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큰 도시와 꼬마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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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먼 옛날, 인간들이 전혀 다른 말을 쓰던 옛적에, 따스한 나라들에 이미 굉장히 화려한 큰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임금님들이 사는 궁전이 우뚝 솟아 있었고, 널찍한 도로, 좁은 도로와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나 있었고, 황금과 대리석으로 조각된 신상(神像)들이 서 있는 웅장한 사원(寺院), 여러 나라에서 모아 들인 상품이 쌓인 흥청대는 장터가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연설을 하고 듣고 하는 아름다운 널따란 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엔 커다란 극장이 있었다. 

 그 극장들은 오늘날의 서커스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한 가지, 온통 바위 덩어리로 짜여진 것이 특색이었다. 관객들이 앉는 좌석은 커다란 깔대기 모양으로 계단을 이루며 둥글게 줄지어 있었다. 위에서 보면 이 극장의 구조는 어떤 것은 원형이었고, 어떤 것은 타원형이었고, 또 어떤 것은 커다란 반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 극장들은 원형극장이라고 불리었다. 

 그 중에는 축구 경기장만큼 커다란 극장도 있었고, 겨우 몇 백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는 아담한 극장도 있었다. 또, 기둥과 조각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것이 있는가 하면, 소박하게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있었다. 이 원형극장에는 지붕이 없었다. 모든 행사는 확 트인 하늘 아래서 벌어졌다. 그래서 화려한 극장에는 좌석 위로 높다랗게 금실로 짜여진 융단이 처져 있어서, 뜨거운 햇볕이나 소낙비로부터 관객을 가려 주었다. 소박한 극장에서는 갈대와 짚으로 짜여진 차일이 같은 구실을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극장들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런 극장을 갖고 싶어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열정적인 관객이요, 청중이었다. 

 뿐 아니라, 무대에서 벌어지는 감동적인 또는 코믹한 장면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들은 그 곳에서 상연되는 삶을, 신비스럽게도 자기들 자신의 일상적인 삶보다도 더 현실감 있게 느끼었다. 그들은 이러한 또 하나의 현실에 귀 기울기를 사랑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옛날의 큰 도시들은 몰락했고, 사원과 궁전들도 무너져 버렸다. 비바람과 추위와 태양의 열기가 돌덩이를 침식하여 구멍을 만들었고, 거대한 극장엔 폐허의 잔해(殘骸)만이 남게 되었다. 폐허가 된 금 간 벽 틈새에서 지금은, 잠든 대지(大地)의 숨결처럼, 여치들만이 단조롭게 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커다란 옛 도시 가운데에는 오늘날까지도 대도시로 남아있는 곳이 있다. 물론 그 안에서의 삶은 전혀 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전차를 타고 달리고, 전화랑 전등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신식 건물의 틈바구니에 군데군데 여전히 여전히 몇 개의 옛날 기둥들, 하나의 성문, 한 조각 성벽, 또는 그 옛날의 원형극장이 하나 남아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도시에서 우리의 모모 이야기는 비롯된다. 


 이 큰 도시의 남쪽 끝 교외(郊外)에 어디부터선가 논밭이 시작되고 갈수록 점점 가난해 보이는 오두막과 인가(人家)가 보이는 곳에, 소나무 숲에 가려진 작은 원형극장의 잔해가 남아 있다. 이 극장은 그 옛날에도 호화로운 극장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극장이었다.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극장이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즉 모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시기에 즈음해서, 이 폐허의 터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다만 고고학(考古學)을 전공하는 몇몇 학자들만이 이 극장을 알고 있었지만, 실상 거기에서 더 연구해 낼 거리(素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도 이 극장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 극장은 큰 도시에 있는 다른 명승지에 댈 만한 관광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다가 몇몇 관광객이 거기 들러, 잡초로 무성하게 뒤덮인 좌석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떠들썩하게 기념 사진을 찍고 떠나곤 하였다. 그리고 나면 돌덩이로 된 원형의 터는 다시 정적에 휩싸이고, 여치들은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끝없는 노래의 다음 귀절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 묘한 둥근 건축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그곳에다 양 떼를 놓아 풀을 뜯게 하였고, 어린애들은 가운데 둥근 터를 공놀이터로 사용했다. 또 간혹 밤이면 사랑하는 남녀들이 그곳을 밀회 장소로 이용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사람들 사이에, 요즘 누군가가 그 폐허 속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것은 어린 아이, 어쩌면 어린 소녀라는 소문이었다. 아이가 약간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닌게 아니라 확실히는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모모라던가, 그와 비슷한 이름이라고 했다. 

 모모의 겉차림은 사실상 약간 기묘했고, 청결과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들한테는 필시 약간 어처구니없게 보일 수도 있었다. 모모는 작고 굉장한 말라깽이였다. 그래서 기껏 잘 봐 줘도 겨우 여덟살쯤 될까, 아무튼 벌써 열 두살이 되었다고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모모는 지금껏 한번도 빗질이나 가위질을 한 적이 없는 것같은, 헝크러진 까만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아름답고 커다란 새까만 눈을 갖고 있었다. 그의 발 역시 새까만 빛깔을 하고 있었다. 모모는 거의 맨발로 돌아 다니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에만 어쩌다 신발을 신었지만, 그것도 짝짝이인데다가 자기한텐 너무 큰 것이었다. 

 사실 모모는 어디서 주운 것이든가, 누구한테 선사받은 것 말고는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색색의 알록달록한 누더기로 기워진 꼬마의 치마는 복사뼈에까지 치렁거렸다. 그 위에다 꼬마는 낡아빠진 헐렁한 남자 웃도리를 걸치고는 손목께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을 잘라 내려고 들지를 않았다. 자기가 더 자랄 것이라는 점을 미리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언제 다시 그렇게 근사하고 실용적인, 주머니 많이 달린 웃도리를 갖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극장의 옛터, 잡초로 뒤덮인 무대 밑으로, 바깥 성벽에 있는 구멍을 통해 들어 설 수 있는, 반쯤 허물어진 몇 개의 방이 있었다. 그 속에다 모모는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어느 한나절 이웃 마을의 몇몇 남녀들이 모모한테 와서 꼬마에 관해 알아 내려고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모모는 마주 서서 걱정스런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쫓아낼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그들이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들은 실제로 가난하고 삶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 남자들 중의 한 사람이 입을 떼었다. "여기가 네 마음에 드니?" 

 "예." 모모는 대답했다. 

 "자, 그렇긴 해도 너는 아직 어리잖니." 한 부인이 말했다. "누구인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지 않겠니." 

 "제가 보살피지요." 모모는 기분이 가벼워져서 대답했다. 

 "너 혼자 감당할 수 있니?" 부인이 물었다. 

 모모는 한참 말이 없더니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저는 별로 필요한 게 없어요." 

 다시금 사람들은 눈짓을 주고 받더니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 모모," 다시금 맨 처음 말을 꺼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 생각엔, 네가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네 집에 같이 살면 어떨까 싶은데. 사실은 우리 모두가 별로 여유는 없어. 대부분 먹여야 할 애들이 벌써 잔뜩 있거든. 그래두, 우리 생각엔 한 아이쯤 더 있는 건 별로 문제가 없는 것 같아. 그렇게 하면 어떻겠니, 응?" 

 "고마와요." 모모는 그제야 처음으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정말 고마와요! 그렇지만 저를 그냥 여기 살게 내버려 두실 순 없으세요?" 

 마을 사람들은 한참 동안 서로 얘기를 주고 받더니, 결국 그렇게 하는 데 뜻을 모았다. 이곳에서도 결국 꼬마는, 그들 중 누구 한 사람 집에 가 있는 것 못지 않게 잘 지낼 수 있으리라는 의견이었던 것이다. 그 대신 그들 모두가 힘을 합해 모모를 보살피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느 한 사람이 보살피는 것보다 한결 더 간단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장, 모모가 살고 있는 반쯤 허물어진 돌로 된 방을 정리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수선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 중의 한 미장이가 심지어 조그만 돌 부뚜막까지 만들어 주고 녹슨 연통까지 달았다. 어느 할아버지 목수는 나무 상자 몇 개를 가지고 작은 책상이랑 두 개의 의자를 두들겨 맞추었다. 마침내 부인들은 낡았지만 꽃무늬로 장식된 철침대랑, 약간 헤어진 메트리스, 두 장의 담요를 가져왔다. 이렇게 해서 폐허의 무대 밑, 바위 구멍 안에 작지만 아늑한 방이 마렸되었다. 예술적 재능을 가진 미장이 아저씨는 벽에다 예쁜 꽃그림까지 그려 끝내 주었다. 하다못해 그림이 걸린 틀과 못에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마을의 어린애들이 남은 음식을 갖고 몰려왔다. 어떤 아이는 치이즈 한 조각, 어떤 아이는 작은 빵 조각, 다른 아이는 과일 등. 그렇게 정말 많은 아이들이 모였다. 이날 밤엔 그야말로 많은 아이들이 몰려와 모두가 어울려 원형극장에서 모모의 이사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일 수 있었다. 그것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즐거운 잔치였다. 

 이렇게 하여 꼬마 모모와 이웃 마을 사람 사이의 친분은 시작되었다. 


 

2  비범한 특성과 지극히 평범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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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부터 꼬마 모모는, 적어도 자기 혼자의 생각으로는, 만족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생기는대로, 마을 사람들의 여유가 돌아가는대로, 어떨 땐 너무 많고 어떨 땐 모자라기도 했지만, 이젠 항상 무엇이고 먹을 것이 있었다. 머리 위엔 지붕이 있었고, 잠자리가 있었고, 추우면 불을 지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모모에겐 참으로 많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토록 친절한 사람들 틈에 있게 된것이 모모한테는 더없이 큰 행운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리라. 하긴 모모 자신은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편에서도, 자기네들 역시 적지 않은 행운을 얻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모모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그 전에 어떻게 모모 없이 살아 왔던가 이상스럽게 여길 지경이었다. 이 꼬마 소녀가 그들 곁에서 지내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모모를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느끼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갑자기 꼬마가 다시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모모는 수없이 많은 방문을 받았다. 거의 언제이고 꼬마 곁에는 누군가가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모를 필요로 하는데도 올 수 없는 사람은 모모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었다. 모모의 존재의 필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한테,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모모한테 가 보게!" 

 이 말은 점점 마을 사람들 간에 으례 하는 말투가 되어 버렸다. 마치 "만사형통하시기를!", "천천히 많이 드십시오!" 또는 "하느님이 알고 계시지!"라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투로, 사람들은 있을 수 있는 어떤 경우에고 간에 "아무튼 모모한테 가 보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모든 사람한테 일일이 훌륭한 충고를 해 줄 수 있을 만큼 모모가 기막히게 현명해서였을까? 위안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서 항상 적절한 말을 찾아내서 였을까? 아니면 현명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서 였을까? 

 아니, 모모는 다른 보통 꼬마나 마찬가지로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모모에겐 사람들의 기분을 좋도록 전환시키는 어떤 재간이 있었던 것일까? 이를테면 유난히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었던가? 아니면 무슨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가? 아니면―하기야 지금 일종의 서커스 안에 살고 있으니까―결국 춤을 출 줄 알았던가? 곡예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것 역시 아니었다. 

 혹시 모모는 마술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일까? 무슨 신비스러운 주문(呪文)을 알고 있어서 그것으로 온갖 근심과 어려움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손금을 읽는다든가, 그런 비슷한 걸로 앞날을 점(占)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꼬마 모모가 가진 재간, 다른 누구나가 할 수 없는 능력은, 귀를 기울여 듣는 일이었다. 

 그거야 별 특별난 재간이 아니라고 어쩌면 많은 독자들은 말할는지 모른다. 귀 기울여 듣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진정으로 귀 기울여 듣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히 드물다. 더우기 모모가 도달하고 있는 귀 기울임의 경지는 세상에 둘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들한테 문득 혜안(慧眼)이 떠지게끔, 귀 기울여 들어 줄 줄을 알았다. 그건 모모가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깨우칠만한 말을 하거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모모는 그냥 옆에서 앉아 오로지 귀 기울여 듣기만 하였다. 온 정신을 집중하고, 온 마음을 쏟으며, 그러면서 그 크고 검은 눈으로 상대방을 응시하였다. 그 때 상대방은,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고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지혜로운 생각이 불현듯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모모는 방향을 못 잡거나 결심을 못한 사람들에게 문득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게끔 귀 기울여 들어 줄 줄을 알았다. 또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어느새 주저함이 없이 용기를 갖도록 해 주었다. 또는 불행한 사람, 억눌린 사람들이 신념과 기쁨을 느끼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가령 누군가가 자기의 인생이 완전히 어긋났으며 무의미하다고 느끼며 자기 자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 망가진 남비처럼 언제이고 즉각 다른 걸로 바꿔질 수 있는 수백만 인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낄 때―모모에게 가서 그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그는 이야기하는 도중 어느새에 신비스럽게도, 자기가 근본적으로 틀린 생각을 했다는 것, 현재의 그 자신은 수많은 인간의 틈에서 오로지 단 한번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자기 나름의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해서 자기는 이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선명히 알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모는 귀 기울여 들어 줄 줄을 알았다! 


 어느 날, 이웃이면서도 죽자 사자 한바탕 싸우고는 서로 말도 하려 들지 않는 두 남자가 원형극장으로 모모를 찾아왔다. 다른 이웃 사람들이 이 두 사람에게 아무튼 모모한테 가 보라고 충고를 했던 것이다. 이웃끼리 원수가 되어 지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두 남자는 처음엔 막무가내로 뻗대다가 결국 마지못해 수그러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제 원형극장 안에서 말없이 원수처럼 각기 돌좌석의 다른 편에 앉아, 침울하게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모모의 '거실'(居室)에다 난로와 예쁜 그림을 마련해 준 장본인, 미장이 아저씨였다. 그는 니콜라라는 이름을 가졌고 끝을 꼬아 올린 새까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니노라는 이름이었다. 그는 바싹 마르고 언제나 약간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니노는 도시 변두리에 조그만 주막을 세(貰)내어 경영하고 있었다. 하긴 주막이랬자 대체로 하루 저녁 내내 술 한잔을 시켜 놓고 지난 날의 회고담이나 늘어 놓는 몇몇 노인 손님이 고작이었다. 니노와 그의 뚱뚱보 마누라 역시 모모의 친구들이었고, 벌써 여러 번 모모한테 맛있는 음식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각기 서로 화가 잔뜩 나 있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모모는 우선 누구한테 먼저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중의 어느 쪽도 기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결국 모모는 두 사람으로부터 똑 같은 거리에 있는 지점, 돌덩이 무대의 가장자리에 걸터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다리고만 있었다. 많은 일들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헌데 시간이야말로 모모가 풍족하게 지니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것이다. 

 두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자 니콜라가 별안간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가겠다. 도대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나는 내 호의를 보여준 거야. 하지만, 모모, 너도 보다시피 저 작자는 조금도 잘못했다는 표정을 보이지 않는구나. 내가 더 이상 기다리고 앉았을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니?" 

 그리고 그는 정말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래, 도망치려면 치라구!" 니노는 니콜라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사실 너는 여기 올 필요도 없었어. 어쨌거나 난 사깃군과는 화해를 안해!" 

 니콜라가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사깃군인데?" 그는 으르릉대면서 다시 되돌아 왔다. 

 "다시 한번 말해 보라구!" 

 "맨날 네 맘대로 될 줄 알구!" 니노가 소리쳤다. "억세고 주먹께나 쓴다고 네 앞에서 바른 말 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아냐? 하지만 나는 네 앞에서건, 누구 앞에서건 들으려는 사람한텐 바른 말을 한다. 자, 들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죽여 보렴. 아까처럼 말이다. 네 맘대로!"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었지!" 니콜라는 고함을 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지만, 좀 봐라, 모모. 저 작자가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중상을 하고 있는지! 나는 그저 자기 목덜미를 잡아 끌어, 자기 집 뒤 개숫물 웅덩이에 처박았을 뿐인데. 그 안에선 쥐새끼라도 빠져 죽을 수가 없게 돼 있어." 

 그리고는 다시 니노한테 몸을 돌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유감스럽게도, 보시다시피 너는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잖니!" 

 한동안 거친 욕지거리가 오고 갔다. 그래도 모모는 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두 사람이 그토록 서로 분개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니콜라가 그런 야비한 폭력을 행사한 것은 니노가 몇 사람의 손님 앞에서 그의 따귀를 때렸기 때문임이 밝혀졌다. 물론 그보다 앞선 이유로는 니콜라가 니노의 그릇을 몽땅 부숴 버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도대체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이야!" 니콜라는 격분한 어조로 변명했다. 

 "항아리 한 개를 벽에다 던졌을 뿐이야. 그것도 실은 이미 금이 가 있던 걸 말이야!" 

 "하지만 그건 내 소유물이야, 알겠니?" 니노는 대답했다. "무엇보다 네가 그런 짓을 할 권리는 없는거야!" 

 니콜라는 자기의 행동이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니노가 미장이로서의 자기의 능력을 모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저놈이 나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니?" 그는 모모를 향해 외쳤다. "날더러, 밤낮 취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제대로 담을 똑 바로 쌓을 수 없을 거라는구나. 그리고 내 증조 할아버지부터 그랬을 거라나. 어쩌면 증조 할아버지가 피사의 사탑(斜塔)을 쌓는 데 같이 거들었는지도 모른다는거야. 그러니……." 

 "그렇지만, 니콜라," 니노가 대답했다. "그건 농담이었잖아!" 

 "참 멋진 농담이구나!" 니콜라는 비꼬듯이 말했다. "그런 농담을 듣곤 나는 웃을 수가 없어." 

 하지만 니노는 그 농담으로 그 이전에 니콜라가 한 다른 농담을 갚아 주려고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느 날 아침 니노의 대문 위에 새빨간 글자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자가 술집 주인이 된다."(Wer nichts wird, wird Wirt). 그리고 그것 역시 니노는 도저히 농담으로 여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남자는 한동안, 두 가지 농담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놓고 진지하게 열을 올리더니 다시금 화가 나서 말을 주고 받으며 싸웠다. 허나 그러다가 갑자기 둘 다 웃음보를 터뜨렸다. 

 모모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남자 중의 누구도, 모모의 시선을 똑바로 해석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두 남자를 우습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모모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남자는 불현듯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본 듯한 느낌이 들었고,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좋아," 니콜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런 소리를 자네 문 앞에 쓰지 말걸 그랬나 보군, 니노. 자네가 포도주 딱 한잔 주는 걸 거절하지만 않았대도, 나는 그러지 않았을 걸세. 그것은 법에 어긋나는 거야. 안 그래? 나는 꼬박꼬박 술값을 지불을 했거던. 자네가 나를 그렇게 대접할 하등의 근거가 없었어." 

 "있을 수도 있지!" 니노가 대답했다. "성(聖) 안토니우스 건(件)은 이제 잊어 버렸나? 아아, 이제 자네 얼굴이 핼쑥해지는군? 그 때 자네는 고의로 나를 속였었지. 그런 일은 용납할 수가 없었어." 

 "내가 자네를?" 니콜라는 소리치며 어이없다는듯 철썩 자기 이마를 쳤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히려 자네가 나를 슬쩍 속이려들다가 뜻대로 안 된거지!" 

 사실은 이러했다. 니노의 작은 주막에는 성(聖) 안토니우스를 그린 그림이 하나 벽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니노가 화보(畵報)에서 잘라 액자에 끼워 넣은 천연색 인쇄물이었다. 

 어느날 니콜라는 니노에게 이 그림을 사겠다고 했다. 겉으로는 그림이 참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니노는 재치있게 흥정을 해서, 마침내 니콜라로 하여금 그의 라디오와 교환하겠다는 제의를 하게 만들었다. 니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이 흥정에서는 니콜라가 응당 상당한 손해를 보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거래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실은, 마분지로 된 액자 뒷면과 그림 사이에, 니노가 전혀 모르고 있던 지폐가 한장 꽂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니 이번에는 니노편이 니콜라의 속임수에 당한 꼴이 되었다. 그는 화가 났다. 한마디로 딱 잘라 그는 니콜라에게 돈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돈은 그림 흥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니콜라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나서부터 니노는 니콜라에게 다시는 술을 팔려 하지 않았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두 남자는 사건의 발단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니노가 물었다. "지금 정말 솔직히 말해 보게, 니콜라. 자넨 흥정 이전에 이미 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안 그래?" 

 "암, 그렇지 않고야 그런 흥정은 안 했을걸세." 

 "그렇다면 자네가 나를 속였다는 점을 시인해야 하네!" 

 "뭣 때문에? 그럼 자네는 돈이 있었다는 걸 정말 몰랐단 말인가?" 

 "몰랐네, 맹세코!" 

 "자, 좋아! 어쨌거나 자네는 나를 살짝 속이려 했었어. 안 그렇다면 그 따위 값도 없는 신문지 조각 하나로 어떻게 내 라디오를 차지할 생각을 할 수 있었나, 응?" 

 "그럼 어떻게 자네는 돈이 있다는 걸 알았나?" 

 "이틀 밤 전에 어떤 손님이 성 안토니우스에 바치는 헌금으로 거기에 돈을 꽂는 것을 보았지." 

 니노는 입술을 깨물었다. "큰 금액이었나?" 

 "내 라디오의 값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이었어." 니콜라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긴 싸움은 애당초 내가 신문에서 오려낸 성 안토니우스 때문일세 그려." 니노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니콜라는 머리를 긁적였다. "애당초 그래." 그는 투덜대듯 말했다. "자네가 갖고 싶으면 돌려 주겠네, 니노." 

 "아닐세, 천만에!" 니노는 당당하게 말했다. "흥정은 끝난 걸세! 사내 대장부 사이의 약속 아닌가!" 

 그리고는 갑자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들은 돌계단을 내려와 풀이 뒤덮인 둥근 광장 가운데서 서로 얼싸안고 상대방의 등을 두들겼다. 그리고는 둘 다 모모를 팔에 안고 말했다. 

 "고맙다!" 

 잠시 후 그들이 떠나갈 때, 모모는 그들의 뒷 모습을 향해 한동안 손을 흔들었다. 모모는 두 친구가 다시 정다와진 것이 퍽 기뻤다. 


 한번은 한 어린 소년이 노래를 하려 들지 않는 카나리아를 가져 왔다. 그것은 모모에게는 훨씬 힘든 과제였다. 카나리아가 마침내 즐겁게 지저귀며 노래하기까지, 모모는 꼬박 한 주일을 귀를 기울여야 했다. 

 모모는 모든 것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개와 고양이, 귀뚜라미와 거북이 아니, 심지어는 빗소리와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노라면 그 모든 것은 모모에게, 자기네 방식으로 말을 걸어 왔다. 

 숱한 밤, 친구들이 집으로 가버리고 나면, 모모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아아치 지붕으로 하고 있는 옛 극장 터의 커다란 둥근 돌좌석 한 가운데 혼자 앉아서, 오로지 거대한 정적(靜寂)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모모는 마치 자기가 별세계를 향해 귀 기울이고 있는 거대한 귓바퀴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야릇하게도 온통 심장을 파고드는, 나지막하고도 힘찬 음악을 듣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밤이면 모모는 항상 유난히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지금도 귀 기울여 듣는 일이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독자가 있다면 정말 자기 자신 잘할 수 있는지 한번 몸소 시도해 보시기를. 


 

3  놀이 속의 폭풍과 진짜 쏟아진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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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또 한 가지 다른 이유로 이유로 이 원형극장 옛터를 즐겨 찾았다. 모모가 여기 사는 이후로 아이들은 전에 없이 잘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지루한 때가 한 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모가 무슨 유별난 제의를 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모모는 그저 거기 있으며 어울려서 놀 뿐이었다. 그리고 다만 그러는 가운데 ― 왜 그런지는 도저히 모르지만 ― 어린아이들한테 신통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날마다 아이들은 좀더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한번은, 짓누르는 것같이 무더운 어느 날, 여남은 되는 어린아이들이 돌덩이 계단에 앉아 모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모는 곧잘 그러듯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러 잠깐 나가고 없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곧 소나기가 쏟아질 기세였다. 

 "집으로 갈까 봐." 어린 꼬마 동생을 데리고 온 한 소녀가 말했다. "나는 천둥 벼락이 무서워." 

 "그럼 집에서는?" 안경을 걸친 한 소년이 물었다. "그럼 집에서는 천둥벼락이 안 무섭단 말이니?" 

 "무섭기야 하지." 소녀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기 있어도 마찬가지 아니니?" 소년은 말했다.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소녀는 말했다. "하지만 모모가 영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애." 

 "그렇다면," 그 때 개구장이 소년 하나가 화제에 끼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무슨 놀이를 할 수 있잖아. 모모가 없더라도." 

 "좋아, 그럼 무슨 놀이를 할까?" 

 "나도 몰라. 무엇이든 간에." 

 "무엇이든이라니, 그건 아무 것도 아니잖아. 누구, 무슨 놀이를 할 지 좋은 생각 없니?" 

 "내 생각에는"라고 여자같은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가진 한 뚱보 소년이 입을 떼었다. "이런 놀이를 했으면 좋겠어. 이 극장 전체를 커다란 배라고 치고, 우리가 미지(未知)의 바다로 나가 모험을 하는 놀이를 하면 어떨까? 내가 선장(船長)이 되고 너는 일등 기관사, 그리고, 너는 자연과학자, 말하자면 교수가 되는거야. 우리의 여행은 이를테면 탐험여행이거던. 알겠니? 그리고 나머지는 마도로스가 되는거야." 

 "그럼 우리 여자 아이들은? 우린 뭐가 되는 거니?" 

 "여자 마도로스. 이 배는 미래의 배거든." 

 그것은 참으로 근사한 착상이었다. 꼬마들은 놀이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의견이 서로 엇갈려,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얼마 안 있어 모두들 돌덩이 좌석에 주저앉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모모가 나타났다. 

 뱃머리로 파도가 높다랗게 철썩거렸다. 탐험선 '아르고'(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야손이 金羊皮를 찾아 콜히스나라에 건너갈 때 타고 간 배의 이름 ― 옮긴이)는 폭풍이 지난 뒤의 파도를 타고 조용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 배는 이제 순풍(順風)을 타고 남쪽 산호(珊瑚)의 바다를 향해 전 속력으로 질주할 참이었다. 태고(太古) 이래로 지금껏 감히 이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려고 나선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바다에는 깊이 모를 여울과 산호초(珊瑚礁), 그리고 알 수 없는 바다 괴물이 우굴거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바다에는 이른바 '영원한 태풍', 영원히 잠들지 않는 회오리 바람이 불기 때문이었다. 폭풍은 끊임없이 이 바다 위를 회오리치면서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그야말로 교활한 귀신처럼, 먹이를 약탈하려 덤벼들었다. 폭풍이 나아가는 방향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단 이 폭풍의 거대한 갈퀴에 걸려 들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것도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리하여 끝내는 속절없이 톱밥처럼 가루로 으깨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탐험선 '아르고'는 이 '떠도는 태풍'을 만날 것에 대비하여 특수 장비를 갖추었다. 이 배는 온통, 칼날처럼 휘어지기는 해도 결코 망가지지 않는 푸른빛 알라몽 철(鐵)로 건조되었다. 그것도 특수한 건조 과정을 거쳐, 용접한 이음새가 없는 단 하나의 철덩어리로 주조(鑄造)된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선장, 다른 선원들이라면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모험길에 나설 용기를 갖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선장 고르돈은 그럴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선장은 사령교(司令橋)에 서서, 하나같이 제가끔 특수 분야에 노련한 전문가들인 그의 마도로스와 여자 마도로스들을 내려다 보았다. 

 선장 옆에는 그의 일등 기관사, 이미 백 스물 일곱번이나 폭풍을 헤치고 이겨낸 노련한 수부, 돈 메루가 서 있었다. 

 저편 뒤 갑판의 햇볕 가리는 천막 위로는, 이 탐험의 학술부 책임자인 아인쉬타인 교수와 비범한 기억력을 갖고 교수의 도서관 구실을 해 주는 두 사람의 여자 조수 마우린과 사라가 보였다. 세 사람 모두 정밀 기계 위로 몸을 구부리고 서서, 자기네들만이 아는 복잡한 학술 용어로 소근소근 상의를 하고 있었다. 

 세 학자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아름다운 토착민 아가씨 모모산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이따금 학자는 이 바다의 특수한 세부적인 사항에 관해 소녀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면 소녀는, 교수만이 알아 듣는 아름다운 울림의 훌라 사투리로 대답했다. 

 이 탐험 여행의 목적은 '떠도는 태풍'의 원인을 찾아내고 가능하면 그것을 제거하여 다른 배들도 이 바다 위를 항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사방이 고요했고 폭풍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조망대에 있는 선원의 갑작스런 외침에 선장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선장님!" 그는 손나팔을 통해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제가 본 것이 틀림없다면, 저 앞에 유리로 된 섬이 하나 보입니다!" 

 선장과 돈 메루는 즉시 망원경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아인쉬타인 교수와 그의 여조수들도 흥미를 갖고 다가 왔다.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만이 침착하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소녀가 속한 토착민의 수수께끼같은 관습은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을 금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리섬에 곧 닿았다. 교수는 배의 바깥 벽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섬의 투명한 바닥에 발을 디뎠다. 바닥은 굉장히 미끄러웠다. 그래서 아인쉬타인 교수는 두 다리를 디디고 서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섬은 원형이었고 눈 어림으로 직경 이십미터 정도 되었다. 섬의 바닥은 한가운데를 향해 반구(半球)처럼 가풀막져 있었다. 제일 높은 부분에 이르자, 교수는 이 섬의 안쪽 깊은 곳에서 광선이 일렁거리며 비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교수는 난간에서 잔뜩 긴장해서 서 있는 다른 선원들에게 자기가 관찰한 광경을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여조수 마우린이 의견을 말했다. "그건 아마도 오겔뭄프 비스트로찌날리스랑 상관된 것일꺼야." 

