸린 틀과 못에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마을의 어린애들이 남은 음식을 갖고 몰려왔다. 어떤 아이는 치이즈 한 조각, 어떤 아이는 작은 빵 조각, 다른 아이는 과일 등. 그렇게 정말 많은 아이들이 모였다. 이날 밤엔 그야말로 많은 아이들이 몰려와 모두가 어울려 원형극장에서 모모의 이사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일 수 있었다. 그것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즐거운 잔치였다. 

 이렇게 하여 꼬마 모모와 이웃 마을 사람 사이의 친분은 시작되었다. 


 

2  비범한 특성과 지극히 평범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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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부터 꼬마 모모는, 적어도 자기 혼자의 생각으로는, 만족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생기는대로, 마을 사람들의 여유가 돌아가는대로, 어떨 땐 너무 많고 어떨 땐 모자라기도 했지만, 이젠 항상 무엇이고 먹을 것이 있었다. 머리 위엔 지붕이 있었고, 잠자리가 있었고, 추우면 불을 지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모모에겐 참으로 많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토록 친절한 사람들 틈에 있게 된것이 모모한테는 더없이 큰 행운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리라. 하긴 모모 자신은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편에서도, 자기네들 역시 적지 않은 행운을 얻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모모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그 전에 어떻게 모모 없이 살아 왔던가 이상스럽게 여길 지경이었다. 이 꼬마 소녀가 그들 곁에서 지내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모모를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느끼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갑자기 꼬마가 다시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모모는 수없이 많은 방문을 받았다. 거의 언제이고 꼬마 곁에는 누군가가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모를 필요로 하는데도 올 수 없는 사람은 모모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었다. 모모의 존재의 필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한테,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모모한테 가 보게!" 

 이 말은 점점 마을 사람들 간에 으례 하는 말투가 되어 버렸다. 마치 "만사형통하시기를!", "천천히 많이 드십시오!" 또는 "하느님이 알고 계시지!"라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투로, 사람들은 있을 수 있는 어떤 경우에고 간에 "아무튼 모모한테 가 보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모든 사람한테 일일이 훌륭한 충고를 해 줄 수 있을 만큼 모모가 기막히게 현명해서였을까? 위안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서 항상 적절한 말을 찾아내서 였을까? 아니면 현명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서 였을까? 

 아니, 모모는 다른 보통 꼬마나 마찬가지로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모모에겐 사람들의 기분을 좋도록 전환시키는 어떤 재간이 있었던 것일까? 이를테면 유난히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었던가? 아니면 무슨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가? 아니면―하기야 지금 일종의 서커스 안에 살고 있으니까―결국 춤을 출 줄 알았던가? 곡예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것 역시 아니었다. 

 혹시 모모는 마술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일까? 무슨 신비스러운 주문(呪文)을 알고 있어서 그것으로 온갖 근심과 어려움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손금을 읽는다든가, 그런 비슷한 걸로 앞날을 점(占)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꼬마 모모가 가진 재간, 다른 누구나가 할 수 없는 능력은, 귀를 기울여 듣는 일이었다. 

 그거야 별 특별난 재간이 아니라고 어쩌면 많은 독자들은 말할는지 모른다. 귀 기울여 듣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진정으로 귀 기울여 듣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히 드물다. 더우기 모모가 도달하고 있는 귀 기울임의 경지는 세상에 둘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들한테 문득 혜안(慧眼)이 떠지게끔, 귀 기울여 들어 줄 줄을 알았다. 그건 모모가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깨우칠만한 말을 하거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모모는 그냥 옆에서 앉아 오로지 귀 기울여 듣기만 하였다. 온 정신을 집중하고, 온 마음을 쏟으며, 그러면서 그 크고 검은 눈으로 상대방을 응시하였다. 그 때 상대방은,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고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지혜로운 생각이 불현듯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모모는 방향을 못 잡거나 결심을 못한 사람들에게 문득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게끔 귀 기울여 들어 줄 줄을 알았다. 또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어느새 주저함이 없이 용기를 갖도록 해 주었다. 또는 불행한 사람, 억눌린 사람들이 신념과 기쁨을 느끼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가령 누군가가 자기의 인생이 완전히 어긋났으며 무의미하다고 느끼며 자기 자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 망가진 남비처럼 언제이고 즉각 다른 걸로 바꿔질 수 있는 수백만 인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낄 때―모모에게 가서 그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그는 이야기하는 도중 어느새에 신비스럽게도, 자기가 근본적으로 틀린 생각을 했다는 것, 현재의 그 자신은 수많은 인간의 틈에서 오로지 단 한번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자기 나름의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해서 자기는 이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선명히 알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모는 귀 기울여 들어 줄 줄을 알았다! 


 어느 날, 이웃이면서도 죽자 사자 한바탕 싸우고는 서로 말도 하려 들지 않는 두 남자가 원형극장으로 모모를 찾아왔다. 다른 이웃 사람들이 이 두 사람에게 아무튼 모모한테 가 보라고 충고를 했던 것이다. 이웃끼리 원수가 되어 지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두 남자는 처음엔 막무가내로 뻗대다가 결국 마지못해 수그러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제 원형극장 안에서 말없이 원수처럼 각기 돌좌석의 다른 편에 앉아, 침울하게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모모의 '거실'(居室)에다 난로와 예쁜 그림을 마련해 준 장본인, 미장이 아저씨였다. 그는 니콜라라는 이름을 가졌고 끝을 꼬아 올린 새까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니노라는 이름이었다. 그는 바싹 마르고 언제나 약간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니노는 도시 변두리에 조그만 주막을 세(貰)내어 경영하고 있었다. 하긴 주막이랬자 대체로 하루 저녁 내내 술 한잔을 시켜 놓고 지난 날의 회고담이나 늘어 놓는 몇몇 노인 손님이 고작이었다. 니노와 그의 뚱뚱보 마누라 역시 모모의 친구들이었고, 벌써 여러 번 모모한테 맛있는 음식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각기 서로 화가 잔뜩 나 있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모모는 우선 누구한테 먼저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중의 어느 쪽도 기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결국 모모는 두 사람으로부터 똑 같은 거리에 있는 지점, 돌덩이 무대의 가장자리에 걸터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다리고만 있었다. 많은 일들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헌데 시간이야말로 모모가 풍족하게 지니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것이다. 

 두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자 니콜라가 별안간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가겠다. 도대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나는 내 호의를 보여준 거야. 하지만, 모모, 너도 보다시피 저 작자는 조금도 잘못했다는 표정을 보이지 않는구나. 내가 더 이상 기다리고 앉았을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니?" 

 그리고 그는 정말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래, 도망치려면 치라구!" 니노는 니콜라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사실 너는 여기 올 필요도 없었어. 어쨌거나 난 사깃군과는 화해를 안해!" 

 니콜라가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사깃군인데?" 그는 으르릉대면서 다시 되돌아 왔다. 

 "다시 한번 말해 보라구!" 

 "맨날 네 맘대로 될 줄 알구!" 니노가 소리쳤다. "억세고 주먹께나 쓴다고 네 앞에서 바른 말 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아냐? 하지만 나는 네 앞에서건, 누구 앞에서건 들으려는 사람한텐 바른 말을 한다. 자, 들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죽여 보렴. 아까처럼 말이다. 네 맘대로!"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었지!" 니콜라는 고함을 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지만, 좀 봐라, 모모. 저 작자가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중상을 하고 있는지! 나는 그저 자기 목덜미를 잡아 끌어, 자기 집 뒤 개숫물 웅덩이에 처박았을 뿐인데. 그 안에선 쥐새끼라도 빠져 죽을 수가 없게 돼 있어." 

 그리고는 다시 니노한테 몸을 돌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유감스럽게도, 보시다시피 너는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잖니!" 

 한동안 거친 욕지거리가 오고 갔다. 그래도 모모는 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두 사람이 그토록 서로 분개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니콜라가 그런 야비한 폭력을 행사한 것은 니노가 몇 사람의 손님 앞에서 그의 따귀를 때렸기 때문임이 밝혀졌다. 물론 그보다 앞선 이유로는 니콜라가 니노의 그릇을 몽땅 부숴 버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도대체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이야!" 니콜라는 격분한 어조로 변명했다. 

 "항아리 한 개를 벽에다 던졌을 뿐이야. 그것도 실은 이미 금이 가 있던 걸 말이야!" 

 "하지만 그건 내 소유물이야, 알겠니?" 니노는 대답했다. "무엇보다 네가 그런 짓을 할 권리는 없는거야!" 

 니콜라는 자기의 행동이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니노가 미장이로서의 자기의 능력을 모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저놈이 나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니?" 그는 모모를 향해 외쳤다. "날더러, 밤낮 취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제대로 담을 똑 바로 쌓을 수 없을 거라는구나. 그리고 내 증조 할아버지부터 그랬을 거라나. 어쩌면 증조 할아버지가 피사의 사탑(斜塔)을 쌓는 데 같이 거들었는지도 모른다는거야. 그러니……." 

 "그렇지만, 니콜라," 니노가 대답했다. "그건 농담이었잖아!" 

 "참 멋진 농담이구나!" 니콜라는 비꼬듯이 말했다. "그런 농담을 듣곤 나는 웃을 수가 없어." 

 하지만 니노는 그 농담으로 그 이전에 니콜라가 한 다른 농담을 갚아 주려고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느 날 아침 니노의 대문 위에 새빨간 글자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자가 술집 주인이 된다."(Wer nichts wird, wird Wirt). 그리고 그것 역시 니노는 도저히 농담으로 여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남자는 한동안, 두 가지 농담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놓고 진지하게 열을 올리더니 다시금 화가 나서 말을 주고 받으며 싸웠다. 허나 그러다가 갑자기 둘 다 웃음보를 터뜨렸다. 

 모모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남자 중의 누구도, 모모의 시선을 똑바로 해석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두 남자를 우습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모모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남자는 불현듯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본 듯한 느낌이 들었고,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좋아," 니콜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런 소리를 자네 문 앞에 쓰지 말걸 그랬나 보군, 니노. 자네가 포도주 딱 한잔 주는 걸 거절하지만 않았대도, 나는 그러지 않았을 걸세. 그것은 법에 어긋나는 거야. 안 그래? 나는 꼬박꼬박 술값을 지불을 했거던. 자네가 나를 그렇게 대접할 하등의 근거가 없었어." 

 "있을 수도 있지!" 니노가 대답했다. "성(聖) 안토니우스 건(件)은 이제 잊어 버렸나? 아아, 이제 자네 얼굴이 핼쑥해지는군? 그 때 자네는 고의로 나를 속였었지. 그런 일은 용납할 수가 없었어." 

 "내가 자네를?" 니콜라는 소리치며 어이없다는듯 철썩 자기 이마를 쳤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히려 자네가 나를 슬쩍 속이려들다가 뜻대로 안 된거지!" 

 사실은 이러했다. 니노의 작은 주막에는 성(聖) 안토니우스를 그린 그림이 하나 벽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니노가 화보(畵報)에서 잘라 액자에 끼워 넣은 천연색 인쇄물이었다. 

 어느날 니콜라는 니노에게 이 그림을 사겠다고 했다. 겉으로는 그림이 참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니노는 재치있게 흥정을 해서, 마침내 니콜라로 하여금 그의 라디오와 교환하겠다는 제의를 하게 만들었다. 니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이 흥정에서는 니콜라가 응당 상당한 손해를 보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거래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실은, 마분지로 된 액자 뒷면과 그림 사이에, 니노가 전혀 모르고 있던 지폐가 한장 꽂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니 이번에는 니노편이 니콜라의 속임수에 당한 꼴이 되었다. 그는 화가 났다. 한마디로 딱 잘라 그는 니콜라에게 돈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돈은 그림 흥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니콜라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나서부터 니노는 니콜라에게 다시는 술을 팔려 하지 않았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두 남자는 사건의 발단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니노가 물었다. "지금 정말 솔직히 말해 보게, 니콜라. 자넨 흥정 이전에 이미 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안 그래?" 

 "암, 그렇지 않고야 그런 흥정은 안 했을걸세." 

 "그렇다면 자네가 나를 속였다는 점을 시인해야 하네!" 

 "뭣 때문에? 그럼 자네는 돈이 있었다는 걸 정말 몰랐단 말인가?" 

 "몰랐네, 맹세코!" 

 "자, 좋아! 어쨌거나 자네는 나를 살짝 속이려 했었어. 안 그렇다면 그 따위 값도 없는 신문지 조각 하나로 어떻게 내 라디오를 차지할 생각을 할 수 있었나, 응?" 

 "그럼 어떻게 자네는 돈이 있다는 걸 알았나?" 

 "이틀 밤 전에 어떤 손님이 성 안토니우스에 바치는 헌금으로 거기에 돈을 꽂는 것을 보았지." 

 니노는 입술을 깨물었다. "큰 금액이었나?" 

 "내 라디오의 값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이었어." 니콜라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긴 싸움은 애당초 내가 신문에서 오려낸 성 안토니우스 때문일세 그려." 니노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니콜라는 머리를 긁적였다. "애당초 그래." 그는 투덜대듯 말했다. "자네가 갖고 싶으면 돌려 주겠네, 니노." 

 "아닐세, 천만에!" 니노는 당당하게 말했다. "흥정은 끝난 걸세! 사내 대장부 사이의 약속 아닌가!" 

 그리고는 갑자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들은 돌계단을 내려와 풀이 뒤덮인 둥근 광장 가운데서 서로 얼싸안고 상대방의 등을 두들겼다. 그리고는 둘 다 모모를 팔에 안고 말했다. 

 "고맙다!" 

 잠시 후 그들이 떠나갈 때, 모모는 그들의 뒷 모습을 향해 한동안 손을 흔들었다. 모모는 두 친구가 다시 정다와진 것이 퍽 기뻤다. 


 한번은 한 어린 소년이 노래를 하려 들지 않는 카나리아를 가져 왔다. 그것은 모모에게는 훨씬 힘든 과제였다. 카나리아가 마침내 즐겁게 지저귀며 노래하기까지, 모모는 꼬박 한 주일을 귀를 기울여야 했다. 

 모모는 모든 것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개와 고양이, 귀뚜라미와 거북이 아니, 심지어는 빗소리와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노라면 그 모든 것은 모모에게, 자기네 방식으로 말을 걸어 왔다. 

 숱한 밤, 친구들이 집으로 가버리고 나면, 모모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아아치 지붕으로 하고 있는 옛 극장 터의 커다란 둥근 돌좌석 한 가운데 혼자 앉아서, 오로지 거대한 정적(靜寂)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모모는 마치 자기가 별세계를 향해 귀 기울이고 있는 거대한 귓바퀴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야릇하게도 온통 심장을 파고드는, 나지막하고도 힘찬 음악을 듣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밤이면 모모는 항상 유난히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지금도 귀 기울여 듣는 일이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독자가 있다면 정말 자기 자신 잘할 수 있는지 한번 몸소 시도해 보시기를. 


 

3  놀이 속의 폭풍과 진짜 쏟아진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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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또 한 가지 다른 이유로 이유로 이 원형극장 옛터를 즐겨 찾았다. 모모가 여기 사는 이후로 아이들은 전에 없이 잘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지루한 때가 한 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모가 무슨 유별난 제의를 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모모는 그저 거기 있으며 어울려서 놀 뿐이었다. 그리고 다만 그러는 가운데 ― 왜 그런지는 도저히 모르지만 ― 어린아이들한테 신통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날마다 아이들은 좀더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한번은, 짓누르는 것같이 무더운 어느 날, 여남은 되는 어린아이들이 돌덩이 계단에 앉아 모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모는 곧잘 그러듯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러 잠깐 나가고 없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곧 소나기가 쏟아질 기세였다. 

 "집으로 갈까 봐." 어린 꼬마 동생을 데리고 온 한 소녀가 말했다. "나는 천둥 벼락이 무서워." 

 "그럼 집에서는?" 안경을 걸친 한 소년이 물었다. "그럼 집에서는 천둥벼락이 안 무섭단 말이니?" 

 "무섭기야 하지." 소녀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기 있어도 마찬가지 아니니?" 소년은 말했다.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소녀는 말했다. "하지만 모모가 영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애." 

 "그렇다면," 그 때 개구장이 소년 하나가 화제에 끼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무슨 놀이를 할 수 있잖아. 모모가 없더라도." 

 "좋아, 그럼 무슨 놀이를 할까?" 

 "나도 몰라. 무엇이든 간에." 

 "무엇이든이라니, 그건 아무 것도 아니잖아. 누구, 무슨 놀이를 할 지 좋은 생각 없니?" 

 "내 생각에는"라고 여자같은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가진 한 뚱보 소년이 입을 떼었다. "이런 놀이를 했으면 좋겠어. 이 극장 전체를 커다란 배라고 치고, 우리가 미지(未知)의 바다로 나가 모험을 하는 놀이를 하면 어떨까? 내가 선장(船長)이 되고 너는 일등 기관사, 그리고, 너는 자연과학자, 말하자면 교수가 되는거야. 우리의 여행은 이를테면 탐험여행이거던. 알겠니? 그리고 나머지는 마도로스가 되는거야." 

 "그럼 우리 여자 아이들은? 우린 뭐가 되는 거니?" 

 "여자 마도로스. 이 배는 미래의 배거든." 

 그것은 참으로 근사한 착상이었다. 꼬마들은 놀이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의견이 서로 엇갈려,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얼마 안 있어 모두들 돌덩이 좌석에 주저앉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모모가 나타났다. 

 뱃머리로 파도가 높다랗게 철썩거렸다. 탐험선 '아르고'(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야손이 金羊皮를 찾아 콜히스나라에 건너갈 때 타고 간 배의 이름 ― 옮긴이)는 폭풍이 지난 뒤의 파도를 타고 조용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 배는 이제 순풍(順風)을 타고 남쪽 산호(珊瑚)의 바다를 향해 전 속력으로 질주할 참이었다. 태고(太古) 이래로 지금껏 감히 이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려고 나선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바다에는 깊이 모를 여울과 산호초(珊瑚礁), 그리고 알 수 없는 바다 괴물이 우굴거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바다에는 이른바 '영원한 태풍', 영원히 잠들지 않는 회오리 바람이 불기 때문이었다. 폭풍은 끊임없이 이 바다 위를 회오리치면서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그야말로 교활한 귀신처럼, 먹이를 약탈하려 덤벼들었다. 폭풍이 나아가는 방향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단 이 폭풍의 거대한 갈퀴에 걸려 들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것도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리하여 끝내는 속절없이 톱밥처럼 가루로 으깨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탐험선 '아르고'는 이 '떠도는 태풍'을 만날 것에 대비하여 특수 장비를 갖추었다. 이 배는 온통, 칼날처럼 휘어지기는 해도 결코 망가지지 않는 푸른빛 알라몽 철(鐵)로 건조되었다. 그것도 특수한 건조 과정을 거쳐, 용접한 이음새가 없는 단 하나의 철덩어리로 주조(鑄造)된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선장, 다른 선원들이라면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모험길에 나설 용기를 갖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선장 고르돈은 그럴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선장은 사령교(司令橋)에 서서, 하나같이 제가끔 특수 분야에 노련한 전문가들인 그의 마도로스와 여자 마도로스들을 내려다 보았다. 

 선장 옆에는 그의 일등 기관사, 이미 백 스물 일곱번이나 폭풍을 헤치고 이겨낸 노련한 수부, 돈 메루가 서 있었다. 

 저편 뒤 갑판의 햇볕 가리는 천막 위로는, 이 탐험의 학술부 책임자인 아인쉬타인 교수와 비범한 기억력을 갖고 교수의 도서관 구실을 해 주는 두 사람의 여자 조수 마우린과 사라가 보였다. 세 사람 모두 정밀 기계 위로 몸을 구부리고 서서, 자기네들만이 아는 복잡한 학술 용어로 소근소근 상의를 하고 있었다. 

 세 학자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아름다운 토착민 아가씨 모모산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이따금 학자는 이 바다의 특수한 세부적인 사항에 관해 소녀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면 소녀는, 교수만이 알아 듣는 아름다운 울림의 훌라 사투리로 대답했다. 

 이 탐험 여행의 목적은 '떠도는 태풍'의 원인을 찾아내고 가능하면 그것을 제거하여 다른 배들도 이 바다 위를 항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사방이 고요했고 폭풍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조망대에 있는 선원의 갑작스런 외침에 선장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선장님!" 그는 손나팔을 통해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제가 본 것이 틀림없다면, 저 앞에 유리로 된 섬이 하나 보입니다!" 

 선장과 돈 메루는 즉시 망원경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아인쉬타인 교수와 그의 여조수들도 흥미를 갖고 다가 왔다.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만이 침착하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소녀가 속한 토착민의 수수께끼같은 관습은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을 금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리섬에 곧 닿았다. 교수는 배의 바깥 벽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섬의 투명한 바닥에 발을 디뎠다. 바닥은 굉장히 미끄러웠다. 그래서 아인쉬타인 교수는 두 다리를 디디고 서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섬은 원형이었고 눈 어림으로 직경 이십미터 정도 되었다. 섬의 바닥은 한가운데를 향해 반구(半球)처럼 가풀막져 있었다. 제일 높은 부분에 이르자, 교수는 이 섬의 안쪽 깊은 곳에서 광선이 일렁거리며 비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교수는 난간에서 잔뜩 긴장해서 서 있는 다른 선원들에게 자기가 관찰한 광경을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여조수 마우린이 의견을 말했다. "그건 아마도 오겔뭄프 비스트로찌날리스랑 상관된 것일꺼야." 

 "그럴는지도 모르지." 여조수 사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슈루쿨라 타페토찌페라일 수도 있어." 

 아인쉬타인 교수는 일어나 안경을 고쳐 쓰고 위를 향해 소리쳤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일반적인 슈트룸푸스 쿠비에치넨주스의 변종(變種)과 상관된 부분인 것 같군요. 하지만 밑에서부터 엄밀히 검토해 본 뒤에야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곧, 세계적으로 유명한 잠수(潛水) 선수권을 갖고 있는 세 여자 마도로스들이 그 새에 잠수복을 입고 물 속으로 뛰어 들어 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바다의 표면에는 물거품만이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산드라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불쑥 물 속에서 솟아 오르더니 헐떡이며 소리쳤다. "이건 어마어마하게 큰 해파리예요! 다른 두 동료가 해파리의 촉수(觸手)에 걸려 들어 꼼짝달싹 못하고 있어요. 큰 변을 보기 전에 어서 구해 줘야 해요!" 그리고 나서 소녀는 다시 사라졌다. 

 즉각 백명의 수부들이 "돌고래"라고 불리우는 노련한 대장 프랑코의 지휘 아래 물결 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물 밑에서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졌다. 물 표면은 거품으로 뒤덮였다. 그렇지만 이 수부들도 무시무시하게 휘감긴 상태의 두 소녀를 풀어 낼 수가 없었다. 이 거대한 해파리의 힘은 그토록 엄청났던 것이다. 

 "뭔가……," 교수는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자기의 조수들에게 말을 건넸다. "뭔가 이 바다 속에 일종의 거대한 생장(生長)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있는 것 같애. 그게 참 흥미거리군!" 

 그 사이에 선장 고르돈과 그의 일등 기관사 돈 메루가 상의한 결과 하나의 결정을 보았다. 

 "퇴각!" 돈 메루가 외쳤다. "모든 수부들은 갑판으로 돌아 오시오. 이 괴물을 두 조각으로 자르기로 합시다. 그러지 않고는 두 소녀를 구해낼 수가 없을 것 같소." 

'돌고래'와 그의 수부들은 갑판으로 되돌아 올라왔다. '아르고' 호는 일단 약간 퇴각을 했다가는 전 속력으로 거대한 해파리를 향해 돌진했다. 이 철덩어리로 된 뱃머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왔다. 소리없이 거의 진동(震動)도 느낄 수 없이, 배는 거대한 해파리를 두 조각으로 내었다. 사실 그것은 촉수에 얽매인 두 소녀를 위해서도 적지 않은 위험을 안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등기관사 돈 메루는 그 상황을 한 치도 틀림없이 측정해서 두 소녀 사이로 돌진했던 것이다. 곧 반쪽 난 해파리의 촉수는 힘을 잃고 축 늘어져 버렸고, 사로잡혔던 두 소녀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두 소녀는 배 위에서 즐거운 환영을 받았다. 아인쉬타인 교수가 두 소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 잘못이었어. 너희들을 내려 보내지 않았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그런 위험 속으로 몰아넣다니!" 

 "미안해 하실 것 없어요, 교수님." 한 소녀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 하려고 우리도 한 배를 탄 걸요." 

 또 한 소녀가 덧붙였다. "위험은 우리의 직업이에요." 

 하지만 더 긴 얘기를 주고 받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구조 작업에 골몰하느라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은 바다를 관찰하는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때야 비로소 그들은 '떠도는 태풍'이 어느 새에 수평선에 나타나 맹렬한 속력으로 '아르고'호를 향해 이동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첫번째의 돌풍이 몰아쳐 와 철덩어리 뱃전을 때리자 배는 공중으로 붕 떴다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오십 미터는 실히 되는 파도 속으로 나가 떨어졌다. '아르고'호의 승무원처럼 노련하고 담대한 선원들이 아니었다면 이 첫번 충격으로 이미 절반은 갑판 위로 휩쓸려 나가떨어졌고, 절반은 기절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선장 고르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다리를 떡 버티고 사령교 위에 서 있었고, 그의 승무원들도 선장 못지 않게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 이런 거친 항해에 익숙하지 못한 모모산만이 구명 보우트 속으로 기어 들었다. 

 순식간에 하늘은 온통 먹빛으로 화했다. 태풍은 으르렁거리며 뱃전을 때려 배를 아득히 공중으로 붕 뜨게 했다가는 바다 깊숙히 쳐넣었다. 게다가 태풍은 철선 '아르고'호를 손아귀에 넣지 못하는 데 화가 치밀어 시시각각으로 더욱 격해지는 것 같았다. 

 침착한 음성으로 선장은 지령(指令)을 내렸고, 이어서 일등 기관사가 큰 음성으로 하달했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아인쉬타인 교수와 두 여조수도 그들의 학술 도구 옆에 붙어 서 있었다. 그들은 이 태풍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측정하고 있었다. 실은 이 배는 그 핵심을 파고 드는 항로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선장 고르돈은 마음 속으로 이 과학자들의 냉철함에 감탄했다. 사실 그들은 선장 자신이나 승무원들처럼 바다에 익숙한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번개가 일더니 철선에 와서 부딪쳤다. 그러자 배든 금새 온통 전기로 충전이 되어 버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이든 붙잡기만 하면 무섭게 전기 불꽃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르고'호의 모든 승무원들은 벌써 몇 달 동안의 연습을 통해 거기에 단련 되어 있었다. 이 정도는 그들 누구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배의 구조 중 비교적 가느다란 부분, 즉 철 밧줄과 철 막대가 전구(電球)의 심지처럼 달아 오르기 시작하는 것만이, 비록 모든 승무원이 석면(石綿) 장갑을 끼었다 해도, 맡은 바 일을 수행하는 데 곤란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열기는 곧 꺼져 버렸다. 이번에는 빗발이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동승한 승무원 중의 어느 누구도 ― 돈 메루를 제외하고는 ― 일찌기 겪어 본 적이 없는, 숨쉴 공기마저 순식간에 몰아내는, 엄청나게 굵은 빗발이었다. 그래서 승무원들은 잠수 마스크와 호흡 도구를 착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번개와 천둥! 으르릉거리는 폭풍! 집채 만한 파도와 허연 거품! '아르고'호는 모든 기관을 전증기압(全蒸氣壓)으로 가동시키고, 이 태풍의 어마어마한 힘에 맞서 싸우면서 한치 한치 앞으로 나아갔다. 기관실(汽罐室) 안쪽에서 일하는 기관사와 화부(火夫)들은 초인적인 역량을 과시했다. 사정없이 아래 위 옆으로 흔들리는 배의 진동으로 인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기관실 화덕으로 휩쓸려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은 두꺼운 철사슬에 묶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태풍의 핵심에 이르렀다. 거기에 보이는 엄청난 광경이란! 

 폭풍의 힘에 물결이 일단 평평하게 짓눌려져 거울처럼 매끈해진 바다의 수면 위에서 웬 엄청난 괴물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괴물은 한 쪽 다리로 선데다 위로 갈수록 점점 큰 부피를 이루고 있어, 흡사 산더미만한 팽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너무나 빠른 속력으로 돌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부분은 헤아려 볼 수가 없었다. 

 "슘―슘 굼미라스티쿰의 일종이군!" 교수는 흥분해서 외치며, 쏟아지는 빗줄기로 자꾸 코에서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썼다.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는 없으세요?" 돈 메루가 투덜거렸다. 

 "우리야 그저 단순한 뱃놈들이 돼 놔서……" 

 "지금은 교수님께서 연구에 전념하시도록 해 주세요?" 여조수 사라가 그에게 말을 던졌다. 

 "두번 다시 없는 기회예요. 이 팽이 모양의 물체는 필시 지구가 생성된 태고 적부터 있어 온 것인지 모릅니다. 억만년은 넘었음에 틀림 없어요. 오늘날에는 다만 현미경으로나 잡을 수 있는 지극히 작은 변종밖에 없어요. 간혹 도마도 소스에서,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초록색 잉크에서나 발견되지요. 이렇게 커다란 표본은 짐작컨대 이런 종류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장은 으르렁대는 폭풍 속으로 소리쳤다. "영원한 태풍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여기 온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저 물건을 잠들게 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셔야지요!" 

 "그건," 교수가 말했다. "나 역시 모릅니다. 학문 역시 그걸 연구할 기회를 지금껏 갖지 못했거든요." 

 "좋습니다." 선장은 말했다. '우선 저걸 한번 쏘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나 한번 보지요." 

 "유감천만의 일입니다!" 교수가 불평했다. "슘―슘 굼미라스티쿰의 둘도 없는 본보기를 쏘다니!" 

 하지만 어느새 상상(想像) 대포가 거대한 팽이를 향해 조준되었다. 

 "발사!" 선장은 명령했다. 일 킬로 거리에서 쌍포문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발사되었다. 물론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상상 대포는 단백질로 발사하기 때문이었다. 

 탄알은 번쩍이며 슘―슘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거대한 팽이에 사로잡혀 방향이 빗나가더니, 괴물 주변을 점점 더 빨리 몇 바퀴 돌다가 결국 공중으로 튕겨져 올라 먹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헛일이었구나!" 선장 고르돈이 외쳤다. "아무래도 저 놈 있는 데로 더 가까이 가야겠어!" 

 "더 가까이는 갈 수가 없습니다!" 돈 메루가 마주 외쳤다. "기관은 지금 벌써 전증기압으로 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폭풍에 맞서 뒤로 날려가는 것을 막는 일을 하고 있는 게 고작입니다." 

 "무슨 방법이 없으십니까, 교수님?" 선장이 물었다. 

 하지만 아인쉬타인 교수는 그저 어깨를 추켜 올릴 뿐이었고, 그의 여조수들도 묘안을 못 찾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탐험 여행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 때 누군가 교수의 소매를 끌었다.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였다. 

 "말룸바!" 소녀는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말했다. "말룸바 오이지투 소노! 엘바이니 삼바 인살투 롤로빈드라. 크라무나 호이 베니 베니 사도가우." 

 "바발루?" 교수는 놀라운 기색으로 물었다. "디디 마하 파이노시 인투 게도이넨 말룸바?"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도도움 아우푸 슐라마트 바바다." 

 "오이―오이." 교수는 대답하고 생각에 잠겨 턱을 문질렀다. 

 "뭐라고 해요?" 일등기관사가 물었다. 

 "아가씨 얘기는……," 교수가 설명했다. "아가씨가 사는 종족 간에는 태고 적부더 내려오는 노래가 있는데, 누구인가, 용기있는 사람이 있어 그것을 폭풍 앞에 대고 노래한다면, 떠도는 태풍을 잠들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웃기지 마십시오! 태풍을 잠재우는 자장가라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수님?" 조수 사라가 물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돼." 아인쉬타인 교수가 말했다. "토착민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관습 속에 진리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흔히 있어. 어쩌면 슘―슘 굼미라스티쿰한테 무슨 영향을 주는 특정한 음색(音色)의 파동이 있는지 모르지. 우린 사실상 저 태풍의 생성 조건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해 봐서 해로울거야 없겠지요." 선장은 결단을 내렸다. "한번 그렇게 해 봅시다. 노래를 해 달라고 말해 주십시오." 

 교수는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말룸바 디디 오이사팔 후나―후나, 바바두?" 

 모모산은 고개를 끄떡이고 당장 아주 독특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억양은 거의 없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래였다. 


   "에니 메니 알루베니 

   바나 타이 수수라 테니!" 


 노래에 곁들여 소녀는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어 스탭을 밟았다. 

 단순한 멜로디와 가사는 외기가 쉬웠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둘씩 어울려 노래를 했고, 얼마 안 가 배 안의 승무원들이 모두 노래를 하며 손뼉을 치고 박자를 맞추어 스탭을 밟았다. 마침내 늙은 수부 돈 메루랑 교수까지 놀이터의 어린애처럼 노래를 하며 손뼉을 치는 광경은 보기에 상당히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자 과연,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팽이는 점점 천천히 돌더니 마침내 우뚝 서서 기울기 시작했다. 천둥을 치면서 팽이 위로 엄청난 물더미가 가라앉았다. 눈 깜짝할 새에 폭풍은 가라앉고 빗줄기도 그쳤다. 하늘은 맑게 푸르러졌고, 물결은 잔잔해졌다. '아르고'호는 이제 반짝이는 수면 위에 고요히 떠 있었다. 마치 여기에는 고요와 평화 이외에 다른 어떤 일도 벌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여러분!" 고르돈 선장은 입을 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깊숙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결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번에 한마디 덧붙인 말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나는 여러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는……" 꼬마 동생을 데리고 온 소녀가 말했다. "정말 비가 내린 것 같애. 어쨌건 나는 홈빡 젖었는걸." 

 실제 그 사이에 소나기가 내렸었다. 누구보다도 꼬마 동생을 데리고 온 소녀는, 철선을 타고 있는 동안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는 걸 까맣게 잊어 버렸다고 이상스러워 했다. 

 어린이들은 그리고도 한참동안 이 모험과, 제각기 자세한 감상을 서로 주고 받았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가서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헤어졌다. 

 다만 한 소년만이 놀이의 경과에 대해 못내 아쉬워했다. 안경을 쓴 소년이었다. 헤어질 때 소년은 모모에게 말했다. "아무튼 슘―슘 굼미라스티쿰을 그냥 가라앉게 만든 건 참 유감이야. 그 종류의 마지막 표본인데! 정말 그걸 자세히 연구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한가지 점에 관해서만은 그들 모두가 여전히 동감이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모모한테서처럼 놀 수는 없으리라는 점에 관해서만은. 

 

4  말없는 노인, 말재줏군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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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많은 친구를 갖고 있다 해도, 그야말로 특별히 가깝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친구는 드물고 몇 안되는 법이다. 실상 모모의 경우에도 그랬다.

 모모와 특별히 친한 친구는 둘이었다. 그 둘은 매일처럼 모모를 찾아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모모와 나누었다. 그 중의 한 친구는 젊었고 한 친구는 할아버지였다. 그들 중의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를 말하라면 모모는 꼬집어 택할 수 없었으리라.


 할아버지 친구는 도로청소부 베포였다. 그도 물론 성(姓)을 갖고 있었지만, 직업이 도로청소부였고, 그래서 모두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도로청소부 베포라고 불렀다. 

 도로청소부 베포는, 원형극장 근처, 기와와 골진 함석, 그리고 지붕 판지(板紙)로 손수 지은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유난히 키가 작은 데다가 항상 약간 꾸부정하니 걷기 때문에, 모모의 키를 겨우 넘어설까 말까 했다. 짧은 흰 머리칼이 뻣뻣하게 난 그의 커다란 머리는 항상 약간 갸웃둥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코에는 작은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도로청소부 베포가 정신이 온전히 제대로 박혀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유인 즉, 무슨 질문을 받으면 그는 맘씨 좋게 빙긋 웃음을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깊이 생각했다. 그래서 대답이 필요 없다고 여겨지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대답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그 대답에 관해 깊이깊이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답을 하기까지 어떨 땐 두 시간이 걸렸고, 심지어는 하루 종일 걸릴 때도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상대방은 자기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 잊어 버리기 일쑤였고, 따라서 베포의 뒤늦은 대답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만 모모만은 그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고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모모는, 베포가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그토록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란 잡다한 거짓말에서, 그러니까 고의적인 거짓말이나 때로는 성급하게 굴거나 불확실한 것을 말하는, 마음에 없는 거짓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베포의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동이 트기도 훨씬 전 꼭두새벽에 베포는 삑삑거리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있는 커다란 빌딩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동료들이랑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빗자루랑 수레를 받아들고 어느 거리를 쓸라는 지시를 받았다. 

 베포는 도시가 아직도 잠들어 있는 이 동트기 전의 시간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맡은 바 일을 기꺼이 그리고 철저히 수행하였다. 그는 그 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거리를 쓸 때면, 그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쓸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심호흡을 하면서, 한번 숨을 쉴 때마다 비질을 했다. 한 걸음―한 숨―한번 비질, 한 걸음―한 숨―한번 비질. 그러는 동안 그는 이따금 잠시 일손을 멈추고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한 숨―한번 비질. 

 그렇게, 깨끗해진 거리를 뒤로 하면서 더러운 거리를 향해 움직여가는 동안, 흔히 그에게는 위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말(言語)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로지 기억 속에만 살아있는 어떤 향기처럼, 또는 꿈 속에서 본 빛깔처럼, 전달하기 어려운 생각들이었다. 일이 끝난 후 모모한테 와 앉으면, 그는 자기의 위대한 생각들을 모모에게 설명했다. 그 때 모모는 그 독특한 방식으로 귀를 기울여 주기 때문에 베포의 굳은 혀도 부드럽게 풀려, 적절한 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봐, 모모," 이를테면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이런 거야. 우리 앞에는 끝없이 아득한 거리가 뻗쳐 있을 때가 많아. 너무도 끝도 없이 아득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는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앞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둘기 시작하지. 그리고 점점 더 성급해지는거야. 눈을 들어 앞을 볼 때마다, 자기 앞의 길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거야. 그래서 점점 더 기를 쓰게 되고, 불안에 사로 잡혀 애들 쓰다가 마침내는 숨이 차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돼. 그리고 길은 여전히 우리의 앞에 버티고 있는거야. 이런 식으로 일을 해서는 안 돼." 

 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길 전체를 한꺼번에 생각하면 안 돼, 알겠니? 오로지 다음 한 걸음, 다음번 한 숨, 다음번 한번 비질만 생각해야 돼. 이렇게 끊임없이 다음번의 한번 동작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또 다시 그는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 "그러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어. 그게 중요한거야. 그렇게 하면 자기 일을 잘 해 나갈 수가 있어. 그래야만 하는 거야." 

 그리고 다시금 한참 말을 중단했다가 입을 떼었다. "문득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그 아득한 길이 닦여졌다는 것을 깨닫게 돼. 그 전엔 어떻게 길이 이루어졌는지 도저히 못 깨달았거든. 그걸 알고 나면 우리는 숨이 차지 안게 돼."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것이 중요한 거야." 

 또 한번은, 그가 와서 모모 옆에 묵묵히 앉았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모모는 뭔가 아주 중요한 얘깃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그는 모모의 눈을 들여다 보며 입을 떼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금 깨달았어."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잇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럴 때가 종종 있어. ……한 낮에……모든 것이 뜨거운 열기 속에 잠들어 있을 때……그 때가 되면 세상이 투명해져……강물처럼, 알겠니? ……밑바닥까지 투시할 수가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더욱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거기엔 다른 시간이 놓여 있어. 저 밑바닥에는…." 

 다시금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겨 적절한 말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적절한 말을 못 찾은 모양이었다. 그 대신 그는 갑자기, 아주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설명을 했다. "오늘 나는 옛 성벽 옆의 길을 쓸러 갔었어. 성벽을 이루는 돌 중에는 다른 빛깔을 한 돌이 다섯개가 끼여 있었어. 알아 듣겠니?"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먼지 위에다 대문자 T자(字)를 썼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동안 그 글자를 들여다 보더니, 불쑥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걸 다시금 알아 보았어. 그 돌들을 말야." 

 그리고 계속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그는 더듬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시대는 전혀 다른 시대였어. 그 성벽이 지어진 그 당시는… 퍽 많은 사람들이 성을 쌓는 일에 참가했지. ……그런데 그들 중에 이 다른 빛깔의 돌을 끼워 넣어 쌓은 두 사람이 있었어. ……그것은 하나의 표적이야 알겠니? 나는 그걸 다시 알아 보았어." 

 그는 손으로 눈을 부볐다. 하고자 하는 말을 표현하기가 그에게 퍽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어서 하는 그의 말은 가까스로 울려 나왔다. "그들은 다르게 보았던 거야. 그 당시의 그 두 사람은. 아주 다르게 보았어." 그리고 그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사뭇 화가 난듯이 불쑥 말을 던졌다. "하지만 나는 우리를 다시금 알아 보았어―너랑 나를. 나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 보았어!" 

 베포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웃어 넘기는 걸, 굳이 사람들의 탓이라고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베포의 등 뒤에서 딱하다는듯이 자기의 이마를 쳤다. 하지만 모모는 그를 좋아했고 그의 모든 말을 가슴 깊숙이 간직했다. 


 모모의 또 다른 절친한 친구는 젊고, 어느 모로 보나 도로 청소부 베포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꿈을 꾸는 듯한 눈을 가진 미소년으로서 기막히게 놀라운 말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무진장한 재치와 익살이 감추어져 있었고, 너무나 쉽게 웃음보를 터뜨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도 무의식중에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은 지로라모였지만 그냥 간단히 지지라고 불리었다. 

 우리가 이미 베포의 경우 직업에 따라 이름을 불렀으니 사실 지지의 경우엔 애당초 정식 직업이 없긴 하지만, 역시 그런 식으로 불러 볼까 한다. 그러니까 그를 여행안내원 지지라고 불러 보자.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여행안내원이란 그가 기회에 따라 하는 여러가지 직업 중 하나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것도 직책상 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이 직업을 위해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준비물은 챙모자 하나였다. 사실 언제이고 두 세 여행자가 이 근처에 나타나 헤매기만 하면, 그는 즉각 챙모자를 썼다. 그리고는 정색을 하고 그들에게 다가 가, 안내와 해설을 해 주겠다고 자청했다. 낯선 관광객들이 그 제의에 관심을 보이는 시늉만 하면, 그는 말문을 열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어낸 사건들, 이름들, 연도(年度)를 정신없이 늘어 놓아서 가엾은 청중들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진상을 눈치 채고 화가 나서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모든 이야기를 진짜로 곧이 들었다. 그래서 지지가 끝으로 챙모자를 내밀면, 진짜 동전을 내놓는 것이었다. 

 이웃마을 사람들은 지지의 착상(着想)에 대해 웃음보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 역시 때로는 정색을 하고, 어쨌든 순전히 꾸며낸 얘기를 해 주고 나서 진짜 돈을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모든 시인(詩人)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 때 지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저 아무 소득 없이 헛돈을 쓴 걸까요? 그들은 원하는 것만큼 받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교과서에 쓰여 있다는 것과 쓰여 있지 않다는 것의 차이가 뭔가요? 교과서에 쓰여진 이야기들은 완전히 꾸며진 것이 아니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아마 아무도 그것은 모르시겠지요?" 

 또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도대체 참된 것과 참된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을 뜻하나요? 천년 전, 이천년 전에 여기서 벌어진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누가 아시나요?"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를 했다. 

 "자, 그러니!" 여행안내원 지지는 외쳤다. "어떻게 여러분께서 내 이야기가 참되지 않다고 간단히 주장하실 수 있습니까? 아무튼 우연히 똑 같은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진실만을 말한 셈이지요!" 

 이 얘기에 대해서는 쉽사리 이의(異議)를 말할 수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말재주에 있어서만은 누구도 지지를 쉽게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물론 유감스럽게도, 이 원형극장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지지는 자주 다른 직업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가 닿는 대로 그는 공원지기, 결혼 입회인, 개 산책 담당, 사랑의 편지 배달부, 장례 입회인, 기념품 행상, 고양이 먹이 팔이 등등 잡다한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지지는 언젠가는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정원에 둘러 싸인, 동화처럼 예쁜 집에서 살고 싶어 했다. 금박이 입혀진 접시에 음식을 먹고 비단 금침에서 자고 싶어했다. 그는 명성의 광채 속에 태양처럼 자리하고 있는 미래의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 태양의 광선은 지금의 가난 속에서도 이미, 말하자면 아득히 먼 거리에서, 그 자신을 따스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꿈에 대해 웃으면 그는 외쳤다. "여러분들 모두가 언젠가는 저의 말을 돌이켜 생각하게 될 겁니다!" 

 어떻게 그가 그 모든 꿈을 이루려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그는 근면한 노력과 힘든 일에다 별로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예술 작품이 아니야." 그는 모모에게 말했다. "예술 작품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는 거야. 그런 사람들을 좀 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약간의 편안함 때문에 삶과 영혼을 팔아 버린 사람들 말야! 아니, 나는 거기에 끼진 않겠어, 않구 말구. 아무리 지금의 내가 커피 한잔 값을 지불할 돈이 없더라도……. 지지는 어디까지나 지지야!" 

 이렇게 서로 전혀 딴판의 두 사람, 세상과 인생에 대해 전혀 상반된 생각을 가진 여행안내원 지지와 도로청소부 베포같은 사람들이 애당초부터 서로 친밀해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사실이 그랬다. 야릇하게도 지지를 보고 무분별하다고 한번도 탓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다름 아닌 베포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그와 꼭 마찬가지로 야릇하게도 괴상스런 할아버지 베포를 한번도 비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바로 말재줏군 지지였다. 

 어쩌면 그것 역시, 꼬마 모모가 그들 두 사람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는 방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들 셋 중의 아무도, 얼마 안 가 어느 새 그들의 우정 위에 한 조각 그늘이 드리워지리라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들의 우정 위로만이 아니라 이 마을 전체에. 그리고 끊임없이 자라나서 어느새 어둡고 차갑게 전 도시 위로 번져 버린 그늘이. 

 그것은 눈에 띄지 않는 소리 없는 침략같았다. 매일처럼 앞으로 진격해 오지만, 어느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침략. 실은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침략자는 누구란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많은 것을 보는 베포 할아버지까지도, 점점 불어나면서 큰 도시를 서성대며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듯한 이 회색 일당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더우기 그들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상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눈에 띄지 않게할 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순히 그들을 스쳐 지나치거나 그들을 보고도 당장 잊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굳이 숨지 않고서도 비밀리에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니까, 그들이 어디에서 왔느냐에 대해, 또 날마다 숫자가 불어나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계속 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멋진 회색 승용차를 타고 거리를 달렸고 모든 빌딩을 드나들고 도처의 레스또랑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작은 수첩에 자주 적어 넣었다. 그들은 온통 거미줄같은 회색 옷을 입은 일당이었다. 심지어 얼굴까지도 잿빛으로 보였다. 그들은 둥근 중산모자를 쓰고, 잿빛의 조그만 시가를 피웠다. 그리고 하나같이 납회색의 서류 가방을 항상 휴대하고 있었다. 

 여행안내원 지지 역시, 이미 몇 번인가 이 회색 일당의 한 떼거리가 원형극장 주변을 정찰하고 수첩에다 온갖 것을 적어 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오로지 모모만이, 어느 날 저녁 폐허의 윗 꼭대기 부분에 떠오른 어두운 실루엣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 받더니 나중에는 무슨 의논을 하는듯 서로 머리를 숙여 맞대었다. 전혀 들을 수는 없었지만 모모는 불현듯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일종의 얼어붙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모모는 그의 커다란 웃도리를 아무리 꼭꼭 둘러 여며도 소용 없었다. 그건 그냥 보통의 추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회색 일당은 사라졌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밤엔 모모도 다른 때처럼 나직하면서도 힘찬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엔, 전과 다름없이 삶이 이어졌고 모모도 이 야릇한 방문객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모모 역시 그들을 잊어 버렸다. 

 

5  많은 사람을 위한 이야기와 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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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갈수록 여행안내원 지지에겐 모모가 없어서는 도저히 안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들뜨고 경박한 젊은 친구들한테나 대고 할 수 있는 얘기지만, 그는 이 더벅머리 꼬마 소녀한테 깊은 사랑에 빠져 버렸고, 어딜 가든지간에 이 꼬마를 끌고 다니고 싶어 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의 광적인 성벽(性癖)이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도 그 자신 분명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변화가 생겼다. 전에는 그가 이야기를 하면서 곤란한 경지에 곧잘 빠졌다. 적절한 표현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고 곧잘 한 말을 또 하거나, 언젠가 본 영화, 또는 언젠가 읽은 신문의 얘깃거리를 되씹을 때가 많았다. 말하자면 그의 이야기는 발로 걸었었다. 하지만 모모를 알고 난 후부터 그의 이야기는 불현듯 날개를 달게 된 것이었다. 

 특히 모모가 곁에 있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때면, 그의 환상은 봄의 초원처럼 꽃을 피웠다.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그의 주변에 모여 들었다. 그는 이제 며칠씩 몇 주일씩 속편(續篇)을 끌고 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착상(着想)의 샘이 마를 줄을 몰랐다. 요컨대 자기 스스로의 이야기에 신경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의 환상이 어디를 향해 달릴지 그 자신도 전혀 예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이 원형극장을 관광하러 여행자들이 왔을 때 (모모는 약간 떨어진 돌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아실는지 모르지만, 슈트라파찌아 아우구스티나 여왕께서는, 비겁(卑怯) 족속의 공격에 대비하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족속을 다시금 정복했을 때, 여왕께서는 끊임없이 성가시게 구는 이들에 대해 크게 노하시어 그들의 왕 삭소트락솔루스에게 응징의 조공(朝貢)으로 그의 금붕어를 바치지 않으면 모조리 멸족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시대만 해도,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나라에서는 금붕어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왕 슈트라파찌아께서는 어느 여행자를 통해, 그 족속의 왕 삭소트락솔루스가 작은 금붕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자라기만 하면 순금(純金)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왕께서는 이 진품(珍品)을 무슨 일이 있어도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삭소트락솔루스 왕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금붕어를 침대 밑에다 감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여왕한테는 그것 대신에 어린 고래를 보석으로 장식된 수우프 그릇에 담아 전달했습니다. 

 여왕께서는 금붕어가 보다 작으리라고 상상했기 때문에, 그 크기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더 큰 황금을 가져다 줄 테니까 말이지요. 물론 이 금붕어는 전혀 황금빛의 흔적이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왕께서는 못 미더워했습니다. 하지만 삭소트락솔루스 왕의 사절(使節)은 물고기가 완전히 자란 뒤에야 황금으로 화하게 될 것이며 그 전에는 황금빛을 내지 않는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돌보아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 말에 여왕 슈트라파찌아께서는 만족하셨습니다. 

 어린 물고기는 하루하루 부쩍부쩍 자라며 엄청난 먹이를 먹어 치웠습니다. 하지만 여왕 슈트라파찌아께서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고기는 먹을수 있는 한 실컷 먹고는 뚱뚱보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수우프 그릇은 물고기가 있기엔 너무 비좁아졌습니다. 

 '크면 클수록, 더욱 좋은거야.' 여왕 슈트라파찌아께서는 그렇게 말하며 물고기의 숙소를 자신의 목욕통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물고기는 목욕통 안에도 잠기지를 않았습니다. 물고기는 부쩍부쩍 자랐습니다. 이번엔 왕의 수영 푸울로 옮겨졌습니다. 벌써 그것을 옮기는 일만 해도 엄청나게 번거로운 일이었습니다. 물고기는 어느새 황소 무게만큼 무거워졌으니까요. 물고기를 끌어 나르던 노예 중의 한 사람이 미끌어졌습니다. 여왕은 이 불행한 노예를 당장 사자밥으로 던져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물고기야말로 여왕에겐 유일한 모든 것이었으니까요. 

 매일처럼 여왕께서는 몇 시간씩 수영 푸울 가장자리에 앉아서 물고기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여왕께서는 엄청난 금덩어리만 생각했습니다.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여왕께서는 그야말로 호사스런 생활을 하느라 낭비해왔기 때문에 금덩어리를 마음껏 가질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크면 클수록, 더욱 좋은거야.' 여왕께서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되뇌었습니다. 이 귀절은 일반적인 규범으로 공식적으로 천명되고, 청동(靑銅) 글자로 새겨져 모든 관공서에 내걸리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왕의 수영 푸울 역시 이 물고기한테는 너무 비좁은 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슈트라파찌아 여왕께서는 여러분들이 지금 그 잔해를 보시는 바와 같은, 이 건물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곳은 꼭대기까지 물이 꽉 차 있던 엄청나게 큰 둥근 수족관(水族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고기는 결국 자랄 수 있는 한 한껏 뻗쳐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왕께서는 몸소 나와서 밤낮으로, 저기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이 거대한 물고기가 어느새 황금으로 변하지 않을까 지켜 보았습니다. 여왕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예도, 왕족도. 그리고 물고기가 도둑 맞을까봐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기에 앉아 불안과 걱정 때문에 점점 말라 들어가며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황금으로 화할 것은 꿈도 꾸지 않고 신이 나서 첨벙거리기만 하는 물고기를 지켰습니다. 이렇게 점점 슈트라파찌아 여왕께서는 정사(政事)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비겁(卑怯) 족속은 바로 이렇게 될 것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삭소트락솔루스 왕의 지휘 하에 그들은 최후의 원정을 감행하여 쉽사리 이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아예 그들과 마주하여 싸우는 병정도 없었습니다. 대중들이야 그 누구가 통치하든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내 슈트라파찌아 여왕께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런 유명한 말을 외쳤습니다. '슬프도다! 오, 내 어쨌든……' 나머지 귀절은 유감스럽게도 전해져 오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왕께서 이 수족관에 뛰어 들어, 여왕의 모든 희망의 무덤인 그 물고기 옆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삭소트락솔루스 왕은 개선의 축제로 그 고래를 도살하라고 명하였고, 일주일 동안 온 국민은 구운 고래 고기를 하사받았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가볍게 믿는 사람들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여러분들은 아셨을 겁니다!" 


 이 말로 지지는 안내원으로서의 얘기를 끝냈고 청중들은 과연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폐허의 잔해를 경외(敬畏)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중의 다만 한 사람만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그럼, 그 모든 일은 언제 일어났나요?" 

 하지만 지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여왕 슈트라파찌아는 주지하다시피, 저명한 옛 철학자 노이오시우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 의심 많은 청중은 물론, 자기가 저명한 옛 철학자 노이오시우스가 언제 살았던가에 대해 전혀 무식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대단히 만족해서 이 관광이야말로 정말 의의가 있었으며, 이토록 옛 시절에 대해 일목요연하고도 재미있는 설명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면 지지는 그의 챙모자를 겸손하게 내밀었고 관광객들은 그들의 감동에 상당하게, 아끼지 않고 돈을 내놓았다. 심지어는 그 의심 많은 사람까지도 동전 몇 개를 던졌다. 

 요컨대 모모와 함께 있은 이래로 지지는 같은 얘기를 두번 한 적이 없었다. 반복하는 일이야말로 그에겐 너무 권태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모모는 청중들 틈에 끼어 앉아 있으면 마치 그에게 마음 속의 댐의 문(水門)이 열려 도대체 깊은 생각같은 것을 할 필요도 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터져 나와 솟구치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그는, 언젠가 두 미국 귀부인을 안내했을 때처럼, 정도를 넘어서는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심지어는 스스로 수시로 브레이크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인 즉 그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 미국 부인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했던 것이다. 

 "마님들의 나라, 넓고 아름다운 아메리카 대륙에야 너무나 당연히 알려진 사실이겠지만, 마님들, 아메리카 인디안이라고 불리우는 잔인무도한 폭군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는 그 당시의 세계를 온통 자기의 생각대로 바꾸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행적은, 결국 인간은 어떤 수를 써도 별 수 없이 원래의 모양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 도저히 변혁시킬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는 노후에 정신착란증에 걸리고 말았지요. 마님들께서야 응당 아시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사실 그런 병을 고칠 수 있는 정신과 의사가 없었지요. 그래서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가 광기(狂氣)를 부려도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광기 상태의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한테 이번엔, 현존하는 세상은 그냥 그대로 둔 채로 차라리 전혀 새로운 세상을 두들겨 맞추어야겠다는 착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물과 바다, 산과 나무, 모든 집들이 완벽하게 자연 그대로인 모습인 지금의 땅 덩어리와 똑 같은 크기의 또 다른 지구를 만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의 전 인류는 사형 선고의 위협에 못 이겨 이 엄청난 작업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맨 먼저 사람들은 이 거대한 지구를 받쳐 줄 받침대를 지었습니다. 

 바로 이 받침대의 폐허를 여기서 보고 계시는 겁니다, 마님들. 

 그 이후 사람들은 지구와 똑 같은 크기의 엄청난 지구본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둥근 모형이 완성되자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면밀하게 그대로 본떠 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 지구본을 만드는 데는 무지무지하게 많은 재료를 필요로 했고, 이 재료들은 실상 지구 자체 말고는 다른 어디에서도 구할 데가 없었지요. 그래서 지구본이 점점 커다랗게 불어나는 한편에서 지구 자체는 서서히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새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헌 지구에 남아 있던 마지막 돌 덩어리 하나까지 똑 떨어지게 옮겨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사람들도 새 지구본으로 옮아 가지 않을 수 없었지요. 헌 지구는 다 써 버렸으니까요.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는 이번에 역시, 제 아무리 수를 써도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길다란 웃도리에 자기 머리통을 싸감고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지요. 

 자, 마님들, 오늘날 이렇게 폐허로 남아 있는 깔대기 모양의 커다란 공동(空洞)은 그 옛날 헌 지구의 표면에 얹혔던 토대(土臺)인 겁니다. 그러니까 마님들께서는 전체를 거꾸로 상상하셔야 합니다." 


 아메리카에서 온 두 귀부인은 얼굴이 핼쑥해졌고 그 중 한 부인이 물었다. "그럼 지구본은 어디로 갔나요?" 

 "마님께서는 바로 그 위에 서 계시잖습니까!" 지지는 대답했다. "오늘날의 세계는, 마님, 바로 새 지구본인 겁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노 귀부인께서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지지는 속절없이 챙모자를 내밀고 서 있었고. 

 하지만 지지는 다른 청중이 아무도 없을 때, 꼬마 모모만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대체로 그것은 동화(童話)였다. 동화는 모모가 제일 즐겨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늘 거의가 지지와 모모 자신이 관련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동화들은 역시 두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서, 다른 때 지지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들리었다. 

 어느 따스한 아름다운 저녁, 두 사람은 돌계단의 꼭대기에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늘에는 어느새 첫 별이 빛나고 있었고 소나무 숲의 검은 실루엣 위로는 커다란 은빛 달이 솟아 있었다. 

 "동화 하나 이야기 해 주지 않을래?" 모모가 나직하게 졸랐다. 

 "좋아." 지지가 말했다. "누구의 이야기를 할까?" 

 "모모와 지로라모의 이야기가 제일 좋아." 모모가 대답했다. 

 지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무슨 제목의 이야기를 할까?" 

 "어떨까, 요술거울의 동화라면?" 

 지지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얘기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자." 

 그는 모모의 어깨에 팔을 얹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모모라는 이름의 예쁜 공주가 살고 있었어. 공주는 빌로드와 비단 옷을 입고, 세상의 저 위쪽 눈 덮힌 산 꼭대기 알록달록한 유리성(琉璃城)에 살고 있었어. 

 공주는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갖고 있었어. 고급 요리만을 먹었고 달콤한 포도주만을 마셨어. 비단 요에서 잠을 잤고 상아(象牙) 의자에 앉아 있었어. 공주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지만, 완전히 혼자였어. 

 공주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 하인들, 시녀들, 개와 고양이와 새와 심지어 꽃들까지도, 모두가 거울 속에 비치는 상(像)이었거든. 

 사실 모모 공주는 요술 거울을 갖고 있었지. 크고 둥근, 고급 은(銀) 거울이었어. 매일 밤낮 공주는 이 거울을 세상에다 비추었어. 이 큰 거울은 육지와 바다, 거리와 논밭 위에 둥실 떠서 말이야. 그것을 본 사람들은 조금도 신기해 하지 않고 그냥 '저건 달이야'라고 말했지. 

 요술거울은 공주에게 되돌아 와서는, 그 때마다 여행길에서 수집한 온갖 거울의 상(像)을 공주 앞에 쏟아 놓았어. 그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흉칙한, 혹은 재미있고 지루한 영상들이었어. 공주는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잡고 나머지는 그냥 어느 시냇물에다 던졌지. 그러면 놓여 난 영상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지상의 물을 타고 원래 주인에게로 순식간에 되돌아갔어. 우리가 샘물 위로든지 웅덩이 위로 몸을 굽히면 자기의 영상(映像)이 비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야. 

 모모 공주는 죽지 않는 존재라는 걸 얘기해 주는 것을 지금껏 잊어버렸군. 아닌 게 아니라 공주는 지금까지 이 요술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본 적이 없었어. 이 거울에 비친 자기의 영상을 본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거든. 그 사실을 공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거울을 쳐다보지 않았지. 그래서 공주는 그녀의 온갖 영상들과 같이 살면서 같이 놀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날, 요술 거울이 지금까지의 영상들보다 훨씬 소중한 영상을 하나 가져왔어. 그것은 어느 젊은 왕자의 영상이었어. 그 상을 보는 순간, 공주는 너무나 왕자가 애타게 그리워져서 어떻게 해서든지 왕자에게 가고 싶어졌어.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공주는 왕자가 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모를 뿐더러 이름도 몰랐거던. 

 달리 뾰족한 생각이 나지 떠오르지 않자 공주는 어쨌든 요술 거울을 들여다 보기로 결심했지. 왜냐하면 공주는―어쩌면 이 거울이 내 얼굴의 상을 왕자한테 비쳐 줄지 몰라, 어쩌면 거울이 하늘에 떠 있는 순간 우연히 왕자님께서 하늘을 쳐다 볼지도 모르지, 그러면 내 얼굴을 보게 될 테지, 어쩌면 왕자님께서는 거울을 쫓아 와서 여기 있는 나를 발견할는지도 몰라―라고 생각했거던. 

 이렇게 해서 공주는 요술거울을 한참 들여다 보고는, 자기의 상이 비친 거울을 세상 위로 보냈어. 물론 이렇게 해서 공주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지. 

 공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조금 뒤에 얘기 해 줄께. 우선은 왕자 이야기를 해야겠군. 

 이 왕자는 지로라모라는 이름이었는데,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큰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어. 그럼 이 왕국은 어디 있었을까? 그 왕국은 어제 안에 있지도 않고 오늘 안에 있지도 않고, 항상 내일 안에 하룻동안 자리잡고 있었어. 그래서 이 왕국은 내일의 나라라고 불리었지. 이 왕국에 사는 모든 백성들은 왕자를 사랑하고 칭송했어. 어느 날 재상(宰相)들이 내일의 나라의 왕자에게 와서 말했어. '폐하, 왕비를 맞아들이셔야 합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할 줄 압니다.' 

 왕자 지로라모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 그래서 신부감을 고르려고 미래의 나라의 미녀들을 궁중에 불러 들였어. 미녀들은 재주껏 치장을 했어. 하기야 누구나 왕자의 신부가 되고 싶어했으니깐. 

 그런데 이 미녀들 틈에 섞여 나쁜 마녀가 하나 궁중에 살짝 들어 왔어. 붉고 따스한 피가 혈관에 흐르지 않고, 초록빛 차가운 피가 흐르는 마녀였어. 물론 이 마녀가 사람들의 눈에 뜨일 리가 없었지. 마녀는 기막힌 재주를 피워 화장을 했거던. 

 이제 왕자는 신부감을 고르려고 황금으로 된 큰 방으로 들어섰을 때 마녀는 재빨리 주문을 외었어. 그러자 가여운 지로라모의 눈에는 마녀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어. 마녀가 어찌나 아름답게 보이던지 왕자는 당장에 마녀더러 왕비가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물었어. 

 '영광이옵니다.'하고 마녀는 속삭였어.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사옵니다.' 

 '들어 주마'하고 지로라모 왕자는 선뜻 대답했지. 

 '황공하옵니다.' 마녀는 대답하면서 이 가련한 왕자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달콤하게 미소를 지었어. '왕자님께서는 일년 동안, 하늘에 떠 있는 은빛 거울을 올려다 보아서는 안되옵니다. 만일 그렇게 하시면, 당장에 왕자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 버리실 것이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잊어 버리고 아무도 왕자님을 알아 주지 않는 오늘의 나라로 가셔야 하옵니다. 그곳에서 왕자님께서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가련한 떠돌이로 사셔야 하옵니다. 제 말에 동의하시옵니까?' 

 '그것뿐이라면!' 왕자는 소리쳤어. '조건은 간단하구나!' 

 그럼, 그 사이에 모모 공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공주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그래도 왕자는 나타나지 않았어. 그래서 공주는 몸소 세상에 내려가서 왕자를 찾기로 결심했어. 

 공주는 자기의 주변에 있는 모든 영상들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어. 그리고는 단 혼자서 포근한 조그만 슬리퍼를 신고, 알록달록한 유리성을 빠져 나와 눈 덮인 산을 지나 세상으로 내려왔어. 공주는 모든 왕자들의 나라를 두루 헤메어 오늘의 나라에까지 오게 되었어. 어느새 공주의 신은 헤져 맨발로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지. 하지만 공주의 영상이 있는 요술거울은 여전히 세상을 굽어보며 떠 있었어. 

 어느날 저녁 지로라모 왕자는 그의 황금성 옥상에 앉아서 초록빛 차가운 피를 가진 마녀와 장기를 두고 있었어. 

 그 때 문득 왕자의 손등에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어. 

 '비가 오려나 봅니다.' 초록색 피를 가진 마녀가 말했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하늘엔 구름이 한점도 없는 걸.' 

 왕자는 위를 바라보았고 하늘에 떠 있는 은빛 커다란 요술거울 한가운데를 보았어. 그 때 왕자는 모모 공주의 영상을 보게 되었고 모모가 울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눈물이 자기 손등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 그 순간 마녀가 자기를 속였다는 것, 마녀는 실제로 아름답지도 않고 핏줄 속에 초록빛 찬 피가 흐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었지. 왕자가 실제로 사랑한 대상은 모모 공주였어. 

 '이제 당신께서는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초록빛 마녀는 이렇게 말하고, 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어. '그러니까 벌을 받으셔야지요!' 

 마녀는 초록빛 길다란 손가락으로, 온 몸이 마비된듯 그냥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왕자의 가슴을 움켜 쥐고는 심장에다 매듭을 묶었어. 순간, 왕자는 자기가 내일의 나라의 왕자라는 걸 잊어 버렸지. 왕자는 도둑처럼 한 밤중에 자기의 왕국을 빠져 나왔어. 그리고는 멀리멀리 세상을 두루 헤매다가 마침내 오늘의 나라에 이르렀지. 거기서 그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가난한 방랑자로 살아가면서 자기를 그냥 지지라고 불렀지. 왕자가 몸에 지니고 온 단 하나의 것은 요술 거울 속에서 꺼낸 영상이었어. 그 때부터 요술 거울은 비어 있게 되었지. 

 그 동안 모모 공주의 빌로드와 비단으로 된 옷도 완전히 찢어져 버렸어. 이제 공주는 낡고 너무나 큰 남자 웃도리에 알록달록 기운 치마를 걸치고 있었어. 그리고 폐허의 옛터에 살고 있었지. 

 어느 화창한 날 두 남녀는 이 폐허에서 만났어. 하지만 모모 공주는 내일의 나라의 왕자를 알아 보지 못했어. 사실 이제 왕자는 가련한 떠돌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지지도 마찬가지로 왕녀를 못 알아 봤어. 공주는 이제 조금도 공주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야. 하지만 같이 불행한 처지에서 그 둘은 서로 친해졌고 서로 위안이 되었어. 

 어느 날 저녁, 이젠 비어 버린 은빛 요술 거울이 다시 하늘에 둥실 떴을 때, 지지는 거울의 영상을 끄집어 내어서 모모한테 보여 주었어. 그 영상은 벌써 사뭇 구겨지고 바래 버렸지만 공주는 그것이 그 옛날 자기가 보낸 자기 자신의 상이라는 것을 당장에 알아 봤어. 그리고 이제사, 가련한 떠돌이 지지의 얼굴에 가려진 왕자의 정체를 알아 보았어. 자기가 늘 그토록 찾아 헤맸고, 그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존재가 되어 버린 왕자 지로라모라는 것을. 이제 공주는 모든 것을 왕자한테 이야기했어. 

 하지만 지지는 슬프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어. '그렇지만 나는 네가 말하는 걸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 내 심장에는 매듭이 묶여져 있어서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거던.' 

 그 때 모모 공주는 왕자의 가슴을 파고 들어 간단하게 심장의 매듭을 풀어 주었어. 이렇게 해서 지로라모 왕자는 갑자기 자기가 누구이며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가를 알게 되었지. 왕자는 공주의 손을 잡고 공주와 함께 떠났어. 아득한 곳으로, 내일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지지가 이야기를 끝내고 나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후 모모가 물었다. "그럼 그들은 나중에 남편과 아내가 되었을까?" 

 "그랬을꺼야." 지지가 말했다. "……먼 훗날에." 

 "그리고 그 사이에 죽었을까?" 

 "아니," 지지는 단호히 말했다. "우연히도 그 점만은 내가 확실히 알아. 이 요술 거울은 혼자서 들여다 볼 때만, 들여다 본 사람을 죽음의 존재로 만들어. 그렇지만 둘이 같이 들여다 보면 다시 죽음을 면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 거야.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그렇게 했거던." 

 달이 은빛으로 크고 둥글게 검은 소나무 위에 떠서 폐허의 옛 돌들을 신비스럽게 비추고 있었다. 모모와 지지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서 오랫동안 달을 쳐다보았다. 이 순간이 지속하는 한 두 사람은 자기네들은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6  똑 맞아 떨어진 엉터리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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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엄청나게 크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관여하고 있고, 누구나가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 들이고 눈꼽만치도 그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 비밀은 시간(時間)이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이 있고 시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우리에겐 단 한 시간이 영원처럼 여겨질 때가 있는 반면, 찰나처럼 무상하게 흘러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에 겪는 우리의 체험에 따라서 말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삶(生)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삶은 마음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회색 도당(灰色徒黨)들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시간, 일분, 심지어 일초의 삶의 가치를 그들만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마치 흡혈귀가 피를 대하듯이, 시간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추구했다. 

 그들은 인간의 시간을 대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몰래 면밀하게 세워진 계획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네들의 활동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전혀 눈에 띄지 않게, 그들은 대도시와 그 안의 주민들의 삶 속에 파고 들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인간들이 모르는 새에 그들은 날마다 앞으로 쳐들어와 인간들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상대방은 전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은 자기네들의 목적을 달성시킬 하나 하나의 인간을 파악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들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당한 때가 오면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이발사 푸시씨(氏)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유명한 이발사는 아니었지만, 그가 사는 거리에서는 인망이 높았다. 그는 가난뱅이도 부자도 아니었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조그마한 그의 이발소에서 그는 조수를 한 사람 쓰고 있었다. 

 어느 날 푸시씨는 이발소 문 앞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수는 휴가를 가고 없고 푸시씨 혼자였다. 그는 빗줄기가 억수같이 퍼붓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잿빛의 날씨였고, 푸시씨의 마음에도 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내 한 평생도 이렇게 가위의 철꺽거리는 소리와 쓸데없는 잡담과 비누 거품으로 흘러가는구나"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애당초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죽어 버리고 나면, 나란 존재는 아예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지." 

 그렇다고 푸시씨가 잡담을 싫어하며 살아 왔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손님들에게 장황하게 자기의 의견을 늘어 놓고, 그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듣기를 사뭇 좋아했다. 또한 가위의 철꺽거리는 소리와 비누 거품을 싫어해 온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일은 분명히 그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고, 스스로 능숙한 기술자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특히 턱 밑 면도를 할 때의 솜씨는 그를 쉽게 따를 이발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전혀 무의미(無意味)한 순간들이 종종 있는 법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리라. 

 "내 한 평생은 어긋나게 살아 왔어." 푸시씨는 생각했다. "나란 존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기껏 좀스러운 이발사로 주저앉고 말았으니. 제대로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나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될 텐데!" 

 이 제대로의 생이 어떻게 살아져야 하는가는, 푸시씨도 물론 잘 몰랐다. 그는 다만 어떤 중요한 것, 어떤 호사스러운 것, 그림 잡지에 항상 실리는 것같은, 그런 것을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우울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런 걸 누리기에는 나의 일은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제대로의 생을 누리려면 시간을 가져야 하는 건데. 자유로와야 해. 그런데 나는 한 평생 가위 소리, 잡담과 비누 거품의 노예로 주저앉아 있단 말야." 

 이 순간, 잿빛 고급 승용차가 미끄러져 와 바로 푸시씨의 이발소 앞에 멈추었다. 회색의 사나이 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니 이발소로 들어 섰다. 그는 납회색의 서류 가방을 거울 앞의 탁자 위에 놓고는 둥근 중산모자를 옷걸이 못에 걸고 이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고 작은 회색 시가를 뿜어대면서 수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푸시씨는 이발소 문을 닫았다. 갑자기 이 작은 가게 안이 이상스럽게 춥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는 당황해서 물었다. "면도를 하시겠습니까" 이발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는 눈치없는 질문을 던지 스스로를 속으로 저주했다. 이 사나이는 번쩍거리는 대머리였던 것이다. 

 "어느 것도 안합니다." 회색 사나이는 웃음기도 없이, 기이하게도 억양 없는, 말하자면 잿빛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시간 저축은행에서 왔습니다. 은행 외무사원 XYQ/384/b호라고 합니다. 당신이 우리 은행에 일반예치(一般預置)를 하기 원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푸시씨는 점점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도대체 그런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금시 초문입니다." 

 "자, 이제 아시게 될 겁니다." 외무사원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수첩을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이발사, 푸시씨임에 틀림없지요?" 

 "맞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푸시씨는 대답했다. 

 "그럼 제대로 찾아 온 셈이군요." 회색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수첩을 닫았다. "당신은 우리의 다음 번 고객입니다." 

 "뭐라구요?" 푸시씨는 점점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한 평생을 가위의 철꺽대는 소리와 쓸데없는 잡담과 비누 거품으로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 버리고 나면 당신의 존재는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제대로 살아갈 시간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전혀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시간입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지금 막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푸시씨는 중얼거리며 후들후들 떨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추워졌기 때문이었다. 

 "자 보십시오!" 회색 사나이는 대꾸하며 흡족한 표정으로 작은 시가를 빨아들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을 갖지요"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푸시씨, 당신은 아주 무책임하게 당신의 시간을 허송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계산으로 그걸 증명해 보여 드리지요. 1분은 6십초입니다. 그리고 한시간은 6십분이지요, 아시겠습니까?" 

 "알구 말구요." 푸시씨는 말했다. 

 외무사원 XYQ/384/b호는 회색 연필로 거울 위에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6십 곱하기 6십은 3천 6백이지요. 그러니까 1시간은 3천 6백초입니다. 하루는 스물 네시간이지요. 그러니까 3천 6백을 스물 넷으로 곱하면, 하루는 8만 6천 4백초입니다. 아시다시피 1년은 3백 6십 5일이지요. 따라서 1년은 3천 1백 5십 3만 6천초입니다. 또는 십년이 지나면 3억 1천 5백 3십 6만초가 되지요. 푸시씨, 당신의 한 평생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저…," 푸시씨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하느님의 뜻대로지만, 일흔살, 여든살을 살게 될까요." 

 "좋습니다."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신중을 기하는 의미에서 일단 일흔살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니까 그건 3억 1천 5백 3십 6만의 일곱배가 되겠지요. 그건 22억 7백 5십 2만초가 되는군요." 

 그리고 그는 그 숫자를 큼지막하게 거울에 썼다. 


    2,207,520,000초 


 그리고 그 밑에다 몇 겹으로 줄을 긋고는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푸시씨. 이것은 당신이 재량껏 쓸 수 있는 재산인 것입니다." 

 푸시씨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이 숫자는 그에게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는 자기가 그토록 부자라는 것을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자," 외무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의 조그만 시가를 다시금 빨아 들였다. "굉장한 숫자이지요" 하지만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지요, 푸시씨?" 

 "마흔 두살입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갑자기 자신이 무슨 횡령이라도 한 것같은 죄의식을 느꼈다. 

 "당신은 평균 하루에 몇 시간이나 주무시지요?" 회색 사나이는 계속 따지고 들었다. 

 "아마 여덟시간쯤……" 푸시씨는 고백했다. 

 외무사원은 번개처럼 빨리 계산을 했다. 연필이 거울 위로 빙글 빙글 스쳤다. 푸시씨는 소름이 끼쳤다. 

 "4십 2년…… 매일 여덟시간…… 그러니까 그것이 벌써 4억 4천 1백 5십만 4천이 되는군요. 이 숫자는 당연히 잃어 버린 것으로 간주해야겠지요. 매일처럼 몇 시간이나 일에 바쳐야 합니까, 푸시씨?" 

 "역시 여덟시간, 대충입니다만," 푸시씨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고백했다. 

 "그럼 다시금 똑같은 숫자를 결손(缺損) 장부에 기록해야겠군요."외무사원은 사정없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엔 영양을 충당하는 일로 일정한 시간이 없어지겠군요. 식사 시간으로 통털어 하루에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잘 모르겠군요." 푸시씨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마 두시간?" 

 "너무 적은 것 같군요." 외무사원은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4십 2년 동안 1억 1천 3십 7만 6천이라는 액수가 나옵니다. 더 계산을 해 봅시다! 당신은 노모(老母)랑 혼자서 사십니다. ……우리가 아는 한은. 매일처럼 당신은 이 늙은 노파한테 완전히 한 시간을 바치고 있지요. 이를테면, 이 노파는 귀가 먹어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그 옆에 앉아 얘기를 하지요. 그러니까 그건 버려진 시간입니다. 5천 5백 1십 8만 8천이군요. 게다가 당신은 쓸데없이 앵무새를 한 마리 갖고 있지요. 그걸 보살피는 데 매일 15분은 쓰고 있습니다. 그걸 계산하면 1천 3백 7십 9만 7천이 되는군요." 

 "그렇지만……." 푸시씨는 애원하듯이 항의했다. 

 "제 말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외무사원은 뻣뻣하게 명령하듯이 말하면서 점점 더 빨리 걷잡을 수 없이 계산을 해댔다. "당신의 어머니가 부담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푸시씨, 당신은 집안 일의 일부를 떠맡아야 합니다. 장을 봐야하고 청소를 해야 하고……, 그런 유(類)의 귀찮은 일이 수없이 많습니다. 거기에다 매일 얼마나 쓰십니까?" 

 "아마 한시간쯤, 하지만……." 

 "당신이 손실한 액수가 또 다시 5천 5백 1십 8만 8천이 되는군요, 푸시씨. 우리는 또, 당신이 한 주일에 한번 극장에 간다는 것, 매주일 한번 합창대에 참석하고, 일주일에 두번 단골 술집에 가며, 나머지 날에는 밤마다 친구를 만나거나, 이따금 심지어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쓸데없는 일로 죽이고 있습니다. 하루에 대충 세 시간쯤, 그것이 또 1억 6천 5백 5십 6만 4천이 되는군요. 기분이 언짢으십니까, 푸시씨?" 

 "그렇군요." 푸시씨는 대답했다. 

 "용서하십시오……. 이제 곧 끝납니다." 회색 사나이는 말했다. "그렇지만 이제 당신의 생(生)의 특별한 장(章)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사실 작은 비밀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푸시씨는 이(齒)를 딱딱 부딪치며 덜덜 떨고 있었다. 그토록 참을 수 없이 춥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까지 아십니까?" 그는 맥이 빠져 중얼거렸다. "나는, 나랑 다리아말고는 아무도……." 

 "우리가 사는 현대에서는……," 외무사원 XYQ/384/b호는 푸시씨의 말을 중단시켰다. "어떤 비밀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한번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푸시씨. 내 질문에 대답을 하십시오. 당신은 다리아양과 결혼하시겠습니까?" 

 "아니오." 푸시씨는 말했다. "그건 안될 말입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다리아양은 다리 병신이니까 한 평생 바퀴 의자에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꽃을 가지고, 매일처럼 반 시간씩 그 여자를 방문하지요. 왜?" 

 "그 여자는……, 아무튼 언제나 기뻐하거든요." 푸시씨는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외무사원은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는 잃어 버린 시간입니다. 푸시씨, 그것을 합치면 어느새 2천 7백 5십 9만 4천이 됩니다. 그리고 매일처럼 잠들기 전에 십오분 동안 창가에 앉아 지나간 낮의 일을 되돌아 보는 당신의 버릇까지 계산해 보면, 다시금 1천 3백 7십 9만 7천이라는 손실액이 나옵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 한번 봅시다, 푸시씨." 

 거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계산이 적혀 있었다. 




       수면(睡眠) 441504000초 

  일 441504000〃 

  식사 110376000〃 

  어머니 55188000〃 

  앵무새 13797000〃 

  장보기 등 55188000〃 

  친구, 합창 등  165564000〃 

  비밀 27594000〃 

  창(窓)가 1379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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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액: 1324512000〃 




 "이 총액은"하고 회색 사나이는 말하며 권총을 쏘는 것같은 소리가 나게끔 세차게 연필로 여러 차례 거울을 쳤다. "이 총액은,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이미 잃어 버린 시간인 겁니다. 뭐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푸시씨?" 

 푸시씨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아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얼음처럼 추워 오는데도 불구하고 진땀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회색 사나이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이 보시는 바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말했다. "이건 벌써 당신이 애당초 갖고 있던 총재산의 절반이 넘습니다, 푸시씨. 그럼 이제 당신의 4십 2년 중에서 대체 얼마나 남아 있나 한번 봅시다. 일년은 아시다시피 3천 1백 5십 3만 6천초입니다. 그리고 그걸 4십 2배 하면 1십 3억 2천 4백 5십 1만 2천초이지요." 

 그는 잃어 버린 시간의 밑에다 그 숫자를 썼다. 




       1324512000초 

  ― 132451200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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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0000000초 




 그는 연필을 집어 넣고는 잔뜩 나열된 영(零)의 실체를 푸시씨에게 실감시키기 위해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과연 그건 효력이 있었다. 

 "저것이……," 푸시씨는 만신창이가 된 느낌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살아 온 생의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로구나." 

 이렇게 한 치도 남김없이 더하기 빼기로 똑 맞아 떨어진 계산이 어찌나 충격을 주었던지, 그는 모든 것을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인정했다. 하기는 계산 자체는 틀림이 없었다. 이것은 회색 도당들이 어느 경우에든 인간을 기만하는 책략의 한 예(例)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을 꾸려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외무사원 XYQ/384/b호는 은근한 말투로 다시 입을 떼었다. 

 "푸시씨, 이제부터 저축을 시작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푸시씨는 말없이, 파랗게 질린 입술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테면 당신이," 외무사원의 잿빛 음성이 푸시씨의 귀에 울렸다. "이십년 전에 매일처럼 단 한시간씩 저축을 하기 시작했더라면, 지금 당신은 2천 6백 2십 8만초의 재산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매일처럼 두 시간씩 저축을 했다면, 물론 그 갑절, 그러니까 5천 2백 5십 6만초가 되겠지요. 푸시씨, 말씀해 보십시오. 이런 어마어마한 숫자에 비하면 두 시간쯤이야 얼마 안 되는 하찮은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지요!" 푸시씨는 외쳤다. "너무나 하잘 것 없는 부스러기 시간이지요!" 

 "그걸 터득하고 계시다니 기쁩니다." 외무사원은 변함 없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똑 같은 조건 하에서 앞으로 이십년 동안 저축을 해서 갖게 될 재산을 계산해 보면, 1억 5백 1십 2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에 이르게 됩니다. 이 자본은 당신이 예순 두살 되는 해에 당신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굉장하군요!" 푸시씨는 더듬거리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만,"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하긴 실제로 더 큰 액수가 되는군요. 우리, 곧 시간 저축은행은, 이를테면 당신이 저축한 시간만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이자(利子)까지 지불하지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더 많은 액수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더 많은가요?" 푸시씨는 숨가쁘게 물었다. 

 "그건 전적으로 당신한테 달려 있습니다." 외무사원은 설명했다. "당신이 얼마나 저축을 하는가, 얼마나 오래 저축액을 우리 은행에 예치(預置)해 놓는가, 하는 데 달려 있지요." 

 "예치해 놓다니요" 푸시씨는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자, 아주 간단합니다." 회색 사나이는 말했다. "당신이 그 동안 저축한 시간을 5년 안에 되찾아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와 똑같은 금액을 가산하여 지불합니다. 당신의 재산은 5년마다 두 배로 불어나는 것이지요, 아시겠습니까" 십년 뒤에는 벌써 애당초 예입한 원액(元額)의 네 갑절이 될 테고, 십오년 뒤에는 여덟 배, 이렇게 점점 불어나는 겁니다. 당신이 하루에 단 두 시간씩 예입하기를, 이십년 전에 시작했더라면, 당신이 예순 두살이 되는 해에는, 그러니까 도합 사십년 후에는, 그 때까지 당신이 실제 예입한 원시간(原時間)의 2백 5십 6배의 시간이 당신 처분을 기다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건 2백 6십 9억 1천 7십 2만초가 되겠군요." 

 그리고 그는 또 다시 회색 연필을 꺼내어 거울 위에 그 숫자를 썼다. 


    26,910,720,000초 


 "보시다시피, 푸시씨." 그는 처음으로 엷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것은 당신의 원래의 전 생애의 열배가 되는 숫자입니다. 그것도 매일처럼 단 두시간 절약해서. 유리한 제안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리하고 말고요!" 푸시씨는 녹초가 되어서 말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유리합니다! 저축을 일찌감치 시작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군요. 이제사 겨우 제대로 눈이 떠졌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자포자기의 기분이 듭니다." 

 "그러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회색 사나이는 은근하게 대답했다. "언제 시작해도 늦는 법이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오늘부터라도 시작하실 수 있지요. 아시게 되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저축을 원한다면," 푸시씨는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절차를 밟아야 합니까?" 

 "그거야 선생님," 외무사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간을 어떻게 아끼는지 당신 자신이 알게 될 겁니다. 이를테면 우선 일을 좀더 신속히 처리하고 모든 쓸데없는 일을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이발소 고객한테 반시간 대신 십오분만 바치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는 오락을 피해야 합니다. 늙은 어머니 곁에 앉아 있는 시간을 반시간으로 단축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애당초 값싸고 좋은 양로원에 노모를 떠맡기는 겁니다. 그럼 벌써 당신은 매일, 옹근 한시간을 벌게 되지요. 쓸데없는 앵무새를 없애 버리십시오! 꼭 방문해야겠으면, 다리아양도 두 주일에 한번만 찾아 가십시오. 십오분 동안의 하루의 반성을 집어치우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그토록 자주, 노래와 책 읽기, 또는 당신의 이른바 친구들과 더불어 다시는 허송하지 마십시오. 얘기하는 김에 덧붙여 충고를 하나 하지요. 당신의 조수의 노동 시간을 정확히 감시할 수 있게끔, 크고 성능이 좋은 시계를 이발소에 걸어 놓으십시오." 

 "좋습니다." 푸시씨는 말했다.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읍시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내게 남게 된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걸 보내야 하나요" 어디로" 아니면 제가 그냥 보관해야 하나요" 전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 점에 관해서는……," 회색 사나이는 말하며 두번째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점은 마음 놓고 우리한테 맡기십시오. 당신이 절약한 시간은 털끝만치도 새어 나가지 않고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이제 확신하시게 됩니다. 당신한테는 어느새 여분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푸시씨는 당황스레 대답했다. "그 점을 믿겠습니다." 

 "맘 푹 놓고 믿으십시오, 선생님." 외무사원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걸로 당신이 우리 시간 저축가 대연맹의 새 회원이 되신 걸 환영해도 되겠지요. 이제 당신도 명실공히 앞서 가는 현대인이 되신 겁니다. 푸시씨, 축하합니다!" 

 그리고 그는 모자와 가방을 들었다. 

 "잠간만!" 푸시씨가 소리쳤다. "대체 무슨 계약같은 걸 체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명을 안 해도 되나요" 무슨 서류같은 것도 받지 않고요?" 

 외무사원 XYQ/384/b호는 문께에서 몸을 돌리더니 약간 불쾌한 기색으로 푸시씨를 훑어 보았다. 

 "그런 건 뭣 때문에 합니까?" 그는 되물었다. "시간 저축은 다른 종류의 저축과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무결한 신뢰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쌍방에서 말이지요! 당신의 수락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일단 수락한 것은 취소할 수가 없지요. 우리야 이제 당신의 저축에만 관여할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얼마나 저축하느냐 하는 건 순전히 당신 자신한테 달린 겁니다. 우리는 당신한테 아무런 강요도 안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푸시씨!" 

 그리고 나서 외무사원은 타고 온 멋진 회색 승용차에 오르더니 붕 떠났다. 

 푸시씨는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서서히 다시 훈기가 돌아왔지만, 그는 비참하게 병든 느낌이 들었다. 외무사원의 작은 시가에서 뿜어 나온 푸른 담배 연기가 방 안에 여전히 진하게 서린 채 한참 가셔지지를 않았다. 

 연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푸시씨는 다시 기분이 나아졌다. 연기가 사라지는 것과 정도를 같이 해서 거울 위에 적힌 숫자도 점점 흐릿하게 바래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연기와 숫자가 완전히 꺼져 버리자 회색 방문객에 대한 기억도 푸시씨의 머리 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방문객에 대한 기억은 지워졌지만 결론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 결론을 그는 이제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훗날 언젠가는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 이제부터 시간을 절약하겠다는 결심이 갈퀴 달린 침(針)처럼 그의 가슴 속에 꽉 박혀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 날의 첫 손님이 왔다. 푸시씨는 무뚝뚝하게 서비스를 했다. 일체의 필요 이상의 서비스를 생략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까 과연 반시간 걸리던 일이 이십분만에 끝났다. 

 이제부터 그는 그런 식으로 모든 손님을 대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는 일에서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미를 느낀다는 것도 이제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도제(徒弟) 외에도 두 사람의 조수를 더 고용하고는 일초도 낭비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감시했다. 하나 하나의 손놀림이 엄밀한 시간표에 의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푸시씨의 이발소 안에는 이제 다음과 같은 표어가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절약된 시간은 갑절의 시간이다! 

 다리아양에게 그는, 이제 시간이 없어서 유감스럽게도 방문을 하지 못하겠노라고 짧고 맹숭맹숭한 편지를 썼다. 앵무새는 동물 매매소에 팔아넘겼다. 그의 어머니는 값이 싼 괜찮은 양로원에 떠맡기고 한달에 한번 방문을 했다. 그리고 그 밖에도 회색 사나이의 모든 충고를 좇았다. 실상 이제 그는 그 충고를 자기 자신이 내린 결론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안정을 잃었다. 실상 한가지 알 수 없는 노릇은 그가 저축한 모든 시간은 과연 조금도 남아 있는 적이 없었다. 그 시간은 수수께끼처럼 그냥 사라져 버려 흔적조차 없었다. 그의 하루 하루는 처음엔 느낄 수 없이, 나중엔 명백히 느낄 수 있게 점점 짧아져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일 주일이 지났고 한 달, 한 해가 지났고, 다시금 또 한 해, 또 한 해가 흘러갔다. 

 이제 그는 회색 사나이가 방문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렸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시간이 대체 어디로 가고 없는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심각해게 생각해 봄 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시간 절약가들처럼 그 역시 별로 이 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 상태는 마치 신들린듯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자기의 시간이 점점 빨리 가속적(加速的)으로 질주한다는 것을 깜짝 놀라 깨닫게 되면 그는 더욱 이를 악물고 시간을 절약할 뿐이었다. 


 대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새 푸시씨와 같은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날마다, 이른바 '시간 절약'을 시작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 갔다. 이렇게 시간 절약가의 수가 늘면 늘수록 뒤따르는 사람의 수효도 늘어갔다. 애당초 시간 절약을 원치 않던 사람들까지도 뒤따라 어울리는 수 밖에 딴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매일처럼 라디오와 텔레비젼, 신문에서는, 언젠가는 인간에게 '제대로의' 삶을 위한 여가를 선사할 각종 새로운 시간 절약 제도의 이점(利點)이 선전되고 해설되었다. 건물의 벽과 광고 기둥마다 행복의 온갖 가능성이 그려진 플래카드가 붙여졌고 플래카드 밑에는 번쩍이는 글자로 이런 문귀가 쓰여 있었다. 


      날로 향상되는 시간 절약! 

     또는, 시간 절약은 미래의 재산! 

   또는, 더 많이 사는 길――시간을 아낍시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시간절약가들은 옛 원형극장 근처에 사는 마을 사람들보다 훨씬 잘 입고 있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따라서 더 많은 지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불쾌하고 피곤한, 또는 불평 투성이의 얼굴에다 불친절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아무튼 모모한테 가 보게!"하는 말투를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에 열심히 귀 기울여 줌으로써 말하는 이에게 신통한 묘안(妙案)과, 화해의 마음, 심지어 기쁨을 안겨다 주는, 모모같은 대상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설사 거기에 그런 대상이 있었다 한들, 그들이 그 대상을 찾아 갔을는지의 여부도 지극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용건이 단 이분 안에 처리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시간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 스스로 여가라고 여기는 시간까지도, 십분 활용되고, 최대한의 속도로, 가능한 한 많은 쾌락과 긴장 해소(緊張解消)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제대로의 축제를 즐길 수가 없게 되었다. 유쾌한 축제도, 엄숙한 축제도, 몽상이란 그들에게는 사뭇 범죄시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적(靜寂)을 가장 견디지 못했다. 정적 가운데 있으면 불안이 덮쳐 오기 때문이었다. 자기네의 삶이 진실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예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적의 위협을 느끼면 항상 소음(騷音)을 내었다. 하지만 이 소음은 물론 어린이 놀이터에서와 같은 유쾌한 소음이 아니었고, 날로 대도시를 더욱 떠들썩하게 메우는 불쾌하고 광란스러운 소음이었다. 

 맡은 바 일에 기꺼운 마음으로, 또는 사랑을 갖고 임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반대로 그런 마음은 억제되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단 한가지, 최소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큰 공장과 사무실의 현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귀가 쓰인 팻말이 걸려 있었다. 


    시간은 값비싼 것――시간을 잃지 말자! 

  또는, 시간은 황금(과 같은 것)――시간을 아끼자! 


 비슷한 팻말들이 사원(社員)의 작은 책상 위에도, 지배인의 안락의자 위에도, 의사의 진찰실 위에도, 상점, 음식점, 백화점, 심지어는 학교와 유치원에까지도 걸려 있었다. 이 자장(磁場) 바깥의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도시의 겉 모습도 점점 달라져 갔다. 낡은 구역은 철거되었고, 실용성(實用性)이 없는 일체의 것이 배제된 신식 건물들이 세워졌다. 그 집 안에서 살 사람들에게 각기 어울리는 집을 짓는 수고를 사람들은 아꼈다. 그러자면 온통 다른 형태의 집을 지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모든 집을 똑 같이 지으면, 훨씬 값싸고, 무엇보다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대도시의 북쪽으로는 벌써 엄청나게 큰 새 주택구가 퍼져 나갔다. 거기에는 너무나 똑 같아서 구별할 수 없는 고층 아파트들이 병영(兵營)처럼 끝없이 줄지어 세워졌다. 이렇듯 똑 같은 집들 사이에 난 도로들은 당연히 똑 같은 형태를 이룰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단조로운 도로들이 부쩍부쩍 늘어났고 어느덧 일직선으로 지평선에까지 뻗쳐 있었다. 그것은 질서의 황무지였다! 그리고 여기에 사는 인간의 삶의 형태도 이와 똑같이 흘러 갔다―일직선으로 지평선까지! 여기서는 모든 것이 매 센티미터마다, 매 순간마다 엄밀하게 계산되고 계획되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절약함으로써, 결국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것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삶이 점점 빈약해지고, 단조로와지며, 차가와져 간다는 것을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분명히 느끼고 있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어린이를 위한 시간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삶인 것이다. 그리고 삶은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면 할수록, 점점 시간은 없어지는 것이었다. 



7  친구들을 방문하는 모모, 적(敵)의 방문을 받는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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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모르겠어"라고 어느날 모모가 말했다. "우리 정든 친구들이 이제 점점 뜸하게 나를 찾아 오는 것같이 느껴져. 참 많은 친구를 퍽 오랫동안 못 봤어."

