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적분의 발견자 ; 뉴튼 vs 라이프니쯔

우선권을 둘러싼 논쟁들 중 이처럼  격렬하고 오래 지속되었던 것도  드물다. 사실 잘 살펴 보면, 싸움 에 불을 지르고, 더 나아가 서로 상대방이 도용했다고까지 주장하게 된 것은 당사자들 보다는 주위의  추종자들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뉴튼(Newton)이 미적분의 힌트를 얻은 것은, 1666년 런던에서 흑사병이 크게 유행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미적분 체계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인 1736년이었다. 1686년에 발표된 그의 명저 "프린키피아(Prinkipia;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에도 미적분은 사용되지 않고 "아폴로니우스의 원" 등으로  그 까다로운 문제들을 "기기묘묘하게" 풀이하고 있다.

다만 뉴튼은 자신의  친지들에게 그 개략을  얘기했고, 1676년부터 시작된 라이프니쯔(Leibniz)와의 서신왕래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종의 수수께끼  문자인 "아나그램"으로  그 개념을  설명했다고  한다. 뉴튼의  첫 편지에는 "6acc...... 4s9t 12vx" 등의 기호가 쓰여 있는데, 이것을 풀이하면  라틴어로 "임의의 유량(변수)을 포함하는 방정식이 주어졌을 때, 그 유율(미분 계수)을 찾아 내는 일 및 그 반대"  를 뜻한다고 한다. 이듬해 라이프니쯔는 답장에서, 지금도 쓰이는 dx,  dy 등의 기호를  사용해서 자신의 미분방법을 분명히기술하였다.

나중에 일어난 논쟁의 촛점은 뉴튼 편지의 아나그램 이 과연  미적분을 뜻하는지, 아닌지에 모아졌다. 라이프니쯔는 1684년 자신의  방법을 공표하였고, 이 무렵까지 두 사람의  사이는좋았다. 그러나, 1699년 라이프니쯔에게 적의를 품고 있던 스위스의 한 수학자가 라이프니쯔의 미적분은 뉴튼의 것을 도용한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논쟁이 불거지기 시작 하였다.

라이프니쯔는 이에 항의하면서,  경솔하게도 1705년  뉴튼이야말로 자신의 것을 도용했다고 은근히 비치는  글을 썼다. 이에  옥스포드대학의 수학자 존케일이 라이프니쯔야말로 도용자라고  강경하게 비난하였다. 라이프니쯔는 왕립학회에 케일을 제소하였고, 학회에서는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그때의 학회장은 뉴튼이었다. 1715년에 발표된 결론은 예상대로, "미적분의 최초 발견자는 뉴튼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이 논쟁은 가라앉지 않았고,  심지어 영국과 독일 양국의 국민감정까지 개입, 흥분하여 격렬하게  지속되었다. 당사자 두 사람이  다 죽은 지 한참을 지나서도 논쟁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오늘날에는 두 사람이 각각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견했고, 발견은 뉴튼이 빨랐으나 발표는 라이프니쯔가 빨랐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2. 안전등의 발명자 ; 데이비 vs 스티븐슨

탄광의 폭발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사고이지만,  옛날에는 더 자주 일어났고, 피해도 컸다. 전등이 없던 때라 촛불을 썼고 이것이 갱속의 메탄으로 인하여 폭발사고를 일으켰던 것이다. 메탄가스는 빛깔도 냄새도 없어서 탄 갱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방의 한 지역유지가, 여행중  우연히 이곳을 들른 유명한과학자 험프리 데이비 (1778-1829)를 만나  탄광사고의 비참한 실정을 호소하고, 그것을 막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데이비는 동정과 호기심이 일어서 런던으로 돌아 간 후 안전한 탄광용 등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불꽃을 쇠그물 로 감싸면 철사속으로  메탄가스가 흘러 들어가 불이 붙어도 불꽃이 쇠그물 밖으로 나가지  않고, 폭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는 탄광용 안전등을 발명하였고,  그에 관한 논문을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북부 잉글랜드의 어느  광산에서 근무하던 조지 스티븐슨(1781-1848;후에 증기기관차를 크게 보급시킨 바로 그 인물)도 안전등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실험을  통해서 불길이 가느다란 파이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그래서 측면을  유리원통으로 싸고 구멍을 뚫은 철판을 씌우고  공기는 꼭대기와 바닥에 있는 작은 구멍을 많이 뚫은 판으로 드나들게 설계한 안전등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데이비와 스티븐슨의 안전등 중 누구의 것이 좋은가,  누가 먼저 발명했나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 졌다. 두 사람  다 자기가 먼저였고 상대방의 연구는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였다. 데이비는 스티븐슨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까지 주장했다. 1817년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데이비는 나중에 학회의 회장까지  맡게 되는 유명 한 과학자였으므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결국 조사위원회는 데이비를 안전등의 발명자로 선언하고 탄광주들의 기부금을 모아서  2,000파운드의 상금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스티븐슨에게도 노력한  댓가로 100파운드 정도의 돈을 주었다.