 "그럴는지도 모르지." 여조수 사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슈루쿨라 타페토찌페라일 수도 있어." 

 아인쉬타인 교수는 일어나 안경을 고쳐 쓰고 위를 향해 소리쳤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일반적인 슈트룸푸스 쿠비에치넨주스의 변종(變種)과 상관된 부분인 것 같군요. 하지만 밑에서부터 엄밀히 검토해 본 뒤에야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곧, 세계적으로 유명한 잠수(潛水) 선수권을 갖고 있는 세 여자 마도로스들이 그 새에 잠수복을 입고 물 속으로 뛰어 들어 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바다의 표면에는 물거품만이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산드라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불쑥 물 속에서 솟아 오르더니 헐떡이며 소리쳤다. "이건 어마어마하게 큰 해파리예요! 다른 두 동료가 해파리의 촉수(觸手)에 걸려 들어 꼼짝달싹 못하고 있어요. 큰 변을 보기 전에 어서 구해 줘야 해요!" 그리고 나서 소녀는 다시 사라졌다. 

 즉각 백명의 수부들이 "돌고래"라고 불리우는 노련한 대장 프랑코의 지휘 아래 물결 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물 밑에서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졌다. 물 표면은 거품으로 뒤덮였다. 그렇지만 이 수부들도 무시무시하게 휘감긴 상태의 두 소녀를 풀어 낼 수가 없었다. 이 거대한 해파리의 힘은 그토록 엄청났던 것이다. 

 "뭔가……," 교수는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자기의 조수들에게 말을 건넸다. "뭔가 이 바다 속에 일종의 거대한 생장(生長)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있는 것 같애. 그게 참 흥미거리군!" 

 그 사이에 선장 고르돈과 그의 일등 기관사 돈 메루가 상의한 결과 하나의 결정을 보았다. 

 "퇴각!" 돈 메루가 외쳤다. "모든 수부들은 갑판으로 돌아 오시오. 이 괴물을 두 조각으로 자르기로 합시다. 그러지 않고는 두 소녀를 구해낼 수가 없을 것 같소." 

'돌고래'와 그의 수부들은 갑판으로 되돌아 올라왔다. '아르고' 호는 일단 약간 퇴각을 했다가는 전 속력으로 거대한 해파리를 향해 돌진했다. 이 철덩어리로 된 뱃머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왔다. 소리없이 거의 진동(震動)도 느낄 수 없이, 배는 거대한 해파리를 두 조각으로 내었다. 사실 그것은 촉수에 얽매인 두 소녀를 위해서도 적지 않은 위험을 안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등기관사 돈 메루는 그 상황을 한 치도 틀림없이 측정해서 두 소녀 사이로 돌진했던 것이다. 곧 반쪽 난 해파리의 촉수는 힘을 잃고 축 늘어져 버렸고, 사로잡혔던 두 소녀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두 소녀는 배 위에서 즐거운 환영을 받았다. 아인쉬타인 교수가 두 소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 잘못이었어. 너희들을 내려 보내지 않았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그런 위험 속으로 몰아넣다니!" 

 "미안해 하실 것 없어요, 교수님." 한 소녀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 하려고 우리도 한 배를 탄 걸요." 

 또 한 소녀가 덧붙였다. "위험은 우리의 직업이에요." 

 하지만 더 긴 얘기를 주고 받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구조 작업에 골몰하느라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은 바다를 관찰하는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때야 비로소 그들은 '떠도는 태풍'이 어느 새에 수평선에 나타나 맹렬한 속력으로 '아르고'호를 향해 이동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첫번째의 돌풍이 몰아쳐 와 철덩어리 뱃전을 때리자 배는 공중으로 붕 떴다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오십 미터는 실히 되는 파도 속으로 나가 떨어졌다. '아르고'호의 승무원처럼 노련하고 담대한 선원들이 아니었다면 이 첫번 충격으로 이미 절반은 갑판 위로 휩쓸려 나가떨어졌고, 절반은 기절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선장 고르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다리를 떡 버티고 사령교 위에 서 있었고, 그의 승무원들도 선장 못지 않게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 이런 거친 항해에 익숙하지 못한 모모산만이 구명 보우트 속으로 기어 들었다. 

 순식간에 하늘은 온통 먹빛으로 화했다. 태풍은 으르렁거리며 뱃전을 때려 배를 아득히 공중으로 붕 뜨게 했다가는 바다 깊숙히 쳐넣었다. 게다가 태풍은 철선 '아르고'호를 손아귀에 넣지 못하는 데 화가 치밀어 시시각각으로 더욱 격해지는 것 같았다. 

 침착한 음성으로 선장은 지령(指令)을 내렸고, 이어서 일등 기관사가 큰 음성으로 하달했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아인쉬타인 교수와 두 여조수도 그들의 학술 도구 옆에 붙어 서 있었다. 그들은 이 태풍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측정하고 있었다. 실은 이 배는 그 핵심을 파고 드는 항로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선장 고르돈은 마음 속으로 이 과학자들의 냉철함에 감탄했다. 사실 그들은 선장 자신이나 승무원들처럼 바다에 익숙한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번개가 일더니 철선에 와서 부딪쳤다. 그러자 배든 금새 온통 전기로 충전이 되어 버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이든 붙잡기만 하면 무섭게 전기 불꽃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르고'호의 모든 승무원들은 벌써 몇 달 동안의 연습을 통해 거기에 단련 되어 있었다. 이 정도는 그들 누구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배의 구조 중 비교적 가느다란 부분, 즉 철 밧줄과 철 막대가 전구(電球)의 심지처럼 달아 오르기 시작하는 것만이, 비록 모든 승무원이 석면(石綿) 장갑을 끼었다 해도, 맡은 바 일을 수행하는 데 곤란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열기는 곧 꺼져 버렸다. 이번에는 빗발이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동승한 승무원 중의 어느 누구도 ― 돈 메루를 제외하고는 ― 일찌기 겪어 본 적이 없는, 숨쉴 공기마저 순식간에 몰아내는, 엄청나게 굵은 빗발이었다. 그래서 승무원들은 잠수 마스크와 호흡 도구를 착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번개와 천둥! 으르릉거리는 폭풍! 집채 만한 파도와 허연 거품! '아르고'호는 모든 기관을 전증기압(全蒸氣壓)으로 가동시키고, 이 태풍의 어마어마한 힘에 맞서 싸우면서 한치 한치 앞으로 나아갔다. 기관실(汽罐室) 안쪽에서 일하는 기관사와 화부(火夫)들은 초인적인 역량을 과시했다. 사정없이 아래 위 옆으로 흔들리는 배의 진동으로 인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기관실 화덕으로 휩쓸려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은 두꺼운 철사슬에 묶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태풍의 핵심에 이르렀다. 거기에 보이는 엄청난 광경이란! 

 폭풍의 힘에 물결이 일단 평평하게 짓눌려져 거울처럼 매끈해진 바다의 수면 위에서 웬 엄청난 괴물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괴물은 한 쪽 다리로 선데다 위로 갈수록 점점 큰 부피를 이루고 있어, 흡사 산더미만한 팽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너무나 빠른 속력으로 돌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부분은 헤아려 볼 수가 없었다. 

 "슘―슘 굼미라스티쿰의 일종이군!" 교수는 흥분해서 외치며, 쏟아지는 빗줄기로 자꾸 코에서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썼다.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는 없으세요?" 돈 메루가 투덜거렸다. 

 "우리야 그저 단순한 뱃놈들이 돼 놔서……" 

 "지금은 교수님께서 연구에 전념하시도록 해 주세요?" 여조수 사라가 그에게 말을 던졌다. 

 "두번 다시 없는 기회예요. 이 팽이 모양의 물체는 필시 지구가 생성된 태고 적부터 있어 온 것인지 모릅니다. 억만년은 넘었음에 틀림 없어요. 오늘날에는 다만 현미경으로나 잡을 수 있는 지극히 작은 변종밖에 없어요. 간혹 도마도 소스에서,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초록색 잉크에서나 발견되지요. 이렇게 커다란 표본은 짐작컨대 이런 종류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장은 으르렁대는 폭풍 속으로 소리쳤다. "영원한 태풍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여기 온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저 물건을 잠들게 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셔야지요!" 

 "그건," 교수가 말했다. "나 역시 모릅니다. 학문 역시 그걸 연구할 기회를 지금껏 갖지 못했거든요." 

 "좋습니다." 선장은 말했다. '우선 저걸 한번 쏘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나 한번 보지요." 

 "유감천만의 일입니다!" 교수가 불평했다. "슘―슘 굼미라스티쿰의 둘도 없는 본보기를 쏘다니!" 

 하지만 어느새 상상(想像) 대포가 거대한 팽이를 향해 조준되었다. 

 "발사!" 선장은 명령했다. 일 킬로 거리에서 쌍포문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발사되었다. 물론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상상 대포는 단백질로 발사하기 때문이었다. 

 탄알은 번쩍이며 슘―슘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거대한 팽이에 사로잡혀 방향이 빗나가더니, 괴물 주변을 점점 더 빨리 몇 바퀴 돌다가 결국 공중으로 튕겨져 올라 먹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헛일이었구나!" 선장 고르돈이 외쳤다. "아무래도 저 놈 있는 데로 더 가까이 가야겠어!" 

 "더 가까이는 갈 수가 없습니다!" 돈 메루가 마주 외쳤다. "기관은 지금 벌써 전증기압으로 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폭풍에 맞서 뒤로 날려가는 것을 막는 일을 하고 있는 게 고작입니다." 

 "무슨 방법이 없으십니까, 교수님?" 선장이 물었다. 

 하지만 아인쉬타인 교수는 그저 어깨를 추켜 올릴 뿐이었고, 그의 여조수들도 묘안을 못 찾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탐험 여행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 때 누군가 교수의 소매를 끌었다.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였다. 

 "말룸바!" 소녀는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말했다. "말룸바 오이지투 소노! 엘바이니 삼바 인살투 롤로빈드라. 크라무나 호이 베니 베니 사도가우." 

 "바발루?" 교수는 놀라운 기색으로 물었다. "디디 마하 파이노시 인투 게도이넨 말룸바?"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도도움 아우푸 슐라마트 바바다." 

 "오이―오이." 교수는 대답하고 생각에 잠겨 턱을 문질렀다. 

 "뭐라고 해요?" 일등기관사가 물었다. 

 "아가씨 얘기는……," 교수가 설명했다. "아가씨가 사는 종족 간에는 태고 적부더 내려오는 노래가 있는데, 누구인가, 용기있는 사람이 있어 그것을 폭풍 앞에 대고 노래한다면, 떠도는 태풍을 잠들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웃기지 마십시오! 태풍을 잠재우는 자장가라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수님?" 조수 사라가 물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돼." 아인쉬타인 교수가 말했다. "토착민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관습 속에 진리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흔히 있어. 어쩌면 슘―슘 굼미라스티쿰한테 무슨 영향을 주는 특정한 음색(音色)의 파동이 있는지 모르지. 우린 사실상 저 태풍의 생성 조건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해 봐서 해로울거야 없겠지요." 선장은 결단을 내렸다. "한번 그렇게 해 봅시다. 노래를 해 달라고 말해 주십시오." 

 교수는 아름다운 토착민 소녀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말룸바 디디 오이사팔 후나―후나, 바바두?" 

 모모산은 고개를 끄떡이고 당장 아주 독특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억양은 거의 없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래였다. 


   "에니 메니 알루베니 

   바나 타이 수수라 테니!" 


 노래에 곁들여 소녀는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어 스탭을 밟았다. 

 단순한 멜로디와 가사는 외기가 쉬웠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둘씩 어울려 노래를 했고, 얼마 안 가 배 안의 승무원들이 모두 노래를 하며 손뼉을 치고 박자를 맞추어 스탭을 밟았다. 마침내 늙은 수부 돈 메루랑 교수까지 놀이터의 어린애처럼 노래를 하며 손뼉을 치는 광경은 보기에 상당히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자 과연,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팽이는 점점 천천히 돌더니 마침내 우뚝 서서 기울기 시작했다. 천둥을 치면서 팽이 위로 엄청난 물더미가 가라앉았다. 눈 깜짝할 새에 폭풍은 가라앉고 빗줄기도 그쳤다. 하늘은 맑게 푸르러졌고, 물결은 잔잔해졌다. '아르고'호는 이제 반짝이는 수면 위에 고요히 떠 있었다. 마치 여기에는 고요와 평화 이외에 다른 어떤 일도 벌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여러분!" 고르돈 선장은 입을 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깊숙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결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번에 한마디 덧붙인 말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나는 여러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는……" 꼬마 동생을 데리고 온 소녀가 말했다. "정말 비가 내린 것 같애. 어쨌건 나는 홈빡 젖었는걸." 

 실제 그 사이에 소나기가 내렸었다. 누구보다도 꼬마 동생을 데리고 온 소녀는, 철선을 타고 있는 동안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는 걸 까맣게 잊어 버렸다고 이상스러워 했다. 

 어린이들은 그리고도 한참동안 이 모험과, 제각기 자세한 감상을 서로 주고 받았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가서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헤어졌다. 

 다만 한 소년만이 놀이의 경과에 대해 못내 아쉬워했다. 안경을 쓴 소년이었다. 헤어질 때 소년은 모모에게 말했다. "아무튼 슘―슘 굼미라스티쿰을 그냥 가라앉게 만든 건 참 유감이야. 그 종류의 마지막 표본인데! 정말 그걸 자세히 연구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한가지 점에 관해서만은 그들 모두가 여전히 동감이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모모한테서처럼 놀 수는 없으리라는 점에 관해서만은. 

 

4  말없는 노인, 말재줏군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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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많은 친구를 갖고 있다 해도, 그야말로 특별히 가깝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친구는 드물고 몇 안되는 법이다. 실상 모모의 경우에도 그랬다.

 모모와 특별히 친한 친구는 둘이었다. 그 둘은 매일처럼 모모를 찾아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모모와 나누었다. 그 중의 한 친구는 젊었고 한 친구는 할아버지였다. 그들 중의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를 말하라면 모모는 꼬집어 택할 수 없었으리라.


 할아버지 친구는 도로청소부 베포였다. 그도 물론 성(姓)을 갖고 있었지만, 직업이 도로청소부였고, 그래서 모두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도로청소부 베포라고 불렀다. 

 도로청소부 베포는, 원형극장 근처, 기와와 골진 함석, 그리고 지붕 판지(板紙)로 손수 지은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유난히 키가 작은 데다가 항상 약간 꾸부정하니 걷기 때문에, 모모의 키를 겨우 넘어설까 말까 했다. 짧은 흰 머리칼이 뻣뻣하게 난 그의 커다란 머리는 항상 약간 갸웃둥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코에는 작은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도로청소부 베포가 정신이 온전히 제대로 박혀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유인 즉, 무슨 질문을 받으면 그는 맘씨 좋게 빙긋 웃음을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깊이 생각했다. 그래서 대답이 필요 없다고 여겨지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대답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그 대답에 관해 깊이깊이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답을 하기까지 어떨 땐 두 시간이 걸렸고, 심지어는 하루 종일 걸릴 때도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상대방은 자기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 잊어 버리기 일쑤였고, 따라서 베포의 뒤늦은 대답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만 모모만은 그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고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모모는, 베포가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그토록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란 잡다한 거짓말에서, 그러니까 고의적인 거짓말이나 때로는 성급하게 굴거나 불확실한 것을 말하는, 마음에 없는 거짓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베포의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동이 트기도 훨씬 전 꼭두새벽에 베포는 삑삑거리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있는 커다란 빌딩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동료들이랑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빗자루랑 수레를 받아들고 어느 거리를 쓸라는 지시를 받았다. 

 베포는 도시가 아직도 잠들어 있는 이 동트기 전의 시간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맡은 바 일을 기꺼이 그리고 철저히 수행하였다. 그는 그 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거리를 쓸 때면, 그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쓸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심호흡을 하면서, 한번 숨을 쉴 때마다 비질을 했다. 한 걸음―한 숨―한번 비질, 한 걸음―한 숨―한번 비질. 그러는 동안 그는 이따금 잠시 일손을 멈추고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한 숨―한번 비질. 

 그렇게, 깨끗해진 거리를 뒤로 하면서 더러운 거리를 향해 움직여가는 동안, 흔히 그에게는 위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말(言語)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로지 기억 속에만 살아있는 어떤 향기처럼, 또는 꿈 속에서 본 빛깔처럼, 전달하기 어려운 생각들이었다. 일이 끝난 후 모모한테 와 앉으면, 그는 자기의 위대한 생각들을 모모에게 설명했다. 그 때 모모는 그 독특한 방식으로 귀를 기울여 주기 때문에 베포의 굳은 혀도 부드럽게 풀려, 적절한 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봐, 모모," 이를테면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이런 거야. 우리 앞에는 끝없이 아득한 거리가 뻗쳐 있을 때가 많아. 너무도 끝도 없이 아득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는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앞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둘기 시작하지. 그리고 점점 더 성급해지는거야. 눈을 들어 앞을 볼 때마다, 자기 앞의 길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거야. 그래서 점점 더 기를 쓰게 되고, 불안에 사로 잡혀 애들 쓰다가 마침내는 숨이 차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돼. 그리고 길은 여전히 우리의 앞에 버티고 있는거야. 이런 식으로 일을 해서는 안 돼." 

 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길 전체를 한꺼번에 생각하면 안 돼, 알겠니? 오로지 다음 한 걸음, 다음번 한 숨, 다음번 한번 비질만 생각해야 돼. 이렇게 끊임없이 다음번의 한번 동작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또 다시 그는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 "그러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어. 그게 중요한거야. 그렇게 하면 자기 일을 잘 해 나갈 수가 있어. 그래야만 하는 거야." 

 그리고 다시금 한참 말을 중단했다가 입을 떼었다. "문득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그 아득한 길이 닦여졌다는 것을 깨닫게 돼. 그 전엔 어떻게 길이 이루어졌는지 도저히 못 깨달았거든. 그걸 알고 나면 우리는 숨이 차지 안게 돼."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것이 중요한 거야." 

 또 한번은, 그가 와서 모모 옆에 묵묵히 앉았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모모는 뭔가 아주 중요한 얘깃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그는 모모의 눈을 들여다 보며 입을 떼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금 깨달았어."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잇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럴 때가 종종 있어. ……한 낮에……모든 것이 뜨거운 열기 속에 잠들어 있을 때……그 때가 되면 세상이 투명해져……강물처럼, 알겠니? ……밑바닥까지 투시할 수가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더욱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거기엔 다른 시간이 놓여 있어. 저 밑바닥에는…." 

 다시금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겨 적절한 말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적절한 말을 못 찾은 모양이었다. 그 대신 그는 갑자기, 아주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설명을 했다. "오늘 나는 옛 성벽 옆의 길을 쓸러 갔었어. 성벽을 이루는 돌 중에는 다른 빛깔을 한 돌이 다섯개가 끼여 있었어. 알아 듣겠니?"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먼지 위에다 대문자 T자(字)를 썼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동안 그 글자를 들여다 보더니, 불쑥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걸 다시금 알아 보았어. 그 돌들을 말야." 

 그리고 계속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그는 더듬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시대는 전혀 다른 시대였어. 그 성벽이 지어진 그 당시는… 퍽 많은 사람들이 성을 쌓는 일에 참가했지. ……그런데 그들 중에 이 다른 빛깔의 돌을 끼워 넣어 쌓은 두 사람이 있었어. ……그것은 하나의 표적이야 알겠니? 나는 그걸 다시 알아 보았어." 

 그는 손으로 눈을 부볐다. 하고자 하는 말을 표현하기가 그에게 퍽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어서 하는 그의 말은 가까스로 울려 나왔다. "그들은 다르게 보았던 거야. 그 당시의 그 두 사람은. 아주 다르게 보았어." 그리고 그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사뭇 화가 난듯이 불쑥 말을 던졌다. "하지만 나는 우리를 다시금 알아 보았어―너랑 나를. 나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 보았어!" 

 베포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웃어 넘기는 걸, 굳이 사람들의 탓이라고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베포의 등 뒤에서 딱하다는듯이 자기의 이마를 쳤다. 하지만 모모는 그를 좋아했고 그의 모든 말을 가슴 깊숙이 간직했다. 


 모모의 또 다른 절친한 친구는 젊고, 어느 모로 보나 도로 청소부 베포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꿈을 꾸는 듯한 눈을 가진 미소년으로서 기막히게 놀라운 말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무진장한 재치와 익살이 감추어져 있었고, 너무나 쉽게 웃음보를 터뜨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도 무의식중에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은 지로라모였지만 그냥 간단히 지지라고 불리었다. 

 우리가 이미 베포의 경우 직업에 따라 이름을 불렀으니 사실 지지의 경우엔 애당초 정식 직업이 없긴 하지만, 역시 그런 식으로 불러 볼까 한다. 그러니까 그를 여행안내원 지지라고 불러 보자.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여행안내원이란 그가 기회에 따라 하는 여러가지 직업 중 하나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것도 직책상 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이 직업을 위해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준비물은 챙모자 하나였다. 사실 언제이고 두 세 여행자가 이 근처에 나타나 헤매기만 하면, 그는 즉각 챙모자를 썼다. 그리고는 정색을 하고 그들에게 다가 가, 안내와 해설을 해 주겠다고 자청했다. 낯선 관광객들이 그 제의에 관심을 보이는 시늉만 하면, 그는 말문을 열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어낸 사건들, 이름들, 연도(年度)를 정신없이 늘어 놓아서 가엾은 청중들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진상을 눈치 채고 화가 나서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모든 이야기를 진짜로 곧이 들었다. 그래서 지지가 끝으로 챙모자를 내밀면, 진짜 동전을 내놓는 것이었다. 

 이웃마을 사람들은 지지의 착상(着想)에 대해 웃음보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 역시 때로는 정색을 하고, 어쨌든 순전히 꾸며낸 얘기를 해 주고 나서 진짜 돈을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모든 시인(詩人)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 때 지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저 아무 소득 없이 헛돈을 쓴 걸까요? 그들은 원하는 것만큼 받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교과서에 쓰여 있다는 것과 쓰여 있지 않다는 것의 차이가 뭔가요? 교과서에 쓰여진 이야기들은 완전히 꾸며진 것이 아니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아마 아무도 그것은 모르시겠지요?" 

 또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도대체 참된 것과 참된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을 뜻하나요? 천년 전, 이천년 전에 여기서 벌어진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누가 아시나요?"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를 했다. 

 "자, 그러니!" 여행안내원 지지는 외쳤다. "어떻게 여러분께서 내 이야기가 참되지 않다고 간단히 주장하실 수 있습니까? 아무튼 우연히 똑 같은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진실만을 말한 셈이지요!" 

 이 얘기에 대해서는 쉽사리 이의(異議)를 말할 수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말재주에 있어서만은 누구도 지지를 쉽게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물론 유감스럽게도, 이 원형극장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지지는 자주 다른 직업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가 닿는 대로 그는 공원지기, 결혼 입회인, 개 산책 담당, 사랑의 편지 배달부, 장례 입회인, 기념품 행상, 고양이 먹이 팔이 등등 잡다한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지지는 언젠가는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정원에 둘러 싸인, 동화처럼 예쁜 집에서 살고 싶어 했다. 금박이 입혀진 접시에 음식을 먹고 비단 금침에서 자고 싶어했다. 그는 명성의 광채 속에 태양처럼 자리하고 있는 미래의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 태양의 광선은 지금의 가난 속에서도 이미, 말하자면 아득히 먼 거리에서, 그 자신을 따스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꿈에 대해 웃으면 그는 외쳤다. "여러분들 모두가 언젠가는 저의 말을 돌이켜 생각하게 될 겁니다!" 

 어떻게 그가 그 모든 꿈을 이루려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그는 근면한 노력과 힘든 일에다 별로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예술 작품이 아니야." 그는 모모에게 말했다. "예술 작품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는 거야. 그런 사람들을 좀 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약간의 편안함 때문에 삶과 영혼을 팔아 버린 사람들 말야! 아니, 나는 거기에 끼진 않겠어, 않구 말구. 아무리 지금의 내가 커피 한잔 값을 지불할 돈이 없더라도……. 지지는 어디까지나 지지야!" 

 이렇게 서로 전혀 딴판의 두 사람, 세상과 인생에 대해 전혀 상반된 생각을 가진 여행안내원 지지와 도로청소부 베포같은 사람들이 애당초부터 서로 친밀해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사실이 그랬다. 야릇하게도 지지를 보고 무분별하다고 한번도 탓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다름 아닌 베포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그와 꼭 마찬가지로 야릇하게도 괴상스런 할아버지 베포를 한번도 비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바로 말재줏군 지지였다. 

 어쩌면 그것 역시, 꼬마 모모가 그들 두 사람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는 방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들 셋 중의 아무도, 얼마 안 가 어느 새 그들의 우정 위에 한 조각 그늘이 드리워지리라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들의 우정 위로만이 아니라 이 마을 전체에. 그리고 끊임없이 자라나서 어느새 어둡고 차갑게 전 도시 위로 번져 버린 그늘이. 

 그것은 눈에 띄지 않는 소리 없는 침략같았다. 매일처럼 앞으로 진격해 오지만, 어느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침략. 실은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침략자는 누구란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많은 것을 보는 베포 할아버지까지도, 점점 불어나면서 큰 도시를 서성대며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듯한 이 회색 일당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더우기 그들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상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눈에 띄지 않게할 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순히 그들을 스쳐 지나치거나 그들을 보고도 당장 잊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굳이 숨지 않고서도 비밀리에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니까, 그들이 어디에서 왔느냐에 대해, 또 날마다 숫자가 불어나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계속 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멋진 회색 승용차를 타고 거리를 달렸고 모든 빌딩을 드나들고 도처의 레스또랑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작은 수첩에 자주 적어 넣었다. 그들은 온통 거미줄같은 회색 옷을 입은 일당이었다. 심지어 얼굴까지도 잿빛으로 보였다. 그들은 둥근 중산모자를 쓰고, 잿빛의 조그만 시가를 피웠다. 그리고 하나같이 납회색의 서류 가방을 항상 휴대하고 있었다. 

 여행안내원 지지 역시, 이미 몇 번인가 이 회색 일당의 한 떼거리가 원형극장 주변을 정찰하고 수첩에다 온갖 것을 적어 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오로지 모모만이, 어느 날 저녁 폐허의 윗 꼭대기 부분에 떠오른 어두운 실루엣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 받더니 나중에는 무슨 의논을 하는듯 서로 머리를 숙여 맞대었다. 전혀 들을 수는 없었지만 모모는 불현듯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일종의 얼어붙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모모는 그의 커다란 웃도리를 아무리 꼭꼭 둘러 여며도 소용 없었다. 그건 그냥 보통의 추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회색 일당은 사라졌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밤엔 모모도 다른 때처럼 나직하면서도 힘찬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엔, 전과 다름없이 삶이 이어졌고 모모도 이 야릇한 방문객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모모 역시 그들을 잊어 버렸다. 

 

5  많은 사람을 위한 이야기와 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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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갈수록 여행안내원 지지에겐 모모가 없어서는 도저히 안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들뜨고 경박한 젊은 친구들한테나 대고 할 수 있는 얘기지만, 그는 이 더벅머리 꼬마 소녀한테 깊은 사랑에 빠져 버렸고, 어딜 가든지간에 이 꼬마를 끌고 다니고 싶어 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의 광적인 성벽(性癖)이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도 그 자신 분명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변화가 생겼다. 전에는 그가 이야기를 하면서 곤란한 경지에 곧잘 빠졌다. 적절한 표현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고 곧잘 한 말을 또 하거나, 언젠가 본 영화, 또는 언젠가 읽은 신문의 얘깃거리를 되씹을 때가 많았다. 말하자면 그의 이야기는 발로 걸었었다. 하지만 모모를 알고 난 후부터 그의 이야기는 불현듯 날개를 달게 된 것이었다. 

 특히 모모가 곁에 있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때면, 그의 환상은 봄의 초원처럼 꽃을 피웠다.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그의 주변에 모여 들었다. 그는 이제 며칠씩 몇 주일씩 속편(續篇)을 끌고 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착상(着想)의 샘이 마를 줄을 몰랐다. 요컨대 자기 스스로의 이야기에 신경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의 환상이 어디를 향해 달릴지 그 자신도 전혀 예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이 원형극장을 관광하러 여행자들이 왔을 때 (모모는 약간 떨어진 돌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아실는지 모르지만, 슈트라파찌아 아우구스티나 여왕께서는, 비겁(卑怯) 족속의 공격에 대비하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족속을 다시금 정복했을 때, 여왕께서는 끊임없이 성가시게 구는 이들에 대해 크게 노하시어 그들의 왕 삭소트락솔루스에게 응징의 조공(朝貢)으로 그의 금붕어를 바치지 않으면 모조리 멸족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시대만 해도,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나라에서는 금붕어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왕 슈트라파찌아께서는 어느 여행자를 통해, 그 족속의 왕 삭소트락솔루스가 작은 금붕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자라기만 하면 순금(純金)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왕께서는 이 진품(珍品)을 무슨 일이 있어도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삭소트락솔루스 왕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금붕어를 침대 밑에다 감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여왕한테는 그것 대신에 어린 고래를 보석으로 장식된 수우프 그릇에 담아 전달했습니다. 

 여왕께서는 금붕어가 보다 작으리라고 상상했기 때문에, 그 크기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더 큰 황금을 가져다 줄 테니까 말이지요. 물론 이 금붕어는 전혀 황금빛의 흔적이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왕께서는 못 미더워했습니다. 하지만 삭소트락솔루스 왕의 사절(使節)은 물고기가 완전히 자란 뒤에야 황금으로 화하게 될 것이며 그 전에는 황금빛을 내지 않는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돌보아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 말에 여왕 슈트라파찌아께서는 만족하셨습니다. 