 여행안내원 지지와 도로청소부 베포가 풀 덮인 폐허의 돌계단 위 모모의 곁에 앉아서 낙조(落照)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지지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나도 똑 같은 느낌이야.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져. 옛날 같지가 않아. 어쨌든 무슨 일인가 생겼어."

 "그게 무슨 일일까?" 모모가 물었다.

 지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겨 낡은 석판 위에 자기가 끄적여 놓았던 무슨 글자를 침으로 지웠다. 이 석판은 베포 노인이 몇 주일 전에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모모한테 가져다 준 것이었다. 물론 새 것은 아니었고 한가운데 커다랗게 금이 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훌륭하게 쓸 수가 있었다. 그 후로 지지는 매일 같이 여러가지 글자를 쓰는 방법을 모모에게 가르쳐 주었다. 모모는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꽤 많은 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쓰기만은 아직 완전히 할 수 없었다. 

 

 모모의 질문에 대해 생각에 잠겼던 베포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게 사실이야. 점점 가까이 다가 오고 있어. 도시 안에는 벌써 완전히 번져 있어. 나한테는 벌써 오래 전에 눈에 뜨인 일이야." 

 "대체 무언데요?" 모모가 물었다. 

 베포는 한참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은 것이 아니야." 

 그리고 다시금 한참 뒤에 덧붙였다. "추워지고 있어." 

 "또 무슨 얘기라구!" 지지는 걱정 말라는듯이 모모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점점 더 많은 어린애들이 여기로 오고 있잖아요." 

 "그래, 그래서 말이야." 베포가 말했다. "그것 때문에 말야." 

 "무슨 뜻이에요?" 모모가 말했다. 

 베포는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어린애들은 우리를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야. 그 애들은 보금자리를 찾고 있을 뿐이야." 

 세 사람 모두,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 오늘 오후에 새로 생각해 낸 공놀이를 하던, 원형극장 한복판의 둥그런 풀밭을 내려다 보았다. 

 그 중에는 모모의 옛 친구도 몇 섞여 있었다. 파올로라는 이름의 안경 쓴 소년, 꼬마 계집아이 동생 데데를 데리고 오는 소녀 마리아, 마시모라는 이름을 가진 소프라노 음성의 뚱보 소년, 그리고 언제 봐도 개구장이같은 프랑코라고 불리는 또 다른 소년. 하지만 그들외에도 불과 며칠 전부터 어울리기 시작한 다른 어린이들이 여럿 있었고, 오늘 오후에 처음 온 꼬마 소년이 하나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은 사실 지지가 말한대로였다. 하루 하루 어린이들은 불어났다. 

 근본적으로 모모는 이 사실을 기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린이들의 대부분은 쉽게 놀 줄을 몰랐다. 아이들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지루하게 주저앉아서 모모와 모모의 친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때로는 일부러 모모와 친구들을 훼방하며 모든 걸 망쳐 놓았다. 말다툼을 하고 때리고 싸우는 일이 이젠 적지 않게 벌어졌다. 물론 싸움이 오래 가진 않았다. 모모의 존재가 이 아이들에게도 역시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곧 스스로 좋은 마음을 갖게 되고 신이 나서 어울려 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거의 매일, 새 어린이들이 오는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먼 도시의 다른 동네에서도 왔다. 그래서 끊임없이 똑 같은 사태가 반복될 수 밖에 없었다. 뻔한 일이지만, 한 사람의 훼방군이 다른 전체의 어린이들의 놀이를 온통 망쳐 놓기가 일쑤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모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또 있었다. 그것 역시 최근에 시작된 현상으로서, 어린이들이 각종 장난감을 들고 오는 일이 점점 잦아져 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실제로 잘 갖고 놀 수 없는 장난감들이었다. 이를테면 원거리 조종 탱크같은 것…….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 쓸모 없는 물건이었다. 또는 막대기에 붙어 윙윙대며 회전하는 우주선같은 것……. 하지만 그 뿐 다른 데는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또는 번득이며 이리저리 굴리는 눈알과 회전식 머리를 가진 미니 로보트, 하지만 그것 역시 다른 데는 아무 데도 소용없는 물건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모모의 친구들은―모모 자신도―도저히 가져 볼 수 없는 값비싼 장난감들이 있었다. 특히 그런 장난감들은 너무나 완벽하게, 작은 부분까지 정밀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그걸 갖고 노는 어린이가 거기에 대고 상상력같은 걸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몇 시간이고 우두커니 앉아 넋을 잃고, 그러면서도 역시 지루하게, 털털거리거나, 이리저리 굴러가거나, 빙빙 돌아가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무슨 묘안(妙案)이 떠오르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결국 두 세개의 상자, 찢어진 행주조각 하나, 두꺼비집, 또는 한 줌의 모래만 있으면 충분한, 옛날에 하던 놀이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이 놀이에서는 모든 것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오늘 저녁에도 무언가가 놀이를 제대로 할 수 없게끔 방해한 모양이었다. 어린이들은 하나씩 둘씩 뿔뿔이 빠져 나오더니 마침내 모두가 지지, 베포, 모모를 둘러싸고 앉았다. 그들은 지지가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하고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즉, 오늘 처음 나타난 어린 소년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꼬마는 다른 사람들과 좀 떨어진 곳에 앉아서 라디오를 한껏 틀어 놓고 있었다. 그것도 광고 방송이었다. 

 "그 떠벌이 상자를 좀 작게 틀 수 없겠니?" 프랑코라고 불리는 개구장이 소년이 얼러대는 투로 말했다. 

 "너를 이해할 수가 없구나." 낯선 소년은 심술궂게 웃으며 말했다. "내 라디오는 이렇게 큰 소리가 나" 

 "당장 소리를 낮춰!" 프랑코는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낯선 소년은 약간 핼쑥해졌다. 그러면서도 뻣뻣하게 되받았다. "너는 나한테 말을 할 자격이 없어, 어느 누구도. 난 내 마음대로 내 라디오를 크게 틀 수 있는 거야 ." 

 "그래, 그 애 말이 맞다." 베포 노인이 말했다. "우린 그 애한테 그걸 못하게 할 수가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껏 양해를 구하는 거야." 

 프랑코는 다시 주저앉았다. 

 "저 녀석이 꺼져야 해요." 그는 식식거리며 말했다. "오늘 오후 내내 우리가 노는 걸 온통 잡쳐 놨어요." 

 "그 애가 그러는 데는 까닭이 있을거다." 베포 노인은 조그마한 안경 너머로 소년을 다정하고 주의깊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분명코 이유가 있을 거다." 

 낯선 소년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후 소년은 라디오의 볼륨을 낮추고 딴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모가 소년에게 다가 가서 그 옆에 말없이 앉았다. 소년은 라디오를 껐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얘기 하나 해 주세요, 지지." 새로 온 어린이 중의 한 아이가 말했다. "아, 그래요, 얘기해 주세요." 다른 어린이들도 소리쳤다. "재미있는 얘기로요!―아니, 흥미진진한 걸로요!―아니, 동화를 해 주세요!―모험 이야기를요!" 

 하지만 지지는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오히려 너희들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는 이윽고 말했다. "너희들에 관해서, 너희들 집에 관해서, 너희들이 무엇을 하고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어린이들은 말이 없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갑자기 슬프고 서먹서먹해졌다. 

 "우리 집에는 지금 아주 근사한 자동차가 있어요." 마침내 한 아이가 입을 떼었다. "토요일 날, 엄마랑 아빠가 시간이 있으면 자동차를 씻어요. 우리가 착하게 굴면 그 일을 도울 수가 있어요. 나중에 나도 그런 자동차를 갖고 싶어요." 

 "나는요," 조그만 소녀가 말했다. "이제 매일처럼 내가 가고 싶으면 극장에 갈 수가 있어요. 유감스럽게도 엄마 아빠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극장 보내는 걸로 나를 돌보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잠시 후 소녀는 덧붙였다. "나는 그렇게 보호 감독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극장에 가지 않고 몰래 여기에 와서, 돈을 모아요. 돈이 넉넉히 생기면 차표를 사서 일곱 난장이가 있는 데로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넌 참 바보구나!" 한 어린이가 말했다. "일곱 난장이란 없어." 

 "있어!" 꼬맹이 소녀는 맞서며 말했다. "여행 안내 광고에서도 봤는걸." 

 "나는요, 벌써 동화 레코드판을 열 한장이나 갖고 있어요." 한 어린 소년이 말했다. "그걸 나는 듣고 싶을 때마다 들을 수가 있어요. 전에는 아버지가 일이 끝나고 돌아 오면 저녁마다 직접 얘기를 해 주었는데요. 그 얘기는 참 재미있었어요. 그렇지만 이젠 저녁 때 아버지가 있는 적이 없어요. 아니면 피곤하든지, 얘기할 기분이 안난대요." 

 "그럼 너희 엄마는?" 마리아라는 소녀가 물었다. 

 "엄마도 이젠 늘상 하루 종일 없어." 

 "그래"하고 마리아가 말했다. "우리 집도 꼭 그래요.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나한텐 데데가 있어요." 소녀는 무릎에 앉아 있는 꼬마 동생에게 뽀뽀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 돌아 오면 나는 우리가 먹을 음식을 데워요. 그리고 숙제를 해요. 그리고 나선……,"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그리고는 이렇게 뛰고 놀아요. 밤이 될 때까지. 대개는 여기로 오지요." 

 모든 어린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같은 형편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아주 만족이에요." 프랑코가 말했다. 하지만 결코 만족스런 기색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나한테 쓸 시간이 없는 게 말이에요. 안 그러면 엄마 아빠는 싸우기나 할 테고, 그리고 나면 나는 매를 맞아요." 

 그 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진 소년이 불쑥 이쪽으로 향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전보다 훨씬 많은 용돈을 받아요!" 

 "맞았어!" 프랑코가 대답했다. "어른들은 그래. 그걸로 우리를 떼어 놓으려고 해! 어른들은 우리를 이제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어른들은 자기네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예요. 도대체 아무 것도 좋아하는 게 없어요. 제 생각엔 그래요." 

 "그건 맞지 않아!" 낯선 소년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굉장히 좋아해. 다만 시간이 없는 데 대해 어쩔 수가 없는 거야. 그런거예요. 그래서 엄마 아빠는 이렇게 나한테 트랜지스터 라디오까지 사 주신거예요. 이건 굉장히 비싸요. 아무튼 이건 하나의 증거가 되지요. 아닐까요?"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그 때 오후 내내 훼방군이었던 그 소년이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다. 소년은 울음을 참으려고 애쓰며 더러운 두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소년의 뺨의 더러운 얼룩 위로 투명한 줄기를 그리며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다른 어린이들은 동정어린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거나 땅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아이들은 소년을 이제 이해하고 있었다. 애당초 모두가 소년과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팽개침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 베포 노인은 잠시 후 다시 한번 말했다. "추워지고 있어." 

 "이제 곧 나는 다시는 여기 오지 못할지 몰라." 안경을 쓴 소년 파올로가 말했다. 

 "왜 못 온단 말이니?" 모모가 놀라 물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파올로가 설명했다. "아저씨들은 게으름뱅이이고 건달이라고 말했어요. 빈둥빈둥 세월을 보낸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그 모양 그 꼴이 됐다고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이 점점 시간이 없어진다고 말해요. 그리고 날더러 이제는 여기에 가지 말래요. 안 그러면 나도 아저씨들처럼 된대요." 

 그러자, 그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어린이들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지는 어린이들을 하나씩 차례로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니? 그렇다면 왜 우리한테 오니?"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프랑코가 말했다. "나도 그런걸요. 나도 크면 별 수 없이 도로 청소부밖에 안 될거라고 아빠는 늘 말하는걸요. 나는 아저씨들 편이에요." 

 "아, 그래?" 지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그러니까 우리를 건달로 여기는구나?" 

 어린이들은 당황해서 시선을 떨구었다. 마침내 파올로가 뭘 캐내려는듯이 베포 노인을 똑 바로 쳐다 보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아무튼 거짓말은 안해요." 소년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더욱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그럼 아저씨들은 건달이 아닌가요?" 

 그러자 청소부는 별로 크지도 않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는 세 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올리고 말했다. "나는 지금껏 결코, 내 평생에 한번도, 사랑하는 하느님이나 다른 사람의 시간을 한 순간이라도 훔쳐온 적이 없어. 하느님께 맹세코!" 

 "나도 그래!" 모모가 덧붙였다. 

 "나도!" 지지가 엄숙하게 말했다. 

 어린이들은 깊은 감동을 받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어느 누구도 세 친구의 맹세를 의심치 않았다. 

 "아무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지지가 말을 이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즐겨 모모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내가 말하는 걸 너희들이 이해할는지 모르겠다만,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했던 거야. 그렇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러기를 꺼리고 있어. 전에는 또 사람들이 늘 내 이야기를 들으러 기꺼이 왔었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 버렸지. 이제는 그러기도 모두가 꺼리고 있어. 그런 일을 할 시간이 없어졌어. 알아 듣겠니? 참 이상스러운 일이야. 무엇 때문에 그들이 시간이 없는지!" 

 그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최근에 시내에서 옛날부터 아는 이를 한 사람 만났어. 이발사야. 푸시라는 이름이지. 한동안 못 만나긴 했지만, 정말 얼른 알아 볼 수가 없었어. 그 사람이 그렇게 달라져 버리다니! 신경질을 부리고 무뚝뚝하고, 기쁨을 잃은 모습이었어. 전에는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노래도 잘 부르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아주 독특한 자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한텐 그런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이 없어졌어. 그 사람은 다만 자기 자신의 껍질일 뿐, 이미 원래의 푸시씨는 전혀 아니었어. 알겠니? 그런 사람이 그 사람 하나라면 나는 그저, 그가 약간 돌았거니 생각하겠어. 그렇지만 어딜 가도 그런 사람 천지가 되었어. 점점 숫자가 늘고 있어. 이젠 심지어 우리의 친구들까지 그렇게 되기 시작했어! 나는 이제 정말 전염성 있는 정신병이 도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 

 베포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어. 분명코 그건 일종의 전염이야." 

 "그렇다면," 모모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우리 친구들을 어쨌든 도와야겠네요!" 

 이날 밤 그들은 함께 오랫동안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언가를 상의했다. 하지만 회색 도당과 그들의 쉴새없는 활동에 대해서는 그들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뒤 며칠 동안 모모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서 옛 친구들이 자기에게 오지 않는지 알아 보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 나섰다. 

 맨 먼저 미장이 니콜라를 찾아 갔다. 모모는 니콜라가 살고 있는, 지붕 밑 조그만 방이 있는 집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집에 없었다. 다만 그 집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로는 니콜라는 도시 반대편 쪽의 대규모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돈을 잔뜩 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어쩌다가 집에 들어 오며, 그것도 대개는 아주 늦게 돌아 온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이제 그가 취하지 않은 때가 드물고, 그래서 도대체 그를 수월하게 대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였다. 

 모모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그의 방문 앞 계단에 앉았다. 점점 어두워졌고, 모모는 깜빡 잠이 들었다. 

 모모가 쿵쾅거리는 발걸음과 거친 노래 소리에 잠이 깨었을 때는 벌써 밤이 깊었음에 틀림 없었다. 계단을 비틀거리며 올라 오는 사람은 니콜라였다. 그는 꼬마 모모를 보자 당황한듯 우뚝 섰다. 

 "어이, 모모!" 그가 크게 외쳤다. 그를 바라보는 모모의 시선이 그를 당황하게 했음이 분명했다. "아직 살아 있었군!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어?"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모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이, 어쩌자고 이러고 있지!" 니콜라는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옛 친구 니콜라를 보러 이렇게 밤늦게 찾아 오다니. 정말 참 오랫동안 너를 못 찾아 간 것 같구나. 그렇지만 사실 시간이 없었어. 그런……개인적인 일에 신경 쓸……." 

 그는 수선스럽게 손짓을 하며 모모 옆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생겼느냐는 거지, 꼬마야! 전 같지가 않아. 시대가 변하고 있어. 내가 지금 일하는 저편에서는 딴판의 속도로 움직여 가고 있어. 정신 차릴 수 없는 템포야. 매일처럼 우리는 온통 한층의 집을 쌓아 올려. 한층씩 한층씩……. 정말,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 모든 일이 조직화(組織化)되었어. 손 놀림 하나 하나가 마지막까지……, 알겠니?" 

 그는 계속 떠들었고, 모모는 주의깊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모모가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의 얘기의 열기도 점점 식어갔다.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고 못이 박힌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온통 부질없는 소리야." 그는 갑자기 슬픈 어조로 말했다. "너도 보다시피, 모모, 또 이렇게 진창 마셨어. 나도 알아. 나는 이제 너무 자주 마셔. 안 그러고는 거기서 하는 일을 견딜 수가 없어. 정직한 미장이한테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야. 모르타르를 모래에 너무 많이 섞어, 알겠니? 그렇게 하면 사 오년이나 지탱할까, 그 다음엔 기침만 해도 무너질꺼야. 온통 사기(詐欺)야. 치사스러운 속임수야! 거기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어. 가장 기차게 한심한 건, 우리가 짓고 있는 건물들이야. 그건 도대체 집이 아니야. 그건, 그건 말이야, 사람들을 쑤셔넣는 높다란 창고야! 거기선 오장육부가 뒤집혀! 하지만 그 모든 게 나완 무슨 상관이 있겠어? 나는 거기서 돈을 벌고 그걸로 그만이야. 아무튼 시대는 변하고 있어. 전에는 내게 일이란 전혀 다른 거였는데. 남이 봐 줄 수 있는 뭔가를 지으면서, 그런 나의 일에 대해 긍지를 가질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 언제고 돈만 충분히 벌면 이 직업을 때려 치우고 딴 일을 하겠어." 

 그는 풀이 죽어서 앞을 침울하게 응시했다. 모모는 아무 말없이 오로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니콜라는 한참 후 말을 이었다. "정말 너한테 한번 가서 모든 걸 털어 놨어야 했나 봐. 그래 정말 그랬어야 했어. 우리 내일 얘기 하자, 응? 아니면 모레가 더 좋을까? 자, 어떻게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사정을 봐야겠어. 그렇지만 가긴 꼭 갈거야. 그럼 약속했지?" 

 "약속했어요." 모모는 대답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졌다. 두 사람 다 지독히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니콜라는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도대체 나타나지를 않았다. 아마도 정말 다시는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다음 번으로 모모는 주막집 주인 니노와 그의 뚱뚱보 아내를 찾아 갔다. 비바람으로 얼룩진 회벽(灰壁)의 낡고 작은 그의 집은 도시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 앞에는 포도 덩굴로 뒤덮인 정자(亭子)가 있었다. 전에도 늘 그랬듯이 모모는 마당 뒤로 돌아 부엌 문으로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니노와 그의 아내 릴리아나가 거칠게 말을 주고 받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다. 릴리아나는 부뚜막에서 프라이팬과 남비를 다루고 있었다. 그녀의 뚱뚱한 얼굴이 땀으로 번득였다. 니노는 몸짓을 하면서 아내에게 뭐라고 열심히 말을 건네고 있었다. 구석에는 갓난아기 둘이 바구니 속에 앉아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모모는 살그머니 꼬마 옆에 앉았다. 그리고 꼬마를 무릎에 앉히고 살랑살랑 흔들어 달래었다. 두 사람은 입씨름을 중단하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모모, 너였구나." 니노는 말하며 언뜻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갑다, 너를 다시 보게 되어서." 

 "뭐 먹고 싶으냐?" 릴리아나가 약간 부루퉁하니 물었다. 

 모모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로 왔니?" 니노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실은 지금 우리는 너하고 어울릴 시간이 없어." 

 "저는 그냥……," 모모가 나직이 대답했다. "왜 아저씨 아줌마가 그토록 오래 저한테 오지 않는지를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도 모르겠어!" 니노는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실은 지금 우리한테 다른 걱정거리가 있어." 

 "그래." 릴리아나가 큰 소리로 말하며 남비를 덜그럭거렸다. "저 이는 지금 전혀 다른 고민거리를 갖고 있어! 이를테면, 어떻게 해서 늙은 단골 손님들을 몰아내 버리나, 그것이 지금의 저 이의 심통(心痛)거리야! 모모, 전에 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노인들 생각나니? 저 이가 그 사람들을 쫓아내 버렸어! 몰아 내던져 버렸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니노가 변명했다. "나는 아주 정중하게 다른 술집을 찾아 보시라고 간청했을 뿐이야. 술집 주인으로서 나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어." 

 "권리, 권리라구요!" 릴리아나가 노기등등해서 되물었다. "그런 일은 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비인간적이고 비열해요. 그 사람들이 다른 술집을 찾이 못하리라는 걸 당신도 번연히 알잖아요. 그 사람들이 우리 집 일을 방해한 건 하나도 없잖아요!" 

 "물론 그 자들이 누구를 방해한 거야 없지!" 니노가 소리쳤다. "말하자면 그 텁석부리 늙은 영감장이들은 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돈 잘 쓰는 착실한 고객이 우리 집에 못 오게 하는 역할을 했으니까. 그런 몰골이 손님들 기분에 들 줄 알아? 저녁 내내 앉아 있으면서 한 사람이 한 잔씩 밖에 안 마시는 제일 싸구려 포도주만 갖고는, 우리는 돈을 벌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는 우리는 도대체 아무 것도 될 수 없단 말이야." 

 "우리는 지금까지 아주 잘 꾸려 나왔잖아요." 릴리아나가 되받았다. 

 "지금까지야 그랬지!" 니노가 거칠게 되받았다. "하지만 당신도 잘 알다시피 앞으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어. 집 주인이 집세를 올렸어. 이제부턴 전보다 삼분의 일을 더 물어야 해. 모든 물가가 뛰고 있어. 우리 가게를 가난한 수다장이 영감 수용소로 만들어 버린다면 나는 어디서 돈을 벌겠어? 무엇 때문에 나만 다른 사람을 보살펴 줘야해? 아무도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데." 

 뚱보 릴리아나는 탕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프라이팬을 부뚜막에 얹어 놓았다. 

 "그렇다면 나도 말할 게 있어요." 그녀는 두 팔을 굵은 허리에 얹고 버텨 서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말한대로 그 늙고 가난한 수다장이 중에는, 이를테면 나의 아저씨 에토레도 끼어 있었어요! 당신이 우리 집안을 모욕하는 걸 난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의 그 잘난 돈 잘 쓰는 고객만큼 돈은 없어도, 아저씨는 선량하고 진실된 남자예요." 

 "에토레 아저씨야 얼마든지 다시 올 수 있잖아!" 니노는 큰 몸짓을 하며 대답했다. "나는 아저씨한테, 아저씨야 계시고 싶으신대로 계셔도 좋다고 말했어. 그렇지만 아저씨가 안 있으려고 했어."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아저씨의 노인 친구들 없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저씨가 저 쪽 바깥 구석에 혼자서 옹크리고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니노가 고함을 쳤다. "어쨌든 나는 초라한 주막집 주인으로 내 평생을 끝마칠 생각은 없어. 당신 아저씨 에토레를 생각해 주느라고 말야! 나는 내 평생에 뭔가 이뤄 놓고 싶어! 이게 무슨 죄가 될까? 나는 이 가게를 번창시키겠어! 내 술집을 크게 키우겠어! 내가 그러자는 건 꼭 나 때문만은 아니야. 그건 역시 당신과 우리 아이 때문이기도 해. 그래도 도저히 못 알아듣겠어, 릴리아나?" 

 "못 알아 듣겠어요." 릴리아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렇게 냉혹해야만 되는 거라면, 그리고 벌써 그럴 결심이 섰다면 나는 빼고 하세요! 그럼 난 언제고 훌쩍 도망가겠어요. 맘대로 하세요!" 

 그리고 그녀는, 그 동아에 다시 울기 시작한 갓난아이를 모모의 팔에서 받아 안고 부엌에서 뛰쳐 나갔다. 

 한참 동안 니노는 말이 없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만지작거렸다. 

 모모는 그를 바라보았다. 

 "음, 하긴," 그는 이윽고 입을 떼었다. "그들은 참 좋은 영감님들이었어. 나 역시 그 노인들을 참 좋아했지. 이 봐, 모모. 정말 나로서도 참 마음이 언짢아, 내가……,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니? 시대가 막 변하고 있어." 

 "어쩌면 릴리아나가 옳을거야." 그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 노인네들이 오지 않고부터는 나한테도 내 술집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 춥게 느껴져, 알겠니? 나 자신도 그걸 견딜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그렇지만 요즘엔 누구나가 다 그러는 걸. 뭣 땜에 나 혼자만 다르게 살겠어? 아니, 나 혼자만이라도 달리 살아야 할까?" 

 모모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니노는 모모를 바라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소를 지었다. 

 "와 주어서 반갑다." 니노가 말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생기면 '하여튼 모모한테 가 보게!'하고 늘 얘기했었는데, 그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다시 갈께, 릴리아나랑. 모레는 우리 가게가 노는 날이야. 그 때 갈께, 알았니?" 

 "알았어요." 모모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니노는 한 봉지 가득 사과랑 오렌지를 내 주었다. 모모는 집으로 돌아왔다. 

 니노와 뚱뚱보 아내는 과연 찾아 왔다. 갓난 애와 함께, 여러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한 바구니 가득 가지고. 

 "생각해 봐, 모모." 릴리아나가 기쁨에 가득 차서 말했다. "니노가 에토레 아저씨랑 다른 노인네들한테, 한사람 한사람씩 찾아 가서 용서를 빌고, 다시 오시도록 간청을 했어." 

 "그래." 니노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이고는 귓등을 긁적거렸다. "노인네들 모두가 다시 오고 있어. 내 술집이 번창해지지 않을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것이 다시 내 마음에 들어." 

 니노는 크게 웃었다. 아내가 말했다. "우리는 어쨌든 계속 살아갈거예요, 니노". 

 오후가 되면서 날씨가 한결 화창해졌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들은 곧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모모는 옛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다녔다. 그 옛날 상자 판대기로 꼬마 책상과 의자를 짜맞춰 준 목수를 찾아갔다. 그리고 침대를 갖다 준 아줌마들을 찾아갔다. 요컨대, 모모는 모든 사람들, 이전에 그들의 이야기에 모모 자신 귀 기울여 들어 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지혜와 결단과 기쁨을 선사해 주었던 모든 사람들을 찾아 보았다. 모두가 다시 찾아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중의 더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거나,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옛 친구들은 정말로 다시 찾아 왔고, 따라서 사뭇 전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알지도 못하는 새에, 모모는 회색 도당에게 방해물이 되어 있었다. 이런 방해물을 회색 도당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유난히 더운 한나절이었다―모모는 폐허의 돌계단 위에서 인형을 하나 발견했다. 

 제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값비싼 장난감을, 어린아이들이 어쩌다 잊고 버려두고 가는 적은 흔히 있어온 일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이 인형은 어떤 어린이가 갖고 있었는지 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눈에 띄었음 직한 물건이었다. 아주 특이한 인형이기 때문이었다. 

 인형은 사뭇 모모의 크기 만했고, 작은 사람과 혼동할 지경으로 실제 모습과 꼭 같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린이나 갓난애의 모습이 아니라, 멋진 젊은 숙녀나 진열장의 마네킹같은 모습이었다. 짧은 원피스를 입고, 뒷굽이 높은 끈 매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모모는 홀린듯이 인형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손으로 건드리자 인형은 몇 번 눈꺼풀을 껌뻑껌뻑 하고 입을 움직여 말했다. 전화에서 울려 나오듯이 꽥꽥 쇳소리가 나는 음성이었다. "안녕, 나는 비비걸이야, 완전한 인형이야." 

 모모는 깜짝 놀라 흠칫 물러섰다. 하지만 곧 무의식 중에 대답을 했다. "안녕, 나는 모모야." 

 인형은 다시금 입술을 달삭이며 말했다. "나는 네 것이야. 모두가 나 때문에 너를 부러워할거야." 

 "네가 내 것이라고, 나는 생각지 않아." 모모가 말했다. "누군가 너를 여기 잊어 버리고 간 것 같아." 

 모모는 인형을 집어 올렸다. 그러자 인형은 다시 입술을 달삭이며 말했다. "나는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그래?" 모모는 대답하고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어. 내가 가진 물건 중에 네게 맞는 게 있는지. 그렇지만 잠간만 있어 봐. 내 물건을 보여 줄께. 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해 줘." 

 모모는 인형을 안고, 인형과 함께 성벽의 구멍을 비집고 지나 자기 방으로 기어 내려갔다. 그리고 온갖 보물이 든 상자를 침대 밑에서 꺼내어 비비걸 앞에 밀어 놓았다. 

 "여기 있어." 모모가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맘에 드는 게 있으면 얘기만 해." 

 그리고 모모는 인형에게 알록달록한 예쁜 새 깃털과 예쁜 무늬의 조약돌 하나, 금빛 단추 하나, 색유리 한 조각을 보여 주었다. 

 인형이 아무 말도 안 하자 모모는 인형을 쳤다. 

 "안녕." 인형이 꽥꽥거렸다. "나는 비비걸이야. 완전한 인형이야." 

 "그래." 모모가 말했다. "벌써 알고 있어. 하지만 넌 뭔가 고르겠다고 했잖아, 비비걸. 여기 이를테면 참 예쁜 분홍빛 조개껍질이 있어. 마음에 드니?" 

 "나는 네 것이야." 인형이 대답했다. "모두가 나 때문에 너를 부러워할거야." 

 "그래, 그 말도 벌써 했잖니." 모모가 말했다. "내 물건 중에 네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우리 그냥 같이 놀면 어떻겠니?" 

 "나는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인형이 되풀이해 말했다. 

 "이것 말고는 내겐 없어." 모모는 이렇게 말하고 인형을 끌고 다시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거기서 모모는 완전한 인형 비비걸을 땅바닥에 앉히고 그 맞은 편에 자기도 앉았다. 

 "우리 이제, 네가 나를 찾아 온 걸로 하고 소꼽장난하자." 모모가 제안을 했다. 

 "안녕." 인형이 말했다. "나는 비비걸이야. 완전한 인형이야." 

 "찾아 주셔서 반갑군요!" 모모가 대답했다. "어디서 오셨나요, 아가씨?" 

 "나는 네 것이야." 비비걸은 말을 이었다. "모두가 나 때문에 너를 부러워할거야." 

 "자, 이거 봐." 모모가 말했다. "네가 맨날 똑 같은 소리만 하면 소꼽놀이를 할 수 없잖아." 

 "나는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인형은 눈꺼풀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모모는 다른 놀이를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도 안 되자, 또 다른 놀이를 해 봤고, 수 없이 많은 다른 놀이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사실, 인형이 차라리 아무 말도 안했다면, 모모가 인형 대신 대답을 해 줄 수 있었을 테고, 더없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 났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비비걸은 다름 아닌 자기의 반복되는 말로, 모든 대화를 방해했다. 

 얼마 후, 모모는 지금껏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자기로서는 전혀 처음 당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참 걸려서야 그 감정이 지루함(倦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모는 어쩔 줄 모르는 느낌에 빠져 버렸다. 그 완전한 인형을 그냥 내팽개쳐 두고 다른 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 인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모모는 그냥 주저앉은 채 인형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마치 서로 최면에 걸린듯이 인형 편에서도 푸른빛 유리 눈알로 모모를 마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모모는 억지로 인형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모모는 흠칫 놀랐다. 전혀 깨닫지 못하게 기척도 없이, 웬 멋진 잿빛 승용차가 바로 곁에 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안에는 거미줄 빛깔의 양복을 입고 회색 중산모자를 쓴 한 사나이가 작은 회색 시가를 피우고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까지도 잿빛으로 보였다. 

 그 사나이는 필시 한참 전부터 구경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모모를 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고개 인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무척 더운 한낮이었고, 햇볕에 대기가 찌는듯 이글거리고 있었는데도 모모는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이윽고 사나이는 차 문을 열고 내려서 모모에게 다가 왔다. 그의 손에는 납회색의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참 예쁜 인형을 갖고 있구나!" 

 그는 특이한 억양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인형 때문에 네 모든 놀이 친구들이 너를 부러워하겠다." 

 모모는 다만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이 없었다. 

 "확실히 굉장히 비싼 거겠지?" 회색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요." 모모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그냥 주운 거예요." 

 "원 참!" 회색 사나이가 대답했다. 

 "정말 운이 좋았구나." 

 모모는 여전히 말없이, 너무 커서 헐렁한 남자 웃도리를 꼭꼭 여몄다. 추위가 점점 더해 왔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하고 회색 사나이는 엷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넌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구나, 꼬마야." 

 모모는 살그머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갑자기 모든 기쁨이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애당초 기쁨같은 것은 없었던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모모 자신 기쁨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에게 어떤 경고(警告)를 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한참 전부터 너를 열심히 지켜 보고 있었어." 회색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너는 저렇게 값비싼 좋은 인형이랑 노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것 같더구나. 내가 가르쳐 줄까?" 

 모모는 깜짝 놀라 사나이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보다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인형이 느닷없이 꽥꽥거렸다. 

 "자, 이거 봐, 꼬마야." 회색 사나이가 말했다. "인형은 이렇게 혼자서 말까지 하잖니. 이렇게 비싸고 좋은 인형이랑은, 다른 보통 인형하고 노는 것처럼 그냥 놀 수는 없는거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냥 보통으로는 놀 수가 없어. 이 인형이랑 지루하지 않게 놀려면, 인형한테도 뭘 갖다 줘야해. 이거 봐, 꼬마야!" 

 그는 자동차로 가더니 뒤의 짐칸을 열었다. 

 "우선," 그는 말했다. "이 인형은 많은 옷을 필요로 해. 여기, 이를테면 아주 멋드러진 야회복이 있지." 

 그는 야회복을 꺼내 모모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또 진짜 밍크로 된 외투도 있어. 이건 비단 가운, 또 정구복, 스키이복, 또 수영복, 그리고 승마복, 잠옷, 속옷, 또 다른 원피스, 또 하나, 또 다른 것, 또……." 

 그는 모든 옷가지를 모모와 인형 사이로 던졌다. 어느 새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였다. 

 "자," 그는 다시금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걸로 일단 한참 놀 수가 있다. 그렇지, 꼬마야? 그렇지만 그것도 며칠 뒤에는 지루해 질 것 같지 않니? 그래, 그럼 너는 또 인형 몫의 다른 물건을 장만해야 해." 

 그는 다시 짐칸 위로 몸을 굽히더니 물건들을 모모한테 던졌다. 

 "이를테면 여기 진짜 미니 립스틱이랑 분첩이 들어 있는, 뱀 가죽으로 된 정식으로 만든 미니 핸드백이 있어. 여기는 또 미니 카메라, 또 정구채. 이건 진짜로 볼 수 있는 인형 망원경, 여기는 팔찌, 목걸이, 귀걸이, 인형 권총, 비단 스타킹, 깃털 모자, 밀짚 모자, 봄철 모자, 미니 골프채, 미니 수표장, 미니 향수병, 목욕용 파우더, 몸에 뿌리는 향수……." 

 그는 말을 멈추고, 얼이 빠져 버린듯이 온갖 물건과 땅바닥 틈에 끼어 앉아 있는 모모를 탐색하듯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아주 간단해. 이렇게 점점 더 많이 갖고 있어야 해. 그럼 전혀 지루하지를 않아. 혹시, 언젠가는 이 완전한 비비걸이 모든 것을 갖게 되고, 그러면 결국 또 지루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지 않아, 꼬마야. 조금도 걱정할 게 없어. 그래서 여기 또 비비걸에 어울리는 짝이 하나 있어." 

 그리고 그는 짐칸에서 다른 인형을 하나 꺼냈다. 그것은 비비걸과 같은 크기에, 똑 같이 완전한 인형이었는데, 단지 젊은 남자인 점만이 달랐다. 회색 남자는 그 사나이 인형을 완전한 인형, 비비걸 옆에 앉히고는 설명했다. "이건 부비보이야! 이 인형한테도 끝없이 많은 부속물이 있어. 그리고 이 모든 것도 다시 지루해지면 비비걸의 또 하나의 여자 친구가 있어. 이 친구 인형도 꼭 자기한테만 맞는 모든 부속 장비를 갖고 있지. 뿐 아니라 부비보이한테도 짝이 맞는 남자 친구가 있어. 그 친구 역시 수없는 친구, 여자 친구들이 있고……, 알겠지. 결코 지루한 일이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 끝없이 계속 충당이 될 수 있으니까 말야. 네가 갖기를 바라는 건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니까 말야." 

 말을 하면서, 그는 인형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자동차의 짐칸에서 꺼냈다. 그 안에는 물건이 무진장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여전히 꼼짝 않고 앉아서 차라리 겁에 질린듯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모모한테로 몸을 돌렸다. 

 "자," 사나이는 이윽고 입을 떼며 짙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인제 알았니? 이런 인형이랑 노는 법을?" 

 "예." 모모는 이제 추위에 못 이겨 덜덜 떨기 시작했다. 

 회색 사나이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시가를 빨아들였다. 

 "물론 이 예쁜 물건들을 몽땅 갖고 싶겠지? 자 좋다, 꼬마야. 내가 선사를 하지! 전부 가져라. 지금 당장이 아니고, 당연히 하나씩 차례로. 그리고 더 많이, 훨씬 많이. 그것에 대해 네가 뭘 갚을 필요는 하나도 없어. 내가 설명대 준대로 그냥 놀기만 하면 돼. 자, 뭐 할 말이 있니?" 

 회색 사나이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모모에게 미소를 건넸다. 하지만 모모가 아무 말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 보자, 그는 성급하게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너는 친구들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야, 그렇지? 이 예쁜 물건들이 전부 네 것이 되고 언제라도 더 가질 수 있다면, 너는 충분히 심심풀이를 할 수 있게 되겠지, 응? 너도 그랬으면 좋겠지? 이 신기한 인형을 갖고 싶지? 꼭 갖고 싶지, 응?" 

 모모는 어떤 싸움이 자기에게 절박하게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아니, 어느 새 싸움의 한가운데 빠져들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벌어진 싸움인지, 누구를 향한 싸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 낯선 방문객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아까 인형을 대했을 때와 같은 기분에 빠져 들었다. 떠들고 있는 음성만이, 오로지 말만이 들려올 뿐,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모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왜 그러지 응?" 회색 사나이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니? 요새 어린애들은 정말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구나! 이 완전한 인형이 대체 또 뭐가 모자라는지 말해 줄 수 없겠니?" 

 모모는 시선을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 

 "제 생각에는……," 모모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 인형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회색 사나이는 한참 동안 대꾸가 없었다. 그는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정신을 다잡고 냉혹하게 말했다. 

 "그런 건 도대체 문제가 되지 않아." 

 모모가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 사나이는 모모에게 공포를, 특히 그 눈초리에서 뻗어 나오는 차가움으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묘하게도, 왜라고는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로, 그는 모모에게 동정의 마음을 일게 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을," 모모는 말했다. "나는 사랑해요." 

 회색 사나이는 별안간 이빨이라도 쑤시기 시작한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다시 자신을 억제하고 실낱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에는," 그는 곰살궂게 말했다. "우리 한번 정식으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꼬마야, 무엇이 중요한가를 네가 알도록 말이다." 

 그는 회색 수첩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찾아 냈다. "네 이름이 모모지? 응?" 

 모모는 고개를 까딱였다. 회색 사나이는 수첩을 탁 덮더니 주머니에 다시 넣고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모모 옆 땅바닥에 앉았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조그만 회색 시가만을 뿜어대었다. 

 "자, 모모, 내 말 좀 잘 들어 봐라!" 이윽고 그는 입을 떼었다. 

 사실 모모는 지금까지 내내, 귀 기울여 들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이 때까지 모모가 귀 기울여 온 그 어느 누구의 얘기보다도 이 사나이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훨씬 힘들었다. 다른 때는 그야말로 얘기하는 이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낯선 방문객한테서는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가 않는 것이었다. 애를 쓰고 귀를 기울이려 할 때마다, 도대체 거기 아무도 없는 것처럼, 어두운 공허(空虛)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야."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무엇을 성취하느냐, 무엇이 되느냐, 무엇을 갖느냐 하는거야.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 더 출세한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한테는 다른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 오게 마련이야. 친구며, 사랑이며, 명예며, 등등. 너는 그러니까 네 친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우리 한번 냉정하게 그걸 검토해 보자." 

 회색 사나이는 공중에 대고 몇 개의 동그라미를 담배 연기로 뿜어댔다. 모모는 맨발을 치마 밑으로 감추고, 될 수 있는 한 커다란 웃도리 속으로 기어 들었다.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으로," 회색 사나이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네가 있다는 것이, 도대체 너의 친구들한테 무슨 의미가 있니? 친구들한테는 너의 존재가 무슨 쓸모가 있니? 도움이 안돼. 친구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잘 살도록 하는 데 네가 도움이 되니? 분명히 도움이 안돼. 친구들이 시간을 절약하려고 애쓰는 걸, 뒷받침을 해 주니? 그 반대야. 너는 친구들을 모든 일에서 떼어 놓고 훼방꾼 노릇을 하면서 친구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망쳐 놓고 있어! 어쩌면 지금까지 너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랬는지 모르지, 모모 어쨌든 너는, 네가 있는 걸로 네 친구들을 해치고 있어. 그래, 너는 실제로는, 원하지 않는 새에 친구의 적(敵)이 되어 있어! 그리고도 그걸 너는 사랑하는 거라고 말하니?" 

 모모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물을 그런 관점에서 본 적이 모모에게는 지금껏 한번도 없었다. 한 순간, 이 회색 남자가 어쩌면 옳지 않은지 어떤지조차, 모모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네 친구들을 너로부터 보호하려고 하는거야. 네가 진정으로 네 친구를 사랑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을 도와 주렴.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이든 성취하기를 바라고 있어. 우리야말로 그들의 참된 친구인 셈이지. 네가 그들을 중요한 모든 일에서 떼어 놓는 것을 우리는 그냥 가만히 구경만 할 수가 없어. 우리는 네가 그들을 내버려 두도록 배려(配慮)할 참이야. 그래서 너한테 이 예쁜 물건들을 몽땅 선사하는거다." 

 "‘우리’가 누군데요?" 모모는 입술을 덜덜 떨며 물었다. 

 "우리는 시간 저축은행의 사원들이야." 회색 사나이가 대답했다. "나는 외무사원 BLW/553/C호야. 나는 개인적으로 너한테 호의를 갖고 대하는거야. 사실 시간 저축은행은 빈틈이 없어서 어리숙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거던." 

 그 순간, 모모는 문득 베포와 지지가 시간 절약과 전염에 대해 하던 얘기를 상기했다. 

 이 회색 사나이가 그 일과 상관이 있을 것이라는 무서운 예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두 친구가 지금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지금껏 한번도 외로움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모모였다. 하지만 모모는 어쨌든 불안해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온 힘과 용기를 모아, 회색 사나이를 가리고 있는 어둠과 공허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그 사나이는 모모를 곁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모의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사나이는 냉소를 지으며 회색 시가의 꽁초에다 새 시가의 불을 붙였다. 

 "공연히 헛수고 하지 말아." 그는 말했다. "넌 우리와 상대해서 싸울 수가 없어." 

 모모는 풀이 죽었다. "아저씨를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나요?" 모모는 소근거리듯 말했다. 

 회색 사나이는 몸을 구부리며 갑자기 풀이 죽어 어깨를 내려뜨렸다. 그리고 이어서 잿빛 음성으로 대답했다. 

 "너같은 사람은 한번도 대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구나. 정말로 없었어. 사실 나는 굉장히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데 말야. 너같은 사람들이 많다면 우리 시간 은행은 곧 문을 닫고 없어져야 할 판이지……, 뭘 가지고 우리가 더 버틸 수 있겠니?" 

 외무사원은 말을 멈추고 모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꺾을 수 없는 무엇에 맞서 싸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의 얼굴엔 더욱 짙은 잿빛이 드리워졌다. 

 이렇게 그가 다시 입을 떼기 시작했을 때, 그 이야기는 그의 뜻(意志)과 상관없이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그 자신 거기에 아무런 제동을 걸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동시에,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놀란 나머지 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이렇게 하여 모모는 마침내 그의 참된 음성을 들었다. "우리는 알려져서는 안돼." 그의 음성은 멀리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활동을 누구도 알아서는 안돼……. 어느 누구의 기억에도 우리가 남아 있지 않도록 우리는 신경을 쓰고 있어……. 우리가 알려지지 않는 한에서만 우리는 일을 진척시킬 수가 있거든……. 인간의 생애를 시간, 분, 초로 뜯어 빨아 들이는 곤혹스러운 일이지……. 사실 그들이 절약하는 모든 시간은 그들로 보면 잃어 버리는 것이거든……. 우리는 그 시간을 끌어 들이고 있어……. 우리는 그 시간을 저장해……. 우리한텐 그것이 필요해……. 우리는 그것에 굶주려 있어……. 아, 너희들은 몰라, 그것이 뭔지를. 너희들의 시간이라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그걸 알고 있어. 그래서 너희들한테서 철두철미 빨아 들이고 있지……. 우리한텐 그것이 점점 더 필요해……. 더 많이……. 왜냐하면 우리들도 점점 늘어나거던……. 점점 더 많이……점점 더 많이……." 

 이 마지막 한 마디를 회색 사나이는 사뭇 그르렁거리며 뱉어냈다. 하지만 곧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튀어나올 듯한 시선으로 그는 모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마치 마취(痲醉)에서 깨어난듯 정신을 차린 모습이 되었다. 

 "어……, 어찌된 일이었지?" 그는 말을 더듬었다. "네가 내 말을 다 엿들었구나! 내가 병이 들었군! 네가 나를 병들게 했어, 네가!" 

 그리고 나서는 그는 거의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내가 온통 헛소리를 했어. 꼬마야. 잊어 버려라! 너는 나를 잊어야 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잊어 버리듯이! 너도 잊어 버려야 돼! 잊어 버려야 해!" 

 그리고 그는 모모를 움켜쥐고 흔들어 대었다. 모모는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나서 회색 사나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쫓기듯이 사방을 둘러보고 납회색 서류 가방을 꾸려 자동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서 굉장히 괴상한 장면이 벌어졌다. 거꾸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모든 인형이랑 흩어져 있던 온갖 물건들이 사방에서 짐칸으로 날아 들어 가더니 짐칸이 쾅 닫혔다. 그리고 차는 돌멩이들을 튀기며 질주하여 떠나갔다. 

 모모는 그리고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지금껏 들은 이야기를 이해하려 애를 썼다. 서서히 끔찍한 추위가 모모의 골수에서 빠져 나갔고, 그와 비례하여 모든 것이 차차 선명해졌다. 모모는 아무 것도 잊어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모는 회색 사나이의 진짜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모 앞의 메마른 풀밭에서 작은 연기 기둥이 솟아 올랐다. 거기엔 짓눌려진 회색 시가 꽁초가 연기를 내더니 서서히 재(灰)로 변했다. 

 

8  수많은 몽상(夢想)과 몇 안되는 깊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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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오후, 지지와 베포가 왔다. 그들은, 여전히 창백하고 심란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성벽의 그늘에 앉아 있는 모모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모의 곁에 앉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더듬더듬 모모는 겪은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회색 사나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전부 한마디 한마디 되풀이했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베포 노인은 모모를 아주 진지하게 탐색하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의 주름살이 더욱 깊게 파여졌다. 모모가 이야기를 끝내고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반대로 지지는 점점 흥분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이야기를 할 때 격앙(激昻)하면 흔히 그러듯이, 그의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제사, 모모가……"라고 말하며 그는 모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가 일어서야 한다는 경종(警鐘)이 울렸구나! 지금껏 아무도 못 찾아낸 정체를 네가 찾아냈어! 이제 우리는 우리 옛 친구들뿐 아니라, 전 도시를 구하는거야! 우리 셋이, 나, 베포 그리고 너 모모!" 

 그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구세주가 된 자기 앞에서 환호성을 치는 수 많은 군중의 환영(幻影)이 보였다. 

 "그렇다면……"하고 모모가 얼떨떨해서 말했다. "대체 어떻게 일을 할거지?" 

 "무슨 소리야?" 지지는 짜증섞인 말투로 물었다. 

 "내 말은," 모모가 설명했다. "어떻게 우리가 회색 도당을 정복하느냐, 이거야." 

 "아, 그건,"하고 지지가 말했다. "그렇게 구체적인 것까지는 물론 지금으로서는 나도 몰라. 우선 그 방법을 우리가 생각해 내야지.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 내용을 안 지금 우리는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혹시 너 겁을 내고 있는 건 아니니?" 

 모모는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엔 그 자들은 결코 보통 인간들은 아닌 것 같아. 나한테 왔던 그 사람은……, 아무튼 좀 달라 보였어. 게다가 아주 참을 수 없이 추웠어. 그런 사람이 많은 경우엔 분명히 매우 위험할거야. 벌써 무서워." 

 "무슨 소리야!" 지지는 열이 나서 외쳤다. "일은 어쨌건 간단해! 이 회색 도당들은 알려지지 않는 한에서만, 자기네들의 지하작업(地下作業)을 전개할 수 있는거야. 너를 방문한 작자가 자기 입으로 털어놨잖아. 그러니까, 봐! 우리는 다만 그 자들이 알려지도록 노력하면 돼. 그래서, 그 자들을 일단 알게 된 사람들은 기억을 하게 될 테고, 그 자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들을 당장 알아 볼 테니까 말야! 그렇게 되면 그 자들도 도저히 우리를 손아귀에 넣을 수 없게 돼. 우리는 그들에게 난공불락(難攻不落)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모모는 의심쩍다는 투로 물어 보았다. 

 "자명(自明)한 일이야!" 지지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너를 방문한 작자가 그렇게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네 앞에서 줄행랑쳤을 리가 없어. 그 자들은 우리가 무서워 떨고 있어." 

 "그렇지만," 모모가 말했다. "우리가 만일 그 자들을 도저히 찾지 못한다면 그들이 우리 앞에서 완전히 숨어 버릴는지도 모르잖아." 

 "물론 그러기가 십상이지"라고 지지도 동의했다. "그 땐 우리는 그들을 숨어 있는 장소에서 꼬여 내야 해." 

 "어떻게?" 모모가 물었다. "내 생각엔 그 자들은 지독하게 간사하고 꾀가 많은 것 같애." 

 "누워서 떡 먹기야!" 지지는 말하며 웃었다. "우리는 그 자들이 탐내는 먹이로 그들을 잡는거야. 고깃덩이로 쥐를 잡듯이, 시간 도둑은 시간으로 잡는거야. 어쨌건 우리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있으니까! 예컨대, 네가 미끼로 앉아서 그들을 유혹해야 할는지 몰라. 그래서 그자들이 나타나면 나랑 베포가 숨어 있다가 뛰쳐 나와 그 자들을 때려잡는거야." 

 "하지만, 그 자들이 나를 벌써 아는걸"하고 모모는 이의를 제기했다. "내 생각엔 그 사람들이 그런 꼬임에 빠져들 것 같지 않아." 

 "좋아." 지지는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성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또 다른 방법을 쓰기로 하지. 회색 사나이는 하여간 시간 저축은행에 관해 뭐라고 말했지. 그건 무슨 건물이겠지. 그 건물은 시내 어디엔가 있을거야. 그것만 찾아내면 되는거야. 그거야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을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그 건물은 아주 유별난 건물일 테니까 말야. 창문도 없고 섬뜩한 회색 건물, 콘크리트로 된 무지무지하게 큰 금고!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아. 그걸 찾아내면 우리는 안으로 들어 가는거야. 우리 모두 제가끔 두 손에다 묵직한 피스톨을 들고 '당장 훔쳐 간 시간을 내놨!'하고 난 소리치겠어……." 

 "그렇지만 우리한텐 피스톨같은 게 없잖아." 모모가 걱정스럽게 지지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럼 피스톨 없이 그냥 그렇게 하지 뭐." 지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그 자들은 오히려 더 놀랄거야. 우리가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자들은 공포에 질리게 될 텐데 뭐." 

 "어쩌면 이 일에 좀더 우리 편이 많으면 좋을는지 모르겠어." 모모가 말했다. "우리 셋뿐이 아니고. 내 말은, 다른 친구들도 같이 찾아면, 시간 저축은행을 한결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야."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지지가 대꾸했다. "우리의 옛 친구들을 모두 동원하면 될거야. 그리고 요새 매일 오는 많은 어린이들도. 우리 셋이 당장 나가서 눈에 띄는대로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전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들도 다시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고 하고. 우리 모두 내일 오후 세 시 여기서 만나 대집회(大集會)를 엽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당장 길을 나섰다. 모모는 이쪽으로 베포와 지지는 저쪽으로. 

 두 사람이 한참 길을 걸어 왔을 때, 여지껏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베포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 봐, 지지"하고 그는 입을 떼었다. "나는 걱정이 돼." 

 지지는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뭐가요?" 

 베포는 친구를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는 모모를 믿어." 

 "그런데요?" 지지는 의아하게 물었다. 

 "내 말은,"하고 베포가 말을 이었다. "모모가 우리한테 들려준 이야기가 참말이라고 믿는다는거야." 

 "좋아요, 그런데요?" 베포의 의도를 알지 못해 지지는 되물었다. 

 "이 봐." 베포가 설명했다. "모모가 얘기한 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이 일이 정말 무슨 비밀 범죄단체랑 상관된 것이라면, 그런 상대를 놓고 섣불리 싸움을 벌여서는 안된다는 얘기야, 알아 듣겠어? 우리가 별 생각 없이 그 자들을 자극해 놓으면 모모가 곤란한 사정에 빠질 수 있어. 우리들이야 문제의 대상으로 거론하고 싶지 않아. 다만 우리가 어린아이들까지 끌어 들이는 경우, 어쩌면 아이들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될는지 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말 신중히 생각해야 해." 

 "아, 원." 지지는 큰 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아저씨는 항상 걱정이 앞서지요!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하면, 그만큼 더 좋은 거라니까요." 

 "내가 보기에는," 베포는 심각하게 대답했다. "너는 모모가 들려준 이야기가 참말이라는 것을 전혀 믿는 것 같지가 않구나." 

 "대체 참말이라는 게 뭔데요?" 

 지지가 대답했다. "베포 아저씨, 아저씨는 환상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온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이고 우리는 그 이야기 안에서 공연을 하는 거예요. 나도 믿어요, 아저씨. 모모가 들려 준 얘기를 전부 믿어요. 아저씨랑 꼭 같이요!" 

 베포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는지를 몰랐다. 하지만 지지의 대답으로 그의 걱정이 한 치도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헤어졌다. 친구와 어린이들에게 내일의 회합을 전해 주기 위하여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지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베포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날 밤, 지지는 도시의 구세주(救世主)로서의 앞날의 명성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는 연미복 차림의 자기 자신과 베포의 모습, 흰빛 비단옷을 입은 모모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 세 사람 모두에게 황금 훈장이 걸리고 월계관이 씌어졌다. 웅장한 음악이 울렸다. 시(市)에서는 그들의 구세주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인류 사상 유례없는 성대하고 끝없이 긴 불꽃 행렬을 마련했다. 

 같은 시간에 베포 노인은 잠자리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래오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사건 전체의 위험스러움이 더욱 분명해졌다. 물론 그는 지지와 모모만을 파멸로 치닫게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 결과가 어찌 되든간에 자기 역시 같이 갈 것이었다. 하여튼 그는 최소한 그들을 붙들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오후 세시, 원형극장의 옛터는 수많은 어린이의 함성과 재잘거림으로 메아리졌다. 유감스럽게도 옛 친구들 가운데 어른들은 오지 않았다(물론 베포와 지지는 예외였지만). 하지만 가까이서 멀리서 온 어린이들, 가난한 어린이와 부자집 어린이들, 잘 차려 입은 어린이와 남루한 어린이, 그리고 크고 작은 어린이들이 어림잡아 오륙십명 모였다. 그 중에는 마리아 소녀처럼 꼬마 동생을 데리고 온 어린이가 꽤 있었다. 손목에 이끌려 또는 팔에 안겨 따라 온 꼬마 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이 엄청난 모임을 구경하고 있었다. 프랑코, 파올로, 마시모도 물론 거기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 최근에 원형극장에 오기 시작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물론 여기서 벌어지는 일에 비상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왔던 소년도 나타났다― 물론 이번엔 라디오를 가져 오지 않았다. 그 소년은 모모 옆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오늘에사 처음으로 자기 이름이 클라우디오이며 이 일에 같이 낄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마침내 이제는 더 올 사람이 없다고 여겨지자, 여행안내원 지지가 일어서서 커다란 손짓으로 조용히하라고 명령했다. 재잘재잘 주고 받던 소리가 뚝 그쳤다. 돌로 이뤄진 원형의 광장 안에는 기대에 찬 침묵이 번져 나갔다. 

 "사랑하는 친구들!" 지지는 우렁찬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무엇때문에 우리가 모였는지, 너희들 모두 대강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 비밀집회에 초대받을 때 이미 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온갖 수단을 다해 아무리 끝없이 시간을 절약해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한테 점점 시간이 없어져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들어 봐라. 이렇게 절약해 놓은 시간은 정작 사람들한테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거야.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모모가 그걸 찾아냈어! 사람들은 이 시간을 문자 그대로 시간 도둑들한테 도둑맞고 있는 거란다! 이 끔찍한 범죄단체의 활동을 중지시키기 위해, 바로 너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 너희 모두가 기꺼이 협조할 마음만 있으면 사람들한테 덮쳐 온 이 도깨비도 단숨에 일망타진될거야. 이 일을 위해 싸우는 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니?" 

 그가 말을 중단하자 어린이들은 박수를 쳤다. 

 "이 일을 어떻게 착수할까에 대해서는 나중에 의논하겠다." 지지는 말을 이었다. "먼저 그 작자들 중의 한 놈을 어떻게 만났고, 그 놈이 뭐라고 털어 놨는지 모모의 얘기부터 들어 보기 바란다." 

 "잠간"하고 베포 노인이 말하며 일어섰다. "들어 봐라, 얘들아! 나는 모모가 말하는 데 반대야. 그래서는 안돼. 모모가 얘기를 하면, 모모랑 너희 모두가 위험을 처하게 돼……." 

 "그래두요!" 몇 아이들이 소리쳤다. "모모 얘기를 듣겠어요!" 

 다른 아이들도 합세하여 나중엔 전부가 합창을 하며 외쳤다. "모모! 모모! 모모!" 

 베포 노인은 주저 앉아 그의 조그만 안경을 벗고 지친듯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모모는 당황해서 일어섰다. 어느 편의 뜻을 따를지, 베포를 따라야 할지 아이들을 따라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모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잔뜩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모모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 침묵이 흘렀다. 

 모모가 보고를 하는 동안 모두가 조금씩 불안한 기분에 싸였다. 아이들은 시간 도둑을 그렇게까지 무시무시하게 상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웬 꼬마 동생 하나가 울음보를 터뜨렸다가 곧 달래어졌다. 

 "자, 그럼," 지지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너희들 중에 누가 우리랑 함께 이 회색 도당에 대항하여 싸울 용기를 갖고 있니?" 

 "왜 베포 할아버지는 모모가 겪을 일을 얘기하지 못하게 말렸나요?" 프랑코가 물었다. 

 "할아버지 생각은," 지지는 어린이들의 기분을 북돋아 주려는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색 도당들이 자기네 비밀을 간파한 사람을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추적할 것이라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장담해. 그 자들의 비밀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들에 대해 저항력을 갖고 있어서 다시는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 가지 않게 된다고 봐. 그건 분명한 일이야! 그렇지 않아요? 베포 아저씨!" 

 하지만 베포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린이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명백해." 지지는 다시 입을 떼었다. "우리는 지금 좋건 나쁘건 힘을 모아야 해! 우리는 신중해야 하겠지만 겁을 먹어서는 안돼. 그래서 다시 한번 묻는데,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협조하겠니?" 

 "저요!" 클라우디오가 큰 소리로 대답하며 일어섰다. 소년은 약간 창백한 모습이었다. 

 클라우디오의 선창(先唱)에 대해 처음에는 주저하는 빛으로, 그리고는 점차 자신있게 다른 아이들도 뒤따르더니, 마침내는 그곳의 모든 어린이가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자, 베포 아저씨!" 지지는 어린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대해 아저씨는 어쩌시겠어요?" 

 "좋다." 베포 노인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나도 돕구말구." 

 "자," 지지는 다시 어린이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해 보자. 누구 무슨 제안이 없니?"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안경잡이 소년 파올로가 물었다. "그런데 그 자들은 어떤 수를 쓰나요? 내 말은, 대체 어떻게 실제로 시간을 훔칠 수 있나요? 대체 어떻게 하지요?" 

 아무도 그 대답을 몰랐다. 

 원형 돌계단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리아가 꼬마 동생 데데를 팔에 안은 채 일어나서 말했다. "혹시 그건 전자(電子)같은 게 아닐까요? 전자는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기계로 기록할 수 있지요. 텔리비젼에서 나는 본 적이 있어요. 어쨌건 요새는 어떤 일에든지 전문가가 있잖아요."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계집애 목소리를 가진 뚱보 소년 마시모가 소리쳤다. "사진을 찍으면 모든 게 필름에 찍히지요. 그리고 녹음을 하면 모든 게 녹음 테이프에 녹음이 되구요. 어쩌면 그 자들은 시간을 빨아 들이는 기계를 갖고 있을는지 몰라요. 시간이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만 안다면 우리는 그 테이프를 되돌릴 수가 있을 테고 다시 시간을 갖게 될 게 아녜요!" 

 "어쨌든," 파올로가 입을 떼며 코 위의 안경을 치켜올렸다. "우리는 제일 먼저 우리를 도와 줄 과학자를 찾아야 해요. 안 그러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너는 언제든지 과학자만 들먹이더구나!" 프랑코가 외쳤다. "과학자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어! 그 분야에 밝은 과학자를 만났다고 쳐도, 그 사람이 시간 도둑하고 한 패인지 어떻게 알겠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두 손 들고 호랑이굴에 들어 가는 셈이지!" 

 그것은 일리 있는 항의였다. 

 이번엔 눈에 띄게 잘 차려 입은 소녀가 일어 서서 말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어림도 없어요!" 프랑코가 항의를 했다. "경찰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이건 아무튼 보통 도둑들이 아니거든요! 경찰이 벌써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건 경찰이 무력(無力)하다는 얘기가 되고, 경찰이 이 놈들의 소굴에 대해 전혀 깜깜 무소식이라면, 그것 역시 이래저래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되는 거예요! 내 생각엔 그래요." 

 하릴없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어떤 조치이건 우리는 취해야 해요." 파올로가 이윽고 말했다. "우리들이 이렇게 힘을 합치는 낌새를 시간 도둑들이 눈치채기 전에, 되도록 빨리요." 

 이번엔 지지가 일어섰다. 

 "얘들아,"하고 그는 입을 떼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해 곰곰 생각을 해 봤다. 수백가지 계획을 세웠다가는 팽개치고, 결국 한 가지 묘안을 찾아 냈는데, 이 방법이면 틀림없이 목표에 이를 수 있을거야. 너희 모두가 협조해 준다면! 나는 너희들 중에 더 좋은 안(案)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우선 일단 들어 보려고 했을 뿐이야.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얘기하지." 

 그는 말을 멈추고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십명이 넘는 어린이의 얼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청중 앞에 서 보기는 참으로 오랫만이었다. 

 "이 회색 도당의 힘은," 그는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알려지지 않고 몰래 일할 수 있는 데서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그들을 무력(無力)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지름길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들에 관한 진상(眞相)을 알게 하는 거야. 그럼 그걸 어떻게 하면 되겠니? 우리는 대대적인 어린이 시위를 벌이는거야! 플래카드와 포스터를 그려서 그걸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거야.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거야. 그래서 전 도시 사람을 우리가 있는 이 원형극장으로 초대해서 그들에게 진상을 설명해 주는거야. 사람들 사이에 굉장한 법석이 일어나겠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이리로 물밀듯이 몰려 올거야! 이렇게 끝도 없이 많은 사람의 물결이 여기에 모여 들고 나면, 우리는 그 무서운 비밀을 털어 놓는거야!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엔 세계가 단숨에 변해 버리겠지! 이젠 누구한테서도 시간을 훔쳐 갈 수 없게 되겠지. 누구나가 자기가 갖고 싶은 만큼 시간을 갖게 될거야. 이제부터는 시간이 충분히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 일은, 얘들아, 우리가 뜻만 같이 하면 힘을 합쳐 해 낼 수 있는 일이야. 그렇게 하겠니?" 

 떠들썩한 환호성이 대답이었다. 

 "그럼 우리가 전 도시 사람을 다음 일요일 오후 옛 원형극장으로 초대하기로,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결정했음을 확인한다." 지지는 연설을 끝막음했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는 우리의 계획에 대해 엄격히 침묵을 지켜야 해. 알겠니? 자, 그럼 얘들아, 일을 시작하자!" 

 그날과 다음 며칠 동안 폐허의 옛터에서는 비밀리에 열성적인 대공사가 벌어졌다. 종이와 물감이 가득 든 통들, 붓과 아교, 판자와 마분지, 나무 꼬챙이, 그리고 그밖에 필요한 모든 것이 날라져 왔다(어디서 어떻게 날라져 왔는지는 묻지 말기로 하자). 그리고 한쪽에서는 포스터와 플래카드, 푯말을 제작하는 동안, 글을 잘 쓰는 어린이들은 인상적인 문귀를 생각해 내어서 그 위에 보기좋게 그려 넣었다. 

 그것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격문(檄文)이었다. 


- 시간저략? 누구를 위한 거신가? -

? 왜 ? 여러분은 시간이 업나요 ?

우리어린이들이 여러분께 알림니다!

모두들 오십시요 다음 월요일 6시 대집홰 옛 원녕극장으로.


오십시요 옛 원녕극장.

일요일 여섯시


여러분들의 어린이들이 큰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들은 시간을 도둑맞고 있어요 !


주의 !

괭장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시간에<- 관한 일입니다.

그것은 큰 비밀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폭노하겠어요 !


 

 그리고 모든 푯말마다 초대 장소와 시간이 쓰여졌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어린이들은 지지와 베포, 모모를 선두로 하여 줄을 맞춰 섰다. 그리고는 포스터랑 푯말들을 들고 길게 일렬 종대로 서서 도시를 향해 행진했다. 게다가 그들은 양철 뚜껑과 피리로 법석을 떨며 구호(口號)같은 합창을 하며, 지지가 이번 거사를 위해 지어 낸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들으시라, 여러분, 우리의 이야기를,

열두시 오분 전 경종이 울렸거늘.

부디 깨어나 정신차리시라,

여러분의 시간이 도둑맞고 있으니.


들으시라, 여러분, 우리의 이야기를,

이젠 괴로움에서 헤어 나오시기를.

일요일 세시, 오셔서 들으시라,

여러분의 자유를 되찾게 되리니! 


 이 노래는 물론 더 많은 절(節)로 이어져 있었다. 도합 스물 여덟 절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다 모두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몇 번인가 이 행렬이 교통을 방해하자, 경찰이 끼어 들어 어린이들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장소에서 다시 모여 처음부터 시작을 했던 것이다. 그 밖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토록 기를 쓰고 주의를 했는데도, 아무 데서도 회색 도당을 만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행렬을 본 어린이들, 지금껏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전혀 몰랐던 어린이들이, 합세하여 같이 행진을 하였다. 그래서 어린이의 수는 수백, 마침내는 수천에 이르게 되었다. 대도시의 도처에서 어린이들이 거리를 누비며 긴 행진을 하면서, 세상에 변화를 가져다 주리라는 중요한 집회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9  실행되지 않은 좋은 모임, 실행된 좋지 않은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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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시간은 지나갔다. 

 그 시간은 지나갔고, 초대받은 이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바로 이 일에 가장 관련이 깊은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번 행렬에 대해 거의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해는 어느새 지평선에 뉘엿뉘엿 넘어 가며 자줏빛 구름바다 속에서 붉고 커다랗게 떠 있었다. 마지막 햇볕이 몇 시간 전부터 수백명의 어린이가 앉아 기다리고 있는 옛 원형극장의 제일 꼭대기 계단을 아직 비춰 주고 있었다. 웅성대는 소리며 즐거운 재잘거림은 이미 들을 수 없었다. 모두가 말없이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그림자가 순식간에 길어졌다. 곧 어두워질 기세였다. 

 어린이들은 떨기 시작했다. 추워졌기 때문이었다. 멀리 교회 시계탑이 여덟번을 쳤다. 이제, 의문의 여지없이 일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처음 몇 명의 어린이들이 일어서더니 소리 없이 빠져나가 버리자, 다음 몇몇이 뒤따랐다. 아무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실망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마침내 파올로가 모모에게 와서 말했다. "기다려도, 소용 없겠어, 모모. 이제 올 사람은 없어. 잘 자, 모모." 

 그리고 가버렸다. 

 다음엔 프랑코가 모모에게 와서 말했다. "이렇게 된 것, 어떻게 할 수 없지 뭐. 어른들한테 더 이상 기대를 할 필요가 없어. 바로 이번에 본 셈이지. 사실 나는 벌써부터 어른들을 불신(不信)해 왔지만 이제부턴 도대체 어른들하고 상관을 안 하겠어." 

 그리고 프랑코도 갔고 다른 아이들도 소년을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깜깜해지자, 다른 나머지 아이들도 희망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모모와 베포와 지지만이 남았다. 

 얼마 후 도로청소부 노인도 일어섰다. 

 "할아버지도 가세요?" 모모가 물었다. 

 "가야 해." 베포 노인이 대답했다. "특별 근무가 있어." 

 "밤중에요?" 

 "그래, 시간외(時間外) 근무로 쓰레기 하치장에 배치를 받았어. 지금 그리로 가야해."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인데요! 도대체 지금껏 그런 적이 없었잖아요!" 

 "없었지. 그렇지만 지금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받았어. '시간외'라고 말하더군. 안 그러면 일을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래. 인원 부족이라든가, 그런 것 때문이야." 

 "유감이에요." 모모가 말했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여기 계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래, 지금 가야하는 게 나로서도 정말 싫어." 베포가 말했다. "그럼, 내일까지 안녕!" 

 그는 삐꺽대는 자전거에 훌쩍 올라 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지는 나직이 구슬픈 곡조로 휘파람을 불었다. 지지의 휘파람 소리는 퍽 듣기 좋았고, 모모는 그 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지지가 멜로디를 뚝 끊었다. 

 "나도 가야겠어!" 그는 말했다. "오늘이 일요일이잖아. 그럼 나도 야경(夜警)을 해야 해! 그게 요즘의 내 새 직업이라는 걸 너한테 말하지 않았니? 하마터면 잊어 버릴 뻔했어." 

 모모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상해 하지 말아." 지지가 말을 이었다. "우리 생각대로 계획이 들어맞지 않은 것 말야. 그렇게 되리라고 상상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어쨌듯―결국은 그것도 재미있었어! 성대한 모임이었지." 

 모모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는 위로하듯이 모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 모모. 내일이면 모든 것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거야. 우리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자, 새로운 이야기를, 응?" 

 "우리의 일은 이야기가 아니었어." 모모가 나직이 말했다. 

 지지는 일어섰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 얘기는 내일 계속하자, 알겠니? 나는 그만 가 봐야겠어. 어쨌건 벌써 시간이 늦겠어. 또 너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났잖아." 

 그리고 그는 구슬픈 가락을 휘파람 불면서 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모모는 커다란 원형 돌계단 한가운데, 혼자 앉아 있었다. 

 별 없는 밤이었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야릇한 바람이 일었다. 세찬 바람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불며 유난스레 추위를 몰아 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잿빛 바람이었다. 

 이 대도시와 뚝 떨어진 바깥 쪽에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이 솟아 있었다. 그것은, 매일처럼 대도시에서 버려지는 종이 상자, 플라스틱 쓰레기, 낡은 메트리스, 양철통, 깨진 그릇 조각, 잿(灰)더미 등등 옷갖 잡동사니들로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 쓰레기들은 차례로 거대한 소각로(燒却爐)로 이동되기까지 여기서 대기 중이었다. 

 한밤이 이슥하도록 베포 노인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헤드라이트를 켠 채 길게 줄지어 서서 쓰레기 짐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짐차들로부터 쓰레기를 삽으로 퍼 내리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짐차를 처리했는데도 연방 더 많은 짐차들이 어느새 다시 줄 뒤에 와서 서 있곤 했다. 

 "서두르시오, 여러분!" 끊임없이 명령이 떨어졌다. "빨리, 빨리! 안 그러면 도저히 끝이 안나요!" 

 베포는 끊임없이 삽질을 했다. 드디어 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찰삭 달라 붙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사실 베포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또 애당초 별로 건장한 체격이 못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지쳐서 구멍 뚫린 대야를 엎어 놓고 그 위에 앉아 한숨을 돌리려고 하였다. 

 "어이, 베포!" 동료 중의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집으로 가네. 자네는 안 가려나?" 

 "잠간만." 베포는 말하며 아픈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어디가 불편하시오? 노인장." 다른 동료가 물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베포는 대답했다. "먼저들 가시오. 나는 잠간만 좀 쉬어야겠소." 

 "자, 그럼." 다른 이들은 소리쳤다. "밤새 안녕히…….!" 그리고 그들은 떠나갔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다만 쓰레기더미 속 여기저기서 쥐새끼들이 쌀쌀거리면서 이따끔 찍찍 소리를 냈다. 베포는 두 팔에 턱을 괸 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문득 한줄기 찬 바람결이 그의 잠을 깨웠다. 그는 위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그의 의식은 말똥말똥해졌다. 

 거대한 쓰레기 산 위에는 온통 고급 양복을 갖춰 입은 회색 도당들이 중산모자를 머리에 쓰고 납회색의 서류 가방을 손에 들고 작은 회색 시가를 입에 문 채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부동 자세로 쓰레기 더미의 맨 꼭대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일종의 판사석(判事席)같은 것이 차려져 있었고, 그 뒤로 그밖의 다른 일당과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세 사람의 회색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처음 순간, 베포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발각될 것이 겁이 났었다.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여기는 그가 있어서는 안 될 장소임이 분명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 회색 도당들이 귀신에 홀린듯이 판사석에만 시선을 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시 그 자들은 베포를 볼 정신적 여유가 없음에 틀림없었다. 또는 기껏해야 베포를 무슨 버려진 쓰레기쯤으로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베포는 숨을 죽이고 앉아 있기로 작정했다. 

 "외무사원 BLW/553/C 호는 재판석 앞으로 출두하라!" 꼭대기 재판석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나이의 음성이 정적 속에 울렸다. 

 이 출두 명령은 아래쪽에서 다시 한번 뇌여졌고 두번째의 메아리처럼 멀리까지 울려퍼졌다. 그러자 회색 도당들이 길을 열어 주었고 그 사이로 한 회색 사나이가 천천히 쓰레기 더미로 올라갔다. 그 사나이가 다른 도당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유일한 점은, 얼굴의 회색이 거의 백지장처럼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재판석 앞에 섰다. 

 "당신이 외무사원 BLW/553/C 호요?" 가운데 사나이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시간 저축은행을 위해 일해 왔소?" 

 "제가 생성된 이후로." 

 "그거야 자명한 얘기요. 그런 쓸데없는 진술은 생략하시오! 당신은 언제 생성되었소?" 

 "십일년, 석달, 엿새, 여덟 시간, 삼십이분, 그리고 이 순간으로 꼭 십팔초 전입니다." 

 이 문답은 낮은 음성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게다가 먼 데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상스럽게도 베포 노인은 한마디 한마디를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소?" 가운데 사나이가 신문을 계속했다. "오늘 이 도시의 상당수의 어린이들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여 도시의 모든 사람을 초대하여 감히 우리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하는 엄청난 계획을 세웠었다는 사실을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외무사원은 대답했다. 

 "이 어린아이들이," 판사는 냉혹하게 신문을 계속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정체와 활동 내용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실 수 있겠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외무사원은 대답했다. "다만 여기서 저의 소견 진술이 허용된다면, 이 사건 전체를 실제 이상으로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으시도록 재판관 제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잘 것 없는 어린이들의 장난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지 사람들한테 시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집회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데 간단히 성공했음을 사료(思料)하십사고 간청드립니다. 그렇지만 설사 우리가 그 일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해도, 어린애들은 사람들에게 어린애식의 도둑 이야기나 전해 주는 것 이외의 딴 짓은 할 수 없었으리라는 걸, 저는 장담합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회를 열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지 않았나 싶군요. 그래서……." 

 "피고!" 가운데에 앉은 사나이가 날카롭게 말을 중단시켰다. "피고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계시오?" 

 외무사원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물론입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피고는 지금," 재판관은 말을 이었다. "인간들의 법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고와 같은 회색 인간의 법정에 있는 것이오. 우리에겐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고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데도 어째서 거짓말을 하려 드는거요?" 

 "그것은……직업상의 습관입니다." 피고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린이들의 계획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재판관은 말했다. "간부들의 판단에 맡겨두시오. 사실 당신 자신도, 피고, 바로 이 어린아이들만큼 우리의 사업에 위험한 존재는 다른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피고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동의를 했다. 

 "어린이들은," 재판관은 설명했다. "우리들에게 맞설 만한 적(敵)이오. 어린이들이 없다면, 인류는 벌써 오래 전에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을 것이오. 다른 어떤 인간들보다도 어린애들이야말로 시간 절약을 할 줄 모른단 말이오. 그래서 우리의 엄격한 법 중의 하나가 '어린이들은 최후의 순서로'라는 것이오. 당신은 이 법을 알고 있었소? 피고." 

 "잘 알고 있습니다, 재판관님."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가진 명백한 증거에 의하면," 재판관은 말을 이었다.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반복해서 말하지요,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어린아이하고 대화를 나누고, 게다가 우리에 관한 진짜 내용까지 누설했단 말이오. 피고, 당신은 혹시 이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누구였는 줄 아시오? 

 "본인이었습니다." 외무사원 BLW/553/C 호는 완전히 기가 죽어서 대답했다. 

 "그럼 어쩌자고 피고는 그렇게 우리의 엄격한 법에 저촉되는 일을 저질렀소." 재판관은 계속 추궁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피고는 변명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우리 일을 이만저만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시간 저축은행을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신의 의도같은 건 우리한테 흥미가 없소." 재판관은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결과뿐이오. 이번 경우에 있어서 결과란, 피고, 우리의 시간에 이득을 가져 오기는커녕, 당신은 그 꼬마한테 우리의 중대하기 이를 데 없는 몇 가지 비밀까지 누설했소. 인정하시오, 피고?" 

 "인정합니다." 외무사원은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유죄(有罪)를 고백하는 것이지요?"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재판관님, 제가 정신이 빠져 버린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상을 참작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아이가 귀 기울려 듣는 태도로 인하여 내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저절로 우러나와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만, 맹세코 그랬습니다." 

 "당신의 변명같은 건 우리에게 흥미가 없소. 정상 참작이란 우리에겐 해당이 안되오. 우리의 법은 범(犯)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떠한 예외도 허용치 않소. 어쨌든 우리는 이 이상스러운 어린이를 데려 와야겠소. 이름이 무엇이오?" 

 "모모." 

 "남자애요, 계집애요?" 

 "조그만 계집애입니다." 

 "거주지는?" 

 "원형극장의 옛터에서 삽니다." 

 "좋소." 모든 것을 수첩에다 기입해 넣고 재판관은 말을 이었다. "이 어린이가 다시는 우리를 해롭게 하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좋을 것이오, 피고. 우리는 무슨 수단을 써서도 그렇게 되도록 하겠소. 형의 집행을 즉결하면 그것이 피고에게도 위안이 되겠지요." 

 피고는 와들와들 떨기 시작한다. 

 "형의 언도가 어떻게 내려졌습니까?" 그는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재판관 뒤의 세 사나이는 서로 고개를 맞대고 무언가를 수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가운데 사나이는 다시 피고를 향해 선고했다. 

 "외무사원 BLW/553/C 호에 대해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형을 언도한다. 피고의 죄는 대역죄(大逆罪)임이 판명되었다. 피고 자신도 본인의 죄를 자백하였다. 우리의 법에 따라 즉각 그에게서 모든 시간을 압류할 것은 언도한다." 

 "너그러운 사면(赦免)을!" 피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옆에 서 있던 다른 두 회색 사나이가 그에게서 납회색의 서류 가방과 작은 시가를 빼앗았다. 

 그러자 참으로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선고를 받은 피고가 시가를 빼앗긴 순간, 그는 순식간에 점점 투명한 인간으로 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비명도 점점 가느다랗고 조그맣게 들려 왔다. 그렇게 그는 선 채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문자 그대로 무(無)로 소멸해 버리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 순간에는 몇 개의 잿가루가 원(圓)을 그리며 바람에 회오리쳐지는가 싶더니, 그것조차 사라져 버렸다. 

 법정에 앉아 방청을 하던 모든 회색 도당들도 말없이 멀어져 갔고 곧 어둠이 그들을 삼켜 버렸다. 다만 회색 바람만이 황량한 쓰레기 하치장 위로 불고 있었다. 

 도로청소부 베포는 여전히 꼼짝 않고 앉아서 피고가 사라져 버린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얼음 덩어리로 얼어 붙었다가 이제 서서히 다시 녹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는 회색 도당의 존재를 실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알게 된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아득히 먼 데의 탑시계가 자정을 쳤다―꼬마 모모 역시 여전히 옛터의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모모는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기다린다고는 꼬집어 말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모모는 무엇인가 기다릴 것이 있는듯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껏 잠자러 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문득 무엇인가 맨발을 살그머니 건드리는 감촉이 있었다. 모모는 몸을 굽혔다. 정말 칠흑처럼 깜깜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거북이 한마리가 모모의 눈에 띄었다. 거북이는 머리를 곧추 세우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며 모모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거북이의 지혜로운 새까만 두 눈은 막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듯 다정하게 반짝였다. 

 모모는 거북이한테로 납작 몸을 굽히고는 손가락으로 거북이의 턱 밑을 쓰다듬었다. 

 "자, 너는 대체 누구니?" 모모는 소근소근 물었다. "고맙다. 너라도 나를 찾아 주어서, 거북아. 대체 나한테 뭘 하러 왔니?" 

 이제사 모모가 알아 본 것인지, 또는 사실상 지금 이 순간에 보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문득 거북이의 딱딱한 등 위에 뿔판의 무늬로 이뤄진 것같은 몇 개의 문자가 어렴풋이 빛을 내며 나타났다. 

 "같이 가자!" 모모는 한참만에 글자를 해독했다. 

 모모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날더러 하는 말이니?" 

 하지만 거북이는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걸음 가다가 멈추더니 모모를 뒤돌아 보았다. 

 "거북이는 정말 나를 두고 말했구나!" 모모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일어 서서 거북이를 따랐다. 

 "그냥 가기만 해!" 모모는 나직이 말했다. "내가 따라 갈게." 

 종종 걸음으로 한발짝 한발짝 모모는 거북이를 뒤쫓아 갔다. 거북이는 느릿느릿, 아주 느림보로 원형 돌계단을 빠져 나와서 대도시로 가는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10  흥분한 추적(追跡)과 침착한 도주(逃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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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포 노인은 삐꺽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달렸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회색 재판관의 말이 여전히 그의 귀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이상스러운 어린이를 데려와야겠소……. 이 어린이가 다시는 우리를 해롭게 하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좋을 것이오, 피고……. 우리는 무슨 수단을 써서도 그렇게 되도록 하겠소……."

 모모가 극도의 위험에 빠져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당장 모모한테로 가서 회색 도당을 조심하라고 일러 주고, 그들로부터 모모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록 그 자신도 보호할 방법을 모르고 있었지만. 하지만 방법이야 어떻게든 떠오를 것이다. 베포는 페달을 밟았다. 그의 은발(銀髮)이 바람에 펄럭였다. 원형극장으로 이르는 길은 아직도 아득했다.


 폐허의 옛터는 사방을 에워싸고 서 있는 수많은 날씬한 회색 승용차들의 헤드라이트로 눈부시게 밝혀져 있었다. 한 떼의 회색 도당들이 잔디 덮인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며 구석구석을 샅샅히 뒤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모모의 방으로 통하는 성벽의 구멍까지 발견해 냈다. 몇 사람이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가 침대 밑을 굽어보고, 심지어는 쌓아 올린 부뚜막 속까지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기어 올라와 고급 회색 양복을 탁탁 털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망쳐 버렸군요." 한 사나이가 말했다.

 "괘씸한데." 다른 자가 말했다. "어린아이가 밤 중에 얌전히 자지 않고 싸돌아다니다니."

 "영 기분이 언짢군요." 세번째 사나이가 단호히 말했다. "누구인가 제때 귀띔을 해 준 것이 분명해요."

 "그럴 리가 없소." 첫번째 사나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자는 우리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미리 알았다는 얘기가 되지요!"

 회색 도당들은 얼이 빠진듯 서로 쳐다보았다.

 "사실상 꼬마가 누구인가 한 패거리의 귀띔을 받았다면"하고 세번째 사나이가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제안했다. "분명코 이미 이 근처에서 새어나갔소. 그렇다면 여기서 더 뒤진다는 건 결국 시간낭비밖에 안됩니다."

 "무슨 더 좋은 수가 있소?"

 "내 생각으로는 즉각 중앙회에 보고를 해야할 것 같군요. 그래야 중앙에서도 대부대를 증원(增員)해서, 수배할 테니까요."

 "중앙회에서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이 주변을 과연 철저히 수색했는가 물어 볼 것이오. 당연한 일이지만요."

 "자 그럼," 첫번째 회색 사나이가 말했다. "일단 주변을 샅샅히 뒤집시다. 그렇지만 그러는 동안 이 꼬마가 한 패거리의 도움이라도 받고 있다면, 우리로서는 결국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는 결과가 되겠지요."

 "웃기는 얘기요!" 다른 사나이가 사뭇 화를 내며 큰 소리를 했다. "그런 경우엔, 중앙회에서 언제라도 즉각 대부대의 인원으로 수배할 수 있소. 결국 기동(機動)이 가능한 전 외무사원이 이 추적에 참여하게 되겠지요. 어린애가 우리의 망을 빠져 나갈 바늘 구멍만한 기회라도 주면 안돼요! 그럼, 일을 시작합시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소."

 이날 밤, 이웃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왜 밤새도록 자동차가 질주하는 소음이 그치지 않았는지, 이상스레 생각하였다. 보통 때에는 큰 도로에서만 들려 오던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심지어는 좁디좁은 골목길과 우툴두툴하기 이를 데 없는 자갈길에 이르기까지, 새벽이 되도록 시끄러웠다. 모두가 한 잠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러한 즈음, 꼬마 모모는 거북이의 안내를 받아 큰 도시를 천천히 걸어 가고 있었다. 도시는 이토록 깊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않고 있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떼를 지어 혼잡스럽게 허겁지겁 달려가며 참을성 없이 서로를 밀쳐내고 욕지거리를 주고 받거나, 끝없는 일렬종대(一列縱隊)로 종종 걸음을 치고 있었다. 차도(車道)에서는 자동차들이 빽빽하게 몰려 달리고, 그 사이로 한결같이 만원을 이룬 거대한 버스들이 으르렁대고 있었고, 건물의 앞면마다 광고 네온이 번쩍이며 번잡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란한 빛을 내려 쏟으면서 명멸(明滅)하고 있었다.

 이런 모든 광경을 생전 처음 보는 모모는 꿈을 꾸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마냥 거북이의 뒤를 쫓아 가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넓은 광장, 밝게 빛나는 거리를 가로 질러 갔다. 자동차들이 그들의 앞뒤로 질주하고 있었고 사방에 행인들이 붐비었다. 하지만 거북이와 함께 가는 이 꼬마한테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모와 거북이는 한번도 누구를 일부러 피해 갈 필요가 없었다. 한번도 누구와 충돌한 적이 없었고, 한번도 자동차에 브레이크를 걸게 한 적이 없었다. 거북이는 어느 순간에 어디로 가면, 달리는 자동차나 걷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한번도 서둘 필요도 없었고, 기다리느라 걸음을 멈출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모모는, 그토록 천천히 걸어 가면서도 그토록 빨리 갈 수 있다는 데 대해, 신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원형극장 옛터에 이르렀을 때, 도로청소부 베포는 자전거에서 채 내리기도 전에, 희미한 자전거 램프빛 속에서도 폐허 주변을 휩씁고 지나간 숱한 자동차 바퀴 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자전거를 풀밭에 팽개치고 성벽의 구멍으로 달려갔다.

 "모모!" 처음엔 작은 소리로 부르다가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외쳤다. "모모!"

 대답이 없었다.

 베포는 침을 삼켰다. 목이 칼칼했다. 그는 구멍을 빠져나가 깜깜한 공간 속으로 기어 내려가느라 비트적거리다가 발목을 삐었다. 그래도 떨리는 손으로 성냥불을 켜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나무 궤짝으로 만든 꼬마 책상과 두 개의 의자는 뒤집혀져 있었고 이불과 두꺼운 요도 침대에서 젖혀져 있었다. 그리고 모모는 거기 없었다. 

 베포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도록 메어오는 흐느낌을 억지로 삼켰다. 

 "맙소사!"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 어쩌면 좋담? 벌써 그 자들이 모모를 납치해 갔구나. 나의 작은 소녀를 벌써 끌어 갔어. 내가 너무 늦게 왔어. 대체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담? 어떻게 하면 좋지?" 그 때 성냥불에 손가락이 데었다. 그는 성냥을 내던지고 깜깜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다시 밖으로 기어 올라와 삔 발로 절뚝거리며 자전거 있는 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훌쩍 뛰어 올라 페달을 밟았다. 

 "지지를 만나야 해!" 그는 거듭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지를 찾아야겠어! 그 친구가 자는 창고를 찾았으면 좋겠는데." 

 베포는 지지가 얼마 전부터 일요일 밤마다 어느 작은 자동차 중개업소의 부속품 창고에서 잠을 자면서 몇 푼의 부수입을 벌어 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 지지는, 아직 사용의 여지가 있는 자동차 부속품이 없어지는 사고가―전에는 그런 사고가 빈번했다.―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주고 있었다. 

 베포가 마침내 창고에 이르러 주먹으로 문을 꽝꽝 두드렸을 때, 처음에 지지는 자동차 부속 도둑쯤으로 생각하고 꼼짝 않고 있었다. 하지만 곧 베포의 음성을 알아 듣고 문을 열었다. 

 "왠 일이세요?" 그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누구든 이렇게 사정없이 잠에서 깨우는 걸 나는 참을 수가 없어요." 

 "모모한테……," 숨이 차서 헐떡이며 베포가 내뱉었다. "모모한테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무슨 말씀이세요?" 지지는 되묻고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잠자리 위에 걸터 앉았다. "모모한테요? 대체 무슨 일이 생겼어요?"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 베포가 헐떡이며 말했다. "나쁜 일이야."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가 보고 들은 일을 전부 들려 주었다. 쓰레기 하치장에서의 재판에 대해서, 폐허의 옛터 주변의 바퀴 자국에 대해서, 그리고 모모가 거기에 없더라는 사실에 대해서. 물론 그가 이야기를 전부 마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모모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로서 더 이상 빨리 말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런 예감을 가졌었어"하고 그는 자기의 보고를 끝맺었다. "나는 일이 순조롭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지금 그자들은 보복을 한거야. 모모를 납치해 갔어! 어쩌면 좋겠나, 지지. 우리는 모모를 구해야 해!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베포가 말을 하는 동안 서서히 지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었다. 그는 갑자기 발 밑의 바닥이 꺼져 버린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순간까지는 모든 것이 그에겐 한낱 커다란 유희였었다. 그는 모든 놀이와 이야기를 대하듯이―어떤 결과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이 사건을 간단히 생각했었다.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그를 빼놓고 앞으로 나아가 독립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환상(幻想)을 동원해도 그 이야기를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옴짝달싹 못하게 마비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이 봐요, 베포 아저씨!" 잠시 후 그는 입을 떼었다. "모모가 잠간 산보를 갔을 수도 있지 않아요. 모모는 산보를 잘 하니까요. 한번은 사흘 밤낮을 시골에서 떠돌아 다닌 적도 있었는걸요. 아직은 우리가 그렇게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자동차 바퀴자국은?" 베포는 화가 나서 물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메트리스는?" 

 "아, 좋아요." 지지는 발뺌하듯 대답했다. "그럼, 정말로 거기 누가 왔었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렇다면 모모를 찾아낸 사람이 그 자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모모는 벌써 전에 가 버렸을 수도 있어요. 안 그랬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온통 뒤집어 엎으며 찾아 봤겠어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놈들이 모모를 찾아냈다면?" 베포가 소리쳤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는 젊은 친구의 웃도리 앞자락을 움켜잡고 흔들어댔다. "지지, 바보같이 굴지 말아! 회색 도당은 실제로 있는거야! 우리는 무슨 조처를 취해야 해, 당장에!" 

 "좀 진정하세요, 베포 아저씨." 지지는 얼이 빠져서 말을 더듬었다. "물론 우리는 무슨 수를 써야해요. 그렇지만 신중히 생각을 해야지요. 우리는 대체 모모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잖아요." 

 베포는 지지를 놓았다. "경찰에 가겠어!" 그는 내뱉았다. 

 "어리석은 소리 마세요!" 지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렇게 하시면 안돼요! 경찰이 나서서 우리 모모를 정말 찾아낸다고 칩시다. 그 다음엔 경찰이 모모를 어떻게 할는지 아세요? 아시겠어요, 베포 아저씨? 떠돌이 고아들이 어디로 보내지는지 아시죠? 창살이 있는 고아원에다 처넣는 거예요! 우리 모모한테 그런 짓을 하시겠어요?" 

 "아니," 베포는 우물우물 말하며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건 싫어. 그렇지만 모모가 정말 곤경에 빠져 있다면?" 

 "하지만 모모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각해 보세요." 지지는 말을 이었다. "모모는 정말 잠간 떠돌아 다니고 있을 뿐인데 아저씨가 경찰에다 신고를 해 버린다면……. 나는 아저씨처럼 행동하진 않겠어요. 그럼 정말 모모는 우리를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다시는 우리를 보지 못하게 될 거예요." 

 베포는 식탁 앞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팔에 묻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는 신음을 했다. "정말 모르겠어." 

 "내 생각에는," 지지가 말했다. "어쨌든 내일이든 모레까지 기다렸다가 무슨 조처를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때까지도 모모가 영 안 돌아오면, 정말 경찰에 갈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 때까지는 벌써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오고, 우리 셋이 그 동안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에 대해 웃을 수 있을 게 거의 틀림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베포는 문득 사정없이 몰려오는 피곤을 못 이겨하며 중얼거렸다. 노인에게는 오늘 하루가 상당히 무리한 날이었다. 

 "그럼요." 지지는 대답하며 베포의 삔 발의 구두를 벗겼다. 그는 노인을 부축해서 침상에 옮기고 삔 발에 찜질을 했다. 

 "틀림없이 제대로 될 거예요."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베포가 어느 새 잠이 든 것을 보고, 지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은 웃도리를 베개 삼아 머리 밑에 괸 채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회색 도당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껏 아무런 거리낌없이 살아 온 그로서 평생 처음으로 불안의 엄습을 느꼈다. 


 시간 저축은행의 중앙회로부터 대규모 증원 수배령이 내려졌다. 대도시에 있는 전 외무사원들은 일체의 다른 업무를 중지하고 오로지 모모라는 소녀 수색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거리마다 회색 인간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 위에도, 하수도 안에도 앉아서 눈에 띄지 않게, 역과 비행장, 버스와 전차를 감시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어디에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모라는 소녀를 찾아 내지는 못했다. 

 "얘, 거북아!" 모모가 물었다. "대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니?" 

 둘은 이제 막 웬 컴컴한 뒷뜰을 지나가고 있었다. 

 "걱정 말아!" 거북이의 등에 글이 나타났다. 

 "나도 걱정은 안 해." 모모는 글자를 해독한 다음에 대답했다. 

 이 말은 사실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오히려 자기 자신한테 한 말이었다. 내심 모모도 조금은 은근히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거북이가 끌고 가는 길은 갈수록 야릇하고 복잡해졌다. 그들은 벌써 수많은 정원을 지나왔고 다리 위를 건넜고, 구름다리 밑을 지나 큰 대문과 복도를 지나 왔다. 뿐만 아니라 몇 번인가는 지하실까지 지났다. 

 회색 도당이 총동원해서 자기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모모는 아마 훨씬 더 큰 불안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그 점에 관해서 모모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참을성 있게 한발짝 한발짝씩 그토록 복잡해 보이는 길을 따라 거북이의 뒤를 쫓아 갈 뿐이었다. 