이에 스티븐슨의  탄광 친구들이  격분하여, 자신들의  주머니돈을 털어서 1,000파운드를 모금한 후 스티븐슨 이야말로 최초의 안전등 발명자라고 결의한 후 그 돈을 스티븐슨에게 보냈다. 공정한 관점에서 보자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각각 독자적으로 안전등을  발명하였고, 시기적으로는 스티븐슨이 빨랐으나 과학 이론적 뒷받침에서는 데이비가 뛰어 났다고 할  수 있다.

 

3. 동시발견과 우선권 논쟁
 
역사상 동시발견의 예를 몇  가지만 더 소개하자면,  수학에서 로그(log)의 발견이 네이피어와 뷔르기에 의해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고, "열역학 제 1법칙"으로 잘 알려진 에너지 보존의 원리는 1842년에서 1847년 사이에 마이어, 헬름홀츠 등 무려 4명의 과학자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연구되었다.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수  십년간 잊혀져  왔던 멘델의  유전법칙은 1900년에 드프리이스, 코렌스, 체르마크 의 세 명의 생물학자에  의해서 동시에 다시 발표되었다. (그래서 1900년을 "멘델법칙 재발견의 해"  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론 이외에도   매우 많다.  그래서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회학자 머튼(Merton)경은 동시발견이 오히려 주류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4. 비행기의 발명자 : 라이트형제 vs 랜글리

우리는 비행기의 발명자로 라이트형제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마터면 비행기의 최초 발명자가 랜글리로 잘못 기록될 뻔하기도 하였다. 라이트형제는 오랜 시간을 끈 진상 규명 노력 끝에 비로소 최초의 비행기 발명자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

사건의  진상인  즉  다음과  같다.  형인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 ) 동생 오빌 라이트 (OrvillWright; 1871-1948  )는 모두 일찍부터 기계제작 등의 기술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형제가  함께 자전거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 당시 활발 히 개발, 보급되기 시작한 가솔린자동차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결국은 가솔린엔진을 이용한 비행기의 발명에 착수하게 되었다.

19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개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증기기관으로는 충분한 출력을 낼 수가 없어서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1903년 12월 17일,가솔린 엔진과 프로펠러를 장착한 라이트형제의 쌍엽기 플라이어호가 드디어 세계 최초의 비행기로서 하늘을 나는데 성공하였다. 자세히 표현하자면, "하늘을 날았다." 라기 보다는 "10여초동안 땅에서 1m쯤 떠서 갔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라이트형제는 자신들의 비행기를 거듭 개량하여, 1-2년  후에는 30분 이상의 연속 비행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한편 라이트형제가 최초의 비행에  성공하기 불과 9일  전에, 역시 비행기 개발에 힘써 온 랜글리가 제작한 비행기의 시험비행이 있었다.  그러나, 랜글리의 비행기는 곧 강물에 추락하고 말았다. 랜글리는 그 당시 미국의 저명한 과학단체인 스미소니언협회의 회장을 맡아  온 원로과학자로서, 비행기의 개발은 그가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인 일이었다.

그는 몇년 후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제자 및 후임자들은 "비행기 발명의 명예를 자전거 직공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는 비뚤어진  마음을 품고, 랜글리의 명예 회복을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 라이트형제의 라이벌격인 비행가 글렌 커티스가, 실패로 끝난 랜글리의 비행기를 수리, 복원해서 정말로 날  수 없었던가 어떤가를 실험해보고 싶다고 청해 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검은 속셈이 있었다. 얼마전 그는 보조날개의 특허를 둘러 싸고 라이트 형제와 다툰 소송에서 패소했던 참이었고 아이디어를 약간 변경해서 다시 소송을 청구하는 동시에,  랜글리의 비행기가 사실은 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이면, 앞으로의 재판에서  자신이 유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미소니언협회는 커티스의 신청을  받아 들여, 실험비용으로  2,000달러를 지불하였고 그는 랜글리의 비행기를  "복원"하여(사실은 개조하여) 1914년 5,6월 뉴욕주의 큐커호에서 비행 실험을 하였다. 괴상한 모양의  이 비행기는 몇 차례 수면을 떠서 날아 올랐으나, 최장 비행시간은 단 5초였다.