 어린 물고기는 하루하루 부쩍부쩍 자라며 엄청난 먹이를 먹어 치웠습니다. 하지만 여왕 슈트라파찌아께서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고기는 먹을수 있는 한 실컷 먹고는 뚱뚱보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수우프 그릇은 물고기가 있기엔 너무 비좁아졌습니다. 

 '크면 클수록, 더욱 좋은거야.' 여왕 슈트라파찌아께서는 그렇게 말하며 물고기의 숙소를 자신의 목욕통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물고기는 목욕통 안에도 잠기지를 않았습니다. 물고기는 부쩍부쩍 자랐습니다. 이번엔 왕의 수영 푸울로 옮겨졌습니다. 벌써 그것을 옮기는 일만 해도 엄청나게 번거로운 일이었습니다. 물고기는 어느새 황소 무게만큼 무거워졌으니까요. 물고기를 끌어 나르던 노예 중의 한 사람이 미끌어졌습니다. 여왕은 이 불행한 노예를 당장 사자밥으로 던져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물고기야말로 여왕에겐 유일한 모든 것이었으니까요. 

 매일처럼 여왕께서는 몇 시간씩 수영 푸울 가장자리에 앉아서 물고기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여왕께서는 엄청난 금덩어리만 생각했습니다.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여왕께서는 그야말로 호사스런 생활을 하느라 낭비해왔기 때문에 금덩어리를 마음껏 가질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크면 클수록, 더욱 좋은거야.' 여왕께서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되뇌었습니다. 이 귀절은 일반적인 규범으로 공식적으로 천명되고, 청동(靑銅) 글자로 새겨져 모든 관공서에 내걸리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왕의 수영 푸울 역시 이 물고기한테는 너무 비좁은 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슈트라파찌아 여왕께서는 여러분들이 지금 그 잔해를 보시는 바와 같은, 이 건물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곳은 꼭대기까지 물이 꽉 차 있던 엄청나게 큰 둥근 수족관(水族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고기는 결국 자랄 수 있는 한 한껏 뻗쳐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왕께서는 몸소 나와서 밤낮으로, 저기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이 거대한 물고기가 어느새 황금으로 변하지 않을까 지켜 보았습니다. 여왕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예도, 왕족도. 그리고 물고기가 도둑 맞을까봐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기에 앉아 불안과 걱정 때문에 점점 말라 들어가며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황금으로 화할 것은 꿈도 꾸지 않고 신이 나서 첨벙거리기만 하는 물고기를 지켰습니다. 이렇게 점점 슈트라파찌아 여왕께서는 정사(政事)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비겁(卑怯) 족속은 바로 이렇게 될 것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삭소트락솔루스 왕의 지휘 하에 그들은 최후의 원정을 감행하여 쉽사리 이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아예 그들과 마주하여 싸우는 병정도 없었습니다. 대중들이야 그 누구가 통치하든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내 슈트라파찌아 여왕께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런 유명한 말을 외쳤습니다. '슬프도다! 오, 내 어쨌든……' 나머지 귀절은 유감스럽게도 전해져 오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왕께서 이 수족관에 뛰어 들어, 여왕의 모든 희망의 무덤인 그 물고기 옆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삭소트락솔루스 왕은 개선의 축제로 그 고래를 도살하라고 명하였고, 일주일 동안 온 국민은 구운 고래 고기를 하사받았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가볍게 믿는 사람들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여러분들은 아셨을 겁니다!" 


 이 말로 지지는 안내원으로서의 얘기를 끝냈고 청중들은 과연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폐허의 잔해를 경외(敬畏)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중의 다만 한 사람만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그럼, 그 모든 일은 언제 일어났나요?" 

 하지만 지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여왕 슈트라파찌아는 주지하다시피, 저명한 옛 철학자 노이오시우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 의심 많은 청중은 물론, 자기가 저명한 옛 철학자 노이오시우스가 언제 살았던가에 대해 전혀 무식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대단히 만족해서 이 관광이야말로 정말 의의가 있었으며, 이토록 옛 시절에 대해 일목요연하고도 재미있는 설명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면 지지는 그의 챙모자를 겸손하게 내밀었고 관광객들은 그들의 감동에 상당하게, 아끼지 않고 돈을 내놓았다. 심지어는 그 의심 많은 사람까지도 동전 몇 개를 던졌다. 

 요컨대 모모와 함께 있은 이래로 지지는 같은 얘기를 두번 한 적이 없었다. 반복하는 일이야말로 그에겐 너무 권태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모모는 청중들 틈에 끼어 앉아 있으면 마치 그에게 마음 속의 댐의 문(水門)이 열려 도대체 깊은 생각같은 것을 할 필요도 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터져 나와 솟구치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그는, 언젠가 두 미국 귀부인을 안내했을 때처럼, 정도를 넘어서는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심지어는 스스로 수시로 브레이크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인 즉 그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 미국 부인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했던 것이다. 

 "마님들의 나라, 넓고 아름다운 아메리카 대륙에야 너무나 당연히 알려진 사실이겠지만, 마님들, 아메리카 인디안이라고 불리우는 잔인무도한 폭군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는 그 당시의 세계를 온통 자기의 생각대로 바꾸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행적은, 결국 인간은 어떤 수를 써도 별 수 없이 원래의 모양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 도저히 변혁시킬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는 노후에 정신착란증에 걸리고 말았지요. 마님들께서야 응당 아시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사실 그런 병을 고칠 수 있는 정신과 의사가 없었지요. 그래서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가 광기(狂氣)를 부려도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광기 상태의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한테 이번엔, 현존하는 세상은 그냥 그대로 둔 채로 차라리 전혀 새로운 세상을 두들겨 맞추어야겠다는 착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물과 바다, 산과 나무, 모든 집들이 완벽하게 자연 그대로인 모습인 지금의 땅 덩어리와 똑 같은 크기의 또 다른 지구를 만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의 전 인류는 사형 선고의 위협에 못 이겨 이 엄청난 작업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맨 먼저 사람들은 이 거대한 지구를 받쳐 줄 받침대를 지었습니다. 

 바로 이 받침대의 폐허를 여기서 보고 계시는 겁니다, 마님들. 

 그 이후 사람들은 지구와 똑 같은 크기의 엄청난 지구본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둥근 모형이 완성되자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면밀하게 그대로 본떠 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 지구본을 만드는 데는 무지무지하게 많은 재료를 필요로 했고, 이 재료들은 실상 지구 자체 말고는 다른 어디에서도 구할 데가 없었지요. 그래서 지구본이 점점 커다랗게 불어나는 한편에서 지구 자체는 서서히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새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헌 지구에 남아 있던 마지막 돌 덩어리 하나까지 똑 떨어지게 옮겨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사람들도 새 지구본으로 옮아 가지 않을 수 없었지요. 헌 지구는 다 써 버렸으니까요. 마르크센티우스 콤무누스는 이번에 역시, 제 아무리 수를 써도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길다란 웃도리에 자기 머리통을 싸감고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지요. 

 자, 마님들, 오늘날 이렇게 폐허로 남아 있는 깔대기 모양의 커다란 공동(空洞)은 그 옛날 헌 지구의 표면에 얹혔던 토대(土臺)인 겁니다. 그러니까 마님들께서는 전체를 거꾸로 상상하셔야 합니다." 


 아메리카에서 온 두 귀부인은 얼굴이 핼쑥해졌고 그 중 한 부인이 물었다. "그럼 지구본은 어디로 갔나요?" 

 "마님께서는 바로 그 위에 서 계시잖습니까!" 지지는 대답했다. "오늘날의 세계는, 마님, 바로 새 지구본인 겁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노 귀부인께서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지지는 속절없이 챙모자를 내밀고 서 있었고. 

 하지만 지지는 다른 청중이 아무도 없을 때, 꼬마 모모만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대체로 그것은 동화(童話)였다. 동화는 모모가 제일 즐겨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늘 거의가 지지와 모모 자신이 관련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동화들은 역시 두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서, 다른 때 지지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들리었다. 

 어느 따스한 아름다운 저녁, 두 사람은 돌계단의 꼭대기에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늘에는 어느새 첫 별이 빛나고 있었고 소나무 숲의 검은 실루엣 위로는 커다란 은빛 달이 솟아 있었다. 

 "동화 하나 이야기 해 주지 않을래?" 모모가 나직하게 졸랐다. 

 "좋아." 지지가 말했다. "누구의 이야기를 할까?" 

 "모모와 지로라모의 이야기가 제일 좋아." 모모가 대답했다. 

 지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무슨 제목의 이야기를 할까?" 

 "어떨까, 요술거울의 동화라면?" 

 지지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얘기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자." 

 그는 모모의 어깨에 팔을 얹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모모라는 이름의 예쁜 공주가 살고 있었어. 공주는 빌로드와 비단 옷을 입고, 세상의 저 위쪽 눈 덮힌 산 꼭대기 알록달록한 유리성(琉璃城)에 살고 있었어. 

 공주는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갖고 있었어. 고급 요리만을 먹었고 달콤한 포도주만을 마셨어. 비단 요에서 잠을 잤고 상아(象牙) 의자에 앉아 있었어. 공주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지만, 완전히 혼자였어. 

 공주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 하인들, 시녀들, 개와 고양이와 새와 심지어 꽃들까지도, 모두가 거울 속에 비치는 상(像)이었거든. 

 사실 모모 공주는 요술 거울을 갖고 있었지. 크고 둥근, 고급 은(銀) 거울이었어. 매일 밤낮 공주는 이 거울을 세상에다 비추었어. 이 큰 거울은 육지와 바다, 거리와 논밭 위에 둥실 떠서 말이야. 그것을 본 사람들은 조금도 신기해 하지 않고 그냥 '저건 달이야'라고 말했지. 

 요술거울은 공주에게 되돌아 와서는, 그 때마다 여행길에서 수집한 온갖 거울의 상(像)을 공주 앞에 쏟아 놓았어. 그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흉칙한, 혹은 재미있고 지루한 영상들이었어. 공주는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잡고 나머지는 그냥 어느 시냇물에다 던졌지. 그러면 놓여 난 영상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지상의 물을 타고 원래 주인에게로 순식간에 되돌아갔어. 우리가 샘물 위로든지 웅덩이 위로 몸을 굽히면 자기의 영상(映像)이 비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야. 

 모모 공주는 죽지 않는 존재라는 걸 얘기해 주는 것을 지금껏 잊어버렸군. 아닌 게 아니라 공주는 지금까지 이 요술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본 적이 없었어. 이 거울에 비친 자기의 영상을 본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거든. 그 사실을 공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거울을 쳐다보지 않았지. 그래서 공주는 그녀의 온갖 영상들과 같이 살면서 같이 놀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날, 요술 거울이 지금까지의 영상들보다 훨씬 소중한 영상을 하나 가져왔어. 그것은 어느 젊은 왕자의 영상이었어. 그 상을 보는 순간, 공주는 너무나 왕자가 애타게 그리워져서 어떻게 해서든지 왕자에게 가고 싶어졌어.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공주는 왕자가 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모를 뿐더러 이름도 몰랐거던. 

 달리 뾰족한 생각이 나지 떠오르지 않자 공주는 어쨌든 요술 거울을 들여다 보기로 결심했지. 왜냐하면 공주는―어쩌면 이 거울이 내 얼굴의 상을 왕자한테 비쳐 줄지 몰라, 어쩌면 거울이 하늘에 떠 있는 순간 우연히 왕자님께서 하늘을 쳐다 볼지도 모르지, 그러면 내 얼굴을 보게 될 테지, 어쩌면 왕자님께서는 거울을 쫓아 와서 여기 있는 나를 발견할는지도 몰라―라고 생각했거던. 

 이렇게 해서 공주는 요술거울을 한참 들여다 보고는, 자기의 상이 비친 거울을 세상 위로 보냈어. 물론 이렇게 해서 공주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지. 

 공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조금 뒤에 얘기 해 줄께. 우선은 왕자 이야기를 해야겠군. 

 이 왕자는 지로라모라는 이름이었는데,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큰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어. 그럼 이 왕국은 어디 있었을까? 그 왕국은 어제 안에 있지도 않고 오늘 안에 있지도 않고, 항상 내일 안에 하룻동안 자리잡고 있었어. 그래서 이 왕국은 내일의 나라라고 불리었지. 이 왕국에 사는 모든 백성들은 왕자를 사랑하고 칭송했어. 어느 날 재상(宰相)들이 내일의 나라의 왕자에게 와서 말했어. '폐하, 왕비를 맞아들이셔야 합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할 줄 압니다.' 

 왕자 지로라모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 그래서 신부감을 고르려고 미래의 나라의 미녀들을 궁중에 불러 들였어. 미녀들은 재주껏 치장을 했어. 하기야 누구나 왕자의 신부가 되고 싶어했으니깐. 

 그런데 이 미녀들 틈에 섞여 나쁜 마녀가 하나 궁중에 살짝 들어 왔어. 붉고 따스한 피가 혈관에 흐르지 않고, 초록빛 차가운 피가 흐르는 마녀였어. 물론 이 마녀가 사람들의 눈에 뜨일 리가 없었지. 마녀는 기막힌 재주를 피워 화장을 했거던. 

 이제 왕자는 신부감을 고르려고 황금으로 된 큰 방으로 들어섰을 때 마녀는 재빨리 주문을 외었어. 그러자 가여운 지로라모의 눈에는 마녀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어. 마녀가 어찌나 아름답게 보이던지 왕자는 당장에 마녀더러 왕비가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물었어. 

 '영광이옵니다.'하고 마녀는 속삭였어.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사옵니다.' 

 '들어 주마'하고 지로라모 왕자는 선뜻 대답했지. 

 '황공하옵니다.' 마녀는 대답하면서 이 가련한 왕자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달콤하게 미소를 지었어. '왕자님께서는 일년 동안, 하늘에 떠 있는 은빛 거울을 올려다 보아서는 안되옵니다. 만일 그렇게 하시면, 당장에 왕자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 버리실 것이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잊어 버리고 아무도 왕자님을 알아 주지 않는 오늘의 나라로 가셔야 하옵니다. 그곳에서 왕자님께서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가련한 떠돌이로 사셔야 하옵니다. 제 말에 동의하시옵니까?' 

 '그것뿐이라면!' 왕자는 소리쳤어. '조건은 간단하구나!' 

 그럼, 그 사이에 모모 공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공주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그래도 왕자는 나타나지 않았어. 그래서 공주는 몸소 세상에 내려가서 왕자를 찾기로 결심했어. 

 공주는 자기의 주변에 있는 모든 영상들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어. 그리고는 단 혼자서 포근한 조그만 슬리퍼를 신고, 알록달록한 유리성을 빠져 나와 눈 덮인 산을 지나 세상으로 내려왔어. 공주는 모든 왕자들의 나라를 두루 헤메어 오늘의 나라에까지 오게 되었어. 어느새 공주의 신은 헤져 맨발로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지. 하지만 공주의 영상이 있는 요술거울은 여전히 세상을 굽어보며 떠 있었어. 

 어느날 저녁 지로라모 왕자는 그의 황금성 옥상에 앉아서 초록빛 차가운 피를 가진 마녀와 장기를 두고 있었어. 

 그 때 문득 왕자의 손등에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어. 

 '비가 오려나 봅니다.' 초록색 피를 가진 마녀가 말했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하늘엔 구름이 한점도 없는 걸.' 

 왕자는 위를 바라보았고 하늘에 떠 있는 은빛 커다란 요술거울 한가운데를 보았어. 그 때 왕자는 모모 공주의 영상을 보게 되었고 모모가 울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눈물이 자기 손등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 그 순간 마녀가 자기를 속였다는 것, 마녀는 실제로 아름답지도 않고 핏줄 속에 초록빛 찬 피가 흐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었지. 왕자가 실제로 사랑한 대상은 모모 공주였어. 

 '이제 당신께서는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초록빛 마녀는 이렇게 말하고, 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어. '그러니까 벌을 받으셔야지요!' 

 마녀는 초록빛 길다란 손가락으로, 온 몸이 마비된듯 그냥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왕자의 가슴을 움켜 쥐고는 심장에다 매듭을 묶었어. 순간, 왕자는 자기가 내일의 나라의 왕자라는 걸 잊어 버렸지. 왕자는 도둑처럼 한 밤중에 자기의 왕국을 빠져 나왔어. 그리고는 멀리멀리 세상을 두루 헤매다가 마침내 오늘의 나라에 이르렀지. 거기서 그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가난한 방랑자로 살아가면서 자기를 그냥 지지라고 불렀지. 왕자가 몸에 지니고 온 단 하나의 것은 요술 거울 속에서 꺼낸 영상이었어. 그 때부터 요술 거울은 비어 있게 되었지. 

 그 동안 모모 공주의 빌로드와 비단으로 된 옷도 완전히 찢어져 버렸어. 이제 공주는 낡고 너무나 큰 남자 웃도리에 알록달록 기운 치마를 걸치고 있었어. 그리고 폐허의 옛터에 살고 있었지. 

 어느 화창한 날 두 남녀는 이 폐허에서 만났어. 하지만 모모 공주는 내일의 나라의 왕자를 알아 보지 못했어. 사실 이제 왕자는 가련한 떠돌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지지도 마찬가지로 왕녀를 못 알아 봤어. 공주는 이제 조금도 공주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야. 하지만 같이 불행한 처지에서 그 둘은 서로 친해졌고 서로 위안이 되었어. 

 어느 날 저녁, 이젠 비어 버린 은빛 요술 거울이 다시 하늘에 둥실 떴을 때, 지지는 거울의 영상을 끄집어 내어서 모모한테 보여 주었어. 그 영상은 벌써 사뭇 구겨지고 바래 버렸지만 공주는 그것이 그 옛날 자기가 보낸 자기 자신의 상이라는 것을 당장에 알아 봤어. 그리고 이제사, 가련한 떠돌이 지지의 얼굴에 가려진 왕자의 정체를 알아 보았어. 자기가 늘 그토록 찾아 헤맸고, 그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존재가 되어 버린 왕자 지로라모라는 것을. 이제 공주는 모든 것을 왕자한테 이야기했어. 

 하지만 지지는 슬프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어. '그렇지만 나는 네가 말하는 걸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 내 심장에는 매듭이 묶여져 있어서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거던.' 

 그 때 모모 공주는 왕자의 가슴을 파고 들어 간단하게 심장의 매듭을 풀어 주었어. 이렇게 해서 지로라모 왕자는 갑자기 자기가 누구이며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가를 알게 되었지. 왕자는 공주의 손을 잡고 공주와 함께 떠났어. 아득한 곳으로, 내일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지지가 이야기를 끝내고 나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후 모모가 물었다. "그럼 그들은 나중에 남편과 아내가 되었을까?" 

 "그랬을꺼야." 지지가 말했다. "……먼 훗날에." 

 "그리고 그 사이에 죽었을까?" 

 "아니," 지지는 단호히 말했다. "우연히도 그 점만은 내가 확실히 알아. 이 요술 거울은 혼자서 들여다 볼 때만, 들여다 본 사람을 죽음의 존재로 만들어. 그렇지만 둘이 같이 들여다 보면 다시 죽음을 면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 거야.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그렇게 했거던." 

 달이 은빛으로 크고 둥글게 검은 소나무 위에 떠서 폐허의 옛 돌들을 신비스럽게 비추고 있었다. 모모와 지지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서 오랫동안 달을 쳐다보았다. 이 순간이 지속하는 한 두 사람은 자기네들은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6  똑 맞아 떨어진 엉터리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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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엄청나게 크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관여하고 있고, 누구나가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 들이고 눈꼽만치도 그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 비밀은 시간(時間)이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이 있고 시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우리에겐 단 한 시간이 영원처럼 여겨질 때가 있는 반면, 찰나처럼 무상하게 흘러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에 겪는 우리의 체험에 따라서 말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삶(生)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삶은 마음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회색 도당(灰色徒黨)들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시간, 일분, 심지어 일초의 삶의 가치를 그들만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마치 흡혈귀가 피를 대하듯이, 시간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추구했다. 

 그들은 인간의 시간을 대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몰래 면밀하게 세워진 계획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네들의 활동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전혀 눈에 띄지 않게, 그들은 대도시와 그 안의 주민들의 삶 속에 파고 들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인간들이 모르는 새에 그들은 날마다 앞으로 쳐들어와 인간들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상대방은 전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은 자기네들의 목적을 달성시킬 하나 하나의 인간을 파악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들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당한 때가 오면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이발사 푸시씨(氏)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유명한 이발사는 아니었지만, 그가 사는 거리에서는 인망이 높았다. 그는 가난뱅이도 부자도 아니었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조그마한 그의 이발소에서 그는 조수를 한 사람 쓰고 있었다. 

 어느 날 푸시씨는 이발소 문 앞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수는 휴가를 가고 없고 푸시씨 혼자였다. 그는 빗줄기가 억수같이 퍼붓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잿빛의 날씨였고, 푸시씨의 마음에도 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내 한 평생도 이렇게 가위의 철꺽거리는 소리와 쓸데없는 잡담과 비누 거품으로 흘러가는구나"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애당초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죽어 버리고 나면, 나란 존재는 아예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지." 

 그렇다고 푸시씨가 잡담을 싫어하며 살아 왔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손님들에게 장황하게 자기의 의견을 늘어 놓고, 그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듣기를 사뭇 좋아했다. 또한 가위의 철꺽거리는 소리와 비누 거품을 싫어해 온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일은 분명히 그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고, 스스로 능숙한 기술자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특히 턱 밑 면도를 할 때의 솜씨는 그를 쉽게 따를 이발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전혀 무의미(無意味)한 순간들이 종종 있는 법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리라. 

 "내 한 평생은 어긋나게 살아 왔어." 푸시씨는 생각했다. "나란 존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기껏 좀스러운 이발사로 주저앉고 말았으니. 제대로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나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될 텐데!" 

 이 제대로의 생이 어떻게 살아져야 하는가는, 푸시씨도 물론 잘 몰랐다. 그는 다만 어떤 중요한 것, 어떤 호사스러운 것, 그림 잡지에 항상 실리는 것같은, 그런 것을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우울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런 걸 누리기에는 나의 일은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제대로의 생을 누리려면 시간을 가져야 하는 건데. 자유로와야 해. 그런데 나는 한 평생 가위 소리, 잡담과 비누 거품의 노예로 주저앉아 있단 말야." 

 이 순간, 잿빛 고급 승용차가 미끄러져 와 바로 푸시씨의 이발소 앞에 멈추었다. 회색의 사나이 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니 이발소로 들어 섰다. 그는 납회색의 서류 가방을 거울 앞의 탁자 위에 놓고는 둥근 중산모자를 옷걸이 못에 걸고 이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고 작은 회색 시가를 뿜어대면서 수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푸시씨는 이발소 문을 닫았다. 갑자기 이 작은 가게 안이 이상스럽게 춥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는 당황해서 물었다. "면도를 하시겠습니까" 이발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는 눈치없는 질문을 던지 스스로를 속으로 저주했다. 이 사나이는 번쩍거리는 대머리였던 것이다. 

 "어느 것도 안합니다." 회색 사나이는 웃음기도 없이, 기이하게도 억양 없는, 말하자면 잿빛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시간 저축은행에서 왔습니다. 은행 외무사원 XYQ/384/b호라고 합니다. 당신이 우리 은행에 일반예치(一般預置)를 하기 원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푸시씨는 점점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도대체 그런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금시 초문입니다." 

 "자, 이제 아시게 될 겁니다." 외무사원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수첩을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이발사, 푸시씨임에 틀림없지요?" 

 "맞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푸시씨는 대답했다. 

 "그럼 제대로 찾아 온 셈이군요." 회색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수첩을 닫았다. "당신은 우리의 다음 번 고객입니다." 

 "뭐라구요?" 푸시씨는 점점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한 평생을 가위의 철꺽대는 소리와 쓸데없는 잡담과 비누 거품으로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 버리고 나면 당신의 존재는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제대로 살아갈 시간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전혀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시간입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지금 막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푸시씨는 중얼거리며 후들후들 떨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추워졌기 때문이었다. 

 "자 보십시오!" 회색 사나이는 대꾸하며 흡족한 표정으로 작은 시가를 빨아들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을 갖지요"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푸시씨, 당신은 아주 무책임하게 당신의 시간을 허송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계산으로 그걸 증명해 보여 드리지요. 1분은 6십초입니다. 그리고 한시간은 6십분이지요, 아시겠습니까?" 

 "알구 말구요." 푸시씨는 말했다. 

 외무사원 XYQ/384/b호는 회색 연필로 거울 위에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6십 곱하기 6십은 3천 6백이지요. 그러니까 1시간은 3천 6백초입니다. 하루는 스물 네시간이지요. 그러니까 3천 6백을 스물 넷으로 곱하면, 하루는 8만 6천 4백초입니다. 아시다시피 1년은 3백 6십 5일이지요. 따라서 1년은 3천 1백 5십 3만 6천초입니다. 또는 십년이 지나면 3억 1천 5백 3십 6만초가 되지요. 푸시씨, 당신의 한 평생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저…," 푸시씨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하느님의 뜻대로지만, 일흔살, 여든살을 살게 될까요." 

 "좋습니다."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신중을 기하는 의미에서 일단 일흔살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니까 그건 3억 1천 5백 3십 6만의 일곱배가 되겠지요. 그건 22억 7백 5십 2만초가 되는군요." 

 그리고 그는 그 숫자를 큼지막하게 거울에 썼다. 


    2,207,520,000초 


 그리고 그 밑에다 몇 겹으로 줄을 긋고는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푸시씨. 이것은 당신이 재량껏 쓸 수 있는 재산인 것입니다." 

 푸시씨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이 숫자는 그에게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는 자기가 그토록 부자라는 것을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자," 외무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의 조그만 시가를 다시금 빨아 들였다. "굉장한 숫자이지요" 하지만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지요, 푸시씨?" 

 "마흔 두살입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갑자기 자신이 무슨 횡령이라도 한 것같은 죄의식을 느꼈다. 

 "당신은 평균 하루에 몇 시간이나 주무시지요?" 회색 사나이는 계속 따지고 들었다. 

 "아마 여덟시간쯤……" 푸시씨는 고백했다. 

 외무사원은 번개처럼 빨리 계산을 했다. 연필이 거울 위로 빙글 빙글 스쳤다. 푸시씨는 소름이 끼쳤다. 

 "4십 2년…… 매일 여덟시간…… 그러니까 그것이 벌써 4억 4천 1백 5십만 4천이 되는군요. 이 숫자는 당연히 잃어 버린 것으로 간주해야겠지요. 매일처럼 몇 시간이나 일에 바쳐야 합니까, 푸시씨?" 

 "역시 여덟시간, 대충입니다만," 푸시씨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고백했다. 

 "그럼 다시금 똑같은 숫자를 결손(缺損) 장부에 기록해야겠군요."외무사원은 사정없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엔 영양을 충당하는 일로 일정한 시간이 없어지겠군요. 식사 시간으로 통털어 하루에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잘 모르겠군요." 푸시씨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마 두시간?" 

 "너무 적은 것 같군요." 외무사원은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4십 2년 동안 1억 1천 3십 7만 6천이라는 액수가 나옵니다. 더 계산을 해 봅시다! 당신은 노모(老母)랑 혼자서 사십니다. ……우리가 아는 한은. 매일처럼 당신은 이 늙은 노파한테 완전히 한 시간을 바치고 있지요. 이를테면, 이 노파는 귀가 먹어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그 옆에 앉아 얘기를 하지요. 그러니까 그건 버려진 시간입니다. 5천 5백 1십 8만 8천이군요. 게다가 당신은 쓸데없이 앵무새를 한 마리 갖고 있지요. 그걸 보살피는 데 매일 15분은 쓰고 있습니다. 그걸 계산하면 1천 3백 7십 9만 7천이 되는군요." 

 "그렇지만……." 푸시씨는 애원하듯이 항의했다. 

 "제 말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외무사원은 뻣뻣하게 명령하듯이 말하면서 점점 더 빨리 걷잡을 수 없이 계산을 해댔다. "당신의 어머니가 부담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푸시씨, 당신은 집안 일의 일부를 떠맡아야 합니다. 장을 봐야하고 청소를 해야 하고……, 그런 유(類)의 귀찮은 일이 수없이 많습니다. 거기에다 매일 얼마나 쓰십니까?" 

 "아마 한시간쯤, 하지만……." 

 "당신이 손실한 액수가 또 다시 5천 5백 1십 8만 8천이 되는군요, 푸시씨. 우리는 또, 당신이 한 주일에 한번 극장에 간다는 것, 매주일 한번 합창대에 참석하고, 일주일에 두번 단골 술집에 가며, 나머지 날에는 밤마다 친구를 만나거나, 이따금 심지어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쓸데없는 일로 죽이고 있습니다. 하루에 대충 세 시간쯤, 그것이 또 1억 6천 5백 5십 6만 4천이 되는군요. 기분이 언짢으십니까, 푸시씨?" 

 "그렇군요." 푸시씨는 대답했다. 

 "용서하십시오……. 이제 곧 끝납니다." 회색 사나이는 말했다. "그렇지만 이제 당신의 생(生)의 특별한 장(章)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사실 작은 비밀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푸시씨는 이(齒)를 딱딱 부딪치며 덜덜 떨고 있었다. 그토록 참을 수 없이 춥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까지 아십니까?" 그는 맥이 빠져 중얼거렸다. "나는, 나랑 다리아말고는 아무도……." 

 "우리가 사는 현대에서는……," 외무사원 XYQ/384/b호는 푸시씨의 말을 중단시켰다. "어떤 비밀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한번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푸시씨. 내 질문에 대답을 하십시오. 당신은 다리아양과 결혼하시겠습니까?" 

 "아니오." 푸시씨는 말했다. "그건 안될 말입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다리아양은 다리 병신이니까 한 평생 바퀴 의자에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꽃을 가지고, 매일처럼 반 시간씩 그 여자를 방문하지요. 왜?" 