 게다가 이 행진은 묘하게 순조로왔다. 거북이는 시내 교통망 중에서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미리 정해 놓은 것 같았고, 뿐더러 언제 어디에 추적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미리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둘이서 막 지나간 장소에 단 한 순간의 차이로 회색 도당이 지나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모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어느새 읽기를 깨우친 게 다행이야." 모모는 순진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지 않니?" 

 거북이의 등판에 경계등(警戒燈)처럼 글자가 번쩍였다. "조용히 해." 

 모모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지시를 따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세 사람의 어두운 형체가 지나갔다. 

 지금 둘이서 가고 있는 도시 구역의 집들은 점점 회색에 가까와 갔고, 점점 더 초라해졌다. 회벽이 부스러져 떨어져 나간 높은 아파트 건물들이, 그리고 물이 고인 구멍 투성이의 길이 양 옆으로 즐비해 있었다. 이곳에서는 전체가 어둡고 인적(人跡)이 없었다. 

  

 시간 저축은행의 중앙회에, 모모라는 소녀가 수사망에 한번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좋소." 대답이었다. "체포했오?" 

 "아닙니다. 꼬마는 땅바닥에 흡수된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발자국을 다시 잃어 버렸습니다." 

 "어째 그럴 수가 있소?" 

 "우리도 그 점이 의문입니다. 무엇인가 들어 맞지가 않아요." 

 "당신네들이 꼬마를 포착한 지점이 어디였소?" 

 "그 점이 바로 이상한 점입니다. 우리한테는 전혀 낯선 도시의 구역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런 구역이란 없소." 중앙회는 자신있게 잘라 말했다. 

 "명백히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마치 이구역은 시간의 접점(接點)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바로 이 접점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었습니다." 

 "뭐라구?" 중앙회는 소리쳤다. "추적을 계속하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꼬마를 잡아야 하오! 알아 들었소?" 

 "알았습니다!" 잿빛 대답이 흘러 나왔다. 

  

 처음에 모모는 새벽의 여명(黎明)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야릇한 빛은 이 거리로 접어 들었을 때 너무나 불현듯, 엄밀히 말해서 순식간에 비쳐왔다. 이곳은 이미 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낮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어스름한 빛은 아침의 빛도, 밤의 빛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윤곽을 너무나 기묘하게 부각(浮刻)시켜 주면서도, 어디가 근원인지를 알 수 없는 빛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동시에 사방에서 비쳐드는 빛이었다. 심지어 거리의 작은 조약돌에 이르기까지, 던지고 있는 길다란 새까만 그림자들이 온통 제가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저 쪽의 나무는 왼편에서, 이 집은 오른편에서, 저 건너편의 기념비는 앞 쪽에서 빛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기념비 자체도 정말 기묘한 모습이었다. 새까만 돌로 된 커다란 주사위 모양의 받침대 위에 무지무지하게 커다란 하얀 달걀 모양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집들도 지금껏 모모가 보아 온 모든 집들과 달랐다. 사뭇 눈이 부실 정도로 흰빛이었다. 창 너머로는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 안에 도대체 누가 사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모모는 이 집들이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고 다른 신비스러운 목적을 위해 지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인적이 없을 뿐 아니라, 개도 새들도, 자동차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움직임 없이 유리 속에 밀폐된듯이 보였다. 한 가닥 미풍(微風)조차 없었다. 

 모모는, 거북이가 아까보다 한결 더 느릿느릿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빨리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이상스럽게 여겼다. 

  

 이 기묘한 도시 구역의 바깥, 밤이 지배하고 있는 구렁 투성이의 거리로는 헤드라이트를 켠 미끈한 자동차 세 대가 질주하고 있었다. 차 안에는 한결같이 여러 명의 회색 사나이들이 타고 있었다. 제일 앞에 가는 차에 앉아 있는 사나이가 모모를 발견했다. 모모는 신비스러운 빛이 시작되는 새하얀 건물의 거리로 꺾어 들고 있었다. 

 하지만 회색 인간들이 그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운전수는 속력 페달을 밟았고 바퀴는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자동차는 제 자리 걸음을 칠 뿐, 마치 같은 속도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콘베이어에 말려 들어간 것같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속력을 내면 낼수록, 더욱 진행이 더딘 것이었다. 회색 도당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화가 나서 투덜대면서 차에서 훌쩍 뛰어 내려, 아직도 멀리 시야(視野)에 잡히는 모모를 쫓아 가려고 했다. 그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달렸다. 하지만 결국 지쳐서 멈출 수 밖에 없었고, 그 때까지 그들이 접근한 거리는 겨우 십미터 밖에 안되었다. 그런데 모모라는 소녀는 저 멀리 어딘가 눈(雪)처럼 새하얀 건물 사이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사라졌어!" 그들 중의 한 사나이가 말했다. "사라졌어, 이제는 끝장이야! 다시는 그 꼬맹이를 찾을 수 없을거요." 

 "알 수 없는 일이야." 다른 사나이가 말했다. "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는지를 말이오." 

 "나도 모르겠소." 첫번째 사나이가 말했다. "문제는 다만, 우리가 그렇게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이 정상 참작이 될 만한 정황으로 사료(思料)될는지 어떨는지 입니다." 

 "우리가 재판에 회부될 거라는 말이오?" 

 "하긴 우리를 칭찬하지 않을 것만은 틀림없지요." 

 이 일에 참여하던 모든 회색 인간들은 풀이 죽어서 자동차의 냉각기와 완충 막대에 걸터 앉았다. 이젠 그들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멀고 아득한 곳, 눈처럼 새하얀 텅빈 거리와 광장의 카오스(混沌) 속 어디엔가를, 모모는 거북이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너무나 천천히 걷고 있었기 때문에, 숫제 그들 발 밑의 거리들이 미끄러져 뒤로 물러가고 건물들이 스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또 다시 거북이는 모퉁이를 굽어 들었다. 모모는 뒤를 따랐다. ― 그리고는 깜짝 놀라 우뚝 섰다. 이 거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거리와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아예 보통의 좁은 골목이 아니었다. 좌우로 나란히 즐비한 집들은 온통 유리로 된 화려한 궁전처럼 보였다. 작은 탑, 지붕의 창문, 테라스 등으로 장식된 집들은, 태초에 바다 밑에 세워졌다가, 지금 갑자기 해초류를 드리우고, 조개며 산호로 뒤덮인 형태로 불쑥 솟아 오른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전체는 진주조개(眞珠貝)처럼 은은히 오색 빛을 영롱하게 발하였다. 

 이 골목은 다른 집들과 직각으로 서 있는 단 한 채의 막다른 집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집의 중앙에는 정교한 그림으로 뒤덮인 커다란 초록 대문이 보였다. 

 모모는 자기 바로 윗벽에 붙어 있는 도로 표지판을 올려다 보았다. 흰 대리석판 위에 황금색으로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초시간가(超時間街) 

 모모가 표지판을 보고 글자를 해독하기까지는 불과 몇 초밖에 지체하지 않았는데도 거북이는 어느덧 저만큼 앞장 서 거의 골목 끝 막다른 집 앞에 서 있었다.

 "좀 기다려, 거북아!" 모모는 소리쳤다.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모모한텐 자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거북이는 알아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모모는 거북이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초시간가로 접어들자마자, 물 속에 잠긴 듯, 세찬 역류(逆流)에 휘말린 듯한, 또는 완강한 역풍(逆風)이 부딪친 듯한 느낌이―실제 느껴지진 않았는데도―들었다. 모모는 이 수수께끼같은 압력을 이겨 내려고 애를 쓰며 돌담의 튀어나온 부분에 매달려 앞으로 나가는 시늉을 하거나, 때로는 방향을 잃고 기어가곤 했다.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모모는 골목 어귀에 주저 앉아, 자기를 향하고 있는 거북이를 보고 외쳤다. "날 좀 도와 줘!"

 느린 걸음으로 거북이는 되돌아왔다. 마침내 모모 앞에 와서 멈추었을 때 거북이 등에 지시 사항이 나타났다. "뒤로 돌아서서 가!"

 모모는 그렇게 했다. 몸을 돌려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즉 모모는 후퇴를 하면서, 자신도 역시 후퇴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호흡하며 느꼈다. 요컨대 모모는 후퇴의 길을 갔던 것이다.

 이윽고 무언가 딱딱한 것에 부딪쳤다. 몸을 돌려보니 거리와 직각으로 서 있는 막다른 골목집 앞이었다. 그림으로 뒤덮인 초록빛 철문이, 막상 그 앞에서는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크게 보여 모모는 적이 놀랐다.

 "대체 이 문이 내 힘으로 열릴까?"하고 모모는 걱정스레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어느새 육중한 양편 문짝이 저절로 열렸다.

 모모는 다시 한번 잠시 머뭇거렸다. 대문 위에 또하나의 표지판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새하얀 뿔(角) 위에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진 판이었다.


초공간(超空間)의 집 

 글자를 재빨리 읽을 재간이 없는 모모가 표지판을 읽고 났을 때에는 양쪽 대문짝이 어느새 스르르 닫히려는 찰나였다. 모모가 얼른 대문을 빠져 들어가자 등 뒤에서 육중한 대문이 둔하게 꽝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 모모의 앞에는 높고 긴 복도가 열려 있었다. 양 옆으로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돌로 된 벌거벗은 남녀의 상(像)이 서 있어 천정을 받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신비스러운 역류의 흔적은 여기서는 이미 느낄 수 없었다.

 모모는 앞에서 기어가는 거북이를 좇아 긴 복도를 지났다. 복도의 끝에 이르러 거북이는 조그만 문 앞에 멈췄다. 모모가 몸을 오그려야 겨우 들어 설 수 있을 꼬마문이었다.

 "다 왔어" 거북이의 등에 글자가 나타났다.

 모모는 몸을 꼬부렸다. 바로 모모의 코 앞 꼬마문 위에 다음과 같은 이름이 쓰인 문패가 보였다.


   세쿤두스 미누티우스 호라 박사

     (Secundus Minutius Hora : 라틴어로 초, 분, 시간의 뜻―옮긴이)


 모모는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꼬마 손잡이를 돌렸다. 꼬마 문이 열리자 재깍재깍 똑딱똑딱 땡땡 하는 여러 소리가 한꺼번에 음악소리처럼 안 쪽에서 울려 나왔다. 꼬마는 거북이의 뒤를 따랐다. 그들 뒤에서 꼬마문이 잠겨졌다. 

 

11  악인(惡人)들이 그릇된 것을 활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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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도 없는 거리와 골목길의 잿빛 불빛 속을 시간 저축은행의 외무사원들이 이리저리 질주하며 흥분해서 서로 긴급 뉴스를 수근수근 주고 받고 있었다. ―간부 전원은 비상회의에 참석하라! 

 그것은 분명 큰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뜻밖의 시간 수익(收益)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모양이라고 해석하는 축들도 있었다. 

 대회의실에서 회색 인간들의 간부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그야말로 끝없이 긴 회의용 탁자 앞에 나란히 줄지어 앉았다. 모두들 한결같이 납회색 서류 가방을 지니고, 작은 회색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다만 둥근 중산모자만은 벗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같이 완전 대머리라는 것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분위기는―이 회색 인간들한테도 이런 분위기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대체로 저조해 있었다. 

 긴 회의석의 머리쪽 끝에 앉아 있던 의장이 일어섰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며 두 줄의 끝없는 회색 얼굴이 그를 향했다. 

 "여러분," 그는 말을 시작했다. "우리의 사태가 심각하오. 본인은, 여러분에게 비통하지만 엄연한 사실을 바로 전달하지 않을 수 없소. 

 모모라는 소녀를 추적하는 일에, 우리는 동원 가능한 거의 전 외무사원을 출동시켰소. 이 추적은 도합 여섯시간 십삼분 팔초가 걸렸소. 이로 인하여 전 기동 외무사원은 부득이 원래의 생존 목적, 즉 시간을 벌어 들이는 일을 소홀하지 않을 수 없었소. 이 결손에 덧붙여, 추적하는 동안 우리 외무사원이 낭비한 자신들의 시간을 가산해야겠소. 이 양자의 결손 총액을 합하면, 정확한 계산에 따라 3십 7억 3천 8백 2십 5만 9천 1백 1십 4초에 달하는 시간 손실액이 나오게 되오. 

 여러분, 그것은 한 인간의 한 평생보다도 많은 시간이오!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엄청난 것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본인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커다란 손짓을 하며, 회의실 앞면에 달린 어마어마한 강철문을 가리켰다. 각종 번호와 안전 자물쇠 투성이인 그 문은 벽 속으로 통하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 창고는, 여러분," 그는 목청을 높여 말했다. "무진장 저장이 가능하고. 추적이 헛수고만 아니었더라도! 어쨌든 그것은 완전히 소득 없는 시간 낭비였소! 우린 모모라는 소녀를 놓친 것이오. 

 여러분, 이런 일은 결코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겠소. 이렇게 값비싼 대규모의 계획을 다시 벌이는 것을, 그것이 여하한 것이든, 본인은 단연코 반대하겠소. 우리는 시간을 절약해야 하고. 여러분, 낭비는 금물이오! 앞으로의 일체의 계획은 이런 뜻에 입각해서 세우기를 본인은 여러분께 부탁하오. 이상으로 소견을 마치겠소. 감사하오." 

 그는 자리에 앉아 짙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좌중에서 들떠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긴 좌석의 반대편 끝에 앉아 있던 두 번째 연사가 일어섰고, 모든 얼굴이 그를 향했다. 

 "여러분,"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시간 저축은행의 번영을 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소. 그렇지만 이 단 하나의 사건을 두고 불안해하거나 무슨 비참한 파국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이번 경우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시간 창고는 이미 막대한 저장량을 보유하고 있고, 설사 이번 손실의 몇 배의 손실을 겪더라도, 우리는 결코 끄떡하지 않을거요. 한 사람의 평생이 우리한테 과연 얼마 만한 것이오? 사실 새 발의 피지요. 

 아무리 그렇긴 해도 그런 일을 두 번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우리의 의장의 발언에 본인은 전적으로 동의하오. 하지만 이 모모라는 소녀와 같은 경우는 결코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변(變)이라고 생각하오. 그 비슷한 일도 지금껏 발생한 적이 없었소. 그러니까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하리라는 가능성도 지극히 희박해요. 

 결국 우리가 모모라는 소녀를 놓쳤다는 의장의 질책은 지당한 것이긴 하오. 하지만 우리가 의도했던 것은 결국 이 소녀가 우리한테 아무런 해(害)도 끼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뭐였소? 그렇다면, 어쨌든 우리의 의도는 완전히 이루어진 셈이 아니겠소! 그 아이는 사라졌소. 시간의 영역에서 도망쳐 버렸소! 우리가 그렇게 몰았소. 우리는 이 결과로서 만족해도 좋으리라고 본인은 생각하오." 

 연사는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착석했다. 여기저기서 자신없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긴 회의석의 한가운데서 세 번째 연사가 일어섰다. 

 "간단히 말씀드리겠소."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을 떼었다. "본인은 지금 우리가 들은 위안의 말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오. 이 어린애는 보통 아이가 아니오. 우리는 이 아이가, 우리와 우리의 일을 지극히 위험에 빠뜨릴 재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 사건이 지금껏 두 번 발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앞으로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될 수 없소. 방심하지 말아야 하오! 이 아이를 실제로 우리의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는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오. 다만 이 아이가 다시는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점만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소. 사실 이 아이가 시간의 영역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은 언제라도 되돌아올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오. 틀림없이 이 아이는 되돌아 올 것이오!" 

 그는 착석했다. 

 회색 일당의 간부진은 고개를 떨구고 풀이 죽어 앉아 있었다. 

 "여러분,"하고 이번에는 세 번째 연사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네번째 연사가 입을 열었다. "용서하시오. 하지만 사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의 언저리만을 맴돌고 있소. 우리는 이 사건에 제 삼자의 힘이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하오. 본인은 모든 가능성을 정확하게 계산해 보았소. 어린아이가 죽지 않고 자기 체력으로 시간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확률(確率)이란, 정확히 4천 2백만분의 일이라는 계산이 나오지요. 다시 말해서, 실제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간부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어느 모로 보나," 웅성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연사는 말을 이었다. "모모라는 소녀를 우리의 추적망에서 벗어 나도록 도와 준 힘이 있소. 본인이 누구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지 여러분들 모두 아실 것이오. 저 이른바 호라 박사가 문제의 대상이오." 

 이 이름이 발음되자, 대부분의 회색 인간들은 얻어맞은듯 몸서리를 쳤고, 어떤 자는 벌떡 일어나 격렬한 몸짓으로 나오는대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발, 여러분!" 네 번째 연사는 두 팔을 내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오, 진정하시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본인도 이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소. 본인 자신으로도 퍽 극기(克己)를 요하는 일이지만, 진상을 명백히 규명해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고……, 또 그래야 하지 않겠소! 그 자가, 이른바 그 자가 모모라는 소녀를 도왔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오. 그것은 우리를 향한 도전임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오. 요컨대 여러분, 그 자가, 그 모(某)라는 인물이 이 아이를 그냥 돌려 보내지 않고 우리를 향해 한 겹 더 무장을 시켜 보내리라는 점을 우리는 고려해야 하오. 그렇다면 그건 우리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될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한 인간의 한 평생을 또 한 번 희생하든지, 그 몇 배를, 아니 여러분,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반복해 말하겠소. 모든 것을, 반복해 말하겠소. 모든 것을 내걸 각오를 해야 하오! 이 경우엔 절약의 원칙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오. 본인의 뜻을 여러분들이 이해하리라 믿고 있소." 

 회색 인간들 사이에 흥분이 점점 고조되어 모두가 웅성웅성 얘기를 주고 받았다. 다섯 번째 연사가 벌떡 일어나 격렬하게 두 손을 휘둘렀다. 

 "조용히, 조용히 하시오!"라고 그는 외쳤다. "지금 발언한 동료께서는 유감스럽게도 온갖 비관적인 가능성만을 시사하는 데 그쳤소. 하지만 그에 대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건지 본인 자신 솔직히 말해 모르겠소! 그는 우리가 모든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소. ―좋소!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했소. 그것도 찬성이오! 우리가 저장해 놓은 재산을 취급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소. ―좋소! 그렇지만 사실 이 모든 주장은 단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소!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는 그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소! 이른바 모모라는 소녀가 우리에 맞서 무슨 장비를 갖추고 나타날지 우리 중의 누구도 모르오! 우리가 맞서게 될 위험이 어떤 건지 우리 중의 누구도 모르오.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우선 풀어야 할 문제인 것이오!" 

 장내의 웅성거림은 점점 더해 갔다. 모두가 뒤섞여 고함을 치고, 어떤 자는 두 주먹으로 탁상을 내려치고 어떤 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치고 야단이었다. 모두들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여섯 번째 연사가 가까스로 청중을 가라앉혔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가 거듭 진정을 호소하는 투로 말을 꺼내자 드디어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렇지만 여러분, 제발 냉정을 되찾으시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냉철한 이성이오. 모모라는 소녀애가 이른바 모(某)박사로부터―어떤 장비를 갖추고든―돌아 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경우 우리는 결코 우리가 직접 나서서 맞서 싸울 필요가 없소. 우리 자신들도 그렇게 만나는 일에 적성(適性)을 못 갖고 있다고 보고 있소. 그 동안 해체되어 버린 우리의 동료 사원 BLW/553/C 호의 슬픈 운명의 경우에서, 우리는 그 점을 뼈아프게 목격하지 않았소! 그런 개인적 접촉은 결코 필요치 않소. 우리는 인간들 중에 충분한 조력자(助力者)를 갖고 있오! 이런 눈에 띄지 않는 세련된 방법을 적용한다면, 여러분, 우리 자신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서도 모모라는 소녀와, 그 소녀가 야기하는 위험을 세상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오. 이런 조처를 쓰면 경제적일 것이오. 우리를 위해서 위험이 없고 반드시 효과적일 것이오." 

 대부분 간부진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제안은 그들 모두에게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회의석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있던 일곱 번째 연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필시 이 제안이 즉석에서 채택되었을는지 모른다. 

 "여러분,"하고 그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지금껏 이 모모라는 소녀에게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거듭 생각했소. 솔직히 말해서 두려운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하지만 두려움이란, 여러분, 좋은 생각의 훼방꾼이오. 본인이 보기에는, 실은 우리의 절호의 찬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쳤소. 이런 격언이 있지요. 정복할 수 없는 상대는 친구로 만들라는. 이 모모라는 소녀를 우리편으로 끌어 들일 생각은 왜 안하시오?" 

 "옳소, 옳소!" 몇 음성이 소리쳤다.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하시오!" 

 "우리로서는 처음부터 찾으려 해도 불가능했던 그 길을, 이른바 모(某)박사 집으로 가는 그 길을, 이 아이가 과연 찾아냈다는 건 분명하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언제라도 그 길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테고, 우리한테 그 길을 안내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럼 우리는 우리 식으로 그 모(某)박사와 협상을 벌일 수 있소. 본인이 장담컨대, 우리는 쉽게 그 자를 설득할 수 있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일단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그 다음에야 굳이 구차스럽게 시간, 분, 초를 긁어들이려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럴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인간의 시간을 몽땅 수중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인간의 시간을 가진 사람은 곧 끝없는 권력을 차지한 셈이오! 여러분, 우리는 목표를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시오! 그러기 위해 여러분 모두가 없애 버리기 원하는 모모라는 소녀가 우리에게 유용(有用)할 것이오!" 

 장내에는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지만"하고 어떤 자가 소리쳤다. "이 모모라는 소녀를 속여 꼬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동료 사원 BLW/553/C 호의 경우를 상기해 보시오. 우리들 누구도 똑 같은 운명을 겪을지 모르는 일이오!" 

 "대체 누가 속여서 꼬인다고 했소?" 아까 연사가 대답했다. "우리는 물론 우리 계획을 기탄없이 알려 주는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하고 다른 자가 손짓을 하며 외쳤다. "그 꼬마는 절대 협조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렇게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다고 보고 있소, 동지." 아홉 번째 연사가 논쟁에 끼어들었다. "우리는 이 꼬마를 유혹할 수 있는 미끼를 아주 자연스럽게 제공해야 할 것이오. 예를 들면, 그 애가 원하는대로 시간을 주기로 약속한다든가……." 

 "당연히 말로만 그렇게 약속하고 안 지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그 새에 끼어들어 소리쳤다.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이오!" 아홉 번째 연사는 대답하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가 진심으로 제의하지 않으면 그 꼬마가 진상(眞相)을 당장 파악할 것이오." 

 "안 돼오, 그건 안될 말이오!" 의장이 소리를 치며 의석을 꽝 쳤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 실제로 꼬마가 원하는대로 시간을 주게 된다면, 그건 우리로서는 엄청난 재산의 손실을 가져올 것이오!" 

 "그건 문제되지 않소." 연사는 진정시키는 투로 말했다. "어린애 하나가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많겠소? 당연히, 그것은 한계가 있는, 얼마 안 되는 손실일 것이오. 그 대신 우리가 받게 될 전체를 생각해 보시오! 전 인류의 시간인 것이오! 그것을 위해 모모가 낭비한 얼마 안 되는 시간이야 기타 잡비 항목에 치부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래야지요. 엄청난 이득을 생각해 보시오, 여러분!" 

 연사는 착석했고 모두들 그가 말한 이득을 생각했다. 

 "그렇긴 해도,"하고 여섯 번째 연사가 이윽고 입을 떼었다. "그것은 안되오." 

 "어째서 안되오?" 

 "간단한 이유에서요. 이 소녀는 유감스럽게도, 어쨌든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이미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을 미끼로 매수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오." 

 "그럼, 우리는 우선 이 아이한테서 시간을 빼앗아야겠소." 아홉 번째 연사가 대답했다. 

 "아, 동지." 의장은 맥이 풀려 말했다.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소.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아이한테 한 치도 접근을 못했소. 이 점이 바로 문제인 것이오." 

 간부진의 긴 열에서 실망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안이 하나 있소." 열 번째 연사가 말했다. "허락해 주시겠소?" 

 "말씀하시오." 의장이 말했다. 

 그 연사는 의장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 말을 이었다. "이 소녀는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고 살고 있소. 이 아이는 자기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선사하기를 좋아하지요. 그렇지만 시간을 같이 나눌 대상이 한 사람도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보시오. 

 소녀가 자진해서 우리 계획을 뒷받침해 주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이 아이의 친구들을 상대해야 될 것 같소." 

 그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 분류함을 꺼내 뒤적거렸다. "누구보다도 도로청소부 베포라는 자와 여행안내원 지지라는 젊은이가 문제의 대상이오. 그리고 또 여기 모모를 정기적으로 찾아 가는 어린애들의 명단이 차례대로 있소. 보시다시피, 여러분, 대단한 일이 아니오! 

 우리는 단지 이 모든 인물들을 모모의 손에 닿지 않게 떼어 놓는 것이오. 그러면 갈 데 없는 모모는 완전히 외톨이가 될 것이오. 그 뒤에야 그 애의 많은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건 무거운 짐이지요. 그렇구 말구요. 차라리 저주스러운 것이지요! 조만간 이 꼬마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고 나서, 여러분, 우리가 현장에 나타나서, 우리 조건을 제시하는 거요. 십분의 일초에 천년을 걸고 장담하지요. 그렇게 되면 이 꼬마도 친구들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한테 앞서 말한 길을 안내할 것이오." 

 지금껏 의기소침해서 시선을 떨구고 있던 회색 도당들은 고개를 들었다. 의기양양한 엷은 미소가 그들의 입술에 감돌았다. 그들은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가 끝없는 거리와 샛길로 메아리지며 돌사태처럼 울렸다. 

 

12  시간의 원천(源泉)에 간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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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엄청나게 큰 홀에 서 있었다. 그것은 어느 최대 규모의 교회당보다도, 어느 최대 공간의 역 대합실보다도 큰 방이었다. 아득히 높이 으스름한 여명(黎明)에 묻혀 있어, 눈에 보이기보다는 짐작될 뿐인 천장을 웅장한 기둥들이 받쳐 주고 있었다.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홀을 밝히고 있는 황금빛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촛불에서 나오고 있었다. 곳곳에 꽂혀 있는 초의 불꽃들은, 마치 반짝이는 그림 물감으로 칠해진 것처럼, 그래서 빛을 발하는 데 초를 전혀 소모하지 않는 것처럼, 움직임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모가 방으로 들어서며 들었던 수천 가지의 똑딱똑딱, 재깍재깍, 땡땡 하는 울림의 하모니는 온갖 크기와 모양의, 끝도 없이 많은 시계가 내는 소리였다. 시계들은 긴 탁자 위에, 유리 진열장 속에, 황금빛 시렁 위에, 그리고 끝없는 선반 위에 놓이거나 세워져 있었다.

 그 중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조그만 회중시계도 있었고, 평범한 양철 괘종시계도 있었고, 모래시계, 춤추는 인형이 얹혀 있는 오르겔 시계, 해시계, 나무로 된 시계, 돌로 된 시계, 유리로 된 시계, 그리고 심지어는 뿜어나는 분수로 움직여지는 시계들까지 있었다. 벽에는 온갖 종류의 뻐꾹이 시계며, 흔들리는 육중한 추(錘)가 달린 다른 종류의 시계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중의 어떤 시계의 추는 장중하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고, 어떤 것은 조그만 추가 잽싸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 층 높이에 이르기까지 나선형의 층계로 이어지는 순회로(巡回路)가 홀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더 높이 두 번째의 순회로가, 그 위로 세 번째의, 그 위에 네 번째 순회로가 올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를 가나 각종 시계들이 걸려 있거나 세워져 있고 혹은 놓여져 있었다. 그 중에는 지구의 모든 일정한 지점의 시각을 가리켜 주는 지구본 모양의 만국 표준시계들도 있었고, 태양, 달, 별이 있는 커다란 천체의(天體儀)들도 있었다. 이 홀의 중앙에는 온통 입식(立式) 시계로 이루어진 숲이 솟아 있었다. 보통 입식시계에서부터 그야말로 탑시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시계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어디에서고 시각을 알리느라 울리거나 치는 시계 소리가 들렸다. 사실 이 모든 시계는 제각기 다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합쳐 울려 오는 소리는 결코 불협화음이 아니라 여름의 숲 속에서처럼 살랑거리는 은은한 화음이었다. 

 모모는 돌아다니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 온갖 진풍경을 열심히 구경했다. 지금 막 모모는 춤을 추며 두 손을 마주 내밀고 서 있는 작은 남녀의 상이 얹힌, 예쁜 장식의 오르겔 시계 앞에 섰다. 그리고 그 형상의 움직이는 모양을 보려고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려는 순간 갑자기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네가 돌아왔구나, 카시오페이아(星座 이름. 희랍 신화에 나오는 안드로메다의 어머니 이름―옮긴이). 꼬마 모모는 안 데려 왔니?" 

 꼬마 모모는 몸을 돌렸다. 그곳, 입식 시계 숲 사이로 난 좁은 길에서, 한 은발의 노인이 바닥에 앉아 있는 거북이를 향해 몸을 굽힌 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금실로 수놓은 긴 웃도리에 푸른 비단 반바지를 입고, 하얀 긴 양말에 커다란 황금 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손목과 목 언저리에는 웃도리의 레이스가 굽이치고 있었고, 은말은 뒷머리에서 작은 다발로 땋아져 있었다. 모모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차림이 두 세기 전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당장 알아 보았을 것이다. 

 "뭐라구?" 노인은 ―여전히 거북이한테 몸을 굽힌 채―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벌써 여기 와 있다구? 대체 어디 있니?" 

 그는 베포 노인의 것과 비슷하지만 황금으로 된 점만이 다른, 조그만 안경을 꺼내 쓰고는 주위를 살폈다. 

 "저, 여기 있어요!" 모모가 소리쳤다. 

 노인은 기쁨에 가득 찬 웃음을 띠고 두 손을 벌이며 모모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다가오는 동안 그의 모습은 한 걸음마다 젊어지는 것처럼 모모의 눈에 비쳤다. 그리고 마침내 모모 앞에 서서 두 손을 맞잡고 뜨겁게 흔들 때, 그의 모습은 모모 또래와 비슷한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반갑다!" 그는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초공간(超空間)의 집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꼬마 모모. 나를 소개하지. 나는 호라 박사야. 세쿤두스 미누티우스 호라." 

 "저를 정말 기다리고 계셨어요?" 모모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기다렸구 말구! 너를 데려오도록 내가 직접 거북이 카시오페이아를 보냈는걸." 

 그는 조끼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회중시계를 꺼내어 뚜껑을 활짝 열었다. 

 "어김없이 기막히게 정각에 도착했구나"라고 그는 웃음을 머금고 힘주어 말하더니 모모에게 시계를 내밀었다. 

 모모는 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숫자판에는 시계 바늘도 숫자도 없이 다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맞물려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두 개의 섬세한, 지극히 섬세한 태엽이 있을 뿐이었다. 태엽이 서로 맞물리는 부분에서 이따금 작은 불꽃이 반짝였다. 

 "이것은,"하고 호라 박사가 말했다. "별시계란다. 이 시계는 아주 진기한 별의 시간을 어김없이 가리켜 주고 있지. 지금 막 이 별의 시간이 시작된거야." 

 "대체 별의 시간이란 무엇인가요?" 모모가 물었다. 

 "들어 봐, 천체의 운행 중에는 비상한 순간이 간혹 있단다"하고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모든 사물과 존재가, 저 아득한 곳의 별들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 만큼 완벽하게 함께 작용을 해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태를 가능케 하는 그런 순간이 말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대체로 인간들은 이 순간을 이용할 줄을 몰라. 그래서 별의 시간은 모르는 새에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 때가 대부분이야. 그렇지만 이 시간을 알아 보는 사람이 존재하는 때면, 세상에는 위대한 사태가 찾아오는거야." 

 "아마도,"하고 모모가 말했다. "그런 시계를 갖고 있으면 되겠지요." 

 호라 박사는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시계만 갖고는 아무 소용이 없어. 시계를 읽을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해." 

 그는 시계를 찰깍 닫고 다시 조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모모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 보는 것을 의식하고는, 그는 생각에 잠겨 자기를 내려다 보더니 이마에 주름을 모으며 말했다. "아, 이제 보니 나 자신이 정작 약간 지각을 한 셈이구나, 유행에서 말이다. 내가 이렇게 주의력이 모자란다니까! 당장 고쳐 입어야 겠어." 

 그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높은 스탠드 칼라의 예복 차림으로 모모 앞에 섰다. 

 "이제 좀 나아졌니?" 그는 자신 없는 투로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어리둥절하고 있는 모모의 표정을 보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아직 제대로가 아니지! 대체 내가 정신을 어디 두고 있담!"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더니 이번엔 느닷없이 모모도, 그 누구도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백년 후에야 유행될 옷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아니니?"라고 그는 또 물었다. "자, 분명히 이것도 벗어 던져야 될 모양이구나! 잠간, 다시 한번 해 볼께." 

 그는 세 번째로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마침내 오늘날 흔히 보는 평상복 차림으로 꼬마 앞에 섰다. 

 "이제 제대로 됐지?"라고 말하며 그는 모모를 보고 눈을 껌벅였다. "나 때문에 공연히 놀라지 않았다면 좋겠구나, 모모야. 이건 내가 하는 작은 장난일 뿐이야. 이제 식탁으로 가실까요, 꼬마 아가씨.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어. 퍽 먼 길을 걸어 왔지. 식사가 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구나." 

 그는 모모의 손을 잡고 시계 숲 한가운데로 안내했다. 거북이는 약간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좁은 길은 미로(迷路)의 한가운데처럼 종횡으로 뒤얽혀 뚫려 있었고, 마침내는 몇 개의 거대한 장롱시계가 뒷벽으로 되어 있는 작은 방으로 이어졌다. 방 한쪽 구석에는 아아치 모양의 발이 달린 작은 식탁 하나, 아담한 소파와 거기에 어울리는 푹신한 안락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이곳 역시 움직임 없는 촛불의 황금빛으로 조명되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배가 불룩한 황금 주전자 하나와 두 벌의 꼬마 찻잔, 접시, 꼬마 숟갈과 나이프가 차려져 있었는데, 온통 번쩍이는 황금으로 된 것이었다. 작은 바구니에는 황금갈색의 바삭바삭한 동그란 빵이 담겨 있었고, 작은 사발 안에는 황금빛 버터, 또 다른 사발에는 마치 황금의 젖처럼 보이는 꿀이 담겨 있었다. 호라 박사는 배가 불룩한 주전자에서 두 개의 잔에다 초콜렛을 따르더니 주인 티를 내면서 말했다. "자, 꼬마 손님, 많이 들어요!" 

 호라 박사가 두 번 권할 필요도 없었다. 마실 수 있는 초콜렛이 있다는사실조차 모모는 지금껏 알지 못했다. 또한 동그란 빵에 버터와 꿀을 발라 먹는 것도 모모의 인생에서는 희귀한 일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지금처럼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모는 처음에는 완전히 음식에 정신이 팔려서 딴 생각을 할 겨를 없이 배가 부를 때까지 먹고 있었다. 음식을 먹는 중에 이상스럽게도 온갖 피곤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밤새 한잠도 못 잤는데도 상쾌하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먹는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은 한결 맛있었다. 며칠이고 계속 그렇게 먹을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었다. 

 호라 박사는 다정하게 모모를 바라보며, 우선은 먹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말없이 빈틈 없는 태도로 가만히 있었다. 그는 이 꼬마 손님이 몇 년 치의 시장기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가 다시 점점 나이가 들어 보이고, 마침내 은발의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바로 이 이유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모모가 나이프를 잘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는 동그란 빵에 버터를 발라 접시에 놔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별로 먹지 않고, 그야말로 대접상 먹는 시늉만 했다. 

 하지만 이윽고 모모도 배가 불러왔다. 꼬마는 코코아를 마시면서 황금빛 찻잔 가장자리 너머로 주인을 유심히 관찰하며, 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정체의 사람일까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코 보통 인물은 아니라는 것까지는 물론 눈치해었지만, 사실 지금껏 그에 관해 이름 말고는 더 이상 근본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하고 모모는 찻잔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거북이를 시켜 저를 데려오게 하셨나요?" 

 "회색 도당들한테서 너를 지켜 주려고." 호라 박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자들이 너를 사방에서 찾고 있는데, 너는 여기 내 집에 있어야만 그들을 피해 안전할 수 있거든."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하나 보지요?" 모모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 얘야." 호라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왜요?"하고 모모는 물었다. 

 "그 자들은 너를 두려워 해."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들 편에서 보면 가장 불리한 일을 네가 했거던." 

 "저는 그 사람들한테 아무 일도 안했어요." 모모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너는 그 도당 중의 한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네 비밀을 털어 놓게 만들었어. 게다가 그 비밀을 네 친구들한테 얘기했어. 너희들은 심지어 모든 사람들한테 회색 도당의 진상을 폭로하려 했었어. 그만하면 그들 편에서 보면 네가 철천지 원수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겠니?" 

 "그렇지만 우리는 도시 한가운데를 누비면서 걸어 왔는데요. 거북이랑 저랑요."하고 모모가 말했다. "그 자들이 사방에서 저를 뒤져 찾았다면 쉽사리 잡아냈을 텐데요. 뿐 아니라 우리는 굉장히 느림보로 걸어 왔어요." 

 호라 박사는, 어느 새 다시 발치에 와 앉은 거북이를 무릎에 앉히고 목을 살살 문질렀다. 

 "어떻게 생각하니, 카시오페이아?" 그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자들이 너희를 쉽게 잡을 수 있었겠니?" 

 거북이의 등판에 "절대로 아니오!"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게다가 그 글자는 너무나 익살맞게 껌뻑거려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역력히 들리는 느낌이었다. 

 "카시오페이아는"하고 호라 박사가 설명했다. "말하자면, 미래를 약간 앞질러 내다 볼 줄 안단다. 아주 멀리는 못보지만, 어쨌든 약 반시간 정도는." 

 "꼭!"이라고 거북이 등에 나타났다. 

 "미안하다"하고 호라 박사는 정정했다. "꼭 반시간. 거북이는 앞으로 반시간 안에 무슨 일이 있을지를 확실히 예견한단다. 그러니까 자연히, 이를테면 회색 도당을 만나게 될지 여부도 미리 알고 있는거야." 

 "아, 그래요." 모모는 신기해하며 말했다. "그것 참 편리하네요! 그러니까 어디 어디에서는 회색 도당과 부딪치리라는 걸 미리 알고, 그냥 딴 길로 가면 되는군요?" 

 "그렇지 않아"하고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일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아. 미리 아는 사건에 대해 거북이 자신이 변경시킬 수는 없어. 거북이는 실제로 일어날 사건만 아니까 말야. 그러니까 거북이는 어디 어디서 회색 도당을 만나게 될 거라고 미리 알게된다면, 결국 피할 수 없이 그들을 만나게 되는거야. 그 사실에 관해선 거북이 자신이 어쩔 수가 없어." 

 "이해할 수가 없네요." 모모는 약간 실망해서 말했다. "그럼 약간 미리 안다는 것이 도대체 아무 소용이 없네요." 

 "그래도 때로는 소용이 있지."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예컨대, 너의 경우에 있어서 거북이는 이러이러한 길로 가면 회색 도당을 안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거던. 그것만 해도 벌써 훨씬 쓸모가 있지 않니?" 

 모모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꼬마의 머리 속은 풀려진 실뭉치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아무튼 너랑 네 친구들에게, 말하자면"하고 호라 박사는 말을 이었다. "치하(致賀)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들의 플래카드와 격문은 참 감동적이었어." 

 "그럼 그걸 읽어 보셨나요?"하고 모모는 신이 나서 물었다. 

 "전부 읽었지." 호라 박사는 말했다. "한 자(字), 한 자!" 

 "참 유감스럽게도"하고 모모는 말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읽은 것 같아요." 

 호라 박사도 유감이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회색 도당이 그렇게 만들었어." 

 "그렇게 전부 잘 아세요?" 모모가 캐물었다. 

 호라 박사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자들을 알고 있고, 그 편에서도 나를 알고 있지." 

 모모는 이 대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벌써 그 자들한테 여러 번 가셨었나요?" 

 "아니, 한번도. 나는 이 초공간의 집을 결코 떠나지 않아." 

 "그렇다면 그 회색 도당편에선, 저……여기를 가끔 방문하나요?" 

 호라 박사는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말아라, 꼬마 모모. 그 자들은 이 안으로 결코 들어올 수 없어. 설령 그 자들이 초시간가(街)로 통하는 거리를 안다손쳐도.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몰라." 

 모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라 박사의 설명에 안심은 되었지만 정작 박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어떻게 그 모든 걸 알고 계시나요?"하고 모모는 입을 떼었다. "우리들의 플래카드며 회색 도당에 관한 일을요." 

 "나는 회색 도당을 쉬지 않고 관찰하고 있고, 그 도당과 연관된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있거든"하고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너랑 너의 친구들도 보게 되었던거야." 

 "그렇지만 절대 집 밖으로 나가시지 않는다면서요?"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단다." 호라 박사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는 눈에 띄게 다시 젊어졌다. "나는 만물투시(萬物透視) 안경을 갖고 있거든." 그러면서 그는 조그만 황금 안경을 벗어 모모한테 건네 주었다. 

 "한번 들여다 보겠니?" 

 모모는 안경을 쓰고 눈을 깜빡이며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도대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네요." 모모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몽롱한 색채와 빛과 그늘의 소용돌이였던 것이다. 모모는 사뭇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 호라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그렇단다. 만물투시경으로 보는 법은 그리 간단치가 않아. 그렇지만 너도 곧 익숙하게 될거야." 

 그는 몸을 일으켜 모모의 의자 뒤로 돌아가 두 손으로 꼬마의 코에 걸쳐진 안경의 테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당장 장면이 선명해졌다. 

 맨먼저 모모는, 야릇한 빛으로 휩싸인 문제의 도시 구역 언저리에서 세 대의 자동차를 타고 앉은 회색 일당을 보았다. 그들은 막 자동차를 되돌릴 참이었다. 

 그리고 더 멀리 내다보자 이번엔 다른 일당이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흥분해서 손짓을 하고 떠들어대면서 무슨 소식을 전하는 것같은 장면이 보였다. 

 "그 자들은 너에 관해 말하고 있어"하고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그들은 네가 자기네 포위망을 빠져나간 걸 이해할 수가 없는 거야." 

 "도대체 저 이들은 왜 저렇게 회색 얼굴을 하고 있나요?" 모모는 계속 안경을 들여다 보면서 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종의 죽음의 요소로 생명이 지탱되기 때문이야"하고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너도 알잖니, 그들은 인간의 삶(生)에서 훔쳐온 시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렇지만 이 시간은 그것의 참된 소유자를 떠나면 문자 그대로 죽은 시간이란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각기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의 시간인 한에서만, 그 시간은 생명을 갖게 되는거야." 

 "그럼 회색 도당은 결코 인간이 아니군요?" 

 "아니지. 그들은 다만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을 뿐이야." 

 "그렇담, 대체 그들은 무엇인가요?" 

 "실제로는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럼 어디서 왔지요?" 

 "그들은, 인간이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에 생성된 존재야. 가능성을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생겨나. 그런데다 이제 인간들은 그들에게 지배할 수 있는 여지(餘地)까지 주고 있어. 그리고 이 여지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은 인간을 지배할 수가 있어." 

 "그럼 그들이 더 이상 시간을 훔칠 수 없게 된다면요?" 

 "그럼 그들은 애당초의 출발점이었던 무(無)로 되돌아 가겠지." 

 호라 박사는 모모한테서 안경을 벗겨 꽂아 넣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한참 뒤 말을 이었다. "그들은 벌써 인간 가운데 퍽 많은 조력자를 갖고 있어. 그것이 불리한 일이야." 

 "저는,"하고 모모는 단호히 말했다. "저 자신의 시간을 누구한테도 뺏기지 않겠어요!" 

 "나도 그러길 바란단다." 호라 박사는 말했다. "이리 오렴, 모모. 내 수집품을 보여주마." 

 이 때 그의 모습은 문득 다시 노인처럼 되었다. 

 그는 모모의 손을 잡고 커다란 홀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이런저런 갖가지 시계들을 가리켜 보이고, 장난감 시계를 돌려 보게하고, 또 천체의(天體儀)를 구경시켜 주었다. 이렇게 자기의 꼬마 손님이 온갖 신기한 물건을 보고 즐거워하는 장면 앞에서 그의 모습도 점점 다시 젊어졌다. 

 "수수께끼 풀기를 좋아하니?" 그는 계속 걸어가며 예사롭게 물었다. 

 "아, 네, 참 좋아해요!"하고 모모가 대답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래." 호라 박사는 웃음 띤 얼굴로 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참 어려운거다. 그걸 풀 수 있는 사람은 퍽 드물단다." 

 "좋아요." 모모가 말했다. "그러면 그것을 외어 두었다가 나중에 친구들한테 풀어 보게 하겠어요." 

 "잔뜩 기대를 하고 있단다"하고 호라 박사가 대꾸했다. "네가 답을 풀어낼 수 있을지. 잘 들어 봐. 


    세 형제가 한 집안에 살고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실제로 제가끔이야. 그런데도 구별을 해서 보려하면 제가끔 다른 둘이랑 같아 보이는 거야. 

 제일 맏형은 거기에 없어. 이제 막 집으로 오고 있어. 

 둘째 형은 거기에 없어. 그는 벌써 나가 버렸어. 

 다만 세째만이 거기에 있어. 셋 중의 막내만이. 

 사실 막내가 없으면 다른 둘도 있을 수가 없어. 

 그런데도 사실 문제가 되고 있는 세째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첫째가 둘째로 변화하는 데 있어. 사실 막내를 보려고 하면 우리는 언제나 다른 둘 중의 하나를 볼 뿐인거야. 

 자, 이제 말해 봐. 이 세 형제는 어쩌면 하나일까? 

 아니면 둘 뿐일까? 또는 결국……아무도 없는 걸까? 

 꼬마야, 이 형제들의 이름을 맞출 수 있다면, 

 너는 셋의 막강한 지배자를 알아 맞추는 셈이야. 

 그들은 같이 한 커다란 왕국을 다스리고 있어. 

 동시에 그들 자신이 왕국인거야! 그 왕국 안에서 그들은 꼭 같애."

 


 호라 박사는 모모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북돋아 주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모는 긴장해서 귀를 기울였다. 탁월한 기억력을 가진 모모는 수수께끼를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반복했다. 

 "어휴!"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려운데요. 뭔지 전혀 짐작조차 안가요. 어떻게 실마리를 잡아야할지 영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봐." 호라 박사는 말했다. 

 모모는 다시 한번 수수께끼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읊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되겠어요." 모모는 손을 들었다. 

 그 새에 거북이가 뒤따라 왔다. 거북이는 호라 박사 옆에 앉아 모모를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카시오페이아,"하고 호라 박사가 말했다. "너는 뭐든 반시간 전에 미리 알 수 있지. 어디 모모가 수수께끼를 풀겠니?" 

 "풀겠어요!"라는 글씨가 카시오페이아의 등판에 나타났다. 

 "이것 봐!" 호라 박사는 모모를 향해 말했다. "네 힘으로 풀게 될 거야. 카시오페이아는 틀림없어." 

 모모는 얼굴을 찡그리고 다시 온 정신을 쏟아 생각을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세 형제가 한 집안에 살고 있을까?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수수께끼에서 형제들이란 늘, 사과씨라든가 이빨이든가, 아무튼 그런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에의 세 형제는 서로 변신(變身)을 하는 것이었다. 서로 변신하는 것이 무엇이람? 모모는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거기, 움직이지 않는 불꽃을 태우고 있는 양초들이 즐비해 있었다. 밀랍이 불꽃을 통해 빛으로 화하고 있었다. 하긴, 그것은 세 형제였다. 하지만 들어 맞지 않는 것이었다. 셋이 모두 한꺼번에 거기 있지 않은가. 그것 중의 둘은 거기에 없어야만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해답은 어쩌면 꽃, 열매, 씨앗같은 것인지도 몰라. 과연 상당히 많은 점이 들어 맞았다. 그 셋 중에서 씨앗은 가장 작지 않은가. 그리고 씨앗이 거기 있을 때 나머지 둘은 거기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씨앗이 없으면 다른 둘도 있을 수 없잖은가. 하지만 이것 역시 해답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씨앗은 어쨌든 얼마든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수수께끼에선 셋 중의 막내를 보려면 으례 다른 형제 중의 하나를 보게 된다 하잖았는가. 

 모모의 생각은 방황했다. 아무래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도저히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카시오페이아는 알아 맞출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모모는 다시 처음부터 수수께끼의 내용을 차근차근 되씹어 읊어 보았다. 

 모모가 "제일 맏형은 거기에 없어, 이제 막 집으로 오고 있어……"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거북이가 모모를 향해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거북이의 등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야!"라는 말이 나타났다 곧 꺼졌다. 

 "가만 있어, 카시오페이아!" 호라 박사는 돌아 보지 않은 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힌트를 주지 말아! 모모는 혼자 힘으로 풀 수 있어." 

 모모는 거북이 등의 암호를 물론 보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곰곰 생각하기 시작했다. 카시오페이아가 아는 것이 대체 뭐람? 거북이는 모모가 수수께끼를 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뜻도 밝혀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거북이는 또 무엇을 아는가? 거북이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거북이가 알고 있는 것은……. 

 "미래!" 모모는 크게 소리쳤다. "맏형은 거기에 없어, 이제 막 집으로 오고 있어. 그것은 미래예요!"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째는,"하고 모모는 계속 이어 말했다. "거기에 없어, 벌써 나가 버렸어. 그럼 이거 과거예요!" 

 다시금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쁨에 찬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하고 모모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지금부터가 어려워요. 대체 세째가 뭘까요? 셋 중의 막내라고 했어요. 막내가 없으면 다른 둘도 없다고 했지요. 그리고 세째는 또 거기에 있는 유일한 존재예요." 

 모모는 곰곰 생각하다가 불쑥 소리쳤다. "그것은 지금이에요! 이 순간이에요! 과거란 지금 막 지나간 순간들이고, 미래란 이제 막 오고 있는 순간들이에요! 그러니까 만약 현재라는 게 없으면 둘 다 없을거예요. 정말 맞았어요!" 

 모모의 뺨은 열이 나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모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 귀절은 무슨 뜻인가요? 


   그런데도 사실 문제가 되고 있는 세째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첫째가 둘째로 변화하는 데 있어…….

 


 그러니까 현재란 미래가 과거로 변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뜻이군요!" 

 모모는 놀라와하며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정말 맞았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순간이란 애당초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과거와 미래만이 있는 셈이지요? 사실 지금 내가, 예를 들면 이 순간에, 순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벌써 어느새 과거가 되어 버린 것이에요! 아, 이제 알겠어요. '사실 막내를 보려고 하면, 언제든지 다른 둘 중의 하나를 볼 뿐인 거야'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뿐만 아니라 이젠 다른 나머지 것도 이해를 하겠어요. 근본적으로 세 형제 중의 하나만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현재만, 아니면 과거나 미래만. 아니면 또 전혀 존재치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다른 형제들 역시 존재하는 경우에만, 각기 존재하니까요! 온통 머리가 뱅뱅 도는 것 같네요!" 

 "그렇지만 수수께끼는 아직 안 끝났어." 호라 박사가 말했다. "같이 다스리고, 동시에 그들 자신이기도 한 커다란 왕국이 대체 뭐겠니?" 

 모모는 어쩔 줄 몰라 호라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무엇일 수 있담? 대체 과거, 현재, 미래를 합한 것이 무엇이람? 

 모모는 거대한 홀 안을 휘둘러 보았다. 꼬마의 시선은 수천 수만가지의 시계 위를 헤맸다. 그러더니 문득 눈에 빛을 발했다. 

 "시간이오!" 모모는 소리치며 손뼉을 쳤다. "그래요, 그건 시간이에요! 시간이 바로 왕국이에요!" 그리고 모모는 기뻐서 몇 차례 깡충깡충 뛰었다. 

 "자, 그럼 세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이 무엇인가 말해 봐라!" 호라 박사가 말했다. 

 "그건 세상이에요." 모모가 대답했다. 

 "브라보!" 호라 박사 역시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정말 용타, 모모! 수수께끼 풀기 선수로구나! 정말 나도 기쁘단다!" 

 "저도 기뻐요!" 모모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자기가 수수께끼를 푼 것을 호라 박사가 왜 그토록 기뻐하는지 약간 의아스러웠다. 

 시계가 진열된 홀을 헤치며 계속 걸어가면서 호라 박사는 다른 진기한 물건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모모의 머리 속은 여전히 수수께끼에 매달려 있었다. 

 "말씀해 주세요." 이윽고 모모는 입을 떼었다. "도대체 시간이라는 게 원래 어떤 존재이지요?" 

 "네가 지금 막 알아 맞추지 않았니?" 호라 박사는 말했다. 

 "아니, 저……"하고 모모는 말했다. "시간 자체, 그것은 어쨌든 무엇인가에 틀림없어요. 시간은 엄연히 존재해요. 대체 시간이란 실제로 무엇일까요?" 

 "네가 그것까지도 대답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호라 박사는 말했다. 

 모모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시간은 존재하고 있어요." 모모는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건 확실해요. 하지만 그것을 잡아 볼 수는 없어요. 또 묶어 놓을 수도 없구요. 어쩌면 시간은 향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시간은 또한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는 그 무엇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에선가 오고 있는 원천을 가진 게 아닐까요? 아니면……, 아니예요 이제 알겠어요! 어쩌면 시간은 항상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종의 음악일 거예요. 사실 저는 벌써 여러 번 그런 음악을 들었던 것 같아요. 아주 나직한." 

 "알고 있다"하고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실 내가 너를 내 집으로 부를 수 있었단다." 

 "그렇지만 거기엔 무엇인가 또 다른 것이 있어요." 모모는 계속 생각에 매달리며 말했다. "그 음악은 사실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내 마음 깊숙히 파고 들면서 울렸어요. 아마 시간은 그런 것일 거예요." 모모는 열적은듯 입을 다물었다가 어쩔 줄 몰라하며 덧붙였다. "저……, 물 위의 파도가 바람으로 인해 생겨나듯이요. 아, 아무래도 제가 바보같은 소리를 지껄인 것 같네요!" 

 "아니," 호라 박사는 말했다. "정말 잘 표현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너한테 비밀을 하나 털어 놓으마. 이곳 초시간의 골목 안, 초공간의 집에서 모든 인간의 시간이 나간단다." 

 모모는 경외(敬畏)의 시선으로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박사님이 직접 시간을 만드세요?" 

 호라 박사는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다, 꼬마야. 나는 그냥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야. 내가 맡은 일은 모든 인간 하나하나한테, 정해진 시간을 나누어 주는 일이란다." 

 "그럼 시간 도둑들이 인간들한테서 시간을 다시는 못 훔쳐가게 박사님께서 간단히 조정하실 수는 없나요?" 모모는 물었다. 

 "아니, 그건 내 힘 밖의 일이야." 호라 박사는 말했다. "인간들이 자기네들의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는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야. 사람들 스스로가 시간을 보호해야 해. 나는 그저 나누어 줄 수 있을 뿐이야." 

 모모는 홀을 휘둘러 보고 나서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시계를 갖고 계시나요? 한사람 몫으로 하나씩, 네?" 

 "아니다, 모모."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이 시계들은 단지 내 취미일 뿐이야. 이것들은 모든 인간이 가슴 속에 갖고 있는 기관의 아주 엉성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단다. 사실 빛을 보기 위해 눈을 갖고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인간은 시간을 감지(感知)하기 위해 심장을 갖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심장으로 감지되지 않은 모든 시간은 잃어 버린 시간이란다. 장님 앞의 무지개 빛깔이나 귀머거리한테의 새의 지저귐처럼.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고동은 치는데도 아무 것도 감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심장이 수두룩하단다." 

 "그럼 저의 심장이 고동치기를 멎어 버리면 어떻게 되지요?" 모모가 물었다. 

 "그럼,"하고 박사는 대답했다. "네 몫의 시간도 정지한단다, 꼬마야. 너 자신이 바로 시간을 타고, 즉 네 몫의 모든 밤과 낮, 달(月)과 해(年)를 타고, 거슬러 돌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 너는 네 삶을 타고 애초에 네가 들어 섰던 커다란 은빛 아아치 성문에 이르기까지 되돌아 가는 거야. 그 문을 너는 다시 나가는거야." 

 "그럼 그 바깥 쪽은 무엇인가요?" 

 "그럼 너는, 네가 종종 아주 은밀히 들었던 음악이 흘러오고 있는 원천에 와 있게 되는 거란다. 그리고 너 자신도 그 원천에 속하게 되는 거야. 너 자신도 그 안에서 하나의 음향을 이루는 거란다." 

 그는 모모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아직도 잘 이해 못하겠니?" 

 "알겠어요." 모모는 나직이 말했다. "알 것 같아요." 

 모모는 온통 거꾸로 된 방향으로 지나왔던 초시간의 거리를 상기하며 물었다. "박사님은 죽음(死)이신가요?" 

 호라 박사는 미소를 머금고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인간들이 죽음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거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면, 아무도 인간에게서 삶의 시간을 훔치지 않을거다." 

 "그렇다면 인간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기만 하면 되겠네요." 모모가 의견을 내 놓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호라 박사는 물었다. "나는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는 매 시간마다 그 사실을 말해 준단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인간들은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 같아. 오히려 두려움을 안겨주는 편의 말을 믿으려고 하는구나. 아무튼 풀 수 없는 수수께끼야." 

 "저는 두렵지 않아요." 모모는 말했다. 

 호라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모를 한참 바라보더니 물었다. "시간이 나오는 원천을 보고 싶니?" 

 "예." 모모는 소근거리듯 말했다. 

 "내가 데려다 주마." 호라 박사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 곳에서는 말을 하면 안돼. 아무 것도 물어서도 안되고 말해서도 안돼. 약속하겠니?" 

 모모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호라 박사는 몸을 굽혀 모모를 덥석 안아 올려 팔에 꽉 껴안았다. 그의 모습은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나이 많은 거인(巨人)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단순한 노인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태고의 고목(古木)처럼, 또는 바위산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모모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것은 모모에게 마치 얼굴에 떨어지는 가볍고 차가운 눈발(雪)처럼 감촉되었다. 

 호라 박사에 안긴 모모는 길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는듯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고 너무나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모모는 자신의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리는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점차, 실제로는 호라 박사의 발자국의 울림같이 느껴졌다. 

 퍽 긴 길이었다. 이윽고 그는 모모를 내려놨다. 그는 바로 모모의 눈 앞에 얼굴을 마주 대고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다 대었다. 이어서 그는 일어서더니 뒤로 물러섰다. 

 황금빛 여명(黎明)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한참만에 모모는 자기가 거대한 원형 지붕 밑에, 그야말로 온 하늘만큼 커 보이는 지붕 밑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이 거대한 지붕은 순전히 황금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 한가운데는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하여 하나의 빛 기둥이 검은 거울처럼 잔잔하고 매끈한, 역시 둥그런 호면(湖面) 위로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호면 바로 위, 빛의 기둥 안쪽에서 무엇인가 밝은 별같은 것이 반짝반짝했다. 그것은 장중하게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모모는 그것이 검은 수면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엄청나게 큰 진자(振子)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두둥실 떠 있을 뿐, 중력(重力)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 별의 진자가 서서히 호수의 가장자리로 점점 가까이 가자, 그곳 깜깜한 물 속에서부터 한송이 거대한 꽃봉오리가 떠올라 왔다. 그리고 진자가 가까와질수록 꽃봉오리는 점점 벌어져서 마침내는 활짝 핀 모습으로 수면 위에 떠 있었다. 

 모모는 일찌기 이토록 찬란한 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온통 광채(光彩)가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같은 꽃이었다. 모모는 그런 색채가 도대체 있다는 것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별의 진자는 한 순간 꽃 위에 머물러 있었다. 모모는 이 광경에 완전히 홀려서 주변의 모든 것을 잊어 버렸다. 다만 꽃의 향기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모모 자신 늘 동경해 왔던 그 무엇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진자는 천천히 흔들리며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진자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 동안, 그 찬란한 꽃이 시들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자, 모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더니 어두운 심연(深淵)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게 아닌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무엇이 영원히 떠나 버린듯, 모모는 크나큰 아픔을 느꼈다. 

 진자가 검은 호수의 한가운데 위에 이르렀을 때, 찬란한 꽃은 완전히 져버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두운 물 속에서 건너편 호면 위로 또 하나의 꽃봉오리가 솟아 올랐다. 그리고 진자가 천천히 이 봉오리에 접근해 가자 한층 더 찬란한 꽃이 활짝 터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모모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관찰하려고 호수를 빙 돌아갔다. 

 이번의 꽃은 앞서 핀 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역시 이 꽃의 빛깔도 모모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꽃이 더욱 풍요하고 진귀해 보이는 것 같았다. 꽃의 향기도 전혀 달랐다. 훨씬 황홀했다. 오래 동안 살펴보면 볼수록 더욱 신비스러운 세세한 부분들이 모모의 눈에 띄었다. 

 하지만 다시금 별의 진자는 방향을 돌렸고, 찬란한 빛은 사라지고 시들어 한 잎 한 잎, 바닥 모를 검은 호수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천천히 진자는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먼젓번과 똑 같은 지점에 이르지 않고 약간 멀리까지 움직여 갔다. 그리고 앞서보다 한 걸음 옆의 지점에서 또 다시 꽃봉오리가 솟아오르더니 서서히 피기 시작했다. 

 이번의 꽃은 모모가 본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꽃 중의 꽃이요, 두 번 있을 수 없는 기적(奇蹟)의 꽃이었다. 

 이 완전한 꽃 역시 시들기 시작하여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보자, 모모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렇지만 호라 박사와 한 약속을 상기하면서 울음을 참았다. 

 역시 또 반대편으로 진자는 한 걸음 더 멀리까지 흔들려 갔고, 새로운 꽃이 어두운 물 속에서 솟아 올라왔다. 

 점차 모모는 새로 피는 꽃은 번번히 앞서 핀 꽃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지금 막 핀 꽃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호수 주변을 돌면서 모모는 꽃이 차례로 솟아올라 피었다가 사라져 가는 광경을 구경했다. 그러면서도 이 광경을 바라보는 일에 조금도 지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차로 모모는 여기서는 자기가 지금껏 깨닫지 못한 일이, 전혀 다른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천장의 한가운데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의 기둥은 그저 눈으로 보이는 광경만이 아니었다―모모는 이제 그것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 그것은 아득히 나무의 수관(樹冠)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살랑거림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살랑거림은 점점 웅장해져서 폭포 소리처럼, 아니면 해안의 바위에 부딪는 바다 물결의 포효(咆哮)처럼 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모는 이 웅장한 울림이 서로 끊임없이 새로이 정렬하고 변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화음(和音)을 이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점점 또렸하게 알아 들었다. 그것은 음악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무엇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모모는 그 소리를 다시금 알아 들었다. 그것은 이미 반짝이는 별 하늘 밑에서 정적에 귀를 기울일 때 종종 들었던, 나직하게 아득히 먼 데서 울려오는것 같았던, 바로 그 음악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 울림들은 점점 더 명징(明澄)해져 갔다. 모모는 이 울리는 빛이야말로 하나하나의 꽃을 여러 꽃들 가운데서 구별되는 모습으로,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모습으로, 어두운 물의 심연에서 솟아 오르게 하여 피게 해 주는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귀 기울여 들으면 들을수록 모모는 낱낱의 소리들을 분명히 구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금과 은, 그리고 온갖 다른 금속들이 화음을 이룬 울림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화음의 배후에서, 전혀 다른 유의 소리들, 상상할 수 없는 심원(深遠)으로부터의,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부터의 소리들이 뒤이어 울려 나왔다. 이 음악은 점점 더 분명해져서 모모는 이제 점차 그것의 말(言語)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지금껏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언어였지만 알아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태양과 달과 유성과 모든 별이 그들의 고유한, 진정한 이름을 계시(啓示)하는 언어였다. 그리고 이 이름 속에야말로 이 천체들이 무엇을 하며, 시간의 꽃을 하나하나 피우고 다시 지게 하기 위해 다 같이 어울려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모모는 이 모든 언어가 자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득한 별들에 이르기까지의 온 세계가, 상상할 수 없이 무한히 큰 단 하나의 얼굴처럼 자기를 향하여 쳐다보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두려움보다도 더 큰 무엇이 모모를 엄습해 왔다. 

 그 순간, 모모는 말없이 손짓하는 호라 박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팔에 안겨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금 그의 손이 눈송이처럼 모모의 눈을 가렸다. 어둠과 정적이 내렸다. 모모는 아늑함을 느꼈다. 호라 박사는 모모를 안고 다시 긴 복도를 되돌아 왔다. 

 다시 시계 틈바구니의 작은 방에 들어 섰을 때 그는 모모를 아담한 소파에 뉘었다. 

 "호라 박사님,"하고 모모는 속삭였다. "저는 전혀 몰랐어요. 모든 인간의 시간이 그렇게……"하고 모모는 적절한 말을 더듬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위대하다는 것을……"하고 모모는 말을 맺었다. 

 "네가 보고 들은 것이, 모모"하고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시간은 아니란다. 그것은 다만 너 자신의 시간이었다. 모든 인간 속에는 방금 네가 가 있었던 그런 장소가 있어. 그렇지만 내 손에 안겨 간 사람만이 그 장소에 갈 수가 있어. 게다가 그냥 보통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가 없단다." 

 "그럼 저는 대체 어디에 가 있었나요?" 

 "너 자신의 마음 속에." 호라 박사는 말하며 모모의 더벅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호라 박사님," 모모는 다시 속삭였다. "내 친구들도 여기 데려올 수 없나요?" 

 "안 돼"하고 그는 대답했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어." 

 "그럼 대체 제가 여기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나요?" 

 "너 자신이 친구들한테 돌아갈 때까지다, 꼬마야." 

 "그럼, 별들이 내게 들려 준 얘기를 친구들한테 하는 건 괜찮나요?" 

 "해도 괜찮아. 그렇지만 네가 할 수가 없을거야." 

 "왜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에 필요한 말이 너 안에서 우선 자라야 할 테니까." 

 "그래도 나는 친구들한테 그 얘기를 하고 싶은걸요. 모두들한테! 친구들한테 그 소리들을 노래로 들려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시 잘 될 텐데요." 

 "정말 그러기를 바란다면, 모모, 너는 기다릴 수 있어야 해." 

 "기다리는 것은 저한텐 쉬워요." 

 "씨앗처럼 기다리는거야, 꼬마야. 움이 돋아나기까지 태양을 한 바퀴 돌도록 땅 속에 묻혀 잠자는 씨앗처럼. 네 안에서 말(言語)이 자라게 되기까지는 그만큼 오래 걸린단다. 그렇게 하겠니?" 

 "예." 모모는 속삭였다. 

 "그럼 자거라." 호라 박사는 모모의 눈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거라." 

 모모는 행복하게 깊은 숨을 쉬고 잠이 들었다. 

 

13  그곳의 하루, 이곳의 한 해(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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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얼마 동안 모모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잔디 뒤덮인 원형극장 옛터의 돌계단 위에 다시 와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라 박사의 집, 초공간(超空間)의 집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어느새 이리로 와 있단 말인가?

 주변은 어둡고 싸늘했다. 동쪽 지평선에서 지금 막 첫 새벽빛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모모는 으시시 떨면서 헐렁한 웃도리를 꼭꼭 여맸다.

 너무나 선명하게 모모는 그 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했다. 거북이를 좇아 대도시를 누비며 밤길을 걸어 갔던 일이며, 신비스러운 빛과 눈부시게 새하얀 집들로 가득 찬 도시 구역이며, 초(超)시간의 거리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계가 있던 홀이며, 초콜렛이랑 꿀빵이며, 호라 박사와 주고 받던 한마디 한마디 얘기며, 수수께끼며를 전부 기억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황금 천장 아래에서의 체험을 너무나 또렷이 기억했다. 두 눈을 감으면, 그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찬란한 꽃들의 광채가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올랐다. 그리고 태양과 달과 별의 음성들이, 지금도 따라서 멜로디를 부를 수 있을 만큼 쟁쟁하게 모모의 귀에서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동안, 모모의 마음 속에는 말(言語)들이 이루어져갔다. 꽃의 향기와 생전 처음 보았던 그 광채를 생생하게 표현해 주는 언어들이! 모모의 기억 속에 있는 음성들은 이 언어를 발음해 주는 소리였다. 뿐 아니라 이렇게 기억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사태가 벌어졌다. 모모는 기억 속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을 눈 앞에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점점 더 많은 것을 보는 것이었다. 마르지 않는 마술의 샘에서처럼 수천 가지의 시간의 꽃이 피어 올랐다. 게다가 꽃 하나하나가 새로운 언어를 울려 주는 것이었다. 모모는 주의깊게 자기 마음 속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써 그 언어를 뒤따라 발음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것은 신비롭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들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 언어를 뒤따라 발음하는 동안에 모모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호라 박사가 말한, 언어가 먼저 자기 안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아니면 결국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 그 모든 것이 현실로 일어난 게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는 모모의 눈에, 저 아래 둥근 광장의 한가운데서 무엇인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거북이가 거기서 아주 유유하게 뜯어 먹을 풀을 찾고 있지 않은가!

 날쎄게 모모는 거북이한테 기어 내려가 그 옆 땅바닥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거북이는 다만 힐끗 머리를 들고 그 태고의 검은 눈으로 꼬마를 유심히 훑어 보더니 다시 유유히 먹는 일을 계속했다.

 "안녕, 거북아." 모모가 말했다.

 거북이의 등에는 아무런 대답도 나타나지 않았다.

 "네가" 하고 모모는 물었다. "어제 밤 나를 호라 박사한테로 안내했었니?"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모모는 실망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참 유감이로구나." 모모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너는 그냥 보통 거북이일 뿐, 그…… 아, 이름을 잊어 버렸어. 참 예쁜 이름이었는데, 퍽 길고 야릇했어. 생전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어."

 "카시오페이아!" 갑자기 거북이의 등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문자가 나타났다. 모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그것을 알아 보았다.

 "맞았어!" 모모는 소리치며 손뼉을 쳤다. "바로 그 이름이야! 그럼 네가 그 거북이니? 네가 호라 박사의 거북이지, 응?"

 "나 말고 누구겠니?"

 "그럼 왜 아까는 대답을 안했니?"

 "아침 식사 중이야." 거북이의 등에 나타난 글자였다.

 "미안해!" 모모는 대답했다. "너를 방해할 생각은 정말 없었어. 나는 내가 어떻게 갑자기 여기 다시 와 있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야."

 "너의 소원이었어!" 대답이 나타났다.

 "이상해라." 모모는 중얼거렸다.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그럼 너는, 카시오페이아? 왜 너는 호라 박사한테 있지 않고 나를 따라왔니?"

 "나의 소원이야!"라고 거북이 등에 쓰여졌다.

 "고마와," 하고 모모는 말했다. "정말 너는 친절하구나."

 "천만에." 이것이 대답이었다. 이로써 거북이는 일단 할 말이 끝난 모양이었다. 중단했던 아침 식사를 계속하러 뒤뚱뒤뚱 기어갔다.

 모모는 돌계단 위에 앉아 베포와 지지, 그리고 어린이들을 만날 기대에 부풀었다. 그리고 자기의 가슴 깊숙이서 그치지 않고 울리고 있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완전히 혼자이고 아무도 들어 주는 이가 없는데도, 모모는 점점 큰 소리로 대담하게 멜로디와 언어를 따라서 불렀다. 지금 막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향하여. 그러는 중에 모모는 새와 귀뚜라미, 나무들, 그리고 이제는 옛 돌멩이들까지도 자기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모는 이제 오랜 시간 동안 자기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또한 자기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온통 헛일이라는 것을, 자기가 떠나가 있던 시간이 퍽 긴 시간이었으며 그 동안 세계가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행안내원 지지와는 회색 도당들도 비교적 쉽게 관련을 맺었다.

 그것은, 일년 전 모모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얼마 뒤, 지지에 관한 꽤 긴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면서 시작되었다. 거기엔 '최후의 진정한 이야기꾼'이라고 실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만날 수 있는 장소와 시간과 아울러, 이 사람이야말로 꼭 만나 볼 만한 매력있는 인물이라고 보도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지지를 보고 이야기를 들으려고 원형극장 옛터로 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물론 지지로서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떠오르는 착상(着想)대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모자를 들고 한 바퀴 돌았다. 그러면 모자는 언제나 동전과 지폐로 하나 가득 채워지곤 했다. 곧 그는 어느 여행사에 취직이 되었고,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관광 대상으로 제공하는 대신 상당한 금액을 덤으로 받았다. 여행자들은 버스에 태워져 안내되어 오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지지는, 돈을 지불하는 여행자들 모두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정규 시간표를 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부터 벌써 지지는 모모가 몹시 아쉬워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그는 아무리 두 배의 돈을 받게 되더라도 똑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하는 일은 애써 피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이야기는 이미 날개를 잃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안 가서 그는 이제 몸소 원형극장 터에 나서서 모자를 들고 돌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방송국에서 그를 끌어갔고, 곧 이어 텔리비젼 방송에도 불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이제 매주일 세번씩 수백만의 시청자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엄청난 돈을 벌어 들이게 되었다. 

 그 동안 그는 이미 원형극장 옛터의 이웃을 떠나 부유한 유명 인사들이 사는 도시의 전혀 딴 구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잘 손질된 정원의 한 복판에 자리잡은 현대식 커다란 주택에 세(貰)들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미 스스로를 지지라고 부르지 않고 지로라모라고 칭했다. 

 물론 그는 옛날처럼 끊임없이 새 이야기를 창안해 내는 일 따위는 오래 전에 집어 치워 버렸다. 도무지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살림을 하듯이 자기의 착상을 다루기 시작했다. 이젠 한가지 착상에서 곧잘 다섯가지 이야기를 조리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점 늘어가는 주문에 응하기에는 이것 역시 여의치 않게 되자, 어느날 그는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저질렀다. 즉 오로지 모모만을 위한 이야기 중의 하나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 역시 다른 모든 이야기들처럼 단숨에 꿀꺽 삼켜졌고, 당장에 잊혀져 버렸다. 사람들은 지지에게 계속 이야기를 요구하였다. 지지는 이제까지와 똑 같은 템포로, 오로지 모모만을 위해서 정해졌던 모든 이야기들을 별 깊은 생각 없이 잇달아 쏟아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이야기를 해 버렸을 때, 그는 불현듯 자신이 빝바닥까지 푹 패여 텅 비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다시는 창작을 할 수 없을 것같은 느낌에 빠졌다. 

 지금까지 이룬 성공이 그를 떠나리라는 불안 속에서, 그는 자기의 모든 이야기를 주인공의 이름만 바꾸고 약간 손질해서 재탕을 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점은 어느 누구도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하여간 그렇다고 해서 그를 향한 주문이 줄어 들지는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나무 판자에 매달리듯이 지지는 이같은 주문에 매달려 있었다. 어쨌든 지금 그는 부(富)와 명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항상 꿈꾸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밤이 되어 비단 누비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면, 그는 곧잘 옛날의 생활, 모모와 베포 노인, 어린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자기 자신 진정으로 이야기할 줄을 알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갈 길은 없었다. 모모가 사라진 채 영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지지도 몇 번 모모를 찾으려고 열심히 시도를 했었지만 나중엔 그럴 시간이 없어져 버렸다. 지금 그는 세 사람의 유능한 여비서를 거느리고, 그들로 하여금 계약을 체결하게 하고, 자기의 이야기를 받아쓰게 하고, 광고며 시간 약속을 맡아 조정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모를 찾기 위한 시간은 이미 한번도 스케줄에 끼어 들어가지 않았다. 

 옛날의 지지의 요소(要素)는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이 얼마 안 남은 옛날의 자기를 끌어 모아서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나는 "수백만이 귀 기울여 듣는, 관록을 가진 음성의 주인이 아닌가"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 아닌 그 누가 인간에게 진리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인간에게 회색 도당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러면서 이것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모모를 찾은 일에 내 모든 청중도 도와 달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옛 친구들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숱한 밤 중의 어느날 밤, 그는 이같은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자 벌써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스케줄의 초안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미처 한 글자도 써 내려가기 전에 전화 벨이 울렸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귀를 기울이다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야릇하게 억양 없는, 말하자면 잿빛 음성이 말을 건네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골수에서부터 배어나오는 듯한 오한을 느꼈다. 

 "그만 둬!" 음성이 말했다. "선의(善意)에서 하는 충고다." 

 "누구요?" 지지는 물었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음성이 대답했다. "우리를 소개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실상 개인적으로는 아직 우리와 어울린 적이 없지만, 너는 벌써 오래 전부터 완전히 우리 편에 가담하고 있어. 그 사실을 몰랐다고는 말 못하겠지!" 

 "너희들이 나한테서 바라는 게 무엇이냐?" 

 "네가 지금 계획한 일이 우리 마음에 안들어. 얌전히 그냥 덮어 놓지 않겠나?" 

 지지는 있는 용기를 다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 수 없다." 그는 말했다. "그냥 덮어놓을 수가 없어. 나는 이제 애숭이가 아니야. 이름없는 여행안내원 지지가 아니란 말이다. 지금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어. 너희들이 나랑 맞서 겨룰 수 있는지 한번 할 테면 해 보렴." 

 음성은 억양 없이 웃었다. 그러자 갑자기 지지의 이빨이 딱딱 마주치기 시작했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음성이 말했다. "우리가 너를 만들었어. 너는 고무 인형에 지나지 않아. 우리가 너를 크게 부풀리게 불었어. 그렇지만 네가 우리의 비위를 건드리면 다시 너한테서 공기를 빼낼 거야. 아니면 너는 지금의 네가, 바로 너 자신의 힘으로, 네 하잘 것 없는 재간의 덕분으로 만들어졌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니?" 

 "그래,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지지는 목이 잠겨 대답했다. 

 "가엾은 애숭이 지지"라고 음성이 울려왔다. "너는 여전히 몽상가(夢想家)로구나. 옛날에 너는 가난한 떠돌이의 허울을 쓴 왕자 지로라모였지. 그럼 지금의 너는 누구냐? 왕자 지로라모의 허울을 쓴 가난한 떠돌이 지지인 거야. 그렇다 해도 너는 우리한테 감사해야 해. 결국는 너의 모든 꿈을 채워 준 것은 어쨌든 우리들이었으니까." 

 "그것은 진실이 아니야!" 지지가 더듬거렸다. "거짓말이야!" 

 "원!" 음성은 대답하며 다시 억양 없이 웃었다. "하필 우리 앞에서 진실을 들먹일 작정이냐? 하기야 옛날에는 진실이냐 진실이 아니냐에 관한 그럴싸한 문투가 흔해 빠졌었지. 아, 어림도 없어, 한심한 지지. 진실을 끌어 들이려고 들면 돈벌이가 안 돼. 네가 허풍선 노릇하는 것을 우리가 도와 주었기 때문에 너는 유명해진거야. 진실은 너한테는 적성(適性)이 아니야. 그러니 그냥 덮어 놔!" 

 "너희들 모모를 어떻게 했니?" 지지는 중얼거렸다. "그런 것 때문에 네 잘난 더벅머리를 썩히지 말아! 너는 이제 그 애를 구해 낼 수가 없어. 더구나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는 어림없는 수작이야. 네가 지금의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네 성공을 그만큼 빨리 몰아내는 결과밖에 안가져 와. 물론 그건 너 자신이 결정할 일이지. 그것이 네게 그토록 중요하다면, 네가 영웅심을 발휘하면서 너를 망치는 것을 우리는 말리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우리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앞으로도 우리의 보호의 손길이 계속 너를 받쳐 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을거다. 부귀와 명성을 누리는 편이 아무튼 훨씬 편안하지 않니?" 

 "그렇긴 해." 지지는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자, 그것 봐! 그럼, 이것으로 얘기는 끝난거야. 알겠지? 사람들한테는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계속 들려 주는 편이 좋아!" 

 "어떻게 그렇게 하지?" 지지는 안간힘을 쓰면서 항의했다. "나 자신 모든 진상을 알아 버린 이 마당에." 

 "내가 근사한 충고를 하나 하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 그것은 사실 너한테 달린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마음을 돌리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잘 해 나갈 수 있어!" 

 "알았어." 지지는 중얼거리며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음을 돌리면……." 

 그리고 나서 수화기 저편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지지도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는 커다란 자기 책상에 엎드려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없는 흐느낌이 그를 뒤흔들었다. 

 이 날부터 지지는 자신에 대한 긍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새로 세웠던 계획을 포기하고 지금까지처럼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깃군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하긴, 사실 그는 사깃군이었다. 이전의 그의 안내자는 그의 환상(幻想)이었고,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환상의 너울치는 길을 따라 걸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중(大衆)의 어릿광대 짓을 했고 꼭둑각시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일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야기들은 점점 천박하거나 신파조(新派調)가 되어갔다. 그런데도 그것이 그의 성공을 깎아 내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칭해지며 숱한 사람들의 흉내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대 유행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지지 자신은 거기서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누구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는가를 알았던 것이다. 그는 결국 아무 것도 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동차를 타고 끊임없는 스케줄에 따라 쫓기었고,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날아 다녔고, 어디를 가거나 끊임없이 여비서로 하여금 그의 옛 이야기들에 새 옷을 입혀 받아쓰게 하였다. 그는―모든 신문에 보도되었듯이―'놀랍게 창작력이 풍부'했다. 

 이렇게 몽상가 지지는 사깃군 지로라모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회색 도당이 도로청소부 베포 노인을 수중에 넣는 데는 훨씬 힘이 들었다. 

 모모가 사라져 버린 그날 밤 이후로 그는 일에서 빠져 나오기만 하면, 원형극장 옛터에 앉아 기다렸다. 걱정과 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지지가 늘어 놓았던 온갖 타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찰한테로 갔다. 

 "어쨌든" 하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경찰이 모모를 다시 창살 있는 고아원에 처넣는 편이, 회색 도당한테 잡혀간 거보다 낫겠어. 아무튼 살아 있기만 한다면. 그런 고아원에서는 모모가 벌써 한번 빠져나온 적이 있으니까 또 그럴 수 있겠지. 아예 모모가 고아원에 들어가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히려 걱정해야 할는지 모르겠어. 어쨌든 우선 가서 찾아 봐야겠어." 

 그는 제일 가까이 있는 도시 변두리 파출소로 갔다. 잠시 그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두 손으로 모자를 돌리며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들어섰다. 

 "무슨 일이오?" 마침 길고 어려운 서식(書式)용지에 뭔가 열심히 기입하고 있던 경찰관이 물었다. 

 베포가 입을 떼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요컨대 어떤 무서운 사태가 벌어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요?" 경찰은 여전히 계속 기록을 하면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그건" 베포가 대답했다. "우리의 모모에 관한 일입니다." 

 "어린애요?" 

 "예, 조그만 소녑니다." 

 "당신의 아이인가요?" 

 "아니오." 베포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니요, 그러니까 네!" 경관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럼 대체 누구의 아이인가요? 부모가 누구요?" 

 "아무도 모릅니다." 베포는 대답했다. 

 "그럼, 그 아이는 어디에 계출(屆出)이 되어 있나요?" 

 "계출이라니요?" 베포가 물었다. "아, 저, 우리들한테 되어 있읍지요. 우리는 모두 그 애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출이 안 되어 있군요." 경찰은 한숨을 쉬면서 잘라 말했다. 그것은 법에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방향을 잡겠소! 어린애는 누구한테 가서 살고 있소?" 

 "자기 집에 삽니다." 베포는 대답했다. "그러니까 원형극장 옛터에 삽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없어요. 없어졌습니다." 

 "잠간" 하고 경관은 말했다. "내가 똑 바로 알아들었다면, 지금까지 저기 변두리 폐허 속에서 떠돌이 꼬마가 살고 있었지요. 뭐라더라…이름이 뭐라고 했소?" 

 "모모" 베포는 대답했다. 

 경관은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모모라는 이름. 모모, 그리고 또? 본명을 말해 보시오!" 

 "모모, 그뿐입니다." 베포가 말했다. 

 경관은 턱 밑을 긁으면서 딱하다는듯이 베포를 바라보았다. 

 "이걸 가지고는 안됩니다, 영감님. 도와 드리고 싶소만, 이걸로는 광고를 낼 수가 없어요. 그럼 일단 영감님 성함부터 말해 보시오." 

 "베포라고 합니다." 베포는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도로청소부 베포입니다." 

 "나는 이름을 묻고 있소, 직업이 아니오!" 

 "그것이 두 가지 다입니다." 베포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빌어먹을!" 그는 부아가 나서 중얼거렸다. "왜 하필 지금이 근무 당번이람." 

 그리고 그는 몸을 똑 바로 일으켜 어깨를 펴고는, 노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듯 미소를 지으면서 병자를 돌보는 사람처럼 상냥하게 말했다. "신원에 관한 건 나중에 조사할 수도 있겠지요. 우선 차근차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든 것이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보시오." 

 "모든 것이라니요?" 베포는 의아스럽게 물었다.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것 말이오." 경관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도대체 시간이 없소. 점심 때까지 이 산더미같은 서류를 전부 채워 넣어야 해요. 피곤해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참이요. 그렇지만 마음 놓고 차근차근히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해 보시오." 

 그는 등을 기대고 분신(焚身) 직전의 순교자의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베포 노인은 그 특유의 괴퍅스럽고 힘든 방식으로 모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모모의 출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애의 아주 유다른 특성, 그리고 자기 자신 엿들은 쓰레기 하치장에서의 회색 도당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하고 그는 말을 맺었다. "모모가 실종되었습니다." 

 경관은 뚱하니 한참 동안 베포를 바라보았다. 

 "바꿔서 말하면," 하고 그는 이윽고 입을 떼었다. "언젠가, 신원을 증명할 수 없는 기막히게 비상한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소녀가 세상에는 알리지지 않은 일종의 유령들에 의해, 어디인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납치되어 갔다 이거군요. 하지만 그것도 확실치는 않구요. 거기에다 대고 경찰이 신경을 써야 한다 이건가요?" 

 "예, 부탁입니다!" 베포는 말한다. 

 경관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험상궂게 소리쳤다.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어 보시오!" 

 베포는 이 요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고는 공손하게 경관의 얼굴에 입김을 내쉬었다. 

 경관은 코를 벌름거리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분명코 취하지는 않으셨군요." 

 "아니오." 베포는 당황해서 새빨개져서 중얼거렸다. "나는 취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 엉터리 없는 넌센스를 이야기했소?" 경관은 물었다. "그런 옛날 이야기에 넘어갈 만큼 경찰이 바보라고 생각하시오?" 

 "그렇습니다." 베포는 악의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드디어 경관의 참을성이 폭발해 버렸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까다롭고 긴 서식 용지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그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소리를 질렀다. "당장 꺼지시오! 안 그러면 관직모욕죄(官職侮辱罪)로 감금하겠소!" 

 "용서하십시오." 베포는 겁에 질려서 우물우물 말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만……." 

 "나가요!" 경관은 고함을 쳤다. 

 베포는 몸을 돌려 나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는 몇 군데 다른 경찰서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연출된 장면들도 첫번째의 장면과 별 차이가 없었다. 어떤 곳에서는 쫓아냈고, 어떤 곳에서는 친절하게 집으로 보냈고, 또는 단지 그를 떼어 버리기 위해 듣기 좋은 말로 위로를 했다. 

 하지만 한번은, 베포는 어떠한 경관들보다도 유모어 감각이 없는 고위 관리한테 걸려들었다.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나더니 차갑게 말했다. "이 영감은 돌았군. 이 영감이 공안(公安)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을 해야겠어. 구치소에 처넣어!" 

 구치소에서 베포는 반나절을 기다린 뒤에 두 경관에 의해 자동차에 실렸다. 그들은 도시를 가로 질러 창살이 있는 크고 흰 건물로 베포를 싣고 갔다. 그러나 그곳은 베포가 처음에 생각했던 감옥이나 그런 비슷한 곳이 아니라, 정신병자를 취급하는 병원이었다. 

 여기서 그는 철저한 검진을 받았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그를 친절히 대했다. 조롱하지도 않았고 욕을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이야기에 상당히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베포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미 한 이야기를 되풀이시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들은 자기한테 대해 한 마디도 반대 의사를 나타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베포는 그들 역시 자기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의 속마음을 석연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들도 역시 베포를 풀어 주지는 않았다. 

 대체 언제쯤 나갈 수 있느냐고 베포가 물어 볼 때마다 대답인 즉 "곧 나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좀더 당신이 필요합니다.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꽤 진전을 보았어요." 

 이 조사가 꼬마 모모의 행방과 상관된 것이라고 믿고 있는 베포는 끈기있게 기다렸다. 

 다른 많은 환자들과 공동으로 쓰는 커다란 침실에 그의 침대가 지정되었다. 어느날 밤, 그는 잠에서 깨어나 희미한 비상등 불빛 속에 웬 사람이 자기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타들어 가는 시가의 빨간 불티만 눈에 뜨이더니, 곧 어둠 속의 인물이 들고 있는 서류 가방과 중산 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이 회색 도당의 일원이라는 것을 베포는 깨달았다. 그리고 심장 속까지 추위를 느끼며 살려 달라고 외치려 했다. 

 "조용히 하시오." 잿빛 음성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당신한테 제안을 전하라는 사명을 맡고 왔소. 내 얘기를 듣고 당신의 대답을 요구할 때 답을 해 주시오! 당신도 필시 우리의 힘이 벌써 얼마나 뻗쳐 있는가를 어느 정도 보았을 거요. 그 점에 관해 더 알게 되는 것은 순전히 당신한테 달려 있소. 당신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보는 사람한테마다 떠든다 해도, 사실 우리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소. 하지만 그건 우리한텐 불쾌한 일이오. 아무튼 당신의 꼬마 친구 모모가 우리한테 잡혀와 있으리라는 당신의 추측은 전적으로 옳소. 그러나 우리한테서 행여 꼬마를 찾아낼 희망은 포기하시오. 그건 어림없는 일이오. 그 아이를 풀어 주려고 당신이 아무리 애쓴다 한들, 그것이 가련한 꼬마의 상황을 편안하게 하지는 못할거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려고 꾀하든, 해보시오, 그 때마다 꼬마가 보상을 치를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는 당신의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시오." 

 회색 사나이는 담배 연기로 몇 개의 동그라미를 내뿜더니, 자기의 말이 베포 노인에게 주는 효력을 눈여겨 바라보며 만족해 했다. 베포는 사실 그 모든 말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시간도 값진 것이니까, 간단하게 딱 잘라 말하겠소."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겠소. 당신이 다시는 우리들의 정체와 활동 내용에 대해 한마디도 안한다는 조건부로 꼬마를 내 주겠소. 그뿐 아니라, 말하자면 풀어 주는 몸값으로, 십만 시간의 저축액을 요구하오. 우리가 그 시간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하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그건 우리의 소관 사항이오. 당신은 다만 그만한 시간을 저축할 임무를 갖고 있을 뿐이오.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오. 당신이 여기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며칠 안에 여기서 풀려 나가도록 배려하겠소.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눌러앉아 있게 되고, 모모는 영원히 우리한테 잡혀 있게 되는 거요. 신중히 생각하시오. 이 관대한 제의를 우리는 지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거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소?" 

 베포는 두 번 침을 꿀꺽 삼키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합니다." 

 "아주 현명한 판단이오." 회색 사나이는 기분이 좋아 말했다. "그러면 이 점을 염두에 두시오. 함구무언(緘口無言)할 것과 십만 시간. 그만한 저축액을 우리가 받는 대로 꼬마 모모를 돌려 주겠소. 안녕히 계시오, 선생." 

 그리고 회색 사나이는 침실을 떠났다. 그가 남기고 간 담배 연기의 가닥이 어둠 속에서 도깨비 불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이날 밤 이후로 베포는 자기의 이야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왜 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다만 서글픈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며칠 안 가서 그는 집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베포는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자기와 동료들이 항상 빗자루와 수레를 배급받는 마당이 있는 큰 건물로 갔다. 그는 빗자루를 갖고 대도시로 가서 쓸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옛날처럼 한 발짝마다 한 숨 쉬고, 한 숨마다 한 번 비질을 하는 식으로 쓸지를 않고 성급하게, 일에 애착이 없이, 오로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쓸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 밑바닥의 확신을, 곧 자신의 지금까지의 전 삶을 부정(否定)하는 것이며 배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뼈아프게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혐오감에 싸여 베포는 괴로와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한 사람에 국한된 것이기만 했더라도, 그는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기를 택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모모와 상관된 것이었다. 모모를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시간 절약의 방법이었다. 

 그는 집에조차 가지 않고 밤낮으로 청소를 했다. 견딜 수 없이 피로가 몰려오면 공원의 벤치나, 때로는 그냥 하수구 덮개 위에 앉아 깜박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벌떡 일어나 쓸기를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음식도 그 새에 성급히 후딱 아무거나 꿀꺽 삼켰다. 원형극장 옆에 있는 그의 오두막으로는 그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몇 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록 청소를 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왔다. 베포는 마냥 쓸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왔다. 베포는 계절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는 십만 시간의 몸값을 절약하기 위해 쓸고 또 쓸기만을 계속했다. 

 대도시의 사람들은 이 조그만 노인에게 시선을 돌릴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가 아주 드물게 그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도 그 일에 목숨이 걸린 양 빗자루를 휘두르며 헐레벌떡 서둘러 비질을 하며 휙 지나치는 이 노인을 보고는, 등 뒤에서 조롱하며 이마를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은 베포로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어서, 별로 개의치를 않았다. 다만, 대체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잠간 동안 일을 중단하고, 묻는 사람을 겁먹은 표정으로 슬픔에 가득 차서 바라보며 입에다 손가락을 대었다. 

 회색 도당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모모의 친구인 어린이들을 자기네 계획대로 조종하는 일이었다. 모모가 실종된 뒤에도 어린이들은 틈만 나면 원형극장 옛터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환상적인 세계 여행을 떠나거나, 성곽과 궁전을 짓기 위해 그들에겐 몇 개의 낡은 상자와 궤짝만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열심히 생각해서 계획을 세우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요컨대, 아이들은 모모가 마치 여전히 자기네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실제로 모모가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어린이들은 모모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한 얘기가 화제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었다. 말없는 확신이 어린이들을 서로 굳게 묶어 놓고 있었다. 모모는 그들 안에 있었고, 지금 여기에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이 그들의 내밀(內密)의 중심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고는 회색 도당도 손을 뻗칠 수가 없었다. 

 어린이들을 모모와 떼어 놓기 위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회색 도당들은 결국 간접적인 우회(迂廻) 조처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간접 수단이 바로 어린이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있는 어른들이었다. 물론 모든 어른들이 아니라, 조력자로서 적합한 어른들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어른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어린이 자신이 쓴 무기를 이번엔 회색 도당이 어린이를 향해 적용시킨 것이었다. 

 즉, 몇몇 사람이 불현듯 지난 날의 행진을, 그리고 어린이들의 플래카드와 격문을 상기해 낸 것이었다. 

 "우리는 무슨 조처를 강구해야 합니다." 어떤 어른이 제의했다. "외톨박이가 되는 어린이가 점점 늘고 등한시되는 상태가 그냥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어른들을 탓할 수는 없지요. 현대 생활이라는 것이 어른들로 하여금 아이들한테 충분히 몰두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니까요. 시(市)행정당국에서 이 점을 배려해야 합니다." 

 "이 상태가 계속될 수는 없지요."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떠돌아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원활한 교통 소통이 난관에 부딪치고 있어요. 길거리의 어린애들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의 증가는 점점 많은 금액을 지출시킵니다. 이 금액을 좀더 현명하게 다른 방법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 

 "감독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하고 또 다른 이들이 확언했다. "도덕적으로 퇴폐하고 범죄자로 성장합니다. 시당국은 모든 어린애들을 관리하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쓸모있고 유능한 사회의 성원으로 자랄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도 의견을 말했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인적(人的) 자원입니다. 미래는 제트기와 전자 두뇌의 시대입니다. 이 모든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수많은 전문가와 숙련공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어린이들한테 내일의 세계를 위한 준비를 시키는 대신, 수많은 어린애들이 몇 해 동안의 소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놀이로 허송하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명의 수치요, 미래의 인류에 대한 범죄입니다." 

 이 모든 의견은 시간 절약가들에게 기막힌 공감을 자아냈다. 게다가 이미 이 대도시에는 상당수의 시간 절약가가 있었기 때문에 소홀히 다뤄지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위한 조처의 필요성을 시 행정당국에 납득시키는 데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이어서 도시의 모든 구역마다 이른바 '탁아소'가 설립되었다. 그것은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모든 어린이들이 떠맡겨졌다가 가능한대로 다시 찾아 갈 수 있는 커다란 집이었다. 어린이들이 거리에서나 녹지대(綠地帶), 또는 어디서든 노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어떤 어린이든 일단 그런 데서 놀다가 들키는 날이면, 당장 그것을 본 어른에 의해 가장 가까이 있는 탁아소로 옮겨졌다. 게다가 부모는 그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어야 했다. 