스미소니언협회는 그 해의 연차보고에서 "이 실험으로  랜글리의 비행기가 세계 최초로 날 수 있는 비행기라는  것이 실증되었다." 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 라이트형제는 오래 전에 랜글리의 비행기의 구조를 연구해서 도저히 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기때문에 스미소니언협회의  성명에 놀랐고 , 뭔가 흑막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사를 하였다. 자세히 살펴 본 결과, 커티스가 날린 비행기는  랜글리의 비행기를 복원한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개조한 것임을 곧 알았다. 형태만 본래의 것과 같았지 크기와 구조도 크게 다르고, 엔진과  기체가 훨씬 강력했으며, 놀랍게도  라이트형제의 특허인 보조날개까지 붙이고 있었다.

동생인 오빌 라이트는 (형인 윌버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협회에  증거를 제출하고, 잘못된 성명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으나  협회는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설사 기체에 변경이  가해졌다 해도 그것은 사소한 것이라고 변명하였고, 도리어  랜글리의 비행기를  복원 조립하여 "인간을 태우고 날 수 있었던 세계 최초의 비행기" 라는 팻말과  함께 화려하게 항공박물관에 전시하였다.

그러던 중, 런던의 과학박물관에서 라이트의 최초 비행기를 전시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오빌 라이트는 미국에서  자신의 비행기를 전시하고 싶었으나, 스미소니언협회가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묵살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1928년 비행기를 영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유럽관광을  온 미국인들이, 뜻밖에도 자신들이 자랑하는 라이트의 비행기가 런던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라의 수치이니  다시 미국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졌고, 라이트와 랜글리의 비행기 중  어느 쪽이 먼저 인지 조사해서 확정하라는 의안이 의회에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스미소니언협회의 새 회장은 조사위를  구성해서 다시 1914년  비행실험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고, 그 결과 역시  라이트의 주장대로 랜글리의 비행기에 대폭적인 변경이 가해졌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1942년 협회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후 라이트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라이트도 납득하고 자신의 비행기를 다시 미국으로  가져 오도록 승낙  하였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지연  되어, 1948년에야 간신히 미국으로 돌아 왔고, 그때는 동생인 오빌라이트 마저 이미세상을 떠난 후였다.

 

5. 진화론의 주창자 : 다윈과 월러스

자연도태설을 바탕으로 한 생물의 진화이론을 수립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영국의 찰즈 다윈이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영국의 앨프리드 월러스도 같은 착상을 하였고, 두 사람은 이론의 내용이  거의 같을 뿐 아니라 영향을 받게된 책, 외지에서의 관찰까지도 공통적이었다.

다윈은 1831년부터 1836년 까지 군함 비글호의 세계일주항해에 참가한 후, 모은 자료의  정리와 관찰,  사색을 통하여   마침내 진화론을 구상하였고 1842년 몇가지 노우트를 만들고  작은 논문들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좀더 많은 사실을 수집하여 자신의 이론을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정식 발표는 미루고 있었고 한 선배 과학자는 "누군가가 자네를 앞지를 지도 모르니" 빨리 논문을 발표하라고 충고하였다.

다윈이 망설이는 동안에 1858년  6월 인도네시아의 물러카즈 제도에  있던 월러스라는 무명의 박물학자에게서 두툼한 편지가 날아 왔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자기가 생각한 이론과 거의 같은  형태의 논문이 동봉되어 있었다. 더욱이 다윈에게 그 논문을 비평해주도록 요청했고, 괜찮다면 학회에 소개해 달라는 청탁까지 있어서 다윈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다윈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월러스의  희망대로 그 논문을 세상에 내놓으면 자신이 20년에 걸쳐서 남몰래 해온  연구는 매장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의 연구를 먼저 발표하면,월러스의  신의를 배반했다는 세상의 비난을 살것이고 어쩌면 도작의 혐의까지  뒤집어 쓸지 모른다. 다윈은 친구들과 상의하였고, 그들은 다윈이 일찍부터 진화론을 연구해 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린네협회에 월러스의 논문과 다윈의 학설의 요약을 함께 낭독하도록 절차를 주선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논문은 동시에  발표되었다. 다윈과 월러스는 모두 다 겸손하고 인격이 고매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우선권을 다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월러스는 진화이론을 스스로 "다위니즘 "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했고, 이 이론에 기여한 자신의 역할은 "다윈의 20년에 대한 1주간"에 불과하다고 했고, 다윈이야말로 "이 이론을 전개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다윈도 월러스에게 "당신이  나만큼의 여가가 있었더라면, 나 이상으로 이 이론을 잘 전개했을 것" 이라고 대답하였다.


최초 발견의 명예를 서로 양보한, 과학사상 보기드문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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