 "그 여자는……, 아무튼 언제나 기뻐하거든요." 푸시씨는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외무사원은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는 잃어 버린 시간입니다. 푸시씨, 그것을 합치면 어느새 2천 7백 5십 9만 4천이 됩니다. 그리고 매일처럼 잠들기 전에 십오분 동안 창가에 앉아 지나간 낮의 일을 되돌아 보는 당신의 버릇까지 계산해 보면, 다시금 1천 3백 7십 9만 7천이라는 손실액이 나옵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 한번 봅시다, 푸시씨." 

 거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계산이 적혀 있었다. 




       수면(睡眠) 441504000초 

  일 441504000〃 

  식사 110376000〃 

  어머니 55188000〃 

  앵무새 13797000〃 

  장보기 등 55188000〃 

  친구, 합창 등  165564000〃 

  비밀 27594000〃 

  창(窓)가 1379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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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액: 1324512000〃 




 "이 총액은"하고 회색 사나이는 말하며 권총을 쏘는 것같은 소리가 나게끔 세차게 연필로 여러 차례 거울을 쳤다. "이 총액은,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이미 잃어 버린 시간인 겁니다. 뭐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푸시씨?" 

 푸시씨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아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얼음처럼 추워 오는데도 불구하고 진땀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회색 사나이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이 보시는 바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말했다. "이건 벌써 당신이 애당초 갖고 있던 총재산의 절반이 넘습니다, 푸시씨. 그럼 이제 당신의 4십 2년 중에서 대체 얼마나 남아 있나 한번 봅시다. 일년은 아시다시피 3천 1백 5십 3만 6천초입니다. 그리고 그걸 4십 2배 하면 1십 3억 2천 4백 5십 1만 2천초이지요." 

 그는 잃어 버린 시간의 밑에다 그 숫자를 썼다. 




       1324512000초 

  ― 132451200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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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0000000초 




 그는 연필을 집어 넣고는 잔뜩 나열된 영(零)의 실체를 푸시씨에게 실감시키기 위해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과연 그건 효력이 있었다. 

 "저것이……," 푸시씨는 만신창이가 된 느낌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살아 온 생의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로구나." 

 이렇게 한 치도 남김없이 더하기 빼기로 똑 맞아 떨어진 계산이 어찌나 충격을 주었던지, 그는 모든 것을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인정했다. 하기는 계산 자체는 틀림이 없었다. 이것은 회색 도당들이 어느 경우에든 인간을 기만하는 책략의 한 예(例)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을 꾸려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외무사원 XYQ/384/b호는 은근한 말투로 다시 입을 떼었다. 

 "푸시씨, 이제부터 저축을 시작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푸시씨는 말없이, 파랗게 질린 입술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테면 당신이," 외무사원의 잿빛 음성이 푸시씨의 귀에 울렸다. "이십년 전에 매일처럼 단 한시간씩 저축을 하기 시작했더라면, 지금 당신은 2천 6백 2십 8만초의 재산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매일처럼 두 시간씩 저축을 했다면, 물론 그 갑절, 그러니까 5천 2백 5십 6만초가 되겠지요. 푸시씨, 말씀해 보십시오. 이런 어마어마한 숫자에 비하면 두 시간쯤이야 얼마 안 되는 하찮은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지요!" 푸시씨는 외쳤다. "너무나 하잘 것 없는 부스러기 시간이지요!" 

 "그걸 터득하고 계시다니 기쁩니다." 외무사원은 변함 없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똑 같은 조건 하에서 앞으로 이십년 동안 저축을 해서 갖게 될 재산을 계산해 보면, 1억 5백 1십 2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에 이르게 됩니다. 이 자본은 당신이 예순 두살 되는 해에 당신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굉장하군요!" 푸시씨는 더듬거리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만,"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하긴 실제로 더 큰 액수가 되는군요. 우리, 곧 시간 저축은행은, 이를테면 당신이 저축한 시간만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이자(利子)까지 지불하지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더 많은 액수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더 많은가요?" 푸시씨는 숨가쁘게 물었다. 

 "그건 전적으로 당신한테 달려 있습니다." 외무사원은 설명했다. "당신이 얼마나 저축을 하는가, 얼마나 오래 저축액을 우리 은행에 예치(預置)해 놓는가, 하는 데 달려 있지요." 

 "예치해 놓다니요" 푸시씨는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자, 아주 간단합니다." 회색 사나이는 말했다. "당신이 그 동안 저축한 시간을 5년 안에 되찾아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와 똑같은 금액을 가산하여 지불합니다. 당신의 재산은 5년마다 두 배로 불어나는 것이지요, 아시겠습니까" 십년 뒤에는 벌써 애당초 예입한 원액(元額)의 네 갑절이 될 테고, 십오년 뒤에는 여덟 배, 이렇게 점점 불어나는 겁니다. 당신이 하루에 단 두 시간씩 예입하기를, 이십년 전에 시작했더라면, 당신이 예순 두살이 되는 해에는, 그러니까 도합 사십년 후에는, 그 때까지 당신이 실제 예입한 원시간(原時間)의 2백 5십 6배의 시간이 당신 처분을 기다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건 2백 6십 9억 1천 7십 2만초가 되겠군요." 

 그리고 그는 또 다시 회색 연필을 꺼내어 거울 위에 그 숫자를 썼다. 


    26,910,720,000초 


 "보시다시피, 푸시씨." 그는 처음으로 엷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것은 당신의 원래의 전 생애의 열배가 되는 숫자입니다. 그것도 매일처럼 단 두시간 절약해서. 유리한 제안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리하고 말고요!" 푸시씨는 녹초가 되어서 말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유리합니다! 저축을 일찌감치 시작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군요. 이제사 겨우 제대로 눈이 떠졌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자포자기의 기분이 듭니다." 

 "그러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회색 사나이는 은근하게 대답했다. "언제 시작해도 늦는 법이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오늘부터라도 시작하실 수 있지요. 아시게 되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저축을 원한다면," 푸시씨는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절차를 밟아야 합니까?" 

 "그거야 선생님," 외무사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간을 어떻게 아끼는지 당신 자신이 알게 될 겁니다. 이를테면 우선 일을 좀더 신속히 처리하고 모든 쓸데없는 일을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이발소 고객한테 반시간 대신 십오분만 바치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는 오락을 피해야 합니다. 늙은 어머니 곁에 앉아 있는 시간을 반시간으로 단축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애당초 값싸고 좋은 양로원에 노모를 떠맡기는 겁니다. 그럼 벌써 당신은 매일, 옹근 한시간을 벌게 되지요. 쓸데없는 앵무새를 없애 버리십시오! 꼭 방문해야겠으면, 다리아양도 두 주일에 한번만 찾아 가십시오. 십오분 동안의 하루의 반성을 집어치우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그토록 자주, 노래와 책 읽기, 또는 당신의 이른바 친구들과 더불어 다시는 허송하지 마십시오. 얘기하는 김에 덧붙여 충고를 하나 하지요. 당신의 조수의 노동 시간을 정확히 감시할 수 있게끔, 크고 성능이 좋은 시계를 이발소에 걸어 놓으십시오." 

 "좋습니다." 푸시씨는 말했다.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읍시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내게 남게 된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걸 보내야 하나요" 어디로" 아니면 제가 그냥 보관해야 하나요" 전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 점에 관해서는……," 회색 사나이는 말하며 두번째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점은 마음 놓고 우리한테 맡기십시오. 당신이 절약한 시간은 털끝만치도 새어 나가지 않고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이제 확신하시게 됩니다. 당신한테는 어느새 여분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푸시씨는 당황스레 대답했다. "그 점을 믿겠습니다." 

 "맘 푹 놓고 믿으십시오, 선생님." 외무사원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걸로 당신이 우리 시간 저축가 대연맹의 새 회원이 되신 걸 환영해도 되겠지요. 이제 당신도 명실공히 앞서 가는 현대인이 되신 겁니다. 푸시씨, 축하합니다!" 

 그리고 그는 모자와 가방을 들었다. 

 "잠간만!" 푸시씨가 소리쳤다. "대체 무슨 계약같은 걸 체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명을 안 해도 되나요" 무슨 서류같은 것도 받지 않고요?" 

 외무사원 XYQ/384/b호는 문께에서 몸을 돌리더니 약간 불쾌한 기색으로 푸시씨를 훑어 보았다. 

 "그런 건 뭣 때문에 합니까?" 그는 되물었다. "시간 저축은 다른 종류의 저축과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무결한 신뢰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쌍방에서 말이지요! 당신의 수락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일단 수락한 것은 취소할 수가 없지요. 우리야 이제 당신의 저축에만 관여할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얼마나 저축하느냐 하는 건 순전히 당신 자신한테 달린 겁니다. 우리는 당신한테 아무런 강요도 안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푸시씨!" 

 그리고 나서 외무사원은 타고 온 멋진 회색 승용차에 오르더니 붕 떠났다. 

 푸시씨는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서서히 다시 훈기가 돌아왔지만, 그는 비참하게 병든 느낌이 들었다. 외무사원의 작은 시가에서 뿜어 나온 푸른 담배 연기가 방 안에 여전히 진하게 서린 채 한참 가셔지지를 않았다. 

 연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푸시씨는 다시 기분이 나아졌다. 연기가 사라지는 것과 정도를 같이 해서 거울 위에 적힌 숫자도 점점 흐릿하게 바래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연기와 숫자가 완전히 꺼져 버리자 회색 방문객에 대한 기억도 푸시씨의 머리 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방문객에 대한 기억은 지워졌지만 결론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 결론을 그는 이제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훗날 언젠가는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 이제부터 시간을 절약하겠다는 결심이 갈퀴 달린 침(針)처럼 그의 가슴 속에 꽉 박혀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 날의 첫 손님이 왔다. 푸시씨는 무뚝뚝하게 서비스를 했다. 일체의 필요 이상의 서비스를 생략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까 과연 반시간 걸리던 일이 이십분만에 끝났다. 

 이제부터 그는 그런 식으로 모든 손님을 대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는 일에서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미를 느낀다는 것도 이제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도제(徒弟) 외에도 두 사람의 조수를 더 고용하고는 일초도 낭비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감시했다. 하나 하나의 손놀림이 엄밀한 시간표에 의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푸시씨의 이발소 안에는 이제 다음과 같은 표어가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절약된 시간은 갑절의 시간이다! 

 다리아양에게 그는, 이제 시간이 없어서 유감스럽게도 방문을 하지 못하겠노라고 짧고 맹숭맹숭한 편지를 썼다. 앵무새는 동물 매매소에 팔아넘겼다. 그의 어머니는 값이 싼 괜찮은 양로원에 떠맡기고 한달에 한번 방문을 했다. 그리고 그 밖에도 회색 사나이의 모든 충고를 좇았다. 실상 이제 그는 그 충고를 자기 자신이 내린 결론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안정을 잃었다. 실상 한가지 알 수 없는 노릇은 그가 저축한 모든 시간은 과연 조금도 남아 있는 적이 없었다. 그 시간은 수수께끼처럼 그냥 사라져 버려 흔적조차 없었다. 그의 하루 하루는 처음엔 느낄 수 없이, 나중엔 명백히 느낄 수 있게 점점 짧아져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일 주일이 지났고 한 달, 한 해가 지났고, 다시금 또 한 해, 또 한 해가 흘러갔다. 

 이제 그는 회색 사나이가 방문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렸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시간이 대체 어디로 가고 없는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심각해게 생각해 봄 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시간 절약가들처럼 그 역시 별로 이 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 상태는 마치 신들린듯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자기의 시간이 점점 빨리 가속적(加速的)으로 질주한다는 것을 깜짝 놀라 깨닫게 되면 그는 더욱 이를 악물고 시간을 절약할 뿐이었다. 


 대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새 푸시씨와 같은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날마다, 이른바 '시간 절약'을 시작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 갔다. 이렇게 시간 절약가의 수가 늘면 늘수록 뒤따르는 사람의 수효도 늘어갔다. 애당초 시간 절약을 원치 않던 사람들까지도 뒤따라 어울리는 수 밖에 딴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매일처럼 라디오와 텔레비젼, 신문에서는, 언젠가는 인간에게 '제대로의' 삶을 위한 여가를 선사할 각종 새로운 시간 절약 제도의 이점(利點)이 선전되고 해설되었다. 건물의 벽과 광고 기둥마다 행복의 온갖 가능성이 그려진 플래카드가 붙여졌고 플래카드 밑에는 번쩍이는 글자로 이런 문귀가 쓰여 있었다. 


      날로 향상되는 시간 절약! 

     또는, 시간 절약은 미래의 재산! 

   또는, 더 많이 사는 길――시간을 아낍시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시간절약가들은 옛 원형극장 근처에 사는 마을 사람들보다 훨씬 잘 입고 있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따라서 더 많은 지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불쾌하고 피곤한, 또는 불평 투성이의 얼굴에다 불친절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아무튼 모모한테 가 보게!"하는 말투를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에 열심히 귀 기울여 줌으로써 말하는 이에게 신통한 묘안(妙案)과, 화해의 마음, 심지어 기쁨을 안겨다 주는, 모모같은 대상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설사 거기에 그런 대상이 있었다 한들, 그들이 그 대상을 찾아 갔을는지의 여부도 지극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용건이 단 이분 안에 처리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시간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 스스로 여가라고 여기는 시간까지도, 십분 활용되고, 최대한의 속도로, 가능한 한 많은 쾌락과 긴장 해소(緊張解消)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제대로의 축제를 즐길 수가 없게 되었다. 유쾌한 축제도, 엄숙한 축제도, 몽상이란 그들에게는 사뭇 범죄시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적(靜寂)을 가장 견디지 못했다. 정적 가운데 있으면 불안이 덮쳐 오기 때문이었다. 자기네의 삶이 진실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예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적의 위협을 느끼면 항상 소음(騷音)을 내었다. 하지만 이 소음은 물론 어린이 놀이터에서와 같은 유쾌한 소음이 아니었고, 날로 대도시를 더욱 떠들썩하게 메우는 불쾌하고 광란스러운 소음이었다. 

 맡은 바 일에 기꺼운 마음으로, 또는 사랑을 갖고 임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반대로 그런 마음은 억제되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단 한가지, 최소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큰 공장과 사무실의 현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귀가 쓰인 팻말이 걸려 있었다. 


    시간은 값비싼 것――시간을 잃지 말자! 

  또는, 시간은 황금(과 같은 것)――시간을 아끼자! 


 비슷한 팻말들이 사원(社員)의 작은 책상 위에도, 지배인의 안락의자 위에도, 의사의 진찰실 위에도, 상점, 음식점, 백화점, 심지어는 학교와 유치원에까지도 걸려 있었다. 이 자장(磁場) 바깥의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도시의 겉 모습도 점점 달라져 갔다. 낡은 구역은 철거되었고, 실용성(實用性)이 없는 일체의 것이 배제된 신식 건물들이 세워졌다. 그 집 안에서 살 사람들에게 각기 어울리는 집을 짓는 수고를 사람들은 아꼈다. 그러자면 온통 다른 형태의 집을 지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모든 집을 똑 같이 지으면, 훨씬 값싸고, 무엇보다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대도시의 북쪽으로는 벌써 엄청나게 큰 새 주택구가 퍼져 나갔다. 거기에는 너무나 똑 같아서 구별할 수 없는 고층 아파트들이 병영(兵營)처럼 끝없이 줄지어 세워졌다. 이렇듯 똑 같은 집들 사이에 난 도로들은 당연히 똑 같은 형태를 이룰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단조로운 도로들이 부쩍부쩍 늘어났고 어느덧 일직선으로 지평선에까지 뻗쳐 있었다. 그것은 질서의 황무지였다! 그리고 여기에 사는 인간의 삶의 형태도 이와 똑같이 흘러 갔다―일직선으로 지평선까지! 여기서는 모든 것이 매 센티미터마다, 매 순간마다 엄밀하게 계산되고 계획되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절약함으로써, 결국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것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삶이 점점 빈약해지고, 단조로와지며, 차가와져 간다는 것을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분명히 느끼고 있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어린이를 위한 시간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삶인 것이다. 그리고 삶은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면 할수록, 점점 시간은 없어지는 것이었다. 



7  친구들을 방문하는 모모, 적(敵)의 방문을 받는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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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모르겠어"라고 어느날 모모가 말했다. "우리 정든 친구들이 이제 점점 뜸하게 나를 찾아 오는 것같이 느껴져. 참 많은 친구를 퍽 오랫동안 못 봤어."

 여행안내원 지지와 도로청소부 베포가 풀 덮인 폐허의 돌계단 위 모모의 곁에 앉아서 낙조(落照)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지지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나도 똑 같은 느낌이야.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져. 옛날 같지가 않아. 어쨌든 무슨 일인가 생겼어."

 "그게 무슨 일일까?" 모모가 물었다.

 지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겨 낡은 석판 위에 자기가 끄적여 놓았던 무슨 글자를 침으로 지웠다. 이 석판은 베포 노인이 몇 주일 전에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모모한테 가져다 준 것이었다. 물론 새 것은 아니었고 한가운데 커다랗게 금이 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훌륭하게 쓸 수가 있었다. 그 후로 지지는 매일 같이 여러가지 글자를 쓰는 방법을 모모에게 가르쳐 주었다. 모모는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꽤 많은 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쓰기만은 아직 완전히 할 수 없었다. 

 

 모모의 질문에 대해 생각에 잠겼던 베포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게 사실이야. 점점 가까이 다가 오고 있어. 도시 안에는 벌써 완전히 번져 있어. 나한테는 벌써 오래 전에 눈에 뜨인 일이야." 

 "대체 무언데요?" 모모가 물었다. 

 베포는 한참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은 것이 아니야." 

 그리고 다시금 한참 뒤에 덧붙였다. "추워지고 있어." 

 "또 무슨 얘기라구!" 지지는 걱정 말라는듯이 모모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점점 더 많은 어린애들이 여기로 오고 있잖아요." 

 "그래, 그래서 말이야." 베포가 말했다. "그것 때문에 말야." 

 "무슨 뜻이에요?" 모모가 말했다. 

 베포는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어린애들은 우리를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야. 그 애들은 보금자리를 찾고 있을 뿐이야." 

 세 사람 모두,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 오늘 오후에 새로 생각해 낸 공놀이를 하던, 원형극장 한복판의 둥그런 풀밭을 내려다 보았다. 

 그 중에는 모모의 옛 친구도 몇 섞여 있었다. 파올로라는 이름의 안경 쓴 소년, 꼬마 계집아이 동생 데데를 데리고 오는 소녀 마리아, 마시모라는 이름을 가진 소프라노 음성의 뚱보 소년, 그리고 언제 봐도 개구장이같은 프랑코라고 불리는 또 다른 소년. 하지만 그들외에도 불과 며칠 전부터 어울리기 시작한 다른 어린이들이 여럿 있었고, 오늘 오후에 처음 온 꼬마 소년이 하나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은 사실 지지가 말한대로였다. 하루 하루 어린이들은 불어났다. 

 근본적으로 모모는 이 사실을 기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린이들의 대부분은 쉽게 놀 줄을 몰랐다. 아이들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지루하게 주저앉아서 모모와 모모의 친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때로는 일부러 모모와 친구들을 훼방하며 모든 걸 망쳐 놓았다. 말다툼을 하고 때리고 싸우는 일이 이젠 적지 않게 벌어졌다. 물론 싸움이 오래 가진 않았다. 모모의 존재가 이 아이들에게도 역시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곧 스스로 좋은 마음을 갖게 되고 신이 나서 어울려 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거의 매일, 새 어린이들이 오는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먼 도시의 다른 동네에서도 왔다. 그래서 끊임없이 똑 같은 사태가 반복될 수 밖에 없었다. 뻔한 일이지만, 한 사람의 훼방군이 다른 전체의 어린이들의 놀이를 온통 망쳐 놓기가 일쑤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모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또 있었다. 그것 역시 최근에 시작된 현상으로서, 어린이들이 각종 장난감을 들고 오는 일이 점점 잦아져 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실제로 잘 갖고 놀 수 없는 장난감들이었다. 이를테면 원거리 조종 탱크같은 것…….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 쓸모 없는 물건이었다. 또는 막대기에 붙어 윙윙대며 회전하는 우주선같은 것……. 하지만 그 뿐 다른 데는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또는 번득이며 이리저리 굴리는 눈알과 회전식 머리를 가진 미니 로보트, 하지만 그것 역시 다른 데는 아무 데도 소용없는 물건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모모의 친구들은―모모 자신도―도저히 가져 볼 수 없는 값비싼 장난감들이 있었다. 특히 그런 장난감들은 너무나 완벽하게, 작은 부분까지 정밀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그걸 갖고 노는 어린이가 거기에 대고 상상력같은 걸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몇 시간이고 우두커니 앉아 넋을 잃고, 그러면서도 역시 지루하게, 털털거리거나, 이리저리 굴러가거나, 빙빙 돌아가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무슨 묘안(妙案)이 떠오르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결국 두 세개의 상자, 찢어진 행주조각 하나, 두꺼비집, 또는 한 줌의 모래만 있으면 충분한, 옛날에 하던 놀이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이 놀이에서는 모든 것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오늘 저녁에도 무언가가 놀이를 제대로 할 수 없게끔 방해한 모양이었다. 어린이들은 하나씩 둘씩 뿔뿔이 빠져 나오더니 마침내 모두가 지지, 베포, 모모를 둘러싸고 앉았다. 그들은 지지가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하고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즉, 오늘 처음 나타난 어린 소년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꼬마는 다른 사람들과 좀 떨어진 곳에 앉아서 라디오를 한껏 틀어 놓고 있었다. 그것도 광고 방송이었다. 

 "그 떠벌이 상자를 좀 작게 틀 수 없겠니?" 프랑코라고 불리는 개구장이 소년이 얼러대는 투로 말했다. 

 "너를 이해할 수가 없구나." 낯선 소년은 심술궂게 웃으며 말했다. "내 라디오는 이렇게 큰 소리가 나" 

 "당장 소리를 낮춰!" 프랑코는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낯선 소년은 약간 핼쑥해졌다. 그러면서도 뻣뻣하게 되받았다. "너는 나한테 말을 할 자격이 없어, 어느 누구도. 난 내 마음대로 내 라디오를 크게 틀 수 있는 거야 ." 

 "그래, 그 애 말이 맞다." 베포 노인이 말했다. "우린 그 애한테 그걸 못하게 할 수가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껏 양해를 구하는 거야." 

 프랑코는 다시 주저앉았다. 

 "저 녀석이 꺼져야 해요." 그는 식식거리며 말했다. "오늘 오후 내내 우리가 노는 걸 온통 잡쳐 놨어요." 

 "그 애가 그러는 데는 까닭이 있을거다." 베포 노인은 조그마한 안경 너머로 소년을 다정하고 주의깊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분명코 이유가 있을 거다." 

 낯선 소년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후 소년은 라디오의 볼륨을 낮추고 딴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모가 소년에게 다가 가서 그 옆에 말없이 앉았다. 소년은 라디오를 껐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얘기 하나 해 주세요, 지지." 새로 온 어린이 중의 한 아이가 말했다. "아, 그래요, 얘기해 주세요." 다른 어린이들도 소리쳤다. "재미있는 얘기로요!―아니, 흥미진진한 걸로요!―아니, 동화를 해 주세요!―모험 이야기를요!" 

 하지만 지지는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오히려 너희들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는 이윽고 말했다. "너희들에 관해서, 너희들 집에 관해서, 너희들이 무엇을 하고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어린이들은 말이 없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갑자기 슬프고 서먹서먹해졌다. 

 "우리 집에는 지금 아주 근사한 자동차가 있어요." 마침내 한 아이가 입을 떼었다. "토요일 날, 엄마랑 아빠가 시간이 있으면 자동차를 씻어요. 우리가 착하게 굴면 그 일을 도울 수가 있어요. 나중에 나도 그런 자동차를 갖고 싶어요." 

 "나는요," 조그만 소녀가 말했다. "이제 매일처럼 내가 가고 싶으면 극장에 갈 수가 있어요. 유감스럽게도 엄마 아빠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극장 보내는 걸로 나를 돌보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잠시 후 소녀는 덧붙였다. "나는 그렇게 보호 감독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극장에 가지 않고 몰래 여기에 와서, 돈을 모아요. 돈이 넉넉히 생기면 차표를 사서 일곱 난장이가 있는 데로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넌 참 바보구나!" 한 어린이가 말했다. "일곱 난장이란 없어." 

 "있어!" 꼬맹이 소녀는 맞서며 말했다. "여행 안내 광고에서도 봤는걸." 

 "나는요, 벌써 동화 레코드판을 열 한장이나 갖고 있어요." 한 어린 소년이 말했다. "그걸 나는 듣고 싶을 때마다 들을 수가 있어요. 전에는 아버지가 일이 끝나고 돌아 오면 저녁마다 직접 얘기를 해 주었는데요. 그 얘기는 참 재미있었어요. 그렇지만 이젠 저녁 때 아버지가 있는 적이 없어요. 아니면 피곤하든지, 얘기할 기분이 안난대요." 

 "그럼 너희 엄마는?" 마리아라는 소녀가 물었다. 

 "엄마도 이젠 늘상 하루 종일 없어." 

 "그래"하고 마리아가 말했다. "우리 집도 꼭 그래요.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나한텐 데데가 있어요." 소녀는 무릎에 앉아 있는 꼬마 동생에게 뽀뽀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 돌아 오면 나는 우리가 먹을 음식을 데워요. 그리고 숙제를 해요. 그리고 나선……,"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그리고는 이렇게 뛰고 놀아요. 밤이 될 때까지. 대개는 여기로 오지요." 

 모든 어린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같은 형편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아주 만족이에요." 프랑코가 말했다. 하지만 결코 만족스런 기색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나한테 쓸 시간이 없는 게 말이에요. 안 그러면 엄마 아빠는 싸우기나 할 테고, 그리고 나면 나는 매를 맞아요." 

 그 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진 소년이 불쑥 이쪽으로 향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전보다 훨씬 많은 용돈을 받아요!" 

 "맞았어!" 프랑코가 대답했다. "어른들은 그래. 그걸로 우리를 떼어 놓으려고 해! 어른들은 우리를 이제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어른들은 자기네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예요. 도대체 아무 것도 좋아하는 게 없어요. 제 생각엔 그래요." 

 "그건 맞지 않아!" 낯선 소년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굉장히 좋아해. 다만 시간이 없는 데 대해 어쩔 수가 없는 거야. 그런거예요. 그래서 엄마 아빠는 이렇게 나한테 트랜지스터 라디오까지 사 주신거예요. 이건 굉장히 비싸요. 아무튼 이건 하나의 증거가 되지요. 아닐까요?"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그 때 오후 내내 훼방군이었던 그 소년이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다. 소년은 울음을 참으려고 애쓰며 더러운 두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소년의 뺨의 더러운 얼룩 위로 투명한 줄기를 그리며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다른 어린이들은 동정어린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거나 땅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아이들은 소년을 이제 이해하고 있었다. 애당초 모두가 소년과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팽개침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 베포 노인은 잠시 후 다시 한번 말했다. "추워지고 있어." 

 "이제 곧 나는 다시는 여기 오지 못할지 몰라." 안경을 쓴 소년 파올로가 말했다. 

 "왜 못 온단 말이니?" 모모가 놀라 물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파올로가 설명했다. "아저씨들은 게으름뱅이이고 건달이라고 말했어요. 빈둥빈둥 세월을 보낸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그 모양 그 꼴이 됐다고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이 점점 시간이 없어진다고 말해요. 그리고 날더러 이제는 여기에 가지 말래요. 안 그러면 나도 아저씨들처럼 된대요." 

 그러자, 그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어린이들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지는 어린이들을 하나씩 차례로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니? 그렇다면 왜 우리한테 오니?"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프랑코가 말했다. "나도 그런걸요. 나도 크면 별 수 없이 도로 청소부밖에 안 될거라고 아빠는 늘 말하는걸요. 나는 아저씨들 편이에요." 

 "아, 그래?" 지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그러니까 우리를 건달로 여기는구나?" 

 어린이들은 당황해서 시선을 떨구었다. 마침내 파올로가 뭘 캐내려는듯이 베포 노인을 똑 바로 쳐다 보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아무튼 거짓말은 안해요." 소년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더욱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그럼 아저씨들은 건달이 아닌가요?" 

 그러자 청소부는 별로 크지도 않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는 세 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올리고 말했다. "나는 지금껏 결코, 내 평생에 한번도, 사랑하는 하느님이나 다른 사람의 시간을 한 순간이라도 훔쳐온 적이 없어. 하느님께 맹세코!" 

 "나도 그래!" 모모가 덧붙였다. 

 "나도!" 지지가 엄숙하게 말했다. 

 어린이들은 깊은 감동을 받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어느 누구도 세 친구의 맹세를 의심치 않았다. 

 "아무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지지가 말을 이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즐겨 모모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내가 말하는 걸 너희들이 이해할는지 모르겠다만,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했던 거야. 그렇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러기를 꺼리고 있어. 전에는 또 사람들이 늘 내 이야기를 들으러 기꺼이 왔었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 버렸지. 이제는 그러기도 모두가 꺼리고 있어. 그런 일을 할 시간이 없어졌어. 알아 듣겠니? 참 이상스러운 일이야. 무엇 때문에 그들이 시간이 없는지!" 

 그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최근에 시내에서 옛날부터 아는 이를 한 사람 만났어. 이발사야. 푸시라는 이름이지. 한동안 못 만나긴 했지만, 정말 얼른 알아 볼 수가 없었어. 그 사람이 그렇게 달라져 버리다니! 신경질을 부리고 무뚝뚝하고, 기쁨을 잃은 모습이었어. 전에는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노래도 잘 부르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아주 독특한 자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한텐 그런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이 없어졌어. 그 사람은 다만 자기 자신의 껍질일 뿐, 이미 원래의 푸시씨는 전혀 아니었어. 알겠니? 그런 사람이 그 사람 하나라면 나는 그저, 그가 약간 돌았거니 생각하겠어. 그렇지만 어딜 가도 그런 사람 천지가 되었어. 점점 숫자가 늘고 있어. 이젠 심지어 우리의 친구들까지 그렇게 되기 시작했어! 나는 이제 정말 전염성 있는 정신병이 도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 

 베포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어. 분명코 그건 일종의 전염이야." 