 모모의 친구들도 이 새로운 규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각기 속한 구역에 따라서 서로 갈라져 여러 탁아소에 처박혀졌다. 그들이 여기에서 스스로 놀이를 창안해 놀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놀이는 감독하는 사람들에 의해 처방이 되었고, 그것은 한결같이 어떤 유용한 것을 습득케 하는 놀이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물론 다른 무엇을 잊어 갔다. 그것은 기뻐하고, 열광하며, 꿈을 갖는 일이었다. 

 점점 어린이들도 꼬마 시간 절약가들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하라고 시키는 일을 그들은 억지로, 재미없어 하며, 적의를 갖고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혼자 힘으로 처리하도록 내맡겨지면, 전 같으면 떠올렸을 좋은 생각들을 하나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 중에서 그들이 지금까지 할 수 있는 유일한 장기(長技)는 떠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물론 즐겁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고 화를 내며 떠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회색 도당은 어린이 중의 누구에게도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대도시 위로 쳐 놓은 그물은 이제 틈새 없이 촘촘하고―겉으로 보기에는―찢어 버릴 수 없이 견고했다. 아무리 영악한 어린이들이라 해도 이 그물의 코를 뚫고 빠져 나가지는 못했다. 회색 도당의 계획은 이뤄진 것이었다. 모모가 돌아올 것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것이었다. 

 그 때부터 원형극장 옛터는 텅 비고 버림받은 채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모모는 지금 돌계단에 앉아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온 후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해가 서쪽 지평선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졌고 추워졌다. 

 이윽고 모모는 일어섰다. 배가 고팠다. 모모에게 음식을 갖다 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 지지와 베포까지도 오늘은 모모를 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걸거야, 내일이 되면 밝혀질 무슨 어이없는 우연일거야, 라고 모모는 생각했다. 

 모모는 거북이한테로 내려갔다. 거북이는 벌써 잠을 자려고 껍질 속에 기어 들어가 있었다. 모모는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주저하면서 손마디로 거북이의 등을 톡톡 쳤다. 거북이는 머리를 내밀고 모모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모모는 말했다. "내가 잠을 깨웠다면,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왜 오늘 하루 종일 내 친구들이 한명도 안 왔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거북이의 등에 글자가 나타났다. "아무도 이제 없어." 

 모모는 글자를 읽었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좋아." 모모는 자신있게 말했다. "내일이면 곧 밝혀질거야. 내일은 내 친구들이 꼭 올거야." 

 "다시는 안 와." 이것이 대답이었다. 

 모모는 희미하게 빛나는 글자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니?" 드디어 모모는 불안스럽게 물었다. "대체 내 친구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니?" 

 "모두들 떠나갔어." 모모는 읽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 카시오페이아. 어제만 해도 친구들이 전부 허탕친 대집회에 왔었는걸." 

 "네가 오래 잤어." 카시오페이아의 대답이었다. 

 모모는 자기더러 땅 속의 씨앗처럼 태양을 한바퀴 돌도록 잠을 자야 한다고 한 호라 박사의 말을 상기했다. 그 말에 찬성을 하면서도 모모는 그것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를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렴풋이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모모는 속삭이듯 물었다. 

 "일년과 하루." 

 이 대답을 이해하기까지 모모는 한참이 걸렸다. 

 "그렇지만 베포와 지지는" 하고 드디어 모모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두 친구는 분명코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이제 아무도 없어"라고 거북이 등 위에 씌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모모의 입술이 떨렸다. "그렇게 간단히 모든 것이 떠나버릴 리가 없어. 옛날의 모든 것이……." 

 그러자 서서히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한 단어가 비쳤다. "흘러갔어." 

 생전 처음으로 모모는 온 힘을 다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느꼈다. 가슴이 전에 없이 무거워졌다. 

 "그렇지만 나는" 하고 모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여전히 여기 와 있는데…."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모모는 거북이가 자기의 맨발을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네 곁에 있잖아!" 거북이 등에 쓰여 있었다. 

 "그래." 모모는 용기를 얻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내 곁에 있구나, 카시오페이아. 정말 기뻐. 이리 와, 우리 자러 가자." 

 모모는 거북이를 안고 성벽 구멍을 지나 자기의 방으로 내려갔다. 기울어가는 햇빛 속에서 모든 것이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이 보였다(베포가 그 당시 방을 다시 청소했었다). 다만 사방에 두터운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궤짝 판자로 만든 작은 탁자 위 양철 상자에 편지가 하나 기대어져 있었다. 편지 역시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모모에게"라고 봉투 위에 쓰여 있었다. 

 모모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받는 일이 생전 처음이었던 것이다. 모모는 편지를 손에 들고 사방으로 살펴보고는 봉투를 찢어 쪽지를 꺼내었다. 


    사랑하는 모모! 

 나는 이사를 했어. 돌아오면, 즉시 나한테 연락하기 바란다. 

 네가 걱정스럽기 짝이 없어. 정말 보고 싶어. 너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 배가 고프면 니노한테 가기 바란다. 니노가 나한테 청구서를 보내면 내가 다 계산을 할게. 그러니까 먹고 싶은대로 먹기만 해, 알았지? 자세한 얘기는 니노가 너한테 해 줄거야. 나를 여전히 사랑하길 바란다. 나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 

 

   항상 너의 것인 지지      

 

 분명히 지지가 한껏 애를 써서 보기 좋고 똑똑하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모모가 이 편지 내용을 알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마침내 편지를 다 읽었을 때 마지막 한 줄기 햇빛이 깜박 져버렸다. 

 하지만 모모는 위안을 느꼈다. 

 모모는 거북이를 들어 자기 옆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먼지 투성이의 이불을 덮으면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 카시오페이아, 나는 혼자가 아니잖아." 

 하지만 거북이는 벌써 잠든 모양이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생생하게 지지를 눈 앞에 보았던 모모는, 이 편지가 벌써 거의 일년 동안 여기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다. 

 모모는 편지를 뺨에 대었다. 이제는 이미 춥지가 않았다. 

 

14  너무 많은 음식과 너무 적은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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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모모는 거북이를 옆구리에 끼어 안고 니노의 작은 주막집을 향해 집을 떠났다. 

 "이제 보라고, 카시오페이아." 모모는 말했다. "곧 모든 것이 밝혀질거야. 니노 아저씨는 지지랑 베포 할아버지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어. 그럼 찾아 가서 어린이들을 모아 오면 우리는 다시 모두 한데 모이게 돼. 아마 니노 아저씨랑 아줌마도 같이 올는지 몰라. 또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너도 좋아할거야. 내 친구들 말야. 오늘 저녁 작은 잔치를 벌일까 봐. 나는 꽃들에 관해서, 음악에 대해서, 호라 박사랑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어. 아, 모두들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까 지금부터 기뻐. 하지만 지금 당장은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할 것이 즐거워. 정말 배가 고프단 말이야." 

 이렇게 신이 나서 모모는 재잘거렸다. 그리고 몇 번이고 거듭 웃도리 속에 품고 온 지지의 편지를 더듬었다. 하지만 거북이는 그 태고(太古)의 눈으로 모모를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 

 모모는 걸으면서 흥얼거리다가 나중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제 불렀던 기억 속의 멜로디와 언어가 지금도 똑 같이 생생하게 다시 음성으로 흘러 나왔다. 모모는 이 음성을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모모는 노래를 뚝 그쳤다. 니노의 주막집 앞에 이른 것이었다. 처음에 모모는 길을 잘못 들어 선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비바람에 얼룩진 회벽의 낡은 집과 문 앞의 작은 정자 대신에, 이제는 거리 쪽의 벽면이 온통 커다란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길다란 건물이 콘크리트 상자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도로 자체도 그 새에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고 그 위로 수많은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길 건너편 쪽으로는 대규모의 주유소와 그 옆에 커다란 사무실 건물이 서 있었다. 수많은 차들이 새 주막 앞에 주차를 하고 있었고, 주막집 입구 위로는 대문자로 새겨진 간판이 휘황하게 눈에 띄었다. 

니노의 스피드 식당 


 모모는 들어 서서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창가를 따라서 마치 이상스런 버섯 모양으로 보이는, 높은 막대기 위에 조그만 판이 얹혀진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테이블은 어른들이 선 채로 먹을 수 있게끔 높았다. 의자란 아예 없었다. 

 반대편으로는 번쩍이는 금속 막대로 된 긴 철책이, 일종의 울타리처럼 쳐져 있었다. 그 뒤로 좁은 간격을 두고 유리 상자들이 열지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햄 빵, 치즈 빵, 소시지, 살라드 접시, 푸딩, 케익 등 모모로서는 알 수 없는 온갖 음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모모가 그 모든 것을 알아 보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꽉 차 붐비고 있어서 모모 자신 사람들한테 끊임없이 거치적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들어 서려 해도 옆으로 밀쳐지거나 계속 떠밀려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시랑 병이 얹힌 쟁반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비좁은 테이블의 한 자리를 날쌔게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급하게 먹고 있는 사람들 뒤로는 벌써 다른 사람들이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기다리는 사람과 먹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친절한 말이 오고 갔다. 요컨대 사람들 전부가 상당히 불쾌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금속 울타리와 유리 상자 사이로 사람들의 긴 열이 서서히 밀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들 여기 저기 유리 상자 속에서 접시, 음료수 병, 종이 컵을 집어들었다. 

 모모는 깜짝 놀랐다. 여기서는, 그러니까 누구나 마음대로 다 가질 수 있구나! 그러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최소한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여기 있는 모든 것은 공짜인지 몰라!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 모르지. 

 한참 후 모모는 니노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니노는 수많은 사람들한테 가려진 채 유리 상자의 긴 대열의 맨 끝 계산대 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계산기를 끊임없이 두들겨 대며 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니노한테 사람들은 돈을 내는구나! 그리고 누구든지 금속 울타리를 지나 니노를 거치지 않고는 식탁 쪽으로 갈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니노 아저씨!" 모모는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 틈을 헤집고 빠져 나가려 했다. 그리고 지지의 편지를 들고 신호를 보냈지만 니노는 알아듣지 못했다. 계산기가 요란한 소음을 내는데다가, 그것을 취급하는 데는 극도의 주의력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모모는 마음을 다잡고 울타리를 타고 넘어 사람들의 장사진을 헤치고 니노한테 달려갔다. 니노는 눈을 들었다. 몇 사람인가 큰 소리로 투덜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모모를 보자, 니노의 얼굴에서는 문득 불쾌한 표정이 씻은듯 가셔졌다. 

 "모모!" 그는 소리치며 옛날과 꼭 같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왔구나! 정말 뜻밖이야!" 

 "차례대로 나갑시다!" 줄지어 선 사람들이 소리쳤다. "저 꼬마는 우리처럼 저 뒤에 가서 줄을 서야 해요. 그냥 새치기하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원, 염치없는 계집애라니!" 

 "잠간만 기다리십시오!" 니노는 큰 소리로 말하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는듯 손을 들었다. "잠간만 참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럼 누구나 그렇게 하게!" 기다리고 있는 행렬 중의 한 사람이 욕지거리를 했다. "앞으로 나가요, 앞으로! 어린애는 우리보다 시간이 많아요." 

 "지지가 네 몫을 전부 지불할거야, 모모." 니노는 꼬마에게 성급히 소근거렸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먹어.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저 뒤에 가서 서. 너도 들었잖아!" 

 무슨 말을 더 물을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모모를 떠밀어 버렸다. 결국 모모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 같이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장사진의 끝에 붙어 서서 선반에서 쟁반을 집어 들고, 상자 속에서 나이프와 포크와 숟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서서히 한 발짝씩 떠밀려 갔다. 쟁반을 드는 데 두 손을 다 써야했기 때문에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를 할 수 없이 쟁반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가면서 유리 상자 속에서 이것 저것 끄집어 내어 거북이 주변에 놓았다. 

 그렇게 하긴 했지만 모모는 사실 당황했기 때문에 정말 괴상하게 음식을 주워 모아 왔다. 구운 생선 한 조각, 잼빵 한개, 소시지 한 쪽, 작은 고기만두 한개, 그리고 종이컵에 든 레몬 쥬스였다. 한가운데의 카시오페이아는 껍질 속에 완전히 기어 들어간 채 여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드디어 계산대 앞으로 오게 되자, 모모는 재빨리 물었다. "지지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래,"하고 니노는 말했다. "우리의 지지는 유명해졌어. 우리 모두가 그를 자랑스러워하지. 어쨌든 지지는 우리들 중의 하나니깐! 지지는 텔레비젼에도 자주 나오고 라디오에서도 얘기를 해. 신문에는 언제든지 지지의 기사가 나지. 얼마 전에는 두 사람의 기자가 나한테까지 찾아 와서 옛날의 얘기를 해 달라고 하겠지. 나는 기자들한테 얘기를 해 줬어. 옛날에 지지가 어떻께……." 

 "앞으로 나가시오!" 행렬 중의 몇 음성이 외쳤다. 

 "그렇지만, 왜 지지는 안 오는 거지요?" 모모는 물었다. 

 "아, 저…… 말이야." 어느새 약간 신경질이 된 니노가 소근댔다. "지지는 지금 시간이 없단다. 그는 지금 훨씬 중요한 일을 해야 하고 원형극장에는 어찌 되었든 별 볼 일이 없어졌으니까." 

 "대체 뭘 하고 있는거요?" 뒤에서 여러 사람의 불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서 이렇게 마냥 죽치고 기다리는 게 우리 기분에 맞으리라고 생각하시오?" 

 "대체 지지는 어디 살아요?" 모모는 집요하게 물었다. 

 "초록빛 언덕 위 어딘가 살아." 니노는 대답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지지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근사한 별장을 갖고 있대. 하지만 우선 지금은 그냥 지나가라, 응!" 

 모모는 아직도 너무나, 너무나 물을 것이 많았기 때문에 도저히 물러날 마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별 수 없이 계속 떠밀려졌다. 그래서 쟁반을 든 채 버섯 모양의 식탁 중의 하나에 다가가 잠시 기다린 후 날쌔게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식탁은 바로 모모의 코에 와서 걸리도록 너무 높았다. 

 모모가 쟁반을 식탁 위에다 밀어 올려 놓자,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역겨워하는 얼굴로 거북이를 바라보았다. 

 "저런 건" 하고 어떤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한테 말했다. "이제는 금지해야 해요." 

 그러자 다른 사람이 투덜대었다. "어쩌자는 건지……, 요즈음의 애들이라니!" 

 하지만 그밖에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들도 모모한테 더 이상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먹는 일 역시 모모한테는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쟁반을 들여다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마침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모모는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이제는 배가 불러졌다. 하지만 베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모모는 다시 한 번 줄 뒤에 가서 붙어섰다. 그러면서도 그냥 그 사이에 끼어서 가면 사람들이 혹시 다시 화를 낼까 봐 겁이 나서,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되는대로 유리 상자에서 무엇을 집어 들었다. 

 마침내 또 다시 니노한테 왔을 때 모모는 물었다. "그럼 베포 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그는 너를 참 오래 기다렸어." 니노는 자기의 고객이 또 다시 불쾌해할 것이 겁이 나서 성급하게 설명했다. "그는 너한테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어. 맨날 회색 도당에 관해 무슨 얘기를 했어. 무슨 소리인지 나도 모르겠어. 하긴, 너도 그를 알잖니. 그 노인은 늘 약간 괴짜였잖아." 

 "어이, 저 앞의 두 친구들!" 장사진 중의 누구인가가 외쳤다. "잠을 자는거야?" 

 "곧 끝납니다, 손님!" 니노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는요?" 모모가 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경찰의 반감(反感)을 샀어." 니노는 말을 이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는 경찰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찾아 내놓으라고 했어. 내가 아는 한, 결국 경찰이 그를 무슨 요양원에다 보냈대.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빌어먹을!" 이번에는 저 뒤쪽에서 격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애당초 여기가 스피드 식당이오? 아니면 대합실이오? 거기 무슨 가족끼리 만난 모양인데, 뭐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니노는 사정하듯이 외쳤다. 

 "할아버지가 아직 거기 있나요?" 모모가 물었다. 

 "아닐거야." 니노는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는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다시 풀어 놨대나 봐." 

 "예, 그렇지만 대체 지금은 어디 계세요?" 

 "전혀 몰라. 정말이야, 모모. 지금은 제발 앞으로 가 줘!" 

 다시 한번 모모는 별 수 없이 뒤에서 밀치는 사람들한테서 밀려났다. 또다시 모모는 버섯 식탁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자리를 차지하고 쟁반에 놓인 음식을 먹어 치웠다. 이번에는 벌써 아까보다 훨씬 맛이 덜했다. 음식을 그냥 남긴다는 생각은 당연히 모모한테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옛날에 늘 자기를 찾아 왔던 어린애들이 어떻게 되었나를 알아봐야 했다. 별 도리 없이 모모는 다시 기다리는 사람의 행렬에 붙어 서서 유리 상자 앞을 지나 나아가며 사람들한테 욕을 안 먹기 위해 또 쟁반에 음식을 채웠다. 

 이윽고 다시 계산대 앞의 니노한테까지 왔다. 

 "그럼 어린애들은요?" 모모가 물었다. "대체 애들은 어떻게 됐어요?" 

 "이젠 모든 상황이 딴판이 되어 버렸어." 니노는 모모를 다시 보자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설명했다. "지금은 너한테 그걸 설명할 수가 없어. 여기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도 보잖니!" 

 "그렇지만 왜 그 애들이 다시 안 오나요?" 모모는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했다.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모든 어린애들은 이제는 탁아소에 맡겨지게 되어 있어. 이제 어린애들은 제 멋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게 되었어. 왜냐 하면…… 자, 간단히 말해서 이제 어린애들은 보호 감독을 받게 된거야." 

 "빨리 끝내요, 저 앞의 굼벵이들!" 다시금 행렬 가운데서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쨌든 우리는 먹으러 왔으니 좀 먹어야겠소." 

 "내 친구들도요?" 모모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 애들도 정말 그것을 스스로 원했나요?" 

 "그 애들의 의견같은 건 묻지 않았어." 니노는 대답하면서도 안절부절하며 계산대의 키이를 손으로 더듬었다. "아무튼 어린애들은 그런 것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아. 그건, 어린애들을 길거리에서 못 놀게 하기 위해 마련된거야. 결국은 그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니?" 

 그 말에 모모는 아무 말도 않고, 다만 따지듯 니노를 찬찬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니노는 완전히 난처해졌다. 

 "원, 빌어먹을!" 또 다시 저 뒤쪽에서 잔뜩 화난 음성이 외쳤다. "여기 오늘 어쩌자고 이렇게 늑장인지, 정말 참을 수가 없군. 당신네들의 아기자기한 수다를 하필이면 지금 해야 옳겠소?" 

 "그럼 내 친구들 없이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요?" 모모는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니노는 어깨를 추켜 보이고는 손가락을 비볐다. 

 "모모!" 그는 말하며 애써 마음의 평정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깊은 숨을 들여 쉬었다. "정신 차리고 언제 다시 한번 와. 지금 나는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하고 앉았을 시간이 정말 없어. 너는 언제든지 여기 와서 먹을 수 있어, 알잖니. 그렇지만, 내가 너 같으면 나는 딴 생각 않고 탁아소엘 가겠어. 거기에서 보살핌을 받고 대우도 받고, 심지어는 무엇을 배우기도 할 텐데. 어쨌든 그렇게 혼자 아무데고 싸돌아 다니면 너도 결국은 그리로 보내지게 될 거야." 

 모모는 다시 아무 말 않고 니노를 쳐다볼 뿐이었다. 뒤로 밀어닥치는 사람의 무리가 모모를 앞으로 밀었다. 모모는 자동적으로 식탁 앞으로 밀려가서, 이제는 도저히 삼킬 수도 없고 나무 토막이나 대패밥처럼 아무 맛이 없어져 버린 세번째의 음식을 역시 자동적으로 먹어 치웠다. 그러자 모모는 자신이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를 겨드랑이 밑에 껴안고 소리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어이, 모모!" 마지막 순간의 모모를 놓치지 않은 니노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잠간만! 그 동안 네가 어디 박혀 있었는지는 전혀 얘기를 안했잖니?" 

 하지만 어느새 다음 번 손님들이 들이 닥쳤고, 니노는 계산대에서 탁탁 두들기기를 계속하며 돈을 받고 거스름 돈을 내 주었다. 그의 얼굴의 웃음기는 어느새 다시 씻은듯이 가셔졌다. 


 

 "너무 많은 음식을," 모모는 다시금 원형극장에 와 닿자, 카시오페이아에게 말했다. "사실 너무 많은 음식을 나는 먹어 치웠어. 너무 많은 음식을. 그런데도 전혀 배부른 느낌이 안들어." 그리고 잠시 후에 덧붙였다. "니노한테 꽃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도 없었어."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 내일은 나가서 지지를 찾자. 지지는 분명 네 마음에도 들거야, 카시오페이아. 두고 봐."

 하지만 거북이의 등에는 다만 커다란 의문표가 나타났을 뿐이었다.

15  찾아낸 지지와 잃어버린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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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모모는 지지의 집을 찾기 위해 아침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물론 거북이도 데리고 갔다. 

 초록빛 언덕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모는 알고 있었다. 그곳은 원형극장 옛터가 있는 지역과는 멀리 동떨어진 교외의 별장 지대였다. 즉 닮은 꼴의 주택이 세워지고 있는 구역, 그러니까 대도시의 반대 편에 있는 동네였다. 

 참 먼 길이었다. 맨발로 걷는 데 익숙한 모모였는데도 이윽고 초록빛 언덕에 닿았을 때는 발이 아팠다. 

 모모는 잠시 다리를 쉬기 위해 하수구 돌뚜껑에 앉았다. 

 과연 으리으리한 고급 주택가였다. 근처의 도로는 기막히게 깨끗하고 넓은 데다 거의 사람 기척이 없었다. 높은 돌담과 철책 안쪽의 정원에는 고목(古木)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정원에 둘러 싸인 집들은 대개가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평평한 지붕이 길게 뻗은 건축물이었다. 집 앞의 잔디들은 윤기가 나게 매끈하게 손질되어 있어서 그 위에서 공중 제비라도 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렇지만 아무 데서도 정원을 산책하거나 잔디 위에서 노는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 아마도 집 주인들은 그럴 시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담." 모모는 거북이한테 말했다. "지지의 집이 이 근처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 낼 수 있을까?" 

 "곧 알게 돼."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글자가 나타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모는 희망에 차서 물었다. 

 "야, 꼬맹아!" 별안간 뒤에서 웬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여기서 뭘 찾니?" 

 모모는 돌아다 보았다. 거기 괴상스런 줄무니 조끼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부자집 하인들은 그런 조끼를 입는다는 것을 모모가 알 턱이 없었다. 모모는 일어나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지지의 집을 찾고 있어요. 니노 아저씨가 그러는데, 지지가 지금 이 동네에 산대요." 

 "누구네 집을 찾는다구?" 

 "여행안내원 지지의 집요. 지지는 내 친구거든요." 

 줄무늬 조끼의 남자는 의심쩍다는듯 꼬마를 훑어 봤다. 그의 뒤로 정원 문이 약간 열려 있어서 모모는 안을 슬쩍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널찍한 잔디 위에서 사냥개 몇 마리가 놀고 있었고 분수가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꽃이 만발한 나무 위에 한 쌍의 작은 공작새가 앉아 있었다. "어머나!" 모모는 탄성을 올렸다. "저 새 좀 봐, 예쁘기도 해라!" 

 모모는 가까이서 새를 보려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조끼입은 남자가 모모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여기 있어!" 그는 말했다. "어쩔 셈이니, 더러운 꼬맹아!" 

 그러더니 그는 모모를 다시 놓고 무슨 못 만질 것이라도 만진듯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이게 전부 아저씨 것이에요?" 모모는 대문 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야." 조끼 입은 남자는 한층 더 불친절하게 말했다. "당장 꺼져! 네가 여기서 볼 일은 없어." 

 "있어요." 모모는 힘을 주어 말했다. "여행안내원 지지를 찾아야 해요. 지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저씨는 대체 그를 모르세요?" 

 "여기 여행안내원 같은 사람은 없어." 조끼 입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정원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그려고 하더니,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혹시 너 지로라모를 찾는 게 아니니? 유명한 소설가 말이다." 

 "아, 그래요. 바로 여행안내원 지지요." 모모는 기뻐서 대답했다. "그렇게도 불러요. 지지의 집이 어딘지 아세요?" 

 "그런데 그 이가 정말 너를 기다리니?" 남자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모모는 말했다. "분명해요. 그는 내 친구이고, 내가 니노 아저씨한테서 먹는 음식 값을 전부 지불해요." 

 조끼 입은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술가들이라니!" 그는 입맛 쓰다는 투로 말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기분파들이라니깐! 아무튼 그 사람이 네가 찾아오는 걸 대단하게 여기리라고 정 믿는다면 그 사람 집은 저 꼭대기 길 가 막다른 집이야." 

 그리고 나서 정원문은 잠겼다. 

 "뻔들뻔들한 녀석!" 이라고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나타나더니 곧 사라졌다. 

 꼭대기 길 가 막다른 집은 사람 키보다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리고 정원문도 조끼 입은 남자의 집의 것과 비슷하게 철판으로 되어 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아무 데도 초인종 단추나 문패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정말 지지의 새 집인지 모를 일이야." 모모가 말했다. "도대체 지지의 집 같지가 않아." 

 "그렇지만 맞아"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어쩌자고 이렇게 몽땅 잠겨 있지?" 모모가 물었다. "들어갈 수가 없잖아." 

 "기다려!" 대답이 나타났다. 

 "그래, 할 수 없지." 모모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기다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여기 바깥에 있는 걸 어떻게 지지가 안담? 도대체 저 안에 있다면 말야." 

 "지지는 곧 와"라고 거북이 등의 글자가 말했다. 

 이렇게 모모는 대문 바로 앞에 앉아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모모는 혹시 카시오페이아가 어쩌다가 잘못 판단을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니?" 잠시 후 모모는 물었다. 

 기다리는 대답 대신에 거북이의 등판에는 "잘 있어!"라는 말이 나타났다. 

 모모는 깜짝 놀랐다. "무슨 뜻으로 그러는 거야, 카시오페이아? 그럼 너도 나를 떠날 참이니? 대체 어쩔려구 그래?" 

 "너를 찾으러 가는거야!" 더욱 수수께끼 같은 카시오페이아의 통보(通報)였다. 

 그 순간 갑자기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미끈한 고급 승용차 한대가 쏜살같이 빠져 나왔다. 모모는 뒤로 훌쩍 뛰어서 겨우 피하긴 했지만 훌렁 나자빠졌다. 

 자동차는 몇 바퀴 쾌속으로 굴러 가더니 끼익 바퀴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차문이 훌쩍 열리더니 지지가 뛰쳐 나왔다. 

 "모모!" 그는 소리를 치며 두 팔을 벌렸다. "이거 정말 나의 꼬마 모모로구나!" 

 모모는 벌떡 일어나 지지한테 달려 갔다. 지지는 모모를 후딱 안아 올려 두 뺨에 수백번 키스를 하고 길거리에서 모모와 춤을 추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그는 숨가쁘게 물었다. 하지만 모모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흥분해서 계속 떠들었다. "너를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굉장히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야, 알겠니? 또 지각하게 생겼어. 그 동안 대체 어디 박혀 있었니? 전부 얘기해 줘야 해. 네가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내 편지를 봤니? 그래? 아직도 거기 있었어? 좋아, 그래서 니노한테 먹으러 갔니? 맛이 있었어? 아, 모모. 우리는 얘기할 게 산더미처럼 많아.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었어. 대체 어떻게 지내니? 말 좀 해 봐! 그리고 우리 베포 아저씨는 뭘 하시니? 정말 아저씨를 본지가 너무 오래 되었어. 그리고 아이들은? 아, 저 말야, 모모, 나는 우리가 모두 같이 모여서 내가 너희들한테 이야기를 들려 주던 그 시절을 참 자주 생각한단다. 참 좋은 시절이었지. 그렇지만 이젠 모든 것이 달라졌어. 완전히 딴판으로 달라졌어." 

 모모는 지지의 물음에 대답을 하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었다. 그렇지만 청산유수(靑山流水)같은 그의 얘기가 끊어질 줄을 몰랐기 때문에 별 수 없이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옛날과 다른 모습이었다. 아주 멋지게 몸단장을 하고 있었고 좋은 향내가 났다. 그러나 무엇인지 모르게 지금의 지지는 모모에게 이상스럽게 낯설었다. 

 그 사이에 자동차에서 네 사람의 다른 인물이 내려 서서 다가왔다. 가죽으로 된 운전수 제복을 입은 한 남자와, 굳은 표정의, 하지만 진하게 화장을 한 얼굴의 세 숙녀들이었다. 

 "어린애가 다쳤나요?" 한 여자가 걱정스러워서라기보다는 힐난하는 투로 물었다. 

 "아니요, 아니. 전혀 다친 덴 없어요." 지지가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다. "그냥 놀랐을 뿐이오." 

 "대체 어쩌자고 대문 앞에서 쌀쌀거리고 있담!" 두번째 여자가 말했다. 

 "사실은 이 꼬마가 모모라오!" 지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 옛 친구 모모가 이 꼬마라오!" 

 "아, 이 소녀가 그럼 실제로 있단 말인가요?" 세번째 여자가 놀라와하며 물었다. "저는 그냥 그 소녀가 선생님의 창작이라고만 생각했었어요. 그렇다면 이것 역시 당장 신문에 낼 수 있겠네요! '동화 속의 공주와의 재회(再會)'라든가, 그런게 사람들한테 전설처럼 솔깃할 거예요! 제가 당장 주선하겠어요. 히트를 칠 거예요!" 

 "아니," 지지가 말했다. "근본적으로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아요." 

 "그렇지만 얘, 꼬마야" 하고 첫번째 숙녀가 이번에는 모모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너는 분명히 신문에 나고 싶겠지? 안 그러냐?" 

 "어린애를 가만히 놔 두시오!" 지지는 불쾌하게 말했다. 

 두번째 숙녀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 전 속력을 내서 가지 않으면 코 앞에서 비행기를 놓치게 돼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선생님도 아시겠지요." 

 "원," 지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오랫만에 만났는데 모모랑 조용히 몇 마디 말도 더 나눌 수가 없다니! 하지만 꼬마야, 너도 보다시피 저 사람들이 나를 안 놔 주는구나. 저 노예(奴隸) 몰잇군같은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아!" 

 "어머나!" 두번째 숙녀가 날카롭게 말을 받았다. "우리한테야 아무러나 전혀 상관이 없어요. 우리야 단지 맡은 일을 할 뿐인 걸요. 선생님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일로 우리는 선생님한테서 보수를 받고 있어요, 선생님." 

 "그래, 옳아요, 옳아!" 지지는 양보를 했다. "그럼 떠납시다! 이봐, 모모! 너도 비행장까지 같이 가자. 그럼 가는 도중에 얘기를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나서 운전수가 너를 집에 데려다 주는 걸로, 됐지?" 

 그는 모모가 뭐라고 말할지 기다리지도 않고 꼬마의 팔을 끌어서 자기가 앞장 서서 자동차로 갔다. 세 숙녀는 뒷자리에 앉았다. 지지는 운전수 옆에 앉아 모모를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차는 떠났다. 

 "자," 지지가 말했다. "이제 얘기해 봐, 모모! 차례대로 차근차근. 어떻게 그 때 그렇게 별안간 사라졌니?" 

 모모가 호라 박사와 시간의 꽃들에 관해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숙녀 중의 한사람이 앞으로 몸을 굽혔다. 

 "실례해요." 그녀는 말했다. "막 굉장히 근사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모모를 공공(公共) 영화협회에 데려다 주는 거예요. 다음 번에 영화화될 선생님의 방랑아 이야기 속의 새 어린이 스타로서 모모야말로 틀림없는 적격(適格)일거예요. 그 센세이션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모모가 모모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직도 못 알아 들으셨소?" 지지는 날카롭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꼬마를 거기에 끌어 들이는 걸 나는 바라지 않아요!" 

 "선생님의 속셈을 정말 모르겠어요." 숙녀는 기분이 상해서 대꾸했다. "누구라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침을 흘리면서 달려들 텐데요." 

 "나는 다른 누구가 아니오!" 지지는 갑자기 격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모모를 향해 덧붙였다. "미안해, 모모. 혹시 너는 이해가 잘 안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떼거리들이 너한테까지 손을 뻗는 것을 어쨌든 원치 않아." 

 그러자 세 숙녀 모두가 기분이 상했다. 

 지지는 신음을 하면서 머리를 움켜 쥐더니 조끼 주머니에서 조그만 은빛 상자를 꺼내어 알약을 집어 꿀떡 삼켰다. 

 몇 분 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지지는 뒤의 숙녀들에게 몸을 돌렸다. "용서하시오" 하고 그는 의기소침해서 중얼거렸다. "당신네들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소. 다만 지금 내가 신경이 극도로 피곤해요." 

 "좋아요, 그러시다는 것쯤 알고도 남겠어요." 첫번째 숙녀가 대답했다. 

 "자, 그럼," 지지는 말을 이으며 슬며시 곁눈질로 모모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 모모." 

 "그 전에 한가지만 물어 보겠어요." 이번엔 두번째 숙녀가 끼어 들었다. "이제 곧 도착하게 되는데요. 저한테 잠간만 이 꼬마랑 인터뷰를 허락하시지 않겠어요?" 

 "닥치시오!" 지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고함을 쳤다. "나는 지금 모모랑,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싶소!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오. 몇 번이나 더 그걸 설명해야겠소?" 

 "그렇지만 선생님 자신이 늘상 나를 탓하셨잖아요." 이번엔 숙녀도 똑 같이 화가 나서 대꾸했다. "선생님을 위해 충분히 효과적인 광고를 못한다고요!" 

 "맞았소!" 지지는 신음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안돼요! 지금은 안돼요!" 

 "유감이에요!" 숙녀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한테 눈물이 쏟아지게 감동을 줄 텐데요. 선생님 뜻대로 하세요. 어쩌면 나중에라도 할 수 있겠지요, 만일……." 

 "안돼요!" 지지는 말을 막았다. "지금도 나중에도 언제라도 안돼요. 그리고 이제 제발 입 좀 다물어 주시오. 내가 모모랑 말하는 동안!" 

 "좋아요, 한마디만 더 하겠어요!" 숙녀도 못지않게 과격하게 대꾸했다. "결국 이것은 선생님의 선전에 관계되는 것이지, 저의 선전이 아니예요! 선생님이 지금 이번 기회를 무시할 처지인지 한번 충분히 고려해 보세요!" 

 "아니," 지지는 어쩔줄 몰라하며 소리쳤다. "나는 그것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오! 그렇지만 모모는 여기에 끼어들 수 없소! 그리고 이제―제발 부탁이오―우리들을 오분만 가만 내버려 두시오!" 

 숙녀들은 침묵을 지켰다. 지지는 지친듯 손으로 두 눈을 비볐다. 

 "네가 지금 보다시피, 나는 이 꼴이 되었어." 그는 잠시 소리내어 씁쓸히 웃었다. "내가 원해도 되돌아 갈 수가 없어. '지지는 어디까지 지지야!' 하던 말은 흘러간 얘기야. 아직도 그 말 생각나니? 그런데 이렇게 지지는 지지로 머물러 있지를 못했어. 한가지 얘기를 하지, 모모.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꿈을 꾸던 소망이 채워지는 일이야. 어쨌든, 나의 경우처럼 된다면. 이제 나한텐 꿈 꿀 것이 없어져 버렸어. 너희들한테서 그것을 다시 배울 수도 없을거야. 나는 모든 것을 지겹도록 갖고 있어." 

 그는 우울한 시선으로 차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이제 나한테 남아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아마도…… 입을 다무는 일일거야. 이야기를 더 이상 안하고 침묵하는 일일거야. 아마도 남아 있는 내 평생 동안. 아니면, 적어도 세상이 나를 잊어 버리고, 나 자신 이름 없는 가난한 떠돌이로 되돌아갈 때까지 말이야. 그렇지만 꿈이 없이 가난하다는 것은―그럴 수가 없어, 모모. 그것은 지옥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자리에 머물러 있는 편을 취하고 있는 거야. 이것 역시 사실은 지옥이야. 하지만 적어도 편안한 지옥이야. 아, 내가 뭘 떠들고 있지? 당연히 너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거야." 

 모모는 다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모는 무엇보다도, 지지가 괴로와하고 있다는 것을, 죽도록 괴로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색 도당이 그에게 손길을 뻗쳤다고 짐작이 갔다. 하지만, 지지 자신 전혀 원하지 않는 마당에 어떻게 자기가 지지를 도와 줄 수 있을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내내 내 얘기만 했군." 지지는 말했다. "이제 너도 얘기 좀 해. 그 동안 겪었던 일을, 모모!" 

 그 순간 자동차가 비행장에 닿았다. 모두들 내려서 홀로 서둘러 들어갔다. 벌써 여기엔 제복을 입은 스튜어디스들이 지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신문기자가 그의 사진을 찍고 질문을 했다. 하지만 스튜어디스들이 비행기 출발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다고 그를 재촉했다. 

 지지는 몸을 굽히고 모모를 바라보았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봐, 모모." 그는 주위에 서 있는 사람이 못 알아 듣게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나랑 같이 있어! 이번 여행길이랑, 어디든지 너를 데려 갈게. 아름다운 내 집에서 같이 살면서 진짜 꼬마 공주처럼 빌로드랑 비단 옷을 입고 다니는거야. 너는 그냥 내 옆에 있으면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아마 그 때처럼, 내게 다시금 진정한 이야기들이 떠오르겠지, 응? 그냥 그러겠다고 대답만 해, 모모. 그럼 모든 것이 제대로 되는 거야. 부탁이야, 나를 도와 줘!" 

 모모는 지지를 진심으로 도와 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모모는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지지는 다시 지지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모모 자신이 이미 모모가 아니라면 지지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모모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였다. 모모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그리고 지지는 모모를 이해했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런 일을 하라고 자기가 돈을 지불하는 숙녀들에 의해 끌려갔다. 멀리서 지지는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고, 모모도 답을 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모모는 지지와 만나는 시간 내내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모모 자신도 그에게 할 말이 참으로 많았다. 지지를 다시 찾은 지금, 모모는 이 만남으로 인해 이제야말로 진실로 그를 잃어 버린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모모는 몸을 돌려 대합실 출구를 향했다. 

 그제사 문득 모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카시오페이아 역시 잃어 버린 게 아닌가! 

 

16  과잉(過剩) 속의 궁핍(窮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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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어디로 가지?" 모모가 다시 지지의 미끈한 승용차로 돌아와 옆에 앉자, 운전수가 물었다. 

 소녀는 심란한 듯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한담? 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던가? 카시오페이아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어디서? 언제 어디서 잃어 버렸단 말인가? 지지와 함께 차 안에 있던 시간 내내, 거북이는 이미 없었다. 그것만은 모모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지의 집 앞에서다! 이제사 모모는 거북이의 등 위에 "잘 있어!", 그리고 "너를 찾으러 가는거야"라고 쓰여 있던 일을 떠올렸다. 물론 카시오페이아는 모모가 곧 자기를 잃어 버리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거북이는 모모를 찾으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어디서 카시오페이아를 찾아낸단 말인가? 

 "자, 오래 걸리니?" 운전수는 말하며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들겼다. "너를 드라이브시켜 주는 것 말고도 나는 또 할 일이 있어." 

 "지지의 집으로 가 주세요." 모모가 대답했다. 

 운전수는 좀 놀란듯 돌아보았다. "나는 너를 너의 집으로 데려다 주는 줄 알았어. 아니면 이제 너도 우리 집에 살거니?" 

 "아니요," 모모는 대답했다. "길에서 무엇을 잃어 버렸어요. 그걸 지금 찾아야 해요." 

 운전수한테는 잘된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기는 그리로 가야 했으니까. 

 지지의 별장 앞에 닿자, 모모는 당장 내려서 사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카시오페이아!" 외치는 모모의 음성이 점점 작아졌다. "카시오페이아!" 

 "대체 뭘 찾는 거니?" 운전수가 차창으로 내다보며 물었다. 

 "호라 박사의 거북이에요." 모모는 대답했다. "카시오페이아라는 이름인데 언제든지 반시간 전에 미래를 내다 봐요. 그리고 등판에다가 글자를 써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거북이를 찾아야 해요. 나를 도와 주실래요?" 

 "그런 엉터리같은 장난에 끼어들 시간이 없어!" 그는 투덜대면서 대문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고, 이어서 대문이 닫혔다. 

 그래서 모모는 혼자서 찾았다. 거리를 온통 샅샅이 뒤졌는데도 카시오페이아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면" 모모는 생각했다. "거북이는 벌써 원형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지 몰라." 

 그래서 모모는 아까 왔던 길을 터덜터덜 되돌아 걸었다. 그러면서 담 모퉁이마다 살펴보고, 거리의 개천마다 들여다 보았다. 끊임없이 거북이의 이름을 외치면서. 그러나 헛일이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모모는 원형극장 옛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도, 어둠을 무릅쓰고 찾아 볼 수 있는 한 샅샅이 모든 것을 뒤졌다. 그리고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자기보다 앞서 거북이가 집 안에 돌아와 있다면, 하는 조마조마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느림보 거북이한테서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모는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난생 처음으로 모모는 진정한 외톨이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뒤 이은 몇 주일 동안 모모는 정처없이 대도시 안을 헤메며, 도로청소부 베포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의 행방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모모로서는 돌아다니다 거리에서 부딪칠 우연에다 턱없는 희망을 걸 도리밖에 없었다. 물론 이 엄청난 대도시 안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날 가능성이란, 난파된 배의 선원이 망망대해에서 파도 속에 던진 편지 담긴 병이 멀리 떨어진 해안의 어선에 의해 낚여지는 것만큼이나 극희 희박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어쩌면 아주 가까이 있을는지 모른다고 모모는 생각했다. 베포가 바로 한 시간 전에, 일분 전에, 그야말로 어쩌면 바로 한 순간 전에 있었던 장소를 자기가 막 지나가고 있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거꾸로, 이 장소나 이 길모퉁이를 금방, 또는 잠시 후에 얼마나 자주 베포가 지나가게 될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모모는 여러 번 한 장소에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 그렇지만 결국 언제나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역시 어긋날 확률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시오페이아가 있다면 지금 얼마나 고맙게 써먹었을까! 여기 있다면, 거북이는 "기다려!" 또는 "그냥 가!"라고 알아 맞혀 주었을 텐데. 그렇지만 모모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 때는, 그러느라고 베포와 어긋날 것이 걱정스러웠고, 기다리지 않을 때는 그래서 또 어긋날 것이 걱정스러웠다. 

 모모는 옛날에 늘 찾아 오던 어린이들을 만날세라 찾아 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한명도 만날 수 없었다. 도대체 거리에는 어린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제 어린이들은 보호 감독받고 있다고 하던 니노의 말이 생각났다. 

 모모 자신이 한번도 경관이나 어른한테 잡혀서 탁아소로 인도되지 않은 까닭은, 몰래 숨어서 끊임없이 지키는 회색 도당의 감시 탓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네들이 모모한테 기대했던 계획이 틀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모모가 알턱이 없었다. 

 매일같이 한번씩 모모는 니노한테 먹으러 갔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 이상으로 니노와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니노는 언제나 한결같이 바빴고 시간이 없었다. 

 몇 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흘러갔다. 그런데도 모모는 여전히 외톨이였다. 

 언젠가 딱 한번, 해질녘 어스름한 빛 속에서 어느 다리(橋)의 난간에 앉아 있었을 때, 모모는 멀리 다른 다리 위에서 한 구부정한 형체를 알아 보았다. 그 형체는 무슨 목숨이라도 걸린 일인 양, 성급하게 빗자루를 휘두르고 있었다. 모모는 베포인가보다 생각하고 소리를 치고 손짓을 했지만 그 형체는 쉴새없이 비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모모는 달려 갔지만 그쪽 다리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아마 베포 할아버지가 아니었을거야." 모모는 스스로 위안을 하느라 혼잣말을 하였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베포 할아버지의 비질하는 모습을 알아." 

 또 모모는 원형극장 옛터 안의 집에 머무는 날도 많았다. 왜냐하면 혹시나, 자기가 이미 돌아왔나 살펴보러, 베포가 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불현듯 솟아나기 때문이었다. 마침 베포 할아버지가 왔을 때 하필 자기가 없다면, 자기가 여전히 실종되어 있는것으로 생각할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도, 어쩌면 일 주일 또는 바로 어제 그런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상상이 모모를 괴롭혔다. 그래서 모모는 기다렸다. 물론 기다리는 것은 헛일이었다. 마침내 모모는 대문자로 방의 벽에다 "내가 다시 왔어요"라고 그려 놓았다. 그렇지만 모모 자신 말고 다른 누가 그것을 읽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시간 중에서도 모모가 잃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호라 박사의 집에서의 체험, 꽃들과 음악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자기 안으로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타오르는 듯한 찬란한 빛깔의 꽃들이 눈 앞에 떠올랐고 음악의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이 음악은 끊임없이 새로이 형성되고 한번도 똑 같은 적이 없었지만, 첫날과 똑 같이 모모는 음악의 언어를 따라 말하고 멜로디를 같이 부를 수가 있었다. 

 곧잘 모모는 하루 종일 혼자 돌계단에 앉아 혼자서 말하고 노래를 했다. 나무와 새들, 옛 돌들밖에는 모모의 노래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고독(孤獨)이 있다. 그렇지만 모모가 체험한 고독은 불과 몇 안되는 사람이 알고 있는 고독이요, 더우기 그와 같은 큰 힘을 지닌 고독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었다. 

 모모는 자신이, 꼭 질식할 것처럼 점점 불어나고 있는 무진장의 재산으로 꽉 찬 보물의 동굴 속에 갚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나갈 길이 없지 않은가! 아무도 모모가 있는 곳까지 뚫고 들어올 수 없었고, 모모 자신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알려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광맥 속에 깊이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때로는 차라리 이 음악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이 색채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에 부딪친다면, 모모는 이 기억을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었으리라. 그로 인하여 죽음을 치른다 해도. 왜냐하면 이제 모모는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즉,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지 않으면 그로 인해 스스로가 파멸에 빠지는 재산들이 있다는 것을……. 

 이틀이 멀다 하고, 모모는 지지의 별장으로 가서 정원문 앞에서 한참씩 기다리곤 했다. 지지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모모는 그 동안 무엇이든지 받아 들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지지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었다. 옛날처럼 되돌아 갈 수 있든 없든 간에. 그렇지만 대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은 사실 몇 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이 시간은 일찌기 모모가 겪었던 어느 시간보다도 긴 시간이었다. 사실 실제의 시간이란 시계와 달력으로는 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고독에 관해서는 진실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한가지 사실만 더 얘기하는 것으로 족할는지 모른다. 즉, 호라 박사한테로 가는 길을 찾을 수만 있었더라면―아닌게 아니라 모모는 수없이 거듭 시도했었다―모모는 그에게 가서, 이제는 더 이상 자기에게 시간을 분배해 주지 말도록, 아니면 호라 박사의 초공간의 집에 영원히 머물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으리라. 

 하지만 카시오페이아 없이는 그 길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카시오페이아는 사라진 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거북이는 옛날에 호라 박사한테로 되돌아가 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세상의 어디메선가 길을 잃었는지도. 어쨌든 거북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날 모모는 시내에서, 옛날에 늘 자기한테 오던 세 어린이를 만났던 것이다. 파올로와 프랑코, 그리고 옛날에 늘 꼬마 동생 데데를 데리고 오던 소녀 마리아였다. 세 아이의 모습이 모두 전혀 딴판이었다. 한결같이 회색 제복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이상하게 마비된 듯 생기가 없어 보였다. 모모가 환성을 지르며 인사를 해도, 아이들은 거의 웃음기도 띠지 않았다. 

 "너희들을 열심히 찾았어." 모모가 숨가쁘게 말했다. "지금 다시 나한테 안 갈래?" 

 세 아이들은 눈길을 주고 받더니, 한결같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럼 내일 올래?" 모모는 물었다. "아니면 모레?" 

 다시금 세 아이들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 다시 오려무나." 모모는 졸랐다. "옛날엔 늘 오지 않았었니." 

 "옛날엔 그랬지!" 파올로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어. 우린 이제 우리의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해서는 안돼." 

 "우리는 그러지 않았어." 모모가 말했다. 

 "그래, 그 때가 참 재미었었어." 마리아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아." 

 세 어린이는 성급히 계속 걸었다. 모모는 그들 옆에서 따라 걸었다. 

 "지금 대체 어디 가는거니?" 모모가 물었다. 

 "놀이(遊戱) 시간에." 프랑코가 대답했다. "거기서 놀이를 배워." 

 "무슨 놀이인데?" 모모가 물었다. 

 "오늘은 펀치 카드 놀이를 배울거야." 파올로가 설명했다. "굉장히 유익한 놀이야. 그렇지만 정신을 무섭게 바짝 차려야 해." 

 "어떻게 하는 건데?" 

 "우리 모두가 제가끔 펀치 카드를 제시해. 모든 펀치 카드는 굉장히 여러가지 명세(明細)를 포함하고 있어. 키, 나이, 무게 등. 그렇지만 물론 실제의 자기 것은 절대 아니야. 그러면 너무 쉬우니까 말야. 어떨 땐 그냥 길다란 숫자로 표시하기도 해. 예를 들면 MUX/763/Y처럼 말야. 그리고 나면 우리가 낸 카드들은 뒤섞여져서 카드함 속에 들어가. 그 다음엔 우리들 중의 한 아이가 어떤 특정한 카드를 알아 맞춰야 하는거야. 그 아이는 계속 질문을 해. 그러는 중에 맞지 않는 다른 카드는 전부 빼 버리고 결국 맞는 카드가 한장 남게 되는거야. 이걸 제일 빨리 하는 아이가 이기는거야." 

 "그게 재미있니?" 모모는 의아스럽게 물었다. 

 "그것은 문제가 안돼." 마리아가 겁난다는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돼." 

 "그럼 대체 뭐가 문제가 되니?" 모모는 궁금해했다. 

 "문제는" 하고 파올로가 대답했다. "미래에 유용(有用)한 것이야." 

 그러는 동안 그들은 커다란 회색 건물 정문 앞에 이르렀다. 문 위에 "탁아소"라고 쓰여 있었다. 

 "너희들한테 할 말이 참 많았는데." 모모가 말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마리아가 서글프게 대답했다. 

 그들 주변에는 훨씬 많은 어린이들이 한결같이 그 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한결같이 모모의 세 친구들과 닮은 모습이었다. 

 "너한테서 놀 때가 훨씬 재미있었어." 프랑코가 불쑥 말했다. "그땐 우리들끼리 항상 굉장히 여러가지 근사한 생각을 해 냈지. 그렇지만 그런 데서는 아무 것도 못 배운대." 

 "그럼 그냥 도망쳐 나올 수 없니?" 모모가 제안을 했다. 

 "벌써 몇 번 그래 봤었어, 처음에는." 프랑코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어. 항상 다시 잡혀 오는거야." 

 "그렇게 말하면 안돼." 마리아가 말했다. "결국 지금 우리는 보호 감독을 받고 있는거야." 

 모두들 입을 다물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모모는 마음을 작정하고 물었다. "너희들 나도 같이 데려갈 수 없니? 지금 나는 언제나 혼자야." 

 하지만 이 때 참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치 강력한 자력(磁力)에 끌린듯이 어린이들이 문 안으로 빨려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들 뒤에서 문이 꽝 소리내며 닫혔다. 

 모모는 깜짝 놀라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잠시 후, 초인종을 누르든지 노크를 해 보려고 문쪽으로 다가서려 했다. 어떤 놀이가 되든간에 자기도 같이 놀게 해 달라고 한번 졸라 볼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미처 문께로 한 발짝 떼어 놓기도 전에, 모모는 깜짝 놀라 얼어 붙었다. 문과 자기 사이에 별안간 회색 도당의 한 사나이가 끼어 들어서 있는 게 아닌가. 

 "소용 없어!" 그 사나이는 엷은 미소를 띠며 입가에 시가를 물고 말했다. "이제 그런 짓은 하지 마! 네가 저 안에 들어가는 건 우리한테는 흥미가 없어." 

 "왜요?" 모모가 물었다. 다시금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몸 속에서 올라옴을 모모는 느꼈다. 

 "우리는 너한테 대해 다른 걸 염두에 두고 있거든." 회색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담배연기를 동그랗게 내뿜었다. 그것은 올가미처럼 모모의 목을 감더니 한참만에 날아갔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섭게 서둘러 걷고 있었다. 모모는 회색 사나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구원을 청하려고 했지만 한마디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집어치워!" 회색 사나이는 말하며 기쁨이 증발되어 버린 잿빛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직도 그렇게 우리를 몰라 보니? 우리가 얼마나 막강한가를 여전히 모르니? 우리는 너의 모든 기쁨을 빼앗았어. 너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게다가 너도 이제는 우리 뜻대로 할 수가 있어. 그렇지만 보다시피 우리는 너를 아끼고 있어." 

 "왜요?" 모모는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네가 우리한테 조그만 일을 하나 해 주었으면 하기 때문이야." 회색 사나이는 대답했다. "현명하게만 굴면, 너는 그 일로 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어. 또 너의 친구들도. 그러겠니?" 

 "예." 모모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회색 사나이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오늘 자정에 만나 상담을 하자." 

 모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느새 회색 사나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그의 시가의 연기만이 공중에 걸려 있었다. 

 어디서 만날지는 회색 사나이도 말하지 않았다. 

 

17  큰 공포와 보다 큰 용기(勇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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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원형극장 옛터로 돌아갈 일이 무서워졌다. 자정에 만나자던 회색 사나이가 분명히 그곳으로 올 것 같았다.

 그곳에서 그와 단둘이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까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워졌다. 아니, 모모는 도대체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든, 어디 다른 데서든 간에. 그가 무엇을 제의하든 간에―결국 그것은 진실로는 자기와 친구들을 위해 좋은 일이 될 리 없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디로 가면 그 사나이의 눈에 안 뜨이게 숨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사람의 무리 속에 들어가 있으면 가장 안전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조금 전 자기와 회색 사나이를 거들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실제로 겪었으면서도, 그래도 정말 회색 사나이가 자기한테 무슨 행동을 가해 오는 경우 살려 달라고 외치면, 주위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을 테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뿐 아니라 밀집한 군중 틈에 박혀 있으면 찾아내기가 제일 어려울 거야 하고 모모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그날 오후와 저녁 시간 내내 한밤이 이슥하도록 모모는 빽빽한 행인들의 틈바구니에 묻혀서, 가장 번잡한 거리와 광장을 따라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커다란 원을 그리듯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모모는 두번, 세번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마냥 쫓기듯 서둘러 걸어가는 인간의 무리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기고 걸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뭇 하루 종일을 싸돌아 다니다 보니 견딜 수 없이 다리가 아파왔다. 밤은 점점 이슥해 갔고, 모모는 반쯤 잠이 든 채 걸어 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잠간만 쉬면," 모모는 마침내 생각했다. "단지 한 순간만 쉬면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을 텐데……."

 길 가에 마침 여러 종류의 자루와 상자를 실은 작은 삼륜차(三輪車)가 서 있었다. 모모는 그 위로 기어 올라가 어느 자루에 몸을 기대었다. 기분 좋게 푹신했다. 피곤한 다리를 세우고 치마로 그 위를 덮었다. 아, 살 것 같다! 모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자루에 한껏 기대어 누웠다. 그리고는 피곤에 못 이겨 자신도 모르는 새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다. 모모는 빗자루를 평행봉으로 하고 바닥 모를 심연 위 아득히 높은 데서 줄타기를 하는 베포 노인을 보았다.

 "어디가 다른 편 끝이지?" 끊임없이 외치는 베포의 음성이 들렸다. "다른 끝을 볼 수가 없어!"

 과연 줄은 끝없이 길어 보였다. 어느 쪽으로나 어둠 속에 묻혀 버려서 끝을 볼 수가 없었다.

 모모는 베포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도저히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도리가 없었다. 베포는 너무나 멀리, 너무나 높이 저쪽에 있었다.

 그리고 나서 모모는 지지를 보았다. 지지는 입에서 끝없는 종이 테이프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는 마냥 계속해서 풀어 내고 있었고, 테이프는 끝없이 풀려 나오며 끊어지지도 않았다. 어느새 지지는 종이 테이프의 산더미 위에 서 있었다. 모모의 눈에는 그의 시선이 애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가 도와 주러 가지 않으면 그가 질식할 것처럼 비쳤다.

 모모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종이 테이프에 발목이 걸렸다. 게다가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복잡하게 테이프 속에 얽혀 들어갔다.

 다음 번에 모모는 어린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트럼프처럼 납작한 평면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카드마다 작은 구멍으로 된 진짜 도안들이 뚫려 있었다. 카드들은 뒤섞여졌고, 그것은 새로 정돈이 되어 새 펀치가 뚫리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카드 어린이들은 커다랗게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새 그들은 다시 뒤섞여졌고 차례차례 포개어져 떨어지며, 덜컥덜컥 소리를 내고 있었다.

 "스톱!" 모모는 외치려고 했다. "그만 둬요!" 그러나 덜컥덜컥 하는 소리에 묻혀 모모의 가는 음성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 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드디어 모모는 그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 순간, 모모는 주변이 깜깜해서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화물차 위에 앉았었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사실 지금 이 차가 달리면서 요란한 모터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모모는 아직도 눈물로 축축한 뺨을 닦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모모가 모르는 새에 이 차는 이미 상당히 오래 달려 왔음에 틀림없었다. 차는 지금, 이런 늦은 밤이면 죽음처럼 느껴지는 도시의 한 부분에 와 있는 것이었다. 거리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고 고층 건물엔 불이 꺼져 있었다.

 화물차는 그다지 속력을 내지 않고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모모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훌쩍 뛰어 내렸다. 회색 도당을 피해 안전하리라고 여겨지는 번잡한 거리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때 꿈을 꾼 장면이 떠올라서 우뚝 멈춰 섰다. 

 어두운 거리에서 모터의 소음이 점점 멀어지더니 조용해졌다. 

 모모는 이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모모는 살아나려는 희망에서 도망을 쳤었다. 지금까지 내내 자기 자신만을, 자기 자신의 외로움만을, 자기 자신의 공포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참으로 곤경에 빠져 있는 편은 자기의 친구들이 아닌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칠 그 누구가 아직 있다면, 그것은 모모 자신뿐이었다. 친구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도록 회색 도당을 움직일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하다 해도, 최소한 시도는 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모모는 갑자기 자기 마음 속의 신비스런 변화를 느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공포감이 급격히 뒤집혀 정반대의 감정으로 돌변하지 않는가. 이제 반대의 감정이 더디고 일어섰다. 모모는 세상의 어떠한 힘에도 굴하지 않을 용기와 자신을 느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제는 도대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이제 모모는 회색 도당을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날 생각이었다. 

 "당장 원형극장 옛터로 가야겠다"고 모모는 생각했다. "벌써 너무 늦었는지 몰라. 어쩌면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그렇게 결심은 했지만, 사실 막상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난감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모모는 운(運)을 하늘에 맡기고 발을 떼었다. 

 모모는 어둡고 쥐죽은 듯 조용한 거리를 끊임없이 자꾸자꾸 걸었다. 게다가 맨발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발자국 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새 길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모모는 어떻게 길을 잡아야 할지 알려 주는 무엇이든 눈에 띄기를, 알아 볼 만한 무슨 표지라도 눈에 띄기를 바랐지만 헛일이었다. 물론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도중에 만난 유일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앙상하고 더러운 한마리 개뿐이었다. 개는 웬 쓰레기 더미에서 먹이를 뒤지다가 모모가 가까이 가자 겁에 질려 도망을 쳤다. 

 이윽고 모모는 엄청나게 넓은 텅 빈 광장에 이르렀다. 나무와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광장이 아니라, 그냥 넓기만 하고 황량한 평지였다. 다만 광장의 가장자리로 밤하늘을 배경으로 집들의 실루엣이 컴컴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모모는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바로 광장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아주 가까운 데서 웬 탑 시계 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계 소리는 여러 번 울렸다. 그러니까 어쩌면 벌써 자정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회색 사나이가 원형극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시간에 맞춰 가는 건 벌써 틀렸어, 하고 모모는 생각했다. 그는 공연히 기다리다가 돌아갈거야. 친구들을 도와 줄 가능성을 놓치는 건지 몰라, 어쩌면 영원히! 

 모모는 주먹을 깨물었다. 어떻게 한담? 이제부터라도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람? 모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 여기 있어요!" 모모는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어둠 속을 향해 외쳤다. 그렇지만 실제 회색 사나이가 그 소리를 들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허나 그건 모모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즉, 마지막 종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이 크고 텅 빈 광장 둘레에서 갈라져 나간 사방의 거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솟아오르더니 점점 밝아졌다. 모모는 곧 그것이,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광장을 향해 사방에서 느릿느릿 굴러오고 있는 여러 대의 자동차 헤드라이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려도 사방에서 눈부시게 강한 불빛이 부딪쳐 오기 때문에 모모는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들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잔뜩 동원하여 오리라고는 모모도 계산하지 않았었다. 한 순간 모든 용기가 다시 스러졌다. 하지만 이렇게 포위되어 버려 도망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모모는, 너무나 헐렁한 남자 웃도리 속으로 될 수 있는 한 기어 들어갔다. 

 하지만 곧 모모는 꽃들과 위대한 음악 속의 음성을 생각하였고,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위안을 느끼고 힘을 얻었다. 

 나직이 모터 소리를 붕붕거리면서 자동차들은 점점 가까와져 오고 있었다. 마침내 차들은 나란히 모모를 중심점으로 하여 하나의 원을 그리며 정지했다. 

 그리고 회색 사나이들은 차에서 내렸다. 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헤드라이트 뒤쪽 어둠 속에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시선이 자기를 향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결코 친절함을 머금지 않은 시선들이. 그러자 모모는 추워졌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모모도, 회색 도당 중의 어느 누구도. 

 "이 아이가 그러니까," 이윽고 어느 잿빛 음성이 들려왔다. "한 때 감히 우리랑 맞서 싸울 수 있다고 까분 모모라는 계집애요. 자, 보시요, 저 가련한 몰골을!" 

 이 말에 뒤이어, 멀리서 여러 사나이들의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웅성웅성하는 소음이 있었다. 

 "조심하시오!" 다른 잿빛 음성이 숨을 죽여 말했다. "아시다시피 이 꼬마는 우리한테 굉장히 해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소. 꼬마를 살짝 속이려는 건 소용 없는 짓이오." 

 모모는 잔뜩 귀를 기울였다. 

 "그럼 좋소," 첫번째 음성이 헤드라이트 뒤의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럼 우리 진실을 가지고 시도해 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모든 회색 도당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데 상상할 수 없는 안간힘을 요하는 모양이었다. 여러 목구멍에서 나오는 헐떡거리는 것같은 소리가 울려왔다. 

 이윽고 누구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음성은 다른 방향에서 들렸지만 역시 잿빛이었다. 

 "그럼 우리 터놓고 얘기해 보자. 너는 혼자야, 꼬마야. 네 친구들은 네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너의 시간을 같이 나눌 사람이 이제 아무도 없어.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지. 보다시피 우리의 힘은 이렇게 막강해. 우리한테 맞선다는 것은 소용 없는 짓이야. 수많은 외로운 시간들, 그것이 지금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니? 너를 압박하는 저주(咀呪)요, 너를 질식케 하는 짐이요, 너를 삼키는 바다요, 너를 시들게 하는 고통이야. 너는 모든 인간들한테서 젖혀졌어." 

 모모는 귀를 기울여 들으며 계속 침묵을 지켰다. 

 "언젠가는" 하고 그 음성은 말을 이었다. "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올 거야. 내일이든, 일 주일 후이든, 일 년 후이든. 우리한텐 아무래도 좋아. 그냥 기다리면 되니까. 언젠가는 네가 머리를 숙이고 기어 들어와서 뭐든지 하겠어요, 다만 이 묶여진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럴 생각이니? 그냥 말만 하면 된다." 

 모모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우리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니?" 그 음성은 싸늘하게 말했다. 

 냉기(冷氣)의 파도가 사방에서 모모를 향해 밀어닥쳤다. 하지만 모모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저 꼬마는 시간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소." 어느 딴 음성이 수군거렸다. 

 "그건 저 꼬마가 정말로 이른바 '모(某)'라는 자한테 갔었다는 증거요." 첫번 음성이 역시 수군대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다시 음성을 높여 물었다. "너는 호라 박사를 알고 있니?" 

 모모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네가 실제로 호라 박사한테 갔었니?" 

 모모는 다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넌…… 시간의 꽃을 알겠구나?" 

 모모는 세번째로 고개를 까딱였다. 아, 모모는 그 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 꽤 긴 침묵이 흘렀다. 다시금 다른 방향에서 음성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너는 네 친구들을 사랑하고 있지?" 

 모모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그들을 우리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싶지?" 

 다시금 모모는 고개를 까딱였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할 수가 있어." 

 모모는 웃도리를 한껏 꼭꼭 여몄다. 추워서 사지(四肢)가 덜덜 떨려왔기 때문이었다. 

 "네 친구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데, 너는 정말 아주 조금만 애를 쓰면 돼. 우리가 너를 도와 주고 네가 우리를 도와 주는거야. 아무튼 공평한거야." 

 모모는 지금의 음성이 들려오는 쪽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즉 우리는 이 호라 박사라는 인물을 한번 직접 보고 싶다, 알겠니? 그렇지만 우리는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만 네가 우리를 그의 집으로 안내해 주는 것뿐이야. 그것이 전부야. 잘 들어 봐, 모모. 이만하면 너도 우리가 너와 솔직히 터놓고 얘기를 하고 진심으로 대했음을 확실히 알겠지? 그 대신 너는 네 친구를 다시 갖게 되고 너희들은 옛날처럼 재미있게 지낼 수가 있을거야. 이만하면 아무튼 유리한 제안이지!" 

 그 순간 모모는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말을 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입술이 얼어 붙은 것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라 박사한테 무엇을 원하나요?" 모모는 느린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그를 보고 싶을 뿐이야." 그 음성은 날카롭게 대답했고 주위는 점점 추워왔다. "그것으로 너는 족한거야." 

 모모는 말없이 서서 기다렸다. 회색 도당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하고 회색 음성은 말했다. "너랑 네 친구들이나 생각하렴! 호라 박사에 대해 무슨 걱정을 하니? 그것은 어쨌든 그 자신이 걱정할 문제야. 그는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어. 뿐만 아니라 그가 현명하게 일을 처리하고 우리하고 뜻이 맞으면, 우린 그의 머리카락 하나 안 건드릴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뜻을 꺾을 수단을 갖고 있어." 

 "어떻게 하려고요?" 모모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물었다. 

 대답하는 음성이 더 질질 끌 수 없다는듯이 갑자기 날카롭게 울려왔다. "우리는 인간의 시간을 초, 분, 시간으로 낱낱이 긁어 모으는 데 진력이 났어. 모든 인간의 시간을 몽땅 가지려는 거야. 호라 박사한테 그 시간을 우리한테 떠넘기라고 할거야!" 

 모모는 깜짝 놀라 음성이 들려오는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럼 인간들은?" 모모는 물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나요?" 

 "인간들은" 하고 그 음성은 쇳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벌써 오래 전부터 넘쳐나고 있어. 인간들 자신이 자기네들이 앉을 자리가 없게끔 세상을 이끌어 왔어. 이제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는거야!" 

 냉기가 너무나 무섭게 몰아쳤기 때문에 모모는 입술을 움직이려고 애썼지만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걱정 말아라, 꼬마 모모." 음성은 이번엔 갑자기 다시 억양을 낮추어 사뭇 아첨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너랑 네 친구들은 물론 예외야. 너희들은 뛰어 놀며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거야. 너희들은 우리의 이번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아. 우리는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거야." 

 음성은 말을 마쳤다. 하지만 곧 이어 이번엔 다른 방향에서의 음성이 말을 시작했다. "보다시피 우리는 진실을 털어놨어. 우리는 우리의 약속을 지킬거다. 그러니 너는 우리를 호라 박사한테 안내해." 

 모모는 입을 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추위가 의식(意識)을 거의 앗아가 버렸다. 몇 번이나 애를 쓴 끝에 가까스로 말을 끄집어냈다. "혹시 제가 할 수 있다 해도 그만 두겠어요." 

 어느 방향에선가 위협하는 투로 한 음성이 물었다. "혹시 할 수 있다니, 무슨 뜻이니? 너는 할 수가 있잖아! 어쨌든 너는 호라 박사한테 갔었고, 그러니 길을 알고 있어!" 

 "나는 그 길을 다시 못 찾아요." 모모는 속삭이듯 말했다. "찾으려고 해 봤어요. 카시오페이아만 그걸 알아요." 

 "그게 누군데?" 

 "호라 박사의 거북이예요." 

 "그 거북이는 지금 어디 있니?" 

 모모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거북이는…나랑…같이 왔어요………그런데…내가…거북이를…잃어 버렸어요." 

 흥분한 음성의 수런거림이 까마득히 멀리서처럼 모모의 주변에서 들려왔다. 

 "당장 대 비상경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거북이를 찾아야 한다. 모든 거북이를 수색하라! 이 카시오페이아라는 거북이를 꼭 찾아야 한다! 꼭 찾아야 한다! 꼭!" 

 음성들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모모는 서서히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모모는 다만 차가운 돌풍만이 여전히 불고 있는 커다란 광장에 혼자 서 있었다. 황량한 공허(空虛)로부터 불어오는 듯한, 잿빛 바람이었다. 

 

18  뒤돌아 보지 않고 섣불리 앞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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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탑시계가 이따금 쳤지만 모모는 거의 듣지 못했다. 다만 아주 서서히 얼어 붙은 팔다리로 온기(溫氣)가 되돌아왔다. 모모는 마치 무력하게 마비되어 버린듯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원형극장 옛터로 되돌아가 잠을 자야 할까? 이제는 자기와 친구들을 위한 모든 희망이 결정적으로 사라져 버린걸까? 다시는 좋게 회복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카시오페이아에 대한 불안이 덮쳐왔다. 회색 도당이 진짜로 카시오페이아를 찾아내면 어떻게 한담? 모모는 도대체 거북이에 관해 입에 올린 자기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둘 만큼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정신없이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하고 모모는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카시오페이아는 벌써 오래 전에 다시 호라 박사한테 가 있을는지 몰라. 그래, 차라리 거북이가 나를 다시 찾지 않았으면. 그게 거북이를 위해서는 행운일거야. 나를 위해서도……." 

 그 순간 모모의 맨발을 무엇인가가 살짝 건드렸다. 모모는 깜짝 놀라 살며시 아래로 몸을 굽혔다. 

 그 앞에 거북이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어둠 속에서 서서히 글자가 비쳐 올랐다. "내가 다시 왔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모는 거북이를 덥석 들어 올려 웃도리 밑에다 싸안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주변의 어둠 속을 살펴보고 귀를 기울였다. 회색 도당이 아직도 근처에 있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사방은 여전히 적막했다. 

 카시오페이아는 웃도리 속에서 요란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모모는 거북이를 꼭 껴안은 채 웃도리 속을 들려다 보며 소근거렸다. "제발 가만히 있어." 

 "왜 이렇게 나를 가두니?" 거북이 등이 반짝였다. 

 "네가 눈에 띄면 안 돼!" 모모는 소근댔다. 

 이번에는 거북이의 등에 이런 글자가 나타났다. "조금도 기쁘지가 않니?" 

 "왜 기쁘지 않겠니." 모모는 말하며 사뭇 훌쩍거렸다. "기뻐, 카시오페이아.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리고는 거북이 코에 대고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거북이 등의 글자가 눈에 띄게 홍조를 띠며 대답했다. "이제 그만!" 

 모모는 방긋 웃었다. 

 "그럼 내내 나를 찾은거니?" 

 "물론." 

 "그럼 어떻게 나를 하필 지금, 왜 여기서 찾았니?" 

 "미리 알았어." 

 그렇다면 거북이는 그 이전의 시간에는 모모를 찾아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내내 찾아 다녔다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 경우 도대체 찾아 다닐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시 오랫동안 곰곰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어지는 카시오페이아의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런 문제로 머리를 싸맬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모모는 그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 소근소근 거북이에게 보고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이윽고 모모는 물었다. 

 카시오페이아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들었다. 이번엔 거북이의 등에 글자가 나타났다. "우리는 호라 박사한테 가는거야." 

 "지금?" 모모는 소스라치듯 놀라 외쳤다. "그렇지만 그 자들이 너를 사방에서 찾고 있어! 다만 여기에만 없는거야. 여기 그냥 있는 것이 현명한 게 아닐까?" 

 하지만 거북이의 등에는 다만 "알고 있어. 우리는 가는거야"라고 쓰였다. 

 "그렇게 되면" 하고 모모는 말했다. "우리는 곧장 그 사람들 품 속으로 뛰어드는 셈이야." 

 "우리는 아무도 안 만나." 카시오페이아의 대답이었다. 

 자, 거북이가 이렇게 확신한다면, 물론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를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러자 먼젓번에 걸어갔던 그 길고 힘들었던 길이 떠오르며, 불현듯 다시는 그 길을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혼자서 가렴, 카시오페이아." 모모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나는 못 가겠어. 혼자 가서 호라 박사께 인사 말씀이나 잘 전해 줘." 

 "아주 가까와!"라고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쓰였다. 

 모모는 그것을 읽고, 놀라서 주위를 돌아 보았다. 점차 모모는 여기가 곧 죽음처럼 느껴지던 그 초라한 도시 구역이라는 것을, 이곳을 통해 그 전에 자기가 신비스러운 불빛이 비치는 새하얀 집들이 있는 이역(異域)에 이르렀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여기가 바로 그 곳이라면, 정말 얼마 안 가 초시간의 거리, 초공간의 집에 이를 것이었다. 

 "좋아,"하고 모모는 말했다. "같이 갈께. 그렇지만 더 빨리 가게 내가 너를 안으면 안되겠니?" 

 "미안하지만 안돼."라고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쓰여졌다. 

 "왜 너는 굳이 너 혼자 기어가야 하니?" 모모는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 수수께끼같은 대답이 나타났다. "길은 내 안에 있어." 

 그리고 나서 거북이는 발을 떼었고 모모는 뒤를 좇았다. 천천히 한 발짝씩, 타박타박. 

  

 소녀와 거북이가 한 샛골목으로 사라지자마자 광장 주변의 칠흑같은 건물 그늘마다 술렁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억양 없이 킬킬거리는 소리처럼 수근대는 웅성거림이 광장으로 퍼졌다. 그것은 이 모든 장면을 엿듣고 있던 회색 도당들이었다. 그들 중의 몇몇이 모모를 몰래 지켜 보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퍽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기다림이 이토록 예기치 않은 수확을 가져다 주리라고는 그들 자신도 짐작 못할 일이었다. 

 "저기 가고 있어." 어느 잿빛 음성이 수근거렸다. "붙잡아야 할까?" 

 "물론 안돼요." 다른 자가 수군댔다. "그냥 가게 내버려 두는거요." 

 "어째서요?" 첫 음성이 물었다. "우린 거북이를 잡아야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라고 하잖았소." 

 "맞았소. 한데 무엇 때문에 거북이가 필요하오?" 

 "호라 박사한테로 안내받기 위해서요." 

 "바로 그거요. 지금 거북이는 바로 그리로 가고 있소. 그렇다면 우리는 거북이한테 억지로 시킬 필요가 없는거요. 지금 거북이는 자진해서 가고 있소, 의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다시금 억양 없는 킬킬거림이 광장 주변의 칠흑같은 그늘로 퍼졌다. 

 "당장 도시 안의 전 외무사원에게 알리시오. 추적이 단절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오. 모든 사원이 우리와 합세해야 하오. 그렇지만 절대 조심할 것은, 여러분, 아무도 저 꼬마와 거북이의 길을 방해해서는 안돼오. 어디를 가든 그들의 길을 터 줘야 하오. 어느 누구도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자, 그럼 우리 침착하게 저 아무 것도 모르는 안내자들을 미행합시다!" 

  

 이렇게 하여 과연 모모와 카시오페이아는 그들의 추적자 중의 누구와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왜냐 하면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든 간에 추적자들은 이들을 피해 제때에 몸을 감추어, 소녀와 거북이 뒤의 동료들에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점점 거창하게 불어나는 회색 도당의 행렬이 끊임없이 담벼락과 건물 모퉁이에 몸을 감춘 채 소리없이 두 도망자의 뒤를 좇고 있었다. 

 모모는 일찌기 겪어 보지 못한 극도의 피곤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쓰러지든가 잠들어 버릴 것같은 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채찍질하며 한 발짝을 떼어 놓았고 다시 다음 발짝을 떼어 놓았다. 그러자 한동안 다시 견딜 만해졌다. 

 거북이가 이토록 참을 수 없이 느림보로 기어 가지만 않더라도! 하지만 그 점은 어떻게 바꿀 도리가 없는 것이다. 모모는 이제 양 옆으로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발과 카시오페이아의 뒤꿈치에만 시선을 박고 있었다. 

 모모로서는 영원(永遠)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발 밑의 거리가 별안간 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모모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과연 그들은 마침내 아침빛도 저녁빛도 아닌 여명(黎明)에 휩싸인, 모든 그림자가 여러 갈래의 방향으로 드리워져 있는 바로 그 도시 구역에 이른 것이었다. 새까만 창문이 달린 건물들이 눈부시게 새하얗게, 접근할 수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또 새까만 정방형 돌 위에 커다란 달걀을 묘사한 것에 불과한 듯한, 예의 괴상한 기념비도 여전히 서 있었다. 

 모모는 용기를 얻었다. 이제야말로 호라 박사의 집에까지 과연 얼마 안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탁이야" 하고 모모는 카시오페이아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빨리 갈 수 없겠니?" 

 "천천히 가면 갈수록, 더욱 빨리 닿게 돼." 거북이 등에 나타난 대답이었다. 거북이는 아까보다 더 천천히 계속 기어갔다. 과연 모모는―전에도 그랬듯이―여기에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천천히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그들 발 밑의 길이 점점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천천히 앞으로 내디디면 디딜수록 더욱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또한 급히 서둘면 서둘수록 더욱 디디게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사실 이것이야말로 이 새하얀 도시 구역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세 대의 자동차로 모모를 추적하던 그 당시에 회색 도당들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모모를 놓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그들도 소녀와 거북이를 결코 앞지르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그들도 앞서가는 두 꼬마와 똑 같은 속도로 천천히 뒤좇고 있었다. 이렇든, 그들 역시 이 비밀을 알아낸 것이었다. 새하얀 거리들은 소녀와 거북이에 뒤이은 한 떼의 회색 도당으로 서서히 메워져 갔다. 여기서는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 버린 회색 도당들은 이제 숫제 거북이보다 느린 속도로 뒤따라 갔고, 그러다 보니 결국 점점 따라 붙게 되어 간격이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이야말로 사뭇 거꾸로의 경주(競走)였다. 느림보 경주였던 것이다. 

 길은 환상의 거리를 가로 세로로 누비며 점점 깊숙이 새하얀 도시 구역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자 초시간가(街)에 이르게 되었다. 

 카시오페이아는 벌써 그 골목으로 굽어 들어 초공간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모는 이 거리에서는 뒤돌아 서서 거꾸로 걷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순간, 모모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깜짝 놀랐다. 

 움직이는 회색 담벼락처럼 시간 도둑들이 다가 오고 있지 않은가. 전 도로의 폭을 가득 채우도록 나란히 서서, 눈에 보이는 한은 끝도 없이 열을 지어서. 

 모모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모모는 뒷걸음질로 초시간가로 들어가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따라 오는 엄청난 회색 도당의 부대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추적자들의 제 일진(一陣)이 초시간가로 뚫고 들어오려 하자,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모모의 눈 앞에서 무(無)로 소멸해 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앞으로 내민 두 팔이, 그 다음엔 다리와 몸뚱아리, 그리고 끝으로 경악의 표정을 담은 얼굴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모만이 이 과정을 목격한 게 아니라, 뒤따라 몰려들던 회색 도당들도 당연히 이 장면을 보았다. 바로 그 뒤의 그룹이 이 뒤에서 몰려오는 대부대를 막고 버티어 섰다. 그러자 한 순간 그들 사이에 일종의 격투같은 장면이 벌어졌다. 모모는 그들의 격노한 얼굴과 절박하게 휘두르는 주먹을 보았다. 그렇지만 자기를 따라 오려고 감히 마음먹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 이윽고 모모도 초공간의 집에 이르렀다. 육중한 초록빛 철문이 열렸다. 모모는 허겁지겁 뛰어 들어가, 돌상(像)들이 즐비한 복도를 달려, 막다른 곳의 꼬마문을 열고 미끄러져 들어 갔다. 다시 수많은 시계가 서 있는 홀을 누비며 시계 숲의 한가운데 있는 꼬마방을 향해 달려가서, 아담한 소파에 몸을 던지고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기 위해서. 

 

19  포위된 사람들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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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서서히 모모는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신기하게도 씻은듯이 피곤이 가시고 상쾌한 느낌이었다. 

 "꼬마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너는, 카시오페이아, 어쩌자고 그렇게 했니?" 

 모모는 눈을 반짝 떴다. 소파 앞의 식탁 곁에 호라 박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거북이가 앉아 있는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회색 도당이 좇아오리라는 것을 생각 못했니?" 

 "나는 미리 알 뿐이에요"라고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나타났다. "뒤늦게 반성은 안해요!" 

 호라 박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카시오페이아, 카시오페이아, 어떨 땐 너 역시 나한텐 수수께끼야!" 

 모모는 일어나 앉았다. 

 "아, 우리 꼬마 모모가 깨었구나!" 호라 박사는 다정하게 말했다. "어떠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니?" 

 "아주 좋아요, 고마와요." 모모는 대답했다. "죄송해요. 여기서 무턱대고 잠이 들어 버려서……." 

 "그런 걱정은 말아라."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참 잘한 일이다. 아무런 설명을 안해도 돼. 내가 만물투시 안경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은 전부 카시오페이아가 그 동안에 보고를 해 주었어." 

 "그럼 회색 도당들은 어떻게 됐어요?" 모모가 물었다. 

 호라 박사는 웃도리에서 커다란 푸른 손수건을 꺼냈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 초공간의 집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셈이지. 그 자들이 접근해 올 수만 있다면 말이다." 

 "여기로 들어올 수는 없단 말인가요?" 모모가 물었다. 

 호라 박사는 코를 풀었다. "아니, 그렇게는 못해. 너도 보지 않았니. 그들이 초시간가(街)를 디디기만 하면 속절없이 무(無)로 사라져버리는 광경을." 

 "어떻게 그렇게 되지요?" 모모는 궁금했다. 

 "시간의 역류(逆流)가 그렇게 만드는 거란다."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그 안에서는 일체 거꾸로의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걸 너도 알잖니? 초공간의 집 주변에서는, 말하자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거든. 그밖의 다른 데서는 시간이 너의 내부(內部)를 향해 흘러 들어 가고 있는거야. 그래서 네가 점점 네 안에 시간을 많이 지닐수록, 너는 나이가 들어 가는 거야. 그렇지만 초시간의 거리에서는 시간이 너로부터 밖으로 빠져 나와. 그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에, 너는 나이가 줄어든다고 말할 수 있겠지. 무턱대고 젊어지는 게 아니라, 다만 그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걸린 시간만큼." 

 "그런 걸 저는 전혀 몰랐어요." 모모는 신기해하며 말했다. 

 "자, 이거 봐." 호라 박사는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게 아냐. 인간은 자기 안에 감추어진 시간을 훨씬 능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회색 도당들한텐 문제가 달라. 그들은 온통 훔쳐온 시간으로 이루어진 존재거든. 그래서 그들이 시간의 역류 속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이 그들에게서 빠져 나오는거야. 마치 터진 고무풍선에서 공기가 빠지듯이. 고무풍선의 경우엔 하다못해 껍데기라도 남지만, 그들은 완전히 형체가 없어져 버려." 

 모모는 정신을 바짝 모아 생각을 했다. 

 "그럼 혹시," 잠시 후 모모는 물었다.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거꾸로 흐르게 할 수는 없을가요? 물론 아주 잠간만요. 그럼 모든 인간들은 약간씩 젊어질 테고, 그거야 괜찮은 일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으로 시간 도둑들은 무(無)로 사라질 테니까요." 

 호라 박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면 물론 좋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는 안돼. 양편의 시간의 흐름은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한편의 흐름을 없애 버리면, 동시에 다른 편의 흐름도 사라지는거야. 그리고 나면 애당초 시간이라는 게 없어지는 거야……." 

 그는 말을 멈추고 만물투시 안경을 이마로 추켜올렸다. 

 "그것은 즉…," 그는 중얼거리며 일어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작은 방안을 몇 번 왔다 갔다 서성댔다. 모모는 잔뜩 긴장해서 그를 쳐다 보고 있었고, 카시오페이아의 시선 역시 그를 좇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좋은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성취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나 혼자한테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야." 그는 발치에 있는 거북이를 향했다. "카시오페이아, 내 소중한 친구! 네 생각에는 포위당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이 뭐겠니?" 

 "아침 식사요!" 거북이의 등에 대답이 나타났다. 

 "그래," 호라 박사는 말했다. "역시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바로 그 순간, 어느새 식탁이 차려졌다. 아니면 애당초 그 동안 내내 식탁이 차려져 있었는데, 모모가 여태 몰랐던 것일까? 어쨌든 거기에는 전처럼 작은 황금 찻잔과 그밖의 모든 황금빛 나는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콜렛이 든 주전자랑, 꿀, 버터, 그리고 바삭바삭한 동그란 빵이. 

 그 동안 여러 번, 이 맛나는 음식을 회상하며 먹고 싶어했던 모모는 잔뜩 식욕을 느끼며 당장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난 번보다 한층 더 맛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호라 박사도 맛있게 음식을 들었다. 

 "그 자들은," 잠시 후 모모는 볼이 불룩하게 씹어 먹으며 말했다. "박사님한테서 모든 인간의 시간을 몽땅 인수하려고 그래요. 그렇지만 박사님께서 그러시지는 않겠지요?" 

 "아니, 꼬마야."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거다. 시간은 언젠가 시작되면, 또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야. 그렇지만 인간이 그것을 쓰기를 그칠 때에야 비로소 끝나는거야. 나한테서는 회색 도당이 단 일초도 뺏아갈 수 없을거다." 

 "그렇지만 그 자들은" 하고 모모는 말을 이었다. "박사님을 그렇게 하도록 꺾을 수 있다던데요." 

 "그 점에 대해 계속 얘기하기 전에" 하고 그는 아주 심각하게 말했다. "네 눈에 그 자들을 보여 주고 싶구나." 

 그는 그의 작은 황금빛 안경을 벗어 모모에게 건네 주었다. 모모는 안경을 썼다. 

 처음에는 다시금 빛깔과 형체의 소용돌이만이 나타났고, 모모는 지난 번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지럼증도 금방 지나갔다. 잠시 후 모모의 눈은 만물의 시계(視界)로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자 거기에 나타난 포위하고 있는 엄청난 대군이란! 

 헤아릴 수 없는 회색의 대군이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초시간가(街) 앞에만 있는 게 아니라 더 멀리 광범위하게, 초공간의 집을 중심으로 하여, 눈처럼 새하얀 집들의 도시 구역을 뒤덮는 커다란 원을 긋고 있었다. 포위망은 물샐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어서 모모는 어떤 다른점을, 의아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처음엔 만물투시 안경의 유리면에 혹시 습기가 끼었거나, 자기 자신이 아직 분명히 볼 수 없는 상태인가 보다고만 생각을 했었다. 알 수 없는 안개가 회색 대군의 윤곽을 몽롱하게 알아 볼 수 없게 흐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이 안개는 안경이나 자신의 눈과는 상관 없이 저 바깥의 거리에서 솟아오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벌써 여러 군데에, 꿰뚫어 볼 수 없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다른 지점에서는 이제 막 안개가 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회색 도당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여전히 머리에 중산모자를 쓰고,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입으로는 작은 회색 시가를 뿜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담배 연기는 다른 때 보통의 공기 속에서처럼 분산되지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이곳의 유리알같은 공기 속에서 담배 연기는 거미줄처럼 질긴 베일을 이루며 뻗쳐, 거리 위쪽 새하얀 건물의 전면(前面)으로 기어올라가 길다란 깃발처럼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퍼져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네모의 청록(靑綠)빛 가닥으로 뭉쳐서, 서서히,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포개어져 쌓여 탑을 이루면서 끝없이 높아지는 담벼락으로 초공간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모모는 또한 이따금 새로운 도당들이 도착해서 다른 자들과 자리를 교대해 가면서 열(列)에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 시간 도둑들은 무슨 꿍꿍이 수작을 벌이는 것일까? 

 모모는 안경을 벗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봤니?" 그는 물었다. "그럼 안경을 이리 돌려다오." 

 안경을 다시 쓰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자들이 나를 꺾을 수 있느냐고 물었지. 너도 알다시피 나 자신에게는 그들이 와서 닿을 수가 없어. 그렇지만 인간들에게 해를 줄 수는 있어. 지금까지 그들이 했던 그 어떤 짓보다 더 나쁜 방법으로. 지금 그 방법으로 그들은 나를 협박해서 뜻을 이루려는 거야." 

 "더 나쁜 방법이라구요?" 모모는 깜짝 놀라 물었다.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 시간을 나누어 주고 있어. 거기 대고는 회색 도당도 손을 쓸 수가 없어. 그들은 또 내가 보내는 시간을 막을 수도 없어. 그렇지만 그것을 중독(中毒)시킬 수는 있어." 

 "시간을 중독시키다니요?" 모모는 의기소침해져서 물었다. 

 "그들의 시가의 연기로 말이다."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조그만 회색 시가를 물지 않은 회색 인간을 하나라도 본 적이 있니? 없을거다. 시가 없이는 그들은 존재할 수 없거든." 

 "그럼 대체 그게 무슨 종류의 시가인가요?" 모모는 궁금해서 물었다. 

 "시간의 꽃을 너는 기억하고 있겠지." 호라 박사는 말했다. "그 때 내가 말했었지. 모든 인간은 심장을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모두가 그런 시간의 황금 성전(聖殿)을 지니고 있다고. 인간들이 회색 도당을 자기의 성전 안에 받아 들이면, 그들은 점차로 그 성전 안의 꽃들을 꺾어갈 수 있게 돼. 그렇지만 이렇게 인간의 심장에서 꺾여 나간 시간의 꽃들은 죽은 게 아니야. 그것들은 실제로 사라져 버린 게 아니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그 꽃들은 살아 있는 것도 아니야. 실제의 주인한테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지. 그 꽃들은 본질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자기의 주인한테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거야." 

 모모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악(惡)도 그 나름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모모. 이 회색 도당이 탈취해 온 시간의 꽃들을 어디에다 저장하는지를 나는 몰라. 나는 다만 그들이 이 꽃들을 유리잔처럼 딱딱해지도록, 자기네의 냉기(冷氣)로 얼린다는 것만 알고 있어. 그렇게 해서 그 꽃이 되돌아 가는 걸 방해하는거야. 어딘가 땅 속 깊이 얼어 붙은 시간이 몽땅 잠긴 거대한 창고가 있을거야. 하지만 거기서도 역시 시간의 꽃은 여전히 죽은 게 아니야." 모모의 뺨은 분노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저장 창고로 회색 도당은 끊임없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 그들은 시간의 꽃에서 꽃잎을 뜯어 내어, 잿빛으로 딱딱해질 때까지 그것을 말린단다. 그리고 그걸 갖고 그들의 조그만 시가를 말아. 그렇지만 이 순간까지도 생명의 잔재(殘滓)가 꽃잎에 남아 있어. 어쨌든 살아 있는 시간이란 회색 도당한테는 벅찬거야. 그래서 그들은 시가에 불을 붙이고 담패를 피우지. 왜냐하면 그렇게 연기로 화하면서 시간은 진실로 완전히 죽어 버리기 때문이야. 그런 죽어 버린 인간의 시간으로 그들은 자기네 존재를 연명하는 거야." 

 모모는 일어섰다. "아! 그렇게 많은 죽어 버린 시간이라니요…." 모모는 말했다. "그래, 저 바깥, 초공간의 집 주변을 두르고 높이 쌓여가는 연기의 장벽은 죽은 시간으로 이뤄진 것이란다. 아직은 탁 트인 하늘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나도 큰 지장 없이 인간에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어. 그렇지만 침침한 연기의 덮개가 사방으로 우리의 위를 뒤덮게 되는 날이면,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 속에, 회색 도당의 유령같은 죽어 버린 시간이 뒤섞이게 된단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 시간을 받게 되면,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병이 들게 돼. 죽을 병에 걸리게 되는거야." 

 모모는 어쩔 줄 몰라하며 호라 박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무슨 병인데요?" 

 "처음에는 거의 증세를 못 느끼지.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무엇이든 할 의욕을 잃어 버려. 재미있는 일이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게 돼. 게다가 이 불쾌감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버티고서는 점점 서서히 커가는 거야. 날이 가고 주일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돼. 점점 기분이 나쁘게 느껴지고, 점점 내면(內面)이 비어가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점점 불만스럽게 느껴지는거야. 그 다음엔 이런 느낌조차 점점 없어지고 결국 아무 것도 느끼지 않게 돼. 완전히 냉담해지고 회색이 되는거야. 온 세상이 그에겐 낯설게 느껴지고 전혀 상관 없게 돼. 화낼 것도 열광할 것도 없어져. 기뻐할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르게 되고 웃는 것과 우는 것을 잊어 버리는거야. 그리고 나면 그의 내면은 싸늘해지고, 아무 것도,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게 돼. 이 정도까지 증세가 악화되면, 그 병은 불치의 병이야. 회복할 길이 없어. 공허한 회색 얼굴로 성급히 싸돌아 다니는거야. 그 자신이 회색 도당과 꼭 같이 되어 버리는거야. 그래, 그렇게 되면 그도 곧 회색 도당의 일원인거지. 이 병의 이름은 중증 권태감(重症倦怠感)이란다." 

 모모는 온 몸을 무섭게 떨었다. 

 "만일 박사님께서 계속 모든 인간에게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하고 모모는 물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을 자기네처럼 만들겠군요?" 

 "그렇단다."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협박해서 뜻을 이루려는거다." 

 그는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나는 지금껏 인간들 스스로가 이 악귀(惡鬼)들한테서 빠져 나오기를 기다렸어. 인간들은 그럴 수가 있었어. 사실 그 악귀들도 결국은 인간에 의존해서 연명을 하니까. 그렇지만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무슨 조처를 취해야겠어. 하지만 나 혼자서는 할 수가 없구나." 그는 모모를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주겠니?" 

 "예." 모모는 속삭였다. 

 "너는 상상할 수도 없는 위험 속으로 보내지는거야" 하고 호라 박사가 말했다. "그리고 세상이 영원히 정지해 버리느냐, 아니면 새로이 살기를 시작하게 되느냐 하는 건 너한테 달렸어, 모모. 정말로 해 볼 용기가 있니?" 

 "예." 되풀이하는 모모의 음성이 이번엔 단호히 울렸다. 

 "그렇다면" 하고 호라 박사는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아주 주의 깊게 들어라. 이제 너는 완전히 너 혼자의 힘으로 서야 해. 나 역시 너를 더 이상 도와 줄 수 없기 때문이야. 나도, 그 어느 누구도." 

 모모는 고개를 까딱하고 온 주의력을 집중해서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을 자는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고 그는 말을 시작했다. "내가 잠이 들면, 그 순간 모든 시간은 정지할 거야. 세상도 정지해 버리겠지. 시간이라는 것이 없어지면, 회색 도당도 아무한테서도 시간을 훔칠 수가 없게 되지. 하긴 그들은 잔뜩 저장해 놓은 시간을 갖고 있으니까 당분간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이것마저 소비해 버리고 나면 그들은 무(無)로 사라지고 말게 돼." 