 "그렇다면," 모모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우리 친구들을 어쨌든 도와야겠네요!" 

 이날 밤 그들은 함께 오랫동안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언가를 상의했다. 하지만 회색 도당과 그들의 쉴새없는 활동에 대해서는 그들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뒤 며칠 동안 모모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서 옛 친구들이 자기에게 오지 않는지 알아 보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 나섰다. 

 맨 먼저 미장이 니콜라를 찾아 갔다. 모모는 니콜라가 살고 있는, 지붕 밑 조그만 방이 있는 집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집에 없었다. 다만 그 집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로는 니콜라는 도시 반대편 쪽의 대규모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돈을 잔뜩 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어쩌다가 집에 들어 오며, 그것도 대개는 아주 늦게 돌아 온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이제 그가 취하지 않은 때가 드물고, 그래서 도대체 그를 수월하게 대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였다. 

 모모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그의 방문 앞 계단에 앉았다. 점점 어두워졌고, 모모는 깜빡 잠이 들었다. 

 모모가 쿵쾅거리는 발걸음과 거친 노래 소리에 잠이 깨었을 때는 벌써 밤이 깊었음에 틀림 없었다. 계단을 비틀거리며 올라 오는 사람은 니콜라였다. 그는 꼬마 모모를 보자 당황한듯 우뚝 섰다. 

 "어이, 모모!" 그가 크게 외쳤다. 그를 바라보는 모모의 시선이 그를 당황하게 했음이 분명했다. "아직 살아 있었군!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어?"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모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이, 어쩌자고 이러고 있지!" 니콜라는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옛 친구 니콜라를 보러 이렇게 밤늦게 찾아 오다니. 정말 참 오랫동안 너를 못 찾아 간 것 같구나. 그렇지만 사실 시간이 없었어. 그런……개인적인 일에 신경 쓸……." 

 그는 수선스럽게 손짓을 하며 모모 옆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생겼느냐는 거지, 꼬마야! 전 같지가 않아. 시대가 변하고 있어. 내가 지금 일하는 저편에서는 딴판의 속도로 움직여 가고 있어. 정신 차릴 수 없는 템포야. 매일처럼 우리는 온통 한층의 집을 쌓아 올려. 한층씩 한층씩……. 정말,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 모든 일이 조직화(組織化)되었어. 손 놀림 하나 하나가 마지막까지……, 알겠니?" 

 그는 계속 떠들었고, 모모는 주의깊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모모가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의 얘기의 열기도 점점 식어갔다.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고 못이 박힌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온통 부질없는 소리야." 그는 갑자기 슬픈 어조로 말했다. "너도 보다시피, 모모, 또 이렇게 진창 마셨어. 나도 알아. 나는 이제 너무 자주 마셔. 안 그러고는 거기서 하는 일을 견딜 수가 없어. 정직한 미장이한테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야. 모르타르를 모래에 너무 많이 섞어, 알겠니? 그렇게 하면 사 오년이나 지탱할까, 그 다음엔 기침만 해도 무너질꺼야. 온통 사기(詐欺)야. 치사스러운 속임수야! 거기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어. 가장 기차게 한심한 건, 우리가 짓고 있는 건물들이야. 그건 도대체 집이 아니야. 그건, 그건 말이야, 사람들을 쑤셔넣는 높다란 창고야! 거기선 오장육부가 뒤집혀! 하지만 그 모든 게 나완 무슨 상관이 있겠어? 나는 거기서 돈을 벌고 그걸로 그만이야. 아무튼 시대는 변하고 있어. 전에는 내게 일이란 전혀 다른 거였는데. 남이 봐 줄 수 있는 뭔가를 지으면서, 그런 나의 일에 대해 긍지를 가질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 언제고 돈만 충분히 벌면 이 직업을 때려 치우고 딴 일을 하겠어." 

 그는 풀이 죽어서 앞을 침울하게 응시했다. 모모는 아무 말없이 오로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니콜라는 한참 후 말을 이었다. "정말 너한테 한번 가서 모든 걸 털어 놨어야 했나 봐. 그래 정말 그랬어야 했어. 우리 내일 얘기 하자, 응? 아니면 모레가 더 좋을까? 자, 어떻게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사정을 봐야겠어. 그렇지만 가긴 꼭 갈거야. 그럼 약속했지?" 

 "약속했어요." 모모는 대답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졌다. 두 사람 다 지독히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니콜라는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도대체 나타나지를 않았다. 아마도 정말 다시는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다음 번으로 모모는 주막집 주인 니노와 그의 뚱뚱보 아내를 찾아 갔다. 비바람으로 얼룩진 회벽(灰壁)의 낡고 작은 그의 집은 도시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 앞에는 포도 덩굴로 뒤덮인 정자(亭子)가 있었다. 전에도 늘 그랬듯이 모모는 마당 뒤로 돌아 부엌 문으로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니노와 그의 아내 릴리아나가 거칠게 말을 주고 받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다. 릴리아나는 부뚜막에서 프라이팬과 남비를 다루고 있었다. 그녀의 뚱뚱한 얼굴이 땀으로 번득였다. 니노는 몸짓을 하면서 아내에게 뭐라고 열심히 말을 건네고 있었다. 구석에는 갓난아기 둘이 바구니 속에 앉아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모모는 살그머니 꼬마 옆에 앉았다. 그리고 꼬마를 무릎에 앉히고 살랑살랑 흔들어 달래었다. 두 사람은 입씨름을 중단하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모모, 너였구나." 니노는 말하며 언뜻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갑다, 너를 다시 보게 되어서." 

 "뭐 먹고 싶으냐?" 릴리아나가 약간 부루퉁하니 물었다. 

 모모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로 왔니?" 니노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실은 지금 우리는 너하고 어울릴 시간이 없어." 

 "저는 그냥……," 모모가 나직이 대답했다. "왜 아저씨 아줌마가 그토록 오래 저한테 오지 않는지를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도 모르겠어!" 니노는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실은 지금 우리한테 다른 걱정거리가 있어." 

 "그래." 릴리아나가 큰 소리로 말하며 남비를 덜그럭거렸다. "저 이는 지금 전혀 다른 고민거리를 갖고 있어! 이를테면, 어떻게 해서 늙은 단골 손님들을 몰아내 버리나, 그것이 지금의 저 이의 심통(心痛)거리야! 모모, 전에 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노인들 생각나니? 저 이가 그 사람들을 쫓아내 버렸어! 몰아 내던져 버렸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니노가 변명했다. "나는 아주 정중하게 다른 술집을 찾아 보시라고 간청했을 뿐이야. 술집 주인으로서 나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어." 

 "권리, 권리라구요!" 릴리아나가 노기등등해서 되물었다. "그런 일은 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비인간적이고 비열해요. 그 사람들이 다른 술집을 찾이 못하리라는 걸 당신도 번연히 알잖아요. 그 사람들이 우리 집 일을 방해한 건 하나도 없잖아요!" 

 "물론 그 자들이 누구를 방해한 거야 없지!" 니노가 소리쳤다. "말하자면 그 텁석부리 늙은 영감장이들은 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돈 잘 쓰는 착실한 고객이 우리 집에 못 오게 하는 역할을 했으니까. 그런 몰골이 손님들 기분에 들 줄 알아? 저녁 내내 앉아 있으면서 한 사람이 한 잔씩 밖에 안 마시는 제일 싸구려 포도주만 갖고는, 우리는 돈을 벌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는 우리는 도대체 아무 것도 될 수 없단 말이야." 

 "우리는 지금까지 아주 잘 꾸려 나왔잖아요." 릴리아나가 되받았다. 

 "지금까지야 그랬지!" 니노가 거칠게 되받았다. "하지만 당신도 잘 알다시피 앞으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어. 집 주인이 집세를 올렸어. 이제부턴 전보다 삼분의 일을 더 물어야 해. 모든 물가가 뛰고 있어. 우리 가게를 가난한 수다장이 영감 수용소로 만들어 버린다면 나는 어디서 돈을 벌겠어? 무엇 때문에 나만 다른 사람을 보살펴 줘야해? 아무도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데." 

 뚱보 릴리아나는 탕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프라이팬을 부뚜막에 얹어 놓았다. 

 "그렇다면 나도 말할 게 있어요." 그녀는 두 팔을 굵은 허리에 얹고 버텨 서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말한대로 그 늙고 가난한 수다장이 중에는, 이를테면 나의 아저씨 에토레도 끼어 있었어요! 당신이 우리 집안을 모욕하는 걸 난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의 그 잘난 돈 잘 쓰는 고객만큼 돈은 없어도, 아저씨는 선량하고 진실된 남자예요." 

 "에토레 아저씨야 얼마든지 다시 올 수 있잖아!" 니노는 큰 몸짓을 하며 대답했다. "나는 아저씨한테, 아저씨야 계시고 싶으신대로 계셔도 좋다고 말했어. 그렇지만 아저씨가 안 있으려고 했어."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아저씨의 노인 친구들 없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저씨가 저 쪽 바깥 구석에 혼자서 옹크리고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니노가 고함을 쳤다. "어쨌든 나는 초라한 주막집 주인으로 내 평생을 끝마칠 생각은 없어. 당신 아저씨 에토레를 생각해 주느라고 말야! 나는 내 평생에 뭔가 이뤄 놓고 싶어! 이게 무슨 죄가 될까? 나는 이 가게를 번창시키겠어! 내 술집을 크게 키우겠어! 내가 그러자는 건 꼭 나 때문만은 아니야. 그건 역시 당신과 우리 아이 때문이기도 해. 그래도 도저히 못 알아듣겠어, 릴리아나?" 

 "못 알아 듣겠어요." 릴리아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렇게 냉혹해야만 되는 거라면, 그리고 벌써 그럴 결심이 섰다면 나는 빼고 하세요! 그럼 난 언제고 훌쩍 도망가겠어요. 맘대로 하세요!" 

 그리고 그녀는, 그 동아에 다시 울기 시작한 갓난아이를 모모의 팔에서 받아 안고 부엌에서 뛰쳐 나갔다. 

 한참 동안 니노는 말이 없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만지작거렸다. 

 모모는 그를 바라보았다. 

 "음, 하긴," 그는 이윽고 입을 떼었다. "그들은 참 좋은 영감님들이었어. 나 역시 그 노인들을 참 좋아했지. 이 봐, 모모. 정말 나로서도 참 마음이 언짢아, 내가……,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니? 시대가 막 변하고 있어." 

 "어쩌면 릴리아나가 옳을거야." 그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 노인네들이 오지 않고부터는 나한테도 내 술집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 춥게 느껴져, 알겠니? 나 자신도 그걸 견딜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그렇지만 요즘엔 누구나가 다 그러는 걸. 뭣 땜에 나 혼자만 다르게 살겠어? 아니, 나 혼자만이라도 달리 살아야 할까?" 

 모모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니노는 모모를 바라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소를 지었다. 

 "와 주어서 반갑다." 니노가 말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생기면 '하여튼 모모한테 가 보게!'하고 늘 얘기했었는데, 그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다시 갈께, 릴리아나랑. 모레는 우리 가게가 노는 날이야. 그 때 갈께, 알았니?" 

 "알았어요." 모모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니노는 한 봉지 가득 사과랑 오렌지를 내 주었다. 모모는 집으로 돌아왔다. 

 니노와 뚱뚱보 아내는 과연 찾아 왔다. 갓난 애와 함께, 여러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한 바구니 가득 가지고. 

 "생각해 봐, 모모." 릴리아나가 기쁨에 가득 차서 말했다. "니노가 에토레 아저씨랑 다른 노인네들한테, 한사람 한사람씩 찾아 가서 용서를 빌고, 다시 오시도록 간청을 했어." 

 "그래." 니노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이고는 귓등을 긁적거렸다. "노인네들 모두가 다시 오고 있어. 내 술집이 번창해지지 않을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것이 다시 내 마음에 들어." 

 니노는 크게 웃었다. 아내가 말했다. "우리는 어쨌든 계속 살아갈거예요, 니노". 

 오후가 되면서 날씨가 한결 화창해졌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들은 곧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모모는 옛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다녔다. 그 옛날 상자 판대기로 꼬마 책상과 의자를 짜맞춰 준 목수를 찾아갔다. 그리고 침대를 갖다 준 아줌마들을 찾아갔다. 요컨대, 모모는 모든 사람들, 이전에 그들의 이야기에 모모 자신 귀 기울여 들어 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지혜와 결단과 기쁨을 선사해 주었던 모든 사람들을 찾아 보았다. 모두가 다시 찾아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중의 더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거나,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옛 친구들은 정말로 다시 찾아 왔고, 따라서 사뭇 전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알지도 못하는 새에, 모모는 회색 도당에게 방해물이 되어 있었다. 이런 방해물을 회색 도당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유난히 더운 한나절이었다―모모는 폐허의 돌계단 위에서 인형을 하나 발견했다. 

 제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값비싼 장난감을, 어린아이들이 어쩌다 잊고 버려두고 가는 적은 흔히 있어온 일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이 인형은 어떤 어린이가 갖고 있었는지 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눈에 띄었음 직한 물건이었다. 아주 특이한 인형이기 때문이었다. 

 인형은 사뭇 모모의 크기 만했고, 작은 사람과 혼동할 지경으로 실제 모습과 꼭 같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린이나 갓난애의 모습이 아니라, 멋진 젊은 숙녀나 진열장의 마네킹같은 모습이었다. 짧은 원피스를 입고, 뒷굽이 높은 끈 매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모모는 홀린듯이 인형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손으로 건드리자 인형은 몇 번 눈꺼풀을 껌뻑껌뻑 하고 입을 움직여 말했다. 전화에서 울려 나오듯이 꽥꽥 쇳소리가 나는 음성이었다. "안녕, 나는 비비걸이야, 완전한 인형이야." 

 모모는 깜짝 놀라 흠칫 물러섰다. 하지만 곧 무의식 중에 대답을 했다. "안녕, 나는 모모야." 

 인형은 다시금 입술을 달삭이며 말했다. "나는 네 것이야. 모두가 나 때문에 너를 부러워할거야." 

 "네가 내 것이라고, 나는 생각지 않아." 모모가 말했다. "누군가 너를 여기 잊어 버리고 간 것 같아." 

 모모는 인형을 집어 올렸다. 그러자 인형은 다시 입술을 달삭이며 말했다. "나는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그래?" 모모는 대답하고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어. 내가 가진 물건 중에 네게 맞는 게 있는지. 그렇지만 잠간만 있어 봐. 내 물건을 보여 줄께. 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해 줘." 

 모모는 인형을 안고, 인형과 함께 성벽의 구멍을 비집고 지나 자기 방으로 기어 내려갔다. 그리고 온갖 보물이 든 상자를 침대 밑에서 꺼내어 비비걸 앞에 밀어 놓았다. 

 "여기 있어." 모모가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맘에 드는 게 있으면 얘기만 해." 

 그리고 모모는 인형에게 알록달록한 예쁜 새 깃털과 예쁜 무늬의 조약돌 하나, 금빛 단추 하나, 색유리 한 조각을 보여 주었다. 

 인형이 아무 말도 안 하자 모모는 인형을 쳤다. 

 "안녕." 인형이 꽥꽥거렸다. "나는 비비걸이야. 완전한 인형이야." 

 "그래." 모모가 말했다. "벌써 알고 있어. 하지만 넌 뭔가 고르겠다고 했잖아, 비비걸. 여기 이를테면 참 예쁜 분홍빛 조개껍질이 있어. 마음에 드니?" 

 "나는 네 것이야." 인형이 대답했다. "모두가 나 때문에 너를 부러워할거야." 

 "그래, 그 말도 벌써 했잖니." 모모가 말했다. "내 물건 중에 네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우리 그냥 같이 놀면 어떻겠니?" 

 "나는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인형이 되풀이해 말했다. 

 "이것 말고는 내겐 없어." 모모는 이렇게 말하고 인형을 끌고 다시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거기서 모모는 완전한 인형 비비걸을 땅바닥에 앉히고 그 맞은 편에 자기도 앉았다. 

 "우리 이제, 네가 나를 찾아 온 걸로 하고 소꼽장난하자." 모모가 제안을 했다. 

 "안녕." 인형이 말했다. "나는 비비걸이야. 완전한 인형이야." 

 "찾아 주셔서 반갑군요!" 모모가 대답했다. "어디서 오셨나요, 아가씨?" 

 "나는 네 것이야." 비비걸은 말을 이었다. "모두가 나 때문에 너를 부러워할거야." 

 "자, 이거 봐." 모모가 말했다. "네가 맨날 똑 같은 소리만 하면 소꼽놀이를 할 수 없잖아." 

 "나는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인형은 눈꺼풀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모모는 다른 놀이를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도 안 되자, 또 다른 놀이를 해 봤고, 수 없이 많은 다른 놀이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사실, 인형이 차라리 아무 말도 안했다면, 모모가 인형 대신 대답을 해 줄 수 있었을 테고, 더없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 났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비비걸은 다름 아닌 자기의 반복되는 말로, 모든 대화를 방해했다. 

 얼마 후, 모모는 지금껏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자기로서는 전혀 처음 당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참 걸려서야 그 감정이 지루함(倦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모는 어쩔 줄 모르는 느낌에 빠져 버렸다. 그 완전한 인형을 그냥 내팽개쳐 두고 다른 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 인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모모는 그냥 주저앉은 채 인형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마치 서로 최면에 걸린듯이 인형 편에서도 푸른빛 유리 눈알로 모모를 마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모모는 억지로 인형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모모는 흠칫 놀랐다. 전혀 깨닫지 못하게 기척도 없이, 웬 멋진 잿빛 승용차가 바로 곁에 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안에는 거미줄 빛깔의 양복을 입고 회색 중산모자를 쓴 한 사나이가 작은 회색 시가를 피우고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까지도 잿빛으로 보였다. 

 그 사나이는 필시 한참 전부터 구경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모모를 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고개 인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무척 더운 한낮이었고, 햇볕에 대기가 찌는듯 이글거리고 있었는데도 모모는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이윽고 사나이는 차 문을 열고 내려서 모모에게 다가 왔다. 그의 손에는 납회색의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참 예쁜 인형을 갖고 있구나!" 

 그는 특이한 억양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인형 때문에 네 모든 놀이 친구들이 너를 부러워하겠다." 

 모모는 다만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이 없었다. 

 "확실히 굉장히 비싼 거겠지?" 회색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요." 모모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그냥 주운 거예요." 

 "원 참!" 회색 사나이가 대답했다. 

 "정말 운이 좋았구나." 

 모모는 여전히 말없이, 너무 커서 헐렁한 남자 웃도리를 꼭꼭 여몄다. 추위가 점점 더해 왔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하고 회색 사나이는 엷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넌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구나, 꼬마야." 

 모모는 살그머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갑자기 모든 기쁨이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애당초 기쁨같은 것은 없었던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모모 자신 기쁨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에게 어떤 경고(警告)를 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한참 전부터 너를 열심히 지켜 보고 있었어." 회색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너는 저렇게 값비싼 좋은 인형이랑 노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것 같더구나. 내가 가르쳐 줄까?" 

 모모는 깜짝 놀라 사나이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보다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인형이 느닷없이 꽥꽥거렸다. 

 "자, 이거 봐, 꼬마야." 회색 사나이가 말했다. "인형은 이렇게 혼자서 말까지 하잖니. 이렇게 비싸고 좋은 인형이랑은, 다른 보통 인형하고 노는 것처럼 그냥 놀 수는 없는거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냥 보통으로는 놀 수가 없어. 이 인형이랑 지루하지 않게 놀려면, 인형한테도 뭘 갖다 줘야해. 이거 봐, 꼬마야!" 

 그는 자동차로 가더니 뒤의 짐칸을 열었다. 

 "우선," 그는 말했다. "이 인형은 많은 옷을 필요로 해. 여기, 이를테면 아주 멋드러진 야회복이 있지." 

 그는 야회복을 꺼내 모모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또 진짜 밍크로 된 외투도 있어. 이건 비단 가운, 또 정구복, 스키이복, 또 수영복, 그리고 승마복, 잠옷, 속옷, 또 다른 원피스, 또 하나, 또 다른 것, 또……." 

 그는 모든 옷가지를 모모와 인형 사이로 던졌다. 어느 새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였다. 

 "자," 그는 다시금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걸로 일단 한참 놀 수가 있다. 그렇지, 꼬마야? 그렇지만 그것도 며칠 뒤에는 지루해 질 것 같지 않니? 그래, 그럼 너는 또 인형 몫의 다른 물건을 장만해야 해." 

 그는 다시 짐칸 위로 몸을 굽히더니 물건들을 모모한테 던졌다. 

 "이를테면 여기 진짜 미니 립스틱이랑 분첩이 들어 있는, 뱀 가죽으로 된 정식으로 만든 미니 핸드백이 있어. 여기는 또 미니 카메라, 또 정구채. 이건 진짜로 볼 수 있는 인형 망원경, 여기는 팔찌, 목걸이, 귀걸이, 인형 권총, 비단 스타킹, 깃털 모자, 밀짚 모자, 봄철 모자, 미니 골프채, 미니 수표장, 미니 향수병, 목욕용 파우더, 몸에 뿌리는 향수……." 

 그는 말을 멈추고, 얼이 빠져 버린듯이 온갖 물건과 땅바닥 틈에 끼어 앉아 있는 모모를 탐색하듯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아주 간단해. 이렇게 점점 더 많이 갖고 있어야 해. 그럼 전혀 지루하지를 않아. 혹시, 언젠가는 이 완전한 비비걸이 모든 것을 갖게 되고, 그러면 결국 또 지루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지 않아, 꼬마야. 조금도 걱정할 게 없어. 그래서 여기 또 비비걸에 어울리는 짝이 하나 있어." 

 그리고 그는 짐칸에서 다른 인형을 하나 꺼냈다. 그것은 비비걸과 같은 크기에, 똑 같이 완전한 인형이었는데, 단지 젊은 남자인 점만이 달랐다. 회색 남자는 그 사나이 인형을 완전한 인형, 비비걸 옆에 앉히고는 설명했다. "이건 부비보이야! 이 인형한테도 끝없이 많은 부속물이 있어. 그리고 이 모든 것도 다시 지루해지면 비비걸의 또 하나의 여자 친구가 있어. 이 친구 인형도 꼭 자기한테만 맞는 모든 부속 장비를 갖고 있지. 뿐 아니라 부비보이한테도 짝이 맞는 남자 친구가 있어. 그 친구 역시 수없는 친구, 여자 친구들이 있고……, 알겠지. 결코 지루한 일이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 끝없이 계속 충당이 될 수 있으니까 말야. 네가 갖기를 바라는 건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니까 말야." 

 말을 하면서, 그는 인형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자동차의 짐칸에서 꺼냈다. 그 안에는 물건이 무진장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여전히 꼼짝 않고 앉아서 차라리 겁에 질린듯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모모한테로 몸을 돌렸다. 

 "자," 사나이는 이윽고 입을 떼며 짙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인제 알았니? 이런 인형이랑 노는 법을?" 

 "예." 모모는 이제 추위에 못 이겨 덜덜 떨기 시작했다. 

 회색 사나이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시가를 빨아들였다. 

 "물론 이 예쁜 물건들을 몽땅 갖고 싶겠지? 자 좋다, 꼬마야. 내가 선사를 하지! 전부 가져라. 지금 당장이 아니고, 당연히 하나씩 차례로. 그리고 더 많이, 훨씬 많이. 그것에 대해 네가 뭘 갚을 필요는 하나도 없어. 내가 설명대 준대로 그냥 놀기만 하면 돼. 자, 뭐 할 말이 있니?" 

 회색 사나이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모모에게 미소를 건넸다. 하지만 모모가 아무 말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 보자, 그는 성급하게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너는 친구들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야, 그렇지? 이 예쁜 물건들이 전부 네 것이 되고 언제라도 더 가질 수 있다면, 너는 충분히 심심풀이를 할 수 있게 되겠지, 응? 너도 그랬으면 좋겠지? 이 신기한 인형을 갖고 싶지? 꼭 갖고 싶지, 응?" 

 모모는 어떤 싸움이 자기에게 절박하게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아니, 어느 새 싸움의 한가운데 빠져들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벌어진 싸움인지, 누구를 향한 싸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 낯선 방문객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아까 인형을 대했을 때와 같은 기분에 빠져 들었다. 떠들고 있는 음성만이, 오로지 말만이 들려올 뿐,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모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왜 그러지 응?" 회색 사나이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니? 요새 어린애들은 정말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구나! 이 완전한 인형이 대체 또 뭐가 모자라는지 말해 줄 수 없겠니?" 

 모모는 시선을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 

 "제 생각에는……," 모모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 인형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회색 사나이는 한참 동안 대꾸가 없었다. 그는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정신을 다잡고 냉혹하게 말했다. 

 "그런 건 도대체 문제가 되지 않아." 

 모모가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 사나이는 모모에게 공포를, 특히 그 눈초리에서 뻗어 나오는 차가움으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묘하게도, 왜라고는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로, 그는 모모에게 동정의 마음을 일게 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을," 모모는 말했다. "나는 사랑해요." 

 회색 사나이는 별안간 이빨이라도 쑤시기 시작한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다시 자신을 억제하고 실낱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에는," 그는 곰살궂게 말했다. "우리 한번 정식으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꼬마야, 무엇이 중요한가를 네가 알도록 말이다." 

 그는 회색 수첩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찾아 냈다. "네 이름이 모모지? 응?" 

 모모는 고개를 까딱였다. 회색 사나이는 수첩을 탁 덮더니 주머니에 다시 넣고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모모 옆 땅바닥에 앉았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조그만 회색 시가만을 뿜어대었다. 

 "자, 모모, 내 말 좀 잘 들어 봐라!" 이윽고 그는 입을 떼었다. 

 사실 모모는 지금까지 내내, 귀 기울여 들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이 때까지 모모가 귀 기울여 온 그 어느 누구의 얘기보다도 이 사나이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훨씬 힘들었다. 다른 때는 그야말로 얘기하는 이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낯선 방문객한테서는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가 않는 것이었다. 애를 쓰고 귀를 기울이려 할 때마다, 도대체 거기 아무도 없는 것처럼, 어두운 공허(空虛)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야."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무엇을 성취하느냐, 무엇이 되느냐, 무엇을 갖느냐 하는거야.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 더 출세한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한테는 다른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 오게 마련이야. 친구며, 사랑이며, 명예며, 등등. 너는 그러니까 네 친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우리 한번 냉정하게 그걸 검토해 보자." 

 회색 사나이는 공중에 대고 몇 개의 동그라미를 담배 연기로 뿜어댔다. 모모는 맨발을 치마 밑으로 감추고, 될 수 있는 한 커다란 웃도리 속으로 기어 들었다.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으로," 회색 사나이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네가 있다는 것이, 도대체 너의 친구들한테 무슨 의미가 있니? 친구들한테는 너의 존재가 무슨 쓸모가 있니? 도움이 안돼. 친구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잘 살도록 하는 데 네가 도움이 되니? 분명히 도움이 안돼. 친구들이 시간을 절약하려고 애쓰는 걸, 뒷받침을 해 주니? 그 반대야. 너는 친구들을 모든 일에서 떼어 놓고 훼방꾼 노릇을 하면서 친구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망쳐 놓고 있어! 어쩌면 지금까지 너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랬는지 모르지, 모모 어쨌든 너는, 네가 있는 걸로 네 친구들을 해치고 있어. 그래, 너는 실제로는, 원하지 않는 새에 친구의 적(敵)이 되어 있어! 그리고도 그걸 너는 사랑하는 거라고 말하니?" 

 모모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물을 그런 관점에서 본 적이 모모에게는 지금껏 한번도 없었다. 한 순간, 이 회색 남자가 어쩌면 옳지 않은지 어떤지조차, 모모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네 친구들을 너로부터 보호하려고 하는거야. 네가 진정으로 네 친구를 사랑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을 도와 주렴.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이든 성취하기를 바라고 있어. 우리야말로 그들의 참된 친구인 셈이지. 네가 그들을 중요한 모든 일에서 떼어 놓는 것을 우리는 그냥 가만히 구경만 할 수가 없어. 우리는 네가 그들을 내버려 두도록 배려(配慮)할 참이야. 그래서 너한테 이 예쁜 물건들을 몽땅 선사하는거다." 

 "‘우리’가 누군데요?" 모모는 입술을 덜덜 떨며 물었다. 

 "우리는 시간 저축은행의 사원들이야." 회색 사나이가 대답했다. "나는 외무사원 BLW/553/C호야. 나는 개인적으로 너한테 호의를 갖고 대하는거야. 사실 시간 저축은행은 빈틈이 없어서 어리숙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거던." 

 그 순간, 모모는 문득 베포와 지지가 시간 절약과 전염에 대해 하던 얘기를 상기했다. 

 이 회색 사나이가 그 일과 상관이 있을 것이라는 무서운 예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두 친구가 지금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지금껏 한번도 외로움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모모였다. 하지만 모모는 어쨌든 불안해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온 힘과 용기를 모아, 회색 사나이를 가리고 있는 어둠과 공허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그 사나이는 모모를 곁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모의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사나이는 냉소를 지으며 회색 시가의 꽁초에다 새 시가의 불을 붙였다. 

 "공연히 헛수고 하지 말아." 그는 말했다. "넌 우리와 상대해서 싸울 수가 없어." 

 모모는 풀이 죽었다. "아저씨를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나요?" 모모는 소근거리듯 말했다. 

 회색 사나이는 몸을 구부리며 갑자기 풀이 죽어 어깨를 내려뜨렸다. 그리고 이어서 잿빛 음성으로 대답했다. 

 "너같은 사람은 한번도 대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구나. 정말로 없었어. 사실 나는 굉장히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데 말야. 너같은 사람들이 많다면 우리 시간 은행은 곧 문을 닫고 없어져야 할 판이지……, 뭘 가지고 우리가 더 버틸 수 있겠니?" 

 외무사원은 말을 멈추고 모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꺾을 수 없는 무엇에 맞서 싸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의 얼굴엔 더욱 짙은 잿빛이 드리워졌다. 

 이렇게 그가 다시 입을 떼기 시작했을 때, 그 이야기는 그의 뜻(意志)과 상관없이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그 자신 거기에 아무런 제동을 걸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동시에,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놀란 나머지 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이렇게 하여 모모는 마침내 그의 참된 음성을 들었다. "우리는 알려져서는 안돼." 그의 음성은 멀리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활동을 누구도 알아서는 안돼……. 어느 누구의 기억에도 우리가 남아 있지 않도록 우리는 신경을 쓰고 있어……. 우리가 알려지지 않는 한에서만 우리는 일을 진척시킬 수가 있거든……. 인간의 생애를 시간, 분, 초로 뜯어 빨아 들이는 곤혹스러운 일이지……. 사실 그들이 절약하는 모든 시간은 그들로 보면 잃어 버리는 것이거든……. 우리는 그 시간을 끌어 들이고 있어……. 우리는 그 시간을 저장해……. 우리한텐 그것이 필요해……. 우리는 그것에 굶주려 있어……. 아, 너희들은 몰라, 그것이 뭔지를. 너희들의 시간이라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그걸 알고 있어. 그래서 너희들한테서 철두철미 빨아 들이고 있지……. 우리한텐 그것이 점점 더 필요해……. 더 많이……. 왜냐하면 우리들도 점점 늘어나거던……. 점점 더 많이……점점 더 많이……." 

 이 마지막 한 마디를 회색 사나이는 사뭇 그르렁거리며 뱉어냈다. 하지만 곧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튀어나올 듯한 시선으로 그는 모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마치 마취(痲醉)에서 깨어난듯 정신을 차린 모습이 되었다. 

 "어……, 어찌된 일이었지?" 그는 말을 더듬었다. "네가 내 말을 다 엿들었구나! 내가 병이 들었군! 네가 나를 병들게 했어, 네가!" 

 그리고 나서는 그는 거의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내가 온통 헛소리를 했어. 꼬마야. 잊어 버려라! 너는 나를 잊어야 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잊어 버리듯이! 너도 잊어 버려야 돼! 잊어 버려야 해!" 

 그리고 그는 모모를 움켜쥐고 흔들어 대었다. 모모는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나서 회색 사나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쫓기듯이 사방을 둘러보고 납회색 서류 가방을 꾸려 자동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서 굉장히 괴상한 장면이 벌어졌다. 거꾸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모든 인형이랑 흩어져 있던 온갖 물건들이 사방에서 짐칸으로 날아 들어 가더니 짐칸이 쾅 닫혔다. 그리고 차는 돌멩이들을 튀기며 질주하여 떠나갔다. 

 모모는 그리고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지금껏 들은 이야기를 이해하려 애를 썼다. 서서히 끔찍한 추위가 모모의 골수에서 빠져 나갔고, 그와 비례하여 모든 것이 차차 선명해졌다. 모모는 아무 것도 잊어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모는 회색 사나이의 진짜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모 앞의 메마른 풀밭에서 작은 연기 기둥이 솟아 올랐다. 거기엔 짓눌려진 회색 시가 꽁초가 연기를 내더니 서서히 재(灰)로 변했다. 

 

8  수많은 몽상(夢想)과 몇 안되는 깊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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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오후, 지지와 베포가 왔다. 그들은, 여전히 창백하고 심란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성벽의 그늘에 앉아 있는 모모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모의 곁에 앉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더듬더듬 모모는 겪은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회색 사나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전부 한마디 한마디 되풀이했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베포 노인은 모모를 아주 진지하게 탐색하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의 주름살이 더욱 깊게 파여졌다. 모모가 이야기를 끝내고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반대로 지지는 점점 흥분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이야기를 할 때 격앙(激昻)하면 흔히 그러듯이, 그의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제사, 모모가……"라고 말하며 그는 모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가 일어서야 한다는 경종(警鐘)이 울렸구나! 지금껏 아무도 못 찾아낸 정체를 네가 찾아냈어! 이제 우리는 우리 옛 친구들뿐 아니라, 전 도시를 구하는거야! 우리 셋이, 나, 베포 그리고 너 모모!" 

 그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구세주가 된 자기 앞에서 환호성을 치는 수 많은 군중의 환영(幻影)이 보였다. 

 "그렇다면……"하고 모모가 얼떨떨해서 말했다. "대체 어떻게 일을 할거지?" 

 "무슨 소리야?" 지지는 짜증섞인 말투로 물었다. 

 "내 말은," 모모가 설명했다. "어떻게 우리가 회색 도당을 정복하느냐, 이거야." 

 "아, 그건,"하고 지지가 말했다. "그렇게 구체적인 것까지는 물론 지금으로서는 나도 몰라. 우선 그 방법을 우리가 생각해 내야지.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 내용을 안 지금 우리는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혹시 너 겁을 내고 있는 건 아니니?" 

 모모는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엔 그 자들은 결코 보통 인간들은 아닌 것 같아. 나한테 왔던 그 사람은……, 아무튼 좀 달라 보였어. 게다가 아주 참을 수 없이 추웠어. 그런 사람이 많은 경우엔 분명히 매우 위험할거야. 벌써 무서워." 

 "무슨 소리야!" 지지는 열이 나서 외쳤다. "일은 어쨌건 간단해! 이 회색 도당들은 알려지지 않는 한에서만, 자기네들의 지하작업(地下作業)을 전개할 수 있는거야. 너를 방문한 작자가 자기 입으로 털어놨잖아. 그러니까, 봐! 우리는 다만 그 자들이 알려지도록 노력하면 돼. 그래서, 그 자들을 일단 알게 된 사람들은 기억을 하게 될 테고, 그 자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들을 당장 알아 볼 테니까 말야! 그렇게 되면 그 자들도 도저히 우리를 손아귀에 넣을 수 없게 돼. 우리는 그들에게 난공불락(難攻不落)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모모는 의심쩍다는 투로 물어 보았다. 

 "자명(自明)한 일이야!" 지지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너를 방문한 작자가 그렇게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네 앞에서 줄행랑쳤을 리가 없어. 그 자들은 우리가 무서워 떨고 있어." 

 "그렇지만," 모모가 말했다. "우리가 만일 그 자들을 도저히 찾지 못한다면 그들이 우리 앞에서 완전히 숨어 버릴는지도 모르잖아." 

 "물론 그러기가 십상이지"라고 지지도 동의했다. "그 땐 우리는 그들을 숨어 있는 장소에서 꼬여 내야 해." 

 "어떻게?" 모모가 물었다. "내 생각엔 그 자들은 지독하게 간사하고 꾀가 많은 것 같애." 

 "누워서 떡 먹기야!" 지지는 말하며 웃었다. "우리는 그 자들이 탐내는 먹이로 그들을 잡는거야. 고깃덩이로 쥐를 잡듯이, 시간 도둑은 시간으로 잡는거야. 어쨌건 우리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있으니까! 예컨대, 네가 미끼로 앉아서 그들을 유혹해야 할는지 몰라. 그래서 그자들이 나타나면 나랑 베포가 숨어 있다가 뛰쳐 나와 그 자들을 때려잡는거야." 

 "하지만, 그 자들이 나를 벌써 아는걸"하고 모모는 이의를 제기했다. "내 생각엔 그 사람들이 그런 꼬임에 빠져들 것 같지 않아." 

 "좋아." 지지는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성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또 다른 방법을 쓰기로 하지. 회색 사나이는 하여간 시간 저축은행에 관해 뭐라고 말했지. 그건 무슨 건물이겠지. 그 건물은 시내 어디엔가 있을거야. 그것만 찾아내면 되는거야. 그거야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을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그 건물은 아주 유별난 건물일 테니까 말야. 창문도 없고 섬뜩한 회색 건물, 콘크리트로 된 무지무지하게 큰 금고!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아. 그걸 찾아내면 우리는 안으로 들어 가는거야. 우리 모두 제가끔 두 손에다 묵직한 피스톨을 들고 '당장 훔쳐 간 시간을 내놨!'하고 난 소리치겠어……." 

 "그렇지만 우리한텐 피스톨같은 게 없잖아." 모모가 걱정스럽게 지지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럼 피스톨 없이 그냥 그렇게 하지 뭐." 지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그 자들은 오히려 더 놀랄거야. 우리가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자들은 공포에 질리게 될 텐데 뭐." 

 "어쩌면 이 일에 좀더 우리 편이 많으면 좋을는지 모르겠어." 모모가 말했다. "우리 셋뿐이 아니고. 내 말은, 다른 친구들도 같이 찾아면, 시간 저축은행을 한결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야."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지지가 대꾸했다. "우리의 옛 친구들을 모두 동원하면 될거야. 그리고 요새 매일 오는 많은 어린이들도. 우리 셋이 당장 나가서 눈에 띄는대로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전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들도 다시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고 하고. 우리 모두 내일 오후 세 시 여기서 만나 대집회(大集會)를 엽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당장 길을 나섰다. 모모는 이쪽으로 베포와 지지는 저쪽으로. 

 두 사람이 한참 길을 걸어 왔을 때, 여지껏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베포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 봐, 지지"하고 그는 입을 떼었다. "나는 걱정이 돼." 

 지지는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뭐가요?" 

 베포는 친구를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는 모모를 믿어." 

 "그런데요?" 지지는 의아하게 물었다. 

 "내 말은,"하고 베포가 말을 이었다. "모모가 우리한테 들려준 이야기가 참말이라고 믿는다는거야." 

 "좋아요, 그런데요?" 베포의 의도를 알지 못해 지지는 되물었다. 

 "이 봐." 베포가 설명했다. "모모가 얘기한 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이 일이 정말 무슨 비밀 범죄단체랑 상관된 것이라면, 그런 상대를 놓고 섣불리 싸움을 벌여서는 안된다는 얘기야, 알아 듣겠어? 우리가 별 생각 없이 그 자들을 자극해 놓으면 모모가 곤란한 사정에 빠질 수 있어. 우리들이야 문제의 대상으로 거론하고 싶지 않아. 다만 우리가 어린아이들까지 끌어 들이는 경우, 어쩌면 아이들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될는지 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말 신중히 생각해야 해." 

 "아, 원." 지지는 큰 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아저씨는 항상 걱정이 앞서지요!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하면, 그만큼 더 좋은 거라니까요." 

 "내가 보기에는," 베포는 심각하게 대답했다. "너는 모모가 들려준 이야기가 참말이라는 것을 전혀 믿는 것 같지가 않구나." 

 "대체 참말이라는 게 뭔데요?" 

 지지가 대답했다. "베포 아저씨, 아저씨는 환상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온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이고 우리는 그 이야기 안에서 공연을 하는 거예요. 나도 믿어요, 아저씨. 모모가 들려 준 얘기를 전부 믿어요. 아저씨랑 꼭 같이요!" 

 베포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는지를 몰랐다. 하지만 지지의 대답으로 그의 걱정이 한 치도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헤어졌다. 친구와 어린이들에게 내일의 회합을 전해 주기 위하여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지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베포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날 밤, 지지는 도시의 구세주(救世主)로서의 앞날의 명성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는 연미복 차림의 자기 자신과 베포의 모습, 흰빛 비단옷을 입은 모모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 세 사람 모두에게 황금 훈장이 걸리고 월계관이 씌어졌다. 웅장한 음악이 울렸다. 시(市)에서는 그들의 구세주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인류 사상 유례없는 성대하고 끝없이 긴 불꽃 행렬을 마련했다. 

 같은 시간에 베포 노인은 잠자리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래오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사건 전체의 위험스러움이 더욱 분명해졌다. 물론 그는 지지와 모모만을 파멸로 치닫게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 결과가 어찌 되든간에 자기 역시 같이 갈 것이었다. 하여튼 그는 최소한 그들을 붙들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오후 세시, 원형극장의 옛터는 수많은 어린이의 함성과 재잘거림으로 메아리졌다. 유감스럽게도 옛 친구들 가운데 어른들은 오지 않았다(물론 베포와 지지는 예외였지만). 하지만 가까이서 멀리서 온 어린이들, 가난한 어린이와 부자집 어린이들, 잘 차려 입은 어린이와 남루한 어린이, 그리고 크고 작은 어린이들이 어림잡아 오륙십명 모였다. 그 중에는 마리아 소녀처럼 꼬마 동생을 데리고 온 어린이가 꽤 있었다. 손목에 이끌려 또는 팔에 안겨 따라 온 꼬마 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이 엄청난 모임을 구경하고 있었다. 프랑코, 파올로, 마시모도 물론 거기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 최근에 원형극장에 오기 시작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물론 여기서 벌어지는 일에 비상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왔던 소년도 나타났다― 물론 이번엔 라디오를 가져 오지 않았다. 그 소년은 모모 옆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오늘에사 처음으로 자기 이름이 클라우디오이며 이 일에 같이 낄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마침내 이제는 더 올 사람이 없다고 여겨지자, 여행안내원 지지가 일어서서 커다란 손짓으로 조용히하라고 명령했다. 재잘재잘 주고 받던 소리가 뚝 그쳤다. 돌로 이뤄진 원형의 광장 안에는 기대에 찬 침묵이 번져 나갔다. 

 "사랑하는 친구들!" 지지는 우렁찬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무엇때문에 우리가 모였는지, 너희들 모두 대강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 비밀집회에 초대받을 때 이미 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온갖 수단을 다해 아무리 끝없이 시간을 절약해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한테 점점 시간이 없어져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들어 봐라. 이렇게 절약해 놓은 시간은 정작 사람들한테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거야.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모모가 그걸 찾아냈어! 사람들은 이 시간을 문자 그대로 시간 도둑들한테 도둑맞고 있는 거란다! 이 끔찍한 범죄단체의 활동을 중지시키기 위해, 바로 너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 너희 모두가 기꺼이 협조할 마음만 있으면 사람들한테 덮쳐 온 이 도깨비도 단숨에 일망타진될거야. 이 일을 위해 싸우는 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니?" 

 그가 말을 중단하자 어린이들은 박수를 쳤다. 

 "이 일을 어떻게 착수할까에 대해서는 나중에 의논하겠다." 지지는 말을 이었다. "먼저 그 작자들 중의 한 놈을 어떻게 만났고, 그 놈이 뭐라고 털어 놨는지 모모의 얘기부터 들어 보기 바란다." 

 "잠간"하고 베포 노인이 말하며 일어섰다. "들어 봐라, 얘들아! 나는 모모가 말하는 데 반대야. 그래서는 안돼. 모모가 얘기를 하면, 모모랑 너희 모두가 위험을 처하게 돼……." 

 "그래두요!" 몇 아이들이 소리쳤다. "모모 얘기를 듣겠어요!" 

 다른 아이들도 합세하여 나중엔 전부가 합창을 하며 외쳤다. "모모! 모모! 모모!" 

 베포 노인은 주저 앉아 그의 조그만 안경을 벗고 지친듯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모모는 당황해서 일어섰다. 어느 편의 뜻을 따를지, 베포를 따라야 할지 아이들을 따라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모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잔뜩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모모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 침묵이 흘렀다. 

 모모가 보고를 하는 동안 모두가 조금씩 불안한 기분에 싸였다. 아이들은 시간 도둑을 그렇게까지 무시무시하게 상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웬 꼬마 동생 하나가 울음보를 터뜨렸다가 곧 달래어졌다. 

 "자, 그럼," 지지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너희들 중에 누가 우리랑 함께 이 회색 도당에 대항하여 싸울 용기를 갖고 있니?" 

 "왜 베포 할아버지는 모모가 겪을 일을 얘기하지 못하게 말렸나요?" 프랑코가 물었다. 

 "할아버지 생각은," 지지는 어린이들의 기분을 북돋아 주려는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색 도당들이 자기네 비밀을 간파한 사람을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추적할 것이라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장담해. 그 자들의 비밀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들에 대해 저항력을 갖고 있어서 다시는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 가지 않게 된다고 봐. 그건 분명한 일이야! 그렇지 않아요? 베포 아저씨!" 

 하지만 베포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린이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명백해." 지지는 다시 입을 떼었다. "우리는 지금 좋건 나쁘건 힘을 모아야 해! 우리는 신중해야 하겠지만 겁을 먹어서는 안돼. 그래서 다시 한번 묻는데,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협조하겠니?" 

 "저요!" 클라우디오가 큰 소리로 대답하며 일어섰다. 소년은 약간 창백한 모습이었다. 

 클라우디오의 선창(先唱)에 대해 처음에는 주저하는 빛으로, 그리고는 점차 자신있게 다른 아이들도 뒤따르더니, 마침내는 그곳의 모든 어린이가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자, 베포 아저씨!" 지지는 어린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대해 아저씨는 어쩌시겠어요?" 

 "좋다." 베포 노인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나도 돕구말구." 

 "자," 지지는 다시 어린이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해 보자. 누구 무슨 제안이 없니?"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안경잡이 소년 파올로가 물었다. "그런데 그 자들은 어떤 수를 쓰나요? 내 말은, 대체 어떻게 실제로 시간을 훔칠 수 있나요? 대체 어떻게 하지요?" 

 아무도 그 대답을 몰랐다. 

 원형 돌계단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리아가 꼬마 동생 데데를 팔에 안은 채 일어나서 말했다. "혹시 그건 전자(電子)같은 게 아닐까요? 전자는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기계로 기록할 수 있지요. 텔리비젼에서 나는 본 적이 있어요. 어쨌건 요새는 어떤 일에든지 전문가가 있잖아요."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계집애 목소리를 가진 뚱보 소년 마시모가 소리쳤다. "사진을 찍으면 모든 게 필름에 찍히지요. 그리고 녹음을 하면 모든 게 녹음 테이프에 녹음이 되구요. 어쩌면 그 자들은 시간을 빨아 들이는 기계를 갖고 있을는지 몰라요. 시간이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만 안다면 우리는 그 테이프를 되돌릴 수가 있을 테고 다시 시간을 갖게 될 게 아녜요!" 

 "어쨌든," 파올로가 입을 떼며 코 위의 안경을 치켜올렸다. "우리는 제일 먼저 우리를 도와 줄 과학자를 찾아야 해요. 안 그러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너는 언제든지 과학자만 들먹이더구나!" 프랑코가 외쳤다. "과학자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어! 그 분야에 밝은 과학자를 만났다고 쳐도, 그 사람이 시간 도둑하고 한 패인지 어떻게 알겠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두 손 들고 호랑이굴에 들어 가는 셈이지!" 

 그것은 일리 있는 항의였다. 

 이번엔 눈에 띄게 잘 차려 입은 소녀가 일어 서서 말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어림도 없어요!" 프랑코가 항의를 했다. "경찰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이건 아무튼 보통 도둑들이 아니거든요! 경찰이 벌써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건 경찰이 무력(無力)하다는 얘기가 되고, 경찰이 이 놈들의 소굴에 대해 전혀 깜깜 무소식이라면, 그것 역시 이래저래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되는 거예요! 내 생각엔 그래요." 

 하릴없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어떤 조치이건 우리는 취해야 해요." 파올로가 이윽고 말했다. "우리들이 이렇게 힘을 합치는 낌새를 시간 도둑들이 눈치채기 전에, 되도록 빨리요." 

 이번엔 지지가 일어섰다. 

 "얘들아,"하고 그는 입을 떼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해 곰곰 생각을 해 봤다. 수백가지 계획을 세웠다가는 팽개치고, 결국 한 가지 묘안을 찾아 냈는데, 이 방법이면 틀림없이 목표에 이를 수 있을거야. 너희 모두가 협조해 준다면! 나는 너희들 중에 더 좋은 안(案)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우선 일단 들어 보려고 했을 뿐이야.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얘기하지." 

 그는 말을 멈추고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십명이 넘는 어린이의 얼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청중 앞에 서 보기는 참으로 오랫만이었다. 

 "이 회색 도당의 힘은," 그는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알려지지 않고 몰래 일할 수 있는 데서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그들을 무력(無力)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지름길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들에 관한 진상(眞相)을 알게 하는 거야. 그럼 그걸 어떻게 하면 되겠니? 우리는 대대적인 어린이 시위를 벌이는거야! 플래카드와 포스터를 그려서 그걸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거야.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거야. 그래서 전 도시 사람을 우리가 있는 이 원형극장으로 초대해서 그들에게 진상을 설명해 주는거야. 사람들 사이에 굉장한 법석이 일어나겠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이리로 물밀듯이 몰려 올거야! 이렇게 끝도 없이 많은 사람의 물결이 여기에 모여 들고 나면, 우리는 그 무서운 비밀을 털어 놓는거야!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엔 세계가 단숨에 변해 버리겠지! 이젠 누구한테서도 시간을 훔쳐 갈 수 없게 되겠지. 누구나가 자기가 갖고 싶은 만큼 시간을 갖게 될거야. 이제부터는 시간이 충분히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 일은, 얘들아, 우리가 뜻만 같이 하면 힘을 합쳐 해 낼 수 있는 일이야. 그렇게 하겠니?" 

 떠들썩한 환호성이 대답이었다. 

 "그럼 우리가 전 도시 사람을 다음 일요일 오후 옛 원형극장으로 초대하기로,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결정했음을 확인한다." 지지는 연설을 끝막음했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는 우리의 계획에 대해 엄격히 침묵을 지켜야 해. 알겠니? 자, 그럼 얘들아, 일을 시작하자!" 

 그날과 다음 며칠 동안 폐허의 옛터에서는 비밀리에 열성적인 대공사가 벌어졌다. 종이와 물감이 가득 든 통들, 붓과 아교, 판자와 마분지, 나무 꼬챙이, 그리고 그밖에 필요한 모든 것이 날라져 왔다(어디서 어떻게 날라져 왔는지는 묻지 말기로 하자). 그리고 한쪽에서는 포스터와 플래카드, 푯말을 제작하는 동안, 글을 잘 쓰는 어린이들은 인상적인 문귀를 생각해 내어서 그 위에 보기좋게 그려 넣었다. 

 그것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격문(檄文)이었다. 


- 시간저략? 누구를 위한 거신가? -

? 왜 ? 여러분은 시간이 업나요 ?

우리어린이들이 여러분께 알림니다!

모두들 오십시요 다음 월요일 6시 대집홰 옛 원녕극장으로.


오십시요 옛 원녕극장.

일요일 여섯시


여러분들의 어린이들이 큰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들은 시간을 도둑맞고 있어요 !


주의 !

괭장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시간에<- 관한 일입니다.

그것은 큰 비밀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폭노하겠어요 !


 

 그리고 모든 푯말마다 초대 장소와 시간이 쓰여졌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어린이들은 지지와 베포, 모모를 선두로 하여 줄을 맞춰 섰다. 그리고는 포스터랑 푯말들을 들고 길게 일렬 종대로 서서 도시를 향해 행진했다. 게다가 그들은 양철 뚜껑과 피리로 법석을 떨며 구호(口號)같은 합창을 하며, 지지가 이번 거사를 위해 지어 낸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들으시라, 여러분, 우리의 이야기를,

열두시 오분 전 경종이 울렸거늘.

부디 깨어나 정신차리시라,

여러분의 시간이 도둑맞고 있으니.


들으시라, 여러분, 우리의 이야기를,

이젠 괴로움에서 헤어 나오시기를.

일요일 세시, 오셔서 들으시라,

여러분의 자유를 되찾게 되리니! 


 이 노래는 물론 더 많은 절(節)로 이어져 있었다. 도합 스물 여덟 절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다 모두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몇 번인가 이 행렬이 교통을 방해하자, 경찰이 끼어 들어 어린이들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장소에서 다시 모여 처음부터 시작을 했던 것이다. 그 밖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토록 기를 쓰고 주의를 했는데도, 아무 데서도 회색 도당을 만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행렬을 본 어린이들, 지금껏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전혀 몰랐던 어린이들이, 합세하여 같이 행진을 하였다. 그래서 어린이의 수는 수백, 마침내는 수천에 이르게 되었다. 대도시의 도처에서 어린이들이 거리를 누비며 긴 행진을 하면서, 세상에 변화를 가져다 주리라는 중요한 집회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9  실행되지 않은 좋은 모임, 실행된 좋지 않은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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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시간은 지나갔다. 

 그 시간은 지나갔고, 초대받은 이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바로 이 일에 가장 관련이 깊은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번 행렬에 대해 거의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해는 어느새 지평선에 뉘엿뉘엿 넘어 가며 자줏빛 구름바다 속에서 붉고 커다랗게 떠 있었다. 마지막 햇볕이 몇 시간 전부터 수백명의 어린이가 앉아 기다리고 있는 옛 원형극장의 제일 꼭대기 계단을 아직 비춰 주고 있었다. 웅성대는 소리며 즐거운 재잘거림은 이미 들을 수 없었다. 모두가 말없이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그림자가 순식간에 길어졌다. 곧 어두워질 기세였다. 

 어린이들은 떨기 시작했다. 추워졌기 때문이었다. 멀리 교회 시계탑이 여덟번을 쳤다. 이제, 의문의 여지없이 일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처음 몇 명의 어린이들이 일어서더니 소리 없이 빠져나가 버리자, 다음 몇몇이 뒤따랐다. 아무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실망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마침내 파올로가 모모에게 와서 말했다. "기다려도, 소용 없겠어, 모모. 이제 올 사람은 없어. 잘 자, 모모." 

 그리고 가버렸다. 

 다음엔 프랑코가 모모에게 와서 말했다. "이렇게 된 것, 어떻게 할 수 없지 뭐. 어른들한테 더 이상 기대를 할 필요가 없어. 바로 이번에 본 셈이지. 사실 나는 벌써부터 어른들을 불신(不信)해 왔지만 이제부턴 도대체 어른들하고 상관을 안 하겠어." 

 그리고 프랑코도 갔고 다른 아이들도 소년을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깜깜해지자, 다른 나머지 아이들도 희망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모모와 베포와 지지만이 남았다. 

 얼마 후 도로청소부 노인도 일어섰다. 

 "할아버지도 가세요?" 모모가 물었다. 

 "가야 해." 베포 노인이 대답했다. "특별 근무가 있어." 

 "밤중에요?" 

 "그래, 시간외(時間外) 근무로 쓰레기 하치장에 배치를 받았어. 지금 그리로 가야해."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인데요! 도대체 지금껏 그런 적이 없었잖아요!" 

 "없었지. 그렇지만 지금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받았어. '시간외'라고 말하더군. 안 그러면 일을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래. 인원 부족이라든가, 그런 것 때문이야." 

 "유감이에요." 모모가 말했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여기 계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래, 지금 가야하는 게 나로서도 정말 싫어." 베포가 말했다. "그럼, 내일까지 안녕!" 

 그는 삐꺽대는 자전거에 훌쩍 올라 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지는 나직이 구슬픈 곡조로 휘파람을 불었다. 지지의 휘파람 소리는 퍽 듣기 좋았고, 모모는 그 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지지가 멜로디를 뚝 끊었다. 

 "나도 가야겠어!" 그는 말했다. "오늘이 일요일이잖아. 그럼 나도 야경(夜警)을 해야 해! 그게 요즘의 내 새 직업이라는 걸 너한테 말하지 않았니? 하마터면 잊어 버릴 뻔했어." 

 모모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상해 하지 말아." 지지가 말을 이었다. "우리 생각대로 계획이 들어맞지 않은 것 말야. 그렇게 되리라고 상상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어쨌듯―결국은 그것도 재미있었어! 성대한 모임이었지." 

 모모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는 위로하듯이 모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 모모. 내일이면 모든 것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거야. 우리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자, 새로운 이야기를, 응?" 

 "우리의 일은 이야기가 아니었어." 모모가 나직이 말했다. 

 지지는 일어섰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 얘기는 내일 계속하자, 알겠니? 나는 그만 가 봐야겠어. 어쨌건 벌써 시간이 늦겠어. 또 너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났잖아." 

 그리고 그는 구슬픈 가락을 휘파람 불면서 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모모는 커다란 원형 돌계단 한가운데, 혼자 앉아 있었다. 

 별 없는 밤이었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야릇한 바람이 일었다. 세찬 바람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불며 유난스레 추위를 몰아 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잿빛 바람이었다. 

 이 대도시와 뚝 떨어진 바깥 쪽에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이 솟아 있었다. 그것은, 매일처럼 대도시에서 버려지는 종이 상자, 플라스틱 쓰레기, 낡은 메트리스, 양철통, 깨진 그릇 조각, 잿(灰)더미 등등 옷갖 잡동사니들로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 쓰레기들은 차례로 거대한 소각로(燒却爐)로 이동되기까지 여기서 대기 중이었다. 

 한밤이 이슥하도록 베포 노인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헤드라이트를 켠 채 길게 줄지어 서서 쓰레기 짐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짐차들로부터 쓰레기를 삽으로 퍼 내리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짐차를 처리했는데도 연방 더 많은 짐차들이 어느새 다시 줄 뒤에 와서 서 있곤 했다. 

 "서두르시오, 여러분!" 끊임없이 명령이 떨어졌다. "빨리, 빨리! 안 그러면 도저히 끝이 안나요!" 

 베포는 끊임없이 삽질을 했다. 드디어 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찰삭 달라 붙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사실 베포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또 애당초 별로 건장한 체격이 못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지쳐서 구멍 뚫린 대야를 엎어 놓고 그 위에 앉아 한숨을 돌리려고 하였다. 

 "어이, 베포!" 동료 중의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집으로 가네. 자네는 안 가려나?" 