 "그렇다면," 모모가 말한다. "어쨌든 참 간단하네요!"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 그렇다면 나는 네 도움도 필요 없겠지, 꼬마야. 요컨대 시간이라는 게 이미 존재하지 않으면, 나 역시 다시는 깨어날 수가 없는거야. 그래서 세상은 정지 된 채로 영원히 머물게 될 거야. 그렇지만 너한테, 모모, 단지 너 혼자한테, 한 송이 시간의 꽃을 주는 것은 내 권한에 속하는 일이야. 물론 단 한 송이뿐이야. 왜냐하면 언제든지 다만 한 송이만이 피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만약 세상의 모두 시간이 정지한다 해도, 너는 한 시간을 더 갖게 될거야." 

 "그렇다면 제가 박사님을 깨울 수 있겠네요!" 모모가 말했다. 

 "그 한 시간만으로는" 하고 호라 박사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간단히 뜻을 이룰 수 없을거다. 왜냐하면 회색 도당의 저장량이 훨씬, 훨씬 많기 때문이야. 단 한 시간 쯤이야, 그들은 그 저장량 중에서 아무 것도 아닌듯이 쓸 수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 이후로도 그들은 여전히 생존할 것이다. 네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훨씬 어려운 것이야! 시간이 정지한다는 것을 깨닫는 즉시―그것을 그들은 당장 깨달을 것이다. 시가의 조달이 중단될 테니까 말이다―회색 도당들은 포위를 풀고 시간의 저장 창고로 달려 갈 것이다. 그 때 너는 그들을 따라가는 거야, 모모. 그들의 비밀 창고를 발견하면, 너는 그들이 저장된 시간을 못 갖도록 막아야한다. 시가를 못 갖게 되면, 그들 역시 끝장이거든. 그렇지만 그 다음에 할 일이 또 있어. 아마 이것이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마지막 시간 도둑이 사라지고 나면, 너는 훔쳐온 모든 시간을 풀어 줘야 하는 것이야. 왜냐하면 이 시간들이 인간에게 되돌아가는 경우에만 세상은 정지 상태를 끝내고, 나 자신도 다시 깨어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 너한테는 단지 한 시간이 있을 뿐이야." 

 모모는 어쩔 줄 몰라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엄청나게 어렵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해 보겠니?" 호라 박사는 물었다. "이것이 유일한 마지막 가능성이야!" 

 모모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기로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같이 가겠어!" 라고 갑자기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나타났다. 

 이 모든 일에 거북이가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담! 그래도 그것은 모모한테 한 줄기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완전히 단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모모는 용기를 얻었다. 이렇다 할 분별있는 근거를 가진 용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용기로 인해 모모는 불쑥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해 보겠어요." 모모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호라 박사는 한동안 모모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많은 점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결 쉬울 것이다. 별(星)의 음성을 들었잖니. 겁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거북이를 향해 물었다. "그래, 카시오페이아, 너도 같이 가겠니?" 

 "물론!" 이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그리고 이 말이 사라지며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타났다. "그래도 누구인가 모모를 지켜야지요!" 

 호라 박사와 모모는 웃음을 머금고 마주 보았다. 

 "카시오페이아도 시간의 꽃을 하나 갖는가요?" 모모는 물었다. 

 "카시오페이아는 그것이 필요 없단다." 호라 박사는 거북이의 목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설명했다. "거북이는 시간 바깥의 존재이거든. 거북이는 자기의 작은 시간을 자신의 내부에 갖고 있어. 모든 것이 영원히 정지한다 해도, 거북이는 여전히 세상 위를 기어다닐 수 있을 거야." 

 "됐어요." 갑자기 사명에 대한 어떤 충동을 느낀듯 모모가 입을 뗐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지금,"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우리는 작별을 하는거야." 

 모모는 훌쩍거리면서 나직이 물었다. "그럼 다시는 못 만나게 되나요?" 

 "다시 만나게 돼, 모모"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그 때까지, 네 인생의 한 시간 한 시간이 내 인사를 전해 줄거다. 우리는 친구이잖니?" 

 "예." 모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이제 가겠다." 호라 박사가 말을 이었다. "따라 와서는 안돼. 또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말아라. 나의 잠은 보통의 잠이 아니란다. 네가 옆에 없는 게 좋아.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다. 내가 떠나자마자 두 개의 문을 열어라. 내 문패가 달려 있는 꼬마문과, 초시간가(街)로 나가는 초록빛 철문을. 시간이 멈춰 버리는 즉시 만물이 정지해 버리게 되고, 그러면 이 문들 역시 세상의 어떠한 힘으로도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말이다. 전부 알아 듣고 기억하겠니? 꼬마야." 

 "예" 하고 모모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멎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채지요?" 

 "걱정 말아라. 그냥 알게 된단다." 

 호라 박사는 일어섰다. 모모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모모의 더벅머리를 정답게 쓰다듬었다. 

 "잘 있거라, 꼬마 모모." 그는 말했다.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커다란 기쁨이었단다." 

 "모든 사람들한테 박사님 얘기를 하겠어요." 모모는 대답했다. "훗날에요." 

 그러자 호라 박사는 갑자기 알 수 없이 다시 늙어 보였다. 그 당시 황금빛 성전에서 보던 모습과 똑 같이 바위산처럼, 태고의 고목처럼. 

 그는 몸을 돌려 시계 상자로 이뤄진 작은 방을 재빨리 빠져 나갔다. 모모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발자국 소리는 수많은 시계의 똑딱거림과 구별할 수 없이 잦아들었다. 어쩌면 그는 이 똑딱거림 속으로 들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를 들어 올려 꼭 껴안았다. 모모의 위대한 모험은 이제 되돌릴 여지없이 시작된 것이었다. 

 

20  추적자(追跡者)의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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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처음으로 모모는 호라 박사의 이름이 붙어 있는 안 쪽의 꼬마문으로 가서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잽싸게 커다란 돌상이 서 있는 복도를 지나 바깥 쪽 초록빛 철문을 열었다. 커다란 문짝이 너무나 육중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야 겨우 열렸다. 

 이 일이 끝나자 모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계가 있는 홀로 되돌아와 카시오페이아를 팔에 안고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일종의 진동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흔드는 진동이 아닌, 시간을 흔드는, 이른바 시진(時震)이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의 것인가를 설명할 적절한 말은 없다. 지금껏 단 한 인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하나의 울림과 함께 이 일은 벌어졌다. 그것은 수백년의 깊이에서 울려 나오는 것같은, 일종의 한숨과 같은 울림이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일은 지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계의 똑딱똑딱, 재깍재깍, 땡땡 하는 합창도 씻은듯 순간적으로 딱 멎었다. 흔들거리던 추(錘)들도 그 순간에 있던 지점에서 멎어 버렸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완전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정적(靜寂)이 퍼졌다. 지금까지 세상을 한번도 지배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정적이었다. 시간이 멎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모모는 자기의 손에 신비로운, 커다란 시간의 꽃이 한 송이 쥐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 꽃이 자기의 손 안에 들어 왔는지 전혀 느끼지를 못했었다. 그 꽃은, 항상 당연히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순간적으로 거기에 나타난 것이었다. 

 조심조심 모모는 한 발짝을 떼어 놓았다. 과연, 언제나와 다름없이 쉽게 그냥 움직여졌다. 꼬마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아침 식사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모모는 안락의자에 앉아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쿠션이 대리석처럼 딱딱해져서 푹신하니 들어가지 않았다. 모모가 먹던 찻잔에는 아직도 한 모금의 초콜렛이 남아 있었지만, 찻잔 역시 놓인 자리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모모는 초콜렛 속에 손가락을 담가 보았다. 그것 역시 유리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꿀도 마찬가지였다. 쟁반에 놓인 빵 부스러기조차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진 마당에서는 아무 것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미 결코 변동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카시오페이아가 바둥거렸다. 모모는 거북이를 쳐다 보았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 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정말, 그래! 모모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홀을 지나 꼬마문을 빠져나가 거침없이 복도를 달려 커다란 문의 모퉁이에서 바깥을 엿보는 순간 흠칫 뒤로 물러섰다. 모모의 심장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시간 도둑들은 도망을 치는 게 아니었다! 반대로, 이제는 역류하는 시간이 멎어 버린 초시간의 거리를 따라 초공간의 집을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계획에서는 예기치 못한 일이 아닌가! 

 모모는 커다란 홀로 되돌아와 카시오페이아를 팔에 안고 커다란 장롱시계 뒤에 몸을 숨겼다. 

 "이제 시작이로구나." 모모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바깥 복도에서 회색 도당의 발자국 소리가 쿵쿵 울리는 게 들렸다. 차례차례로 그들은 억지로 꼬마문을 기어 들어 와서는 일당이 몽땅 홀 안에 섰다. 그들은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감개무량하군!" 그 중 한 사나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새 집이로군." 

 "모모라는 꼬마가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소." 다른 잿빛 음성이 말했다. "내 눈으로 똑똑이 보았소. 참 똑똑한 아이요! 그 늙은이의 마음을 되돌려 놓느라 이 꼬마가 무슨 수를 썼는지 참 궁금하오." 

 그러자 세번째의, 아주 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그 모(某)라는 자가 스스로 패를 내던진 것 같소. 왜냐하면 초시간가(街)에서 시간의 역류가 그쳤다는 것은 곧 그가 시간의 역류를 차단시켰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오. 그러니까 그 자도 우리한테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오. 이제 우리 그를 간단히 처리해 버립시다. 대체 그 자가 어디 처박혀 있는거요?" 

 회색 도당은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한 사나이가 말을 했다. 그의 음성은 한층 더 잿빛으로 울렸다. "저게 맞지 않아요, 여러분! 시계들 말이오. 저기 시계들 좀 보시오! 몽땅 멎어 있어요. 여기 모래시계까지." 

 "그 자가 지금 막 시계를 세운 모양이오." 다른 사나이가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모래시계는 정지시킬 수가 없소!" 먼저 사나이가 말했다. "게다가 이것 좀 보시오, 여러분. 흘러내리는 모래가 떨어지는 중간에서 멎어 버렸소! 시계를 움직일 수도 없소! 이게 무엇을 뜻하겠소?" 

 그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서 뛰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또 다른 회색 사나이가 흥분해서 손짓을 하며 꼬마문을 억지로 빠져 들어와 소리쳤다. "방금 시내의 우리 외무사원의 보고가 들어왔소. 자동차들이 정지했다는거요. 모든 것이 서 버렸소. 세계가 정지해 버렸소. 인간에게서 단 한 순간도 탈취해 오는 일이 불가능해진 것이오. 우리의 보급원(補給源)이 몽땅 끊어져 버린 것이오! 이제 시간이 없어졌소! 호라가 시간을 멈추어 버렸소!" 

 한 순간 죽음 같은 정적이 지배했다. 그러자 한 사나이가 물었다. "뭐라고 했소? 우리의 보급원이 끊어졌다고? 그렇다면, 휴대하고 온 시가를 다 피워 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당신도 알지 않소!" 다른 사나이가 소리쳤다. 

 "무서운 재앙이요, 여러분!" 

 그러자 갑자기 모두들 혼란을 일으키며 아우성쳤다. "호라가 우리를 근절시키려는 거요! ―당장 포위를 풀어 버려야겠소!―우리의 시간 창고로 가도록 해야겠소! 차가 없는데! 시간에 맞춰갈 수가 없소! 내 시가는 이십 칠분밖에 지탱을 못하는데! ―내 시가는 사십이분! ―그럼 나 좀 주시오! ―당신 돌았소? ―누구 나 좀 살려 주시오!――" 

 모두들 꼬마문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서 한꺼번에 비비적거리며 몰려 나가고 있었다. 모모는 몸을 감춘 채, 이 공황(恐慌) 속에서 그들이 서로 주먹질을 하며 밀치고 닥치고, 점점 격렬하게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관찰했다. 너나없이 자기가 앞장서 나가려 들며 자기의 회색 생명을 연명하려고 허우적대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머리의 모자를 치고 뒤얽혀 격투를 벌이며 각기 남의 입에서 조그만 시가를 낚아채었다. 그래서 빼앗긴 쪽은 그 순간 갑자기 모든 힘을 잃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허우적대며 겁에 질려 울상을 하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는 어느새 점점 투명하게 엷어져서 결국은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의 흔적은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었다. 모자조차도 간 곳이 없었다. 

 이윽고 홀 안에는 오로지 세명의 회색 사나이만이 남게 되었고, 그들은 어쨌든 꼬마문을 빠져나가 도망칠 수가 있었다. 

 겨드랑이엔 거북이를 끼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간의 꽃을 든 채, 모모는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제 모든 것은 회색 사나이들을 놓치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다. 

 큰 문을 나섰을 때, 시간 도둑들은 벌써 초시간가(街)의 어귀에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담배 연기 속에 다른 한 떼의 회색 도당이 서서 흥분해서 손짓을 하며 서로 뭐라고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들은 초공간의 집에서 달려나오는 사람을 보더니, 역시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잇달아 다른 떼들도 도망자의 행렬에 합류했고, 얼마 안 있어 전 부대가 허겁지겁 퇴각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끝도 없는 회색 도당의 행렬이, 사방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새하얀 건물의 신비스러운 꿈의 지역을 누비며 시내 쪽을 향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시간이 사라짐과 동시에, 물론 여기서는 빠른 것과 느린 것이 거꾸로 진행되던 신비스러운 속도의 전환(轉換)도 멎어 버렸다. 회색 도당의 행렬은 커다란 달걀 모양의 돌상을 지나서 비로소 보통의 집들이 시작되는 지점, 바로 시간의 접점(接點)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거주지인, 퇴락한 회색 아파트가 서 있는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어느새 모든 것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행렬의 후진(後陳)과 적당한 간격을 취하며 모모는 뒤좇았다. 이렇게 해서 이번에는 대도시를 누비는 거꾸로의 추적이 시작된 셈이었다. 엄청난 무리의 회색 인간들이 도망을 치는데, 한 손에는 꽃 한 송이를 들고, 다른 팔에는 거북이를 껴안은 작은 꼬마가 뒤쫓는 추적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의 모습은 얼마나 야릇해졌는가! 차도(車道)에는 종횡으로 자동차들이 줄지어 있었고, 핸들 뒤에는 스위치에 손을 대고 있거나, 크락션에 손을 얹은 자세로 움직임을 잃은 운전수들이 앉아 있었다(어떤 운전수는 마침 손가락으로 이마를 치며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옆 좌석의 사람을 건너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커브를 돌겠다는 표시로 팔을 내뻗은 채 굳어 버린 자전거를 타고 앉은 사람, 그리고 도보 위의 수많은 행인들, 남자, 여자, 어린이,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하다 못해 배기관(排氣管)에서 나오는 연기까지도 완전히 움직임을 잃고 굳어 있었다. 

 네거리마다에는 교통순경들이 호각을 입에 문 채, 교통 정리를 하는 동작으로 멈춰 서 있었다. 한 떼의 비둘기들이 꼼짝 않고 어느 광장 위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비행기 한 대가 그림처럼 하늘에 걸쳐 있었다. 분수의 물줄기는 얼음처럼 보였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새들이 꼼짝 않고 공중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 한 쪽 다리를 가로 등에 올려 놓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박제(剝製)처럼 서 있었다. 

 사진처럼 생명을 잃은 이 도시의 한복판으로 회색 도당은 질주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시간 도둑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조심하면서 모모가 뒤쫓고 있었다. 그렇지만 회색 도당들은 다른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도망길이 점점 더 어렵고 힘들어져 갔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그들은 이렇게 긴 거리를 걸어서 헤쳐 나가는 데 익숙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하려고 고심(苦心)했다. 게다가 그들은, 생명선인 조그만 회색 시가를 무슨 일이 있어도 입에서 떼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 중의 적지 않은 수는 달리는 도중에 시가를 놓쳤고 그것을 미처 바닥에서 주워 올리기도 전에 벌써 무(無)로 화해 버렸다. 

 그렇지만 그들의 도망길을 점점 더 어렸게 만든 것은 이런 외부적인 사정만이 아니었다. 같이 곤경의 길을 가는 동료들 편에서 오는 위험이 이제는 점점 더 심각하게 불어났다. 즉 자기가 가진 시가를 다 태워 버린 자들이 절망한 나머지 무턱대고 다른 동료들의 입에서 시가를 낚아채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수효는 서서히,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줄어들어 갔다. 

 아직도 약간의 예비 시가를 서류 가방 속에 휴대하고 있는 자들은, 다른 동료가 눈치를 못 채게 잔뜩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잖으면 자기 것이 바닥이 난 자들이, 저장자(貯藏者)들한테 달려들어 재산을 탈취하려 들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격투가 수없이 벌어졌다. 저장품을 얼마큼이라도 움켜 잡으려고 그들은 몽땅 한덩어리가 되어 아귀다툼을 벌였다. 그러는 가운데 시가는 길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고 소동 가운데서 짓밟혔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는 공포감이 회색 도당을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시내 쪽으로 점점 다가가면서, 또 다른 문제가 이들의 어려움을 가중(加重)시켰다. 대도시의 도처에는 수없이 많은 인간의 군상이 빽빽히 밀집해 서 있어서, 회색 도당들은, 마치 우거진 숲 속의 나무들을 헤쳐 나가듯이, 이 인간의 숲을 비집고 돌파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라깽이 꼬마인 모모로서야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다 못해 공중에 걸려 있는 작은 솜털까지도 꼼짝 않고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색 도당들은 잘못 보고 달려가다가는 거기에다 머리를 호되게 부딪게 되는 것이었다. 

 퍽이나 긴 길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걸릴지 모모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모모는 조심스럽게 시간의 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동안에 비로소 활짝 피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모모로 하여금 한 순간 모든 일을 잊어 버리게 만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어느 뒷골목에 도로청소부 베포가서 있지 않은가! 

 "베포 할아버지!" 모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소리치고 그에게 달려갔다. 

 "베포 할아버지, 사방으로 찾아 다녔어요! 그 동안 내내 어디 계셨어요? 왜 한번도 안 왔어요? 아아, 베포 할아버지!" 

 모모는 그의 목을 얼싸안으려 한다. 그렇지만 베포는 마치 강철로 된 형상처럼 모모를 퉁겨 물리쳤다. 모모는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폭포처럼 꼬마의 눈에서 쏟아졌다. 흐느끼면서 모모는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포의 조그만 몸집은 전보다 더 구부정해 보였다. 다정한 얼굴은 바짝 시들고 마르고 몹시 창백해졌다. 턱에는 까칠한 흰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면도를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너무나 많이 비질을 해서 거의 닳아 빠진 낡은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베포는 그렇게 서 있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잃고. 그리고는 작은 안경 너머로 거리의 오물(汚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자기의 존재를 깨닫게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지금에 와서야, 모모는 드디어 그를 찾아낸 것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이것이 그를 마지막 보는 것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일이 어떻게 되어 갈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일이 잘못 되어 간다면 베포 노인은 영원히 이렇게 여기에 서 있어야 할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거북이가 모모의 팔에서 바둥거렸다. 

 "계속해서 가!"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모모는 큰 거리로 되돌아 달려가 보고 깜짝 놀랐다. 시간 도둑이 하나도 안 보이지 않는가! 앞서 회색 도당이 도망치던 방향으로 잠간 뛰어 가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모는 그들의 자취를 잃어 버린 것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모모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한담! 물어 보는 시선으로 카시오페이아를 바라보았다. 

 "찾을 수 있어. 계속해서 가!"라고 거북이 등의 글자가 지시했다. 

 자, 카시오페이아가 미리 알고 있다면, 모모가 어떤 방향으로 굽어들든 간에 시간 도둑을 찾아내리라는 것은, 어찌 되었든 맞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모모는 무턱대고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계속 걸었다. 때로는 왼편으로, 때로는 오른편으로, 때로는 똑바로. 

 그러는 동안 모모는 똑 같은 주택들이 열지어 있고 일직선의 도로들이 지평까지 뻗어 있는, 신축지구(新築地區)가 확장되어 나가는 곳, 대도시의 북쪽 변두리에까지 이르렀다. 모모는 계속해서 달렸다. 하지만 모든 집과 거리가 서로 완전히 똑 같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같은 장소를 뱅뱅 도는 것같은 느낌이 곧 들었다. 그것은 진실로 미로(迷路)였다. 하지만 규칙과 획일이 지배하는 미로였다. 

 모모가, 용기를 잃어 가려는 찰나 갑자기 한 모퉁이로 마지막 회색 사나이가 돌아 가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절뚝거리고 있었다. 바지는 찢어지고 모자와 서류 가방도 없었다. 다만 심술궂게 꾹 다문 그의 입에서는 작은 회색 시가의 꽁초가 연기를 뿜고 있었다. 

 모모는, 끝도 없는 똑 같은 주택의 열(列) 중에서 별안간 단 하나의 예외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를 쫓아갔다. 그곳에는 집 대신에 널찍한 네모 난 땅을 둘러싸고 있는 거친 판자 울타리가 높게 세워져 있었다. 이 울타리에는 대문이 빼꼼이 열려 있었고, 마지막 회색 사나이가 그 안으로 후딱 미끄러져 들어갔다. 

 문 위에는 간판이 하나 붙어 있었다. 모모는 그것을 해독하느라 멈춰 섰다.


! 경고 !

극히 생명이 위험함

무자격자 출입엄금

 

21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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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경고판을 읽느라 잠시 지체했다. 그리고 문 안으로 살짝 들어갔을 때 마지막 회색 사나이는 이미 눈에 띄지 않았다. 

 앞에는 이십, 또는 삼십 미터의 깊이는 실히 됨직한 어마어마한 건축 공사장이 패여 있었다. 준설기(浚渫機)며 다른 건축용 기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공사장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경사진 찻길에는 몇 대의 화물차가 달리던 상태로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도처에 공사장의 노동자들이, 저마다의 자세로 움직임을 잃고 굳어져 있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간담? 모모는 마지막 회색 사나이가 들어 갔음 직한 입구는 아무래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시오페이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북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거북이 등에는 아무런 글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모는 공사장 밑바닥으로 기어 내려가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문득 다시 한번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 니콜라가 서 있었다. 그 당시 자기의 방 벽에 아름다운 꽃을 그려 주었던 미장이 니콜라가 서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잃고 있었지만 그의 자세는 참으로 기묘했다. 누구인가를 향해 뭐라고 외치려는듯 손을 입에 대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공사장 바닥에 솟아있는 자기 옆의 커다란 파이프 구멍을 가리키고 서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눈길은 지금 마침 모모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모모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그것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 들여 파이프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들어서기가 무섭게 모모는 미끄러 떨어졌다. 파이프는 가파른 내리막이었던 것이다. 이 파이프는 사방으로 꼬불꼬불 돌아 내려가고 있어서, 모모는 마치 미끄럼틀에 앉은듯, 이리저리 부딪치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너무나 무서운 속력으로 아래로 깊이깊이 떨어지는 바람에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어떨 때는 거꾸로 굴러서 머리를 앞으로 꽝 받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거북이와 꽃은 꼭 붙들고 놓치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추워졌다. 

 문득 모모는 대체 어떻게 여기를 다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처 생각을 제대로 펴기도 전에, 갑자기 파이프가 끝나고 지하의 복도가 나타났다. 여기는 이미 어둡지가 않았다. 사방의 벽에서 반사되는 듯한 어스름한 잿빛이 지배하고 있었다. 

 모모는 일어서서 계속 달렸다. 맨발이었기 때문에 모모의 발걸음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아까 회색 사나이의 발자국 소리가 다시금 앞쪽에서 들려왔다. 모모는 발자국의 울림을 뒤쫓았다. 

 이 복도로부터 사방으로 다른 통로가 갈라져 나가 있었다. 그것은 신축지구의 땅 밑으로 뻗어 있는 이른바 지하총맥락(地下叢脈絡)인 모양이었다. 

 이제는 웅성거리는 음성들이 들려왔다. 모모는 웅성거리는 쪽을 향해 걸어가 한쪽 구석에서 조심조심 안을 엿보았다. 

 모모의 눈 앞에는 그야말로 끝없이 긴 회의용 탁자가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홀이 전개되었다. 그 탁자를 가운데 두고 회색 도당이―엄밀히 말해서 남아 있는 회색 도당이 몽땅―두 줄로 길게 앉아 있었다. 지금의 이들 시간 도둑 잔당(殘黨)의 몰골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양복은 모두 찢겨져 있었고, 회색 대머리는 생채기와 혹 투성인데다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만 그들의 시가만은 여전히 불붙어 있었다. 

 모모는 맨 뒤쪽 홀의 뒷벽에 있는 거대한 철판문이 약간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홀 안에서부터 얼음처럼 싸늘한 기운이 불어 나왔다. 그래야 소용 없다는 것을 겪었으면서도 모모는 웅크리고 주저앉아 맨발을 치마로 감쌌다. 

 "우리는," 탁자의 맨 머리쪽 철판문 앞에 앉은 한 회색 사나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재고(在庫)를 절약해서 취급해야겠소. 그것으로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오. 우리는 우리의 수를 제한해야겠소." 

 "어차피 우리는 몇 남아 있지 않소!" 다른 자가 고함쳤다. "재고는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오!" 

 "일찍 절약을 시작할 수록," 연사는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더욱 오랜 시간을 버티게 되오. 절약한다는 내 말의 의미를 여러분은 아실 것이오. 이 재앙을 견디고 남아야 할 우리의 인원은 몇이면 충분하오. 우리는 이 상황을 냉정하게 보아야 하오! 자, 여러분, 여기 앉아 있는 우리의 수는 너무 많소. 우리는 우리의 수를 대폭 감축해야겠소. 이것은 이성(理性)의 명령이오. 여러분, 지금 번호를 불러 주시겠소?" 

 회색 도당은 번호를 불렀다. 그러자 의장은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설명을 했다. "제비를 뽑겠소. 숫자가 새겨진 면이 나오면 짝수를 가진 자가 남는 것이고, 머리 면이 나오면 홀수를 가진 자가 남는 거요." 

 그는 동전을 높이 던지고는 주워 들었다. 

 "숫자 면이오!" 그는 소리쳤다. "짝수의 사람들은 남고 홀수 사람들은 즉석에서 해체하도록 하시오!" 

 억양 없는 신음이 패배자의 열(列)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짝수를 가진 시간 도둑들은 다른 이들의 시가를 인수했고, 선고받은 자들은 무(無)로 해체됐다. 

 "자, 그럼" 하고 의장은 말없는 좌중을 향해 말했다. "똑같이 또 한 번 할까요." 

 똑 같은 소름 끼치는 과정이 두번, 세번, 결국 네번까지 진행되었다. 끝에 가서는 겨우 여섯명의 회색 도당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세명씩 끝없이 긴 탁자의 머리쪽 끝에 마주 앉아 싸느랗게 쳐다보고 있었다. 

 모모는 몸서리를 치면서 이 과정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 회색 도당의 숫자가 줄어들어 갈 때마다 무시무시한 추위가 현저하게 덜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전에 비하면 지금은 어느새 한결 견딜 만해졌다. 

 "여섯이란," 그들 중 한 회색 사나이가 말했다. "불쾌한 숫자요." 

 "이제는 됐소." 탁자의 다른 편에 있는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의 수를 더 줄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소. 여기 여섯으로 이 재앙을 버텨 이겨내지 못한다면, 셋으로도 역시 안되는 것이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오." 앞서 말한 자가 설명했다. "그렇지만 필요한 경우엔, 언제라도 또 그것을 얘기할 수 있소. 나중에 말이오."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어떤 자가 말했다. "재앙이 시작될 때 저장 창고가 열려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그 결정적 순간에 잠겨 있었더라면, 지금은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열 수가 없었을 것이오. 우리는 완전히 패배했을 것이오." 

 "미안하지만 당신 의견이 완전히 옳지는 않소, 동지." 다른 자가 대답했다.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냉동실의 냉기(冷氣)가 새어 나오고 있소. 시간이 가면서 시간의 꽃들은 녹아 버릴 것이오. 그렇게 되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꽃들이 원천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을 우리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오." 

 "당신 생각으로는" 하고 세번째 사나이가 물었다. "우리의 냉기가 재고량을 충분히 냉동시킬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인가요?"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여섯 뿐이오." 두번째 사나이가 대꾸했다. "우리가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는 당신 자신도 헤아릴 수 있을 것이오. 우리의 수를 그렇게 사정없이 줄인 것은 굉장히 경솔했던 것 같소. 이래 가지고는 우리는 이길 수가 없소." 

 "두 가지의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택해 우리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오." 첫번째 사나이가 소리쳤다. "어차피 결단은 내려진 것이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우리는 몇 년이고 여기에 앉아 서로를 감시나 하고 있을 것 같군요." 한 사나이가 입을 떼었다. "솔직히 말하면, 암담한 전망입니다." 

 모모는 깊이 생각했다. 여기 마냥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의미 없는 일이야. 회색 인간들이 완전히 없어졌다면야, 시간의 꽃들이 저절로 녹아 버리겠지. 하지만 우선은 그들이 엄연히 남아 있지 않은가. 내가 손을 쓰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그냥 존재할거야. 그렇지만 저장 창고가 저렇게 열려 있어서 시간 도둑들이 마음대로 조달을 받을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담?" 

 카시오페이아가 바둥거렸다. 모모는 거북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저 문을 닫아!" 라고 거북이 등에 쓰여 있었다. 

 "그렇게 안돼!" 모모가 속삭였다. 

 "문도 움직여지지 않잖아." 

 "꽃으로 건드리면 돼!" 이것이 대답이었다. 

 "시간의 꽃으로 건드리면 문을 움직일 수 있니?" 모모가 소근거렸다. 

 "너는 그렇게 하게 돼" 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카시오페이아가 그렇게 미리 알고 있다면, 필시 맞는 얘기일 것이다. 모모는 거북이를 살그머니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그동안 벌써 상당히 시들어 꽃잎이 몇 잎 남지 않은 시간의 꽃을 웃도리 밑에 감추었다. 

 그 다음 모모는, 여섯 회색 도당의 눈에 띄지 않고 긴 회의용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거기서부터는 네 발로 기어서 회의석 저쪽 끝에 이르렀다. 이제 모모는 바로 시간 도둑들의 발 사이에 앉게 되었다. 가슴이 터질듯이 고동쳤다. 

 살금살금 소리 없이 모모는 시간의 꽃을 꺼내어 이빨 새에 물고는, 회색 도당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의자의 틈새를 빠져 나갔다. 

 이윽고 열려 있는 철문에 이르러 모모는 꽃으로 문을 건드림과 동시에 손으로 밀었다. 고정되었던 문의 돌쩌귀가 움직였다. 과연 문이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꽝 소리를 내며 잠겼다. 꽝 하는 울림은 홀 안과 수천 갈래의 지하의 통로로, 겹겹의 메아리를 지며 퍼져갔다. 

 모모는 발딱 일어났다. 자기들 외에 이 완벽한 정지(停止)의 상태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어떤 다른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계산하지 못했던 회색 도당들은, 놀란 나머지 얼이 빠진듯 의자에 앉은 채 모모를 노려보았다. 

 정신없이 모모는 그들을 지나 홀의 출구를 향해 달렸다. 그러자 회색 도당도 벌떡 일어나서 모모를 뒤쫓았다. 

 "맹랑한 꼬마 모모요!" 

 어떤 자의 고함이 들렸다. "모모야!" 

 "그럴 리가 없소!" 다른 자가 소리쳤다. "어떻게 그 애가 움직일 수가 있소?" 

 "그 애는 시간의 꽃을 갖고 있소!" 세번째 사나이가 고함쳤다. 

 "그 꽃으로" 네번째 사나이가 물었다. "문을 움직였단 말이오?" 

 다섯번째 사나이가 날뛰며 이마를 쳤다. "그렇다면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었소! 우리도 꽃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소!" 

 "가졌었소! 가졌었어." 여섯번째 사나이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렇지만 이젠 문이 잠겼소! 구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소. 꼬마의 시간의 꽃을 빼앗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만사가 끝장이오!" 

 그러는 새에 모모는 수없이 갈라져 나간 통로의 어디멘가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는 회색 도당이 훨씬 지리에 밝았다. 모모는 이리저리 닥치는대로 도망을 쳤고, 어떤 때는 추적자가 손에 잡힐듯이 접근을 해 왔지만 번번이 용케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카시오페이아 역시 자기의 방식으로 이 추격전에 참여를 했다. 거북이는 아닌게 아니라 느림보로 길 줄 밖에 몰랐지만, 추적자들이 어디로 좇아갈 지를 항상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맞춰 제 때 그 자리에 다달아 도중에 엎드려 있어서, 회색 인간들이 걸려 비트적거리거나 바닥에 딩굴도록 만들었다. 뒤 따라 오는 사람은 넘어진 사람 위로 엎어졌다. 이런 식으로 거북이는 거의 틀림없이 붙잡히게 될 뻔한 모모를 여러 차례 구해 주었다. 물론 그러는 가운데 거북이 자신은 발걸음에 채여서 날려가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도 거북이는 계속해서 그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렇게 하게 되리라는 것을 거북이 자신은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추격전에서 몇 사람의 회색 도당은―시간의 꽃을 탐(貪)하는 나머지 정신이 빠져서―시가를 잃어 버리고는 하나씩 하나씩 무(無)로 화해버렸다. 그래서 결국은 그들 중의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모모는 긴 회의용 탁자가 있는 큰 홀로 되돌아 도망을 쳤다. 두 사나이는 탁자를 뱅뱅 돌며 모모를 추적했지만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갈라져서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이제 모모로서는 빠져 나갈 길이 없어졌다. 모모는 큰 홀의 한 구석에 몰려 선 채 두 추격자를 겁에 질려 쳐다보고 있었다. 꽃을 꼭 감싸 안은 채. 꽃에는 이제 가물가물 시들어가는 세개의 꽃 잎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첫번째 추적자가 꽃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라 두번째 추적자가 그를 밀쳐냈다. 

 "안돼," 그는 소리쳤다. "꽃은 내 것이오! 내 것이야!" 

 두 회색 사나이는 서로 밀쳐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통에 첫 추적자가 둘째의 입에서 시가를 쳐냈다. 그러자 둘째 추적자는 유령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빙 돌더니 투명하게 무(無)로 화하며 사라졌다. 그리고나서 최후의 회색 사나이가 모모에게 다가왔다. 그의 입 가에서는 아직도 작은 시가 꽁초가 연기를 뿜고 있었다. 

 "자, 꽃을 내놔!" 헐떡이며 말하는 중에 작은 꽁초가 그의 입에서 떨어져 굴러갔다. 회색 사나이가 바닥에 몸을 던져 꽁초를 향해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거기까지 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잿빛 얼굴을 모모에게 돌리고 가까스로 반쯤 몸을 일으켜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었다. 

 "부탁이다." 그는 중얼거렸다. "제발, 아가야, 꽃을 다오!" 

 모모는 여전히 구석에 박혀 선 채 꽃을 꼭 껴안고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정말 한 마디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최후의 회색 인간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된거야"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잘 된거야. ……이제……모든 것이……지나가……버린 것은……." 

 그리고 나서 그도 사라져 버렸다. 

 모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가 누워 있던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는 "문을 열어" 라는 글자를 등에 쓴 채 카시오페이아가 꾸물대고 있었다. 

 모모는 문으로 가서, 단 하나의 마지막 꽃잎이 달려 있는 시간의 꽃으로 다시 문을 건드려서 활짝 열었다. 

 최후의 시간 도둑이 사람짐과 동시에 추위도 사라졌다. 모모는 놀라서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어마어마하게 큰 저장 창고로 들어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의 꽃들이 끝없는 선반에 유리잔처럼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그 중의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찬란해 보였다. 요컨대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수십만, 수백만의 인생의 시간이었다. 온실 안처럼 점점 따스해졌다. 

 모모 자신의 시간의 꽃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짐과 동시에 갑자기 일종의 폭풍이 몰아쳤다. 시간의 꽃들이 구름처럼 모모의 꽃 주위로 몰려와 소용돌이치며 지나갔다. 그것은 흡사 따스한 봄날의 폭풍 같았다. 하지만 실은 온통 자유로와진 시간으로 뭉쳐진 폭풍이었다. 모모는 꿈꾸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바로 앞 바닥에 있는 카시오페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북이 등에는 빛나는 글자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집으로 빨리가, 꼬마 모모. 집으로 가!" 

 그리고 이것이 모모가 카시오페이아를 본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곧 꽃들의 폭풍이 그야말로 설명할 수 없이 세차게 몰아쳐 와서 모모는, 자기 자신도 바로 꽃이 된듯이 떠 받쳐져 그 폭풍에 실려 어두운 통로를 지나 땅 위로, 대도시 위로 밀려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모는 점점 크게, 크게 뭉쳐지는 거대한 꽃구름에 묻혀 지붕과 담 위를 날았다. 그것이야말로 찬란한 음악에 맞춘 일종의 흥겨운 무도(舞蹈)였다. 모모는 그 속에 떠서 아래 위로 흔들리며 선회(旋廻)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 꽃구름은 서서히 살그머니 가라앉았다. 꽃들은 경직된 세계 위로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눈송이처럼 살며시 녹아들어 다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꽃들이 속했던 원천으로, 인간의 마음 속으로 되돌아 가기 위해서. 

 이 순간, 시간은 다시 시작되었다. 만물은 새로이 활기를 띠고 생동하기 시작하였다. 자동차가 달리고 교통순경들은 호각을 불었다. 비둘기가 날고 강아지는 가로등에 오줌을 갈겼다. 세계가 한시간 동안 정지해 있었더는 사실에 관해서 인간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정지와 새로운 시각 사이에는 사실상 전혀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간들한테는 눈 깜짝할 찰나처럼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들은 갑자기 끝없이 많은 시간을 갖게 된 것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것을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신비스럽게 되돌아온 자기 자신이 절약한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 왔을 때, 모모는 어느 거리에 서 있었다. 그곳은 지난 번 베포를 보았던 뒷골목이었다. 그런데 과연, 거기 베포가 여전히 있지 않은가! 등을 보인 모습으로, 빗자루로 몸을 가눈 채, 지난 번과 똑 같이 깊은 생각에 잠겨 앞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갑자기 조금도 서둘 필요가 없어졌고, 어째서 이렇게 별안간 위안과 충만한 희망을 느끼게 되었는지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마도"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사 나는 십만 시간을 절약했고 모모가 풀려 나왔는지 몰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누구인가 웃도리를 잡아 당기는 바람에 몸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 앞에 꼬마 모모가 서 있지 않은가! 

 이 다시 만남의 기쁨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마 세상에 없으리라. 두 사람은 웃음과 울음을 뒤바꿔가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것은 물론 기쁨에 겨워 취했을 때 늘 그렇듯이 온통 실없는 소리를.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얼싸안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멈춰서서 즐거워하며 같이 웃고 울었다. 이제야말로 그들도 모두 그럴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베포는 빗자루를 어깨에 메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날은 청소를 하러갈 생각조차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시내를 지나 원형극장 옛터로 향해 걸었다. 서로가 끝도 없이 할 얘기가 많았다. 

 한편 대도시 안에서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광경이 벌어졌다. 어린이들은 거리 한복판에서 놀이를 하고,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운전수들은 미소를 머금고 구경을 했다. 그 중의 어떤 이는 차에서 내려 무턱대고 같이 놀았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서서 정답게 말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자세히 묻고 있었다.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도 창가의 꽃들에 감탄하거나 새에게 모이를 줄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의사들도 이제는 모든 환자한테 친절하게 봉사할 시간이 있었다. 노동자들도 맘 놓고 애착을 갖고 맡은 바 일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최소의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가져 오는 일이 이제는 문제시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누구나가 어떠한 일에든지 자기가 필요한 만큼, 원하는 만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부터야말로 다시 충분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누구의 덕분인지, 그리고 그들에겐 눈 깜짝할 찰나였던 그 순간 동안 참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채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믿지 않았으리라. 이 진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모모의 친구들뿐이었다. 

 사실, 꼬마 모모와 베포 노인이 그날 원형극장 옛터로 되돌아 왔을 때, 모든 친구들이 이미 거기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여행안내원 지지, 파올로, 마시모, 프랑코, 꼬마 동생 데데를 데리고 온 마리아, 클라우디오, 그리고 그밖의 어린이들, 주막집 주인 니노, 그의 뚱뚱보 마누라 릴리아나, 그리고 그들의 갓난애, 미장이 니콜라, 그리고 그 전에 항상 모모를 찾아 왔었고 모모를 지니고 있었던 이웃의 모든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이어서 축제가 벌어졌다. 오로지 모모의 친구들만이 누릴 줄 아는 즐거운 축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옛 별들이 뜰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 환성과 포옹, 악수와 웃음, 그리고 뒤섞인 소음이 잦아들고나자 모두가 잔디로 뒤덮인 돌계단 위에 둥글게 앉았다. 완전히 조용해 졌다. 

 모모가 한가운데 텅 빈 둥근 터에 섰다. 모모는 별의 음성과 시간의 꽃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맑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초공간의 집에서는, 되돌아간 시간에 의해 처음이자 유일한 잠으로부터 깨어난 호라 박사가 아담한 꼬마 식탁 앞 의자에 앉아서 만물투시 안경을 통해 모모와 그의 친구들을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중병에서 갓 회복된듯이 여전히 퍽 창백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의 눈만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발에 무엇이 건드려지는 감촉을 느꼈다. 안경을 벗고 내려다 보았다. 그 앞에 거북이가 앉아 있었다. 

 "카시오페이아." 그는 정답게 말하며 거북이의 목을 어루만졌다. "너희들, 참 잘 해 주었다. 나한테 전부 얘기를 해 줘야겠어. 이번에만은 나도 너희들을 볼 수 없었거든." 

 "나중에요!" 라고 거북이의 등에 쓰였다. 그러더니 카시오페이아는 재채기를 했다.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니니?" 호라 박사는 걱정스레 물었다. 

 "왜 아니겠어요!" 카시오페이아의 대답이었다. 

 "회색 도당의 냉기 때문에 걸린 것이로구나." 호라 박사는 말했다. "네가 정말 굉장히 피곤하고, 드디어 근본적으로 한번 쉬고 싶어하리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럼 가서 쉬렴." 

 "고마와요!"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그리고 카시오페이아는 절뚝거리며 조용하고 어두운 구석을 찾았다. 그리고는 머리와 네 발을 웅크려 넣었다. 거북이의 등에는 이 이야기를 읽은 독자만이 알아 볼 수 있는 글자가 서서히 나타났다. * 


                                     - ENDE -

 

작가의 짧은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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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지 않은 나의 독자들은 지금 마음 속에 숱한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도와 줄 수 없을 것 같아 염려스럽다. 사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대로 기억에 따라 썼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나는 꼬마 모모도, 그들의 친구 중의 아무도 본 적이 없다. 그 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오늘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모른다. 또한 대도시에 관해서도 오로지 나의 추측에 의존했을 뿐이다.

 한가지, 내가 아직 밝혀 두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그 당시 나는 마침 긴 여행을 하고 있었다(나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그 때 나는 내가 탄 기찻간에서 어떤 묘한 승객을 만났다. 묘하다는 것은 나로서는 그의 나이를 도저히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왠 노인이 내 앞에 앉아 있거니 생각했었는데 곧 나는 내가 착각을 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행자는 갑자기 아주 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인상 역시 곧 어느 새 틀린 것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긴 밤 여행 동안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우리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자 이 수수께끼같은 승객은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을 나는 독자 앞에 털어놔야 할 것 같다.

 "나는 당신에게 이 모든 것을 이미 있었던 일처럼 얘기했습니다." 즉 그 말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얘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것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 역에서 내렸음에 틀림없다. 한참 후 내가 그 칸에 나 혼자 있는 것을 깨달았던 걸 보면.

 유감스럽게도 그 이후 나는 그 이야기꾼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히 그를 다시 한번 만나는 경우에는, 나도 그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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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댄 브라운>
한때는 평범한 교사이던 <다 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은 이 작품으로 일거에 세계적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 빈치 코드>를 발표하기 전에 세 개의 작품에서 자신의 능력을 탄탄히 쌓아왔다.
첫 책은 1998년에 출간된 Desital Fortress이며, 다음 작품은 Deception Point와  Angels & Demons가 있다. 바로 Angels & Demons에 하버드 대학교의 예술사, 종교 기호학 교수 로버트 랭던이 등장한다. <다 빈치 코드>에서 인류의 비밀을 파헤치는 핵심 인물인 랭던은 전작에서 이미 창조된 인물인 것이다. <다 빈치 코드>의 주인공 소피 누뵈 또한 전작에서 창조된 주인공 이다. 이렇듯 댄 브라운은 주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소를 전작에서 발전시켜, 완벽한 블록버스터 <다 빈치 코드>를 탄생시켰다.
댄  브라운은 소설의 상상력이 얼마나 방대할수 있는지,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그를 소설계의 빅뱅이라고 부른다. 이제 댄 브라운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될 것이다.

<소개글 , 서평>
<다 빈치 코드>는 2003년 3월 출간 이후 미국에서 하나의 신드롬이 되었다. <다 빈치 코드>는 미국에서 약 7백만 부 판매되었고, 아마존에 독자서평은 3천 개를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다 빈치 코드>의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독일,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40여 개국에서 판권을 계약했고, 10여 개국에서 출간하여 모두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USA Today>지는 <다 빈치 코드>가 유일하게 <해리포터> 시리즈의 판매량을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베스트셀러 소설은 단지 그 한 책만 판매되는데 그치고 마는데, <다 빈치 코드>는 이 책에서 언급하거나 이 책과 관련 있는 다양한 도서의 판매량까지 끌어올려 독서시장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출간한 더블데이 출판사는 이 책이 시장에 나온 날을 '다 빈치 코드의 날'이라고 부른다.
미국 ABC 방송사는 뉴스 스페셜에서 <예수, 마리아 그리고 다 빈치>라는 제목으로 <다 빈치 코드>에서 언급한 내용을 추적했다. 이 소설의 파장은 <뉴스위크>를 포함한 주요 언론에서 크게 기사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계까지 파장이 이어져 SONY사와 영화 판권을 계약해 2005년 개봉할 예정이다. 이렇듯 <다 빈치 코드>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주목을 받자 <다 빈치 코드>를 소재로 한 다양한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이제 <다 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은 세계의 화제 인물로 꼽히게 되었다.

사실 1099년에 설립된 유럽의 비밀단체, 시온 수도회는 실제로 존재하는 조직이다. 파리 국립 도서관은 1975년에 기밀문서로 알려진 양피지들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작 뉴턴,보티첼리,빅토르 위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포함한 수많은 시온 수도 회의 회원들 이름이 있었다.
  ‘오푸스 데이’ 라는 바티칸의 성직 자치단은 아주 독실한 가톨릭 분파다. 세뇌와 강압, ‘육체의 고행’으로 알려진 위험한 종교의식들이 보도되면서, 이 교파는 최근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오푸스 데이는 미국 뉴욕 시 렉싱턴 가 243번지에 4천 7백만 달러짜리 미국본사 건물을 얼마 전에 완공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술작품과 건물, 자료, 비밀 종교의식들에대한 모든 묘사는 정확한 것이다.

프롤로그

파리,루브르 박물관
오후 10시 46분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 자크 소니에르는 대화랑의 아치형 천장 아래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소니에르는 제일 가까이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으로 돌진했다. 일흔여섯 살의 이 노인은 도금된 그림 액자가 벽에서 떨어질 때까지 잡아당겼다. 소니에르가 뒤로 넘어지자 그림이 몸을 덮쳤다. 소니에르의 예상대로 화랑의 출입을 봉쇄하는 철문이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마룻바닥이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벨이 울려댔다.
  소니에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잠시 누워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
  캔버스 아래에서 기어나오며 소니에르는 몸을 숨길 만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움직이지 마시오.”
  냉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소니에르는 손과 무릎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천천히 돌렸다.
  4,5미터 떨어진 철문 밖에서 소니에르를 공격하던 남자의, 산처럼 큰 그림자가 철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몸집이 큰 사내였다. 유령처럼 창백한 피부에 가늘고 하얀 머리카락을 뒤집어쓴 사내의 눈동자는 암적색이고 홍채는 분홍색이었다. 색소결핍증인 듯한 사내는 외투에서 권총을 꺼내 철창 사이로 소니에르를 겨누었다.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소.”
  들어보지 못한 특이한 억양이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시오.”
  “무슨 얘긴지 도통 모르겠소.”
  화랑 마룻바닥에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관장은 말을 더듬거렸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남자는 소니에르를 바라보았다. 유령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외에는 움직임이 없었다.
  “당신과 당신 형제들이 갖고 있는 그것은 당신들 게 아니오.”
  소니에르는 일순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 작자가 그걸 알지?’
  “오늘 밤 정통 수호자들이 복귀하실 것이오. 그것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말하시오. 그럼 당신은 살수 있소.”
  남자는 권총을 낮춰 소니에르의 머리에 겨누었다.
  “그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비밀이오?”
  소니에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남자는 총신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소니에르는 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잠깐 당신이 원하는 걸 얘기해 주겠소.”
  관장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지금 하려는 거짓말은 수없이 연습하던 것이다...... 기도하는 매순간, 결코 쓸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소니에르가 말을 마쳤을 때, 남자는 뽐내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사람들이 말한 그대로군.”
  소니에르는 움찔했다.
  ‘그 사람들?’
  “그들을 찾아냈지. 세 명 다. 그들도 당신이 방금 말한 대로 얘기하더군.”
거대한 몸집의 남자는 빈정거렸다.
  ‘그럴 리 없어!’
  세 명의 집사와 관장의 진짜 신분은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고대 비밀만큼이나 신성한 것이다. 소니에르는 집사들이 죽기 전에 엄격한 절차에 따라 똑같은 거짓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조직의 규정이기도 했다.
  남자는 다시 권총을 겨누었다.
  “당신이 사라지고 나면 진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내가 되겠군.”
  ‘진실.’
  순간 소니에르는 진짜 공포에 맞닥뜨려졌다.
  ‘내가 죽으면 진실은 영원히 사라진다.’
  관장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권총이 발포되었다. 총알이 복부에 박힐 때 소니에르는 타는 듯한 열기를 느꼈다. 관장은 쓰러졌다. 천천히 몸을 움츠리며 소니에르는 철창 사이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이제 소니에르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소니에르는 눈을 감았다. 두려움과 후회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빈 화랑에 딸각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니에르는 눈을 번쩍 떴다.
  남자는 즐겁다는 듯이 권총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권총의 둘째 핀으로 손을 뻗던 남자는 순간 생각을 바꿨는지, 소니에르를 비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내 일은 끝났군.”
  관장은 하얀 셔츠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흉골 아래가 5,6 센티미터 가량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위장.’
  무참하게 총알은 심장을 비껴갔다. 알제리 전쟁에 참가한 베테랑으로서 소니에르는 이런 끔찍한 죽음을 목겼했었다. 고작 15분 정도만 살 수 있을 터였다. 위산이 흉강에 스며들면, 독 때문에 천천히 독살될 것이다.
  “고통이란 좋은 것이오. 선생.”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사라졌다.
  혼자가 된 자크 소니에르는 고개를 다시 철문으로 돌렸다. 덫에 갇힌 꼴이었다. 적어도 20분동안 저 철문은 열리지 않을것이다. 누군가 다가오더라도 소니에르는 이미 죽은 목숨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소니에르를 사로잡는 두려움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반드시 비밀을 전해야 한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소니에르는 살해된 세 형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들보다 먼저 활동한 윗세대와 그들 모두에게 맡겨진 사명을 생각했다.
  ‘깨져서는 안 될 지식의 사슬.’
  그리고 이제, 갑자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소니에르는 유일하게 남은 연결고리이자 지금까지 지켜온 엄청난 비밀의 외로운 수호자이다.
  소니에르는 떨리는 몸을 이끌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 .’
  박물관 대화랑에 갇힌 소니에르는 횃불을 건네줄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사람이다. 소니에르는 이 고상한 감옥의 벽들을 응시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들이 오랜 친구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면서 소니에르는 모든 힘과 재능을 끌어모았다. 소니에르는 그의 필사적인 임무를 위해 얼마 남지않은 자신의 시간을 다 써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

  로버트 랭던은 천천히 깨어났다.
  어둠속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작고 익숙하지 않은 울림이었다. 손으로 침대옆을 더듬어 불을 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본 랭던은 루이 16세 시대의 가구들과 수작업으로 된 프레스코 벽화, 거대한 마호가니 기둥이 침대 네 귀퉁이에 서 있는 호화로운 르네상스풍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침대 기둥에 걸려 있는 자카드 천의 목욕 가운데는 ‘리츠 파리 호텔’이라고 적혀 있었다.
  느리게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랭던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랭던씨? 제가 손님을 깨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침대 옆의 시계를 본 랭던은 망연자실했다. 밤 12시 32분. 겨우 한 시간 정도 잤는데 죽은 듯이 잔 것 같았다.
  “저는 호텔 안내인입니다. 손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방문객이 와 계십니다. 몹시 급한 일이라고 하시는데요.”
  랭던은 아직도 의식이 흐릿했다.
  ‘방문객?’
  침대 옆 탁자 위의 구겨진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파리 아메리칸 대학이 자랑스럽게 제안하는 로버트 랭던과의 밤
  하버드 대학, 종교 기호학 교수
  랭던은 신음했다. 오늘 밤에 그는 사르트르 대성당의 돌들에 숨겨진 이교도의 상징에 관한 슬라이드를 가지고 강의했다. 아마 청중 가운데 보수적인 사람들은 심사가 뒤틀렸을 것이다. 일부 종교학자들은 그의 숙소까지 쫓아왔다.
  “미안합니다만, 저는 무척 피곤하고 또 ......”
  “하지만 손님, 아주 중요한 분입니다.”
  안내인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다급하게 속삭였다.
  랭던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종교화와 종교의식의 기호에 관한 그의 책들은 예술계에서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어 버렸다. 지난해, 바티칸에서 공표된 사건에 그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유명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 이후 자칭 대단한 역사학자나 예술가 나부랭이들이 랭던의 방문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랭던은 되도록 공손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 방문객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좀 받아놓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분께 제가 화요일 파리를 떠나기 전에 전화드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 그럼 수고하십시오.”
  안내인이 뭐라고 항의하려는데 랭던은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침대 옆에 놓인 호텔의 ‘숙박고객 안내서’를 본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내서의 표지는 ‘빛의 도시에서 아기처럼 자는 법, 리츠 파리 호텔에서의 포근한 잠’ 따위의 선전 문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랭던은 방을 가로지르는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헝클어지고 지친 남자가 낯설어 보였다.
  ‘넌 좀 쉬어야 해. 로버트.’
  지난 몇 년 간 그는 과도하게 일했다. 하지만 랭던은 거울에 나타난 그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날카롭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오늘 밤에는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강한 턱과 보조개가 팬 뺨에는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자라 있었다. 관자놀이 근처에는 회색 머리카락들이 굵고 거친 흑발 사이로 깊게 길을 내었다. 학교의 여자동료들은 그 회색 머리카락이 랭던의 문학적인 외모를ㄹ 강조해 준다고들 했다.
  ‘<보스턴 매거진>이라면 당장이라도 만날 텐데.’
  당황스럽게도 지난달. <보스턴 매거진>은 랭던을 보스턴의 가장 흥미로운 인사 열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했다. 영광인지 뭔지 모를 그 선정 때문에 랭던은 하버드 동료들의 끊임없는 놀림에 시달려야 했다. 집에서 5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에서 가진 오늘 밤 강의는 그에게 또 다른 명예를 안겨주었다.
  만원을 이룬 파비용 도핀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주최자가 입을 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밤 우리의 손님은 소개가 따로 필요 없는 분입니다. 이분은 수많은 책의 저자입니다. <비밀 분파의 기호학>,<조명학의 예술>,<표의문자의 잃어버린 언어> 그리고 <종교적인 도상학(그리스도나 성모, 성화에 나타난 기호를 풀이하고 연구하는 학문)>등 다수의 책을 집필하셨는데, 말 그대로 대단한 책들입니다. 여러분 중 대다수가 수업 교재로 이분의 책을 사용하고 있을 겁니다.”
  관중석에 있던 학생들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오늘밤, 인상적이고 다양한 이분의 관심 분야를 공유하는 것으로 이분을 소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 ”
  주최자는 무대에 앉아 있는 랭던을 장난스럽게 쳐다보았다.
  “청중 가운데 한 분이 방금 제게 이것을 건네주었습니다. 말하자면 ...... 흥미로운 소개라고나 할까요.”
  주최자가 들고 있는 것은 <보스톤 매거진>이었다.
  랭던은 몸을 움츠렸다.
  ‘제기랄, 저게 어디서 났지?’
  여자는 얼빠진 기사의 일부를 발췌해 읽기 시작했다. 랭던은 의자속으로 몸이 점점 가라앉는 듯 느껴졌다. 30초 정도 지나자 청중은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만둘 기세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해 바티칸 비밀회의에서 자신의 이례적인 역할에 대해 랭던 씨가 공개적인 설명을 거절한 일은, 우리 잡지가 가장 흥미로운 인물로 랭던 씨를 꼽는 일에 확실한 점수를 보탰다.”
  여자는 청중을 선동했다.
  “여러분, 더 듣고 싶어요?”
  청중은 갈채를 보냈다.
  주최자가 다시 기사로 고개를 숙이자 랭던은 누군가 저 여자를 막아줬으면 하고 바랐다.
  “비록 랭던 교수가 우리의 일부 젊은 수상자들처럼 외모가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 사십대의 학자는 학자로서의 매력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사로잡는 랭던 교수의 외모는 이례적으로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로 완성된다. 랭던 교수의 여학생들은 이 목소리를 ‘귀를 위한 초콜릿’ 이라고 표현한다.”
  강당에 폭소가 터졌다.
  랭던은 서투른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해리스 트위드를 입은 해리슨 포드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기사 몇 줄이 더 나올 터였다. 더구나 오늘 밤 랭던은 해리스 트위드와 바바리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 랭던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랭던은 어정쩡하게 서서 주최자를 연단에서 밀어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모니크 씨. <보스턴 매거진>은 말을 꾸미는 데 확실히 재능이 있죠.”
  당황스러운 한숨을 쉬며 랭던은 청중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여러분 중 누가 저 기사를 제공했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영사관을 통해 그 사람을 추방하게 하겠습니다.”
  청중들은 웃어댔다.
  “자,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저는 오늘 밤 기호의 힘에 대해 얘기하려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
  전화기가 침묵을 깨며 다시 한 번 울렸다.
  호텔에 대한 불신으로 신음하면서 랭던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예상한 대로 호텔 안내인이었다.
  “랭던 씨.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 방문객이 지금 손님 방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랭던은 이제 잠이 완전히 깨었다.
  “방문객을 지금 내 방으로 보냈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손님. 하지만 이런 분은 ...... 이분을 막을 힘이 제게는 없습니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구요?”
  하지만 안내인은 이미 전화기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육중한 주먹이 랭던의 방문을 두드렸다.
  랭던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목욕가운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누구요?”
  “랭던 씨? 당신과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저는 제롬 콜레 부관입니다. 중앙사법경찰국(DCPJ)에서 나왔습니다.”
  남자의 영어에는 날카롭고 권위적인 울림이 배어 있었다.
  랭던은 멈칫했다.
  ‘사법경찰?’
  DCPJ라면 미국의 FBI와 비슷한 기관이다.
  안전고리를 걸어 둔 채 랭던은 문을 조금 열었다. 랭던을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는 무척 말랐고 공무원 차림인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랭던은 망설였다. 낯선 사람의 누르께한 눈이 자기를 쳐다보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희 반장님이 비공식적인 문제로 당신의 전문적인 능력을 원하십니다.”
  “지금요? 자정이 넘었는데요”
  랭던은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오늘 밤 루브르 박물관 관장을 만날 예정이었다는데, 맞습니까?”
  랭던은 의아함이 치밀어 올랐다. 오늘 밤 강의가 끝나면 자크 소니에르와 술 한잔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소니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관장의 수첩에서 발견했습니다.”
  “저는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DCPJ 요원은 절박한 한숨을 내쉬더니, 열린 문틈 사이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들이 밀었다.
  사진을 본 랭던은 온몸이 굳는 듯했다.
  “이 사진은 사건이 발생한 지 한 시간도 채 되기 전에 찍은 것입니다. 루브르 박물관 안에서요.”
  사진의 이상한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니 강한 혐오와 충격이 부풀어 오르는 분노로 바뀌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습니까?”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당신이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관장을 만날 계획이었다는 것과 기호학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 참고로 말입니다.”
  사진을 바라보며 느낀 공포가 이제는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사진의 광경은 끔찍하고도 기이했다. 불편한 데자뷔 감각마저 몰고 왔다. 1년하고 조금 더 전에 지금과 비슷한 도움을 요청받았다. 24시간이 지난 뒤, 그는 바티칸 시티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전혀 달랐다. 사진의 장면이 불안할 정도로 익숙했다.
  DCPJ 요원은 시계를 보았다.
  “반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랭던은 요원의 얘기를 거의 듣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사진에 꽂힌 채였다.
  “여기 이 기호와 시체가 아주 이상하게......”
  “시체의 자세 말인가요?”
  요원이 물었다.
  한기를 느끼며 랭던은 고개를 들어 끄덕였다.
  “대체 누가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가 없군요.”
  요원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랭던씨. 이 사진의 모습은 ......”
  요원은 뜸을 들였다.
  “소니에르 관장이 직접 한 것입니다.”

2

  1.6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예르 가에 있는 고급 저택의 입구에서는 사일래스라는 이름을 가진 덩치 큰 알비노(알비노: 선천성 색소결핍증, 즉 백피증인 사람)가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대못이 박힌 말총 허리띠가 허벅지에 매달려 살을 파고 들었지만, 사일래스의 영혼은 주인에 대한 봉사의 만족감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고통은 좋은 것이다.’
  저택으로 들어서던 사일래스는 로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이 깨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침실 문은 열려 있었다. 이곳에서는 문을 잠그는 것이 금지되었다. 사일래스는 침실로 들어가 등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방은 검소했다. 딱딱한 나무 바닥에 소나무 옷장과 침대로 쓰는 삼베 매트가 구석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번 주에 사일래스는 이곳 방문객이다. 하지만 뉴욕에 이와 비슷한 은신처를 갖는 축복을 수년 동안 누리고 있었다.
  ‘주님 내게 쉴 곳과 삶의 목적을 제공하신다.’
  마침내 오늘 밤 사일래스는 그 빚을 갚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그는 옷장으로 서둘러 다가가 맨 아래 서랍에 숨겨져 있던 휴대 전화기를 찾아서 번호를 눌렀다.
  “네?”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스승님, 막 돌아왔습니다.”
  “말해라.”
  사일래스의 연락을 받게 되어 몹시 즐겁다는 투로 전화의 목소리는 명령했다.
  “네 명 모두 죽었습니다. 세 명의 집사들 ...... 그리고 우두머리인 마스터도요.”
  마치 애도하는 듯한 침묵의 순간이 이어졌다.
  “그럼 자네가 정보를 갖고 있겠군.”
  “네 명 모두 일치했습니다. 각각 따로따로 말입니다.”
  “그럼 자넨 그들의 말을 믿는다는 건가?”
  “그들의 일치된 증언을 우연으로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흥분된 숨소리가 이어졌다.
  “훌륭해. 비밀 엄수에 대한 조직의 명성이 너무 자자해서 걱정했는데 말이야.”
  “죽음에 대한 예감이 강력한 동기였습니다.”
  “그래, 제자여 내가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 얘기해 보거라.”
  사일래스는 희생자들에게서 모은 정보가 충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승님, 네 사람 모두 클레 드 부트(clef de voute:금고를 여는 열쇠)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 전설의 쐐기돌 말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급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사일래스는 그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쐐기돌이라...... 정확히 우리가 예상한 대로군.”
  전설에 따르면, 조직은 ‘클레 드 부트’ 또는 ‘쐐기돌’이라고 알려진 돌로된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조직의 가장 큰 비밀이 잠든, 최후의 장소를 밝혀줄 정보가 새겨진 석관이다. 그 비밀은 매우 엄청난 것이어서 그것을 보호하는 일이 조직의 존립 이유가 되었다.
  “그 쐐기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한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다.”
  스승이 말했다.
  “스승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쐐기돌은 여기 파리에 있습니다.”
  “파리? 믿어지지 않는군. 그렇게 간단하다니.”
  사일래스는 오늘 밤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네 명의 희생자들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허망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기 바로 직전에 비밀을 실토한 일들을 말이다. 네 명 모두 같은 얘기를 했다. 쐐기돌은 파리의 오래된 생 쉴피스 교회 안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고 말이다.
  “주님의 집에 말이냐? 감히 우리를 이렇게 조롱하다니!”
  스승이 소리쳤다.
  “그자들이 수백년을 숨겨온 것처럼 말이죠.”
  승리의 기쁨을 가라앉히기라도 하듯 스승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오늘 신께 아주 훌륭한 예배를 드린 것이네. 우리는 이를 위해 수백년을 기다려 왔어. 자네는 반드시 그 돌을 내게 가져와야 해. 즉시! 오늘밤 안으로. 거기에 걸린 대가는 알고 있겠지.”
  그 대가는 계산할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사일래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승의 요구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교회는 요새와 같습니다. 특히 밤에는요. 제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확신에 찬 스승의 목소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고 난 사일래스는 기대감에 온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사일래스는 중얼거렸다. 고맙게도 스승은 신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참회할 시간을 준 것이다.
  ‘오늘 저지른 죄에 대해 내 영혼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오늘 벌어진 죄악은 신성한 목적하에 행한 것이었다. 적들에 대한 신의 전쟁은 수백년 동안 있어 왔다. 용서는 보장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면죄는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사일래스는 그림자를 끌면서 알몸으로 방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대못이 박힌 말총 허리띠가 허벅지를 옥죄는 것을 살폈다. <길>의 신실한 추종자들은 모두 이 장치를 착용한다. 그리스도가 겪은 고통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도구로는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금속 갈고리가 박힌 가죽 채찍도 있다. 이런 도구들이 불러오는 고통은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기본 착용시간인 두 시간 넘게 하고 있었지만 ,사일래스는 오늘이 보통 때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리띠의 버클을 잡고 한 단계 더 조이자, 허리띠의 갈고리들이 살 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천천히 숨을 토해 내면서 사일래스는 고통의 정화 의식을 음미했다.
  ‘고통은 좋은 것이다.’
  스승 중의 스승인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신부의 신성한 부문을 되뇌면서 사일래스는 속삭였다. 에스크리바는 1975년에 죽었지만 그의 지혜는 계속 살아있고, 그의 말은 이 땅의 수천 명의 신실한 충복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육체의 고행’으로 알려진 신성한 의식을 수행할 때 여전히 속삭여지고 있다.
  사일래스는 마룻바닥에 정결하게 말려 있는 두꺼운 밧줄로 고개를 돌렸다.
  ‘원칙.’
  밧줄의 굵은 매듭에는 마른 피가 붙어 있었다. 자기의 고뇌가 정화되기를 고대하며 사일래스는 짧은 기도문을 외웠다. 그런 뒤 밧줄의 한 쪽 끝을 쥐고 눈을 감은 채 어깨 너머로 휘둘렀다. 밧줄의 매듭이 등을 찍어 대는 아픔이 느껴졌다. 사일래스는 밧줄로 자기 살을 난도질하면서 한 번 더, 한 번 더 외쳤다.
  “Castigo corpus menu(내 몸에 체벌을 내려라)!”
  마침내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3

  시트로엥 ZX의 열린 창문으로 상쾌한 4월의 공기가 느껴졌다. 오페라 하우스의 남쪽을 지나 방돔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자동차의 보조석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던 로버트 랭던은 이 도시가 자기 옆을 지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빨리 마친 샤워와 면도는 랭던을 말쑥해 보이게 했지만 그의 근심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참혹한 관장의 시체 사진이 랭던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가 죽었다.’
  랭던은 관장의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소니에르는 운둔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헌신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푸생과 테니르스의 그림들 속에 숨겨진 비밀부호에 관한 소니에르의 책들은 랭던이 즐겨 사용하는 교재이기도 했다. 오늘 밤의 만남을 몹시 고대하던 랭던은 관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실망했었다.
  다시 관장의 시체사진이 떠올랐다.
  ‘자크 소니에르가 직접 그렇게 했다?’
  사진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떨쳐내며 랭던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는 이제 꾸불꾸불한 아랫길로 이어졌다. 수레의 사탕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 쓰레기 봉지를 거리에 내놓는 식당 종업원들 , 재스민 향이 묻어나는 산들바람에서 늦은 밤의 온기를 느끼려고 서로 감싸안는 연인들. 시트로엥 자동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이 혼돈속을 누볐다. 2음조의 거슬리는 사이렌 소리는 칼처럼 교통의 흐름을 갈랐다.
  “랭던 씨가 아직 파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반장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호텔을 떠난 후 요원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본질적으로 다른 표상과 이념들의 숨겨진 상관성을 탐구하는 데 일생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랭던은 세계를 역사와 사건들이 서로 심오하게 짜여진 거미집으로 보였다. 랭던은 하버드에서 기호학 수업시간에 종종 이렇게 말했다.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항상 거기에 있다. 표면 바로 아래에 묻힌채 말이다.’
  “파리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겠군요?”
  랭던이 말했다.
  요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인터폴입니다.”
  ‘인터폴, 물론 그랬겠군.’
  랭던은 생각했다. 모든 유럽의 호텔들이 숙박 수속을 밟을 때 여권을 보여달라고 하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요청이 공식적인 행동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랭던은 깜박 잊고 있었다. 그것은 법이기도 했다. 유럽 어디에 있든, 인터폴 수사관들은 누가 어디에서 자는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리츠 호텔에 묵고 있는 랭던을 찾아내는 데는 아마 5초밖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트로엥이 도시를 남쪽으로 가로지르자, 조명을 받고 있는 에펠 탑이 오른쪽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에펠 탑을 보며 1년 전의 장난기 어린 약속을 떠올린 랭던은 비토리아를 생각했다. 6개월마다 지구상의 낭만적인 장소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에펠 탑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1년 전에 로마의 시끄러운 공항에서 키스를 나눈 것이 마지막이다.
  “그녀를 올라가 봤습니까?”
  요원이 고개 너머로 물었다.
  랭던은 자신이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흘끗 쳐다보았다.
  “뭐라구요?”
  요원은 창 밖으로 에펠 탑을 가리켰다.
  랭던은 자신이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흘끗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요원은 창밖으로 에펠 탑을 가리켰다.
  “무척 아름답죠. 안 그런가요? 그녀는 프랑스의 상징입니다. 저는 그녀가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랭던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호학자들은 프랑스에서 저 3백 미터짜리 남근상보다 적절한 국가적 상징을 찾을 수 없다고 종종 말한다. 프랑스는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 나폴레옹이나 난쟁이 페팽처럼 불안하고 왜소한 지도자들로 유명한 나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리볼리 가의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시트로앵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요원은 앞에 가던 세단을 앞질러 카스트글리온 가의 숲이 우거진 구역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카스티글리온 가는 파리의 센트럴 파크로 불리는 유명한 튈르리 정원의 북쪽 입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튈르리 정원을 여기 피어난 수천 송이의 튤립과 연관시켜서 잘못 이해한다. 튈르리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단어이다. 공원은 한 태 이 도시의 유명한 붉은 기와, 즉 튈르를 만들기 위해 진흙을 채굴하던 엄청나게 크고 오염된 채굴장이었다.
  황량한 공원에 들어서자, 요원은 계기판 아래로 손을 뻗어 사이렌을 껐다. 랭던은 갑작스러운 정적을 음미하며 안도했다. 자동차의 창백한 할로겐 헤드라이트가 공원의 자갈길을 훑었다. 타이어는 졸린 듯한 리듬으로 억양을 실어 노래하듯 윙윙 굴러간다. 랭던은 항상 튈르리를 신성한 땅으로 생각했다. 이곳에서 클로드 모네는 형식과 색을 실험했고, 문자 그대로 인상파 운동의 탄생이 고무되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이상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시트로엥은 공원 중앙 가로수 길의 서쪽 아래로 접어들더니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원형 분수를 돌아 한적한 나무 길을 통과하자 널찍한 사각형 공간이 나타났다. 랭던은 아치 모양의 거대한 돌로 표시된 튈르리 정원의 끝을 바라보았다.
  케러젤의 아치.
  케러젤의 아치에서 주신제 의식이 한 번 열리긴 했어도, 예술지상주의자들은 이 장소를 전혀 다른 이유로 숭배했다. 튈르리 끝의 산책길에서는 동서남북 네 곳에 있는, 계에서 가장 훌륭한 미술 박물관이 모두 보였기 때문이다.
  센 강과 볼테르 부두를 건너 남쪽인 오른쪽 창문 밖으로는, 옛날 철도역사로 쓰이던 오르세 미술관의 모습이 드라마틱하게 보였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파리국립근대 미술관이 있는 퐁피두 예술 문화 센터의 초현대적인 건물의 꼭대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뒤편 서쪽으로는 죄 드 폼 국립 미술관의 고대 람세스의 오벨리스크가 나무들 위로 솟아 있다는 것을 랭던은 알고 있었다.
  아치 길을 통과해서 곧게 뻗은 동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ㄷ자형의 르네상스 궁전인 루브르 박물관이 있다.
  랭던이 눈동자로 거대한 건축물을 흡수하려는 헛된 시도를 하는 사이, 익숙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아찔할 정도로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루브르의 당당한 정면이 파리의 하늘을 배경으로 성체처럼 서 있었다. 거대한 편자 모양으로 생긴 루브르 박물관은 유럽에서 가장 긴 건물이다. 이 편자 모양의 건물을 펼치면 에펠 탑을 세 개 늘어놓은 것보다 길다. 심지어 박물관 양 날개 사이에 있는 수백만 평방미터의 광장도 박물관 정면의 폭에는  도전하지 못한다. 랭던은 한때 루브르 박물관 주변을 한 바퀴 걸어보았다. 길이가 약 5킬로미터나 되었다.
  대략 6만 5천 3백 점이나 되는 루브르의 예술품들을 모두 감상하는 데는 5주 정도 걸리지만, 여행객들은 대부분 랭던이 ‘ 루브르의 보물찾기’ 라고 부르는 축약된 코스를 선택한다. 박물관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세 가지 미술품에 눈도장을 찍고 가려는 단거리 경주 같은 것이다. 이 보물들은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승리의 날개>다. 아트 부치왈드는 5분 56초 안에 이 명작들을 모두 보았다고 자랑삼아 떠벌렸다.
  요원이 무전기를 꺼내 빠르게 프랑스어로 말했다.
  “랭던 씨가 도착했습니다. 이 분 전입니다.”
  해독하기 어려운 대답이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왔다.
  요원은 무전기를 넣은 뒤 랭던을 돌아보았다.
  “출입문에서 반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요원은 루브르 광장의 자동차 출입 금지 표지판을 무시했다. 그리고 도로의 연석 위로 시트로엥을 몰고 갔다. 조명 빛을 받으며 분수를 뿜어내는 일곱 개의 삼각형 연못에 위풍당당하게 둘러싸인 루브르 박물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라미드.’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입구는 박물관만큼이나 유명했다. 중국 출신의 미국인 건축가 I. M. 페이가 디자인한 신현대적인 유리 피라미드 입구는, 르네상스 앞마당의 품위를 해친다고 믿는 전통주의 신봉자들의 냉소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괴테는 건축물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페이를 비평하는 이들은 이 피라미드를 칠판 위의 손톱자국이라고 비꼬았지만, 진보적 옹호론자들은 22미터 가까운 높이의 투명한 피라미드를 고대 구조와 현대 방식의 빛나는 결합, 그 이상이라며 환영했다. 새 천년으로 루브르를 이끄는 신구(新舊)의 상징적 연결고리로서 말이다.
  “저 피라미드가 마음에 드십니까?”
  요원이 물었다.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인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함축적인 질문이다. 피라미드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안목없는 미국인이 되어 버리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프랑스인에게 모욕이 되는 식이다.
  “미테랑은 대담한 남자였죠.”
  랭던은 다소 엉뚱하게 대답했다. 피라미드를 의뢰한 이 대통령은 ‘파라오 콤플렉스’로 고통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단독으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이집트 예술, 그 인공물로 파리를 채우려 한 프랑수아 미테랑은 이집트 문화에 애착이 강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서, 프랑스 사람들은 작고한 미테랑 대통령을 여전히 스핑크스라 부르고 있었다.
  “반장은 누구입니까?”
  화제를 바꾸려고 랭던이 물었다.
  “부쥐 파슈. 우리는 토로라고 부릅니다.”
  피라미드 정문으로 다가가면서 요원은 말했다.
  모든 프랑스인의 별명이 이상한 동물 이름일까 궁금해 하면서 랭던은 요원을 슬쩍 쳐다보았다.
  “반장을 ‘황소’라고 부른단 말입니까.”
  요원의 눈썹이 활처럼 치켜 올라갔다.
  “랭던 씨의 프랑스어 실력은 생각보다 훌륭하군요.”
  ‘프랑스어 실력은 시시하지만, 12궁도 도상학은 꽤 쓸 만하지.’
  타우루스자리는 황소를 의미한다. 점성술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상징의 정수다.
  요원은 차를 세우고 두 분수 사이에 있는 피라미드 한 면의 커다란 문을 가리켰다.
  “저게 입구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선생.”
  “함께 안 갑니까?”
  “제 임무는 선생을 여기까지 모시는 겁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습니다.”
  랭던은 한숨을 내쉰 뒤 차에서 내렸다.
  ‘이건 당신네 서커스로군.’
  요원은 시동을 걸고 속도를 냈다.
  혼자 남은 랭던은 떠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을 지켜보며 이 광장을 빠져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침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뭔가가 그것은 불순한 생각이라고 랭던에게 말하고 있었다.
  분수의 안개 속으로 다가가며 랭던은 전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상상의 문턱을 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꿈결 같기만 한 이밤의 묘한 분위기가 랭던 주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20분 전까지만 해도 호텔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황소라고 불리는 경찰 반장을 기다리며 스핑크스의 지시로 지어진 투명한 피라미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에 갇힌거야.’
  랭던은 생각했다.
  거대한 회전문이 달린 정문으로 랭던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로비에는 흐릿한 불이 켜져 있을 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노크해야 하나?’
  하버드의 저명한 이집트 학자들 중 일찍이 피라미드의 정문을 두드리고 답을 구해본 자가 있는지 궁금했다. 손을 들어 유리를 두드리려는 순간, 아래쪽 어둠 속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인물이 있었다. 땅딸막한 남자는 어둠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처럼 보였다. 어깨에 두줄 단추가 달린 짙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한치의 실수도 없을 것 같은 권위를 풍기며 다가왔다. 휴대 전화기로 통화하던 남자는 문에 도착하자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랭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랭던이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자 남자가 말했다.
  “저는 브쥐 파슈입니다. 중앙사법경찰국의 반장입니다.”
  남자의 어조는 귀에 거슬리는 굉음으로, 마치 폭풍이 몰려드는 것 같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랭던은 손을 내밀었다.
  “로버트 랭던입니다.”
  파슈의 큰 손바닥이 랭던의 손을 으깰 듯이 감쌌다.
  “사진을 보았습니다. 당신네 요원은 자크 소니에르가 스스로 그런 것을 ......”
  흑단처럼 새까만 파슈의 눈동자는 잠겨 있었다.
  “랭던 씨. 당신이 사진에서 본 것은 소니에르가 한 일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4

  브쥐 파슈 반장은 넓은 어깨를 뒤로 젖히고, 턱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성난 황소처럼 몸을 움직였다. 검은 머리에 오일을 발라 뒤로 매끄럽게 넘겨 화살 모양의 앞머리가 두드러져 보였다. 돌출된 이마를 둘로 가르는 듯 한 중앙의 v자 모양의 머리는 함선의 뱃머리를 연상시켰다. 반장의 눈은 밟고 있는 바닥을 태우기라도 할 것 같았다. 모든 문제를 철저하고 엄격하게 다룬다는 명성 그대로, 반장의 눈은 화염 같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랭던은 반장을 따라서 유리 피라미드 아래의 낮은 중앙홀로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두 명의 사법경찰 앞을 지나갔다. 메시지는 명료했다. 오늘 밤 파슈 반장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여기를 드나들 수 없는 것이다.
  홀로 내려오면서 랭던은 점점 치밀어 오르는 전율과 싸워야 했다. 파슈의 존재가 오히려 고마웠다. 이 시간의 루브르는 묘지 같은 음산한 분위기 였다. 어두운 영화관의 통로처럼 계단은 발판마다 깔린 조명으로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랭던은 머리위의 유리에 닿아 진동하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투명한 지붕 바깥으로 분수에서 피어난 안개가 조명을 받아 흐릿하게 사라지는 광경이 보였다.
  “마음에 듭니까?”
  파슈는 넓은 턱으로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랭던은 이 말장난에 싫증이 나서 한숨만 내쉬었다.
  “예, 당신네 피라미드는 대단합니다.”
  파슈는 투덜거렸다.
  “파리의 얼굴에 난 흉터일 뿐이죠.”
  ‘원 스트라이크.’
  이 반장이란 작자는 재미라곤 없는 경직된 사고방식의 인간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랭던은 파슈가 미테랑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정확히 666장의 유리판을 사용해 이 피라미드가 세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이상한 요청은 666이 사탄의 숫자라고 주장하는 음모론 애호가들 사이에서 뜨거운 얘깃거리가 되었다.
  지하 로비로 더 내려가자, 입을 크게 벌린 것 같은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지하 로비로 더 내려가자, 입을 크게 벌린 것 같은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지하 17미터 아래에 건설된 6천 5백 평방미터의 새로운 로비가 끝없는 동굴처럼 뻗어 있었다. 루브르의 외관과 어울리도록 따뜻한 느낌의 황토색 대리석으로 건설된 지하 홀은, 보통 때엔 햇빛과 관광객들로 힘차게 맥박치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홀 전체가 차가운 교회당의 지하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어둡고 황량했다.
  “박물관의 보안 요원들은?”
  랭던이 물었다.
  “조사.”
  랭던이 자기 팀의 성실성에 의문이라도 제기한 것처럼 파슈는 간단히 대꾸했다.
  “명백하게, 출입이 금지된 누군가가 오늘밤 들어온 것이 확실합니다. 박물관의 모든 야간 경비원들은 지금 쉴리 관에서 조사받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은 제 요원들이 박물관을 접수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랭던은 파슈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빨리 움직였다.
  “자크 소니에르 관장과 잘 아는 사이입니까?”
  반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파슈는 놀란 듯했다.
  “첫 만남이 오늘 밤이 될 뻔했다는 얘깁니까?”
  “예. 제 강의가 끝난 후 아메리칸 대학의 리셉션 자리에서 만날 작정이었죠. 하지만 관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파슈는 작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었다. 걸어가면서 랭던은 다른 피라미드를 언뜻 보았다.
  ‘역 피라미드.’
  중간층의 접합 부분에서 종유석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거대한 채광창이었다. 파슈는 아치 모양의 터널 입구로 통하는 짧은 계단으로 안내했다. 터널의 입구 위에는 ‘드농’이라는 표지가 있었다. 드농 관은 루브르의 3대구역(드농,쉴리,리슐리외)중 가장 유명한 구역이다.
  “오늘 만남은 누가 제안했습니까? 당신인가요. 아니면 관장인가요?”
  갑자기 파슈가 물었다.
  랭던은 질문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터널로 들어서면서 대답했다.
  “소니에르 씨가 제안한 것입니다. 몇 주 전의 관장의 비서가 전자메일로 연락해 왔습니다. 이번 달에 파리에서 강의가 있다는 얘기를 관장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의논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습니다.”
  “뭘 의논하려 했지요?”
  “저도 모르죠. 하지만 예술에 관해서가 아니겠어요? 우리는 관심사가 비슷하니까요.”
  파슈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관장이 왜 만남을 제안했는지 당신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얘기군요.”
  그랬다. 그 당시 랭던은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꼬치꼬치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크 소니에르는 사생활이 알려지지 않기로 유명했고, 참석하는 자리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랭던은 자크 소니에르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랭던 씨, 관장이 살해된 오늘 밤에 당신과 무엇을 의논하려 했는지 짐작가는게 있습니까? 수사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질문의 신랄함에 랭던은 불쾌했다.
  “정말이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물어보지 않았거든요. 연락을 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느꼈으니까요. 저는 소니에르 씨의 작업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제 수업 시간에 소니에르 씨의 원문을 종종 사용할 정도로요.”
  파슈는 수첩에 이 사실도 적어 넣었다.
  두 사람은 드농 관을 절반 정도 걸어왔다. 랭던은 벽 쪽에 두 개의 에스컬레이터가 멈춰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소니에르 씨와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지난해의 대부분을 소니에르 씨의 주요 전문 분야를 다루는 책의 초고를 쓰는데 보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소니에르 씨의 뇌를 끄집어내고 싶었지요.”
  파슈가 힐끗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파슈는 잘 이해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그 주제에 관해서 소니에르 씨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는 얘깁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주제였습니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랭던은 잠시 망설였다.
  “본질적으로, 원고 내용은 여신숭배에 관한 도상학입니다. 여성의 고결함에 대한 개념과 그와 연관된 예술과 상징들을 다루는 것이죠.”
  파슈는 두툼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소니에르 씨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만 ......”
  “알겠습니다.”
  랭던은 파슈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는 지상에 나타난 최초의 여신을 다룬 도상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소니에르는 다산, 여신숭배,위카(땅 혹은 대지에 바탕을 둔 종교로, 새로운 이교도의 하나) , 신성한 여성에만 열정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루브르 박물관장으로서 20년의 재임 기간 동안, 소니에르는 박물관에 여신과 관련된 지상의 예술품들을 최대한 수집하는 데 일조했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 델피 신전의 여제사장의 쌍도끼부터 시작해 금 지팡이, 서 있는 작은 천사들 같은 티예 앙크(여성의 생식기관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고리가 달린 T자 모양. 생식과 장수를 상징하며, 오늘 날 여성을 나타내는 기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수백 점, 고대 이집트에서 사악한 영혼을 쫒아내는 데 쓰인 시스트럼(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여신 이시스 제사 때에 쓰던 금속악기) , 호루스를 기르는 여신 이시스의 모습을 묘사한 입상들의 당당한 진용에 이르기까지 루브르의 수집품은 엄청난 것이었다.
  “자크 소니에르 씨가 당신의 원고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당신 책에 도움을 주려고 만나자는 전화를 한 게 아닐까요?”
  랭던은 머리를 흔들었다.
  “사실, 제 원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직 초고 상태이니까요. 그리고 편집장 외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파슈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랭던은 다른 이유를 덧붙이지 않았다. 사실 그는 누구에게도 원고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잃어버린 신성한 여성의 기호들>이란 가제를 달아둔 3백 페이지가량의 초고는 기존의 종교적 도해에,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논쟁거리가 될 새로운 해석을 들이대고 있었다.
  랭던은 작동을 멈춘 에스컬레이터에 도착했다. 하지만 파슈가 더 이상 옆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돌아보자, 파슈는 5미터 정도 뒤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겠습니다. 아시겠지만 , 화랑은 걸어가기에는 꽤 머니까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파슈가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드농 관의 기다란 두 층을 오르는 수고는 덜어줄 터였다. 그러나 랭던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성마른 얼굴로 파슈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뒤돌아보며 랭던은 한숨을 토해 냈다.
  ‘잘못 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
  랭던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랭던은 소년이었을 때 쓸모 없어진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구출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좁은 공간 안에서 철벅거리며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했었다. 그 후 폐쇄된 공간에서 병적인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스쿼시 코트 같은 곳 말이다.
  ‘엘리베이터는 안전한 기계다. 줄에 매달린 작은 금속상자일 뿐이야!’
  랭던은 스스로 타일렀지만, 결코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숨을 참으며 랭던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익숙한 아드레날린의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고작 이 층일 뿐이다. 십 초면 돼.’
  “당신과 소니에르 씨. 한번도 얘기를 나눈 적이 없습니까? 편지 왕래도 없었습니까? 우편으로 뭔가를 주고받은 적은 없습니까?”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파슈가 물었다.
  역시 이상한 질문이었다.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없습니다.”
  그 사실을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처럼 파슈는 머리를 곧추세웠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파슈는 눈앞의 문짝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랭던은 자기를 둘러싼 네 벽들 외에 다른 것에 신경쓰려고 노력했다. 반질반질한 엘리베이터 문에 반장의 넥타이 핀이 반사되어 비쳤다. 칠흑 같은 마노 보석 열세 개가 박힌 은제 십자가 모양이었다. 랭던은 적이 놀랐다. 열세 개의 보석이 박힌 십자가라는 뜻의 크룩스 젬마타(crux gemmata)라 불리는 상징이었다. 열세 개의 보석은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를 나타내는 기독교적인 표의문자였다. 경위야 어떻든 간에 랭던은 프랑스 경찰 반장이 자기의 종교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순간, 여기는 프랑스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 나라에서 기독교는 종교도 특권도 아니다.
  “이건 크룩스 젬마타입니다.”
  갑자기 파슈가 말했다.
  깜짝 놀란 랭던은 문에 반사된 파슈의 모습을 마주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며 멈추고 문이 열렸다.
  천장이 높기로 유명한 루브르 화랑의 확 트인 공간을 기대하면서, 랭던은 엘리베이터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가 걸음을 내디딘 세계는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랭던은 놀라서 멈칫했다.
  파슈가 흘끗 쳐다보았다.
  “랭던 씨, 관람 시간 이후의 루브르는 본 적이 없겠지요?”
  ‘그런 적은 없죠.’
  태도를 바로하려고 애쓰면서 랭던은 생각했다.
  빠짐없이 조명을 받는 루브르 화랑들이 오늘 밤엔 놀라울 정도로 어두었다. 위에서 비추는 관람용 흰색 조명 대신에, 조도가 낮은 붉은 조명이 바닥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간헐적인 붉은 조명 조각들이 타일 바닥위로 엎질러진 것 같았다.
  어둑어둑한 복도를 쳐다보며, 랭던은 이런 장면을 예상했어야 했음을 깨달았다. 대부분 일류 화랑들은 전략적으로 밤에는 조도가 낮고 , 덜 위협적인 붉은 조명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것은 야간에 경비요원들이 복도를 순찰할 때 , 그림이 빛에 과다 노출되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술품을 상대적으로 어두운 곳에 두기 위한 배려였다. 오늘 밤 박물관 안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통 때라면 솟구쳐 보이는 아치형 천장이 낮고 어두운 공허한 공간으로만 보였다.
  “이쪽으로”
  파슈는 오른쪽으로 홱 돌더니 연결된 여러 개의 화랑을 지나갔다.
  파슈를 뒤따라가면서 랭던의 시력은 점차 어둠에 적응해갔다. 거대한 암실에서 현상되고 있는 사진들처럼 커다란 유화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점차 드러내고 있었다...... 랭던이 화랑을 지나갈 때, 그림들의 눈도 그를 따라왔다. 랭던은 박물관 특유의 익숙한 공기를 느낄수 있었다. 탄소 향이 희미하게 감도는 메마르고 탈이온화된 향기였다. 관람객들이 토해 놓은 부식성 강한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사방에 설치된 석탄 필터가 장착된 산업용 습기 제거기 때문이었다.
  벽을 따라 올라간 높은 곳에서는 보안용 카메라들이 관람객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따.
  ‘우리가 당신을 보고 있다. 어느 것에도 손대지 마시오.’
  “모두 진짜인가요?”
  감시카메라를 가리키며 랭던이 물었다.
  “물론 아닙니다.”
  파슈는 고개를 저었다.
  랭던은 놀라지 않았다. 이 정도 크기의 박물관을 비디오로 감시한다는 것은 비용면에서도 말이 안되고, 효과 차원에서도 신통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비디오로 감시하려면, 몇백명의 전문 인력이 필요할 것이다. 대부분의 큰 박물관들은 이제 봉쇄 정책을 펴고 있다. ‘도둑이 오지 못하게 막는 일은 그만두자. 차라리 도둑을 안에 가두어 버리자’는 의미다. 침입자가 예술품을 옮기려고 하면, 예술품이 있는 화랑 주변이 봉쇄되는 것이다. 도둑은 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철창 안에 갇힌 자기 꼴을 보게 될 터였다.
  대리석 화랑 앞쪽에서 목소리들이 울려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오른쪽으로 쑥 들어간 큰 방에서 나오는 듯했다. 밝은 불빛이 복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장실입니다.”
  반장이 말했다.
  관장실로 다가가면서 랭던은 소니에르의 우아한 취미를 엿보았다. 따뜻한 재질의 목재, 나이든 거장의 그림들, 엄청나게 큰 골동품 스타일의 책상, 그 위에는 완전 무장한 60센티미터 정도의 중세 기사상이 놓여 있었다. 사무실은 전화를 하고 뭔가를 받아 적는 경찰 요원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중 한명은 소니에르의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 컴퓨터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관장실은 오늘 저녁 DCPJ의 임시 본부가 된 모양이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듣고 계십니까?”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랭던은 호텔 문 앞에서부터 출입 허가증을 달고 있었다. 파슈와 랭던은 어떤 상황에서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한 무리의 요원들을 남겨두고, 파슈는 랭던을 어두운 홀 아래로 안내했다. 루브르의 가장 인기 있는 장소인 대화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30미터정도 앞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랑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한 이탈리아 걸작품들이 모여 있는 ,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방이다. 랭던은 이미 이곳에 소니에르의 시신이 누워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명한 기하학 문양의 마룻바닥이 폴라로이드 사진에 한치의 실수도 없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출입구는 거대한 강철 격자로 막혀 있었다. 중세의 성채들에서나 이용 했을 법한 격자다.
  “봉쇄용 보안 철창입니다.”
  격자 가까이 다가가서 파슈가 말했다.
  어둠 속의 철창은 탱크라도 가둘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랭던은 희미하게 불을 밝힌 동굴같은 대화랑을 철창 사이로 들여다보았다.
  “먼저 들어가십시요. 랭던 씨.”
  랭던은 돌아섰다.
  ‘나 먼저 들어가라고? 어디로’
  파슈는 격자 밑부분의 바닥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랭던은 아래를 보았다. 어둠속이라 눈치 채지 못했지만, 철창은 60센티미터가량 들어 올려져 있었다.
  “이곳은 루브르 보안요원들에게는 아직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경찰 과학수사국(PTS)에서 나온 저희 팀이 지금 막 조사를 끝냈습니다.”
  파슈가 입구를 가리켰다.
  “아래로 들어가십시오.”
  랭던은 겨우 기어 들어갈 좁은 공간을 응시하다고, 위에 매달린 육중한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농담이겠지?‘
  철문은 침입자를 내리치려고 기다리는 단두대 같았다.
  파슈가 프랑스어로 뭐라고 툴툴거리더니 시간을 체크했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덩치 큰 몸을 숙여 철창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파슈는 철창 사이로 랭던을 뒤돌아보았다.
  랭던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을 반질반질한 마룻바닥에 짚은 채, 배를 바닥에 깔고 앞으로 끌었다. 그러나 입고 있던 해리스 트위드의 목덜미가 철창에 걸려 찢어지고, 뒤통수를 철문에 박고 말았다.
  ‘아주 우아하군. 로버트.’
  서투르게 철창 밑을 빠져나온 후 일어서면서, 랭던은 오늘 밤이 아주 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오푸스 데이의 새로운 미국 본사이자 회담 센터인 머리 힐은 뉴욕의 렉싱턴 가 243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1만 2천 평방미터짜리 빌딩은 4천 7백만 달러 이상이라는 가격이 매겨져 있고, 붉은 벽돌과 인디애나 석회암으로 치장되어 있다. 메이 앤 핀스카가 디자인했고, 빌딩 안에는 백 개가 넘는 침실과 여섯 개의 식당, 도서실 거실 회의실 사무실이 있다. 2층과 8층,16층에는 목공예와 대리석으로 장식된 교회가 있고, 17층은 모두 주거 지역이다. 남자들은 렉싱턴 가에 위치한 정문으로 드나들었지만, 여자들은 다른 쪽에 있는 출입문을 사용해야 했다. 이 건물 안에서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항상 분리되어 있었다.
  이른 저녁, 마누엘 아링가로사 주교는 자신의 아파트 펜트하우스에서 전통적인 검정 사제복을 입고 작은 여행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허리에 자줏빛 띠를 둘렀을 테지만, 오늘 밤은 일반인들과 섞여서 여행할 참이었다. 주교는 자신의 높은 지위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로지 예리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만이 14캐럿짜리 자수정과 커다란 다이아몬드들, 그리고 수공예로 만든 미트라(주교들이 의식 때 쓰는 관)모양의 홀이 박힌 금반지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여행가방을 어깨에 짊어지면서 주교는짧은 기도를 올리고 아파트를 나섰다. 운전사가 공항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에 앉은 아링가로사는 창문을 통해 어두운 대서양을 내려다보았다. 해는 이미 졌지만, 주교는 자기만의 별이 떠오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밤 전투는 승리할 것이다.’
  한 달 전 자신의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에 대항해서 아무런 힘도 쓸수 없던 것을 생각하면 그저 아찔할 뿐이었다.
  오푸스 데이의 수장으로서, 아링가로사는 지난 10년 간 자신의 삶을 오푸스 데이. 즉 ‘신의 사업’에 관한 복음을 널리 알리는 데 바쳐왔다. 1928년 스페인 사제인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에 의해 설립된 이 단체는 보수적인 카톨릭 가치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그리고 회원들에게는 신의 사업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할 것을 권고했다.
  오푸스 데이의 전통철학은 프랑코 독재시절 이전의 스페인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1934년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정신이 담긴 <길>의 출간과 함께 에스크리바의 메시지는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책에는 평소 생활하면서 신의 사업을 행할 수 있는 999개의 명상이 수록되어 있었다. 현재 42개 언어로 번역되어 4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으므로 오푸스 데이의 힘은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오푸스 데이의 건물과 교육센터, 심지어 대학교까지 찾아볼 수 있다. 오푸스 데이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재정도 가장 안정된 가톨릭 교파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종교적인 냉소와 예찬, 텔레비전 선교사들이 판치는 요즘 시대에 날로 확장되는 오푸스 데이의 부와 힘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아링가로사는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푸스 데이를 뇌를 세척하는 종교의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초보수적인 기독교의 비밀 분파라고도 합니다. 어느 쪽입니까?”
  기자들이 가끔 묻는 말이었다.
  그때마다 주교는 끈기 있게 대답했다.
  “그 어느쪽도 아닙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한 가톨릭 교리를 열심히 따르는 일을 우선시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신의 사업이란 게 반드시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헌금으로 내고, 순결에 대한 서약과 채찍질이나 말총 허리띠를 통한 속죄를 포함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오푸스 데이의 극히 일부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오푸스 데이에는 여러 참여 단계가 있습니다. 수천 명의 오푸스 데이 회원들은 결혼을 했고, 가정이 있으며,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서 신의 일을 행합니다. 그밖의 사람들은 오푸스 데이의 수도원에서 고행의 삶을 선택했지요. 이러한 선택은 모두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푸스 데이의 모든 사람들은 신의 사업을 행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확실히 경탄할 만 한 원정이지요.”
  하지만 이런 이성적인 논리가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미디어는 항상 스캔들을 파고 들었다. 대부분의 큰 조직들처럼 오푸스 데이 역시 조직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잘못 인도된 몇몇 영혼들이 회원으로 있었다.
  두 달 전, 오푸스 데이 그룹은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환락 상태를 종교 체험이라 믿고 환각제에 취한 신입회원들을 붙잡았다. 또 다른 대학교의 학생은 갈고리가 박힌 말총 허리띠를 하루 권장시간인 두 시간 넘게 사용해,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얼마전에는 삶에 환멸을 느낀 보스턴의 한 젊은 금융투자자가 자살을 기도하기 전에, 자기의 전 재산을 오푸스 데이에 넘긴다고 서명한 사건도 있었다.
  ‘잘못 인도된 양 떼 무리들.’
  마음은 신도들에게 향한 채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물론 가장 당혹스러운 일은 FBI스파이. 로버트 한센의 공개재판이었다. 그 과정에서 로버트 한센이 오푸스 데이의 신실한 회원이라는 것과, 자기방에 비디오 카메라를 몰래 설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센의 친구들은 몰래 카메라를 통해서 한센이 자기 부인과 성행위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판사는 ‘독실한 가톨릭 교인의 유희로는 보기 어렵다.’고 언급했다.
  슬프게도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오푸스 데이의 감시 네트워크(ODAN)라고 알려진 새로운 감시단체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 단체의 인기 웹사이트인 www.odan.org는 오푸스 데이 구회원들의 증언을 빌려 ,오푸스 데이 가입을 경고하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이제 미디어는 오푸스 데이를 ‘신의 마피아’ 혹은 ‘그리스도의 제사’로 치부하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아링가로사는 오푸스 데이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는지 비평가들이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오푸스 데이는 바티칸의 전적인 승인과 축복을 받고 있었다.
  ‘오푸스 데이는 교황 자신의 개인적인 교파다.’
  하지만 최근에 오푸스 데이는 미디어보다 훨씬 강력한 힘의 위협을 받고 있다. 아링가로사 자신도 몸을 숨길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적 ...... 다섯달 전에 힘의 균형이 변화무쌍하게 흔들린 사건이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그 충격에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시작한 전쟁을 아직 모르고 있어.”
  비행기 창문 밖으로 어두운 대서양을 내려다보며 아링가로사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순간 아링가로사의 눈은 비행기 창에 비친 낯선 자기 얼굴에 머물렀다. 납작하게 흰 코가 어두운 장방형의 얼굴을 지배하고 있었다. 코는 젊은 선교사 시절 , 스페인에서 한방 얻어맞아 주저앉은 것이다. 신체 결함은 이제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아링가로사는 영혼의 세계에 있지, 육체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가 포르투칼의 해안을 통과할 때, 아링가로사의 사제복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 전화기가 진동했다. 비행 도중 휴대 전화기의 사용을 금하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 통화는 놓칠 수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이 번호를 알고 있고, 그 사람이 이 휴대 전화기를 우편으로 보내준 것이다.
  흥분된 감정으로 주교는 조용히 대답했다.
  “네?”
  “사일래스가 쐐기돌의 행방을 알아냈소. 돌은 파리에 있소. 생 쉴피스 교회 안이오.”
  전화를 건 사람이 말했다.
  아링가로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까이 있군요.”
  “즉시 쐐기돌을 얻을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의 힘이 필요하오.”
  “물론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십시오.”
  휴대 전화기의 전원을 껐을 때, 아링가로사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공허한 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주교는 자신이 벌이기 시작한 일 때문에 난쟁이처럼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8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일래스라는 이름을 가진 알비노는 물이 담긴 작은 대야 앞에 서 있었다. 등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문질러, 붉은 피가 물에 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히솝(히솝풀. 성서의 우술초로 , 유대인은 부정을 없애는 의식에 그 가지를 썼다.)으로 나를 정화시키리라. 그럼 나는 깨끗해질 것이다.’
  찬송가를 인용하면서 사일래스는 기도했다.
  ‘나를 씻자. 그럼 나는 눈보다 하얗게 될 것이다.’
  사일래스는 한동안 느끼지 못하던 어떤 예감이 솟아남을 알 수 있었다. 그 예감은 사일래스를 전율케 했다. 지난 10년간 사일래스는 자기의 죄를 씻고, 새 생활을 시작하고, 과거의 폭력성을 지우면서 <길>의 내용을 따랐다. 하지만 오늘밤, 모든 것이 힘차게 돌아오고 있었다. 묻어 버리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싸우던 증오가 다시 샘솟고 있었다. 자기의 과거가 이토록 빠르게 떠오르는 것에 사일래스는 놀라고 있었다. 물론 과거의 기억과 함께 기술도 생각났다. 거칠지만 아주 유용한 기술이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평화...... 비폭력......사랑.’
  이것은 사일래스가 처음으로 받은 가르침이다. 그는 이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담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적들이 이 말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힘으로 신을 위협하는 자들은 힘과 부딪히게 될 것이다. 확고 부동한 힘과 말이다.’
  2천 년 동안 그리스도의 병사들은 자기들의 신념을 꺾으려는 자들에 대항해 그들의 신념을 지켜왔다. 오늘 밤 사일래스는 그 전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상처를 말리면서 사일래스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입었다. 양모로 만들어진 어두운 색깔의 망토는 사일래스의 흰 피부와 머리카락을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허리에 매단 밧줄을 꽉 죄면서, 사일래스는 후드를 머리위로 뒤집어썼다. 거울 속에서 사일래스의 붉은 두 눈은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