 "잠간만." 베포는 말하며 아픈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어디가 불편하시오? 노인장." 다른 동료가 물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베포는 대답했다. "먼저들 가시오. 나는 잠간만 좀 쉬어야겠소." 

 "자, 그럼." 다른 이들은 소리쳤다. "밤새 안녕히…….!" 그리고 그들은 떠나갔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다만 쓰레기더미 속 여기저기서 쥐새끼들이 쌀쌀거리면서 이따끔 찍찍 소리를 냈다. 베포는 두 팔에 턱을 괸 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문득 한줄기 찬 바람결이 그의 잠을 깨웠다. 그는 위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그의 의식은 말똥말똥해졌다. 

 거대한 쓰레기 산 위에는 온통 고급 양복을 갖춰 입은 회색 도당들이 중산모자를 머리에 쓰고 납회색의 서류 가방을 손에 들고 작은 회색 시가를 입에 문 채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부동 자세로 쓰레기 더미의 맨 꼭대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일종의 판사석(判事席)같은 것이 차려져 있었고, 그 뒤로 그밖의 다른 일당과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세 사람의 회색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처음 순간, 베포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발각될 것이 겁이 났었다.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여기는 그가 있어서는 안 될 장소임이 분명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 회색 도당들이 귀신에 홀린듯이 판사석에만 시선을 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시 그 자들은 베포를 볼 정신적 여유가 없음에 틀림없었다. 또는 기껏해야 베포를 무슨 버려진 쓰레기쯤으로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베포는 숨을 죽이고 앉아 있기로 작정했다. 

 "외무사원 BLW/553/C 호는 재판석 앞으로 출두하라!" 꼭대기 재판석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나이의 음성이 정적 속에 울렸다. 

 이 출두 명령은 아래쪽에서 다시 한번 뇌여졌고 두번째의 메아리처럼 멀리까지 울려퍼졌다. 그러자 회색 도당들이 길을 열어 주었고 그 사이로 한 회색 사나이가 천천히 쓰레기 더미로 올라갔다. 그 사나이가 다른 도당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유일한 점은, 얼굴의 회색이 거의 백지장처럼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재판석 앞에 섰다. 

 "당신이 외무사원 BLW/553/C 호요?" 가운데 사나이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시간 저축은행을 위해 일해 왔소?" 

 "제가 생성된 이후로." 

 "그거야 자명한 얘기요. 그런 쓸데없는 진술은 생략하시오! 당신은 언제 생성되었소?" 

 "십일년, 석달, 엿새, 여덟 시간, 삼십이분, 그리고 이 순간으로 꼭 십팔초 전입니다." 

 이 문답은 낮은 음성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게다가 먼 데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상스럽게도 베포 노인은 한마디 한마디를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소?" 가운데 사나이가 신문을 계속했다. "오늘 이 도시의 상당수의 어린이들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여 도시의 모든 사람을 초대하여 감히 우리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하는 엄청난 계획을 세웠었다는 사실을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외무사원은 대답했다. 

 "이 어린아이들이," 판사는 냉혹하게 신문을 계속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정체와 활동 내용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실 수 있겠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외무사원은 대답했다. "다만 여기서 저의 소견 진술이 허용된다면, 이 사건 전체를 실제 이상으로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으시도록 재판관 제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잘 것 없는 어린이들의 장난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지 사람들한테 시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집회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데 간단히 성공했음을 사료(思料)하십사고 간청드립니다. 그렇지만 설사 우리가 그 일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해도, 어린애들은 사람들에게 어린애식의 도둑 이야기나 전해 주는 것 이외의 딴 짓은 할 수 없었으리라는 걸, 저는 장담합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회를 열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지 않았나 싶군요. 그래서……." 

 "피고!" 가운데에 앉은 사나이가 날카롭게 말을 중단시켰다. "피고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계시오?" 

 외무사원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물론입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피고는 지금," 재판관은 말을 이었다. "인간들의 법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고와 같은 회색 인간의 법정에 있는 것이오. 우리에겐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고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데도 어째서 거짓말을 하려 드는거요?" 

 "그것은……직업상의 습관입니다." 피고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린이들의 계획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재판관은 말했다. "간부들의 판단에 맡겨두시오. 사실 당신 자신도, 피고, 바로 이 어린아이들만큼 우리의 사업에 위험한 존재는 다른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피고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동의를 했다. 

 "어린이들은," 재판관은 설명했다. "우리들에게 맞설 만한 적(敵)이오. 어린이들이 없다면, 인류는 벌써 오래 전에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을 것이오. 다른 어떤 인간들보다도 어린애들이야말로 시간 절약을 할 줄 모른단 말이오. 그래서 우리의 엄격한 법 중의 하나가 '어린이들은 최후의 순서로'라는 것이오. 당신은 이 법을 알고 있었소? 피고." 

 "잘 알고 있습니다, 재판관님."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가진 명백한 증거에 의하면," 재판관은 말을 이었다.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반복해서 말하지요,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어린아이하고 대화를 나누고, 게다가 우리에 관한 진짜 내용까지 누설했단 말이오. 피고, 당신은 혹시 이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누구였는 줄 아시오? 

 "본인이었습니다." 외무사원 BLW/553/C 호는 완전히 기가 죽어서 대답했다. 

 "그럼 어쩌자고 피고는 그렇게 우리의 엄격한 법에 저촉되는 일을 저질렀소." 재판관은 계속 추궁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피고는 변명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우리 일을 이만저만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시간 저축은행을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신의 의도같은 건 우리한테 흥미가 없소." 재판관은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결과뿐이오. 이번 경우에 있어서 결과란, 피고, 우리의 시간에 이득을 가져 오기는커녕, 당신은 그 꼬마한테 우리의 중대하기 이를 데 없는 몇 가지 비밀까지 누설했소. 인정하시오, 피고?" 

 "인정합니다." 외무사원은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유죄(有罪)를 고백하는 것이지요?"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재판관님, 제가 정신이 빠져 버린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상을 참작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아이가 귀 기울려 듣는 태도로 인하여 내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저절로 우러나와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만, 맹세코 그랬습니다." 

 "당신의 변명같은 건 우리에게 흥미가 없소. 정상 참작이란 우리에겐 해당이 안되오. 우리의 법은 범(犯)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떠한 예외도 허용치 않소. 어쨌든 우리는 이 이상스러운 어린이를 데려 와야겠소. 이름이 무엇이오?" 

 "모모." 

 "남자애요, 계집애요?" 

 "조그만 계집애입니다." 

 "거주지는?" 

 "원형극장의 옛터에서 삽니다." 

 "좋소." 모든 것을 수첩에다 기입해 넣고 재판관은 말을 이었다. "이 어린이가 다시는 우리를 해롭게 하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좋을 것이오, 피고. 우리는 무슨 수단을 써서도 그렇게 되도록 하겠소. 형의 집행을 즉결하면 그것이 피고에게도 위안이 되겠지요." 

 피고는 와들와들 떨기 시작한다. 

 "형의 언도가 어떻게 내려졌습니까?" 그는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재판관 뒤의 세 사나이는 서로 고개를 맞대고 무언가를 수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가운데 사나이는 다시 피고를 향해 선고했다. 

 "외무사원 BLW/553/C 호에 대해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형을 언도한다. 피고의 죄는 대역죄(大逆罪)임이 판명되었다. 피고 자신도 본인의 죄를 자백하였다. 우리의 법에 따라 즉각 그에게서 모든 시간을 압류할 것은 언도한다." 

 "너그러운 사면(赦免)을!" 피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옆에 서 있던 다른 두 회색 사나이가 그에게서 납회색의 서류 가방과 작은 시가를 빼앗았다. 

 그러자 참으로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선고를 받은 피고가 시가를 빼앗긴 순간, 그는 순식간에 점점 투명한 인간으로 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비명도 점점 가느다랗고 조그맣게 들려 왔다. 그렇게 그는 선 채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문자 그대로 무(無)로 소멸해 버리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 순간에는 몇 개의 잿가루가 원(圓)을 그리며 바람에 회오리쳐지는가 싶더니, 그것조차 사라져 버렸다. 

 법정에 앉아 방청을 하던 모든 회색 도당들도 말없이 멀어져 갔고 곧 어둠이 그들을 삼켜 버렸다. 다만 회색 바람만이 황량한 쓰레기 하치장 위로 불고 있었다. 

 도로청소부 베포는 여전히 꼼짝 않고 앉아서 피고가 사라져 버린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얼음 덩어리로 얼어 붙었다가 이제 서서히 다시 녹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는 회색 도당의 존재를 실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알게 된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아득히 먼 데의 탑시계가 자정을 쳤다―꼬마 모모 역시 여전히 옛터의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모모는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기다린다고는 꼬집어 말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모모는 무엇인가 기다릴 것이 있는듯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껏 잠자러 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문득 무엇인가 맨발을 살그머니 건드리는 감촉이 있었다. 모모는 몸을 굽혔다. 정말 칠흑처럼 깜깜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거북이 한마리가 모모의 눈에 띄었다. 거북이는 머리를 곧추 세우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며 모모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거북이의 지혜로운 새까만 두 눈은 막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듯 다정하게 반짝였다. 

 모모는 거북이한테로 납작 몸을 굽히고는 손가락으로 거북이의 턱 밑을 쓰다듬었다. 

 "자, 너는 대체 누구니?" 모모는 소근소근 물었다. "고맙다. 너라도 나를 찾아 주어서, 거북아. 대체 나한테 뭘 하러 왔니?" 

 이제사 모모가 알아 본 것인지, 또는 사실상 지금 이 순간에 보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문득 거북이의 딱딱한 등 위에 뿔판의 무늬로 이뤄진 것같은 몇 개의 문자가 어렴풋이 빛을 내며 나타났다. 

 "같이 가자!" 모모는 한참만에 글자를 해독했다. 

 모모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날더러 하는 말이니?" 

 하지만 거북이는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걸음 가다가 멈추더니 모모를 뒤돌아 보았다. 

 "거북이는 정말 나를 두고 말했구나!" 모모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일어 서서 거북이를 따랐다. 

 "그냥 가기만 해!" 모모는 나직이 말했다. "내가 따라 갈게." 

 종종 걸음으로 한발짝 한발짝 모모는 거북이를 뒤쫓아 갔다. 거북이는 느릿느릿, 아주 느림보로 원형 돌계단을 빠져 나와서 대도시로 가는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10  흥분한 추적(追跡)과 침착한 도주(逃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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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포 노인은 삐꺽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달렸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회색 재판관의 말이 여전히 그의 귀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이상스러운 어린이를 데려와야겠소……. 이 어린이가 다시는 우리를 해롭게 하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좋을 것이오, 피고……. 우리는 무슨 수단을 써서도 그렇게 되도록 하겠소……."

 모모가 극도의 위험에 빠져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당장 모모한테로 가서 회색 도당을 조심하라고 일러 주고, 그들로부터 모모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록 그 자신도 보호할 방법을 모르고 있었지만. 하지만 방법이야 어떻게든 떠오를 것이다. 베포는 페달을 밟았다. 그의 은발(銀髮)이 바람에 펄럭였다. 원형극장으로 이르는 길은 아직도 아득했다.


 폐허의 옛터는 사방을 에워싸고 서 있는 수많은 날씬한 회색 승용차들의 헤드라이트로 눈부시게 밝혀져 있었다. 한 떼의 회색 도당들이 잔디 덮인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며 구석구석을 샅샅히 뒤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모모의 방으로 통하는 성벽의 구멍까지 발견해 냈다. 몇 사람이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가 침대 밑을 굽어보고, 심지어는 쌓아 올린 부뚜막 속까지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기어 올라와 고급 회색 양복을 탁탁 털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망쳐 버렸군요." 한 사나이가 말했다.

 "괘씸한데." 다른 자가 말했다. "어린아이가 밤 중에 얌전히 자지 않고 싸돌아다니다니."

 "영 기분이 언짢군요." 세번째 사나이가 단호히 말했다. "누구인가 제때 귀띔을 해 준 것이 분명해요."

 "그럴 리가 없소." 첫번째 사나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자는 우리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미리 알았다는 얘기가 되지요!"

 회색 도당들은 얼이 빠진듯 서로 쳐다보았다.

 "사실상 꼬마가 누구인가 한 패거리의 귀띔을 받았다면"하고 세번째 사나이가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제안했다. "분명코 이미 이 근처에서 새어나갔소. 그렇다면 여기서 더 뒤진다는 건 결국 시간낭비밖에 안됩니다."

 "무슨 더 좋은 수가 있소?"

 "내 생각으로는 즉각 중앙회에 보고를 해야할 것 같군요. 그래야 중앙에서도 대부대를 증원(增員)해서, 수배할 테니까요."

 "중앙회에서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이 주변을 과연 철저히 수색했는가 물어 볼 것이오. 당연한 일이지만요."

 "자 그럼," 첫번째 회색 사나이가 말했다. "일단 주변을 샅샅히 뒤집시다. 그렇지만 그러는 동안 이 꼬마가 한 패거리의 도움이라도 받고 있다면, 우리로서는 결국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는 결과가 되겠지요."

 "웃기는 얘기요!" 다른 사나이가 사뭇 화를 내며 큰 소리를 했다. "그런 경우엔, 중앙회에서 언제라도 즉각 대부대의 인원으로 수배할 수 있소. 결국 기동(機動)이 가능한 전 외무사원이 이 추적에 참여하게 되겠지요. 어린애가 우리의 망을 빠져 나갈 바늘 구멍만한 기회라도 주면 안돼요! 그럼, 일을 시작합시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소."

 이날 밤, 이웃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왜 밤새도록 자동차가 질주하는 소음이 그치지 않았는지, 이상스레 생각하였다. 보통 때에는 큰 도로에서만 들려 오던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심지어는 좁디좁은 골목길과 우툴두툴하기 이를 데 없는 자갈길에 이르기까지, 새벽이 되도록 시끄러웠다. 모두가 한 잠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러한 즈음, 꼬마 모모는 거북이의 안내를 받아 큰 도시를 천천히 걸어 가고 있었다. 도시는 이토록 깊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않고 있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떼를 지어 혼잡스럽게 허겁지겁 달려가며 참을성 없이 서로를 밀쳐내고 욕지거리를 주고 받거나, 끝없는 일렬종대(一列縱隊)로 종종 걸음을 치고 있었다. 차도(車道)에서는 자동차들이 빽빽하게 몰려 달리고, 그 사이로 한결같이 만원을 이룬 거대한 버스들이 으르렁대고 있었고, 건물의 앞면마다 광고 네온이 번쩍이며 번잡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란한 빛을 내려 쏟으면서 명멸(明滅)하고 있었다.

 이런 모든 광경을 생전 처음 보는 모모는 꿈을 꾸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마냥 거북이의 뒤를 쫓아 가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넓은 광장, 밝게 빛나는 거리를 가로 질러 갔다. 자동차들이 그들의 앞뒤로 질주하고 있었고 사방에 행인들이 붐비었다. 하지만 거북이와 함께 가는 이 꼬마한테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모와 거북이는 한번도 누구를 일부러 피해 갈 필요가 없었다. 한번도 누구와 충돌한 적이 없었고, 한번도 자동차에 브레이크를 걸게 한 적이 없었다. 거북이는 어느 순간에 어디로 가면, 달리는 자동차나 걷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한번도 서둘 필요도 없었고, 기다리느라 걸음을 멈출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모모는, 그토록 천천히 걸어 가면서도 그토록 빨리 갈 수 있다는 데 대해, 신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원형극장 옛터에 이르렀을 때, 도로청소부 베포는 자전거에서 채 내리기도 전에, 희미한 자전거 램프빛 속에서도 폐허 주변을 휩씁고 지나간 숱한 자동차 바퀴 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자전거를 풀밭에 팽개치고 성벽의 구멍으로 달려갔다.

 "모모!" 처음엔 작은 소리로 부르다가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외쳤다. "모모!"

 대답이 없었다.

 베포는 침을 삼켰다. 목이 칼칼했다. 그는 구멍을 빠져나가 깜깜한 공간 속으로 기어 내려가느라 비트적거리다가 발목을 삐었다. 그래도 떨리는 손으로 성냥불을 켜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나무 궤짝으로 만든 꼬마 책상과 두 개의 의자는 뒤집혀져 있었고 이불과 두꺼운 요도 침대에서 젖혀져 있었다. 그리고 모모는 거기 없었다. 

 베포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도록 메어오는 흐느낌을 억지로 삼켰다. 

 "맙소사!"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 어쩌면 좋담? 벌써 그 자들이 모모를 납치해 갔구나. 나의 작은 소녀를 벌써 끌어 갔어. 내가 너무 늦게 왔어. 대체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담? 어떻게 하면 좋지?" 그 때 성냥불에 손가락이 데었다. 그는 성냥을 내던지고 깜깜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다시 밖으로 기어 올라와 삔 발로 절뚝거리며 자전거 있는 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훌쩍 뛰어 올라 페달을 밟았다. 

 "지지를 만나야 해!" 그는 거듭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지를 찾아야겠어! 그 친구가 자는 창고를 찾았으면 좋겠는데." 

 베포는 지지가 얼마 전부터 일요일 밤마다 어느 작은 자동차 중개업소의 부속품 창고에서 잠을 자면서 몇 푼의 부수입을 벌어 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 지지는, 아직 사용의 여지가 있는 자동차 부속품이 없어지는 사고가―전에는 그런 사고가 빈번했다.―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주고 있었다. 

 베포가 마침내 창고에 이르러 주먹으로 문을 꽝꽝 두드렸을 때, 처음에 지지는 자동차 부속 도둑쯤으로 생각하고 꼼짝 않고 있었다. 하지만 곧 베포의 음성을 알아 듣고 문을 열었다. 

 "왠 일이세요?" 그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누구든 이렇게 사정없이 잠에서 깨우는 걸 나는 참을 수가 없어요." 

 "모모한테……," 숨이 차서 헐떡이며 베포가 내뱉었다. "모모한테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무슨 말씀이세요?" 지지는 되묻고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잠자리 위에 걸터 앉았다. "모모한테요? 대체 무슨 일이 생겼어요?"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 베포가 헐떡이며 말했다. "나쁜 일이야."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가 보고 들은 일을 전부 들려 주었다. 쓰레기 하치장에서의 재판에 대해서, 폐허의 옛터 주변의 바퀴 자국에 대해서, 그리고 모모가 거기에 없더라는 사실에 대해서. 물론 그가 이야기를 전부 마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모모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로서 더 이상 빨리 말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런 예감을 가졌었어"하고 그는 자기의 보고를 끝맺었다. "나는 일이 순조롭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지금 그자들은 보복을 한거야. 모모를 납치해 갔어! 어쩌면 좋겠나, 지지. 우리는 모모를 구해야 해!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베포가 말을 하는 동안 서서히 지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었다. 그는 갑자기 발 밑의 바닥이 꺼져 버린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순간까지는 모든 것이 그에겐 한낱 커다란 유희였었다. 그는 모든 놀이와 이야기를 대하듯이―어떤 결과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이 사건을 간단히 생각했었다.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그를 빼놓고 앞으로 나아가 독립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환상(幻想)을 동원해도 그 이야기를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옴짝달싹 못하게 마비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이 봐요, 베포 아저씨!" 잠시 후 그는 입을 떼었다. "모모가 잠간 산보를 갔을 수도 있지 않아요. 모모는 산보를 잘 하니까요. 한번은 사흘 밤낮을 시골에서 떠돌아 다닌 적도 있었는걸요. 아직은 우리가 그렇게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자동차 바퀴자국은?" 베포는 화가 나서 물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메트리스는?" 

 "아, 좋아요." 지지는 발뺌하듯 대답했다. "그럼, 정말로 거기 누가 왔었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렇다면 모모를 찾아낸 사람이 그 자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모모는 벌써 전에 가 버렸을 수도 있어요. 안 그랬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온통 뒤집어 엎으며 찾아 봤겠어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놈들이 모모를 찾아냈다면?" 베포가 소리쳤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는 젊은 친구의 웃도리 앞자락을 움켜잡고 흔들어댔다. "지지, 바보같이 굴지 말아! 회색 도당은 실제로 있는거야! 우리는 무슨 조처를 취해야 해, 당장에!" 

 "좀 진정하세요, 베포 아저씨." 지지는 얼이 빠져서 말을 더듬었다. "물론 우리는 무슨 수를 써야해요. 그렇지만 신중히 생각을 해야지요. 우리는 대체 모모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잖아요." 

 베포는 지지를 놓았다. "경찰에 가겠어!" 그는 내뱉았다. 

 "어리석은 소리 마세요!" 지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렇게 하시면 안돼요! 경찰이 나서서 우리 모모를 정말 찾아낸다고 칩시다. 그 다음엔 경찰이 모모를 어떻게 할는지 아세요? 아시겠어요, 베포 아저씨? 떠돌이 고아들이 어디로 보내지는지 아시죠? 창살이 있는 고아원에다 처넣는 거예요! 우리 모모한테 그런 짓을 하시겠어요?" 

 "아니," 베포는 우물우물 말하며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건 싫어. 그렇지만 모모가 정말 곤경에 빠져 있다면?" 

 "하지만 모모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각해 보세요." 지지는 말을 이었다. "모모는 정말 잠간 떠돌아 다니고 있을 뿐인데 아저씨가 경찰에다 신고를 해 버린다면……. 나는 아저씨처럼 행동하진 않겠어요. 그럼 정말 모모는 우리를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다시는 우리를 보지 못하게 될 거예요." 

 베포는 식탁 앞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팔에 묻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는 신음을 했다. "정말 모르겠어." 

 "내 생각에는," 지지가 말했다. "어쨌든 내일이든 모레까지 기다렸다가 무슨 조처를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때까지도 모모가 영 안 돌아오면, 정말 경찰에 갈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 때까지는 벌써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오고, 우리 셋이 그 동안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에 대해 웃을 수 있을 게 거의 틀림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베포는 문득 사정없이 몰려오는 피곤을 못 이겨하며 중얼거렸다. 노인에게는 오늘 하루가 상당히 무리한 날이었다. 

 "그럼요." 지지는 대답하며 베포의 삔 발의 구두를 벗겼다. 그는 노인을 부축해서 침상에 옮기고 삔 발에 찜질을 했다. 

 "틀림없이 제대로 될 거예요."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베포가 어느 새 잠이 든 것을 보고, 지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은 웃도리를 베개 삼아 머리 밑에 괸 채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회색 도당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껏 아무런 거리낌없이 살아 온 그로서 평생 처음으로 불안의 엄습을 느꼈다. 


 시간 저축은행의 중앙회로부터 대규모 증원 수배령이 내려졌다. 대도시에 있는 전 외무사원들은 일체의 다른 업무를 중지하고 오로지 모모라는 소녀 수색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거리마다 회색 인간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 위에도, 하수도 안에도 앉아서 눈에 띄지 않게, 역과 비행장, 버스와 전차를 감시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어디에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모라는 소녀를 찾아 내지는 못했다. 

 "얘, 거북아!" 모모가 물었다. "대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니?" 

 둘은 이제 막 웬 컴컴한 뒷뜰을 지나가고 있었다. 

 "걱정 말아!" 거북이의 등에 글이 나타났다. 

 "나도 걱정은 안 해." 모모는 글자를 해독한 다음에 대답했다. 

 이 말은 사실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오히려 자기 자신한테 한 말이었다. 내심 모모도 조금은 은근히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거북이가 끌고 가는 길은 갈수록 야릇하고 복잡해졌다. 그들은 벌써 수많은 정원을 지나왔고 다리 위를 건넜고, 구름다리 밑을 지나 큰 대문과 복도를 지나 왔다. 뿐만 아니라 몇 번인가는 지하실까지 지났다. 

 회색 도당이 총동원해서 자기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모모는 아마 훨씬 더 큰 불안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그 점에 관해서 모모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참을성 있게 한발짝 한발짝씩 그토록 복잡해 보이는 길을 따라 거북이의 뒤를 쫓아 갈 뿐이었다. 

 게다가 이 행진은 묘하게 순조로왔다. 거북이는 시내 교통망 중에서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미리 정해 놓은 것 같았고, 뿐더러 언제 어디에 추적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미리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둘이서 막 지나간 장소에 단 한 순간의 차이로 회색 도당이 지나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모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어느새 읽기를 깨우친 게 다행이야." 모모는 순진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지 않니?" 

 거북이의 등판에 경계등(警戒燈)처럼 글자가 번쩍였다. "조용히 해." 

 모모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지시를 따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세 사람의 어두운 형체가 지나갔다. 

 지금 둘이서 가고 있는 도시 구역의 집들은 점점 회색에 가까와 갔고, 점점 더 초라해졌다. 회벽이 부스러져 떨어져 나간 높은 아파트 건물들이, 그리고 물이 고인 구멍 투성이의 길이 양 옆으로 즐비해 있었다. 이곳에서는 전체가 어둡고 인적(人跡)이 없었다. 

  

 시간 저축은행의 중앙회에, 모모라는 소녀가 수사망에 한번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좋소." 대답이었다. "체포했오?" 

 "아닙니다. 꼬마는 땅바닥에 흡수된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발자국을 다시 잃어 버렸습니다." 

 "어째 그럴 수가 있소?" 

 "우리도 그 점이 의문입니다. 무엇인가 들어 맞지가 않아요." 

 "당신네들이 꼬마를 포착한 지점이 어디였소?" 

 "그 점이 바로 이상한 점입니다. 우리한테는 전혀 낯선 도시의 구역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런 구역이란 없소." 중앙회는 자신있게 잘라 말했다. 

 "명백히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마치 이구역은 시간의 접점(接點)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바로 이 접점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었습니다." 

 "뭐라구?" 중앙회는 소리쳤다. "추적을 계속하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꼬마를 잡아야 하오! 알아 들었소?" 

 "알았습니다!" 잿빛 대답이 흘러 나왔다. 

  

 처음에 모모는 새벽의 여명(黎明)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야릇한 빛은 이 거리로 접어 들었을 때 너무나 불현듯, 엄밀히 말해서 순식간에 비쳐왔다. 이곳은 이미 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낮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어스름한 빛은 아침의 빛도, 밤의 빛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윤곽을 너무나 기묘하게 부각(浮刻)시켜 주면서도, 어디가 근원인지를 알 수 없는 빛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동시에 사방에서 비쳐드는 빛이었다. 심지어 거리의 작은 조약돌에 이르기까지, 던지고 있는 길다란 새까만 그림자들이 온통 제가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저 쪽의 나무는 왼편에서, 이 집은 오른편에서, 저 건너편의 기념비는 앞 쪽에서 빛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기념비 자체도 정말 기묘한 모습이었다. 새까만 돌로 된 커다란 주사위 모양의 받침대 위에 무지무지하게 커다란 하얀 달걀 모양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집들도 지금껏 모모가 보아 온 모든 집들과 달랐다. 사뭇 눈이 부실 정도로 흰빛이었다. 창 너머로는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 안에 도대체 누가 사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모모는 이 집들이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고 다른 신비스러운 목적을 위해 지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인적이 없을 뿐 아니라, 개도 새들도, 자동차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움직임 없이 유리 속에 밀폐된듯이 보였다. 한 가닥 미풍(微風)조차 없었다. 

 모모는, 거북이가 아까보다 한결 더 느릿느릿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빨리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이상스럽게 여겼다. 

  

 이 기묘한 도시 구역의 바깥, 밤이 지배하고 있는 구렁 투성이의 거리로는 헤드라이트를 켠 미끈한 자동차 세 대가 질주하고 있었다. 차 안에는 한결같이 여러 명의 회색 사나이들이 타고 있었다. 제일 앞에 가는 차에 앉아 있는 사나이가 모모를 발견했다. 모모는 신비스러운 빛이 시작되는 새하얀 건물의 거리로 꺾어 들고 있었다. 

 하지만 회색 인간들이 그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운전수는 속력 페달을 밟았고 바퀴는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자동차는 제 자리 걸음을 칠 뿐, 마치 같은 속도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콘베이어에 말려 들어간 것같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속력을 내면 낼수록, 더욱 진행이 더딘 것이었다. 회색 도당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화가 나서 투덜대면서 차에서 훌쩍 뛰어 내려, 아직도 멀리 시야(視野)에 잡히는 모모를 쫓아 가려고 했다. 그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달렸다. 하지만 결국 지쳐서 멈출 수 밖에 없었고, 그 때까지 그들이 접근한 거리는 겨우 십미터 밖에 안되었다. 그런데 모모라는 소녀는 저 멀리 어딘가 눈(雪)처럼 새하얀 건물 사이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사라졌어!" 그들 중의 한 사나이가 말했다. "사라졌어, 이제는 끝장이야! 다시는 그 꼬맹이를 찾을 수 없을거요." 

 "알 수 없는 일이야." 다른 사나이가 말했다. "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는지를 말이오." 

 "나도 모르겠소." 첫번째 사나이가 말했다. "문제는 다만, 우리가 그렇게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이 정상 참작이 될 만한 정황으로 사료(思料)될는지 어떨는지 입니다." 

 "우리가 재판에 회부될 거라는 말이오?" 

 "하긴 우리를 칭찬하지 않을 것만은 틀림없지요." 

 이 일에 참여하던 모든 회색 인간들은 풀이 죽어서 자동차의 냉각기와 완충 막대에 걸터 앉았다. 이젠 그들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멀고 아득한 곳, 눈처럼 새하얀 텅빈 거리와 광장의 카오스(混沌) 속 어디엔가를, 모모는 거북이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너무나 천천히 걷고 있었기 때문에, 숫제 그들 발 밑의 거리들이 미끄러져 뒤로 물러가고 건물들이 스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또 다시 거북이는 모퉁이를 굽어 들었다. 모모는 뒤를 따랐다. ― 그리고는 깜짝 놀라 우뚝 섰다. 이 거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거리와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아예 보통의 좁은 골목이 아니었다. 좌우로 나란히 즐비한 집들은 온통 유리로 된 화려한 궁전처럼 보였다. 작은 탑, 지붕의 창문, 테라스 등으로 장식된 집들은, 태초에 바다 밑에 세워졌다가, 지금 갑자기 해초류를 드리우고, 조개며 산호로 뒤덮인 형태로 불쑥 솟아 오른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전체는 진주조개(眞珠貝)처럼 은은히 오색 빛을 영롱하게 발하였다. 