6

  보안 철문을 기어 나온 로버트 랭던은 대화랑의 입구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랭던은 길고 깊은 협곡 같은 화랑 입구를 응시했다. 화랑의 양쪽에는 9미터 높이의 벽이 어둠 속에서 증발하듯 솟아 있었다. 천장 케이블에 매달린 다 빈치와 티치아노, 카라바조의 멋진 작품들 사이로 야간 조명등이 부자연스러운 붉은 불빛을 발산하며 위를 향해 있었다. 귀족과 정치인의 초상화를 비롯해 정물화와 종교적인 장면, 풍경화 들이었다.
  대화랑은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많은 관람객에게 더 놀라운 경험은 기하학 패턴으로 유명한 마룻바닥이다. 대각선의 참나무 널빤지를 눈부신 기하학 디자인으로 배열한 마룻바닥은 시각적인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닥의 다차원적인 네트워크는 관람객들에게 매 걸음 변하는 표면위로 화랑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마룻바닥의 무늬를 따라가던 랭던의 눈에 예기치 못한 물체가 잡혔다. 랭던 왼쪽으로 2,3미터 앞에 떨어져 있는 물체 주위에는 경찰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었다. 랭던은 파슈를 향해 돌아섰다.
  “바닥에 있는 저것 ...... 카라바조의 작품입니까?”
  쳐다보지도 않고 파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하건대, 그 그림은 2백만 달러도 더 나갈 터였다. 그런데 폐기된 포스터 그림처럼 마룻바닥에 누워 있었다.
  “도대체 저 그림이 왜 바닥에 누워 있는 겁니까?”
  파슈는 움직이지 않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곳은 범죄 현장입니다. 랭던 씨, 우리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저 캔버스는 관장이 벽에서 잡아 뜯어낸 것입니다. 관장은 그렇게 해서 보안 시스템이 움직이게 한 거죠.”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마음에 그려보며 랭던은 입구를 뒤돌아보았다.
  “관장은 자기 사무실에서 공격을 받고, 이 대화랑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벽에서 잡아떼어, 보안 철문을 작동시킨 겁니다. 즉시 모든 출입구가 차단되면서 철문이 떨어졌을 겁니다. 철문이 내려진 여기가 대화랑으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입구입니다.”
  랭던은 혼란을 느꼈다.
  “그럼 관장이 대화랑 안에서 범인을 잡았단 말입니까?”
  파슈는 고개를 저었다.
  “보안 철문은 소니에르와 범인을 갈라놓았습니다. 살인범은 홀 저쪽에 있었죠. 그리고 이 철문을 통해 소니에르를 쐈습니다.”
  파슈는 그들이 막 기어서 통과한 철문의 쇠창살 하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오렌지색 딱지가  매달려 있었다.
  “PTS 팀이 철문에서 탄흔 잔재를 찾아냈습니다. 범인은 쇠창살 사이로 총을 쐈고, 소니에르 씨는 여기서 홀로 죽어갔습니다.”
  랭던은 소니에르의 시신이 담긴 사진을 떠올렸다.
  ‘경찰은 소니에르 스스로 했다고 하는데......’
  랭던은 앞에 펼쳐진 광대한 규모의 화랑을 쳐다보았다.
  “그럼 소니에르 씨의 시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파슈는 십자형의 넥타이 핀을 바로잡은 뒤 걷기 시작했다.
  “잘 아시겠지만, 대화랑은 상당히 깁니다.”
  랭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화랑의 길이는 대략 450미터, 워싱턴 기념비 세 개를 합쳐놓은 것과 같다. 화랑의 폭 역시 숨을 들이쉴 만은 했다. 열차 두량을 나란히 세워 놓은 넓이 정도는 되었다. 화랑의 중앙에는 군데군데 입상들과 거대한 도기품들이 전시되어 복도를 멋스럽게 가르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한쪽 벽을 따라 관람하다가, 반대편 벽으로 돌아가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다.
  파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면을 주시한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 많은 걸작들을 일별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랭던은 무례하게만 느껴졌다.
  ‘어차피 이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거야.’
  랭던은 자신을 달랬다.
  조도가 낮은 붉은색 조명등은 불행히도 바티칸 비밀문서 보관소의 붉은 조명 아래에서 겪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오늘 밤은 로마에서 죽을 뻔한 그날과 매우 유사했다. 랭던은 다시 비토리아를 떠올렸다. 수개월 동안 비토리아는 랭던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로마에서 겪은 일이 겨우 1년 전이라는 것을 랭던은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수십년은 지난 것 같았다.
  ‘또 다른 삶.’
  비토리아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지난 12월이었다. 엽서에는 분규물리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자바해로 떠난다는 내용이 씌어있었다. 쥐가오리의 이동을 추적하기 위해 인공위성을 이용하는 무슨 물리학이라고 했다. 랭던은 비토리아 베트라 같은 여자가 대학 캠퍼스에서 자기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은 결코 품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로마에서의 만남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열망을 마음에 심어놓았다. 독신생활에 대한 오랜 애착과 거기서 얻는 자유로움이 어느틈엔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예상치 못한 공허감이 랭던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랭던과 파슈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자크 소니에르 씨가 이렇게 멀리까지 갔습니까?”
  “소니에르 씨는 위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서서히 죽어 갔을 겁니다. 십 오분에서 이십 분 정도 걸렸겠지요. 분명히 소니에르 씨는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랭던은 섬뜩해서 돌아보았다.
  “보안요원이 도착하는 데 십오 분이나 걸렸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경보음이 울리면 박물관 보안요원은 즉시 행동합니다. 그들은 대화랑이 봉쇄되었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쇠창살을 통해 화랑안.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지요.  보안요원들이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고 합니다. 필시 범인일 거라 가정하고, 규정대로 사법경찰에 연락한 것입니다. 우리가 도착해서 철문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들어올리고, 저는 무장한 요원 부대를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요원들은 화랑을 점거해 가면서 침입자를 구석으로 몰아갔지요.”
  “그리고요?”
  “안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니에르 씨외에는요.”
  파슈는 저 멀리 아래쪽을 가리켰다.
  랭던의 시선이 파슈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처음에는 파슈가 화랑 중앙의 커다란 대리석 입상을 가리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상을 지나, 30미터쯤 지난 지점에 휴대용 조명기구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마룻바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진홍색 화랑 안에서 하얀 조명을 받고 있는 부분은 정말이지 섬처럼 보였다. 빛 한가운데에는 현미경 밑에 놓인 벌레처럼 관장의 시신이 마룻바닥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사진을 봤을 테니,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겁니다.”
  파슈가 말했다.
  시체로 다가가면서 랭던은 차디찬 냉기를 느꼈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가장 기이한 장면이 앞에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의 핏기 없는 시신은 사진에서처럼 바닥에 누워있었다. 랭던은 강한 조명 불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시신 위로 몸을 숙였다. 기묘한 형태로 자기 몸을 배열하느라 삶의 마지막 몇 분을 써버렸을 소니에르가 다시금 놀라웠다.
  소니에르는 제 나이에 맞는 노인으로 보였다. 모든 근육조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걸치고 있던 모든 옷가지들은 벗어서, 마루 위에 단정하게 놓아두었다. 소니에르는 자기 등을 화랑의 긴 축과 정확히 일치시켜 폭 넓은 화랑 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팔과 다리는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나 아이들이 만든 눈 천사처럼 바깥쪽으로 뻗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사지를 벌린 사람처럼 보였다.
  총알이 살을 뚫고 지나간 듯 갈비뼈 바로 아래에는 피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바닥에 흘러내린 양이 적은 것을 보니, 놀랍게도 거의 피를 흘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니에르의 왼쪽 집게손가락은 피투성이였다. 자기 손가락을 상처 부위로 쑤셔 넣은 게 틀림없었다. 소니에르는 자신의 피를 잉크삼고 벌거벗은 복부를 캔버스 삼아, 배 위에 기호 하나를 그려놓은 것이다. 오각형의 별 모양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직선이었다.
  ‘별표.’
  소니에르의 배꼽에 중심을 둔 별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는데, 현장을 직접 목격하니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소니에르가 직접 했다.’
  “랭던씨?”
   파슈의 짙은 눈동자가 다시 랭던에게 머물렀다.
  답하는 랭던의 목소리는 거대한 공간의 내부가 텅 빈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것은 별표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기호 중 하나입니다. 기원전 사천 년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을 겁니다.”
  “무엇을 뜻하는 거죠?”
  이런 질문을 받으면 랭던은 항상 망설였다. 하나의 기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얘기한다는 것은 노래가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지 얘기하는 것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미는 달랐다. 미국에서 KKK(Ku Klux Klan) 집단의 하얀 모자는 증오와 인종차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종교적 신념의 의미를 갖는 의복의 하나다.
  “기호를 각기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기본적으로 별표는 이교도의 종교적 기호입니다.”
  파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숭배로군요.”
  “아닙니다.”
  어휘 선택이 더 명확했어야 함을 깨닫고 랭던은 즉시 말을 고쳤다.
  요즘들어, ‘이교도(pagan)'라는 용어는 악마숭배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몰이해다. 이 단어의 어원은 시골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파가누스(paganus)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교도‘는 자연 숭배처럼 오래된 시골풍의 종교를 고집하면서, 기독교에서 볼 때 아직 교화되지 않았거나 교리 따위를 주입받지 않은, 문자 그대로 시골 사람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실 , 시골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두려움은 너무커서, 한 때 시골 사람(villager)을 뜻하던 무해한 단어가 악당(villain)이라는 사악한 영혼을 나타내는 단어를 낳기까지 했다.
  “별표는 자연숭배와 관련된 기독교 이전의 기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세상을 두 개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죠. 신과 여신이 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양이라고도 하죠. 음양이 균형을 잘 이룰 때 세상의 모든 것은 조화를 이룹니다. 균형이 맞지 않으면 혼돈이 생기죠.”
  랭던은 소니에르의 복부를 가리켰다.
  “이 별표는 모든 것의 반쪽인 여자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종교 역사가들이 ‘신성한 여성’ 또는 ‘성스러운 여신’이라고 부르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소니에르 씨 역시 이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소니에르 씨가 자기 배 위에다 여신의 기호를 그렸다는 말입니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랭던은 그렇다고 해야만 했다.
  “가장 구체적으로 해석하자면, 별표는 성애와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기호화한 것입니다.”
  알몸의 시신을 바라보며 파슈는 신음소리를 냈다.
  “초기 종교는 자연의 신성한 질서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여신 비너스와 행성인 비너스, 즉 금성같은 것이었죠. 여신은 밤시간 동안 하늘을 지배했고, 수많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너스,동방의 별, 이슈타르, 아스타르테. 모두 자연과 어머니인 지구와 연결된 강력한 여성형 개념입니다.”
  파슈는 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든 간에 악마숭배라는 개념이 더 마음에 드는 듯 말이다.
  랭던은 별표의 가장 놀라운 의미는 설명하지 않았다. 비너스와 관련된 그래픽의 기원이었다. 천문학도 시절, 8년마다 황도를 가로지르는 금성, 즉 비너스의 자취가 완벽하게 별 모양을 그린다는 것을 배우고 랭던은 기절할 뻔했다. 이 현상을 관찰한 옛날 사람들도 랭던처럼 매우 놀랐고, 비너스와 그 별 모양은 완벽, 아름다움 그리고 성애의 순환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마법 같은 비너스의 매력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리스인들은 올림픽 게임을 조직할 때 비너스의 8년 주기를 도입했다. 현대 올림픽 게임의 스케줄이 여전히 비너스 주기의 절반을 따른다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심지어 오각형의 별 모양이 공식 올림픽 휘장이 될 뻔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조화와 포용이라는 올림픽 게임의 정신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오각형 별은 교차하는 다섯 개의 고리로 바뀐 것이다.
  파슈가 불쑥 끼어들었다.
  “랭던 씨, 저 별은 분명히 악마와 관계가 있습니다. 당신네 미국 공포영화들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습니까?”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맙군, 할리우드.’
  악마 같은 연쇄 살인범 영화에서 오각형 별은 이제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다. 다른 악마부호들과 함께 사탄 추종자들의 아파트 벽에 휘갈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쓰인 기호를 보면, 랭던은 항상 실망스러웠다. 별의 진짜 기원은 아주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본 것과는 달리, 별 모양에 대한 악마적인 해석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별이 상징하는 개념은 수천년을 거치며 왜곡되어 왔지요. 이번 경우에는 유혈 참사에서 쓰였고요.”
  “제가 설명을 잘 따라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랭던은 파슈의 십자형 넥타이 핀을 흘끗 쳐다보았다. 말의 요점을 어떻게 잘 표현해서 이해시켜야 할지 난감했다.
  “교회 말입니다. 반장님. 기호들은 아주 복원력이 강합니다. 하지만 별 모양의 의미는 초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바뀌어 버렸지요. 이교도를 뿌리뽑고 대중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목적으로 바티칸이 캠페인을 벌였는데, 그 일부가 이교도의 신과 여신들에 대한 더러운 캠페인이었습니다. 신성한 상징들을 악한 것으로 둔갑시킨 겁니다.”
  “계속하십시오.”
  “난리통인 시대엔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롭게 출현한 권력은 기존의 기호들을 접수해서, 그 의미를 지워버리기 위한 시도로 두고두고 기존의 기호들을 폄하합니다. 이교도의 상징과 기독교의 상징이 맞붙은 전쟁에서, 이교도가 진 것이죠. 포세이돈의 삼지창은 악마의 갈퀴가 되고, 지혜로운 할머니의 뾰족한 모자는 마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비너스의 별이 악마의 기호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랭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불행하게도, 미국 육군 역시 별 모양의 의미를 오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별 모양은 전쟁을 나타내는 첫쨰 상징이 되어 버렸죠. 모든 전투기에 별을 그려 넣었고, 모든 군 장성들의 어깨에는 별이 달려 있으니까요.”
  ‘사랑과 미의 여신에게 너무한 일이지.’
  파슈는 독수리처럼 펼쳐진 시신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그럼 이 시신의 자세는요? 뭔가 짐작되는 거라도 있습니까?”
  랭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자세는 별 모양과 신성한 여성의 관계를 단지 보강하고 있습니다.”
  파슈의 표정이 흐려졌다.
  “무슨 말씀인가요?”
  “반복입니다. 기호를 반복하는 것은 의미를 강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죠. 소니에르씨는 자기 몸으로 별 모양을 만든 겁니다.”
  ‘별 하나가 좋은 거면, 두 개는 더 좋으니까.’
  매끄러운 머리를 다시 한 번 쓸어 넘기면서, 파슈의 눈은 소니에르의 두 팔과 두 다리, 머리의 다섯 꼭지점을 훑고 지나갔다.
  “흥미로운 분석이군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 저 알몸은?”
  파슈는 늙은 남자의 벌거벗은 몸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듯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소니에르 씨는 왜 옷을 벗었을까요?”
  ‘빌어먹을, 좋은 질문이군.’
  랭던 역시 사진을 본 순간부터 궁금했다. 랭던의 추측은 전라의 육체 역시 성애의 여신인 비너스를 나타내는 것이다. 현대 문화는 남녀의 육체 결합과 비너스의 관계를 많은 부분 지워버리고 있지만, 날카로운 어원학의 눈으로 보면 비니리얼(venereal : ‘성교의 , 성교로 일어나는’의 뜻)이라는 단어에서 비너스의 본래 의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랭던은 여기까지는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파슈 씨, 소니에르 씨가 왜 자기 몸에 기호를 그렸는지, 왜 이런식으로 자기 몸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명백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크 소니에르 같은 분은 별을 여성 신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기호와 신성한 여성의 상관관계는 역사가들이나 기호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자기 피를 잉크로 쓴 것은요?”
  “쓸 수 있는 다른 도구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파슈는 잠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사실 나는 ...... 경찰이 어떤 법정 절차를 따를지를 예상하고 소니에르씨가 피를 사용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
  “이 왼손을 보십시오.”
  랭던은 관장의 창백한 팔을 지나 왼손까지 살펴보았지만 ,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몸을 숙여 들여다보다가, 놀랍게도 관장이 커다란 펠트펜을 꽉 쥐고 있음을 알아챘다.
  “우리가 소니에르 씨를 발견했을 떄 이것을 쥐고 있어습니다.”
  파슈는 랭던을 남겨두고 5,6미터 떨어진 곳에 놓인 이동식 탁자로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여러 전선과 전자기구, 수사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탁자 둘레를 걸으며 파슈가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펜을 잘 아십니까?”
  펜의 상표를 보기 위해 랭던은 더 깊숙이 몸을 숙였다.
  ‘뤼미에르 누아르 스타일.’
  랭던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적외선이나 자외선 같은 불가시(不可視)광선 펜 또는 워터마크 첨필로 알려진 특수 펠트펜은 원래 박물관 사람이나 예술품 복원가, 위조 감식 경찰관들이 고안한 것으로, 물건에 보이지 않는 표시를 해둘 때 사용한다. 부식되지 않는 알코올 바탕의 형광 잉크로 쓰인 첨필은 오로지 불가시광선에서만 보인다. 요즘의 박물관 보수 유지 직원들은 매일매일 박물관을 순찰할 때 이 펜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복원이 필요한 미술품들의 액자에 보이자 않게 V표시를 해둔다.
  랭던이 일어서자, 파슈는 하얀 조명기로 걸어가서 전원을 꺼버렸다. 화랑은 순식간에 어둠에 파묻혔다.
  랭던은 불안했다. 파슈의 몸이 밝은 자주색 조명 아래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파슈는 휴대용 전등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자주색 빛이 안개처럼 파슈를 감싸고 있었다.
  자줏빛으로 눈을 빛내면서 파슈가 말했다.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경찰은 피나 다른 법정 증거를 찾기 위해 범죄 현장을 조사합니다. 이때 불가시광선 조명을 사용하죠. 이제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이 되실 겁니다......”
  파슈는 불쑥 시체의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를 보던 랭던은 놀라 펄쩍 뛰었다.
  자기 앞 마룻바닥에서 빛나고 있는 기묘한 광경을 보았을 때, 랭던의 심장은 무섭게 뛰었다. 관장이 휘갈겨쓴 필기체 글씨가 관장의 몸뚱아리 옆에서 보라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관장이 남긴 마지막 문장을 바라볼수록, 랭던은 오늘 밤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았다.
  문장을 다시 한 번 읽고 난 랭던은 파슈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이죠?”
  파슈의 눈동자가 하얗게 빛났다.
  “선생, 정확하게 그서이 당신이 여기에서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소니에르의 사무실에서는 콜레 부관이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와, 관장의 거대한 책상 위에 설치된 오디오 계기판 위로 몸을 웅크렸다. 콜레는 AKG 헤드폰을 조절하고, 하드 디스크의 녹화 시스템에 붙은 입력 레벨을 살폈다. 모든 시스템은 제대로였다. 마이크는 아무 이상없이 작동하고 있었고, 오디오도 수정처럼 깨끗했다.
  ‘진실의 순간이로군.’
  콜레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미소지으면서 눈을 감은 콜레는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대화랑의 마지막 대화를 즐기는 기분으로 들었다.

7

  생 쉴피스 교회 2층, 성가대의 발코니 왼쪽에는 소박한 방이 있었다. 돌로 된 바닥에 최소한의 가구들만 갖춘 두 칸짜리 방은 지난 10년 동안 상드린 비에유 수녀의 숙소였다. 누군가 물어보면 근처의 수도원이 공식 집이라고 말했을테지만, 수녀는 교회의 조용함을 더 좋아했다. 침대와 전화기, 전기 히터가 있는 2층과 더불어 조용한 교회가 수녀는 편했다.
  교회의 보수 유지 관리자로서, 상드린 수녀는 교회 운영에 비종교적인 모든 일을 총괄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교회의 일반 보수 유지를 비롯해서 보조 인력과 안내원들의 고용 문제,폐관 후의 문단속, 성체 포도주나 성체 빵 같은 필수품 주문도 상드린 수녀의 몫이었다.
  작은 침대에서 자고 있던 수녀는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피곤해하며 수녀는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생 쉴피스 교회의 상드린 수녀입니다.”
  “여보세요? 수녀님.”
  상드린 수녀는 일어나 앉았다.
  ‘대체 몇 시 지?’
  자기 상관인 신부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난 15년간 신부는 한 번도 밤중에 깨운 적이 없다. 신부는 미사가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서 곧장 잠을 청하는 무척 경건한 사람이었다.
  신부는 불안하고 조바심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방금 영향력있는 미국인 주교 한 분께서 전화를 하셨는데, 수녀님도 아시죠? 마누엘 아링가로사 주교라고.”
  “오푸스 데이의 수장 말인가요?”
  ‘물론 그 사람을 알고 있지. 교회에 있는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
  오푸스 데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성장했다. 은총을 입었다고 할 정도로 그 성장은 비약적이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오푸스 데이를 ‘교황의 사적 자치단’으로 승격시킨 1982년 부터였다. 이때 교황은 오푸스 데이의 모든 예배 관행을 승인한 셈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통상 바티칸 은행으로 불리는 ‘종교업무를 위한 바티칸 협회’에 오푸스 데이가 10억 달러에 가까운 돈을 보냈다고 알려진 그해에 오푸스 데이가 승격되었다는 것이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이 돈이 도산 위기에 놓여 있던 바티칸 은행을 구했다고 한다. 눈썹을 몇 번 들어 올림으로써 교황은 오푸스 데이의 창시자를 성인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급행열차에 앉힌 것이다. 죽은 사람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려면 백 년 정도를 기다려야 했지만, 이 경우에는 고작 20년으로 시간을 단축해 버린 것이다. 로마에서 오푸스 데이가 자리매김하는 것이 상드린 수녀는 왠지 의심스럽게만 여겨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를 교황에게 문제삼지 않았다.
  “아링가로사 주교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자기 신도중 한 사람이 오늘 밤 파리에 있다고......”
  신부의 목소리는 불안했다.
  이상한 요청을 듣고 있던 상드린 수녀는 혼란스러웠다.
  “죄송합니다만, 그 오푸스 데이 신도가 교회 방문을 내일 아침까지 미룰 수 없다고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링가로사 주교를 태운 비행기가 벌써 떠났답니다. 주교가 부탁한 신도는 생 쉴피스를 둘러보기를 꿈꿔 왔다는군요.”
  “하지만 낮에 보는 것이 훨씬 좋을 텐데요. 둥근 창을 통과하는 햇살이라든가, 해시계에 드리워진 그림자들, 이런 게 우리 교회를 독특하게 만들잖아요.”
  “수녀님,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오늘 밤 그 신도가 교회 안으로 들어 갈수 있게끔 개인적인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그 사람이 거기로 갈 겁니다. 한 시쯤이라고 하던가? 이십 분밖에 안 남았군요.”
  상드린 수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알겠습니다. 신부님,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신부는 고맙다고 얘기한 뒤 전화를 끊었다.
  어리둥절한 수녀는 온기가 남아 있는 따뜻한 침대에 잠시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잠의 흔적을 떨치려고 애쓰면서, 예순 살 먹은 몸은 쉽게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 한 통은 수녀의 감각을 확실히 깨워 놓았다. 수녀는 오푸스 데이가 항상 불편했다. 육체의 고행이라는 비밀의식을 고수하는 것 외에도 여성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중세 시대나 다름 없었다. 오푸스 데이의 남자 신도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동안에 여성 신도들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남자 신도들의 방을 청소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상드린 수녀는 충격을 받았다. 또 남자들은 짚으로 만든 매트에서 잠을 자지만, 여자들은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잔다고 한다. 여자들은 육체의 고행을 위해 남자들보다 많은 조건을 참아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원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브가 지식의 사과를 한 입 깨물었을 때부터, 여성에게는 영원히 그 빚을 갚아야 할 어두운 운명이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들이 점진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오푸스 데이는 그런 흐름을 바꾸어 놓으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수녀는 부탁을 받은 입장이었다.
  침대에서 다리를 빼내면서 상드린 수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맨발에 닿는 차가운 돌바닥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냉기가 몸을 타고 올라올 때 수녀는 예기치 못한 두려움을 느꼈다.
  ‘여자의 직감?’
  신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상드린 수녀는 자기의 영혼의 고요한 목소리 안에서 평화를 찾는 법을 배워왔다. 하지만 오늘 밤 그 목소리는 수녀를 둘러싼 텅 빈 교회만큼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8

  랭던은 마룻바닥에 휘갈겨 쓴 자줏빛의 글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크 소니에르의 마지막 메시지는 랭던의 상상에서 벗어난, 있을 법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13-3-2-21-1-1-8-5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메시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랭던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별 모양이 악마 숭배와 관련되었을 거라는 파슈의 직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소니에르는 악마라는 표현을 그대로 남긴 것이다.
  파슈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암호해독 요원이 벌써 작업을 마쳤을 겁니다. 우리는 이 숫자들이 소니에르를 죽인 자를 밝혀줄 열쇠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전화 교환국이나 무슨 신분증에 나와 있는 번호일지도 모르죠. 이 숫자들이 뭔가를 상징하고 있습니까?”
  랭던은 숫자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어떤 상징을 도출하려면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니에르가 의도한 바가 있다 해도 랭던에게는 숫자들 모두 무작위로 뽑힌 것 같았다. 감각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상징의 해석 절차를 밟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여기 있는 별 모양과 글자, 숫자들은 모두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도 전혀 다른 별개의 것들로 보였다.
  “랭던 씨가 앞서 단언한 대로, 소니에르의 행위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으로 보입니다...... 여신숭배라든가, 뭐 그런 연장선에 있는 뭔가를 말이죠. 그런데 이 메시지가 어떻게 들어맞는 겁니까?”
  랭던은 파슈의 얘기가 입에 발린 칭찬임을 알고 있었다. 이 기괴한 메시지는 여신숭배라는 랭던의 시나리오와는 조금도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저 구절은 무슨 규탄처럼 보이는데요, 안 그런가요”
  파슈가 말했다.
  랭던은 대화랑에 홀로 갇힌 관장의 마지막 몇 분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관장은 자기가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닥의 글은 논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자기를 살해한 범인에 대한 규탄이라...... 이치에 맞는 것 같군요.”
  “물론 제 직업은 그놈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랭던씨, 하나 물어봅시다. 당신 눈에는 저 숫자들말고, 문자들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 이상합니까?”
  ‘제일 이상한 것?’
  화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안에서 죽어 가는 남자가 자기 몸에 별모양을 그렸다. 바닥에는 이상한 비난의 글을 휘갈겨 놓았다. 이런 장면에서 이상하지 않은 게 무엇이겠는가?
  “드라코 같은? ‘드라코 같은 악마’라는 어휘를 선택한 게 이상해 보이는 군요”
  랭던은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말했다. 기원전 7세기의 무자비한 정치가 드라코를 언급한 것이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드라코 같은? 여기에서 소니에르 씨의 어휘 선택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 같아 보이지 않는데요.”
  파슈의 목소리에는 이제 성급함이 묻어났다.
  파슈의 마음에 어떤 문제들이 들어 있는지 랭던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드라코와 파슈는 서로 사이 좋게 지낼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파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니에르 씨는 프랑스인입니다. 그리고 파리에 삽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남기려고 소니에르 씨는......”
  “영어를 사용했죠”
  반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랭던은 말을 받았다.
  파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니에르가 흠잡을 데 없는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후의 말을 남길 때 왜 영어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랭던은 어깨를 움츠렸다.
  파슈는 소니에르의 복부에 그려진 별을 다시 가리켰다.
  “악마숭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직도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랭던은 이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저 기호와 문자는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분명하게 해줄 수도 있겠군요.”
  시체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선 파슈가 불가시광선 조명등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더 넓게 주위를 비추기 시작했다.
  “자, 지금은요?”
  놀랍게도 미완성의 원이 관장의 몸 둘레에서 빛나고 있었다. 분명히 관장은 누워서, 자기 둘레에 여러 차례 호(弧)를 그렸을 것이다. 원 안에 자기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다.
  순간 번쩍 생각이 나면서 의미가 명료해졌다.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랭던은 숨이 막혔다. 소니에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스케치를 자기 몸으로 묘사한 것이다.
  해부학에서 그 당시의 가장 정확한 그림으로 간주되는 다 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는 세계 도처에서 티셔츠에, 포스터에, 컴퓨터의 마우스패드에 그려진 근대 문화의 상징이다. 이 축복받은 스케치에는 날개를 펼친 독수리처럼 팔다리를 쭉 뻗은 알몸의 남자가 완벽한 원 안에 들어가 있다.
  ‘다 빈치’
  랭던은 전율을 느꼈다. 소니에르의 의도는 명백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관장은 옷을 벗고, 비트루비우스의 이미지대로 자기 몸을 펼쳐 보인 것이다.
  원은 놓쳐 버린 중요한 요소였다. 원은 보호를 나타내는 여성적인 상징이다. 알몸의 남자 둘레에 쳐진 원은 다 빈치의 메시지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알몸의 남자 둘레에 쳐진 원은 다 빈치의 메시지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 이제 질문은 왜 소니에르가 이 유명한 스케치를 모방하려고 했는가였다.
  “랭던 씨, 당신 같은 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흑예술(성서에서 유래된 종교인 기독교나 유대교의 관점에서 보면 신을 통하거나 신을 위한 예술은 백예술이지만, 악마나 사탄을 위한 예술은 흑에술이다.)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아실테죠?”
  랭던은 다 빈치에 관한 파슈의 지식에 놀랐다. 확실히 이 사건이 악마숭배와 관련 있으리라는 반장의 의심을 설명해 주는 면목이기도 했다. 다 빈치는 역사가들에게, 특히 기독교에서는 다루기 힘든 주제다. 다 빈치는 미래를 내다보던 천재였지만 동성애자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신성한 질서를 숭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끊임없이 다 빈치를 신에게 대적하는 죄악의 상태에 처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예술가로서 기이한 괴벽은 악마적 분위기를 풍기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어, 인체 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해 시체를 도굴한다든지, 남들이 읽을 수 없게 글자를 거꾸로 쓴 불가사의한 일기를 간직한다든지 하는 일들이었다. 다 빈치는 자기가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연금술이 있다고 믿었고, 죽음을 지연시킬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개발해 신을 속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다 빈치의 발명품 중에는 끔찍하고, 누구도 결코 상상하지 못한 전쟁 무기와 고문도구들도 있었다.
  ‘오해는 불신을 낳는 법이다.’
  랭던은 생각했다.
  심지어 숨이 멎을 정도의 엄청난 기독교적 작품들마저, 정신의 위선으로 유명하던 이 예술가의 명성을 더 키워 놓았을 뿐이다. 다 빈치는 바티칸에서 돈벌이가 되는 수백 건을 의뢰받아서 기독교적 주제들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의 믿음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사업 수완, 즉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다 빈치는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종종 즐거움을 위해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의뢰인의 손을 콱 깨물기도 했다. 많은 기독교적인 그림들에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기호들, 그러니까 자기 자신만의 믿음에 대한 헌정사나 교회에 대한 미묘한 경멸을 기호로 숨겨 놓은 것이다. 랭던은 영국 런던의 국립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의 비밀생활: 기독교 예술에 나타나는 이교도적 상징주의’라는 주제로 강연한 적도 있다.
  “반장님의 염려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다 빈치는 실제로 흑예술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외적일 정도로 정신적인 인간이었지요. 비록 교회와 끊임없이 투쟁을 했지만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랭던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랭던은 바닥에 있는 메시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그래서요?”
  파슈가 물었다.
  랭던은 신중하게 말에 무게를 실었다.
  “방금...... 소니에르 씨가 다 빈치의 많은 정신적 이념을 공유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현대 종교에서 신성한 여성을 자꾸 배제하려고 하는데에 따른 걱정을 포함해서 말이죠. 단지 현대 교회가 여신을 악마로 둔갑시킨 데 대한 좌절감을 다 빈치의 좌절감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다 빈치의 유명한 그림을 모방해서 말입니다.”
  파슈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그럼 랭던 씨는, 소니에르가 교회를 불구의 성인이자 드라코 같은 악마로 불렀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 의견이 억지스럽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지만, 별 모양은 자기 생각을 어느 정도 지지해 주는 것 같았다.
  “제 말은 소니에르 씨가 여신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만큼 그러한 역사를 지워버리려고 한 집단도 없습니다. 소니에르 씨가 마지막 작별인사로 자기의 깊은 실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실망이라고요? 이 메시지는 실망보다는 분노에 가깝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파슈의 목소리는 적대적으로 들렸다.
  랭던은 인내심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반장님, 반장님은 소니에르가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제 직관을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에 관한 제 나름의 답을 드린 겁니다.”
  “그럼 이것이 교회를 고발하는 얘기란 말입니까?”
  이를 악물고 말해서 그런지, 파슈의 턱은 뻣뻣해 보였다.
  “랭던 씨, 일을 하면서 나는 많은 죽음을 보았소만, 이것 한 가지만은 얘기해 두겠소.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될 때, 피해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모호한 정신적인 진술서를 쓰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뿐일 겁니다.”
  속삭이는 것 같은 파슈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복수, 저는 소니에르 씨가 우리에게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말해 주기 위해 이런 표현을 남겼다고 믿습니다.”
  랭던은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맞지 않다고요?”
  랭던은 지치고 화도 난 상태에서 되받아쳤다.
  “예, 반장님은 분명히 소니에르 씨가 관장실에서 자신이 초대했을 누군가에게 저격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관장은 자기를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고 결론짓는게 이치에 맞습니다.”
  파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십시오”
  “만일 소니에르가 자기를 죽인 사람을 알고 있었다면, 이게 대체 다 뭐란 말입니까? 숫자,기호? 불구의 성인? 드라코 같은 악마? 배에 그려진 별? 모든 것이 다 수수께끼투성이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파슈는 눈살을 찌푸렸다.
  “핵심을 찔렀군요.”
  “주변 환경을 고려해 볼 때, 만일 소니에르 씨가 자기를 죽인 자를 알리고 싶어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을 바닥에 적어 놓았을 겁니다.”
  랭던이 말을 마치자, 이 밤 내내 웃음이라곤 없던 파슈의 입술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해요,정확해.”
  ‘나는 지금 반장의 작업을 목격하고 있다.’
  오디오 장비를 조절하면서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파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콜레 부관은 즐거웠다. 부관인 콜레는 이 같은 순간들이 반장을 프랑스 법 집행의 정점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슈는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것이다.’
  사람을 감언으로 꾀려면 심한 압박 아래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꾀는 이 미묘한 기술은 현대의 법 집행에서는 사라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업무를 수행하면서 침착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파슈는 이런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파슈의 자제력과 인내는 로봇과 비슷했다.
  오늘 밤 파슈가 보인 유일한 감정은 확고한 결의였다. 마치 범인의 체포가 파슈에게 사적인 일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한 시간 전 파슈가 요원들에게 내린 지시는 보통 때와 달리 간결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파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가 자크 소니에르 씨를 죽였는지 알고 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이다. 오늘 밤엔 어떤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떤 실수도 일어나지 않았다.
  용의자의 유죄를 확신하는 파슈의 증거에 콜레는 아직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소의 본능에 의문을 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파슈의 직관은 거의 신기에 가까워 보였다.
  “신이 파슈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파슈의 육감에 따른 아주 인상적인 작전을 본 후에 한 요원이 한 말이다. 만일 신이 있다면, 신의 우선 목록에 파슈의 이름이 들어 있으리라는 것을 콜레도 인정했다. PR이라는 명목하에 다른 관료들도 휴일에 교회에 나가지만, 반장은 그들보다 자주 미사와 고해성사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몇 년 전 파리를 방문한 교황이 관중들과 대면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얻기 위해 파슈는 온힘을 기울였다. 그때 교황과 함께 찍은 사진은 지금도 파슈의 사무실에 걸려 있다. 요원들은 은밀히 파슈를 ‘교황의 황소’라고 불렀다.
  최근 몇 년 동안 파슈가 공인으로서 보인 자세중, 아동 성추행에 관한 가톨릭 사제들의 스캔들에 대한 반응은 콜레에게는 꽤 뜻밖이었다. 파슈는 단언했다.
  “이런 사제들은 두 번씩 교수형에 처해야 해! 한 번은 어린이에게 저지른 죄 때문이고, 또 한번은 가톨릭 교회의 이름에 먹칠을 한 대가야.”
  콜레는 반장을 더 화나게 한 것이 후자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노트북 컴퓨터를 들여다보면서, 콜레는 오늘 밤 여기서 해야 할 나머지 절반의 일에 착수했다. GPS 추적 시스템을 이용하는 일이었다. 컴퓨터 스크린에는 루브르 박물관 보안사무실에서 보내준 드농 관의 세세한 구조 모형도가 떠 있었다. 미로 같은 화랑들과 복도를 추적하던 콜레의 눈이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대화랑의 깊숙한 중심부에서 조그마한 붉은 점이 깜박였다.
  ‘여기 마크가 있군.’
  파슈는 오늘 밤 자기 먹잇감을 잘 가둬 놓고 있었다. 현명하게도 말이다. 그리고 로버트 랭던은 자신이 멋진 손님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9

  랭던과 대화하기 위해 브쥐 파슈는 휴대 전화기를 꺼버렸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이 전화기는 파슈의 주문과 반대로 쌍방향 라디오 기능까지 갖춘 고급 모델이라서, 요원 한 명이 파슈를 호출했다.
  “반장님?”
  휴대 전화기가 무전기처럼 지직거렸다.
  화가 난 파슈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비밀 감시작업을 방해받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도 없었다.
  파슈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랭던을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
  그리고 허리띠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어 라디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왜?”
  “반장님, 암호 해독부서에서 나온 요원이 도착했습니다.”
  파슈의 분노는 순간 가라앉았다.
  ‘암호 해독가?’
  타이밍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반가운 소식이었다. 마룻바닥의 수수께끼 같은 소니에르의 글을 발견하고 나서, 파슈는 범죄 현장의 전체 사진을 암호 해독부의 컴퓨터에 올렸다. 빌어먹을, 소니에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지 누군가 얘기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암호 해독가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은 누군가 소니에르의 메시지를 거의 풀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바쁘네. 그 암호 해독가에게 지휘 본부에서 기다리라고 하게. 일이 끝나면 내가 직접 그 남자를 만나볼 테니까.”
  파슈는 반론의 여지가 없게 되받았다.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파슈의 말을 고쳤다.
  “여자입니다. 느뵈 요원입니다.”
  이 말에 파슈는 불쾌해졌다. 소피 느뵈는 DCPJ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다. 이 젊은 파리지엥 해독가는 영국 로열 홀로웨이에서 암호 표기법을 공부했다. 2년 전 더 많은 여성을 경찰 인력에 포함시키려는 해당 부처의 의도에 따라, 느뵈는 파슈에게 은근슬쩍 떠넘겨진 것과 같은 존재였다.
  경찰본부의 이런 계속적인 간섭은 부처를 약화시킬 뿐이라고 파슈는 주장해왔다. 여자는 경찰 업무에 필요한 체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현장에서 일하는 남자 요원들을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파슈가 두려워하던 대로 느뵈는 그 누구보다 가장 심란한 존재였다.
  서른두 살의 느뵈는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끈기가 있었다. 영국의 새로운 해독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상관이자 베테랑인 프랑스 암호 해독가들을 끊임없이 화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파슈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피할 수 없는 우주의 진리다. 중년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사무실에서, 매력적인 젊은 여성은 남자들의 눈을 업무에서 떼놓게 만들기 일쑤였다.
  전화기 속의 남자가 말했다.
  “느뵈 요원이 당장 반장님과 이야기해야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막으려고 해봤지만 , 벌써 그쪽 화랑으로 갔습니다.”
  파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움찔했다.
  “말도 안 돼! 이건 분명히......”
  순간, 로버트 랭던은 브쥐 파슈가 뇌출혈을 일으킨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말하는 도중에 턱의 움직임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파슈의 불타는 눈동자는 랭던의 어깨 너머의 뭔가에 사로잡힌 듯 보였다. 랭던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등 뒤에서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랭던은 돌아서서 젊은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길고 유연한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걸음걸이는 확신에 차 있었다. 검은색 레깅스 위에 무릎까지 오는 크림색스웨터를 입은 여자는 매력적이었다. 서른 살 정도로 보였다. 여자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는 포도주 빛깔의 머리카락이 어깨에 아무렇게나 늘어뜨려져 있었다. 하버드 기숙사의 벽을 동경하는 히피풍의 골빈 금발 미인들과는 달리, 자신감을 온몸에서 풍기며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과 진실성을 갖춘 건강한 미인이었다.
  놀랍게도 여자는 곧장 랭던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랭던 씨, 저는 DCPJ의 암호 해독부서에서 나온 느뵈 요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프랑스식 영어 억양으로 여자는 말을 부드럽게 굴렸다.
  랭던은 여자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여자의 강한 시선이 자신에게 잠시 꽂히는 것을 느꼈다. 여자의 눈동자는 날카롭고 깨끗한 올리브그린색 이었다.
  파슈는 질책의 말을 날리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자는 재빨리 돌아서서 파슈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다.
  “반장님, 방해했다면 용서하세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파슈는 침까지 튀기며 소리를 질렀다.
  랭던에게 예의를 갖추려는 것처럼 소피는 계속 영어로 이야기했다.
  “전화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반장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고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꺼놓았지. 랭던 씨와 얘기 중이었어.”
  파슈가 핀잔을 주었다.
  “그 숫자 코드를 해독했어요.”
  소피는 단조롭게 말했다.
  랭던은 한줄기 흥분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기호를 풀었다고?’
  파슈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직 태도를 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설명드리기 전에, 랭던씨에게 전해 드릴 급한 메시지가 있어요.”
  파슈의 표정이 짙은 우려를 드러냈다
  “랭던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피는 랭던에게로 돌아섰다.
  “미국 대사관에 연락해 보세요. 랭던 씨, 미국에서 당신에게 보낸 메시지가 거기 있답니다.”
  랭던은 코드에 대한 흥분보다 갑작스러운 걱정이 들어 놀랐다.
  ‘미국에서 보낸 메시지?’
  누가 연락을 해왔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의 동료 중 단지 몇 명만이 랭던이 파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슈의 넓적한 턱이 뻣뻣하게 굳었다. 의심스럽다는 듯 파슈가 물었다.
  “미국 대사관? 랭던씨가 여기 있는 것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지?”
  소피는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히 대사관에서 랭던 씨 호텔에 전화를 했을 테고, 호텔 안내인은 DCPJ요원이 랭던 씨를 데려갔다고 얘기했겠지요.”
  파슈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대사관에서 DCPJ 암호부서에 연락한 거야?”
  “아닙니다. 반장님. 반장님에게 연락하려고 DCPJ의 교환국에 제가 전화 했을때, 교환국에서 랭던씨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반장님을 만나면 전해달라고 제게 부탁하던걸요.”
  혼란스러워하는 파슈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파슈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소피는 이미 랭던을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소피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뭔가를 의도하는 시선으로 랭던에게 건넸다.
  “랭던 씨, 이건 당신네 대사관의 메시지 서비스센터 전화번호예요. 가능하면 빨리 전화해 달라고 했어요. 제가 반장님게 코드를 설명하는 동안 전화를 걸어 보시죠.”
  랭던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파리를 나타내는 지역번호 뒤에 번호가 몇 개 더 적혀있었다. 랭던은 이제 걱정스러웠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전화기가 어디에 있죠?”
  소피가 스웨터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를 꺼내자 파슈가 손을 저었다. 파슈는 막 폭발하려는 베수비오 화산처럼 보였다. 소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반장은 자기 휴대 전화기를 내밀었다.
  “이 라인이 안전합니다. 랭던 씨, 이걸 사용하십시오.”
  젊은 여자에 대한 파슈의 분노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랭던은 반장의 전화기를 받았다. 파슈는 즉시 소피를 대여섯 걸음 끌고 가서, 쉰 목소리로 힐문하기 시작했다. 랭던은 반장을 더욱더 혐오하면서 두 사람의 이상한 대결에서 시선을 거두고 전화기를 들었다. 소피가 건네준 종이를 확인하며 랭던은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랭던은 대사관 교환원의 목소리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어떤 전화기의 자동응답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더구나 테이프에 녹음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바로 소피 느뵈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소피 느뵈입니다. 저는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만......”
  당황해서 랭던은 소피를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만, 느뵈 양? 당신이 제게 준 것은......”
  랭던의 혼란을 예상이나 한 듯 소피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니예요. 맞는 번호예요. 대사관은 자동 메시지 시스템이더군요. 당신에게 남겨진 메시지를 들으려면 접속 코드를 눌러야 할 거예요.”
  랭던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가 드린 종이에 세 자리 숫자가 있죠? 바로 그거예요.”
  이 이상한 실수를 설명하려고 랭던이 입을 여는 순간, 소피의 눈빛이 절박하게 빛났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수정처럼 투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묻지 마세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랭던은 종이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454’
  자동응답기에서 흘러나오던 소피의 인사말은 즉시 끊어졌다. 그리고 기계음으로 된 프랑스어 안내가 들렸다.
  “새로운 메시지가 한 개 있습니다.”
  분명이 이 454라는 번호는 소피가 집 밖에 있을때, 집 전화기에 남긴 메시지를 확인할 때 필요한 원거리 접속 코드였다.
  ‘내가 저 여자에게 남겨진 메시지를 듣게 되는 건가?’
  테이프가 뒤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테이프가 멈추고,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랭던은 귀를 기울였다.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소피의 목소리였다.
  메시지는 두려움에 찬 속삭임으로 시작했다.
  “랭던 씨, 이 메시지에 반응하지 마세요.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하세요. 지금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제 지시를 정확하게 따르세요.”

10

  사일래스는 스승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준 검은색 아우디 승용차 안에 앉아서, 위대한 생 쉴피스 교회를 내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설치된 조명을 받고 있는 교회의 두 종탑이 기다란 건물 위로 충실한 보초처럼 솟아 있었다. 양쪽 측면에는 아름다운 야수의 갈비뼈처럼 매끄러운 버팀목들이 그림자 속에서 줄지어 있었다.
  ‘미개인들이 우리의 쐐기돌을 감추는 데 신의 집을 이용하다니.’
  환각과 기만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조직의 명성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사일래스는 쐐기돌을 찾아서 스승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면 오래 전에 조직이 충실한 신자들에게서 빼앗긴 것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오푸스 데이를 얼마나 더 강하게 만들 것인가?’
  생 쉴피스 교회 앞 공터에 아우디를 주차시키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사일래스는 숨을 토해냈다. 방금 전에 행한 육체 고행으로 등이 아팠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푸스 데이가 자기를 구원하기 전에 겪던 삶의 고통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아직도 그 기억들은 사일래스의 영혼을 찾아왔다.
  사일래스는 자신에게 주문했다.
  ‘증오를 놓아라. 너를 짓밟고 간 자들을 용서해라.’
  생 쉴피스 석탑을 올려다보면서 사일래스는 떠밀려 오는 익숙한 기억과 싸워야 했다. 그 기억들은 종종 시간을 거슬러서, 젊은 시절의 세계나 다름없던 감옥에 사일래스를 가둬 놓았다. 지옥과도 같던 그곳의 기억들은 바로 눈앞의 일처럼 되살아났다. 썩어빠진 양배추 냄새, 시체와 오줌똥에서 나는 악취, 피레네 산맥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에 맞서 희망을 잃은 자들의 울음소리와 잊혀진 자들의 가냘픈 흐느낌.
  ‘안도라.’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황량하고 버려진 국가다. 돌로 만들어진 감방에서, 덜덜 떨며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던 사일래스는 구원을 받았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빛은 천둥이 지나간 후에 찾아온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사일래스란 이름은 본명이 아니었다. 사일래스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집을 떠났다. 덩치 큰 부두 노동자이던 사일래스의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있었고, 아들이 알비노로 태어나자 아내를 패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끄러운 모습을 아내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아들이 엄마를 변호하고 나서면, 아들 역시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어느 날 밤, 심하게 얻어맞은 엄마는 깨어나질 못했다. 엄마와 시신 위에 서서 소년은 이런 일의 근원이 된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어떤 악마가 소년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소년은 부엌으로 걸어가서 식칼을 집어들었다.
취해서 자고 있는 아버지의 방으로 최면에 걸린 듯 다가가, 한마디 말도 없이 소년은 뒤에서 아버지를 찔렀다. 아버지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대며 데굴데굴 굴렀지만, 아들은 방이 조용해 질때까지 찌르고 또 찔렀다.
  소년은 집을 떠났다. 그러나 마르세유의 길거리도 편한 곳이 아니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기이한 외모는 떠도는 젊은 부랑자들 틈에서도 소년을 외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버려진 공장 지하에서 혼자 지내며 부두에서 훔친 과일이나 날생선을 먹으며 살아야 했다. 소년의 유일한 친구는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너덜너덜한 잡지들이었고, 그런 잡지들을 통해 스스로 읽는 법을 배웠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였다. 소년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은 다른 부랑자가 소년을 조롱하면서 소년의 음식을 훔치려고 했다. 소년은 그 부랑자를 죽을 만큼 구타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소년의 몸을 떼어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당국은 소년에게 최후 통첩을 내렸다. 청소년 감옥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해안을 따라 툴롱까지 내려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엔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차 두려워하는 시선으로 변했다. 소년은 힘센 젊은이로 자랐다. 사람들은 몹시 놀란 눈으로 젊은이의 허연 피부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유령 같아.”
  “악마의 눈을 가진 유령이야.”
  청년도 자신이 유령처럼 여겨졌다. 투명하고 ......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떠도는 ......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열여덟 살 때, 어느 항구 마을에서였다. 화물선에서 햄 통조림 한개를 훔치려다가 선원 두 명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년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두 선원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청년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공포와 증오에 대한 기억이 깊은 곳에서 괴물처럼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년은 맨손으로 선원 한 명의 목을 부러뜨렸고, 다른 선원은 때마침 도착한 경찰 덕분에 비슷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두 달 후, 청년은 쇠고랑을 차고 안도라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알몸으로 추위에 떠는 청년을 간수들이 데리고 들어서자 감방의 다른 죄수들이 조롱했다.
  “네 놈은 유령처럼 허옇구나.”
  “저 유령을 좀 봐! 저놈의 유령은 벽을 그대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12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청년의 영혼과 육체는 스스로 투명해졌다고 느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나는 유령이다.’
  ‘나는 무게가 전혀 없다.’
  ‘나는 유령이다...... 유령처럼 창백하고...... 홀로 세상을 떠도는 유령.’
  어느 날 밤, 유령은 다른 감방 죄수들의 비명에 잠을 깼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자고 있는 방바닥을 흔드는 건지, 어떤 거대한 손이 돌로 만들어진 감방의 회벽을 흔드는 건지 유령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어섰을 때, 커다란 둥근 돌이 유령이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로 떨어졌다.돌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니 흔들리는 벽에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 너머로 지난 10년 동안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달이었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좁은 갱도를 기어서 바깥세상으로 비틀비틀 나아갔다. 황량한 산 옆자락을 구르고 굴러서 숲으로 달아났다. 유령은 굶주림과 피로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밤새도록 달렸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령은 숲 개간지에서 기차가 풀을 밟고 지나간 자국을 보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 바퀴자국을 따라갔다. 빈 화물 운송칸을 발견하고 은신처 겸 휴식을 취하기 위해 기어들었다. 잠이 깼을 때 기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잤지? 얼마나 멀리 온 거지?’
  뱃속의 고통이 커져갔다.
  ‘난 죽는걸까?’
  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시 깼을 때는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때리며, 화물칸에서 그를 끌어내고 있었다. 피를 흘리면서 유령은 음식을 찾아 작은 시골마을의 변두리를 어슬렁거렸다. 마침내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의식을 잃고 길가에 쓰러졌다.
  서서히 빛이 다가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죽어 지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루? 사흘? 상관없었다. 침대는 구름처럼 부드러웠다. 주위의 공기는 양초들 때문에 밝고 달콤했다.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 있다. 돌은 옆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너는 다시 태어났다.”
  유령은 자다가 깨어났다. 안개가 의식을 감싸고 있었다. 유령은 결코 천국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기를 지켜보고 계셨다. 침대 옆에는 음식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먹었다. 뼈에 살이 다시 붙는 것 같았다. 또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예수님은 여전히 웃으며 내려다보다가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너는 구원되었다. 내 길을 따른 이들은 축복받은 이들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를 선잠에서 깨어나게 만든 것은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유령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소리 나는 곳으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부엌으로 들어섰을 때, 덩치 큰 남자가 작은 남자를 때리는 것이 보였다.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유령은 큰 남자를 붙잡아 벽에다 내팽개쳤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와 버티고 서 있는 유령을 남겨두고 덩치 큰 남자는 도망쳐 버렸다. 사제의 코뼈는 심하게 주저앉았다. 유령은 피투성이가 된 사제를 안고서 소파로 옮겼다.
  사제는 서툰 프랑스어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의 친구여, 교회 헌금은 도둑들을 유혹하는 법입니다. 자면서 프랑스어를 하던데, 스페인어도 할 줄 압니까?”
  유령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사제는 계속해서 서툰 프랑스어로 물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가 들은 것이라곤 간수들의 조롱이 전부였다.
  사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내 이름은 마누엘 아링가로사 입니다. 마드리드에서 온 선교사지요. 신의 사업을 위해 교회를 지으러 이곳에 왔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유령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오비에도라고, 스페인 북부 지역입니다.”
  “제가 어떻게 여기에?”
  “어떤 사람이 문간에 당신을 두고 갔습니다. 당신은 아팠어요 제가 당신을 보살폈습니다. 여기에 꽤 오랫동안 있었지요.”
  그는 자기를 돌봐준 젊은 사람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친절을 받는다는게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사제는 맞아서 터진 입술을 어루만졌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접니다. 친구여.”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를 둘러싼 세계가 좀더 분명해진 것 같았다. 유령은 침대 위에 걸린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십자가는 자기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 존재에 마음이 놓였다. 일어나 앉아서,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오려진 신문을 보고 유령은 깜짝 놀랐다. 기사는 1주일 전 것으로 프랑스어로 씌어 있었다. 기사를 읽고 난 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문은 피레네 산맥에서 발생한 지진이 감옥 시설을 파괴했고, 그 결과 위험한 많은 죄수들이 달아났다는 내용을 싣고 있었다.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저 사제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유령이 느낀 감정은 한동안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부끄러움, 죄의식, 이런 감정들이 잡힐 것이라는 두려움과 함께 밀려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행동 지침서입니다.”
  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본 유령은 깜짝 놀랐다.
  젊은 사제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웃고 있었다. 서툰 솜씨로 코에 붕대를 싸매고 들어온 사제는 낡은 성경책을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서 프랑스어로 된 성경책을 찾았습니다. 읽을 부분은 표시해 두었어요.”
  16장.
  성서 구절은 사일래스라는 죄수에 관한 얘기였다. 두들겨 맞고 발가벗겨진 채 감방에 누운 사일래스는 신에게 찬송가를 불렀다. 26절에 이르렀을 때, 유령은 충격을 받았다.
  ‘...... 그리고 엄청난 지진이 있었다. 감옥의 기반이 흔들리고 모든 문이 열렸다.’
  유령은 사제를 뚫어지게 보았다.
  사제는 따뜻하게 웃었다.
  “친구여, 이름이 없다면 지금부터 당신을 사일래스라고 부르겠습니다.”
  유령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래스. 살을 부여받은 것이다.
  ‘내 이름은 사일래스다.’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교회를 지으려면 힘이 있어야지요.”
  지중해 상공 6킬로미터 위에서는 승객들이 불안을 느낄 정도로, 알이탈리아 항공 1618편이 난기류에 들썩이며 날고 있었다. 하지만 아링가로사 주교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주교는 오푸스 데이의 앞날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파리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 사일래스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스승은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했다.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스승은 설명했다.
  “이건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요. 요즘 전자통신은 우리 대화를 엿들을 수도 있소. 그 결과는 당신에게 재앙이 될 것이오.”
  스승이 옳다는 것을 아링가로사는 알고 있었다. 스승은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아링가로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적은 없지만, 복종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스승은 매우 비밀스러운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조직의 고위직 인사 네 사람의 이름을!’
  이 사건은 스승이 놀라운 영광을 가져다줄 진정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주교에게 확신시켜 준 일 중 하나다.
  스승은 아링가로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교, 모든 준비는 다 마쳤소. 내 계획이 성공하려면, 요 며칠 간 사일래스가 오직 나에게만 대답하게 해야 하오. 그리고 사일래스와 주교,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마시오. 나는 다른 안전한 채널을 통해서 사일래스와 연락할 것이오.”
  “사일래스를 존중해 주실 겁니까?”
  “신념을 가진 사람은 마땅히 최고의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소.”
  “훌륭하십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사일래스와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신분과 사일래스의 신분, 그리고 내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오.”
  “투자?”
  “주교, 만일 일의 진전을 세세하게 알고 싶은 당신의 열망 때문에 자칫 당신이 감옥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주교는 내게 돈을 지불하지 못할 것이오.”
  주교는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우리의 열망은 한 가지니까요. 성공을 기원합니다.”
  ‘이천만 유로.’
  이제 비행기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주교는 생각했다. 이 액수는 미국 달러 가치와 거의 비슷한 금액이다.
  ‘아주 엄청난 것의 대가치곤 푼돈이지.’
  스승과 사일래스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력하게 들었다. 돈과 신념은 강력한 동기유발 요인이다.

11

  “숫자로 된 농담? 소니에르 씨의 기호에 대한 자네의 해석이라는 것이, 일종의 숫자 장난일 뿐이란 말인가?”
  브쥐 파슈는 불신으로 가득 차서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소피 느뵈를 노려보았다.
  파슈는 이 여자의 설명을 전적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허락 없이 주제넘게 참견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소니에르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기호가 그저 숫자로 된 장난질일 뿐이라고 파슈를 설득하려는 것이다.
  소피는 빠른 프랑스어로 설명했다.
  “이 기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간단한 거예요. 자크 소니에르는 우리가 즉시 꿰뚫어볼 것을 알았을 거에요. 여기 해독한 내용이예요.”
  그녀는 스웨터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파슈에게 건넸다.
  파슈는 종이를 보았다.
  1-1-2-3-5-8-13-21
  “이게 다인가? 자네가 한 것이라곤 숫자를 커지는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 뿐이잖은가?”
  소피는 이 상황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일 줄 아는 배짱이 있었다.
  “정확해요.”
  파슈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끓는 것처럼 낮아졌다.
  “느뵈 요원, 자네가 이걸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난 도통 모르겠네. 그러니 빨리 알아듣게 얘기해봐.”
  파슈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서 있는 랭던에게 근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미국 대사관에서 온 메시지를 듣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랭던의 어두운 표정으로 보아, 별로 좋은 내용은 아닌 모양이라고 파슈는 생각했다.
  “반장님 손에 들고 있는 숫자들의 순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학 수열이예요.”
  소피의 목소리는 위험할 정도로 불손했다.
  파슈는 유명하다고 할 정도의 수학 수열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소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파슈의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소피는 말했다.
  “이것은 피보나치 수열이라는 거예요. 이 수열에서는 한 숫자가 그 앞의 숫자 두개를 더한 합과 같아요.”
  파슈는 숫자들을 관찰했다. 각각의 숫자는 정말로 앞의 숫자 두 개를 더한 합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소내에르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는 13세기에 이 숫자들의 배열을 창조했어요. 소니에르 씨가 마룻바닥에 적은 모든 숫자들이 피보나치의 유명한 수열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예요.”
  파슈는 잠깐 소피를 응시했다.
  “좋아, 만일 우연이 아니라면, 자크 소니에르 씨가 왜 이 수열을 선택했는지 설명할 수 있겠어?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거지? 대체 이 수열은 무슨 의미란 거야?”
  소피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게 요점이예요. 이것은 가장 간단한 암호로 된 농담이라고요. 유명한 시에서 몇 마디 골라낸 뒤에, 다시 아무렇게나 섞어서 누군가 그 시를 알아보는지 시험하는 거예요.”
  파슈가 위협이라도 하듯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파슈의 얼굴과 소피의 얼굴이 마주한 거리는 불과 10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만족스러운 설명을 가져온 줄 알았는데.”
  소피의 부드러운 얼굴이 앞으로 기울수록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장님, 저는 오늘 밤 여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크 소니에르 씨가 반장님과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게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분명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저희 부장님께 반장님은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구두를 돌려서 왔던 길로 걸어나갔다.
  기절할 것 같은 기분으로 파슈는 소피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여자가 지금 제정신이야?’
  소피 느뵈는 지금 막 ‘전문적 자살’을 다시 정의내린 것이다.
  파슈는 랭던을 향해 돌아섰다. 랭던은 아직도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저 주의 깊게 들으면서 아까보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미국 대사관.’
  브쥐 파슈는 많은 것을 경멸했다. 그 중에서도 미국 대사관만큼 불쾌한 것이 없었다.
  파슈와 미국 대사관은 정기적으로 싸움을 벌이는 편이었다. 싸움은 프랑스를 방문 중인 미국 사람들에 대한 법 집행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마약을 소지한 미국 교환학생들. 미성년을 상대로 매춘을 구하는 미국 사업가들, 물건을 훔치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미국 관광객들, 이런 사람들을 DCPJ는 거의 매일 잡아들이고 있었다. 법적으로 미국 대사관은 프랑스의 법 집행에 끼어들어 유죄를 받은 자기네 시민들을 인도받을 수가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고작해야 손목 한 대 맞으면 그만이었다.
  ‘사법경찰의 거세.’
  파슈는 이렇게 불렀다. 최근 <파리 마치> 신문에 파슈를 미국인 범죄자를 물어뜯으려는 경찰견으로 묘사한 만화가 게재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파슈는 미국인에게 닿 지 못했다.미국 대사관에 사슬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파슈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오늘은 아니야. 너무 많은 것이 걸려 있어.’
  그 순간 로버트 랭던이 전화를 끊었다. 랭던은 어디가 아파 보였다.
  “괜찮습니까?”
  파슈가 물었다.
  랭던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서 나쁜 소식이 온 모양이군.’
  파슈는 휴대 전화기를 돌려받으면서 랭던이 땀을 약간 흘리는 것을 보고 짐작했다.
  이상한 표정으로 파슈를 바라보면서 랭던은 말을 더듬거렸다.
  “사고가...... 친구가...... 아침 일찍 집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랭던의 얼굴에 떠오른 충격이 진짜라는 것을 파슈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뭔가가 있었다. 이 미국인의 눈동자에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 참 유감입니다.”
  파슈는 랭던을 좀더 관찰하며 말했다. 그리고 화랑 안의 관람용 의자를 가리켰다.
  “좀 앉으시겠습니까?”
  랭던은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러다가 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멈춰섰다.
  “사실은 화장실에 좀 갔으면 합니다.”
  파슈는 속으로 찡그렸다.
  “화장실이라, 물론입니다. 몇 분간 쉬었다가 하지요.”
  그리고 그들이 들어왔던 쪽의 긴 복도를 가리켰다.
  “화장실은 광장의 사무실 쪽으로 가다 보면 저 뒤에 있습니다.”
  랭던은 망설였다. 그리고 대화랑의 다른 쪽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끝에 더 가까운 화장실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랭던의 말이 옳다는 것을 파슈는 깨달았다. 그들은 대화랑을 따라 쭉 걸어 내려와 3분의2 정도되는 지점에 있었는데, 대화랑의 막다른 끝에 화장실 두 개가 있었다.
  “같이 가드릴까요?”
  벌써 화랑의 안쪽으로 움직이면서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잠시 혼자 있고 싶군요.”
  파슈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랭던이 걸어가는 길은 막다른 곳이고, 대화랑의 유일한 출구는 그들이 들어온 입구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소방법에  따르면 비상 공간의 확보를 위해 여러 개의 비상계단을 두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소니에르가 비상 시스템을 작동 시켰을때 모든 비상계단은 자동으로 잠겨 버렸다. 지금은 시스템이 다시 설정되어, 비상계단은 모두 풀렸지만, 그게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외부로 통하는 문이 열리게 되면 화재 경보기가 울리도록 되어 있었고, 또 DCPJ 요원들이 문 밖을 지키고 있었다. 파슈 모르게 랭던이 루브르를 떠나는 일은 불가능했다.
  “저는 잠시 소니에르 씨의 사무실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그곳으로 오십시오. 랭던 씨 의논해야 할 것이 더 있으니까요.”
  어둠속으로 사라지면서 랭던은 조용히 알았다는 뜻을 전했다.
  파슈는 랭던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화난 걸음으로 걸어갔다. 출입구에 이르러서는 다시 바닥을 기어서 대화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홀을 가로질러 지휘 본부가 차려진 소니에르의 사무실로 폭풍처럼 들어갔다.
  “누가 소피 느뵈를 이 건물에 들여보내라고 승인했나?”
  파슈는 고함을 질렀다.
  콜레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바깥을 지키고 있는 우리 요원에게 느뵈 요원이 암호를 풀었다고 말했답니다.”
  파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느뵈는 갔나?”
  “반장님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먼저 나갔네.”
  파슈는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았다. 분명 소피는 나가는 길에 여기 들러서 다른 요원들과 잡담할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파슈는 소피가 건물을 나가기 전에, 중간층에 있는 요원에게 연락해 소피를 붙잡아 데려오라고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파슈는 잘 알고 있었다. 하고싶은 말이란 그저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말뿐이라는 것을 ...... 오늘 밤 그는 정신이 몹시 산란했다.
  ‘느뵈 문제는 나중에 다루자.’
  그녀를 해고시키리라 마음먹으면서 파슈는 자신에게 말했다.
  파슈는 소피를 마음에서 몰아내며 소니에르의 책상에 서 있는 기사의 모형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 뒤 콜레에게 돌아섰다.
  “그를 찾았나?”
  콜레는 짧고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북 컴퓨터를 파슈 쪽으로 돌렸다. 건물 도안 위에서 ‘화장실’이라고 표시된 방안에서 빨간 점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파슈는 말했다.
  “좋아. 나는 전화할 곳이 있네. 화장실에 있는 랭던을 확실히 지키고 있게.”

12

  대화랑의 끝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로버트 랭던은 현기증을 느꼈다. 소피의 전화 메시지가 마음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가리개 같은 이탈리아 그림들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는 화랑끝에는, 화장실임을 알리는 국제 부호인 막대인간 그림의 조명 표시등이 켜져 있었다.
  남자용 문을 열고 들어간 랭던은 화장실의 불을 켰다.
  화장실은 비어 있었다.
  세면대로 걸어간 랭던은 정신을 차리려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강렬한 형광등이 화장실 바닥의 타일을 비추고, 암모니아 냄새가 풍겼다. 종이 수건을 잡아당기는 순간, 랭던 뒤에서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랭던은 돌아섰다.
  두려움에 가득 찬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소피 느뵈가 들어왔다.
  “오, 하느님! 다행스럽게도 여기로 왔군요. 우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DCPJ의 암호 해독요원인 소피 느뵈를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랭던은 세면대 옆으로 비켜섰다. 몇 분 전만 해도 랭던은 그녀가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전화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소피 느뵈가 정직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이 메시지에 반응하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하세요. 당신은 지금 위험에 처해 있어요. 제 지시에 따라 그대로 움직이세요.”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랭던은 소피의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전화 메시지가 시키는 대로 랭던은 파슈에게 사고를 당한 고향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 뒤에 대화랑 끝에 있는 화장실을 쓰겠다고 말했다.
  소피는 화장실로 서둘러서 되돌아오느라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며 랭던 앞에 서 있었다. 형광등 아래, 부드러운 용모에서 뿜어나오는 소피의 강인한 기운이 랭던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소피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르누아르의 초상화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베일로 가려진 듯하지만 뚜렷하고, 신비함을 가득 담은 듯하지만 대담함이 함께 어우러진......
  여전히 숨을 가다듬으며 소피가 말했다.
  “랭던 씨, 당신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당신이 비밀 감시작업하에 있다는 것을요. 당신은 감시받고 있어요.”
  소피의 영어 억양은 타일 벽에 반사되어 공허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 왜?”
  전화에서 소피는 이미 그에게 설명했지만, 그는 직접 듣고 싶었다.
  “파슈가 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당신을 점찍고 있거든요.”
  소피는 랭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 말은 랭던을 바짝 긴장시켰지만, 우스꽝스럽게만 들렸다. 소피의 말에  따르면, 오늘 밤 랭던이 루브르까지 불려 온 까닭은 기호학자여서가 아니라 사건의 용의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랭던은 부지중에 비밀 감시작업이라고 불리는 DCPJ가 선호하는 심문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비밀 감시작업이란 경찰이 용의자를 범죄 현장으로 조용히 불러 인터뷰하면서, 용의자의 신경이 불안정해져 실수로 자신이 범인임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속임수였다.
  “당신 재킷의 왼쪽 주머니를 보세요. 경찰이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거예요.”
  ‘내 주머니를 보라고?’
  무슨 싸구려 마술 속임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한번 보세요.”
  랭던은 당혹해하며,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트위드 재킷의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제기랄 뭘 기대한 거지?’
  혹시 소피란 저 여자가 미친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손가락에 뭔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작고 단단한 것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조그마한 물체를 끄집어낸 랭던은 그것을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손목시계의 배터리만한 크기의 단추처럼 생긴 금속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무슨......?”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추적장치예요. DCPJ가 모니터하는 GPS위성으로 그 위치를 끊임없이 전송하는 거죠. 사람들의 위치를 모니터할 때 그 장치를 써요. 지구 어디에 있든 60센티미터 범위 내 위치를 알려주니까요. 경찰이 당신에게 목줄을 매어 둔거나 마찬가지예요. 호텔로 당신을 데리러 간 요원이 방을 나서기 전에 그 주머니에 슬쩍 떨어뜨렸을 거예요.”
  랭던은 호텔 방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방을 나서기 전에 DCPJ요원이 공손하게 트위드 재킷을 랭던에게 내밀며 말했었다.
  “밖은 춥습니다. 랭던씨, 파리의 봄은 당신네 노래 가사에서 떠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답니다.”
  랭던은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재킷을 입었다.
  소피의 올리브색 시선은 예리했다.
  “그 추적 장치에 대해서는 일부러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파슈가 보는 앞에서 당신이 주머니를 뒤질까봐 걱정되었거든요. 당신이 그것을 찾아 냈다는 것을 파슈는 모를 거예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랭던은 알수 없었다.
  “경찰은 당신이 도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 장치를 붙인 거예요. 사실, 경찰은 당신이 도망치기를 바랄거예요. 그러면 자기네 주장이 옳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왜 도망을 칩니까? 난 결백합니다.”
  “파슈반장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분노한 랭던은 추적 장치를 버리려고 쓰레기통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피는 랭던의 팔을 잡고 그를 막았다.
  “안 돼요! 장치를 다시 주머니에 넣어 두세요. 만일 버리면 장치는 작동을 멈추고, 경찰은 당신이 추적 장치를 찾아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파슈가 당신을 홀로 내버려 두는 이유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모니터할 수 있기 때문이예요. 자기가 한 짓을 당신이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면......”
  소피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대신 랭던의 손에서 동그란 금속 물체를 받아 들고, 조심스레 살핀 후에 다시 트위드 재킷 주머니 안으로 흘려 넣었다.
  “이 장치는 적어도 당분간 당신과 함께 있어야 돼요.”
  랭던은 아찔했다.
  “파슈는 왜 내가 자크 소니에를 씨를 죽였다고 믿고 있는 겁니까?”
  “그 사람은 당신을 의심할 만한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 아직 보지 못한 증거가 여기 있어요. 파슈는 신중하게 그 증거를 당신에게 감춘거고요.”
  랭던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소니에르 씨가 마룻바닥에 적어 놓은 세 줄의 문구를 기억해요?”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와 문자들은 랭던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소피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처럼 낮아졌다.
  “불행하게도 당신이 본 것은 메시지 전체가 아니예요. 거기에는 한 줄이 더 있었어요. 파슈가 사진을 찍고 나서, 당신이 오기 전에 넷째 줄을 지워버린 거예요.”
  워터마크 펜의 가용성 잉크는 쉽게 지울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왜 파슈가 증거를 지워버렸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소니에르 씨가 남긴 메시지와 마지막 줄은 파슈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였어요.”
  소피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적어도 파슈가 당신과 볼 일을 마칠 때까지는요.”
  소피는 스웨터 주머니에서 컴퓨터로 출력된 사진 한 장을 꺼내 펼쳐 보였다.
  “파슈는 오늘 밤 일찍 범죄 현장의 사진을 암호 해독부서의 컴퓨터에 올려놓았어요. 소니에르 씨의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 중 누군가가 풀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이게 그 사진이예요.”
  소피는 랭던에게 프린트를 건넸다.
  사진을 본 랭던은 당황했다. 근접 촬영으로 찍은 사진은 바닥에서 빛나고 있는 메시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누군가 배를 걷어찬 것처럼, 메시지의 마지막 줄이 랭던을 쳤다.
  13-3-2-21-1-1-8-5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13

  랭던은 몇 초 간 마지막 줄에 적힌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라는 문구를 의아하게 응시했다.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소니에르가 내 이름을 마지막 줄에 남겼다’
  랭던은 그 이유를 전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급박한 시선으로 소피는 말했다.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파슈가 오늘 밤 왜 당신을 여기로 불렀는지를요. 그리고 왜 당신이 파슈의 일급 용의자인지를요.”
  그 순간 랭던은 자신이 소니에르가 범인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파슈가 짓던 거만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그의 혼란은 이제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소니에르 씨가 왜 이렇게 적었을까요? 내가 왜 자크 소니에르 씨를 죽이려 했겠습니까?”
  “파슈는 살해 동기를 찾아야 해요. 그래서 그 사람은 오늘 밤 있었던 당신과의 대화를 전부 녹음했을 거예요. 당신이 하나의 단서라도 흘리길 희망하면서 말이예요.”
  랭던은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소피가 설명했다.
  “파슈는 소형 마이크를 달고 있었어요. 그 마이크는 파슈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송신기와 연결되어 있고, 송신기는 신호를 지휘 본부로 전달하죠.”
  랭던은 더듬거렸다.
  “이건 말도 안돼. 난 알리바이가 있소. 강의를 끝낸 후에 곧장 호텔로 돌아갔어요.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면 알겁니다.”
  “파슈가 벌써 물어봤어요. 반장님의 보고서에는 대략 밤 열 시 삼십 분쯤에 직원에게서 열쇠를 받았다고 되어 있더군요. 운 나쁘게도 살해 시간은 밤 열한 시 가까운 때였어요. 당신은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호텔을 빠져나올 수 있었죠.”
  “이건 말도 안 돼! 파슈는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소!”
  소피의 두 눈이. ‘증거가 없다고요?’라고 말하듯 커졌다.
  “랭던 씨. 당신 이름이 시체 옆 바닥에 적혀 있었어요. 또 소니에르 씨의 수첩에 살인이 일어난 그 시간쯤에 당신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고요. 파슈는 당신을 구금해서 심문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 아니 그 이상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거예요.”
  랭던은 갑자기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소.”
  소피는 한숨을 쉬었다.
  “이건 미국 텔레비전이 아니예요. 랭던씨, 프랑스에서는 법이 범죄자가 아니라 경찰을 보호하지요. 불행하게도, 이 경우는 미디어까지 고려해야 해요. 자크 소니에르 씨는 파리의 저명 인사이고, 모두에게서 사랑받는 인물이예요. 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은 아침 뉴스가 되지요. 파슈는 즉시 성명을 발표하라는 압박을 받을 테고, 용의자를 이미 구금시켜 놓았다고 하면 보기 좋겠지요. 당신에게 죄가 있든 없든, DCPJ가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때까지는 DCPJ에 붙들려 있어야만 할 겁니다.”
  랭던은 우리에 갇힌 짐승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왜 내게 이런 얘기를 다 해주는 겁니까?”
  “왜나하면, 랭던씨, 저는 당신이 결백하다고 믿으니까요.”
  소피는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가 다시 랭던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신이 이런 곤란에 빠지게 된 것에는 부분적으로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뭐라고요? 소니에르 씨가 나를 엮어 넣은 것이 당신 잘못이란 말입니까?”
  “소니에르 씨는 당신을 엮어 넣으려고 한 것이 아니예요. 그건 실수였어요. 바닥에 있던 메시지는 나를 위한 거예요.”
  랭던은 사태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뭐요?”
  “그 메시지는 경찰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소니에르 씨는 나를 위해 쓴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경찰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소니에르 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요. 숫자 코드는 아무 의미도 없는거예요. 현장 조사에 암호 해독가를 포함시키기 위해 그 숫자들을 적었을 거예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가 가능한 빨리 알아차리기를 바라면서 말이예요.”
  랭던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게 되었다. 소피 느뵈가 제정신이든 아니든, 이 여자가 왜 자기를 도우려고 하는지 이유는 알게 된 것이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소피는 랭던을 찾으라는 관장의 마지막 구절이 자기에게 남겨진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소니에르 씨의 메시지가 왜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소피는 힘없이 말했다.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그 특별한 스케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다 빈치의 작품이예요. 오늘 밤 소니에르 씨는 제 주의를 끌기 위해서 그 그림을 이용한 거예요.”
  “잠깐만, 지금 관장이 당신이 좋아하는 예술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모든게 엉망인 것 같죠. 자크 소니에르 씨는 나와......”
  소피의 목소리가 끊겼다. 랭던은 그 목소리에서 갑작스러운 슬픔과 고통스러운 과거가 표면 아래에서 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피와 자크 소니에르는 어떤 특별한 관계임이 분명했다. 랭던은 자기 앞에 있는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관찰했다. 프랑스에서는 나이 든 남자가 종종 젊은 정부를 두기도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피 느뵈를 그런 여자로 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소피는 속삭이는  말투로 말했다.
  “십 년 전에 우리는 크게 싸웠어요. 그 뒤로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아요. 오늘 밤 소니에르 씨가 살해됐다는 전화를 받고, 사진으로 시체와 바닥에 적힌 글을 보았어요. 그리고 제게 메시지를 남기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덕분에?”
  “예. 그것과 P.S.라는 글자 때문에요.”
  “추신을 뜻하는 P.S. 말이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P.S. 는 제 이니셜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이름은 소피 느뵈잖소?”
  소피는 시선을 돌렸다. 소피의 얼굴이 붉어졌다.
  “P.S. 는 그와 함께 살 때 그가 불렀던 제 별명이예요. 프린세스 소피의 앞글자를 딴거죠.”
  랭던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웃긴다는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십 년 전의 일이예요. 내가 어린 소녀였을 때니까.”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소니에르 씨를 알고 있었나요?”
  소피의 눈에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잘 알았죠. 자크 소니에르 씨는 제 할아버지세요.”                       

14

  “랭던은 어디에 있나?”
  지휘 본부로 다시 돌아온 파슈가 마지막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물었다.
  “아직 남자 화장실에 있습니다.”
  콜레 부관은 이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파슈는 투덜거렸다.
  “아직도 시간을 끌고 있군.”
  반장의 눈은 콜레의 어깨 너머에 있는 GPS 점에 박혀 있었다. 콜레는 파슈가 몸을 홱 돌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반장은 직접 가서 랭던을 살펴보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관찰 대상은 스스로 경계를 허물도록 충분한 자유와 시간을 주는 것이 좋았다. 랭던은 스스로 돌아와야 했다. 10여분이 흘렀다.
  ‘너무 오래 있는군.’
  “랭던이 돌아올 것 같나?”
  콜레는 머리를 저었다.
  “남자 화장실에서 여전히 작은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GPS 장치는 분명 랭던에게 부착되어 있습니다. 아픈 게 아닐까요? 랭던이 장치를 발견했다면, 떼버리고 도주하려고 할 겁니다.”
  파슈는 자기 시게를 체크했다.
  “좋아.”
  파슈는 여전히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콜레는 오늘 밤 반장에게서 전혀 볼수 없었던 이상한 강박증 같은 것을 느꼈다. 상부로부터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항상 침착하고 초연하던 파슈가 오늘 밤은 저 일이 자기 개인적인 일이라 도 되는 양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있었다.
  ‘놀랄 일도 아니지. 파슈는 이 체포를 성사시키려고 필사적이니까.‘
  콜레는 생각했다. 최근 부처 이사회와 신문 방송은 파슈의 공격적인 전술과 힘있는 외국 대사관과의 잦은 충돌, 새로운 기술의 과다예산 책정 등에 관한 일로 파슈를 점점 비판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오늘 밤 저 미국인을 첨단 기술과 고자세로 체포하게 되면, 파슈를 비판하는 무리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 터였다. 특히 연금을 받고 은퇴할 때까지, 파슈는 자기 지위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파슈 반장에게 연금이 필요하다는 것은 신도 알고 계시지.’
  콜레는 생각했다. 수사 기술에 대한 파슈의 열의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몇 년 전, 파슈가 저축한 모든 돈을 어떤 기술에 투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입고 있던 셔츠까지 잃었다고 했다.
  ‘파슈 반장은 최고급 셔츠만 입는 사람인데 말이야.’
  오늘 밤 시간은 충분했다. 소피 느뵈의 이상한 개인은 그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녀도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슈는 아직 돌릴 수 있는 카드 패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파슈는 랭던에게 희생자가 마루 위에 랭던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말해야 했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그 증거에 대한 미국인의 반응은 볼 만할 터였다.
  DCPJ 요원 한 명이 사무실을 가로질러 오면서 파슈를 불렀다.
  “반장님, 전화 좀 받아 보십시오.”
  요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밀었다.
  “누군데?”
  요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암호 해독부서의 부장입니다.”
  “그런데?”
  “소피 느뵈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15

  때가 되었다.
  사일래스는 검은색 아우디 승용차 밖으로 나왔다. 밤 바람이 사일래스의 외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변화의 바람은 이 대기 속에 있다.’
  자기 앞에 놓인 임무가 힘보다 정교함을 더 요하는 것임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총은 차 안에 두고 내렸다. 13구경 헤클러 앤 코크 UPS 40으로 스승이 준 것이었다.
  ‘신의 집에 죽음의 무기가 있을 자리는 없다.’
  교회 앞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보이는 영혼이라곤 저 멀리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향해 몸뚱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10대 매춘부들이 전부였다. 그들의 육체는 사일래스의 허리에 익숙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본능적으로 허벅지가 부풀어 오르자, 매고 있던 갈고리 허리띠가 살 속으로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사일래스는 신실하게 모든 성적 탐닉을 외면했다. 그것이 <길>이었다. 오푸스 데이를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돌려받았다. 금욕과 모든 개인 재산을 양도한다는 서약을 희생이라고 보지 않았다. 감옥에서 견뎌야 했던 성적인 공포와 평생 지고 살았던 가난을 생각해 보면 금욕은 오히려 호강이었다.
  안도라에 있는 감옥에 갇혀 지낸 후 프랑스에 돌아온 사일래스는 고향땅이 구원받은 자기 영혼에서 폭력적인 기억을 끄집어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너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사일래스는 자기 자신을 일깨웠다. 신에 대한 그의 봉사는 살인이라는 죄를 범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자기 가슴에 묻어야 하는 희생임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네 신념을 측정하는 것은 네가 참고 있는 고통을 측정하는 것과 같다.”
  스승은 그에게 말했었다. 사일래스는 고통에 익숙했다. 그는 스승에게 자기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스승은 사일래스에게 그의 행위가 더 높으신 힘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확신시켜주었다.
  “Hago la obra de Dios(나는 신의 사업을 행하는 몸이다)”
  교회 입구로 들어서면서 사일래스는 중얼거렸다.
  육중한 문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멈춰서서, 사일래스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저 안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사일래스가 꺠닫는 데에는 일순간도 걸리지 않았다.
  ‘쐐기돌 그것이 우리를 최종 목표로 인도할 것이다.’
  사일래스는 유령처럼 하얀 주먹을 들어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잠시후, 거대한 나무 문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6

  자신이 루브르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파슈가 알아내는 데 얼마나 걸릴지 소피는 궁금했다. 넋이 나간 랭던을 보면서, 랭던을 남자 화장실로 몰아넣은 것이 잘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
  날개를 펼친 독수리처럼 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던 할아버지의 시체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 이 늙은이에게서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소피는 놀랐다. 이제 자크 소니에르는 그녀에게 남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소피가 스물두 살이었던 3월의 어느 날 밤, 한 가지 사건으로 끝나 버렸다.
  ‘십 년 전이군.’
  소피는 영국의 대학원에서 예정보다 며칠 일찍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분명 자신이 보아서는 안 될 어떤 일에 할아버지가 연루되어 있는 것을 실수로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까지도 믿을 수 없는 이미지였다.
  ‘내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는 설명하려고 했지만, 너무 수치스럽고 몹시 놀란 탓에 그녀는 저축해둔 돈을 찾아 집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작은 아파트를 얻었다. 자기가 본 것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겠다고 소피는 맹세했다. 할아버지는 카드와 편지를 보내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었다.
  ‘어떻게 설명하겠단 말인가?’
  소피는 딱 한 번을 제외하곤 응답하지 않았다. 그때 소피는 다시는 전화 걸지 말라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아버지를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전했다. 할아버지의 설명이 사건 자체보다 끔찍한 것일까 봐 소피는 두려웠다.
  소니에르는 결코 소피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서랍 속에 감추어 두었던 10년 묵은 일이, 서랍이 열리는 바람에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된 것이다. 소니에르는 소피의 요구를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결국 소피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오후까지는’
  “소피? 나는 오랫동안 네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제야 전화를 하는 게 고통스럽구나. 하지만 네게 꼭 해야 될 말이 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단다.”
  자동응답기에서 울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아파트 부엌에 서 있던 소피는 너무 오랜만에 소니에르의 목소리를 듣자 한기를 느꼈다. 그녀가 어린 소녀였을 때 그러던 것처럼 소니에르는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소니에르의 온화한 목소리는 즐겁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몰고 왔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로 말하고, 집에서는 영어로 말하거라.’
  “소피 제발 들어다오. 소피, 영원히 나에게 화를 내면서 살 수는 없다. 내가 지난 세월동안 보낸 편지들을 읽지 않은 게냐? 아직도 이해를 못한게냐? 한 번은 얘기해야만 한다. 제발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다오. 루브르에 있으니 전화해라. 지금 당장, 너와 나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구나.”
  소피는 자동응답기를 쳐다보았다.
  ‘위험?’
  도대체 할아버지는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지?
  감정이 격한 나머지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프린세스...... 나는 네게 어떤 일들을 감춰 왔다는 것을 잘 안다. 그 대가로 네 사랑을 잃은 것도 안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네 안전을 위해서였다. 이제 너도 진실을 알아야 해. 가족에 관한 진실을 말해 주려고 한단다.”
  갑자기 심장 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족?’
  소피의 부모는 그녀가 네 살 때 죽었다. 그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가 다리 위를 달리다 물살이 빠른 물속으로 추락한 것이다. 소피의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도 그 차에 함께 있었다. 소피의 전 가족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이 사건이 보도된 신문기사를 소피는 아직도 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얘기는 기대치 못한 갈망을 뼛속 깊이 불러일으켰다.
  ‘우리 가족?’
  순간 소피는 어린아이였을 때 수없이 꾸던 환상을 보았다.
  ‘가족들이 살아 있다! 식구들이 집으로 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서의 환상일 뿐이었다.
  ‘가족은 죽었다. 소피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자동응답기에서 할아버지가 말하고 있었다.
  “소피...... 네게 말해 주려고 난 오랜 세월을 기다렸단다. 적당한 순간을 찾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루브르에 있으니 전화하거라. 오늘 밤 내내 여기 있을게야. 우리 두 사람 모두 위험에 처했다는 두려움이 드는구나. 네가 알아야 할 게 참 많단다.”
  전화 메시지는 끝났다.
  침묵 속에서 소피는 몸을 떨었다. 할아버지의 메시지를 곱씹어 볼수록 한 가지 가능성만이 그럴듯해 보였다. 할아버지의 진정한 의도가 점점 분명해졌다.
  미끼였따.
  분명 할아버지는 소피를 너무나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뭐든지 할 것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소피의 거부감은 아주 깊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병이 들어 마지막으로 자기가 찾아오도록 술수를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선택은 현명했다.
  ‘우리 가족.’
  루브르 박물관, 남자화장실의 어둠 속에 서서, 소피는 오후에 들었던 전화 메시지를 다시 기억했다.
  ‘소피, 우리 두 사람 모두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구나. 전화하거라.’
  그녀는 전화하지 않았다. 전화할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전화 메시지에 대한 의심은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기 박물관 바닥에 살해된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을 적어놓았다. 그 기호들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바닥의 메시지를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 메시지가 암호로 되어 있다는 것이 소니에르가 자기를 염두에 둔 또 다른 증거라고 소피는 확신했다. 암호 해독학에 대한 소피의 열정과 재능은 자크 소니에르와 함께 살면서 얻어진 자연스러운 결과다. 할아버지는 기호, 낱말 게임, 수수께끼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요일을 신문에 난 암호문과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 게임을 함께 풀며 시간을 보냈던가?’
  열두 살, 소피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르 몽드>지의 가로세로 낱말 퍼즐을 끝냈을 때, 할아버지는 영어로 된 낱말 퍼즐과 수학적인 수수께끼, 대체 암호들의 분야로 소피를 안내했다. 소피는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결국 소피는 그 열정을 직업으로 연결시켜, 사법경찰을 위해서 일하는 암호 해독가가 된 것이다.
  오늘 밤, 자신과 로버트 랭던이라는 두 이방인을 결합시킨 할아버지의 간단한 코드를 소피는 존중해야만 했다.
  질문은 ‘왜?’였다.
  랭던의 눈에 어린 당황스러운 표정은, 이 미국인도 그녀만큼이나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왜 이들을 함께 엮어 놓은 것일까?
  소피는 다시 물었다.
  “당신과 할아버지는 오늘 밤 만나기로 돼 있었어요. 무엇 때문이죠?”
  랭던은 진짜 혼란스러웠다.
  “그분 비서가 정한 것이고, 특별한 이유를 말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저 내가 프랑스 성당들의 이교도적인 도상학에 관한 강의할 거라는 것을 듣고서, 소니에르 씨가 그 주제에 흥미를 가졌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얘기 후에 술 한잔하러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 같았고요.”
  소피는 그저 흘려들었다. 그 정도로는 빈약했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교도적인 도상하게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일개 미국인 교수와 잡담이나 할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소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할아버지가 오늘 오후에 제게 전화했었어요. 할아버지와 내가 큰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하더군요. 뭔가 와 닿는게 없나요?”
  랭던의 푸른 눈이 근심으로 뒤덮였다.
  “없습니다. 하지만 방금 이러난 일을 생각해보면......”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일어난 사건을 생각해보면, 놀랍기보다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소피는 화장실 끝에 있는 작은 유리창으로 걸어갔다. 유리창에는 경보장치 테이프가 그물망처럼 덮여 있었다.소피는 창문을 통해 밖을 응시했다. 적어도 지상에서 15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소피는 눈을 들었다. 그리고 파리의 멋진 야경을 쳐다보았다. 왼쪽으로 센 강을 가로질러 조명을 받고 서 있는 에펠 탑이 보였다. 정면에는 개선문이 있었다. 오른쪽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는 사크레쾨르의 우아한 아라베스크 양식의 둥근 지붕이 보였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둥근 석조 지붕은 휘황찬란한 성역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서쪽 끝인 이 드농 관에서 보면, 캐러젤 광장의 도로가 드농 관과 나란히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루브르의 외벽과 도로를 분리하는 것은 오직 작은 보도뿐이다. 저 아래로 밤 시간에 움직이는 운송 트레일러들의 행렬이 보였다. 교통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느라 멈춰 있었다. 차량의 주행등이 소피를 조롱하듯 깜박거렸다.
  랭던이 소피 뒤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분명 당신 할아버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랭던의 깊은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유감을 느끼며, 소피는 창문에서 돌아섰다. 자신을 둘러싼 곤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랭던은 분명 소피를 돕고 싶어했다.
  ‘그는 대학교수다.’
  용의자에 대한 DCPJ의 수사보고서를 읽으면서 소피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분명히 무지를 경멸하는 학자이다.
  ‘우리는 그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암호 해독가로서 소피는 의미 없이 보이는 자료에서 의미를 추출해 내는 일을 한다. 로버트 랭던이 알고 모르는 것을 떠나, 분명 이 남자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소피의 추측이었다.
  ‘프린세스 소피,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할아버지의 메시지가 이보다 어떻게 명료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생각할 시간. 이 미스터리를 함께 정리할 시간.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시간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랭던을 올려다보며 소피는 자기가 생각한 일을 말했다.
  “조금 있으면 브쥐 파슈가 당신을 구금할 거예요. 난 당신이 박물관을 빠져나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해요.”
  랭던의 눈이 커졌다.
  “나보고 도망치란 말입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예요. 만일 파슈가 당신을 구금하게 되면 프랑스 감옥에서 몇 주는 보내야 할 거예요. DCPJ와 미국 대사관이 어느 나라 법정에 당신을 세울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 싸움을 끝낼 때까지는요. 하지만 여기서 바로 빠져나가 당신네 대사관으로 간다면, 당신이 이 살인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을 당신과 내가 증명하는 동안 당신네 정부가 당신의 권리를 보호해 주겠죠.”
  랭던은 그다지 탐탁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만둡시다! 파슈는 모든 입구에 무장한 요원들을 세워 두었어요. 만일 우리가 총에 맞지 않고 빠져나간다 쳐도, 도망가면 내가 유죄라고 말하는 꼴과 같습니다. 바닥에 적힌 메시지가 당신에게 남겨진 거라고 파슈에게 말하십시오. 그리고 거기 있는 내 이름은 소니에르 씨가 나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게 할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미국 대사관으로 안전하게 돌아간 후에 말할 거예요. 대사관은 여기서 이 킬로미터도 안 돼요. 박물관 밖에 내 차가 주차되어 있고요. 여기서 파슈와 거래를 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없어요. 이해 못하겠어요? 그 사람은 오늘 밤 안으로 당신이 유죄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혈안이 돼 있어요. 체포를 미루는 유일한 이유는 혹시 당신이 실수로 자기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단서를 흘리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요.”
  “맞아요. 도주하는 것처럼 말이죠!”
  갑자기 소피의 스웨터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파슈일 거야’
  소피는 손을 뻗어 전화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랭던씨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볼 것이 있어요.”
  소피는 서둘러 말했다.
  ‘어쩌면 당신의 미래가 거기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바닥에 적힌 글은 분명이 당신의 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예요. 하지만 파슈는 확실하게 당신이 범인이라고 우리 팀에게 말했어요. 파슈가 당신이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다른 이유를 생각해보셨나요?”
  랭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소피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로군’
  하지만 왜 그랬는지 소피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중요한 사실은 파슈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오늘 밤 안으로 랭던을 철창 안에 집어넣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소피는 랭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소피에게는 유일한 논리적인 결론이자 딜레마였다.
  ‘랭던을 미국 대사관으로 데려가야 해.’
  소피는 창문으로 돌아서서, 둥근 유리창에 붙어 있는 비상경보기의 그물망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15미터 아래로 포장도로가 아찔하게 보였다. 이 높이에서 뛰어내린다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껏해야 다리가 부러지는 것뿐이다.
  결국 소피는 결정을 내렸다.
  로버트 랭던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탈출시키는 것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17

  “느뵈가 응답을 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그 여자의 휴대 전화기로 전화 건 거 확실한 건가? 분명히 휴대전화기를 가지고 있는데.”
  파슈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콜레는 대여섯 차례나 소피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아마 전원이 다되었거나, 전화기를 꺼버린 것 같은데요.”
  파슈는 암호 해독부 부장과 전화통화한 후 줄곧 저기압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파슈는 느뵈 요원에게 연락하라며 콜레를 닦달했다. 연락이 안되자 파슈는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쪽 부장님이 왜 전화하신 겁니까?”
  콜레는 그제야 물어보았다.
  파슈는 돌아섰다.
  “드라코 같은 악마들과 불구의 성인들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없다는 말을 해주려고.”
  “그게 다입니까?”
  “아닐세. 메시지의 숫자들이 피보나치의 숫자라고 하더군. 하지만 별 의미는 없는 것 같다고 했어.”
  콜레는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미 느뵈 요원을 보내서 알리지 않았습니까.”
  파슈는 머리를 저었다.
  “느뵈를 보내지 않았다더군.”
  “예?”
  “부장 말로는 내 부탁에 따라 자기네 부서의 모든 요원을 호출해서 내가 전송한 이미지를 보게 했다는군 그런데 느뵈 요원은 도착하자마자 소니에르의 모습과 그가 남긴 코드를 보더니, 말도 없이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는 게야. 부장 말이, 느뵈 요원이 사진 때문에 극도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녀의 행동을 문제삼지 않았다는군.”
  “동요를 해요? 죽은 시체를 본 적이 없나 보죠?”
  파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몰랐지만, 부장도 몰랐대. 다른 요원이 부장에게 알리기 전까지는 말이야. 소피 느뵈는 자크 소니에르 씨의 손녀야.”
  콜레는 말을 잃었다.
  “부장은 느뵈가 한 번도 소니에르 씨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다고 그러더군. 아마 유명한 할아버지 덕에 생길 수도 있는 특별 대접을 느뵈 요원이 원치 않은 게 아니겠느냐고 부장은 추측하던데.”
  ‘느뵈가 사진을 보고 동요한 것도 무리가 아니군.’
  죽은 가족이 남긴 코드를 해독하기 위해 젊은 여인이 소집된, 운도 지지리 없는 이런 우연을 가정하기란 힘들 것이다. 하지만 느뵈의 행동에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들이 피보나치의 숫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기 와서 우리에게 말한 것 아니겠습니까. 느뵈 요원이 왜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사무실을 떠났는지 이해를 못하겠군요.”
  콜레는 명확하지 않은 정황을 설명하는 시나리오로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소니에르는 바닥에 숫자로 된 코드를 적었다. 경찰 조사에 암호 해독가를 포함시키도록 말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손녀에게 닿게 된다. 메시지의 남은 부분은 소니에르가 자기 손녀와 어떤 식으로 의사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느뵈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랭던은 어떻게 끼어들게 되었을까?
  콜레가 좀더 생각을 펼치기 전에, 경보음이 적막에 갇힌 박물관을 흔들어 놓았다. 경보음은 대화랑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경보다! 대화랑! 남자화장실입니다.”
  요원 한 명이 루브르 보안센터를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파슈가 콜레에게 몸을 돌리며 외쳤다.
  “랭던은 어디 있나?”
  “아직 남자 화장실 안입니다!”
  콜레는 컴퓨터 모니터 위의 깜박이는 빨간 점을 가리켰다.
  “랭던이 창문을 깬 모양입니다!”
  랭던이 멀리 갈 수 없다는 것을 콜레는 알고 있었다. 파리의 소방 규정에 따라 공공건물에서 15미터 이상 높이에 있는 창문은 화제에 대비해 깨지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의 2층 창문에서 밧줄이나 사다리 없이 빠져나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다 드농 관이 있는 서쪽 끝은 떨어질 때의 충격을 완화시켜 줄 나무나 풀밭도 없었다. 화장실 창문 바로 아래에는 박물관 외벽에서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캐러젤 광장의 2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맙소사. 랭던이 창문의 돌출 부분으로 움직였습니다!”
  모니터에 눈을 박고 콜레가 소리쳤다.
  파슈는 어깨에 두른 권총집에서 MR 93 리볼버를 꺼내 움켜쥐고 사무실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당황한 콜레는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깜박이는 붉은 점이 창문 돌출부로 가더니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빨간 점이 건물 바깥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게 뭐야? 랭던이 창문에서 떨어졌거나, 아니면......’
  “맙소사!”
  콜레는 벌떡 일어났다. 빨간 점은 외벽 바깥으로 움직였다. 신호가 잠시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건물 주변 9미터 정도에서 갑자기 멈춰 버렸다.
  콜레는 컴퓨터를 조작해서 파리 지도를 끌어왔다. 그리고 그 위에 GPS 시스템을 다시 설정했다. 영상을 확대하자 신호를 보내는 정확한 위치를 볼 수 있었다.
  점은 움직이지 않았다. 캐러젤 광장의 도로 한가운데에 죽은 듯이 멈춰 있었다.
  랭던이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든 것이다.

18

  파슈가 대화랑으로 화살처럼 달리고 있을 때, 그의 무전기를 통해 콜레의 목소리가 멀리 들리는 경보음 사이로 울려 퍼졌다.
  콜레는 소리를 질렀다.
  “랭던이 뛰어내렸습니다! 캐러젤 광장 도로에서 신호를 찾아냈습니다! 화장실 창문 바깥입니다! 그런데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맙소사, 랭던이 자살한 것 같습니다!”
  파슈는 듣고 있었지만,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았다. 파슈는 계속 달렸다. 화랑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소니에르의 시체 옆을 지나자, 저 멀리 드농 관 끝에 있는 칸막이들이 보였다. 경보음은 더욱 커졌다.
  무전을 통해 콜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기다리십쇼! 랭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나 봅니다. 랭던이 움직이고 있어요.”
  화랑의 길이를 저주하면서 파슈는 계속 달렸다.
  콜레는 아직도 무전기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랭던이 더 빠르게 움직입니다! 캐러젤 아래 쪽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기다려...... 랭던이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요!”
  칸막이에 다다른 파슈는 화장실 문으로 돌진했다.
  무전기 소리는 경보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랭던이 차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차를 탄 것 같아요! 제가......”
  파슈가 총을 꺼내 들고 남자 화장실로 뛰어들자 경보음이 콜레의 말을 삼켜버렸다. 날카로운 경보음에 주춤거리면서 파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파슈의 눈은 즉시 화장실 끝에 있는 깨진 창문으로 향했다. 정문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랭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 높이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내리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뛰어내렸다 해도 심하게 다쳤을 터였다.
  마침내 경보음이 멎고, 콜레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 남쪽으로 움직입니다...... 더 빨라 ...... 캐러젤 다리를 지나 센 강을 건너갑니다!”
  파슈는 왼쪽을 둘러보았다. 캐러젤 다리를 지나는 차량은 2단으로 된 거대한 트레일러뿐이었다. 루브르에서 남쪽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비밀 방수포로 덮여 있는 트레일러의 위칸은 거대한 해먹처럼 보였다. 파슈는 순간 몸을 떨었다. 몇 분 전만 해도 저 트레일러는 화장실 창문 바로 밑에서 정지 신호를 받고 멈춰 있었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미친 짓이야!’
  파슈는 속으로 외쳤다. 방수포를 덮은 트레일러가 무엇을 싣고 있는지 랭던은 알 길이 없다. 만일 트레일러가 철강을 싣고 있었다면? 혹은 시멘트를? 아니면 그저 그런 쓰레기를? 15미터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콜레가 소리를 질렀다.
  “점이 방향을 틀었습니다! 생 페르 다리를 향해. 오른쪽입니다!”
  다리를 건넌 트레일러는 천천히 속도를 줄여 생 페르 다리가 있는 오른쪽으로 돌고 있었다. 파슈는 놀란 시선으로 트레일러가 구석을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콜레는 무슨 생방송이라도 하는 양 트레일러의 위치를 시시각각 안내하면서, 외부에 있는 요원들을 무전기로 호출. 루브르 박물관 주위로 소집했다. 그리고 트레일러를 추적하도록 경찰차를 보냈다.
  ‘끝났군.’
  파슈는 자기 요원들이 몇 분 안에 트레일러를 에워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랭던은 어디로도 도망 칠 수 없을 것이다.
  권총을 집어넣으면서 파슈는 화장실을 빠져나와 콜레에게 무전으로 연락했다.
  “내 차를 가져와. 내가 직접 현장에 가봐야겠어.”
  대화랑을 다시 터벅터벅 걸어나오면서, 파슈는 랭던이 아직 살아 있을지 궁금했다.
  문제될 것은 없었다.
  ‘랭던은 달아났다. 이제 죄를 씌우기만 하면 된다.’
  화장실에서 겨우 14미터 떨어진 대화랑의 어둠 속에 랭던과 소피는 서있었다. 그들은 화장실 입구를 가리고 있는 칸막이들 중 하나에 등을 바싹 밀착시키고 있었다. 파슈가 총을 꺼내 들고 화살처럼 화장실로 들어오기 직전에, 랭던과 소피는 가까스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지난 60초가 몽롱했다.
  랭던이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현장에서 도주하는 것을 거절하고 남자 화장실 안에 있을 때, 소피는 창문 유리에 눈을 고정시키고 유리를 감싸고 있는 경보장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 뒤 낙하 거리를 재기라도 하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표적만 있으면, 당신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어요.”
  소피가 말했다.
  ‘표적?’
  랭던은 불안하게 화장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길 위쪽으로 18륜의 거대한 2단 트레일러가 화장실 창문 바로 아래의 정지 신호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트레일러의 육중한 화물은 푸른 방수포로 느슨하게 덮여 있었다. 랭던은 소피가 일을 실행하지 않기를 바랐다.
  “소피, 난 뛰어내릴 수 없......”
  “추적장치를 꺼내봐요.”
  당황한 랭던은 작은 금속장치가 잡힐 때까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소피는 추적장치를 랭던에게서 받아 들고 세면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두꺼운 비누 위에 추적장치를 얹고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금속이 부드러운 비누의 표면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추적장치가 비누 속에 안전하게 박히도록 매만졌다.
  비누를 랭던에게 건넨 소피는 세면대 아래에 있는 실린더 모양의 쓰레기통을 집어 들었다. 랭던이 미처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소피는 쓰레기통으로 유리창을 박살냈다.
  귀를 찢는 듯한 경보음이 머리 위에서 터져 나왔다.
  “비누를 이리 줘요!”
  경보음 때문에 소피는 고함을 질렀다.
  랭던은 소피의 손에 비누를 넘겼다.
  비누를 꼭 쥐고서, 소피는 부서진 창 밖으로 18륜 트레일러가 아주 서서히 멈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표적은 상당히 컸다. 값이 꽤 나가는 방수포. 건물에서 3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교통신호가 바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피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비누를 아래로 천천히 던졌다.
  비누는 트럭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다가, 방수포 가장자리에 안착했다. 교통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을 때, 비누는 화물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축하해요. 당신은 지금 막 루브르를 탈출했어요.”
  랭던을 문으로 잡아끌면서 소피는 말했다.
  남자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어둠 속에 막 자리 잡았을때, 파슈가 휙 지나갔다.
  이제 경보음은 멎었다. DCPJ 차량의 사이렌 소리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멀어지는 것을 랭던은 들을 수 있었다.
  ‘경찰 대탈출이로군.’
  파슈 역시 대화랑을 비워 놓고 서둘러 나갔을 것이다.
  “대화랑 쪽으로 다시 오십 미터 정도 들어가면 비상계단이 있어요. 경비원들은 이 주변을 떠났을 테니까, 우린 여기에서 나갈 수 있어요.”
  오늘 밤 랭던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피 느뵈는 자기보다 훨씬 똑똑한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19

  생 쉴피스 교회는 파리에 있는 어떤 건물보다 역사가 기이하다고들 말한다.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위한 고대 사원의 폐허 위에 세워진 이 교회는, 건축학 면에서 얼마 안 떨어져 있는 노트르담 사원과 쌍벽을 이루는 발자취를 지니고 있다. 이 성역은 마르키 드 사드와 보들레르의 세례, 빅토르 위고의 결혼식을 주관한 곳이었다. 이곳의 부속 신학교는 정설이 아닌 역사 자료들을 잘 보관하고 있어서, 한때는 셀 수 없이 많은 비밀단체들의 은밀한 모임 장소가 되기도 했다.
  오늘 밤 생 쉴피스의 동굴 같은 본당은 무덤처럼 고요했다. 생명을 암시하는 것은 오로지 초저녁 미사 때 피웠던 희미한 향 냄새뿐이었다. 상드린 수녀가 사일래스를 교회 안으로 안내할 때, 수녀의 태도가 편치 않다는 것을 사일래스는 눈치 챘다. 사일래스는 이런 일에 놀라지 않았다. 자기 외모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미국인이지요?”
  수녀가 물었다.
  사일래스는 대답했다.
  “태생은 프랑스입니다. 스페인에서 그분의 부름을 받았지요.  그리고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상드린 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한 눈을 가진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그런데 생 쉴피스를 보신 적이 없다고요?”
  “보지 않은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낮에 보면 더 멋지답니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오늘 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부탁하시더군요. 당신은 분명히 힘있는 친구들을 둔 모양이네요.”
  ‘이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상드린 수녀의 뒤를 따라 중앙복도를 걸어가면서, 사일래스는 이 성역의 검소함에 놀랐다. 다채로운 프레스코화와 금도금을 한 제단, 따뜻한 느낌의 목재로 치장된 노트르담 사원과는 달리, 생 쉴피스는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스페인 고행자들의 성당을 생각나게 하는 황량한 분위기를 풍겼다. 장식을 배제해 교회의 내부가 더 고상하게 느껴졌다. 격자형의 재목이 치솟은 둥근 천장을 올려다보며, 사일래스는 전복된 거대한 선체 아래에 서있는 상상을 했다.
  ‘잘 들어맞는 이미지야.’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조직의 배는 영원히 뒤집히려 하고 있었다. 어서 일에 착수하고 싶은 열망을 느끼면서, 사일래스는 수녀가 자기를 홀로 내버려 두기를 바랐다. 수녀는 쉽게 해치울 수 있는 조그마한 여자였다. 하지만 불필요한 힘은 사용하지 않기로 맹세했었다.
  ‘이 여자는 성직자다. 그리고 쐐기돌을 숨겨 놓은 장소로 조직이 이 교회를 선택한 것은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남이 저지른 죄 때문에 여자가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송구하군요. 수녀님. 저 때문에 일어나셨을 텐데.”
  “천만에요. 파리에 머무는 시간이 아주 짧다고 했지요? 그럼 생 쉴피스를 놓쳐서는 안 되지요. 교회에 대한 당신의 관심은 건축학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역사적인 것인가요?”
  “사실 수녀님. 제 관심은 영적인 것입니다.”
  수녀는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이 필요없겠네요. 저는 그저 당신을 어디서부터 안내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었답니다.”
  사일래스는 제단으로 눈길을 보냈다.
  “교회 구경은 필요 없습니다. 수녀님은 정말 친절하시군요. 저 혼자서 잠깐 둘러보겠습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잠도 다 깼으니까.”
  사일래스는 걸음을 멈췄다. 수녀와 사일래스는 맨앞의 좌석에 이르렀다.제단은 고작 14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일래스는 육중한 몸을 돌려 작은 체구의 수녀앞에 막아섰다. 수녀가 자기의 붉은 눈을 올려다보다가 뒷걸음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무례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수녀님, 저는 신의 성전을 그저 구경하는 일이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일 따위엔 익숙하지 않습니다. 둘러보기 전에 ,제가 홀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좀 가져도 되겠습니까?”
  상드린 수녀는 망설였다.
  “아, 물론이지요. 그럼 저는 저 뒤쪽에서 기다리지요.”
  사일래스는 수녀의 어깨 위에 부드럽지만 힘이 들어간 손을 얹고 수녀를 내려다보았다.
  “수녀님, 수녀님을 깨운 것도 너무 죄송한데, 계속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무례입니다. 그러니 침대로 돌아가십시오. 수녀님의 성전인 이곳을 혼자 즐기다가 조용히 나가겠습니다.”
  수녀는 불편한 표정이었다.
  “혼자 있어도 정말 괜찮겠어요?”
  “그럼요. 기도는 은밀한 즐거움이니까요.”
  “그럼 좋으실 대로”
  사일래스는 수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수녀님, 주님의 평화가 수녀님과 함께하길.”
  “주님의 평화가 당신과도 함께하길. 나갈 때 문을 꼭 닫아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사일래스는 수녀가 계단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 후에 자리에 앉아 허벅지에 매단 갈고리 허리띠가 다리를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신이여, 오늘 제가 하는 이 일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제단 위 상당히 높은 곳에는 성가대의 발코니가 있었다. 상드린 수녀는 이 발코니의 어둠에 몸을 웅크리고서, 망토를 뒤집어쓴 수도승이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난간 사이로 훔쳐보고 있었다. 마음속의 순간적인 공포가 몸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잠깐 동안, 수녀는 이 수상한 방문객이 그들이 자기에게 경고한 적일 수도 있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그녀가 긴 시간 품고 있던 명령을 오늘 밤 실행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수녀는 어둠 속에 숨어서 남자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20

  어둠속에서 나온 랭던과 소피는 비상계단을 향해 고요한 대화랑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랭던은 어둠에서 조각 그림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이 미스터리는 아주 골치 아팠다.
  ‘사법경찰의 반장이 내게 살인 혐의를 씌우려 하고 있다.’
  랭던은 속삭였다.
  “어쩌면 파슈가 바닥에 메시지를 적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소피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불가능해요.”
  랭던은 여전히 미심쩍었다.
  “반장이 나를 유죄로 만드는 데 아주 열심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쩌면 내 이름을 바닥에 적어 놓으면 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피보나치 수열은요? 그리고 P.S는? 다 빈치와 여신을 나타내는 모든 상징들은요? 그것은 분명히 할아버지가 남긴거예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단서인 상징들은 너무 완벽하게 서로 엮여 있었다. 별 모양과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다 빈치, 여신, 심지어 피보나치 수열까지. 도상학자로서 소니에르가 남긴 메시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상징 세트라고 할수 있었다. 모든 것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아까 오후에 할아버지가 내게 한 전화요. 할아버지는 내게 뭔가를 얘기해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루브르 바닥에 남긴 메시지가 내게 뭔가 중요한 것을 알리려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노력이었다고 확신해요. 할아버지는 내가 그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랭던은 소피의 행복을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소니에르가 남긴 메시지를 풀고 싶었다. 저 암호문 같은 글자를 처음 본 이후,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화장실 창문에서 거짓말로 뛰어내린 행위는 파슈가 랭던을 이해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프랑스 경찰 반장이 자기가 추적해서 체포한 것이 비누조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문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소피가 말했다.
  “할아버지의 메시지에 있던 숫자들이 다른 행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어요?”
  랭던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총서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 원고에는 비문(碑文)의 암호들이 들어 있었는데, 어떤 줄의 기호들은 다른 줄을 해독하는 단서가 되었었다.
  “전 오늘 밤 내내 그 숫자들을 안고 고민했어요. 더하고, 나누고, 곱하고, 하지만 아무것도 풀지 못했어요. 수학적으로 볼 때, 그 숫자들은 무작위로 배열된 거예요. 암호 표기법으로 보면 쓸데없는 장난질 같은 거죠.”
  “결국 피보나치 숫자를 사용한 것은 할아버지가 내게 다른 신호를 보낸 것과 같아요. 영어로 메시지를 남긴 것이나, 내가 좋아하는 예술 형태로 자기 몸을 만든 것이나, 몸에 별표를 그린 것처럼 말이죠. 이 모든 것은 제 관심을 끌기 위한 거예요.”
  “별표가 당신에게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제가 자랄 때 별표는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특별한 상징이었어요. 우리는 재미삼아 타로 카드 놀이를 했는데, 제 패에는 항상 별표가 있는 카드들이 나왔어요. 할아버지가 몰래 준비한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 후 별표는 우리만의 장난이 되어 버렸지요.”
  랭던은 한기를 느꼈다.
  ‘타로 카드 놀이를 했다?’
  타로 카드는 중세 이탈리아 카드로 이교도의 상징이 풍부하게 숨겨진 게임이다. 랭던은 새 원고에 타로에 관해서 한 장 전체를 할애했을 정도였다. 스물두 장의 카드 중에서 ‘여자 교황’,‘여황제’, ‘별’ 같은 이름을 가진 카드도 있다. 원래 타로 카드는 교회에서 금지한 이념들을 몰래 전달하는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타로 카드의 신비스러운 매력은 현대 점술가들의 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성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타로 카드는 별표이다.’
  만일 소니에르가 자기 손녀를 위해 재미로 카드를 미리 준비했다면, 별표가 들어간 카드들이 적절한 장난이었다는 것을 랭던은 깨달았다.
  두 사람은 비상계단에 다다랐다. 소피는 조심스럽게 문을 당겼다.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다. 오직 외부로 연결된 문에만 경보장치가 달려 있었다. 소피는 지상으로 내려가는 지그재그 모양의 계단으로 랭던을 이끌었다. 그들은 속력을 냈다.
  소피를 따라 서둘러 내려가던 랭던은 입을 열었다.
  “당신 할아버님 말입니다. 당신에게 별표에 대해서 얘기할 때, 여신숭배라든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분개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나요?”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난 수학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황금비율이라든가, PHI, 피보나치 수열, 그런 것들요.”
  랭던은 놀랐다.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PHI 숫자를 가르쳤다는 겁니까?”
  소피의 표정이 수줍게 변했다.
  “물론이죠. 황금비율도요. 사실 할아버지는 내가 반은 황금이나 다름없다는 농담을 했어요 ...... 있잖아요. 내 이름에 들어간 글자들 때문에.”
  랭던은 잠시 생각하다가 신음했다.
  ‘소피...... s-o-PHI-e'
  계단을 내려가며, 랭던은 PHI에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 생각한 것보다 소니에르의 단서들이 훨씬 일관성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빈치 ...... 피보나치 수열...... 별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한 가지 개념에 연결되어 있었다. 예술사에서 가장 기본 개념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랭던은 종종 몇 주에 걸쳐 강의를 했다.
  ‘PHI'
  갑자가 기억이 하버드로 되돌아가, <예술의상징> 수업시간에 서있는 것 같았다. 랭던은 칠판에 자기가 좋아하는 숫자를 적고 있었다.
  ‘1.618’
  랭던은 학생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 숫자가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뒤에서 수학과의 다리 긴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PHI(그리스 알파벳의 21번째) 숫자입니다.”
  학생은 ‘피-’라고 발음했다.
  “잘했네. 스테트너. 여러분, PHI입니다.”
  싱글거리면서 스테트너가 덧붙였다.
  “PI(그리스 알파벳의 16번째)와 혼동해서는 안되죠. 우리 수학자들은 ‘PHI'의 하나밖에 없는 H가 PI보다 훨씬 멋있다!고 말하길 좋아하죠.”
  랭던은 웃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스테트너는 풀이 죽었다.
  “이 숫자 PHI는 1.618이다. 예술에서 아주 중요한 숫자지. 그 이유를 말해 줄수 있는 사람 있나?”
  “매우 아름답기 때문이 아닌가요?”
  스테트너가 생기를 되찾으며 물었다.
  모두가 웃었다.
  랭던이 말했다.
  “사실, 스테트너가 맞다. 일반적으로 PHI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숫자로 간주된다.”
  웃음은 즉시 가라앉았다. 스테트너 혼자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슬라이드 영사기를 설치하면서, 랭던은 이 숫자가 피보나치 수열에서 나온 것임을 설명했다. 연속된 두 숫자의 합이 다음 숫자와 같아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연속된 두 숫자를 서로 나누어 보면 그 몫이 거의 1.618, 즉 PHI 값과 항상 비슷하게 나오기 때문에 더 유명한 수열이다. PHI!
  PHI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신비로운 수학적인 면모에 기원이 있는 것 같지만, PHI의 진정한 매력은 자연의 일부를 이루는 그 역할에 있었다. 식물,동물 심지어 인체에서도 ‘PHI:1' 이라는 기이한 비율을 찾아볼 수 있다.
  강의실의 불을 끄면서 랭던은 설명했다.
  “PHI는 자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우연과는 거리가 멀지, 그래서 고대인들은 PHI를 신이 미리 정해 놓은 숫자라고 생각했다. 옛날 과학자들은 1:1.618을 황금비율이라고 불렀지.”
  앞줄에 앉은 젊은 여학생이 말했다.
  “잠깐만요. 전 생물학 전공인데요, 자연에서 이런 황금비율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요.”
  랭던은 싱긋 웃었다.
  “없어? 그럼 꿀벌 집단에서 수벌과 암벌의 관계를 공부했나?”
  “물론이죠. 암벌의 수가항상 수벌보다 많죠.”
  “정확해. 그럼 수벌의 수로 암벌의 수를 나누면, 항상 똑같은 숫자가 나온다는 것을 아나?”
  “그런가요?”
  “그래, 바로 PHI지”
  여학생은 숨을 멈추었다.
  “말도 안 돼요!”
  “말이 돼. 이걸 알아볼 수 있겠나?”
  랭던은 웃으면서 곧바로 되받았다. 그리고 나선형의 조개 사진을 영사기 위에 올렸다.
  생물학 전공 학생이 말했다.
  “앵무조개네요. 조개 속 빈 공간으로 가스를 뿜어서, 바닷속에서 떠다닐 수 있게 자기를 조정하는 두족형 연체동물이예요.”
  “정확해. 여기 조개 껍질의 나선들이 보이는데 말이야. 한 나선과 그 다음 나선의 직경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맞힐 수 있겠나?”
  앵무조개의 소용돌이 모양의 나선에 눈을 붙이고 있는 여학생의 표정은 자신이 없어보였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PHI. 황금비율이야. 1:1.618”
  학생은 놀란 표정이었다.
  랭던은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해바라기의 씨받이를 근접 촬영한 것이었다.
  “해바라기씨들은 앵무조개의 나선형과는 반대로 자라지. 각 나선의 직경은 다음 나선의 직경과 어떤 비율을 이룰까?”
  “PHI?"
  모두가 대답했다.
  “빙고.”
  랭던은 다음 슬라이드로 손을 뻗었다. 나선형으로 자라는 솔방울. 식물줄기의 잎새 배열. 곤충 분할. 놀랍게도 모두가 황금비율에 들어맞았다.
  “정말 놀라운데!”
  누군가 외쳤다.
  “정말 놀라워요. 그런데 그게 예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하! 드디어 물어보셨군.”
  랭던은 다른 슬라이드를 꺼냈다. 노랗게 바랜 양피지 위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알몸의 남자가 들어있었다.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이름을 딴 유명한 스케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였다. 비트루비우스는 저서 <건축학>에서 황금 비율을 찬탄한 로마 시대의 뛰어난 건축가다.
  “다 빈치보다 인체의 황금구조를 잘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빈치는 인간의 뼈 구조의 정확한 비율을 알아내기 위해서 실제로 시체를 파내기도 했지. 그는 말 그대로 인체가 항상 PHI를 이루는 덩어리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이야.”
  모든 학생들이 랭던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랭던은 제안했다.
  “날 믿지 못하겠나 보지? 다음에 샤워할 일이 있으면 자기 몸을 재보게.”
  몇몇 풋볼 선수들이 킬킬거렸다.
  “운동선수들만이 아니야. 여러분 모두, 남학생 여학생 모두, 한번 재봐. 먼저 머리끝에서부터 바닥까지 재고, 그 길이를 배꼽에서 바닥까지 잰 길이로 나누는 거지. 어떤 숫자가 나올까?”
  “PHI는 아닐 겁니다!”
  운동선수들 가운데 하나가 불신에 찬 목소리로 불쑥 내뱉었다.
  랭던은 대답했다.
  “아니. PHI야. 1.618이지. 다른 예를 더 원하나? 어깨에서 손가락 끝까지 잰 후에. 그 길이를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 잰 길이로 나눠 봐. 다시 PHI야. 하나 더? 엉덩이에서 바닥까지 잰 뒤 무릎에서 바닥까지 잰 길이로 나눈다. PHI? 물론이지. 손가락 마디, 발가락 마디, 척추관절 마디, 모두 PHI, PHI, PHI야. 여러분, 여러분 각자의 몸은 걸어다니는 황금비율의 기념품이다.”
  어둠 속에서도 랭던은 학생들이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랭던은 몸안에서 익숙한 열기를 느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가르치는 이유였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혼돈의 세상에도 그 바닥에는 질서가 흐른다. 고대인들이 PHI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신이 세상을 위해 만들어 놓은 덩어리들 사이로 서툴게 돌아다닐 뿐이라고 믿었지. 그래서 그들은 자연을 숭배한 거야. 지금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지. 신의 손은 분명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야. 심지어 오늘날에도 어머니인 지구를 경배하는 종교들이 존재한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교들이 하는 식으로 자연을 찬미하지. 다만 그런 줄 모르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야. 메이 데이 같은 경우가 완벽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봄이 다시 찾아온 것을 축하하고, 땅이 생명을 되찾게 해준 자연의 관대함에 감사를 드리는 거지. 황금비율에 대한 신비로운 마술은 태초부터 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그저 자연의 규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거든. 왜냐하면 조물주의 손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모방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여러분은 예술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황금비율의 예를 만나게 될 거야.”
  나머지 30분을, 랭던은 학생들에게 미켈란젤로, 알브레이트 뒤러, 다 빈치 그 외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슬라이드로 보여 주었다. 모두들 작품속에서 황금비율을 고의적으로, 그리고 열성적으로 사용한 사람들이었다.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이집트의 피라미드, 심지어 뉴욕에 있는 UN빌딩 같은 건축물에서도 PHI를 볼수 있다는 것을 랭던은 제시했다. PHI는 작곡에서도 나타나는데, 버르토크, 드뷔시, 슈베르트를 비롯해 모차르트의 소나타들과 베토벤의 5번 교향곡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명장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바이올린을 제작할 때, F홀의 정확한 자리를 계산해 내기 위해서 PHI 숫자를 이용했다는 얘기도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랭던은 칠판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끝으로 칠판에 다섯 개의 선을 그어 오각형의 별을 만들었다.
  “이 기호는 이번 학기에 여러분이 보게 될 기호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기호다. 별표라고 불리는 이 기호는 여러 문화에서 신성하면서도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 그런지 말해 볼 사람?”
  스테트너가 손을 들었다.
  “왜냐하면 별 모양을 그릴 때, 선들이 황금비율에 따라 자동적으로 분할되기 때문입니다.”
  랭던은 뿌듯한 표정으로 학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래, 별에 있는 모든 선들의 비율은 정확히 PHI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기호를 황금비율의 궁극적인 상징이라고 하지. 이러한 이유로 오각형의 별 모양은 여신과 신성한 여성을 나타내는 아름다움의 완벽의 상징이 되어 왔다.”
  여학생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한 가지만 말해두자. 오늘 우리는 그저 다 빈치를 슬쩍 건드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우리는 훨씬 더 자주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여신을 고대 방식으로 숭배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까 . 내일은 그의 유명한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을 보여줄거야. 여러분이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신성한 여성에 대해 가장 놀라운 찬사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누군가 말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최후의 만찬>은 예수에 관한 그림으로 알고 있는데요.”
  랭던은 윙크했다.
  “여러분이 결코 상상도 못할 상징들이 그림에 숨겨져 있지.”
  소피가 속삭였다.
  “이봐요. 뭐가 잘못됐어요? 거의 다 왔어요. 서둘러요.”
  딴생각에 빠져든 마음을 추스르며 랭던은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계단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랭던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몸이 굳었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소피가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어.’
  랭던은 생각했다.
  하지만 랭던은 알아냈다.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큰 그릇 속에...... PHI와 다 빈치의 이미지가 한데 뒤섞여 소용돌이치면서 랭던의 마음으로 밀려 들어왔다. 랭던은 자기도 모르게 소니에르의 코드를 풀어 버린 것이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이건 가장 간단한 코드야!”
  랭던보다 아래 계단에 있던 소피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랭던을 올려다보면서 멈춰 섰다.
  ‘코드?’
  밤새도록 숙고했지만, 어떤 기호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아주 간단한 것도.
  랭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말했소. 피보나치의 숫자들은 올바른 순서로 있어야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장난일 뿐이라고 말이오.”
  랭던이 무슨 얘길 하려는지 소피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피보나치 숫자들?’
  소피는 그 숫자들이 단지 오늘 밤 벌어진 사건에 암호 해독부서를 참여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거기에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
  그녀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 종이를 꺼내 들고, 소니에르가 남긴 메시지를 다시 살폈다.
  13-3-2-21-1-1-8-5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이 숫자들이 뭐 어떻다는 거지?’
  종이를 가져가며 랭던이 말했다.
  “뒤섞어 놓은 피보나치 수열이 단서입니다. 이 숫자들이 다른 부분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에 대한 단서인 거죠. 아무 의미 없이 숫자들을 늘어놓은 것처럼. 같은 식으로 글자들을 해석하라는 의미인 겁니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이 말들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아무렇게나 적어 놓은 글자들일 뿐이지요.”
  소피는 랭던의 암시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무척 간단한 얘기였다. 소피는 랭던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당신 생각은. 이 메시지가...... 아나그램(철자 바꾸기)? 신문에서 아무 말이나 골라낸 것처럼요?”
  랭던은 소피의 얼굴에 떠오른 의심을 볼 수 있었지만,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사소한 장난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아나그램이 기호학에서 얼마나 풍부한 역사를 지녔는지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카발라(중세 유대교의 신비철학 또는 밀교)의 신비한 가르침은 아나그램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 헤브라이어 글자들을 재배치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프랑스 왕들은 아나그램에 마법의 힘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왕들은 왕립 아나그램 전문가들을 임명해, 중요한 자료를 분석할 때 돕도록 했다. 로마 사람들은 실제로 아나그램에 관한 학문을 아르스 마그나, 즉 위대한 예술이라고 불렀다.
  랭던의 눈동자는 소피의 눈을 붙들고 있었다.
  “당신 할아버님의 뜻은 바로 우리 코앞에 있었소. 그분은 충분한 단서를 우리에게 남긴 거요.”
  아무 말 없이 랭던은 외투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들고, 각 줄의 글자들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O,Draconian devil!)
  오, 불구의 성인이여!(Oh, lame saint!)
  이 글자들은 완벽한 아나그램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모나리자!(The Mona Lisa!)

21

  모나리자.
  출구 계단에 서 있던 소피는 순간, 루브르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아나그램에 대한 그녀의 충격에는 그 메시지를 스스로 풀지 못했다는 창피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복잡한 암호 해독법에 관한 한 전문가인 그녀의 지식이 가장 단순한 말장난을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다. 당연히 알아냈어야  했다고 소피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아나그램에 무지하지 않았다. 특히 영어로 된 아나그램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녀가 어렸을 때, 영어 철자법을 훈련시키기 위해 소니에르는 종종 아나그램 게임을 사용했다. 한번은 ‘행성들(planets)'이란 단어를 불러주고, 각 철자의 순서를 바꾸면서 조합하면 무려 92개의 다른 영어 단어들이 생긴다고 소피에게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영어 사전을 안고 사흘을 꼬박 투자한 끝에 92개의 단어를 모두 찾아냈다.  종이를 들여다보며 랭던이 말했다.
  “당신 할아버님은 죽기 전 고작 몇 분 동안에 어떻게 이런 복잡한 아나그램을 만들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가 없군요.”
  소피는 랭던의 호기심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그녀의 기분을 더 악화시켰다.
  ‘내가 당연히 알아냈어야 했어!’
  말장난 애호가이자 예술을 사랑한 할아버지가 유명한 예술작품들의 제목으로 아나그램 만들기를 즐겼다는 것을 소피는 기억하고 있었다. 소피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만든 아나그램 중 하나는 할아버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미국의 한 예술잡지와 인터뷰하면서, 소니에르는 현대 큐비즘 운동에 대한 혐오를 표한한 적이 있었다. 이때 피카소의 걸작,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더럽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낙서(vile meaningless doodles)'라는 완벽한 아나그램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피카소 애호가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다.
  “아마 할아버지는 모나리자의 아나그램을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 두었을 거예요.”
  랭던을 흘끗 올려다보며 소피는 말했다.
  ‘그리고 오늘 밤 임시변통의 암호로 그것을 썼을 거고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차갑고 정확하게 들려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왜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유명한 그림에 관한 언급인지 소피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었다. 심란한 가능성이었다.
  ‘이 메시지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모니리자>를 찾아가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거기에 할아버지는 다른 메시지를 남긴 것일까? 이 생각은 그럴듯해 보였다. 어쨌든 이 유명한 그림은 살 데 제타에 걸려 있는데, 살 데 제타는 오직 대화랑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모나리자> 전용 관람실이었다. 소피는 이제야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죽은 장소에서, 겨우 20미터 떨어진 곳에 살 데 제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모나리자>에게 다녀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내려온 비상계단을 다시 올려다보며 소피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랭던을 즉시 박물관에서 빼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본능은 반대로 움직이라고 그녀를 재촉했다. 소피는 드농 관을 처음 방문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만일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말해 줄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다 빈치의 <모나리자>보다 적당한 만남의 장소는 없음을 소피는 깨달았다.
  “그녀는 조금 멀리 있단다.”
  소피의 작은 손을 꼭 쥐고서 할아버지는 속삭이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관람시간이 지난 한적한 박물관 안을 그녀를 데리고 걷고 있었다.
  소피는 여섯 살이었다.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어지러운 바닥을 내려다본 어린 소피는 자기가 작고 하찮게 느껴졌다. 텅 빈 박물관은 어린 그녀를 겁나게 했지만, 할아버지가 눈치 채지 않게 애쓰고 있었다. 턱을 단단히 죄고 할아버지의 손이 이끄는 대로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살데 제타란다.”
  루브르의 가장 유명한 방에 거의 이르렀을 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드러나게 즐거워하는 듯했지만, 어린 소피는 집에 가고 싶었다. 책에서 이미 <모나리자>를 보았지만, 소피는 그녀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모든 사람이 그녀 앞에서 야단법석을 떠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분해요.”
  소피가 툴툴거렸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집에서는 영어를 쓰라고 했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집이 아냐!”
  소피는 반항적으로 외쳤다.
  할아버지는 피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구나. 그럼 그저 재미삼아 영어로 얘기해 볼까.”
  소피는 입을 삐죽 내밀고 계속 걸었다. 두 사람이 전용 관람실에 들어갔을때, 소피의 눈이 작은 방을 훑어보다가 가장 유명한 지점에 딱 멈췄다. 오른쪽 벽 중앙에 초상화 하나가 보호용 유리벽에 둘러싸여 외롭게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문가에 서서, 그림 쪽으로 가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가봐라, 소피. 그녀를 혼자 볼 수 있는 기회란 그리 흔치 않단다.”
  불안감을 참고서, 어린 소피는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갔다. <모나리자>에 관해 모든 것을 들은 뒤라, 소피는 마치 왕족을 알현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보호 유리벽에 이르자, 소피는 숨을 참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림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에서 무얼 기대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흥분의 도가니도 아니었고, 순간의 감동도 아니었다. 그림의 유명한 얼굴은 책에 나온 그대로였다. 뭔가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영원처럼 느껴지는 침묵 속에 소피는 서 있었다.
  조용히 소피 뒤로 다가와 할아버지는 속삭였다.
  “그래, 어떻니? 아름답지, 그렇지?”
  “그녀도 작아요.”
  소니에르는 미소를 지었다.
  “너도 작고, 또 아름답지.”
  ‘난 아름답지 않아.’
  소피는 자기의 빨간 머리와 얼굴의 주근깨가 싫었다. 게다가 같은 반의 남자애들보다 키도 컸다. 소피는 <모나리자>를 뒤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 여자는 책에서 본 것보다 못생겼어요. 얼굴이......”
  “안개가 낀.”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었다.
  “안개가 낀.”
  새 단어를 배웠을 때 반복해서 말하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계속 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피는 얼른 따라했다.
  할아버지는 소피에게 말했다.
  “저건 회화에서 스푸마토(인물을 어스름한 안개로 감싸는 기법. 몽환적 효과를 나타낸다)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거란다. 매우 하기 어려운 거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른 누구보다 저 기법에 뛰어났단다.”
  소피는 여전히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여자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비밀을 갖고 있는 것처럼요.”
  할아버지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게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란다. 사람들은 왜 <모나리자>가 미소짓고 있는지 추측하기를 좋아하지.”
  “할아버지는 왜 <모나리자>가 웃고 있는지 알아요?”
  할아버지는 윙크했다.
  “아마도, 언젠가는 네게 모든 것을 말해 줄게.”
  소피는 발을 굴렀다.
  “할아버지, 말했잖아요. 난 비밀이 싫어요!”
  “프린세스, 삶은 항상 비밀로 가득 차 있는 거란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단다.”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난 다시 위로 올라가 봐야겠어요.”
  소피의 목소리는 계단 통로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모나리자>한테 말입니까? 지금?”
  랭던이 되물었다.
  소피는 위험을 고려해 보았다.
  “나는 살인 용의자가 아니예요.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어요. 할아버지가 내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이해해야 해요.”
  “그럼 대사관은?”
  소피는 랭던을 도망자로 만들어 버린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게다가 이제는 혼자 버려 두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소피는 계단 아래의 금속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랭던에게 자동차 열쇠를 건넸다.
  “저 문을 통해서 가세요. 출구 표시등을 계속 따라가면 돼요. 할아버지는 저를 이리로 내보내곤 했어요. 출구 표시등을 따라가면 보안 회전문이 나올거예요. 일방 통행문인데 열려 있어요.제 차는 직원용 주차장의 빨간색 스마트카예요. 이 벽 바로 너머예요. 대사관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나요?”
  손에 든 열쇠를 바라보며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할아버지가 <모나리자>가 있는 방에 메시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에 대한 단서 같은 거요. 아니면 내가 왜 위험에 처해 있는지 알려주거나.”
  ‘아니면,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거나.’
  “나는 올라가서 확인해 봐야겠어요.”
  “하지만 소니에르 씨가 당신이 왜 위험에 처해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면, 왜 죽은 자리에 그냥 적어 두지 않았겠습니까? 왜 이런 복잡한 말장난을 남겼을까요?”
  “할아버지가 제게 말하려던 게 무엇이든 간에. 누구나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할아버지가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심지어 경찰이라 해도 말이예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가보기 전에 제가 <모나리자>에게 다녀가기를 할아버지가 원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직 그녀를 통해서만 비밀스러운 내용이 직접 전달될 수 있도록 할아버지가 모든 힘을 기울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비밀 이니셜을 포함해서, 코드화된 문장을 바닥에 적었고, 로버트 랭던을 찾으라고 그녀에게 요청한 것이다. 이 미국인 기호학자가 할아버지의 코드를 풀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현명한 요청인 셈이다.
  “나도 함께 가겠소.”
  “안 돼요! 대화랑이 얼마나 오래 비어 있을지 알 수 없어요. 당신은 나가야 해요.”
  학문적인 호기심이 이성적인 판단을 위협해, 결국 파슈의 손에 끌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랭던은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 가세요. 랭던씨, 대사관에서 만나요.”
  소피는 랭던에게 감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랭던은 시무룩해 보였다.
  “그럼 거기서 한 가지 조건으로 만나겠소.”
  확고한 목소리로 랭던은 응답했다.
  소피는 놀란 듯 머뭇거렸다.
  “그게 뭔데요?”
  “나를 랭던 씨라고 부르지 않는 겁니다.”
  시원한 웃음이 랭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소피는 느낄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소피가 말했다.
  “행운을 빌어요. 로버트”
  계단 아래로 내려서자, 의심할 여지없는 아마인유 냄새와 석고 먼지들이 랭던의 콧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앞쪽에는 출구 표시등이 긴 복도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랭던은 복도로 들어섰다. 오른쪽에는 어둑어둑한 작품 복원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안에 보수가 필요한 조각상들이 한 무더기 서 있는 게 보였다. 왼쪽으로는 하버드의 미술교실을 닮은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 안에는 이젤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림과 팔레트, 액자 도구들이 보였다.
  복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랭던은 어느 순간 케임브리지에 있는 자기 침대에서 놀라 잠이 깨는 것은 아닌지 의아했다. 이 밤 전체가 기묘한 꿈만 같았다.
  ‘나는 지금 루브르 박물관을 절박하게 빠져나가는 중이다...... 그것도 도망자가 되어서.’
  랭던은 여전히 소니에르의 재치 있는 아나그램 메시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피가 <모나리자>에서 뭔가를 발견했는지 궁금했다. 만일 뭔가가 있다면 말이다. 그녀는 소니에르가 그 유명한 그림을 방문하도록 자신을 유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이지만, 랭던은 뭔가 찜찜했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소니에르는 마룻바닥에 랭던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소피에게 랭던을 찾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저 소피가 아나그램을 풀도록 돕기 위해서? 그것은 매우 이상했다. 랭던이 아나그램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소니에르가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소피가 당연히 자신의 힘으로 아나그램을 풀었어야 했다고 말한 점이다. 피보나치 수열을 생각해 낸 것도 소피고, 의심할 여지없이 시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랭던의 도움 없이도 메시지를 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혼자서 아나그램을 풀게 되어 있었다.’
  랭던은 확신했다. 하지만 소니에르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분명히 있었다.
  복도를 내려가면서 랭던은 궁금했다.
  ‘왜 나지? 왜 소니에르 씨는 관계가 소원한 손녀에게 나를 찾아내기를 절실히 원했을까? 소니에르 씨는 내가 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동요로 랭던은 걸음을 멈췄다. 랭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주머니를 뒤져 프린트물을 꺼냈다. 랭던은 소니에르가 남긴 마지막 줄을 응시했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랭던은 두 글자에 눈을 고정시켰다.
  ‘P.S.'
  순간, 랭던은 소니에르의 수수께끼 같은 기호들이 렌즈의 초점을 맞춘것처럼 뚜렷하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둥소리처럼 기호학과 역사에 대해 가치 있는 그의 경력이 주위로 부서져 내렸다. 오늘 밤 자크 소니에르가 저지른 모든 일이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랭던의 생각은 계속 달려갔다. 랭던은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암시들을 조합해 보려고 노력했다. 몸을 빙 돌려, 랭던은 자기가 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시간이 될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랭던은 계단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22

  첫째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일래스는 기도하는 척하며 교회 내부의 배치를 관찰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처럼, 생 쉴피스도 거대한 로마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처럼, 생 쉴피스도 거대한 로마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중앙의 본당은 곧장 제단으로 향하고, 제단은 수랑(袖廊:십자형 회당의 좌우 날개부분)이라고 불리는 구역과 교차되었다. 본당과 수랑이 만나는 지점은 정확히 교회의 둥근 지붕 바로 밑이며, 교회의 심장부로 간주되는 곳이다...... 교회 안에서 가장 신성하고 신비로운 지점.
  ‘하지만 오늘 밤은 아니다. 생 쉴피스는 어딘가에 비밀을 감추고 있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사일래스는 남쪽 수랑을 응시했다. 그리고 오른쪽 뒤편, 마지막 줄의 의자 너머로 보이는 차가운 교회 바닥에서 희생자들이 묘사한 물체를 찾았다.
  ‘저기 있다.’
  회색 화강암 바닥에 윤기 나게 잘 닦인 가는 황동 선이 반짝거렸다...... 황동색 선이 교회 바닥을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선에는 자처럼 눈금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 선은 해시계였다. 이교도적인 천문 관측기라고 들었다. 세계 도처에서 관광객과 과학자, 역사가 그리고 이교도 들은 이 유명한 선을 보기위해 생 쉴피스 교회로 몰려들었다.
  ‘로즈 라인(Rose Line)'
  사일래스는 천천히 황동선의 궤적을 추적했다. 선은 사일래스의 오른쪽 끝에서 왼쪽 앞으로 교회 바닥을 가로지르는데, 사일래스 앞에서 약간 이상한 각도로 틀어지는 바람에 대칭형인 교회와는 전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제단을 자르면서 지나가는 선이 사일래스에게는 고운 얼굴에 난 상처처럼 보였다. 선은 교회를 둘로 나누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체 폭을 가로지르는 셈이었다. 결국 선이 끝나는 곳은 북쪽 수랑이 있는 구역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혀 예기치 못한 구조물이 서있었다.
  거대한 이집트 오벨리스크.
  여기에서 로즈 라인은 90도로 방향을 틀어 수직으로 올라갔다. 오벨리스크 자체를 직접 타고 오르는 것이다. 오벨리스크를 타고 10미터를 올라간 로즈 라인은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서 마침내 진행을 멈추었다.
  ‘로즈 라인. 이 라인에 조직은 쐐기돌을 숨겼다.’
  오늘 밤 일찍, 스승에게 쐐기돌이 생 쉴피스 교회 안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을 때, 스승은 미심쩍어했다. 하지만 사일래스가 생 쉴피스 바닥을 지나는 황동 선과 관련해, 형제들이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덧붙이자, 스승은 뜻밖의 사실에 숨을 들이켰다.
  “지금 로즈 라인을 말한 것이냐!”
  스승은 재빨리 사일래스에게 생 쉴피스 교회의 유명한, 그러면서도 기이한 건축 특성에 대해 알려주었다. 정확히 남북을 축으로 서 있는 교회를 로즈 라인이 분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즈 라인은 고대 해시계의 일종이며, 한때 이교도의 사원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던 흔적이라는 내용이었다. 극점에서 극점으로 움직이는 태양광선이 남쪽 벽의 둥근 창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매일 선 아래를 따라 움직인다는 거였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이 선이 로즈 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수세기 동안, 장미는 영혼을 바른 곳으로 인도한다는 지도와 관련된 상징이었다. 거의 모든 지도에 그려져 있는 ‘로즈 나침반’은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원래는 ‘바람의 로즈’라고 불렸는데, 이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나침반에서 서른 두 개의 바람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여덟 개의 주요 바람. 주요 바람들 사이에 또 여덟 개의 중간 바람, 그리고 여덟 개 중간바람들 사이에 열 여섯 개의 바람들. 하나의 원 안에 나침반의 서른 두 개 방향의 점을 찍어 원들을 그려내면, 서른 두 장의 꽃잎을 가진 전통적인 장미 모양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기본적인 항해 도구를 로즈 나침반이라고 하는데, 북쪽은 항상 화살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아니 좀더 보편적으로는 붓꽃의 상징이다.
  지구에서 자오선 또는 경선이라고 불리는 로즈 라인은 북극과 남극을 잇는 상상의 선이다. 지구의 어느 지점에서라도 북극과 남극을 잇는 경선이 있기 때문에 로즈 라인의 수는 사실 무한하다고 볼 수 있다. 초기 항해사들의 의문은 무한한 경선들 가운데, 어느 것을 로즈 라인, 즉 경도0으로 불러야 하느냐였다.
  오늘날 이 라인은 영국의 그리니치에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제1자오선으로 그리니치가 선정되기 전에, 전세계의 경도0은 프랑스 파리의 생 쉴피스 교회를 통과했다. 생 쉴피스의 황동 선은 세계의 첫째 주요 자오선이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비록 1888년에 그리니치가 그 영광을 가져갔지만, 본래의 로즈 라인은 여기 남아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볼 수가 있다.
  스승은 사일래스에게 말했다.
  “그래, 전설이 사실이었군. 쐐기돌은 장미의 표식 아래 누워있을 것이다.”
  벤치에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사일래스는 교회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순간, 성가대 발코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사일래스는 몸을 돌려 잠시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 혼자다’
  사일래스는 일어서서 제단을 마주했다. 그리고 세 번 무릎을 꿇었다. 그런 뒤에 왼쪽으로 돌아서서 오벨리스크로 향한 황동 선을 따라갔다.
  그때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 공항에서는, 착륙하는 비행기의 타이어 소리가 아링가로사 주교의 선잠을 깨웠다.
  ‘잠이 들었었군.’
  잠이 들 정도로 자신이 편안한 상태라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인상적이었다.
  “로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행기의 안내방송이었다.
  자리에 앉아 아링가로사는 검정 사제복의 주름을 펴고, 좀처럼 짓지 않는 웃음까지 지었다. 행복한 여행이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방어적으로 지내왔어.’
  하지만 오늘 밤 규칙은 바뀔 것이다. 겨우 다섯 달 전만 해도, 아링가로사는 자기 신념의 미래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마치 신의 뜻인 것처럼 해답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한 개입’
  오늘 밤 파리에서의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 이루어진다면, 아링가로사는 기독교 세계에서 그를 가장 강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뭔가를 곧 갖게 될 터였다.

23

  숨을 헐떡이며 소피는 살 데 제타의 커다랗고 육중한 문에 도착했다. 들어가기 전에 소피는 홀 아래쪽을 마지못해 바라보았다.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할아버지가 지중 조명을 받으며 조용히 누워 있었다.
  갑자기 강한 후회가 그녀를 붙들었다. 죄책감과 함께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지난 10년 동안 할아버지는 수천 번이나 그녀와 접촉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피는 할아버지의 편지와 소포들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한 할아버지의 노력을 부인하면서 말이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끔찍한 비밀을 감추고 있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자기에게서 몰아냈다. 완전히.
  이제 할아버지는 죽었고, 무덤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모나리자.’
  소피는 거대한 목재 문을 밀었다. 입구가 하품하듯이 살짝 열렸다. 소피는 문턱에 서서, 잠시 사각형의 큰 방을 살펴보았다. 이 방 역시 부드러운 붉은 조명 아래에 있었다. 대화랑 한가운데에 있는 살 데 제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몇 개밖에 되지 않는 막다른 방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 밀고 들어간 이 문이 전용 관람실의 유일한 출입문이었다. 문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4.5미터나 되는 보티첼리의 그림이 걸려있다. 그 아래 방 중앙에는 팔각형 모양의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다. 루브르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을 구경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피는 한 가지 빼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불가시광선.’
  저기 아래에서 여러 전자기구에 둘러싸여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할아버지가 여기에 뭔가를 적었다면, 워터마크펜으로 적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소피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환한 범죄 현장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할아버지를 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PTS 도구를 찾는 데 집중했다. 작은 자외선 만년필형 손전등을 찾아내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둘러 전용실의 열린 문으로 돌아갔다.
  문턱을 넘어 들어가려는 순간, 소피는 방 안에서 서둘러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안에 있다.’
  어두컴컴한 붉은 조명에서 유령 같은 형체가 불쑥 나타났다. 소피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여기 있었군!”
  그녀 앞으로 다가오며 랭던의 거친 속삭임이 공기를 갈랐다.
  소피가 안도감을 느낀 건 순간뿐이었다.
  “로버트, 빠져나가라고 말했을 텐데요! 만일 파슈가......”
  “어디 있었어요?”
  “불가시광선이 필요해서요. 할아버지가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면......”
  랭던의 푸른 눈이 그녀를 확고하게 붙들었다.
  “소피, 들어봐요. P.S.라는 글자들...... 그 글자들이 당신에게 다른 의미는 없어요? 전혀?”
  그들의 목소리가 홀 아래로 울려퍼질 것이 두려워, 소피는 랭던을 전용 관람실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육중한 문을 가만히 닫았다.
  “말했잖아요. 그 이니셜은 프린세스 소피라고.”
  “압니다. 그런데 그게 다른 곳에 쓰인 것을 본 적이 없냐고요? 당신 할아버지가 다른 식으로는 P.S.를 사용한 적이 없느냔 말입니다? 가령, 모노그램으로라든가 아니면 문서라든가, 무슨 개인 물품 같은 것에 말이오.”
  랭던의 질문은 소피를 놀라게 했다.
  ‘랭던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지?’
  정말로 소피는 전에 한 번 P.S.를 모노그램의 형태로 본 적이 있었다.
  아홉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할아버지가 숨긴 생일 선물을 찾아서 소피는 집 안을 몰래 훑고 있었다. 그때는 자기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싫었다.
  ‘할아버지가 올해에는 어떤 선물을 주실까?’
  소피는 벽장과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내가 갖고 싶어하는 인형을 주시겠지? 그런데 그걸 어디에 숨기신 거야?’
  집 안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자, 소피는 용기를 내 할아버지의 침실로 살며시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침실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아래층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얼른 둘러만 봐야지!’
  발끝을 들고 삐걱거리는 나무 마룻바닥을 가로 질러 할아버지의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들 뒤에 있는 선반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아래도 살폈지만 역시 없었다. 할아버지의 책상으로 다가가서, 소피는 사람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여기에 있을 거야!’
  서랍 하나만 남아 있을 때까지 인형의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낙담한 소피는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입은 적이 없는 검은 색 옷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안쪽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뭔가가 소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계줄처럼 보였지만, 할아버지에겐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소피는 알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를 깨닫자 소피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목걸이!’
  소피는 조심스럽게 줄을 잡아당겼다. 놀랍게도 줄 끝에는 반짝이는 황금열쇠가 달려 있었다. 열쇠는 묵직하고 아른아른하게 빛났다. 마법에 걸린듯, 소피는 열쇠를 집어 들었다. 대부분의 열쇠들은 납작한 다리에 톱니 모양의 이빨 자국들이 나 있지만 이 열쇠는 삼각기둥 모양의 다리에 온통 작은 곰보 자국뿐이었다. 큰 열쇠 머리는 시자가 모양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십자가는 아니었다. 팔길이가 다 같은 더하기(+) 모양이었다. 십자의 한가운데에는 이상한 기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꽃처럼 생긴 디자인과 두 글자가 서로 얽혀 있었다.
  소피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뭐지?’
  “소피?”
  할아버지가 문가에 서 계셨다.
  너무 놀란 소피는 돌아보다가 쨍, 소리를 내며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무서워 소피는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저...... 생일 선물을 찾고 있었어요.”
  소피는 머리를 숙였다. 자기가 할아버지의 신뢰를 배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원같이 느껴지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침묵을 지키며 문가에 서 있었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열쇠를 주워라. 소피.”
  소피는 열쇠를 집었다.
  할아버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온화하게 무릎을 꿇고 , 할아버지는 소피에게서 열쇠를 가져갔다.
  “소피, 넌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열쇠는 아주 특별한 거란다. 만일 내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할아버지의 조용한 목소리가 소피의 기분을 더 처참하게 만들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난 이게 제 생일 선물인 목걸이라고 생각했어요.”
  할아버지는 잠시 소피를 쳐다보았다.
  “소피, 이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한번 더 네게 말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 할아버지.”
  “나중에 더 얘기하자. 지금은 정원에서 잡초를 좀 뽑아야 할 것 같구나.”
  소피는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음 날 아침, 소피는 할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선물도 받지 못했다. 어제일 때문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생일날 밤, 슬픈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려던 소피는 침대에 기어오르다가 베개 위에 놓은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위에는 단순한 수수께끼가 적혀 있었다. 수수께끼를 풀기도 전에, 소피는 벌써 웃고 있었다.
  ‘뭔지 알아!’
  지난 크리스마스 아침에도 소피를 위해 할아버지가 이런 장난을 했다.
  ‘보물찾기!’
  수수께끼를 풀 때까지 소피는 카드에 골몰했다. 해답은 집 안의 다른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고, 거기에는 다른 수수께끼 카드가 놓여 있었다. 이걸 풀고 ,소피는 다음 장소로 또 달려갔다. 단서들을 쫓아 집 안 여기저기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던 소피는 마침내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었다. 해답은 다시 자기 침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쏜살같이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뛰어든 소피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방 한가운데에 손잡이에 빨간 리본이 달린 빨간 자전거가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소피는 탄성을 내질렀다.
  “네가 인형을 바란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걸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지.”
  구석에서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다음 날, 할아버지는 소피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다. 소피가 무성한 잔디 위로 자전거를 몰고 가다 균형을 잃으면, 둘은 함께 잔디 위로 구르면서 웃었다.
  할아버지를 껴안으며 소피는 말했다.
  “할아버지, 그 열쇠는 정말 미안해요.”
  “안다. 얘야. 난 널 용서했단다. 내가 어떻게 계속 화낼 수 있겠니. 할아버지와 손녀는 항상 서로 용서하는 거란다.”
  소피는 물어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열쇠는 뭘 여는 거예요? 그런 열쇠는 본 적이 없어요. 아주 예쁘던데.”
  할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소피는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마침내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 열쇠는 어떤 상자를 여는 거란다. 그 안에 이 할아비는 많은 비밀을 보관하고 있거든.”
  소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난 비밀이 싫어요!”
  “나도 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중요한 비밀이란다. 언젠가는 너도 나처럼 그 비밀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게다.”
  “열쇠 위에 글자와 꽃이 있는 걸 봤어요.”
  “그래. 그 꽃은 할아비가 좋아하는 꽃이지. 붓꽃이란다. 우리 집 정원에도 있지.”
  “나도 그 꽃 알아요! 나도 좋아해요!”
  소피에게 뭔가 도전적인 일을 시킬 때면 항상 그랬듯이, 할아버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좋아, 그럼 우리 계약을 하나 맺을까. 네가 내 열쇠를 비밀로 간직하고, 나에게나 다른 누구에게도 절대로 열쇠 얘기를 하지 않겠다면, 언젠가 그 열쇠를 네게 주마.”
  소피는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요?”
  “내 약속하지. 때가 되면, 그 열쇠는 네 것이 될 거야. 그 열쇠에는 이미 네 이름도 있잖아.”
  소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예요. 열쇠에는 P.S.라고 써 있었어요. 내 이름은 P.S.가 아니잖아요.!”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듣는 사람이없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아, 소피. 네가 꼭 알아야 하겠다면 말해주마. P.S는 암호란다. 네 비밀 이니셜이야.”
  그녀는 눈이 둥그레졌다.
  “내 비밀 이니셜이 있어요?”
  “물론이지. 모든 손녀들에게는 오직 할아버지만 아는 비밀 이니셜이 있단다.”
  “P.S.?"
  할아버지는 그녀를 간질였다.
  “프린세스 소피”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난 프린세스가 아니야!”
  “넌 나의 프린세스란다.”
  그후로 둘은 다시는 열쇠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피는 할아버지의 프린세스 소피가 되었다.
  살 데 제타안에서 소피는 깊은 상실감에 젖어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 이니셜을 본 적이 있소?”
  소피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랭던은 속삭였다.
  소피는 박물관 화랑에서 할아버지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열쇠에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내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소피는 할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다시 할아버지의 신뢰를 자신이 어길 수 있을지 궁금했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할아버지는 랭던이 돕기를 원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 한 번 봤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때요.”
  “어디에서요?”
  소피는 망설였다.
  “할아버지에게 아주 중요한 어떤 물건에서.”
  랭던의 눈이 소피의 눈과 얽혔다.
  “소피,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요. 그 이니셜이 다른 상징과 함께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어요? 붓꽃인가요?”
  소피는 너무 놀라 뒤로 비틀거렸다.
  “아니...... 어떻게 당신이 그걸 알죠!”
  랭던은 숨을 토해 내며 소리를 낮췄다.
  “내 장담하건데, 당신 할아버지는 비밀단체의 일원이었을 거예요. 아주 오래되고 은밀한 조직 말이오.”
  소피는 뱃속에 딱딱한 응어리가 뭉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끔찍한 이 사실을 그녀에게 확인시켜 준 사건을 잊기 위해 지난 10년동안 노력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어떤 일을 목격한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어.’
  “붓꽃, P.S라는 이니셜과 결합된 붓꽃은 어떤 조직의 공식적인 의장이죠. 조직의 문장이자 로고인 셈이예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죠?”
  랭던이 자신도 그 조직의 일원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소피는 기도했다.
  “그 조직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비밀단체들의 상징을 연구하는 것이 내 전공이죠. 그들은 자기들을 시온 수도회(Priory of sion) 라고 불렀어요.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유럽 전역에서 힘있는 멤버들을 끌어들였죠. 사실 이 조직은 지구상에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비밀조직이예요.”
  랭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소피는 이런 것들에 관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랭던은 속사포처럼 말하고 있었다.
  “시온 수도회의 회원들을 보면 역사상 가장 고결한 인물들이 몇몇 포함되어 있어요. 예를 들자면, 보티첼리나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등이 그런 사람들이죠.”
  랭던은 학문적 열정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잠시 말을 쉬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어요.”
  소피는 멍하는 쳐다볼 뿐이었다.
  “다 빈치가 비밀단체의 일원이었다고요?”
  “다 빈치는 1510년부터 1519년 사이, 조직의 회장. 즉 그랜드 마스터로서 시온을 이끌었어요 .이 점이 당신 할아버지가 왜 그토록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열정을 보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거요. 당신 할아버지는 레오나르도에게서 역사적으로 맺어진 형제애 같은 것을 공유한 것이 틀림없어요. 그리고 두 사람의 사상은 여신 도상학에 대한 열정이나 이교주의,여신의 신성, 교회에 대한 혐오 등 여러 면에서 완벽하게 들어맞아요. 시온 수도회는 역사적으로 신성한 여성을 찬양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지금 저한테 그 조직이 이교도적인 여신숭배 집단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이교도적인 여성숭배 집단 그 이상이에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고대 비밀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다는 거죠. 조직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만든 비밀.”
  확신에 찬 랭던의 눈을 보면서도, 소피의 솔직한 반응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비밀스러운 이교도 집단이라고? 한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조직을 이끌었다고?’
  모든 것이 터무니없게만 들렸다. 하지만 랭던의 얘기를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려 해도, 그녀의 마음은 10년 전 사건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실수로 할아버지를 놀라게 하고 ,그녀가 아직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그날 밤의 일.
  ‘그걸 설명할 수 있을까?’
  랭던은 말했다.
  “살아 있는 시온 회원들의 신분은 최상급 비밀이예요. 하지만 당신이 아이였을 때 보았다는 P.S와 붓꽃이 증거요. 그것들은 오로지 시온수도회와 관련이 있을 뿐이죠.”
  소피는 자기가 상상한 것보다 랭던이 할아버지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미국인은 그녀와 공유할 수 있는 많은 양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경찰이 당신을 잡아가게 둘 수는 없어요. 로버트, 우리가 서로 의논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나가야 해요!”
  랭던은 소피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정신은 지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고대의 비밀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곳. 역사에서 잊혀진 장소가 어둠에서 나오는 곳이었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랭던은 머리를 천천히 돌려 붉은 안개같은 조명 속에 있는 <모나리자>를 응시했다.
  붓꽃은 불어로 fleur-de-lis다.
  ‘fleru-de-lis...... flower of Lisa (리자의 꽃)......Mona Lisa(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었다. 시온 수도회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역할에 공명하는 소리 없는 교향악처럼 말이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앵발리드 너머 강둑에서, 트레일러를 몰던 운전사가 경찰이 들이댄 총 끝에 둘러싸여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법경찰 반장이 분노에 찬 욕설을 내지르며 넘실대는 센 강에 비누를 던져 버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24

  사일래스는 육중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의 길이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흥분으로 근육이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교회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혼자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 오벨리스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쐐기돌은 로즈 라인 아래에 숨겨져 있다,’
  ‘쉴피스의 오벨리스크 아래에.’
  희생자들의 말이 일치했다.
  무릎을 꿇은 채, 사일래스는 돌바닥을 더듬어 나갔다. 타일을 움직일 만 한 틈이나 표시는 보이지 않았다. 사일래스는 손가락 마디로 바닥을 부드럽게 톡톡 쳐보기 시작했다. 오벨리스크에 가까이 있는 황동 선을 따라서, 선 근처에 있는 타일들을 두드려 보았다. 마침내 한 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바닥 아래에 빈 공간이 있다!’
  사일래스는 미소를 지었다. 희생자들이 진실을 말한 것이다.
  사일래스는 바닥의 타일을 깰 만한 도구를 찾기 위해 교회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단 위 높을 발코니에서 상드린 수녀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것이다. 이 방문객은 평범한 방문객이 아니었다. 수상한 오푸스데이 신도가 다른 목적을 품고 생 쉴피스에 들어온 것이다.
  비밀스러운 목적.
  ‘당신만 비밀을 갖고 있는게 아냐.’
  수녀는 생각했다.
  상드린 비에유 수녀는 교회의 관리인 이상의 존재였다. 그녀는 파수꾼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고대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낯선 방문객이 오벨리스크 바닥에서 서성인다는 것은 조직에서 보낸 신호인 셈이었다.
  ‘재난이 시작됐다는 소리 없는 신호다.’

25

  파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샹젤리 제의 오른쪽, 가브리엘 가에 있는 자그마한 복합건물이었다. 1만2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이 영역은 미국 땅으로 간주되었다. 즉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국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법과 보호하에 있다는 의미다.
  대사관의 야간 교환원이 <타임>지의 국제판을 읽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미국 대사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대사관 자동 전화 시스템에 저한테 온 전화 메시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름은 랭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접속 코드인 세 자리 숫자를 잊어버렸습니다. 도와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랑스 억양의 영어로 말했다. 그러나 공손한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남자의 어조는 퉁명스럽고 관료적이었다.
  교환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손님의 메시지는 상당히 오래된 것 같군요. 그 시스템은 보안상의 문제로 이 년전에 폐기되었습니다.게다가 지금 모든 접속 코드는 다섯자리고요. 그런데 당신에게 온 메시지가 있다는 얘기를 누가 했죠?”
  “자동 전화 시스템이 없단 말입니까?”
  “예, 손님에게 온 메시지라면 저희 서비스 부서에 메모가 되어 있을 겁니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하지만 남자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센 강을 따라 달리며, 브쥐 파슈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랭던이 지역번호를 누르고 세 자리 코드를 누르고 나서, 녹음된 메시지를 듣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랭던이 대사관에 전화한게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한테 한 거지?’
  휴대 전화기를 내려다보던 파슈는, 순간. 답이 자기 손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 랭던이 내 휴대 전화기를 사용했지.’
  휴대 전화기의 메뉴 버튼을 눌러, 파슈는 최근 통화목록을 열었다. 랭던이 건 전화번호도 그대로 나와 있었다.
  파리 지역번호와 어떤 전화번호 뒤에 세자리 코드(454)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누른 파슈는 신호가 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한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소피 느뵈입니다. 저는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만......”
  파슈는 피가 끓어오르는 듯 했다. 그리고 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4...5...4.

26

  불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 <모나리자> 그림은 고작 가로 53, 세로 79 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루브르 박물관의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포스터보다 작다. 그녀는 5센티미터 두께의 보호용 유리벽에 둘러싸여 전용 관람실의 북서쪽 벽에 걸려 있다. 포플러 나무판 위에 그려진 모나리자의 우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는 스푸마토 기법의 대가이던 다 빈치의 능력 덕분이었다. 이 기법에서 형상은 증기처럼 사라져 없어진다.
  루브르 박물관에 자리잡은 이래, <모나리자>는 두 번 도둑맞았다. 최근에 일어난 것은 1911년 이었는데, 루브르 박물관의 ‘살롱 카레’에서 였다. 모든 파리 시민들은 슬퍼했고, 도둑에게 그림을 돌려 달라는 내용의 기사를 신문에 게재했다. 2 년 후, 피렌체의 한 모텔이 있던 트렁크 밑바닥에서 숨겨져 있던 <모나리자>를 찾아냈다.
  랭던은 떠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소피를 따라 전용 관람실로 들어갔다. <모나리자>는 20미터 앞에 있었다. 소피가 펜 전등을 켜자, 펜에서 흘러나오는 초승달 같은 푸르스름한 빛이 바닥을 비추었다. 소피는 지뢰라도 찾는 것처럼 어딘가에 잉크의 흔적이 없는지 이리저리 맞추기 비추기 시작했다.
  소피 옆에서 걸으면서, 랭던은 위대한 작품과의 재회를 앞둔 기대감이 온몸에 번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소피의 손에서 나오는 자주색 불빛 너머의 것을 보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왼쪽으로 팔각형의 휴식용 의자가 어두운 섬처럼 보였다.
  이젠 어두운 유리벽도 볼수 있었다. 저 유리 뒤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독방에 갇혀 있다는 것을 랭던은 알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모나리자>의 지위는 그녀의 불가피한 미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많은 역사가들이나 음모론 애호가들이 내놓는 난해한 해석 따위와도 상관없다.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녀를 자기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림을 가지고 다녔다.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기품 있게 표현한 그녀와 떨어져 있기 싫어서라고 대답한 것이다.
  많은 예술사가들은 <모나리자>에 대한 다 빈치의 애정이, 숙련된 예술기법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모나리자>는 극히 평범한 스푸마토 초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 이 작품에 대한 다 빈치의 숭배는 좀 더 의미심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림의 여러 겹들 사이에 숨겨진 메시지가 그것이다. 사실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풍자와 해학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두툼한 예술사 책들은 이 그림에 잘 드러나 이중 의미의 콜라주와 장난기 넘치는 은유를 설명하고 있다. 대중들은 여전히 <모나리자>의 미소를 가장 큰 신비로 여기지만 말이다.
  ‘미스터리란 없다. 미스터리는 없어.’
  랭던이 좀더 앞으로 다가서자, 그림의 희미한 외곽선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 랭던은 카운티 연방교도소에 있는 열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모나리자>의 비밀을 나눈 적이 있었다. 교도소에서 가진 이 세미나의 교육을 교도소 시스템에까지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하버드 대학의 사회 협력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하버드의 동료들은 이 세미나를 ‘죄수를 위한 문화강좌’라고 불렀다.
  불을 끈 연방교도소 도서관에서, 영사기 앞에 선 랭던은 수업에 참여한 죄수들과 <모나리자>의 비밀을 공유했다. 랭던은 이들에게 꽤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도서관 벽에 투영된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랭던은 말했다.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 모나리자의 얼굴 뒤에 있는 배경은 서로 다릅니다.”
  랭던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배경을 가리켰다.
  “다 빈치는 왼쪽의 수평선을 오른쪽보다 일부러 낮게 그렸습니다.”
  “다 빈치가 그림을 망친 겁니까?”
  죄수 중 한 명이 물었다.
  랭던은 소리내어 웃었다.
  “아닙니다. 다 빈치는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다 빈치가 살짝 장난을 친 것입니다. 왼쪽에 있는 시골 풍경을 낮게 그려서, 오른쪽보다 왼쪽의 모나리자가 더 커보이게 한 겁니다. 이 것은 다빈치 나름대로의 해학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라는 개념은 한쪽씩을 차지하는 거였습니다. 왼쪽이 여자, 오른쪽은 남자였지요. 다 빈치는 여성이 가진 본질을 매우 아꼈기 때문에, 오른쪽보다 왼쪽에서 보이는 모나리자를 더 크게 보이게 한 겁니다.”
  “다 빈치가 호모였다는 얘길 들었어요.”
  염소수염을 기른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말했다.
  랭던은 싱긋 웃었다.
  “역사가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다 빈치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게 그  사람이 여성적인 것에 집착하는 이유였나요?”
  “사실, 다 빈치는 남자와 여자의 균형을 맞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 이 두 요소를 다 갖추지 못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결코 깨우칠 수 없다고 믿었지요.”
  “남자 성기를 가진 계집을 말하는 거요?”
  누군가 물었다.
  이 질문은 소란스러운 웃음을 이끌어냈다. 랭던은 자웅동체를 뜻하는 단어. 헤르마프로디테가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가 결합된 것이라는 어원학적인 설명을 해줄까 생각하다가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어이, 해리슨 포드를 닮은 랭포드 씨, 다 빈치가 여장을 하고서 그린 자기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게 사실이오? 그렇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근육질의 남자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 빈치는 장난꾸러기였습니다. 모나리자와 다 빈치의 초상화들을 컴퓨터로 비교 분석해보면, 얼굴에서 놀랄 만큼 일치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 빈치가 무엇을 하고자 했든, 그의 모나리자는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즉 모나리자는 남녀 양성을 모두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아니면 그들을 섞고 있든지요.”
  랭던이 대답했다.
  “하버드 식으로 표현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모나리자가 못생긴 계집이라는 소립니까?”
  랭던은 그만 웃고 말았다.
  “아마도요. 하지만 실제로 다 빈치는 이 그림이 양성임을 암시하는 큰 단서를 남겨두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혹시 아몬이라는 이집트 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염병할, 그래요! 남성적인 정력의 신이죠!”
  몸집이 큰 사내가 말했다.
  랭던은 놀랐다.
  “아몬 콘돔 상자에 적혀 있소. 상자 앞에 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사내가 그려저 있는데, 이집트의 다산의 신이라고 합디다.”
  근육질의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랭던은 들어보지 못한 상표였다. 하지만 콘돔 회사가 이집트의 표의문자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대단한데요. 정말로 아몬은 양의 머리를 가진 남자로 그려집니다. 아몬의 난교와 곡선 뿔은 현대 우리 사회의 성적 속어인 ‘호색한( 뿔을 나타내는 단어 ’horn'에서 호색을 나타내는 속어 ‘homy'가 나오게 된 것을 말한다.)’이라는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에잇, 엿 같군!”
  “엿 같죠. 그럼 아몬의 상대가 누군지 아십니까? 다산을 상징하는 이집트 여신은요?”
  몇 초 간 침묵이 흘렀다. 펜을 잡으며 랭던이 말했다.
  “이시스입니다. 자, 여기 남성 신, 아몬(AMON)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신, 이시스. 이시스는 고대 그림문자로 한때 ‘리자(LISA)'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을 다 적고, 랭던은 영사기에서 몇 걸음 물러섰다.
  AMON L'ISA
  "생각나는 게 있습니까?“
  “모나리자...... 오,맙소사.”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모나리자의 얼굴만 양성처럼 보이는 게 아니고, 그녀의 이름 또한 남자와 여자의 신성한 결합인 아나그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 빈치의 작은 비밀입니다. 모나리자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유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여기 있었어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소피가 말했다. <모나리자>와 열 걸음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마룻바닥의 한 점을 불빛으로 가리켰다.
  처음에 랭던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소피 곁에 무릎을 꿇고서야, 말라버린 액체 방울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잉크인가?’
  갑자기 불가시광선이 실제로 무엇에 쓰이는 도구인지 생각났다.
  ‘피다.’
  그의 감각이 욱신거렸다. 소피가 옳았다. 자크 소니에르는 죽기 전에 정말로 <모나리자>를 방문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이유 없이 여기에 오진 않았을 거예요. 여기에 분명히 나를 위한 메시지를 남겼을 거예요.”
  일어서면서 소피는 속삭였다. 그녀는 <모나리자>에게로 몇 걸음 더 걸어가서 그림 앞의 바닥을 불빛으로 비추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흔들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 순간, 랭던은 <모나리자> 바로 앞에 있는 보호 유리벽 위에서 자줏빛의 희미한 뭔가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소피의 손목을 자고 랭던은 그림 자체에 천천히 전등을 비췄다. 두 사람은 얼어붙고 말았다.
  유리 위에 휘갈겨 쓴 여섯 글자가 모나리자의 얼굴 바로 위를 가로지르며 자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27

  소니에르의 책상에 앉아 있던 콜레 부관은 전화기에서 들리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비누 조각이었다고요 ? 하지만 랭던이 어떻게 GPS장치를 알았을까요?”
  “소피 느뵈. 그 여자가 말해 준거야.”
  파슈가 응답했다.
  “예? 아니, 왜요?”
  “빌어먹을. 좋은 질문이야. 하지만 나도 방금 전에야 그 여자가 랭던에게 귀띔해 준 사실을 확인했어.”
  콜레는 할 말을 잃었다.
  ‘느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파슈는 소피가 DCPJ의 수사를 방해한 증거를 확보한 건가? 소피 느뵈는 이제 해고당할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반장님...... 랭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경보기가 울렸었지?”
  “예.”
  “대화랑 출입구로 누구 나온 사람 없었나?”
  “없습니다. 박물관 경비원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반장님이 지시하신 대로요.”
  “좋아, 랭던은 아직 대화랑 안에 있어.”
  “안에요? 하지만 랭던이 왜?”
  “박물관 경비원은 무장하고 있나?”
  “예, 반장님. 선임 경비원입니다.”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 우리 요원들이 몇 분 안에 거기까지 갈 수는 없으니까. 랭던이 출구를 뚫지 못하게 해. 그리고 그 경비원에게 느뵈 요원이 그 놈과 한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좋겠어.”
  “느뵈 요원은 나간 걸로 생각되는데요.”
  “정말로 나가는 것을 자네가 봤나?”
  “아닙니다. 반장님 하지만......”
  “그래, 아무도 그년이 나가는 걸 보지 못했어. 오직 들어오는 것만 봤네.”
  콜레는 소피 느뵈의 허세에 기가 막혔다.
  “느뵈가 아직 건물 안에 있다고?”
  “잘하고 있게나. 돌아가면 랭던과 느뵈가 총 끝에 서 있는 걸 보고 싶네.”
  트레일러를 보낸 후, 파슈 반장은 자기 팀을 소집했다. 오늘 밤 랭던은 잡기 어려운 사냥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더구나 느뵈 요원이 그를 돕고 있기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구석으로 몰아넣기가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파슈는 어떤 요행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위험을 반으로 줄이기 위해, 파슈는 요원들을 둘로 나눠 반은 루브르 주변으로 보내고 나머지 반은 랭던이 파리에서 안전한 피난처라고 여길 만한 유일한 장소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했다.

28

  살 데 제타 안에서는 랭던이 유리 위에 빛나는 여섯 글자를 감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글자들은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 위에 지그재그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랭던은 속삭였다.
  “시온 수도회. 이것은 당신 할아버지가 그 일원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소피는 랭던을 바라보았다.
  “이걸 이해한단 말이예요?”
  생각을 휘저으며,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잡을 데가 없소. 이것은 시온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을 선언한 것 중 하나요.”
  모나리자의 얼굴 위로 갈겨쓴 메시지에 소피는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의 진로는 너무 어둡다.
  “소피. 불멸의 여신숭배라는 시온의 전통은 어떤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그 믿음이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강한 힘을 가진 남성들이 여성을 비하하고, 남성의 편의대로 저울질한 거짓말들을 널리 선전하면서 세상에 진로를 조종하기 시작했다는 거요.”
  글자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소피는 말이 없었다.
  “시온 수도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뒤를 이은 남성 계승자들이 세상을 모계 중심의 종교에서 가부장제의 기독교로 성공적으로 개조했다고 믿고 있어요. 신성한 여성을 악마같이 만들어 버리는 선전, 선동에 열을 올림으로써, 현대 종교에서 여신의 존재를 영원히 소멸시켜 버렸다는 얘기요.”
  소피의 표정은 확신이 없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이걸 보라고 날 이곳에 보냈어요. 그렇다면 분명히 그 이상의 것을 내게 말하려고 하셨을 거예요.”
  랭던은 소피의 뜻을 이해했다.
  ‘소피는 이것이 또 하나의 코드라고 생각하고 있군.’
  숨겨진 뜻이 여기에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랭던은 즉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랭던의 마음은 여전히 소니에르의 외관상의 메시지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의미를 붙들고 있었다.
  ‘인간의 진로는 너무나 어둡다. 정말로 어둡군.’
  랭던은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오늘의 세상에서 현대 교회가 행한 엄청난 선행을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가 기만과 폭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교도와 여성숭배 종교들을 재교육시킨다는 명목하에 벌인 잔인한 십자군 전쟁은 3백 년 동안이나 자행되었다. 인간의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끔찍한 방법들을 이용해 가면서 말이다.
  가톨릭 종교재판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핏물을 적셨다고 감히 부를 수 있는 책을 발간했었다. 그 책 <마녀의 망치>는 자유로이 사고하는 여자들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세상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성직자들에게 이런 여자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고문하고, 파멸시키는지  가르쳤다. 교회에 의해서 마녀가 된 여자들은 학자, 여사제, 집시, 신비주의자, 자연 예찬론자, 약초를 모으는 자,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모든 여자 들이었다. 산파들 역시 출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이교도적인 의학지식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출산의 고통은 지혜의 사과를 먹는 데 한몫한 이브의 행동에 대해서 신이 내린 정당한 벌이라는 것이 교회의 주장이었다. 3백년에 걸친 마녀 사냥으로 교회는 5백만 명에 달하는 여성을 말뚝 위에서 태워 죽인 것이다.
  이 선동과 유혈의 참사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다.
  오늘날의 세계가 그 살아 있는 증거다.
  한때, 영혼의 계몽을 위해 필수적인 반쪽으로 찬양받던 여성은 세계 모든 신전에서 추방당했다. 유대교의 랍비, 가톨릭의 사제, 이슬람 성직자 그중 여성은 없다. 신성 결합은 남녀의 자연스러운 성적 결합을 통해서 각자의 영혼이 완전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신성 결합의 강령은 부끄러운 강령으로 바뀌어 버렸다. 신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때 상대 여성과 성적 결합을 요구하던 고결한 남자들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성적 충동을 악마의 작업, 특히 악마가 선호하는 공범자와 협력해서 만들어 내는 충동으로 여겨 두려워했다. 그 공범자란 ...... 여자였다.
  왼쪽과 여성의 연관 역시 교회의 비방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왼쪽을 나타내는 말들은 아주 부정적인 어조를 갖게 되었다. 그 반면에 오른쪽은 정직하고, 영리하고, 정확하다는 뜻이 있다. 오늘날에도 급진적인 사고는 좌파, 비이성적인 행동은 좌뇌라고 불리며, 왼쪽은 사악하고 불길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신의 시대는 끝났다. 세력이 바뀐 것이다. 어머니인 지구는 남자들의 세계가 되어 버렸고, 파괴와 전쟁의 신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남자의 자아는 그 짝인 여자의 견제를 받지 않은 채 2천 년을 소비해 버렸다. 시온 수도회는 현대적인 삶에서 신성한 여성의  소멸이 아메리칸 인디언인 호피 부족이 말한 ‘코야니스쿠아치’ 즉 균형이 맞지 않는 삶을 야기했다고 보았다.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의 일종)이라는 연료로 빚어지는 전쟁들. 여자를 폄하하는 사회. 그리고 어머니인 지구를 불손하게 대하는 인간들의 증가.
  소피의 속삭임이 랭던의 생각을 다시 되돌렸다.
  “로버트! 누가 오고 있어요!”
  랭던도 홀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이리로!”
  소피가 손전등을 꺼버리자 눈앞에서 소피가 증발한 것처럼 보였다.
  순간 랭던의 눈은 완전히 장님이었다.
  ‘어디로?’
  눈이 어둠에 익자, 방 한가운데에 있는 팔각형 의자 밑으로 소피가 숨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따라 막 움직이려는 순간, 시끄러운 목소리가 랭던을 차갑게 막았다.
  “멈춰!”
  문가에서 한 남자가 명령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경비원이 전용 관람실의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똑바로 뻗은 경비원의 권총은 정확히 랭던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랭던은 자기 팔이 본능적으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진 것을 알았다.
  “엎드려! 바닥에 엎드려!”
  요원은 명령했다.
  몇 초 후에 랭던의 얼굴은 바닥에 닿았다. 경비원이 서둘러 다가와, 양 다리를 벌리라며 다리를 찼다.
  “허튼 생각이오. 랭던 씨. 허튼 생각!”
  총으로 랭던의 등을 누르며 요원이 말했다.
  팔과 다리를 좍 벌리고 얼굴을 바닥에 붙이고 있었지만, 지금의 자세가 랭던은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가 생각나는군. 얼굴이 아래로 향해 있긴 하지만 말이야.’

29

  생 쉴피스 교회 안에서는 상일래스가 봉헌된 무거운 철제 촛대를 들고 제단에서 오벨리스크로 돌아오고 있었다. 바닥을 파는 데 쓰기 위해서였다. 빈 공간을 덮고 있는 것이 분명한 회색 대리석 타일을 노려보며, 사일래스는 시끄럽지 않게 타일을 깨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리석의 쇳조각을 들이대면, 둥근 천장까지 소리가 울릴 것이다.
  수녀가 듣지 않을까? 지금쯤이면 수녀는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일래스는 일을 실행하지 않기로 했다. 촛대 끝을 감쌀 만한 천이 없나 둘러 보았지만, 제단을 덮고 있는 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단의 천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망토’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어차피 교회 안에는 혼자뿐이었다. 사일래스는 끈을 풀고, 망토를 벗어 내렸다. 모로 된 망토의 섬유조직이 등에 갓 생긴 상처에 들러붙어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사일래스는 이제 허리에 찬 기저귀 같은 속옷 외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촛대의 끝을 망토로 감싸고, 눈여겨 봐둔 타일 중앙에 촛대의 끝을 들어밀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돌은 깨지지 않았다. 다시 촛대로 눌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금이 갔다. 세번의 시도 만에 타일은 마침내 산산이 부서지고, 파편들이 바닥 아래의 빈 공간으로 떨어져 내렸다.
  ‘공간이 나왔다.!’
  남은 조각들을 빨리 치우고, 사일래스는 빈공간을 들여다보았다. 그 앞에 무릎을 꿇자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창백한 팔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빈 공간의 바닥은 매끈한 돌이었다. 로즈 라인 아래로 팔을 더 집어넣자 뭔가 만져졌다! 두꺼운 석판이었다. 손가락으로 석판의 가장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일래스는 일어서서 석판을 살펴보았다. 가장자리가 우둘투둘하게 잘리고, 표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일래스는 순간 현대판 모세가 된 기분이었다.
  석판 위에 적힌 글을 읽으면서 사일래스는 놀랐다. 석판에는 지도나 복잡한 지시들, 아니면 암호로 된 뭔가가 적혀 있을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석판에 있는 글은 너무나 간단했다.
  욥기 38:11
  ‘성경구절?’
  순간 사일래스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비밀 장소가 성경 구절에 들어있다? 조직은 정의의 사람들을 속이는 일엔 결국 실패했다!
  ‘욥기 38장 11절’
  비록 정확한 구절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성서의 욥기는 반복되는 시련을 신에 대한 믿음으로 뚫고 살아남은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들어맞는군.’
  흥분을 간신히 감추면서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사일래스는 어깨 너머로 은은하게 빛나는 로즈 라인을 내려다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의 재단 위에는 거대한 가죽 장정의 성경이 도금된 책 받침대 위에 얹혀 있었다.
  발코니 안에서 상드린 수녀는 몸을 떨었다. 조금 전 아래에 있는 남자가 갑자기 망토를 벗었을 때, 수녀는 달아나서 자기의 의무를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석고처럼 하얀 사내의 살갗을 본 순간, 수녀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내의 널찍하고 창백한 등은 핏자국이 선연한 상처들로 덮여 있었다. 심지어 수녀가 있는 자리에서도 상처들이 얼마 전에 생긴 것임을 알수 있었다.
  ‘저 남자는 회초리로 무자비하게 맞았다.’
  수녀는 사내의 허벅지에 묶인 말총 허리띠에서도 피가 떨어지는 걸 보았다.
  ‘대체 어떤 신이 이런 식으로 육체를 벌하기를 원한단 말인가?’
  오푸스 데이의 의식이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드린 수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순간 수녀의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오푸스 데이가 쐐기돌을 찾고 있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수녀는 상상할 수 가 없었다.
  피투성이 사내는 다시 망토를 입고 있었다. 전리품을 꼭 쥐고서 제단의 성경책으로 다가갔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수녀는 서둘러 발코니를 떠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손과 무릎을 들이밀어서, 침대 아래 숨겨 놓았던 봉인된 봉투를 끄집어 냈다. 지난 10년간 수녀가 감춰 온 것이었다.
  봉투를 찢자, 파리 전화번호 네 개가 나왔다.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수녀는 전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는 사일래스가 석판을 재단 위에 놓고 성경책에 손을 뻗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길고 하얀 손가락은 땀에 젖었다. 구약성서 편을 넘기다가 욥기를 찾아냈다. 38장을 찾아낸 손이 11절을 따라 달려 내려갔다. 이제 읽게 될 구절을 사일래스는 예상했다.
  ‘이 구절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11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사일래스는 읽기 시작했다. 고작 일곱 단어에 불과했다. 혼란을 느끼면서 사일래스는 다시 읽었다. 뭔가 심하게 잘못되었다는 감이 왔다. 구절은 간단했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30

  <모나리자>앞에 엎드린 포로를 내려다보며, 경비원 클로드 그루아르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악당이 관장님을 죽였다.’
  그루아르를 비롯한 경비 팀에게 있어 소니에르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루아르는 방아쇠를 잡아당겨 로버트 랭던의 등에 총알을 들이박고 싶었다. 선임 경비원으로 그는 실제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경비원 가운데 하나였다.하지만 여기서 랭던을 죽여버리는 것은 브쥐 파슈와 프랑스 형무소를 대면하는 참혹한 시간에 비교하면 관대한 운명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루아르는 허리띠에서 무전기를 뽑아들고, 지원을 부탁하는 무전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이 방에서는 부가적인 전자 보안장치 때문에, 요원들간의 무전이 항상 어려웠다.
  ‘문가로 나가야 하는데.’
  랭던에게 계속 총을 겨누면서, 그루아르는 천천히 입구 쪽으로 물러섰다. 세 걸음 옮겼을 때, 경비원은 뭔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기랄, 뭐지?’
  설명하기 어려운 형체가 방 가운데에 나타났다. 그림자. 방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 여자 하나가 왼쪽 벽을 향해 어둠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는 자주색 광선 빔으로 바닥 여기저기를 비추고 있었다. 여자는 그 빛으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냐?”
  30초 만에 두 번째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경비원은 물었다 어디로 총을 겨눠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그루아르는 순간 알 수가 없었다.
  “PTS"
  손에 들고 있는 전등으로 바닥을 비추면서 여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루아르는 땀이 났다.
  ‘경찰과학 수사국? 모든 요원은 가버린 줄 알았는데!’
  이제야 그루아르는 보라색 빛이 PTS팀이 항상 휴대하는 자외선광선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DCPJ가 왜 여기서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름을 말하시오!”
  “저예요. 소피 느뵈예요.”
  소피는 차분한 프랑스어로 응답했다.
  그 이름은 그루아르의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었다.
  ‘소피 느뵈?’
  소니에르의 손녀 이름이지 않은가? 그녀는 꼬마였을 때 여기에 가끔 오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느뵈일 리가 없어!’
  그리고 설령 저 여자가 소피 느뵈라 할지라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소니에르와 손녀 사이가 아주 소원하다는 소문을 그루아르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저 아시죠? 그리고 로버트 랭던은 할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요. 저를 믿으세요.”
  경비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원이 필요해!’
  무전기를 다시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의 입구는 그루아르 뒤로 족히 20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총구를 바닥에 있는 남자에게 겨누기로 결심하고, 경비원은 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루아르가 아주 조금 뒤로 움직였을 때, 여자가 방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자외선 빔을 쳐들고 <모나리자>의 맞은편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 그림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그루아르는 숨을 들이켰다.
  ‘아니 대체 저 여자가 뭘하는 거야?’
  방을 가로질러 가면서, 소피는 차가운 땀방울이 이마를 가르며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랭던은 여전히 바닥에 날개를 펼친 독수리처럼  엎어져 있었다.
  ‘조금만 참아요. 로버트. 거의 다 됐어요.’
  경비원은 두 사람중 누구에게도 실제로 총을 쏘지는 못할 것이라고 소피는 짐작했다. 소피는 이제 손에 들린 문제로 관심을 집중했다. 다 빈치의 또 다른 걸작인 그림 하나를 구석구석 조사하고 있지만, 자외선 빛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바닥에도, 벽에도, 캔버스 위에도 없었다.
  ‘틀림없이 여기 뭔가가 있을 텐데!’
  소피는 자신이 할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기려고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지금 조사하고 있는 걸작품은 150센티미터 크기의 캔버스였다. 위험하게 드러난 바위들 위에서 서투른 자세의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 세례요한, 천사 우리엘과 함께 앉아 있는 이 이상한 그림은 다 빈치의 작품이었다. 소피가 어린 꼬마였을때, 할아버지는 <모나리자> 다음으로 이 그림을 보지 않고서는 박물관을 나서지 못하게 했었다.
  ‘할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요!’
  자기 뒤에서, 경비원이 도움을 요청하는 무전을 다시 시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집중하자!’
  소피는 <모나리자>를 보호하는 유리벽에 휘갈겨 쓴 메시지를 떠올렸다.
  ‘인간의 진로는 너무나 어둡다.’
  지금 소피 앞에 있는 그림은 메시지를 남길 만한 보호 유리벽이 없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림 자체에 글을 써서 위대한 작품을 훼손시킬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멈춰섰다.
  ‘적어도 정면은 아니야.’
  그녀의 눈동자는 캔버스를 붙들기 위해 천장에서 내려온 기다란 케이블을 따라 올라갔다.
  ‘그게 가능했을까?’
  그림 액자의 왼쪽을 붙들고 소피는 그림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림이 커서 케이블이 휘었다. 벽에서 그림을 살짝 들어내고, 소피는 머리와 어깨를 그림 뒤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뒤를 조사하기 위해 손전등을 들어올렸다.
  자기 본능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림 뒤에는 비어 있었다. 자주색 글씨는 없고, 오래된 캔버스 뒷면에는 얼룩덜룩한 갈색 자국들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기다려.’
  목재 액자 아래에서 금속물질이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체는 작았다. 캔버스가 액자와 만나는 틈에 살짝 끼어, 은은하게 빛을 내는 금사슬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사슬에는 금으로 된 열쇠가 붙어 있었다. 십자 모양의 넓고, 조각된 머리에 문양이 새겨진, 그녀가 아홉 살 이후로 보지 못했던 그 열쇠였다. P.S.라는 이니셜과 함께 붓꽃, 그 순간 소피는 할아버지가 자기 귀에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때가 되면 이 열쇠는 네 것이다.’
  할아버지가 목숨을 잃으면서도 그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깨닫자 딱딱한 응어리가 목구멍에 맺혔다.
  ‘이 열쇠는 내가 많은 비밀을 보관한 상자를 여는 거란다.’
  오늘 밤 낱말 게임의 목적은 바로 이 열쇠였다는 것을 소피는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살해될 때 이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열쇠가 경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 그림 뒤에 숨겼다. 그런 뒤에 오직 소피만이 찾을 수 있도록 보물찾기 게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원 요청!”
  경비원이 소리를 질렀다.
  소피는 그림 뒤에서 열쇠를 집어 자외선 전등과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캔버스 뒤에서 보니, 그루아르가 연결도 되지 않는 무전기에 대고 지원 요청을 하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총은 랭던을 겨눈 채였다.
  “지원 바람!”
  경비원이 다시 고함을 쳤다.
  아무 답변도 없었다.
  ‘경비원은 지원 요청을 할 수 없어.’
  <모나리자>를 보러온 관광객들이 자랑하려고 집에 전화를 걸지만 거의 대부분 좌절하고 만다는 것을 소피는 기억해 냈다. 전용 관람실의 벽을 감싸고 있는 추가 보안장치들이, 전화 통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경비원은 이제 재빨리 출입구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소피는 즉시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숨겼던 커다란 그림을 올려다보며, 소피는 오늘 밤 두 번째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자신을 돕기 위해 거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미터만 더 가면.’ 총을 바로 들고 그루아르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멈춰요! 그렇지 않으면 부수겠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루아르는 흘끗 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어이구 ,안 돼!”
  붉은 안개 같은 조명 속에서, 여자가 그림을 매달고 있는 줄에서 그림을 떼어내 자기 몸앞에 갖다 놓은 게 보였다. 150센티미터 가까운 크기의 캔버스는 여자의 몸을 거의 감출 정도였다. 그루아르의 첫 번째 생각은 왜 작품을 매달고 있는 케이블의 감지기가 작동하지 않았느냐였다. 하지만 곧, 오늘 밤에 케이블 감지기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여자가 뭘 하려는 거지?’
  그림을 본 경비원은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림 한가운데가 부풀어 오르더니,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세례 요한의 형태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값을 매길 수 없는 다 빈치의 그림이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며 공포에 사로잡힌 경비원은 비명을 질렀다. 여자가 그림 뒤에서 무릎으로 그림 한가운데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루아르는 서둘러 총구를 여자에게 겨눴지만, 즉시 이것은 아무 쓸모없는 위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캔버스는 그저 직물에 불과했지만, 단순히 총알로 뚫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5백만 달러짜리 갑옷인 셈이었다.
  ‘다 빈치의 그림에 총알을 박을 수는 없어.’
  여자가 차분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총과 무전기를 내려놓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무릎으로 이 그림을 뚫어 버릴 거예요. 제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느끼실지는 잘 알고계실 거라 생각해요.”
  그루아르는 현기증을 느꼈다.
  “제발...... 안 돼. 그 그림은 <암굴의 마돈나>야.”
  경비원은 총과 무전기를 떨어뜨리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고마워요. 이제 제가 말하는 대로 정확히 움직이세요. 그럼 모든 것이 잘될 거예요.”
  잠시 후, 소피를 따라 비상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랭던의 맥박은 아직도 천둥치듯 뛰고 있었다. 떨고 있는 루브르 경비원을 전용 관람실에 남겨두고 나온 뒤로 그들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경비원의 권총은 이제 랭던의 손에 들려 있었다. 랭던은 이 물건을 빨리 없애 버리고 싶었다. 권총에서 무겁고 위험스러운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 번에 두 계단씩  내려오면서, 랭던은 소피가 거의 훼손할 뻔했던 그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그녀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작품 선택은 오늘 밤의 모험과 이상하리만큼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잡은 다 빈치의 그림은 <모나리자>와 마찬가지로, 숨겨진 이교도의 상징들이 너무 풍부해서 예술사가들에게 악명 높은 작품이었다.
  “아주 귀중한 인질을 선택했소.”
  달리면서 랭던이 말했다.
  “<암굴의 마돈나(Madonna of the Rocks)> 말이군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예요. 할아버지가 한 것이지. 그 그림 뒤에 할아버지는 내게 뭔가를 남겼어요.”
  랭던은 놀라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뭐요? 어떻게 그게 그 그림인줄 알았소? 왜 <암굴의 마돈나>요?”
  “인간의 진로는 너무 어둡다(So dark the con of man). 처음 두개의 아나그램은 놓쳤어요. 로버트. 하지만 세 번째는 놓치지 않으려고 했죠.”
  소피는 승리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31

  “그들이 죽었어요! 제발 전화기를 들어요. 그들이 모두 죽었다고요!”
  상드린 수녀는 자기 방에서 전화기에 대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중이었다.
  목록에 있던 처음 세 번호는 모두 끔찍한 결과만을 알려주었다. 신경질적인 과부, 살해현장에서 늦게까지 일하는 형사,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을 위로하는 엄숙한 사제. 이 세명의 연락원들은 모두 죽었다. 이제 수녀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번호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 번호는 앞의 세 번호들로 연락이 되면, 이용해서는 안 되는 번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동응답기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들리는 자동응답 안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메시지를 남기라는 말만 했다.
  “바닥 한 칸이 깨졌어요! 다른 세 사람은 모두 죽었나 봐요!”
  메시지를 남기며 수녀는 간청했다.
  상드린 수녀는 자기가 보호하고 있는 네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침대 밑에 보관된 이 사적인 전화번호들은 오직 한 가지 조건에서만 쓰일 수 있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은 전달자가 수녀에게 말했었다.
  ‘바닥의 타일이 깨지면, 상부 계층이 돌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중 한사람이 치명적인 위협 앞에서 필사적인 거짓말을 하게 강요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번호들로 전화하세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십시오. 이 일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게 말입니다.’
  침묵의 경고였다. 누구라도 알 수 있게끔 간단했다. 처음 들었을 때 그 계획은 수녀를 놀라게 했다 .한 형제의 정체가 드러났다면, 그는 나머지 형제들에게 경고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한 사람 이상이 합의한 것처럼 보였다.
  “제발 대답해요. 어디 있나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수녀는 속삭였다.
  “전화기를 내려놓으시오.”
  문가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포를 느끼며 돌아선 수녀는 거대한 몸집의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쇠촛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죽었소. 네 사람 모두 죽어 버렸지. 그리고 날 바보로 만들었어. 쐐기돌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시오.”
  “난 몰라요! 그 비밀은 다른 자들이 지키고 있어요.”
  상드린 수녀는 진실하게 말했다.
  ‘죽어 버린 그 사람들이!’
  사내는 앞으로 다가서며 촛대를 하얀 손으로 꽉 쥐었다.
  “당신은 교회의 수녀요. 그런데 그놈들을 위해 일해?”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진실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예요. 나는 그 메시지를 오푸스 데이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수녀는 도전적으로 말했다.
  사내의 눈에서 갑작스러운 분노가 폭발했다. 사내는 몸을 날려 방망이처럼 촛대를 휘둘렀다. 쓰러지면서 상드린 수녀는 불길한 예감이 덮쳐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 사람 모두 죽었다.’
  ‘귀중한 진실은 영원히 사라졌다.’

32

  랭던과 소피가 건물을 빠져나와 파리의 밤거리로 뛰어들 때, 드농 관 서쪽 끝에서 울린 비상벨 소리는 근처 튀르리 정원에서 쉬고 있던 비둘기들을 내쫓았다. 소피의 차가 세워져 있는 광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며, 랭던은 멀리서 경찰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기 있어요.”
  땅딸막한 2인승 빨간 차를 가리키며 소피가 소리쳤다.
  ‘지금 농담하는 거겠지. 그렇지?’
  소피의 차는 랭던이 지금까지 본 차들 중에 가장 작은 차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스마트카예요. 리터당 백 킬로미터를 간다고요.”
  소피가 말했다.
  랭던이 보조석에 앉자마자, 자갈로 구분되어 있는 연석 위에 걸쳐져 있던 소피의 스마트카가 튀어나갔다. 차가 보도를 건너 루브르 박물관의 캐러젤에 있는 작은 로터리를 향해 무섭게 내달리자, 랭던은 자동차의 계기판을 붙잡았다.
  순간 랭던은 소피가 로터리를 그냥 가로질러 가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중앙에 있는 커다란 원형 풀밭의 울타리를 곧장 뚫고 지날 수만 있다면 가장 빠른 지름길일 터였다.
  “안 돼!”
  랭던은 캐러젤 주위에 도사린 위험을 알고 있었다. 중앙에 위험한 공간이 있다. 역 피라미드. 박물관 안에서 이미 보았던 아래로 향한 채광창이었다. 그 공간은 그들이 타고 있는 스마트카를 한입에 꿀꺽 삼킬 정도로 컸다. 다행히 소피는 더 안전한 길을 택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바퀴를 오른쪽으로 확 꺾어 로터리를 적당히 돌다가 다시 왼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난 길을 잡아 리볼리 가 방향으로 속도를 냈다.
  2음조의 경찰 사이렌 소리가 그들 뒤에서 크게 울어대고 있었다. 랭던은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에서 빛나는 사이렌을 볼 수 있었다. 루브르에서 더 빨리 빠져나가려고 소피가 엔진을 밟을수록, 스마트카에서 항의라도 하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45미터 정도 앞에 있는 교통신호는 빨간색이었다. 소피는 숨소리 아래로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진했다. 랭던은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피?”
  교차로에 이르러 약간 속력을 줄인 소피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렸다. 교차로는 비어 있었다. 엑셀러레이터를 더 밟기 전에 양쪽 길ㅇ르 흘끗 본 소피는 리볼리로 접어드는 왼쪽으로 차를 급하게 틀었다. 서쪽으로 4백 미터쯤 한껏 속도를 내어 달리다가, 커다란 로터리를 한 바퀴 돌고 오른쪽으로 차를 꺾었다. 그러자 샹젤리제의 길이 나왔다.
  차가 똑바로 달리자, 랭던은 목을 학처럼 뽑고 리어 뷰 미러를 통해 루브르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경찰이 자기들을 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푸른빛의 바다가 박물관을 메우고 있었다.
  마침내 심장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자 랭던이 소피를 보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소피는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앞에 뻗은 샹젤리제의 긴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파리의 5번가로 불리는 샹젤리제에는 호화로운 가게들이 3킬로미터 가량 늘어서 있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은 겨우 1.6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랭던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간의 진로는 너무 어둡다.’
  소피의 빠른 사고가 인상적이었다.
  ‘암굴의 마돈나.’
  소피는 그 그림 뒤에 할아버지가 뭔가를 남겼다고 말했다.
  ‘마지막 메시지?’
  랭던은 소니에르가 메시지를 숨긴 장소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암굴의 마돈나>라는 그림은 오늘 밤 드러난 상징들과 서로 연결되어 꼭 들어맞았다. 소니에르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둡고 장난스러운 측면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모든 면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 같았다.
  <암굴의 마돈나>를 그린 다 빈치의 원래 보수는 ‘순결한 관념의 협회’라고 알려진 단체에서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협회는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 있는 제단의 세 폭짜리 그림 중 중앙에 들어갈 그림이 필요했다. 수녀들은 레오나르도에게 구체적인 치수와 그림에 들어갈 주제도 미리 알려주었다. 성모 마리아, 아기 세례 요한, 우리엘. 아기 예수가 동굴에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 빈치는 그들의 요구대로 그림을 그렸지만, 작품을 전달했을 때 협회의 반응은 공포에 가까웠다. 다 빈치는 폭발적이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세부적인 묘사들로 그림을 채워 놓았던 것이다.
  그림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로 보이는 갓난애를 팔에 두르고 앉아있다. 마리아의 맞은편에는 우리엘이 앉아 있는데, 마찬가지로 아기 요한과 함께다. 예수가 요한을 축복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그림에서 예수를 축복하는 것은 요한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의 권위를 양도하고 있다! 더욱 심란한 것은 마리아가 아기 요한의 머리 위에 한 손을 높이 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손가락들은 보이지 않는 머리를 쥐고 있는 것처럼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분명하고 놀라운 이미지는 마리아의 굽은 손가락들 바로 아래에 있다. 우리엘이 자기 손으로 뭔가를 자르는 모습이다. 마치 마리아의 손 같은 발톱에 잡힌 보이지 않는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말이다.
  랭던의 학생들은 다 빈치가 결국 두 번째 그림을 새로 그려서 협회를 달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면 항상 즐거워했다. <암굴의 마돈나>의 묽어진 버전은 <암굴의 성모>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런던 국립 박물관에 걸려있다. 하지만 랭던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도발적인 원래 작품을 더 좋아했다.
  소피가 차의 속력을 높이자 랭던이 물었다.
  “그림 말이오. 그 뒤에 뭐가 있었소?”
  그녀의 눈은 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대사관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면 보여줄게요.”
  “내게 보여준단 말입니까? 소니에르 씨가 구체적인 물건을 남겼습니까?”
  랭던은 놀랐다.
  소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붓꽃과 P.S라는 이니셜이 양각되어 있어요.”
  랭던은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거의 해냈어’
  오른쪽으로 스마트카를 돌리며 소피는 생각했다. 호화로운 크릴롱 호텔을 지나, 나무들이 담장을 이룬 지역으로 들어갔다. 대사관은 이제 1킬로미터도 남지 않았다. 소피는 자신이 다시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운전을 하면서도 소피의 마음은 주머니 속에 든 열쇠와 오래 전에 그것을 본 기억에 가 있었다. 팔길이가 같은 십자 모양의 머리와 삼각 기둥의 다리, 움푹파인 자국들, 양각으로 새겨진 꽃 봉인과 P.S라는 글자.
  지난 세월 동안 이 열쇠가 소피의 마음에 떠오른 적은 거의 없었지만, 정보 부처에서 일하는 그녀의 업무는 보안에 대해서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이제 이 열쇠는 특이한 도구일 뿐 그렇게 신비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레이저 도구로 바뀌는 주형이다. 이 열쇠는 복사가 불가능해.’
  자물쇠의 공간에서 서로 맞물려야 움직이는 이빨을 가진 열쇠들과 달리 이 열쇠는 레이저로 새겨진 복잡한 수두 자국 모양들은 전자장치로 검사된다. 만일 전자장치의 눈이 열쇠의 육각형 모양의 수두 자국의 위치와 배열과 깊이가 정확하다고 판단하면, 자물쇠는 열릴 것이다.
  이렇게 생긴 열쇠가 무엇을 열 것인지 소피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버트라면 그녀에게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열쇠를 보지 않고서도 열쇠 위에 양각된 문장을 알아맞히지 않았던가. 열쇠 머리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열쇠가 어떤 기독교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런데 소피는 레이저 도구로 변하는 주형 열쇠를 사용하는 어떤 교회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소피는 10년 전에 그 증거를 목격했다. 뜻밖에도 그 목격이 또 다른 열쇠가 되어 주었다. 그녀에게 할아버지의 진짜 본성을 보여준 것이다.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린 것은 따뜻한 오후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할아버지는 날 보면 놀라실 거야.’ 소피는 생각했다. 영국에 있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소피는 봄 방학을 맞아 며칠 일찍 나선 길이었다. 소피는 할아버지를 만나서 자기가 배운 해독기법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예정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파리에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실망스러웠지만 소피는 할아버지가 자신이 오늘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할아버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 오후잖아.’
  그녀는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주말에는 좀처럼 일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보통......
  씨익 웃으며 소피는 차고로 달려갔다. 역시 차고는 비어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는 시내 드라이브를 싫어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차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휴가 때 이용하는 파리 북쪽에 있는 노르망디의 별장. 런던의 꽉 막힌 교통지옥 속에서 몇 달을 지내다 온 소피로서는 자연의 향기가 무척 그리웠다. 그래서 곧바로 방학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초저녁이었다. 그녀는 즉시 출발해서 할아버지를 놀래 주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의 차를 빌려 북쪽, 달이 쓸고 지나는 크뢸리 근처의 황량한 언덕들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10시가 막 지난 후에야 소피는 할아버지의 별장으로 향하는 사유지의 긴 길로 접어들 수가 있었다. 진입로는 2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이었다. 반쯤 지났을 때, 나무들 사이로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 덕 한 면의 나무들 사이에 자리잡은 거대하고 오래된 석조 저택이었다.
  이 시간쯤이며 할아버지는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불빛이 깜박거리는 저택을 보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도로에 가득히 주차된 차들을 발견한 순간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메르세데스, BMW,아우디,롤스로이스 등등.
  소피는 순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유명한 은둔자인 우리 할아버지!’
  자크 소니에르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런 은둔자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소피가 멀리 가 있는 동안 할아버지는 파티를 주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동차들의 외관으로 보아, 파리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참석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를 놀라게 할 생각에 들떠, 소피는 서둘러 정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문은 잠겨있었다. 그녀는 노크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며, 뒤로 돌아가서 뒷문을 찾았다. 뒷문도 잠겨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잠시 서 있다가 소피는 귀를 기울였다. 들리는 소리라곤 계곡을 지나면서 뱉어내는, 낮은 신음소리 같은 차가운 노르망디의 공기뿐이었다.
  음악도 없다.
  말소리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숲속의 고요함 속에서 소피는 저택 한 면에 쌓여 있는 장작 더미위로 힘들게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얼굴을 거실 창문에 갖다 댔다.
  “아무도 없잖아!”
  2층 전체가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지?’
  심장 박동이 줄달음치면서, 소피는 장작을 넣어 둔 헛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불쏘시개 상자 밑에서 할아버지가 숨겨둔 열쇠를 찾아냈다. 그녀는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쓸쓸한 응접실로 들어서자, 보안 시스템의 통제 패널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안에 들어온 사람이 10초 안에 정확한 코드를 누르지 않으면 보안 경보기가 작동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파티 중인데도 경보기를 작동시켜 놓았나?’
  소피는 재빨리 코드를 눌러 시스템을 해제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소피는 집 안 전체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2층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응접실로 내려와서 그녀는 정적 속에 잠시 서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소피가 뭔가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들. 그 소리는 바닥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소피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엎드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다. 소리는 분명 아래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목소리는 노래, 혹은...... 읊조리는 소리? 순간 그녀는 겁에 질리고 말았다. 소리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집에 지하실이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적어도 난 못 봤어.’
  소피는 돌아서서 거실을 살폈다. 그때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물건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아끼는 골동품인 오뷔송 융단이 구겨져 있었다. 보통 때라면 벽난로 옆 동쪽 벽에 걸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밤엔 융단을 매단 막대 한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벽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말이다.
  벽쪽으로 걸어가며, 소피는 읊조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망설이던 소피는 귀를 벽에 대보았다. 목소리가 훨씬 뚜렷하게 들렸다. 사람들이 분명 읊조리고 있었다...... 소피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이상한 억양으로 노래했다.
  ‘이 벽 뒤는 비어있다!’
  벽을 이루고 있는 나무판들의 가장자리를 더듬어 나가다가, 소피는 움푹 들어간 구멍을 발견했다. 구멍은 은밀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미닫이 문이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소피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옆으로 밀어 보았다. 어둠 저편에서 목소리들이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소피는 문 안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나선형 모양의 돌 계단이 아래로 뻗어 있었다. 아이 때부터 이 저택에 놀러왔지만, 이런 계단이 존재하는 줄은 몰랐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지고 목소리는 뚜렷해졌다. 이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나선형 계단이라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계단을 돌면 보일 것이다. 저 너머로 지하 바닥이 보였다. 오렌지 빛깔의 불빛이 깜박거리며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숨을 참으며, 소피는 조금 더 내려갔다. 그리고 몸을 숙였다. 자기가 본 것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방은 지하 석굴이었다. 언덕의 화강암을 뚫어서 만든 거친 석실이었다. 빛이라곤 벽에 걸어 놓은 횃불에서 나오는게 전부였다. 불빛속에서 서른명 정도의 사람들이 방 한가운데에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난 꿈을 꾸고 있는거야. 꿈. 그렇지 않으면 이게 대체 뭐지?’
  소피는 자신에게 말했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여자들은 황금색 신발에 하얀 비옷 같은 가운을 입은 채 하얀 가면을 쓰고 손에는 둥그런 물체를 들고 있었다. 남자들은 검은색 긴 가운을 입고,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체스판의 말들 같았다. 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 앞의 바닥에 놓은 뭔가를 향해 엄숙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읊조림은 계속되고 점점 커졌다. 이제 천둥처럼 울렸다. 그리고 더 빨라졌다. 참가자들은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소피는 마침내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공포에 젖어 그녀는 뒤로 비틀거렸지만, 그 이미지는 너무나 뚜렷하게 보였다. 구역질을 참아내며 소피는 석벽을 붙잡고 계단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채 파리로 차를 몰았다.
  그날 밤 환멸과 배신으로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 났다. 소피는 짐을 모두 챙겨들고 집을 떠났다. 부엌 식탁 위에 한 장의 쪽지만 남겨둔 채,
  저도 거기 있었어요. 저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쪽지 옆에는 별장의 장작 헛간에서 가져온 비상 열쇠를 놓아 두었다.
  “소피! 멈춰요! 멈춰!”
  랭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회상에서 깨어나며 소피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미끄러지다 정지했다.
  “뭐예요? 무슨 일이죠?”
  랭던은 길 아래 저 너머를 가리켰다.
  랭던이 가리키는 곳을 본 소피는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90미터 앞 교차로에 DCPJ 경찰차 두 대가 엇갈리게 주차되어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경찰들이 가브리엘 가를 봉쇄했군.’
  랭던은 어두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 대사관은 출입금지인 모양이죠?”
  길 아래에는 두 명의 DCPJ 경관이 경찰차 옆에 서서, 그들을 향해 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멈춰 서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랭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소피,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거야.’
  소피는 차를 세 번이나 움직인 후에야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소피가 반대 방향으로 차를 돌리자,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타이어 소리가 났다. 사이렌이 큰 소리로 울려퍼졌다.
  욕을 내뱉으며 소피는 가속 페달을 밟아댔다.

  33
  소피의 스마트카는 대사관과 영사관들이 모여있는 외교 구역을 가르며 지나갔다. 골목길을 질주하다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샹젤리제의 넓은 한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랭던은 안전벨트를 매고 앉아, 몸을 뒤로 돌려 뒤따라오는 차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는 갑자기 도망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랭던은 자기 자신에게 확인시켰다. 소피가 화장실 창문으로 GPS 장치를 던져 버렸을 때, 소피가 그를 위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제 그들은 대사관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지면서 차량이 드문 샹젤리제의 거리를 꾸불꾸불하게 달리고 있었다. 랭던은 자기가 취할 수 있는 선택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소피가 경찰을 거의 따돌린 듯 보였지만, 그것은 잠시뿐일것이다. 랭던은 자신들의 행운이 오래 지속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운전대를 쥔 소피는 스웨터 주머니에서 뭔가를 찾아 랭던에게 내밀었다.
  “로버트, 이걸 한번 봐요. 할아버지가 <암굴의 마돈나> 뒤에 남겨놓은 거예요.”
  떨리는 기대감으로 랭던은 건네받은 물건을 살펴보았다. 꽤 묵직하고,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첫인상은 장례식 때 묘지에 박기 위해 디자인된 기념 대못의 모형이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뻗어 나온 기둥이 삼각형 모양의 각기둥이었다. 그리고 기둥에는 마마 자국처럼 보이는 수백 개의 작은 육각형 자국들이 있었다. 점들은 아주 섬세하게 찍혀 있고, 무작위로 흩어져 있었다.
  “레이저로 다듬어진 열쇠예요. 거기 있는 육각형들은 전자장치를 통해야만 읽힐 거예요.”
  소피가 랭던에게 말했다.
  ‘열쇠?’
  랭던은 이런 열쇠를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쪽을 봐요.”
  차선을 바꾸어 교차로를 지나면서 소피가 말했다.
  열쇠를 돌린 랭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십자가의 중앙에는 붓꽃과 P.S. 라는 이니셜이 섬세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소피,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봉인입니다. 시온 수도회에 공식적인 문장 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얘기했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이 열쇠를 보았어요. 할아버지가 다시는 열쇠 얘기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죠.”
  랭던의 눈은 여전히 열쇠에 못박혀 있었다.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열쇠와 그 위에 그려진 오래된 상징은 고대와 현대 세계를 기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이것이 어떤 상자를 여는 열쇠라고 말했어요. 자기 비밀을 많이 넣어둔 상자요.”
  자크 소니에르 같은 사람이 간직한 비밀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랭던은 한기를 느꼈다. 고대의 비밀단체가 이런 첨단 열쇠를 가지고 무얼 하려고 했는지 랭던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시온은 비밀을 보호하려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했다. 엄청난 힘에 관한 비밀이었다.
  ‘이 열쇠가 그 비밀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생각만으로도 랭던은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열쇠로 무엇을 열어야 하는지 알고 있소?”
  소피의 표정은 실망스러웠다.
  “당신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손바닥 위에서 열쇠를 돌려가며 조사만 할 뿐 랭던은 아무 말도 없었다.
  “기독교 물건 같아 보여요.”
  소피가 단언했다.
  랭던은 그 말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열쇠의 머리는 한쪽 다리가 긴 전통적인 기독교 십자가가 아니라, 팔길이가 모두 같은 정사각형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이 정사각형 십자가는 기독교보다 1천 5백 년 앞서 나타났는데,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된 기독교적인 의미와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 기독교의 상징이 된 한쪽 다리가 긴 라틴 십자가는 원래 로마인들이 쓰던 고문 도구였다. 랭던은 항상 놀라웠다. 십자가 위에 박힌 예수를 바라보는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이름 자체에서 드러나는 잔혹한 상징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crucifix)라는 말은 라틴어 동사 ‘크루시에르(cruciare)'에서 왔는데, 이 말은 ’고문하다‘라는 뜻이다.
  “소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팔길이가 같은 십자가는 평화로운 십자가로 간주된다는 거요. 이 사각형 모양은 십자가 처형에는 전혀 쓸모가 없소. 그리고 균형을 이룬 수직과 수평의 요소들은 남성과 여성의 자연스러운 합일의 뜻을 내 포하고 있소. 그러니까 시온의 철학과 상징적으로 일치하는 셈이오.”
  소피는 랭던에게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모르는 거죠. 그렇죠?”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소피는 자동차의 리어 뷰 미러로 뒤를 살폈다.
  “좋아요. 내려야 해요. 이것이 무엇을 여는 열쇠인지 파악할 안전한 장소가 필요해요.”
  랭던은 리츠 호텔의 안락한 자기 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은 좋은 장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내 강의를 주최한 아메리칸 대학의 인사들은 어떻소?”
  “너무 뚜렷해요. 파슈가 그 사람들을 조사할 거예요.”
  “당신이 사람들을 많이 알겠지. 여기 사니까 말이오.”
  “파슈는 내 전화와 전자메일을 모두 기록하고, 내 동료들에게도 모두 연락했을 거예요. 내가 접촉할수 있는 사람들은 오염됐을 거예요. 호텔을 찾는 것도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네요. 신분증을 요구할테니까.”
  파슈가 자기를 루브르 박물관에서 체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어땠을까. 랭던은 다시 궁금해졌다.
  “대사관에 전화합시다. 내가 사정을 설명하고, 대사관 측에서 사람을 내보내면 어딘가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이 남자가 미친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소피는 랭던을 응시했다.
  “만나요? 로버트. 지금 꿈꾸고 있어요? 당신네 대사관은 대사관 구역외에서는 아무런 사법적 힘을 갖고 있지 않아요. 누군가를 보내서 우리를 데려가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정부의 도망자를 돕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제 발로 대사관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일시적인 보호를 요청한다면, 그래요, 그건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프랑스 땅 안에서 프랑스 법 집행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해달라고 대사관에 부탁하자고요? 대사관에 지금 당장 전화해 보세요. 그럼 그쪽에서는 앞으로 닥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파수에게 가서 자수하라고 말할 거예요. 그 후에는 외교 채널을 통해서 당신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설득하겠노라고는 약속이나 하겠죠.”
  소피는 샹젤리제에 우아하게 늘어서 있는 상점들을 쳐다보았다.
  “현금은 얼마나 있어요?”
  랭던은 지갑을 열었다.
  “백 달러와 약간의 유로요. 왜요?”
  “신용카드는요?”
  “물론 가지고 있소.”
  소피가 차의 속력을 내자, 랭던은 그녀가 뭔가 계획을 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앞. 샹젤리제의 끝에는 개선문이 서 있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군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50미터짜리 기념물이었다. 이 개선문 둘레로 9차선이 돌아가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로터리가 있었다.
  개선문으로 다가가며 소피는 다시 자동차 리어 뷰 미러를 살폈다.
  “잠깐 동안은 경찰을 따돌릴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이 차안에 계속 머무른다면 오 분 후에는 잡히고 말 거예요.”
  ‘그럼 다른 차를 훔치려나. 이제 우리는 모두 범죄자가 되는군.’ 하고 생각하니 랭던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어쩔 작정이오?”
  소피는 개선문의 로터리로 차를 몰았다.
  “날 믿어요.”
  랭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밤 신뢰라는 말은 그다지 그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재킷의 소매를 걷어올려 시계를 살폈다. 이 시계는 열 살 생일때 부모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수집가들을 위해 그 해에 특별히 제작된 미키 마우스 손목시계. 어린애 같은 다이얼은 종종 이상한 시선을 끌기도 했지만, 랭던은 결코 다른 시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디즈니 만화는 색과 형태의 마술로 랭던은 처음 이끌었다. 이제 미키 마우스는 매일같이 젊은 가슴을 지닐수 있도록 랭던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미키의 팔이 이상한 시간을 나타내며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졌다.
  2:51 A.M.
  "재미있는 시계군요.“
  로터리에 접어들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아가면서, 랭던의 손목을 흘끗 본 소피가 말했다.
  “이야기가 깁니다.”
  소매를 다시 끌어내리며 랭던은 말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피는 랭던에게 짧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시내 중심을 떠나 북쪽을 향해 로터리를 재빨리 돌아 나갔다. 푸른 신호등인 교차로 두 개를 간신히 지나 세 번째 교차로에 이르러, 소피는 오른쪽 말셰르브 가로 접어들었다.나무들이 울창한 외교관 밀집 구역을 지나서 어두컴컴한 공업지구로 들어섰다. 소피가 재빨리 왼쪽을 내다보았다. 잠시 후 랭던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생라자르 철도역.
  그들 앞에는 비행기 격납고나 온실의 후손처럼 보이는 유리 지붕의 철도 터미널이 있었다. 유럽의 철도역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이 시간에도 대여섯 대의 택시들이 터미널 정문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 앞에는 행상들이 수레에 생수와 샌드위치를 올려놓고 팔고 있고, 역에서 막 나온 배낭을 짊어진 넝마꼴의 아이들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금 어느 도시에 와 있는지를 기억해 내려는 것처럼 말이다. 거리 위쪽에는 두세 명의 순경들이 연석 위에 서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일부 관광객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피는 스마트카를 택시들의 행렬 뒤로 끌고 가서, 주차금지 구역 안에 세웠다. 길 건너에 합법적으로 차를 주차할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데도 말이다. 랭던이 무얼 하려는 거냐고 미처 묻기도 전에 소피는 차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서둘러 바로 앞에 있는 택시로 달려가 운전사에게 뭔가를 부탁하기 시작했다.
  랭던이 스마트카에서 빠져나올 때, 소피가 운전사에게 지폐 뭉치를 건네주는 것이 보였다. 택시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을 놔두고 가 버렸다. 랭던은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된 거요?”
  택시가 사라진 후, 보도 위에 올라가 있는 소피 곁으로 가서 랭던은 물었다.
  소피는 철도역 입구로 벌써 걸어가고 있었다.
  “이리 와요. 우리는 파리를 떠나는 다음 기차표 두 장을 살 거예요.”
  랭던은 서둘러 소피 옆으로 걸어갔다. 루브르 박물관을 떠나 2킬로미터 정도만 가면 되는 미국 대사관으로 간다는 것이 파리를 완전히 벗어나는 철수가 되고 말았다. 랭던은 이런 식의 행동이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34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공항에서 아링가로사 주교를 태운 운전사는 작고 볼품 없는 검은색 피아트 세단을 몰고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모든 바티칸 수송 차량들이 교황의 봉인을 수놓은 깃발과 금속제 메달 모양의 번호판을 뽐내던 호화로운 대형 차량이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 시절은 가버렸구나.’
  바티칸의 차들은 이제 허세도 줄었고 아무런 특징도 없었다. 바티칸은 이러한 조치가 비용을 절감해서 교구에 더 많은 봉사를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링가로사는 보안문제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세계는 미쳐가고 있었고,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광고하는 일은 자동차 지붕 위에 과녁을 그려 놓는 것과 같았다.
  아링가로사는 검은 사제복을 잘 추스른 뒤 차에 올라탔다. 검은색 좌석에 편히 앉아 간돌포 성까지의 긴 여정을 준비했다.
  ‘작년 로마로의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었지.’
  주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 달 전, 바티칸에서 주교에게 급히 로마로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설명도 없었다.
  “당신의 비행기표는 공항에 있습니다.”
  교황청은 고위 성직자들에게조차 신비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
  이 이상한 소환에 대해 아링가로사는 최근 오푸스 데이의 성공, 즉 뉴욕에 지어진 오푸스 데이 세계 본사의 완공을 두고, 이를 등에 업으려는 교황과 바티칸 관료들의 사진 촬영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잡지 <건축의 다이제스트>에서 오푸스 데이 건물을 ‘현대적인 조경과 우아하게 어울리는 빛나는 가톨릭의 등대’라고 부른 것이다. 최근 바티칸은 ‘현대’ 라는 말이 붙은 것이면 어느 것에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어쩔 수 없이 이 초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행 교황체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링가로사로서는 대다수의 보수적인 성직자들처럼 신임 교황의 재임 첫해를 지대한 우려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전례없이 자유주의자인 교황은 바티칸 역사상 가장 말 많고 이상한 비밀 투표를 통해 교황직을 보장받았던 것이다.이제 교황은 기대하지도 못했던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을 겸손해하지도 않았고, 기독교 세력 안의 고위 관료들과 연계해서 힘을 과시하는데 시간을 쓰지도 않았다. 추기경 대학에서 비롯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유주의 조류를 타고, 교황은 ‘바티칸 교리의 쇄신과 세 번째 밀레니엄의 시대에 맞게 가톨릭을 갱신하자.‘는 사명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 말은 교황이란 존재가, 신의 법을 다시 쓸 수도 있고 진정한 가톨릭의 요구가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주장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이런 뻔뻔스러운 생각이 아링가로사는 두려웠다.
  아링가로사는 오푸스 데이의 무시 못할 규모와 자금력 등 자신의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해서, 교황과 그의 조언자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교회의 법을 부드럽게 고치는 것은 믿음도 없는 겁쟁이 짓이며 정치적인 자살이라고 말이다. 아링가로사는 예전에 시행된 ‘바티칸2(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12월 8일까지 이루어진 2차 바티칸 평화회의)의 대실패’ 같은 교회법의 순화는 훼손된 유산만 남겼을 뿐임을 환기시켰다. 교회 참석자들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헌금은 메말라가고 있었다. 교회를 담당할 가톨릭 사제들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지도와 구체적인 틀이 필요한 것이지, 응석이나 받아주고 면죄나 주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다!”
  아링가로사는 주장했다.
  몇 달 전 밤, 자신을 태운 피아트 자동차가 공항을 출발할 때 아링가로사는 놀랐다. 차가 바티칸이 아닌 동쪽으로 꾸불꾸불한 산길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링가로사는 운전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알반 언덕입니다. 회의 장소는 간돌포 성입니다.”
  “교황의 여름 거주지?”
  아링가로사는 그곳에 가본 적도 없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바티칸 천문대가 있는 이 16세기 성채는 교황의 여름 휴가지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천체 관측소이기도 했다. 시대적인 필요성 때문에 과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바티칸의 입장이 아링가로사는 늘 불만이었다. 과학과 믿음을 섞어 놓은 논리적 근거가 무엇이란 말인가? 산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편견 없는 과학을 수행할 수 없다.믿음 역시 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별로 가득한 11월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간돌포 성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하지만, 믿음은 존재한다.’
  진입로에서 바라본 성은 무분별한 도약을 꿈꾸는 거대한 석조 괴물 같았다. 벼랑 끝에 자리잡은 성은 이탈리아 문명의 요람 위를 굽어보고 있었다. 로마를 건설하기 전, 쿠리아치 부족과 오라치 부족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계곡이었다.
  그 실루엣만으로도 간돌포 성은 시선을 붙들만 했다. 층층으로 이루어진 방어적인 형태의 성채는 벼랑 위에 세워져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상적인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붕위에 세워진 거대한 알루미늄 망원경 돔은 건물의 외관을 망치고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한때 근엄한 성채였던 이 건물이 마치 자랑스러운 투사가 파티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링가로사가 차에서 내리자, 젊은 예수회 수사가 서둘러 다가와 그를 맞이했다.
  “주교님, 어서 오십시오. 저는 망가노 신부입니다. 여기 천문학자이기도 하고요.”
  ‘자네에겐 잘된 일이군.’
  아링가로사는 인사말을 중얼거리고, 수사를 따라 성 안의 홀로 들어갔다. 홀은 르네상스 예술과 천문학 이미지를 무자비하게 섞어 놓은 넓은 공간이었다. 석회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층계를 오르자, 회의실과 강의실, 관광 안내 서비스 표지들이 보였다. 영혼의 성장을 위해 일관되고 근엄한 안내를 제공하는 데 실패한 바티칸이 관광객들에게 천체물리학 강의 시간을 마련하는게 아링가로사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봐요. 언제부터 꼬리가 개를 흔들게 되었소?”
  아링가로사는 젊은 사제에게 말했다.
  사제는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아링가로사는 손을 내젓고, 이 밤에 대해서 특별한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바티칸은 미쳐가고 있어.’
  버르장머리 없게 슬피 우는 아이를 꼿꼿이 세워 놓고 가치를 가르쳐 주는 것보다, 그저 묵인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아차린 게으른 부모처럼 교회는 모든 것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빗나간 문화에 자신을 맞추느라 아예 교회를 다시 짓는 것 같았다.
  제일 상층의 복도는 널찍하고, 오직 한 곳으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거대한 참나무 문에는 황동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천문학 도서관.
  아링가로사는 이 장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케플러,뉴턴,그리고 세키의 위대한 업적을 포함해 2만 5천권이 넘는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도서관은 교황의 고위급 관료들이 사적인 회의를 여는 장소이기도 했다...... 바티칸 시티의 벽 안에서 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런 모임들 말이다.
  아링가로사는 도서관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곧 듣게 될 충격적인 소식과 움직이기 시작한 사건들의 고리를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주교가 비틀거리며 회의실에서 빠져나온 것은 가혹한 암시를 받아들인지 한 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지금부터 육 개월이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피아트에 앉은 아링가로사는 첫 회의를 앞둔 자신이 주먹을 꼭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먹을 펴고,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근육을 완화시켰다.
  ‘모든 것이 잘될거야.’
  피아트가 산으로 높이 올라갈때, 주교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직도 주교는 휴대 전화기의 벨이 울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승은 왜 아직 전화하지 않는 걸까? 지금쯤 사일래스는 쐐기돌을 얻었을텐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아링가로사는 반지에 끼워진 보라색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의 단면들과 반지에 붙은 아플리케의 질감을 느끼며 아링가로사는 스스로를 달랬다. 이 반지는 곧 그가 얻게 될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힘의 상징일 뿐이라고 말이다.

35

  생 라자르 철도역은 유럽의 다른 역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역사(驛舍)문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마분지를 들고 있는 노숙자들이 있고, 몇몇 대학생 녀석들이 휴대용 MP3 플레이어를 틀어 놓은 채 배낭 위에서 자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짐꾼들도 보였다.
  소피는 거대한 출발안내 표지판으로 눈을 돌렸다. 랭던도 표지판을 올려보았다. 가장 빠른 열차는 3시 6분 릴리 행 열차였다.
  “빠를수록 좋겠어요. 그리고 릴리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소피가 말했다.
  ‘빠를수록?’
  랭던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시 59분이었다.열차는 7분후에 떠날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아직 표도 사지 않았다.
  소피는 랭던을 매표소 창문으로 이끌며 말했다.
  “당신 신용카드로 표 두 장을 사요.”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추적을 받을......”
  “바로 그거예요.”
  랭던은 비자카드로 객실 차표 두 장을 구입하고, 표를 소피에게 건넸다.
  소피는 랭던을 열차 선로로 안내했다. 머리 위로 기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고, 릴리 행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승객용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들 앞에는 열여섯 개의 선로가 흩어져 있었다. 오른쪽 멀리, 3번 철로에서 릴리 행 기차가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으며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피는 랭던의 팔을 끼고 기차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로비를 통과해 밤새도록 문을 여는 카페를 지나갔다. 마침내 철도 역사의 서쪽에 있는 옆문으로 빠져나오자 인적이 없는 거리가 나왔다.
  문 근처에서 택시 한 대가 빈둥거리고 있었다.
  운전사가 소피를 보더니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렸다.
  소피가 뒷자석으로 올라탔다. 랭던은 그녀를 따라 차에 들어갔다.
  택시가 출발하자, 소피는 기차표를 꺼내 찢어버렸다.
  랭던은 한숨을 쉬었다.
  ‘칠십 달러가 날아가 버렸군.’
  택시가 클리시 가로 이르는 단조로운 북쪽 길로 접어들자 랭던은 자기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오른쪽 창으로 몽마르트와 사크레 쾨르의 아름다운 돔이 보였다. 반대편에서 경찰차가 사이렌을 번쩍거리며 그들 옆을 휙 지나갔다.
  랭던과 소피는 사이렌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몸을 숙이고 있었다.
  소피는 택시 운전사에게 시 외곽으로 나가 달라고 짧게 말했다. 소피의 굳어진 턱을 보며, 랭던은 그녀가 다음 행보를 구상중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랭던은 십자 모양의 열쇠를 다시 살펴보았다. 창에 가까이 가져가 보기도 하고, 열쇠가 만들어진 곳을 알려주는 어떤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눈에 대보기도 했다. 간간이 빛나는 가로등 불빛 속에서, 랭던은 시온의 문장(紋章)외에는 어떤 표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말도 안되오.”
  랭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떤 부분이요?”
  “당신 할아버지는 이 열쇠를 당신에게 주기 위해서 무척 고생했을 텐데, 당신은 이걸 가지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오.”
  “동감이예요.”
  “할아버지가 그림 뒤에 아무것도 써놓지 않은 게 확실하오?”
  “샅샅히 조사했어요. 이것뿐이었어요. 이 열쇠도 그림 뒤에 쑤셔 넣어져 있었다고요. 열쇠 머리의 시온 문장을 보고는 주머니에 넣은채, 당신과 함께 박물관을 나온 거예요.”
  랭던은 삼각형 다리의 뭉툭한 끝을 들여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열쇠 머리의 테두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에 누군가 이 열쇠를 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요?”
  “알코올로 문지른 냄새가 나요.”
  소피가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랭던은 열쇠를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누군가 열쇠를 클리너로 문지른 냄새가 난단 말이오. 반대쪽에서 더 강하게 나는군. 그래, 알코올 성분의 물질이야. 클리너로 문질렀든지, 아니면......”
  “뭐죠?”
  랭던은 열쇠를 빛에 대더니 십자가의 넓은 팔 위의 부드러운 표면을 들여다보았다. 그 부분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젖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머니에 열쇠를 넣기 전에 뒷면을 잘 들여다보았소?”
  “왜요? 글쎄요, 그건 잘 ...... 서둘러야 해서.”
  랭던은 소피를 돌아보았다.
  “그 펜 등을 아직도 가지고 있소?”
  소피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외선 펜 등을 꺼냈다. 랭던은 등으로 열쇠 뒷면을 비췄다.
  열쇠의 뒷면이 순간 빛났다. 거기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읽을 수는 있지만 급하게 적은 필적이었다.
  “자, 우리는 알코올 냄새가 무엇인지 이제 알 게 되었군요.”
  랭던이 웃으며 말했다.
  소피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열쇠 뒷면의 자줏빛 글씨를 응시했다.
  악소 가 24번지.
  ‘주소! 할아버지가 주소를 적어 놓았어!’
  “이게 어딥니까?”
  랭던이 물었다.
  소피도 몰랐다. 소피가 운전사에게 묻자 운전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 곳은 파리의 서쪽 교외에 있는 테니스 경기장 근처라고 말했다. 소피는 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부아 드 불로뉴를 지나가면 더 빠릅니다. 괜찮습니까?”
  운전사가 프랑스어로 소피에게 물었다.
  소피는 얼굴을 찡그렸다. 덜 수치스러운 길을 생각해 내려고 했지만, 오늘 밤은 까다롭게 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좋아요.”
  ‘우리가 이 미국 방문객에게 충격을 주겠군.’
  소피는 다시 열쇠를 들여다보며, 악소가 24번지에서 그들이 과연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했다.
  ‘교회? 일종의 시온 본부?’
  그녀의 마음은 10년 전에 지하 석굴에서 목격했던 비밀스러운 의식의 이미지들로 다시 메워지고 있었다. 소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버트, 당신에게 할 얘기가 아주 많아요. 하지만 먼저 시온 수도회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개 말해 줬으면 해요.”
  택시는 서쪽으로 달라고, 소피의 눈동자는 랭던의 눈과 마주쳤다.

36

<모나리자>의 전용 관람실 밖에서, 브쥐 파슈는 씨근거리고 있었다. 소피와 랭던이 어떻게 자신을 무장해제시켰는지 설명하는 경비원 그루아르의 얘기를 들으며 파슈는 생각했다.
  ‘그냥 그 축복받은 그림을 쏴버리지 그랬나?’
  “반장님?”
  부관 콜레가 지휘 본부 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반장님, 사람들이 느뵈 요원의 차를 찾았다고 합니다.”
  “대사관으로 간 모양이지?”
  “아닙니다. 철도역입니다. 막 출발한 기차표를 두 장 샀다고 합니다.”
  파슈는 경비원에게 가라고 손짓하고, 콜레를 근처 구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목적지가 어딘가?”
  “릴리입니다.”
  파슈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끼일 거야. 좋아, 만일을 위해 다음 역에 연락하고 열차를 세워 조사하라고 해. 느뵈의 차는 그대로 두고, 그들이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사복 차림의 요원들을 배치시켜놔. 맨발로 도주할지도 모르니까, 사람을 보내서 역 주변을 뒤지라고 해. 역에서 떠나는 버스들이 있나?”
  “지금 이 시간엔 없습니다. 오직 대기하고 있는 택시들뿐입니다.”
  “잘됐군. 운전사들에게 물어봐. 뭔가 본게 있는지 말이야. 택시회사 발차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설명해. 난 인터폴에 연락하겠네.”
  콜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장님, 이 일을 전화로 알릴 겁니까?”
  파슈는 후회했다. 하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물망을 좁혀야 해. 더욱 꽉 죄도록 말이야.’
  처음 한 시간이 중요했다. 탈주 후 첫 한 시간을 보내는 도망자들의 행동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을 필요로 했다.
  ‘여행, 숙박, 현금.’
  훌륭한 삼위일체였다. 인터폴은 눈 한번 깜박이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도망자에게서 빼앗을 수 있었다. 랭던과 소피의 사진을 파리의 여행사와 호텔,은행에 전송함으로써 인터폴은 이 두사람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두사람은 파리를 떠날 수도 없고, 숨을 곳도 없으며, 신분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돈을 인출할 수도 없다. 도망자는 차를 훔치거나, 가게를 털거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된다. 어떤 짓이건, 이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금세 그 지역 경찰서에서 파악할 것이다.
  “오직 랭던만 알리는 거지요. 그렇죠? 소피 느뵈까지 들추는 겁니까? 그녀는 우리측 요원입니다.”
  콜레가 말했다.
  파슈는 냉큼 말을 잡아챘다.
  “물론 그 여자도 포함이야. 그 여자가 랭던의 더러운 일을 다 돌봐주는 마당에 랭던만 잡아넣어 좋을 게 뭐가 있겠나? 느뵈의 인사 기록을 훑어보고 친구나 가족, 안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파악해야겠어. 도움을 청하려고 연락할지도 모르니까.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밖에서 저 지랄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이제 느뵈는 이 일로 직업을 잃는 것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저는 전화기 옆에 있을까요. 아니면 현장으로 나갈까요?”
  “현장으로 가. 역으로 가서 팀을 꾸리게. 자네가 고삐를 쥐고 있는 거지만, 내게 말 없이 움직이지 마.”
  “알겠습니다. 반장님.”
  콜레는 달려나갔다.
  구석에 선 파슈는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창문 밖으로 유리 피라미드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이는 연못에 반사된 피라미드의 모습이 물 위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군.”
  안정을 취하며 파슈는 혼자말을 했다.
  잘 숙련된 현장 요원이라면 인터폴이 가하는 압력을 운 좋게 이겨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 암호 해독가와 대학 교수라?’
  동이 트기도 전에 그들은 잡힐 것이다.

37

  나무들이 울창한 공원은 부아 드 불로뉴 외에도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파리의 예술품 감정가들은 이곳을 ‘지상의 즐거움이 모인 정원’이라고 불렀다. 거창한 별명과 공원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같은 제목을 가진 보슈의 선정적인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어둡고 비틀린 이 숲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원은 변태와 성도착자들의 쉼터였다. 밤이 되면 숲의 바람결을 타고, 말로 할 수 없는 깊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타난 수백의 몸뚱어리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자, 여자 그 중간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랭던이 시온 수도회에 관해서 말하려고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 택시는 공원의 입구를 통과해 자갈이 깔린 서쪽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랭던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공원의 야간 거주자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자신들이 걸친 옷을 뽐내고 있었다. 앞에서는 가슴을 풀어헤친 두 명의 소녀들이 자동차를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녀들 뒤에서는 번들거리는 흑인이 국부만 가린 채 엉덩이를 돌려댔다. 흑인 옆에는 눈부시게 황홀한 금발미인이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스커트를 들어 올리자 그 금발 여인은 여자가 아니란 것이 드러났다.
  ‘하느님 맙소사!’
  랭던은 시선을 차 안으로 거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시온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소피가 말했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기가 말하려는 전설과 이처럼 안 어울리는 배경이 또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랭던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망설였다. 조직의 역사는 천 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비밀과 협박, 배신, 분노한 교황의 손에서 일어난 잔인한 고문 등이 지난 천 년에 걸쳐 놀라운 연대기를 이루었다.
  랭던은 입을 열었다.
  “시온 수도회는 1099년 프랑스 왕 부이용의 고드프루아가 만든 것이오. 왕이 이 도시를 정복한 직후죠.”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은 랭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드프루아 왕은 엄청난 비밀의 소유자였다고 알려져 있소.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그 가족들에게 전해진 비밀인데, 자기가 죽으면 그 비밀이 사라질까 두려워한 왕은 비밀조직, 그러니까 시온 수도회를 만들었다고 해요. 이 조직이 세대를 거쳐 비밀을 조용히 전수하고, 자기 비밀을 보호하도록 말이오. 예루살렘 시절에, 시온은 폐허가 된 헤롯 신전 밑에 문서 상자가 숨겨진  채 묻혀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헤롯 신전은 일찍이 솔로몬 신전의 폐허 위에 세우진 거였소. 그 문서들은 고드프루아의 엄청난 비밀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고, 교회가 이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라고 시온은 믿었소.”
  소피의 표정이 어두웠다.
  “시온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이 문서들을 신전 밑의 돌 속에서 회수해야 한다고 맹세했어요. 그리고 진실이 영원히 죽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말이오. 폐허 밑에서 문서를 끄집어내기 위해 시온은 군사조직을 만들었소.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청빈한 기사들의 부르심‘ 이라고 불리는 아홉 명의 기사집단이오.“
  랭던은 잠시 뜸을 들였다.
  “성전 기사단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거요.”
  소피는 놀랍다는 시선을 던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귓결에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성전 기사단에 관해서 랭던은 종종 강의했다. 학자들에게 성전 기사단의 역사는 사실과 전설, 잘못된 정보가 서로 뒤섞인 불안정한 세계였다. 그래서 가장 기초적인 진실들을 끄집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요즈음 들어 랭던은 강의도중 성전기사단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일부러 피하고 있다. 잘못하다간 음모이론에 휩쓸린 한 무더기의 질문들과 맞닥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소피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지금 성전 기사단을 비밀 문서를 회수하려는 시온 수도회가 만들었다는 얘긴가요? 전 기사단이 성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걸로 아는데요.”
  “그건 일반적인 오해요.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일반적인 개념은 기사단이 자기들의 임무를 위장한 거란 말이오. 성지에서 기사단의 진짜 목적은 신전 폐허 밑에 깔려 있는 문서들을 회수하는 거였소.”
  “그럼 그들이 문서를 찾아냈나요?”
  랭던은 싱긋 웃었다.
  “아무도 확신하지 않아요. 하지만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는 기사단이 폐허 밑에서 뭔가를 발견했다는 것이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무엇, 기사들에게 부와 권력을 가져다줄 그 뭔가를 말이오.”
  랭던은 재빨리 성전 기사단에 얽힌 보편적인 학설을 대충 얘기했다. 기사단이 2차 십자군 전쟁동안 어떻게 성지에 머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왕인 볼드윈 2세에게 기독교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기 있겠다고 말했다는 것 등을 말이다. 어떤 금전적인 보상도 없이 청빈을 맹세한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은 왕에게 쉴 곳을 부탁했고  신전의 폐허 속에 마구간과 거처를 마련하겠노라며 왕의 허락을 구했다. 볼드윈 왕은 그 요청을 수락했다. 기사들은 황폐한 성전 안에 누추한 거취를 마련했던 것이다.
  기사들의 이상한 거처는 별 생각 없이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기사단은 시온이 찾는 문서들이 폐허 깊숙이 묻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신이 거주했다고 믿어지는 신전 속의 신성한 방 안에 말이다. 문자 그대로 유대인들의 믿음 한가운데였다. 아홉명의 기사들은 10년 동안을 폐허 속에서 살았다. 단단한 바위들 사이에서 비밀을 파내면서 말이다.
  소피가 시선을 들었다.
  “그럼 기사단이 뭔가를 찾았다는 얘기예요?”
  “그들은 확실히 뭔가를 찾아냈소.”
  비록 9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기사단은 그들이 찾아 헤매던 것을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보물을 성전에서 유럽으로 가지고 왔다. 이로써 유럽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졌다.
  기사단이 바티칸을 협박했는지, 아니면 교회가 단순히 기사단의 침묵을 사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교황 이노센트 2세는 즉시 기사단에게 무제한의 힘을 부여했고, 그들이 곧 법이라는 유례없는 교황청의 교서를 발표했다. 즉 기사단은 왕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모든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자적인 군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기사단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유로워진 것을 의미했다.
  바티칸에서 부여받은 이 백지 위임장으로 성전 기사단은 열두 개가 넘는 나라에서 광대한 땅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의 숫자나 정치적인 면에서도 급속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기사단은 왕가에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이자를 물어 왕가를 파산시켜 버렸다. 현대와 같은 은행 시스템을 통해 자기들의 부와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간 것이다.
  1300년경, 바티칸의 인가가 기사단에게 너무 많은 힘을 몰아주었다고 판단한 교황 클레멘트 5세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결정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공모해, 교황은 바티칸을 짓누르고 있는 비밀을 통제함으로써 기사단을 뭉개 버리고, 그들의 부를 빼앗을 계획을 고안해 냈다. 교황 클레멘트는 CIA같은 군사 책략을 통해,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유럽 전역에 있는 교황의 군사들에게 동시에 열어보도록 봉인된 비밀 지령을 내렸다.
  13일 새벽, 봉인은 풀리고 무시무시한 교황의 지령이 드러났다. 클레멘트의 편지에는 신이 자신을 찾아와 계시를 내렸는데, 성전 기사단이 악마숭배와 동성애, 십자가 모독, 남색, 그 외 불경한 행동의 이단적인 죄들을 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은 교황 클레멘트에게 모든 기사들을 소환해서 신에 거역한 그들의 죄를 실토할때까지 고문하고, 지상을 깨끗하게 하라는 요청을 내렸다고 했다. 클레멘트의 마키아벨리식 작전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진행됐다. 그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사들이 사로잡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이단자로서 말뚝에 세워져 화형당했다. 그 비극의 메아리는 현대 문화에까지 울리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13일의 금요일은 운이 나쁜 날로 인식되고 있다.
  소피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성전 기사단이 사라졌다는 거죠? 하지만 기사단의 형제애는 지금도 존재하는 걸로 아는데?”
  “그렇소.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말이오. 기사단을 뿌리뽑으려던 클레멘트의 노력과 거짓 혐의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은 강력한 동지애를 가지고 있었고 또 몇몇은 바티칸의 처형을 피해 가까스로 달아날 수 있었소. 기사단의 보물인 문서들은 명백히 기사단의 힘의 원천이었고, 클레멘트의 진짜 목표도 이것이었소. 하지만 이 보물은 클레멘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만 거요. 이 문서들은 기사단의 그림자 같은 설계자인 시온 수도회에 쭉 맡겨져 있었소. 그리고 시온의 비밀스러운 장막은 바티칸의 살육에서 조직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가 있었던 거요. 바티칸이 살육을 끝냈을 때, 시온은 한밤중에 파리의 성전 기사단 건물에서 문서들을 몰래 빼내 라로셸에 있는 기사단의 배에 실었다고 해요.”
  “그 문서들은 어디로 갔지요?”
  랭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미스터리에 대한 답은 오직 시온만이 알고 있을 거요. 오늘날까지도 끊임없는 수색과 탐색의 대상이니 말이오. 문서들은 여러 번 옮겨지고 다시 숨겨진 것 같소. 현재는 영국 어딘가에 있다는 추정이 지배적이오.”
  소피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천 년 동안 이 비밀의 전설이 전해져 왔소. 문서 전체와 그 힘, 문서가 가진 비밀은 하나의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바로 상그리엘이오. 이것에 관한 수백 권의 책들이 씌어졌고, 상그리엘에 관한 학자들의 큰 관심만큼이나 그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고 있소.”
  “상그리엘? 이 단어가 프랑스어인 ‘상’과 스페인어인 ‘상그리’와 관련이 있나요? 이 단어들은 모두 피를 뜻하는데......?”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상그리엘의 중추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소피가 상상하는 그런 식은 아니었다.
  “전설은 복잡해요. 하지만 기억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시온이 증거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고, 그 진실을 역사에 드러낼 적절한 순간을 의식적으로 기다려 왔다는 것이오.”
  “무슨 진실요? 어떤 진실이 그렇게 엄청날 수 있죠?”
  랭던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곁눈질로 어둠에 잠긴 파리의 하층부를 바라보았다.
  “소피, 상그리엘이라는 말은 고대 언어요.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른 용어로 진화해 왔소...... 더 현대적인 이름으로 말이오. 내가 그 현대적인 이름을 말하면, 당신은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거요. 사실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상그리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거예요.”
  소피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난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랭던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들어봤을 거요. 성배(聖杯)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말이오.”

38

  소피는 랭던의 표정을 살폈다.
  ‘이 사람, 지금 농담하는 거겠지?’
  “성배라고요?”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성배는 상그리엘이란 문자 그대로의 뜻이오. 이 말은 프랑스어 상그랄(sangraal)에서 유래된 거요. 이게 상그리엘(sangreal)로 진화했고, 결국 상(san)과 그리엘(greal)로 나뉜 것이오.”
  ‘성배.’
  소피는 자신이 그 언어의 결합을 즉시 눈치 채지 못한 데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랭던의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난 성배가 잔인 줄 알았는데, 당신은 조금 전에 상그리엘이 어두운 비밀을 드러내는 문서 뭉치라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하지만 상그리엘에 관한 문서는 성배라는 보물의 절반에 지나지 않소. 문서는 성배와 함께 묻혀 있었으니까...... 그 진정한 의미를 포함해서 말이오. 문서들은 성전 기사단에게 굉장한 힘을 주었소. 왜냐하면 그 종이들은 성배의 본질을 밝히고 있으니까.”
  ‘성배의 본질?’
  소피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성배란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마신 잔이었고, 그 잔으로 아리마테아의 요셉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피를 받았던 것이다.
  “성배는 그리스도의 잔이에요. 어떻게 그보다 간단할 수 있죠.”
  그녀에게 기대면서 랭던이 속삭였다.
  “소피, 시온에 의하면 성배는 잔이 아니오. 성배가 그저 잔이라는 전설은 어떤 암시를 숨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주장이오. 즉 성배 이야기는 더 강력한 뭔가를 대신하는 은유로 잔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요. 그것은 당신 할아버지가 오늘 밤 우리에게 말하려고 애쓴 것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어떤 것일 거요. 신성한 여성을 언급하는 모든 상징들을 포함해서 말이오.”
  소피는 랭던의 끈기 어린 미소가 자신의 혼란을 더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랭던의 눈빛은 정직했다.
  “성배가 잔이 아니라면 대체 뭐죠?”  랭던은 이 질문이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떻게 얘기해 줘야 할지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절한 역사적 배경에서 대답하지 않는다면, 소피는 더 당황할게 분명했다. 몇 달 전, 자신의 편집장에게 원고를 건넸을 때, 편집장이 지어 보인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소피의 얼굴에서 보게 될 터였다.
  “이 원고에서 주장하는 게 뭐죠? 심각한 건 아니겠죠?”
  포도주 잔을 내려놓고 반쯤 먹어치운 점심 식사 너머로 랭던을 바라보며, 편집장은 숨막히는 소리로 물었다.
  “이걸 조사하느라 일 년을 투자했을 정도로 심각한 겁니다.”
  뉴욕의 저명한 편집장인 조나스 파우크만은 신경질적으로 자기의 염소수염을 말아 올렸다. 그 동안 파우크만은 별의별 주제를 다룬 책들을 만나 보았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런 내용이었다.
  파우크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로버트, 내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요. 나는  당신의 작업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함께 멋진 길을 달려왔어요. 하지만 내가 이 같은 아이디어를 출간하기로 동의한다면, 사람들은 몇 달 동안 내 사무실 밖에서 시위를 할 거요. 게다가 이 일은 당신의 명성을 떨어뜨릴 거요. 당신은 하버드의 역사학자이지, 빨리 몇 푼 벌려는 싸구려 잡상인이 아니잖소. 이 같은 이론을 지지하는 신뢰할 만한 증거들을 분명히 찾은 거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랭던은 트위드 코트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파우크만에게 건넸다. 종이에는 50개 이상의 참 고문헌 목록이 망라되어 있었다. 모두 저명한 역사가들의 저서로 일부는 동시대 인물들의 것이고, 일부는 몇 세기 전 인물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저서의 상당수는 인문학 도서의 베스트 셀러들이었다. 모든 책들의 제목은 랭던이 방금 제시한 것과 같은 명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목록을 읽어 내려가면서, 파우크만은 지구가 실제로 평평하다는 것을 막 발견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저자들 중의 일부를 알고 있어. 이들은...... 진짜 역사가들인데!”
  랭던은 싱긋 웃었다.
  “조나스, 지금 보다시피, 이것은 나 혼자만의 이론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주위에 있었던 거예요. 난 그저 그 위에 건물을 지은 겁니다. 어느 책도 기호학적인 각도에서 성배의 전설을 탐험해 보지는 않았어요. 내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내가 찾아낸 도상학적인 증거들은 무척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파우크만은 여전히 도서 목록을 보고 있었다.
  “오, 하느님, 이 책들 중 한 권은 영국의 왕립 역사가인 레이 티빙 경이 쓴 거잖아.”
  “티빙은 성배를 연구하는 데 자기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지요. 이 인물은 실제로 제 영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나스, 티빙은 이 목록의 다른 사람들처럼 믿는 사람이죠.”
  “당신은 지금 이 모든 역사가들이 실제로 믿는다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파우크만은 침을 삼켰다.
  랭던은 다시 싱긋 웃었다.
  “성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 헤맨 보물입니다. 성배는 전설을 퍼뜨렸고, 이를 둘러싼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생을 걸고 찾아 헤매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그저 단순한 잔이라면 말이 되는 일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다른 유산들, 예를 들어 면류관이나 진짜 십자가, 현판(예수의 범죄 사실을 기록한 판. 형장에서 십자가 꼭대기에 부착했다)같은 것도 비슷하거나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죠. 역사를 통틀어 성배는 가장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유를 알겠죠?”
  파우크만은 여전히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들이 모두 성배에 관한 것을 쓰고 있다면, 왜 이 이론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거요?”    
  “이 책들은 당시에 지지를 받고 있던 역사와 싸울 수는 없었던 거죠. 특히 그 역사가 최고의 베스트 셀러로 보장받을 때는 말입니다.”
  파우크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실제로는 성배에 관한 책이라는 얘기만은 하지 말아요.”
  “전 성경을 말한 겁니다.”
  파우크만은 움찔했다.
  “나도 알아요.”
  “내려놔!”
  소피의 고함이 택시안의 공기를 갈랐다.
  소피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택시 운전사에게 고함을 지르자 랭던은 놀라 펄쩍 뛰었다. 운전사는 라디오 마우스피스를 잡고 있었다.
  소피는 돌아서서 랭던의 트위드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랭던이 미쳐 깨닫기도 전에, 소피가 권총을 꺼내 한 바퀴 돌리더니 운전사의 뒤통수에 갖다댔다. 운전사는 즉시 마우스피스를 떨어뜨리고 한 손을 머리위로 들어 올렸다.
  “소피! 도대체 무슨?”
  랭던은 말이 막혔다.
  “멈춰!”
  소피가 운전사에게 명령했다.
  운전사는 떨면서 공원 한 귀퉁이에 차를 세웠다.
  랭던이 자동차 계기판에서 흘러나오는 택시회사 배차 안내원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
  “...... 소피 느뵈라는 요원을......”
  무선 라디오는 잡음이 심했다.
  “그리고 미국인 한 명, 로버트 랭던......”
  랭던은 근육이 굳는 듯 했다.
  ‘저들이 우리를 벌써 찾아냈단 말인가?’
  “내려요.”
  소피가 명령했다.
  떨고 있는 운전사는 두 팔을 머리로 올린 채 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피는 창문을 내려서 당황한 운전사를 권총으로 계속 겨누고 있었다. 소피는 조용히 말했다.
  “로버트, 운전대를 잡아요. 당신이 운전하세요.”
  랭던은 총을 휘두르는 이 여인과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차 밖으로 뛰어나가서 운전대 앞에 앉았다. 운전사는 여전히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저주에 찬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로버트, 난 당신이 우리의 마법의 숲을 충분히 봤으리라고 믿어요.”
  뒷좌석에서 소피가 말했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많이 봤지.’
  “좋아요. 우리 여기서 나가요.”
  랭던은 브레이크와 클러치를 더듬었다.
  “소피?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이......”
  “가요!”
  소피가 소리쳤다.
  밖에서는 대여섯 명의 매춘부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오고 있었다. 한 여자는 자기 휴대 전화기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랭던은 클러치를 밟고 기어 스틱을 1단으로 놓은 뒤 가속기를 만지작거리며 소리를 시험했다.
  클러치를 놓자, 타이어가 포효하는 소리를 내며 택시가 앞으로 돌진했다. 좌우로 요동을 치며 택시가 급격히 움직이자, 모여든 군중이 이를 피하기 위해 좌우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휴대 전화기를 들고 있던 여자는 차에 치일 뻔하다가 가까스로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차가 비틀거리며 달리자 소피가 말했다.
  “부드럽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신에게 말하려고 했소. 난 오토매틱만 몰아 봤단 말이오!”
  이를 가는 듯한 엔진 소리 너머로 랭던은 소리쳤다.

39

  라 브뤼에르 가의 고급 주택 안의 검소한 방은 많은 고통을 목격했겠지만, 사일래스는 지금 자신의 창백한 몸뚱어리를 휘어잡고 있는 분노를 잠재울 만한 것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속았다. 모든 게 사라져 버렸어.’
  사일래스는 속았다. 시온의 회원들은 진실을 밝히는 대신에 죽음을 택하는 거짓말을 했다. 사일래스는 스승에게 전화할 힘도 없었다. 쐐기돌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네 사람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생 쉴피스 교회의 수녀도 죽였다.
  ‘그 여자는 신에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 오푸스 데이의 사업을 비웃었단 말이다!’
  범죄의 충동과 여자의 죽음이 일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링가로사 주교는 사일래스를 생 쉴피스에 들여보내기 위해 전화를 거는 수고까지 했다. 수녀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생 쉴피스의 신부는 어떻게 생각할까? 수녀를 침대에 잘 눕혀 놓고 나왔지만, 수녀의 머리에 난 상처는 너무나 분명했다. 교회 바닥의 깨진 타일도 수습해 보려고 했지만, 워낙 파손이 컸다. 사람들은 여기에 누군가가 왔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일래스는 자기 임무를 마치고 나면, 오푸스 데이에 숨을 작정이었다.
  ‘아링가로사 주교님이 보호해 주실 것이다.’
  사일래스는 뉴욕에 있는 오푸스 데이 본사의 담장 안에서 올리는 기도와 명상의 삶보다 축복받은 존재를 상상할 수 없었다. 다시는 밖으로 발을 내딛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그곳에 있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링가로사 주교 같은 유명한 인물은 그리 쉽게 사라질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내가 주교님을 위험에 빠뜨렸다.’
  사일래스는 멍한 시선으로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며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다. 처음에 사일래스에게 생명을 준 것은 아링가로사였다...... 스페인에 있는 작은 사제관에서 그를 가르치고, 그에게 삶의 목적을 주었다.
  아링가로사는 사일래스에게 말했다.
  “친구여, 당신은 알비노로 태어났습니다. 이 일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폄하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게 당신을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까? 노아도 알비노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그 노아 말입니까?”
  사일래스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링가로사는 웃고 있었다.
  “맞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노아도 알비노였지요. 당신처럼 천사같은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세요. 노아는 지상의 모든 생명을 구했습니다. 사일래스, 당신은 위대한 일을 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신은 당신을 자유롭게 한 것입니다. 당신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의 사업을 하기 위해, 신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일래스는 자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난 순수하다. 하얗고 아름답다. 천사처럼.’
  하지만 그 순간, 자기가 머물고 있는 방에서 사일래스에게 속삭이는 것은 실망스러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넌 실패작이야. 유령이라고.’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일래스는 사죄의 기도를 올렸다. 그런 뒤 외투를 벗고, 징벌의 수단들에 손을 뻗었다.

40

  기어 조작에 애를 먹으면서도 랭던은 탈취한 택시를 부아 드 불로뉴의 끝으로 몰고 갈 수 있었다. 겨우 두 번 덜컹거렸을 뿐이다. 불행히도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택시 배차 안내원이 무전을 통해 운전사를 계속 부르는 소리에 묻히고 있었다.
  “차량번호 563, 어디에 있습니까? 응답하시오!”
  랭던이 공원의 출입구에 이르렀을 때, 랭던은 자신의 남성다움을 버리기로 작심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당신이 운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소.”
  운전석으로 뛰어들면서 소피는 안심하는 듯 보였다. 몇 초 후에 소피는 공원을 떠나 롱샹의 오솔길을 따라 서쪽으로 차를 부드럽게 몰았다.
  “어느 쪽이 악소 가요?”
  소피가 속력을 1백 킬로미터 가까이 올리는 것을 지켜보며 랭던이 물었다.
  소피의 눈동자는 도로에 고정되어 있었다.
  “악소 가는 롤랑 가로의 테니스 스타디움 바로 옆에 있다고 운전사가 말했잖아요. 그 지역을 알고 있어요.”
  랭던은 묵직한 열쇠의 무게를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주머니에서 다시 꺼냈다. 이 열쇠는 어마어마한 결과물일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이제 열쇠는 자신의 자유와도 상당히 관계가 있었다.
  조금 전에 소피에게 성전 기사단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랭던은 열쇠가 시온의 문장을 지니고 있는 것 이외에도 조직과 좀 더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길이가 같은 십자가 모양은 균형과 조화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성전 기사단의 상징이기도 했다. 누구나 성전 기사단이 입고 있는 하얀 튜닉 위에 붉은 십자가가 수놓아진 그림을 봤을 것이다. 기사단의 십자가들은 그 끝이 살짝 부풀려져 있긴 해도 같은 길이의 팔들로 되어 있다.
  ‘정사각의 십자가. 이 열쇠의 십자가와 같다.’
  기사단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하자, 랭던은 자신의 상상력이 줄달음쳐 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성배.’
  그 터무니없음에 랭던은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성배는 영국 어딘가, 적어도 1천 5백 개가 넘는 기사단 교회들 중 한 곳의 은밀한 방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 빈치가 시온의 수장으로 있던 시대였지.’
  시온은 조직의 강력한 문서들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문서들을 여러 차례 옮겨야만 했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성배가 예루살렘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이래 여섯 번이나 이동했다고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성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447년 수많은 목격자들이 문서들을 태워 버릴 뻔한 화재를 묘사한 때였다. 하나를 옮기는 데도 장정 여섯 명이 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궤짝 네 개를 미처 안으로 안전하게 옮기기 전이었다고 한다. 그후 누구도 성배를 보지 못했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나라인 영국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성배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남아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생전에 성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숨겨진 장소는 아마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배에 미친 사람들은 다 빈치의 그림이나 그의 일기를 여전히 숙고하는 것이다. 성배의 현재 위치를 알려줄 숨겨진 단서를 찾을 희망으로 말이다. 일부는 <암굴의 마돈나>의 산악 배경이 스코틀랜드의 굴이 많은 언덕 지형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제자들의 수상스러운 자리 배치가 일종의 암호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모나리자> 그림을 엑스레이로 비춰 보면, 모나리자가 원래는 이시스의 청금석 펜던트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 다 빈치가 죽은 후에 고의적으로 덧칠해서 없애 버렸다고 주장한다. 랭던은 팬던트의 흔적을 못봤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림이 어떻게 성배를 나타내는 것인지 상상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성배 숭배론자들은 이에 관해서 인터넷 게시판이나 채팅방에서 멀미가 날 정도로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다.
  ‘모두가 음모를 좋아한다.’
  그리고 음모는 계속되고 있었다. 가장 최근의 깜짝 놀랄 만한 발전으로는 유명한 다 빈치의 그림인 <매기에 대한 찬사>가 있다. 이 그림은 여러 겹의 채색 밑에 어두운 비밀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예술 진단가인 마우리치오 세라치니가 이 사실을 밝혀냈고, <뉴욕 타임스 매거진>은 ‘은폐된 레오나르도’라는 제목으로 이 이야기를 떠들썩하게 실었다.
  녹회색으로 스케치한 밑그림은 진짜 다 빈치의 작품이지만, 채색 자체는 다 빈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세라치니가 밝혀낸 분명한 사실이었다. 진실은 어떤 무명화가가 다 빈치 사망 이후 그 햇수만큼 스케치에 색을 칠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더 심란한 것은 가짜 사기꾼 그림 밑에 과연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적외선 반사경과 엑스레이로 촬영된 사진들은 이 뻔뻔한 화가가 다 빈치의 습작에 색칠을 해가면서, 밑그림에서부터 수상한 출발을 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마치 다 빈치의 진정한 의도를 바꾸려는 것처럼 말이다. 밑그림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그림은 대중 앞으로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의 당황한 관리들은 즉시 이 그림을 길 건너 창고로 추방시키고 말았다. 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방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에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오만한 안내문을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은 복원을 위해 진단 테스트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성배를 추적하는 현대인들의 기묘한 지하세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위대한 수수께끼의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작품은 비밀을 막 터뜨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비밀이 거기에 숨겨져 있든, 한 겹의 채색 밑에 있든, 그저 평범한 시각 속에 암호로 숨겨져 있든, 아니면 숨겨진 것이라곤 전혀 없든 간에 말이다. 어쩌면 애를 태우는 듯한 다 빈치의 풍부한 단서들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모나리자의 얼굴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조롱을 불러 모으기 위한 공허한 약속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가능할까요? 당신이 들고 있는 열쇠가 성배의 숨겨진 장소를 풀어 줄까요?”
  랭던을 돌아보며 소피가 물었다.
  랭던의 웃음소리는 자신에게조차 억지스럽게 들렸다. 랭던은 소피에게 역사에 대해 짧게 얘기해 주었다.
  “정말 잘 모르겠소. 더욱이 성배는 프랑스가 아닌 영국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어지니까.”
  소피가 주장했다.
  “하지만 성배가 유일하게 합리적인 결론 같아요. 우린 극도로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고, 이 열쇠에는 시온의 문장이 각인되어 있어요. 그리고 시온의 회원으로부터 이 열쇠를 건네받았고요. 당신이 내게 말한 대로라면, 조직은 성배 수호자들인 거잖아요.”
  랭던은 소피의 추론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소문에는 시온이 언젠가는 성배를 마지막 안식처인 프랑스로 가져오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하게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줄 만한 역사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시온이 성배를 어떻게든 프랑스로 가져왔다 쳐도, 테니스 스타디움 근처에 있다는 악소가 24번지가 고귀한 성배의 마지막 안식처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피, 난 정말 이 열쇠가 성배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성배가 영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인가요?”
  “그것뿐만이 아니오. 성배의 위치는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지켜진 비밀들 중 하나요. 시온에 가입한 회원들은 자신들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수십 년을 기다려야만 해요. 조직의 상층부로 올라가서 성배가 어디에 있는지를 배우기 전까지는 말이오. 이 비밀은 칸막이로 구분된 지식처럼 교묘한 시스템으로 보호되고 있었을 것이오. 조직의 규모는 매우 컸겠지만, 당대에는 오직 네 사람만이 성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수장인 그랜드 마스터와 세 명의 집사들. 당신 할아버지가 이 네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은 아주 적어요.”
  ‘할아버지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어요.“
  가속기를 밟으며 소피는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조직 안에서 할아버지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 이미지가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만일 당신 할아버지가 조직의 상위 계층이었다고 해도, 조직 외부의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밝혀서는 안될 입장이었을 거요. 할아버지가 당신을 조직 안으로 데려갈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소.”
  ‘난 이미 거기 있었어요.’
  지하실의 의식을 떠올리며 소피는 생각했다. 소피는 지금 이 순간 노르망디의 저택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것을 랭던에게 말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수치스러운 마음 때문에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피는 몸이 떨렸다. 저 멀리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소피는 무거운 피로가 전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저기!”
  앞에 어렴풋이 나타난 거대한 테니스 스타디움을 보고 흥분한 랭던이 소리쳤다.
  소피는 슬며시 스타디움 쪽으로 차를 몰았다. 교차로를 몇 개 지나자, 악소 가를 알리는 교차로에 도달했다. 번지수가 낮은 쪽으로 차를 돌렸다. 도로는 점점 상업 건물들로 잘 정비된 산업화 지구처럼 바뀌었다.
  랭던은 ‘24’라는 숫자를 찾으면서 자신이 은밀히 수평선에서 교회의 첨탑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리석게 굴지 말자. 이런 지역이 잊혀진 기사단의 성전이라니?’
  “저기 있네요.”
  소피가 뭔가를 가리키며 소리를 내질렀다.
  랭던은 소피가 가리키는 구조물로 눈을 돌렸다.
  ‘세상에, 저게 뭐야?’
  팔길이가 같은 거대한 네온 십자가로 화려하게 정면을 장식한 현대식 건물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십자가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
  랭던의 기사단의 교회에 대한 그의 희망을 소피에게 알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 숨겨진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이 기호학자들의 직업 성향이었다. 이 경우, 팔길이가 같은 십자가가 중립국인 스위스의 깃발 상징으로 차용되어 쓰인다는 것을 랭던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적어도 미스터리는 풀렸다.
  소피와 랭던은 스위스 은행의 금고 열쇠를 들고 있는 것이다.

41

  간돌포 성 밖에서는, 차가운 산 공기의 상승 기류가 벼랑을 타고 넘어와 피아트에서 내리는 아링가로사 주교에게 냉기를 안겼다.
  ‘사제복 위에 뭘 더 껴입을걸 그랬군.’
  반사적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참으며 주교는 생각했다. 어쨌든 오늘 밤 아링가로사가 보여야 할 태도는 약하고 두려움에 찬 모습이었다.
  꼭대기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제외하면 성은 어둡고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서관이군, 깨어서 기다리고들 있는 모양이지.’
  바람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푹 숙인 채 아링가로사는 돔 모양의 관측소를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문에서 주교를 맞이한 사제는 졸려보였다. 사제는 다섯 달 전에 아링가로사를 맞이한 그 사람이었지만, 오늘 밤은 그다지 공손해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제의 표정에는불쾌함이 역력했다.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주교님.”
  “미안합니다. 요즘 비행기는 워낙 믿을 수가 없어서.”
  사제는 들리지 않게 뭐라고 중얼거린 뒤 말했다.
  “이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도서관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나무로 된 거대한 사각형 방이다. 모든 벽에는 장서들이 빽빽이 꽂힌 책장들이 솟아 있었다. 바닥은 가장자리가 검은 현무암으로 장식된 호박색 대리석이었는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 건물이 한때 궁전이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주교.”
  방을 가로질러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했지만 방안의 조명이 너무 어두웠다. 아링가로사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듯 환했다.
  ‘긴장된 밤이 시작되었군.’
  오늘 밤 이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발설하려는 것에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어둠에 앉아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천천히, 그리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탁자 뒤인 방 끝에서 세 사람의 형체를 볼 수 있었다. 그 중 가운데 앉은 남자의 형체는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바티칸 시티에서 모든 법적인 문제들을 총괄하는, 몹시 뚱뚱한 바티칸 서기관이었다. 나머지 둘은 높은 자리에 있는 이탈리아의 추기경들이었다.
  아링가로사는 도서관을 가로질러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시간에 늦어 죄송할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어서, 여러분들께서는 필시 피곤하시겠습니다.”
  거대한 배 위에 손을 포개면서 서기관이 말했다.
  “아닙니다. 주교가 이곳까지 와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작 한 일이라곤 일어나서 당신을 만나는 일뿐인데요. 뭘. 커피나 다른 마실 것을 갖다드릴까요?”
  “사교적인 방문인 척하지 않는 것을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잡아 타야할 다른 비행기가 또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물론입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움직이시는군요.”
  서기관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았을 텐데요.”
  “다섯 달 전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근심을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링가로사가 말했다.
  “그렇군요. 주교의 빠른 행보가 다행스러울 뿐입니다.”
  아링가로사의 눈이 긴 탁자를 따라가다가 커다란 검은색 서류가방에 멎었다.
  “저게 제가 요구한 것입니까?”
  서기관의 목소리는 불편했다.
  “그렇소. 하지만, 우리가 그 요청에 대해서 염려하고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겠소. 그것은 아주......”
  “위험해 보입니다.”
  추기경 중 한 명이 서기관의 말을 끝맺었다.
  “어딘가로 전송해 드리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금액입니다.”
  ‘자유란 비싼 법이지.’
  “제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신이 저와 함께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금액은 제가 요구한 대로 정확하겠죠?”
  서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티칸 은행에서 발행한 고액 채권이오. 세계 어디에서나 현금으로 바꿀 수 있소.”
  아링가로사는 탁자 끝으로 걸어가서 서류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두꺼운 채권 뭉치 두 다발이 들어 있었다. 각각의 채권에는 바티칸 문장과 ‘포르타토레’라는 타이틀이 양각되어 있었다. 이것이 채권을 소지한 자라면 누구에게나 현금과 상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서기관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교, 이 말을 꼭 해야겠소. 만일 이 돈이 현찰이라면, 우리들이 이렇게까지 걱정스럽지는 않을 거요.”
  ‘내가 그 많은 현금을 들고 다닐 수는 없지.’
  가방을 닫으며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채권도 현금처럼 쓰일 수 있다. 바로 서기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추기경들은 서로 불편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채권들은 곧장 바티칸 은행으로 추적됩니다.”
  아링가로사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 점이 바로 스승이 아링가로사에게 돈을 바티칸 은행의 채권으로 받으라고 지시한 이유였다. 이 채권은 보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한배를 탄 거야.’
  “이 일은 합법적인 거래입니다. 오푸스 데이는 바티칸 시티의 개인적인 분과입니다. 교황은 어떻게 하든 돈을 분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어떤 법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아링가로사는 변호했다.
  서기관이 몸을 앞으로 내밀자, 그 몸무게를 못 이겨 의자가 삐걱거렸다.
  “맞소, 하지만...... 당신이 이 돈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소. 만일 이 돈이 불법적인 일에 쓰인다면......”
  “서기관님이 제게 묻고 계신 것을 고려해 볼때, 제가 이 돈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여러분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겠지.’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제가 서명해야 할 것을 가지고 오셨겠지요?”
  그들은 아링가로사 앞으로 서류 한 장을 열성적으로 내밀었다. 아링가로사가 그저 조용히 떠나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링가로사는 앞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았다. 거기엔 교황의 문장이 있었다.
  “제게 보낸 서류와 같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서류에 서명하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게 아링가로사는 놀랐다. 하지만 앞에 있는 세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고맙소. 주교. 교회에 대한 당신의 봉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오.”
  서기관이 말했다.
  서류 가방을 집어들며 아링가로사는 그 무게에서 권위와 약속을 느꼈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듯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아링가로사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주교?”
  추기경 한 명이 문지방에 다다른 아링가로사를 불렀다.
  아링가로사는 멈칫하며 돌아섰다.
  “네?”
  “여기서 어디로 가십니까?”
  아링가로사는 그 물음이 지정학적 물음이라기보다는 영혼과 관련된 물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불멸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파리로 갑니다.” 

42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은 스위스 숫자 계좌의 전통 안에서, 익명의 서비스를 현대적으로 제공하는 24시간 운영제의 안전금고 은행이다. 취리히, 콸라룸푸르, 뉴욕 그리고 파리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취리히 은행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익명의 컴퓨터 코드로 된 미완날인증서 서비스와 디지털화 된 백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은행의 주요 업무는 지금까지도 가장 오래되고 간단한 익명의 안전금고 상자의 제공이다. 고객은 주식 증서에서부터 고가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든 익명을 보장받고 소유물을 맡길 수 있었다. 사생활을 보호하는 고도의 기술로 이루어진 차단장치를 통해서, 고객은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언제든지 물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소피는 목적지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랭던은 타협의 여지라고는 보이지 않는 건축물을 내다보았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은 유머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확고한 인상을 주었다. 창문 하나 없는 건물은 전체가 강철로 주조된 듯한 느낌이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은 5미터 크기의 번쩍거리는 네온 십자가를 정면에 단 채 길에서 물러나 앉아 있었다.
  비밀 엄수를 고수하는 스위스 은행의 명성은 스위스의 가장 돈이 되는 수출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설비가 예술계에서는 시빗거리가 되고 있었다 훔친 미술품을 숨길 수  있는 완벽한 장소를 은행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치된 물품은 사생활 보호법에 따라 경찰 수사에서도 보호받았고, 사람의 이름 대신 숫자로 된 계좌만 붙어 있기 때문에 도둑들은 훔친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자기들이 결코 추적당할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건물 밑으로 진입로가 있었다. 소피는 진입로를 막고 있는 문 앞에 택시를 세웠다. 머리 위에서는 비디오 카메라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랭던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감시 카메라와는 달리 저 카메라는 진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피는 택시의 창문을 내리고, 운전자 쪽에 붙은 전자 계기판을 살폈다. 액정 자막 화면이 7개 국어로 안내사항을 보여주었다. 첫째 줄은 영어였다.
  열쇠를 넣으십시오.
  주머니에서 마마 자국이 있는 황금열쇠를 꺼낸 소피는 안내 계기판에 다시 주의를 돌렸다. 화면 아래에는 삼각형 모양의 구멍이 있었다.
  “열쇠와 저 구멍이 맞을 것 같소.”
  랭던이 말했다.
  소피는 열쇠의 다리를 구멍과 맞춘 후에 열쇠의 다리가 모두 들어갈 때까지 깊숙이 집어넣었다. 열쇠를 돌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즉시 문이 돌아가며 열렸다. 소피는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을 떼고, 두 번째 문의 계기판으로 차를 몰았다. 뒤에서 첫째 문이 닫히자, 그들은 수문 사이에 갇힌 배처럼 덫에 걸린 꼴이 되었다.
  랭던은 갇힌 느낌이 정말 싫었다.
  ‘둘째 문에서도 작동해 주길 빌어야겠군.’
  두 번째 안내 계기판도 익숙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열쇠를 넣으십시오.
  소피가 열쇠를 꽂자, 두 번째 문도 즉시 열렸다. 잠시 후 그들은 진입로를 따라 건물의 중앙에 이르렀다.
  고객용 주차장은 작고 어두웠다. 약 열두 대 정도의 차들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저쪽 끝에 건물의 입구가 있었다. 방문자들을 환영하는 붉은 카펫이 거대한 금속 문 앞까지 깔려 있었다.
  ‘혼합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군. 환영한다, 하지만 조심해라.’
  랭던은 생각했다.
  소피는 출입구 근처에 택시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총은 여기에 두고 가는 게 좋겠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좌석 밑에 총을 내려놓으며 랭던은 생각했다.
  소피와 랭던은 택시 밖으로 나와 강철 문으로 향하는 붉은 카펫을 따라 걸어갔다.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대신 문 옆의 벽에 삼각형의 열쇠 구멍이 나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안내문도 붙어 있지 않았다.
  “배우는 게 더딘 사람은 들이지 않겠다는 얘기로군.”
  랭던이 말했다.
  소피가 불안한 얼굴로 웃었다.
  “한번 가보죠.”
  소피가 열쇠를 구멍에 꽂자, 문이 낮은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열렸다. 시선을 서로 주고 받으며 소피와 랭던은 안으로 들어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그들 뒤에서 닫혔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응접실은 랭던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실내 장식이었따. 대부분의 은행들은 윤기 흐르는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내부를 꾸미는데, 이 은행은 바닥에서부터 벽까지 금속과 대못만을 선택했다.
  ‘이 은행을 장식한 사람은 누구일까? 철강업계 협력 업체 사람인가?’
  랭던은 의아했다.
  로비를 살펴보는 소피도 겁먹은 표정이었다.
  바닥, 벽 카운터, 문 심지어 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온통 회색 금속 일색이었다. 틀에 부어 만든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