 이 골목은 다른 집들과 직각으로 서 있는 단 한 채의 막다른 집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집의 중앙에는 정교한 그림으로 뒤덮인 커다란 초록 대문이 보였다. 

 모모는 자기 바로 윗벽에 붙어 있는 도로 표지판을 올려다 보았다. 흰 대리석판 위에 황금색으로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초시간가(超時間街) 

 모모가 표지판을 보고 글자를 해독하기까지는 불과 몇 초밖에 지체하지 않았는데도 거북이는 어느덧 저만큼 앞장 서 거의 골목 끝 막다른 집 앞에 서 있었다.

 "좀 기다려, 거북아!" 모모는 소리쳤다.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모모한텐 자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거북이는 알아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모모는 거북이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초시간가로 접어들자마자, 물 속에 잠긴 듯, 세찬 역류(逆流)에 휘말린 듯한, 또는 완강한 역풍(逆風)이 부딪친 듯한 느낌이―실제 느껴지진 않았는데도―들었다. 모모는 이 수수께끼같은 압력을 이겨 내려고 애를 쓰며 돌담의 튀어나온 부분에 매달려 앞으로 나가는 시늉을 하거나, 때로는 방향을 잃고 기어가곤 했다.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모모는 골목 어귀에 주저 앉아, 자기를 향하고 있는 거북이를 보고 외쳤다. "날 좀 도와 줘!"

 느린 걸음으로 거북이는 되돌아왔다. 마침내 모모 앞에 와서 멈추었을 때 거북이 등에 지시 사항이 나타났다. "뒤로 돌아서서 가!"

 모모는 그렇게 했다. 몸을 돌려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즉 모모는 후퇴를 하면서, 자신도 역시 후퇴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호흡하며 느꼈다. 요컨대 모모는 후퇴의 길을 갔던 것이다.

 이윽고 무언가 딱딱한 것에 부딪쳤다. 몸을 돌려보니 거리와 직각으로 서 있는 막다른 골목집 앞이었다. 그림으로 뒤덮인 초록빛 철문이, 막상 그 앞에서는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크게 보여 모모는 적이 놀랐다.

 "대체 이 문이 내 힘으로 열릴까?"하고 모모는 걱정스레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어느새 육중한 양편 문짝이 저절로 열렸다.

 모모는 다시 한번 잠시 머뭇거렸다. 대문 위에 또하나의 표지판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새하얀 뿔(角) 위에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진 판이었다.


초공간(超空間)의 집 

 글자를 재빨리 읽을 재간이 없는 모모가 표지판을 읽고 났을 때에는 양쪽 대문짝이 어느새 스르르 닫히려는 찰나였다. 모모가 얼른 대문을 빠져 들어가자 등 뒤에서 육중한 대문이 둔하게 꽝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 모모의 앞에는 높고 긴 복도가 열려 있었다. 양 옆으로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돌로 된 벌거벗은 남녀의 상(像)이 서 있어 천정을 받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신비스러운 역류의 흔적은 여기서는 이미 느낄 수 없었다.

 모모는 앞에서 기어가는 거북이를 좇아 긴 복도를 지났다. 복도의 끝에 이르러 거북이는 조그만 문 앞에 멈췄다. 모모가 몸을 오그려야 겨우 들어 설 수 있을 꼬마문이었다.

 "다 왔어" 거북이의 등에 글자가 나타났다.

 모모는 몸을 꼬부렸다. 바로 모모의 코 앞 꼬마문 위에 다음과 같은 이름이 쓰인 문패가 보였다.


   세쿤두스 미누티우스 호라 박사

     (Secundus Minutius Hora : 라틴어로 초, 분, 시간의 뜻―옮긴이)


 모모는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꼬마 손잡이를 돌렸다. 꼬마 문이 열리자 재깍재깍 똑딱똑딱 땡땡 하는 여러 소리가 한꺼번에 음악소리처럼 안 쪽에서 울려 나왔다. 꼬마는 거북이의 뒤를 따랐다. 그들 뒤에서 꼬마문이 잠겨졌다. 

 

11  악인(惡人)들이 그릇된 것을 활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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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도 없는 거리와 골목길의 잿빛 불빛 속을 시간 저축은행의 외무사원들이 이리저리 질주하며 흥분해서 서로 긴급 뉴스를 수근수근 주고 받고 있었다. ―간부 전원은 비상회의에 참석하라! 

 그것은 분명 큰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뜻밖의 시간 수익(收益)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모양이라고 해석하는 축들도 있었다. 

 대회의실에서 회색 인간들의 간부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그야말로 끝없이 긴 회의용 탁자 앞에 나란히 줄지어 앉았다. 모두들 한결같이 납회색 서류 가방을 지니고, 작은 회색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다만 둥근 중산모자만은 벗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같이 완전 대머리라는 것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분위기는―이 회색 인간들한테도 이런 분위기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대체로 저조해 있었다. 

 긴 회의석의 머리쪽 끝에 앉아 있던 의장이 일어섰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며 두 줄의 끝없는 회색 얼굴이 그를 향했다. 

 "여러분," 그는 말을 시작했다. "우리의 사태가 심각하오. 본인은, 여러분에게 비통하지만 엄연한 사실을 바로 전달하지 않을 수 없소. 

 모모라는 소녀를 추적하는 일에, 우리는 동원 가능한 거의 전 외무사원을 출동시켰소. 이 추적은 도합 여섯시간 십삼분 팔초가 걸렸소. 이로 인하여 전 기동 외무사원은 부득이 원래의 생존 목적, 즉 시간을 벌어 들이는 일을 소홀하지 않을 수 없었소. 이 결손에 덧붙여, 추적하는 동안 우리 외무사원이 낭비한 자신들의 시간을 가산해야겠소. 이 양자의 결손 총액을 합하면, 정확한 계산에 따라 3십 7억 3천 8백 2십 5만 9천 1백 1십 4초에 달하는 시간 손실액이 나오게 되오. 

 여러분, 그것은 한 인간의 한 평생보다도 많은 시간이오!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엄청난 것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본인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커다란 손짓을 하며, 회의실 앞면에 달린 어마어마한 강철문을 가리켰다. 각종 번호와 안전 자물쇠 투성이인 그 문은 벽 속으로 통하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 창고는, 여러분," 그는 목청을 높여 말했다. "무진장 저장이 가능하고. 추적이 헛수고만 아니었더라도! 어쨌든 그것은 완전히 소득 없는 시간 낭비였소! 우린 모모라는 소녀를 놓친 것이오. 

 여러분, 이런 일은 결코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겠소. 이렇게 값비싼 대규모의 계획을 다시 벌이는 것을, 그것이 여하한 것이든, 본인은 단연코 반대하겠소. 우리는 시간을 절약해야 하고. 여러분, 낭비는 금물이오! 앞으로의 일체의 계획은 이런 뜻에 입각해서 세우기를 본인은 여러분께 부탁하오. 이상으로 소견을 마치겠소. 감사하오." 

 그는 자리에 앉아 짙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좌중에서 들떠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긴 좌석의 반대편 끝에 앉아 있던 두 번째 연사가 일어섰고, 모든 얼굴이 그를 향했다. 

 "여러분,"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시간 저축은행의 번영을 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소. 그렇지만 이 단 하나의 사건을 두고 불안해하거나 무슨 비참한 파국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이번 경우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시간 창고는 이미 막대한 저장량을 보유하고 있고, 설사 이번 손실의 몇 배의 손실을 겪더라도, 우리는 결코 끄떡하지 않을거요. 한 사람의 평생이 우리한테 과연 얼마 만한 것이오? 사실 새 발의 피지요. 

 아무리 그렇긴 해도 그런 일을 두 번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우리의 의장의 발언에 본인은 전적으로 동의하오. 하지만 이 모모라는 소녀와 같은 경우는 결코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변(變)이라고 생각하오. 그 비슷한 일도 지금껏 발생한 적이 없었소. 그러니까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하리라는 가능성도 지극히 희박해요. 

 결국 우리가 모모라는 소녀를 놓쳤다는 의장의 질책은 지당한 것이긴 하오. 하지만 우리가 의도했던 것은 결국 이 소녀가 우리한테 아무런 해(害)도 끼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뭐였소? 그렇다면, 어쨌든 우리의 의도는 완전히 이루어진 셈이 아니겠소! 그 아이는 사라졌소. 시간의 영역에서 도망쳐 버렸소! 우리가 그렇게 몰았소. 우리는 이 결과로서 만족해도 좋으리라고 본인은 생각하오." 

 연사는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착석했다. 여기저기서 자신없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긴 회의석의 한가운데서 세 번째 연사가 일어섰다. 

 "간단히 말씀드리겠소."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을 떼었다. "본인은 지금 우리가 들은 위안의 말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오. 이 어린애는 보통 아이가 아니오. 우리는 이 아이가, 우리와 우리의 일을 지극히 위험에 빠뜨릴 재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 사건이 지금껏 두 번 발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앞으로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될 수 없소. 방심하지 말아야 하오! 이 아이를 실제로 우리의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는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오. 다만 이 아이가 다시는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점만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소. 사실 이 아이가 시간의 영역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은 언제라도 되돌아올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오. 틀림없이 이 아이는 되돌아 올 것이오!" 

 그는 착석했다. 

 회색 일당의 간부진은 고개를 떨구고 풀이 죽어 앉아 있었다. 

 "여러분,"하고 이번에는 세 번째 연사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네번째 연사가 입을 열었다. "용서하시오. 하지만 사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의 언저리만을 맴돌고 있소. 우리는 이 사건에 제 삼자의 힘이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하오. 본인은 모든 가능성을 정확하게 계산해 보았소. 어린아이가 죽지 않고 자기 체력으로 시간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확률(確率)이란, 정확히 4천 2백만분의 일이라는 계산이 나오지요. 다시 말해서, 실제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간부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어느 모로 보나," 웅성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연사는 말을 이었다. "모모라는 소녀를 우리의 추적망에서 벗어 나도록 도와 준 힘이 있소. 본인이 누구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지 여러분들 모두 아실 것이오. 저 이른바 호라 박사가 문제의 대상이오." 

 이 이름이 발음되자, 대부분의 회색 인간들은 얻어맞은듯 몸서리를 쳤고, 어떤 자는 벌떡 일어나 격렬한 몸짓으로 나오는대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발, 여러분!" 네 번째 연사는 두 팔을 내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오, 진정하시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본인도 이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소. 본인 자신으로도 퍽 극기(克己)를 요하는 일이지만, 진상을 명백히 규명해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고……, 또 그래야 하지 않겠소! 그 자가, 이른바 그 자가 모모라는 소녀를 도왔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오. 그것은 우리를 향한 도전임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오. 요컨대 여러분, 그 자가, 그 모(某)라는 인물이 이 아이를 그냥 돌려 보내지 않고 우리를 향해 한 겹 더 무장을 시켜 보내리라는 점을 우리는 고려해야 하오. 그렇다면 그건 우리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될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한 인간의 한 평생을 또 한 번 희생하든지, 그 몇 배를, 아니 여러분,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반복해 말하겠소. 모든 것을, 반복해 말하겠소. 모든 것을 내걸 각오를 해야 하오! 이 경우엔 절약의 원칙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오. 본인의 뜻을 여러분들이 이해하리라 믿고 있소." 

 회색 인간들 사이에 흥분이 점점 고조되어 모두가 웅성웅성 얘기를 주고 받았다. 다섯 번째 연사가 벌떡 일어나 격렬하게 두 손을 휘둘렀다. 

 "조용히, 조용히 하시오!"라고 그는 외쳤다. "지금 발언한 동료께서는 유감스럽게도 온갖 비관적인 가능성만을 시사하는 데 그쳤소. 하지만 그에 대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건지 본인 자신 솔직히 말해 모르겠소! 그는 우리가 모든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소. ―좋소!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했소. 그것도 찬성이오! 우리가 저장해 놓은 재산을 취급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소. ―좋소! 그렇지만 사실 이 모든 주장은 단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소!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는 그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소! 이른바 모모라는 소녀가 우리에 맞서 무슨 장비를 갖추고 나타날지 우리 중의 누구도 모르오! 우리가 맞서게 될 위험이 어떤 건지 우리 중의 누구도 모르오.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우선 풀어야 할 문제인 것이오!" 

 장내의 웅성거림은 점점 더해 갔다. 모두가 뒤섞여 고함을 치고, 어떤 자는 두 주먹으로 탁상을 내려치고 어떤 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치고 야단이었다. 모두들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여섯 번째 연사가 가까스로 청중을 가라앉혔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가 거듭 진정을 호소하는 투로 말을 꺼내자 드디어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렇지만 여러분, 제발 냉정을 되찾으시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냉철한 이성이오. 모모라는 소녀애가 이른바 모(某)박사로부터―어떤 장비를 갖추고든―돌아 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경우 우리는 결코 우리가 직접 나서서 맞서 싸울 필요가 없소. 우리 자신들도 그렇게 만나는 일에 적성(適性)을 못 갖고 있다고 보고 있소. 그 동안 해체되어 버린 우리의 동료 사원 BLW/553/C 호의 슬픈 운명의 경우에서, 우리는 그 점을 뼈아프게 목격하지 않았소! 그런 개인적 접촉은 결코 필요치 않소. 우리는 인간들 중에 충분한 조력자(助力者)를 갖고 있오! 이런 눈에 띄지 않는 세련된 방법을 적용한다면, 여러분, 우리 자신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서도 모모라는 소녀와, 그 소녀가 야기하는 위험을 세상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오. 이런 조처를 쓰면 경제적일 것이오. 우리를 위해서 위험이 없고 반드시 효과적일 것이오." 

 대부분 간부진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제안은 그들 모두에게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회의석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있던 일곱 번째 연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필시 이 제안이 즉석에서 채택되었을는지 모른다. 

 "여러분,"하고 그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지금껏 이 모모라는 소녀에게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거듭 생각했소. 솔직히 말해서 두려운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하지만 두려움이란, 여러분, 좋은 생각의 훼방꾼이오. 본인이 보기에는, 실은 우리의 절호의 찬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쳤소. 이런 격언이 있지요. 정복할 수 없는 상대는 친구로 만들라는. 이 모모라는 소녀를 우리편으로 끌어 들일 생각은 왜 안하시오?" 

 "옳소, 옳소!" 몇 음성이 소리쳤다.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하시오!" 

 "우리로서는 처음부터 찾으려 해도 불가능했던 그 길을, 이른바 모(某)박사 집으로 가는 그 길을, 이 아이가 과연 찾아냈다는 건 분명하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언제라도 그 길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테고, 우리한테 그 길을 안내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럼 우리는 우리 식으로 그 모(某)박사와 협상을 벌일 수 있소. 본인이 장담컨대, 우리는 쉽게 그 자를 설득할 수 있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일단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그 다음에야 굳이 구차스럽게 시간, 분, 초를 긁어들이려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럴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인간의 시간을 몽땅 수중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인간의 시간을 가진 사람은 곧 끝없는 권력을 차지한 셈이오! 여러분, 우리는 목표를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시오! 그러기 위해 여러분 모두가 없애 버리기 원하는 모모라는 소녀가 우리에게 유용(有用)할 것이오!" 

 장내에는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지만"하고 어떤 자가 소리쳤다. "이 모모라는 소녀를 속여 꼬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동료 사원 BLW/553/C 호의 경우를 상기해 보시오. 우리들 누구도 똑 같은 운명을 겪을지 모르는 일이오!" 

 "대체 누가 속여서 꼬인다고 했소?" 아까 연사가 대답했다. "우리는 물론 우리 계획을 기탄없이 알려 주는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하고 다른 자가 손짓을 하며 외쳤다. "그 꼬마는 절대 협조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렇게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다고 보고 있소, 동지." 아홉 번째 연사가 논쟁에 끼어들었다. "우리는 이 꼬마를 유혹할 수 있는 미끼를 아주 자연스럽게 제공해야 할 것이오. 예를 들면, 그 애가 원하는대로 시간을 주기로 약속한다든가……." 

 "당연히 말로만 그렇게 약속하고 안 지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그 새에 끼어들어 소리쳤다.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이오!" 아홉 번째 연사는 대답하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가 진심으로 제의하지 않으면 그 꼬마가 진상(眞相)을 당장 파악할 것이오." 

 "안 돼오, 그건 안될 말이오!" 의장이 소리를 치며 의석을 꽝 쳤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 실제로 꼬마가 원하는대로 시간을 주게 된다면, 그건 우리로서는 엄청난 재산의 손실을 가져올 것이오!" 

 "그건 문제되지 않소." 연사는 진정시키는 투로 말했다. "어린애 하나가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많겠소? 당연히, 그것은 한계가 있는, 얼마 안 되는 손실일 것이오. 그 대신 우리가 받게 될 전체를 생각해 보시오! 전 인류의 시간인 것이오! 그것을 위해 모모가 낭비한 얼마 안 되는 시간이야 기타 잡비 항목에 치부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래야지요. 엄청난 이득을 생각해 보시오, 여러분!" 

 연사는 착석했고 모두들 그가 말한 이득을 생각했다. 

 "그렇긴 해도,"하고 여섯 번째 연사가 이윽고 입을 떼었다. "그것은 안되오." 

 "어째서 안되오?" 

 "간단한 이유에서요. 이 소녀는 유감스럽게도, 어쨌든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이미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을 미끼로 매수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오." 

 "그럼, 우리는 우선 이 아이한테서 시간을 빼앗아야겠소." 아홉 번째 연사가 대답했다. 

 "아, 동지." 의장은 맥이 풀려 말했다.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소.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아이한테 한 치도 접근을 못했소. 이 점이 바로 문제인 것이오." 

 간부진의 긴 열에서 실망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안이 하나 있소." 열 번째 연사가 말했다. "허락해 주시겠소?" 

 "말씀하시오." 의장이 말했다. 

 그 연사는 의장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 말을 이었다. "이 소녀는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고 살고 있소. 이 아이는 자기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선사하기를 좋아하지요. 그렇지만 시간을 같이 나눌 대상이 한 사람도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보시오. 

 소녀가 자진해서 우리 계획을 뒷받침해 주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이 아이의 친구들을 상대해야 될 것 같소." 

 그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 분류함을 꺼내 뒤적거렸다. "누구보다도 도로청소부 베포라는 자와 여행안내원 지지라는 젊은이가 문제의 대상이오. 그리고 또 여기 모모를 정기적으로 찾아 가는 어린애들의 명단이 차례대로 있소. 보시다시피, 여러분, 대단한 일이 아니오! 

 우리는 단지 이 모든 인물들을 모모의 손에 닿지 않게 떼어 놓는 것이오. 그러면 갈 데 없는 모모는 완전히 외톨이가 될 것이오. 그 뒤에야 그 애의 많은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건 무거운 짐이지요. 그렇구 말구요. 차라리 저주스러운 것이지요! 조만간 이 꼬마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고 나서, 여러분, 우리가 현장에 나타나서, 우리 조건을 제시하는 거요. 십분의 일초에 천년을 걸고 장담하지요. 그렇게 되면 이 꼬마도 친구들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한테 앞서 말한 길을 안내할 것이오." 

 지금껏 의기소침해서 시선을 떨구고 있던 회색 도당들은 고개를 들었다. 의기양양한 엷은 미소가 그들의 입술에 감돌았다. 그들은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가 끝없는 거리와 샛길로 메아리지며 돌사태처럼 울렸다. 

 

12  시간의 원천(源泉)에 간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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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엄청나게 큰 홀에 서 있었다. 그것은 어느 최대 규모의 교회당보다도, 어느 최대 공간의 역 대합실보다도 큰 방이었다. 아득히 높이 으스름한 여명(黎明)에 묻혀 있어, 눈에 보이기보다는 짐작될 뿐인 천장을 웅장한 기둥들이 받쳐 주고 있었다.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홀을 밝히고 있는 황금빛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촛불에서 나오고 있었다. 곳곳에 꽂혀 있는 초의 불꽃들은, 마치 반짝이는 그림 물감으로 칠해진 것처럼, 그래서 빛을 발하는 데 초를 전혀 소모하지 않는 것처럼, 움직임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모가 방으로 들어서며 들었던 수천 가지의 똑딱똑딱, 재깍재깍, 땡땡 하는 울림의 하모니는 온갖 크기와 모양의, 끝도 없이 많은 시계가 내는 소리였다. 시계들은 긴 탁자 위에, 유리 진열장 속에, 황금빛 시렁 위에, 그리고 끝없는 선반 위에 놓이거나 세워져 있었다.

 그 중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조그만 회중시계도 있었고, 평범한 양철 괘종시계도 있었고, 모래시계, 춤추는 인형이 얹혀 있는 오르겔 시계, 해시계, 나무로 된 시계, 돌로 된 시계, 유리로 된 시계, 그리고 심지어는 뿜어나는 분수로 움직여지는 시계들까지 있었다. 벽에는 온갖 종류의 뻐꾹이 시계며, 흔들리는 육중한 추(錘)가 달린 다른 종류의 시계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중의 어떤 시계의 추는 장중하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고, 어떤 것은 조그만 추가 잽싸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 층 높이에 이르기까지 나선형의 층계로 이어지는 순회로(巡回路)가 홀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더 높이 두 번째의 순회로가, 그 위로 세 번째의, 그 위에 네 번째 순회로가 올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를 가나 각종 시계들이 걸려 있거나 세워져 있고 혹은 놓여져 있었다. 그 중에는 지구의 모든 일정한 지점의 시각을 가리켜 주는 지구본 모양의 만국 표준시계들도 있었고, 태양, 달, 별이 있는 커다란 천체의(天體儀)들도 있었다. 이 홀의 중앙에는 온통 입식(立式) 시계로 이루어진 숲이 솟아 있었다. 보통 입식시계에서부터 그야말로 탑시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시계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어디에서고 시각을 알리느라 울리거나 치는 시계 소리가 들렸다. 사실 이 모든 시계는 제각기 다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합쳐 울려 오는 소리는 결코 불협화음이 아니라 여름의 숲 속에서처럼 살랑거리는 은은한 화음이었다. 

 모모는 돌아다니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 온갖 진풍경을 열심히 구경했다. 지금 막 모모는 춤을 추며 두 손을 마주 내밀고 서 있는 작은 남녀의 상이 얹힌, 예쁜 장식의 오르겔 시계 앞에 섰다. 그리고 그 형상의 움직이는 모양을 보려고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려는 순간 갑자기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네가 돌아왔구나, 카시오페이아(星座 이름. 희랍 신화에 나오는 안드로메다의 어머니 이름―옮긴이). 꼬마 모모는 안 데려 왔니?" 

 꼬마 모모는 몸을 돌렸다. 그곳, 입식 시계 숲 사이로 난 좁은 길에서, 한 은발의 노인이 바닥에 앉아 있는 거북이를 향해 몸을 굽힌 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금실로 수놓은 긴 웃도리에 푸른 비단 반바지를 입고, 하얀 긴 양말에 커다란 황금 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손목과 목 언저리에는 웃도리의 레이스가 굽이치고 있었고, 은말은 뒷머리에서 작은 다발로 땋아져 있었다. 모모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차림이 두 세기 전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당장 알아 보았을 것이다. 

 "뭐라구?" 노인은 ―여전히 거북이한테 몸을 굽힌 채―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벌써 여기 와 있다구? 대체 어디 있니?" 

 그는 베포 노인의 것과 비슷하지만 황금으로 된 점만이 다른, 조그만 안경을 꺼내 쓰고는 주위를 살폈다. 

 "저, 여기 있어요!" 모모가 소리쳤다. 

 노인은 기쁨에 가득 찬 웃음을 띠고 두 손을 벌이며 모모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다가오는 동안 그의 모습은 한 걸음마다 젊어지는 것처럼 모모의 눈에 비쳤다. 그리고 마침내 모모 앞에 서서 두 손을 맞잡고 뜨겁게 흔들 때, 그의 모습은 모모 또래와 비슷한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반갑다!" 그는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초공간(超空間)의 집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꼬마 모모. 나를 소개하지. 나는 호라 박사야. 세쿤두스 미누티우스 호라." 

 "저를 정말 기다리고 계셨어요?" 모모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기다렸구 말구! 너를 데려오도록 내가 직접 거북이 카시오페이아를 보냈는걸." 

 그는 조끼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회중시계를 꺼내어 뚜껑을 활짝 열었다. 

 "어김없이 기막히게 정각에 도착했구나"라고 그는 웃음을 머금고 힘주어 말하더니 모모에게 시계를 내밀었다. 

 모모는 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숫자판에는 시계 바늘도 숫자도 없이 다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맞물려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두 개의 섬세한, 지극히 섬세한 태엽이 있을 뿐이었다. 태엽이 서로 맞물리는 부분에서 이따금 작은 불꽃이 반짝였다. 

 "이것은,"하고 호라 박사가 말했다. "별시계란다. 이 시계는 아주 진기한 별의 시간을 어김없이 가리켜 주고 있지. 지금 막 이 별의 시간이 시작된거야." 

 "대체 별의 시간이란 무엇인가요?" 모모가 물었다. 

 "들어 봐, 천체의 운행 중에는 비상한 순간이 간혹 있단다"하고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모든 사물과 존재가, 저 아득한 곳의 별들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 만큼 완벽하게 함께 작용을 해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태를 가능케 하는 그런 순간이 말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대체로 인간들은 이 순간을 이용할 줄을 몰라. 그래서 별의 시간은 모르는 새에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 때가 대부분이야. 그렇지만 이 시간을 알아 보는 사람이 존재하는 때면, 세상에는 위대한 사태가 찾아오는거야." 

 "아마도,"하고 모모가 말했다. "그런 시계를 갖고 있으면 되겠지요." 

 호라 박사는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시계만 갖고는 아무 소용이 없어. 시계를 읽을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해." 

 그는 시계를 찰깍 닫고 다시 조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모모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 보는 것을 의식하고는, 그는 생각에 잠겨 자기를 내려다 보더니 이마에 주름을 모으며 말했다. "아, 이제 보니 나 자신이 정작 약간 지각을 한 셈이구나, 유행에서 말이다. 내가 이렇게 주의력이 모자란다니까! 당장 고쳐 입어야 겠어." 

 그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높은 스탠드 칼라의 예복 차림으로 모모 앞에 섰다. 

 "이제 좀 나아졌니?" 그는 자신 없는 투로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어리둥절하고 있는 모모의 표정을 보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아직 제대로가 아니지! 대체 내가 정신을 어디 두고 있담!"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더니 이번엔 느닷없이 모모도, 그 누구도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백년 후에야 유행될 옷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아니니?"라고 그는 또 물었다. "자, 분명히 이것도 벗어 던져야 될 모양이구나! 잠간, 다시 한번 해 볼께." 

 그는 세 번째로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마침내 오늘날 흔히 보는 평상복 차림으로 꼬마 앞에 섰다. 

 "이제 제대로 됐지?"라고 말하며 그는 모모를 보고 눈을 껌벅였다. "나 때문에 공연히 놀라지 않았다면 좋겠구나, 모모야. 이건 내가 하는 작은 장난일 뿐이야. 이제 식탁으로 가실까요, 꼬마 아가씨.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어. 퍽 먼 길을 걸어 왔지. 식사가 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구나." 

 그는 모모의 손을 잡고 시계 숲 한가운데로 안내했다. 거북이는 약간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좁은 길은 미로(迷路)의 한가운데처럼 종횡으로 뒤얽혀 뚫려 있었고, 마침내는 몇 개의 거대한 장롱시계가 뒷벽으로 되어 있는 작은 방으로 이어졌다. 방 한쪽 구석에는 아아치 모양의 발이 달린 작은 식탁 하나, 아담한 소파와 거기에 어울리는 푹신한 안락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이곳 역시 움직임 없는 촛불의 황금빛으로 조명되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배가 불룩한 황금 주전자 하나와 두 벌의 꼬마 찻잔, 접시, 꼬마 숟갈과 나이프가 차려져 있었는데, 온통 번쩍이는 황금으로 된 것이었다. 작은 바구니에는 황금갈색의 바삭바삭한 동그란 빵이 담겨 있었고, 작은 사발 안에는 황금빛 버터, 또 다른 사발에는 마치 황금의 젖처럼 보이는 꿀이 담겨 있었다. 호라 박사는 배가 불룩한 주전자에서 두 개의 잔에다 초콜렛을 따르더니 주인 티를 내면서 말했다. "자, 꼬마 손님, 많이 들어요!" 

 호라 박사가 두 번 권할 필요도 없었다. 마실 수 있는 초콜렛이 있다는사실조차 모모는 지금껏 알지 못했다. 또한 동그란 빵에 버터와 꿀을 발라 먹는 것도 모모의 인생에서는 희귀한 일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지금처럼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모는 처음에는 완전히 음식에 정신이 팔려서 딴 생각을 할 겨를 없이 배가 부를 때까지 먹고 있었다. 음식을 먹는 중에 이상스럽게도 온갖 피곤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밤새 한잠도 못 잤는데도 상쾌하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먹는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은 한결 맛있었다. 며칠이고 계속 그렇게 먹을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었다. 

 호라 박사는 다정하게 모모를 바라보며, 우선은 먹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말없이 빈틈 없는 태도로 가만히 있었다. 그는 이 꼬마 손님이 몇 년 치의 시장기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가 다시 점점 나이가 들어 보이고, 마침내 은발의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바로 이 이유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모모가 나이프를 잘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는 동그란 빵에 버터를 발라 접시에 놔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별로 먹지 않고, 그야말로 대접상 먹는 시늉만 했다. 

 하지만 이윽고 모모도 배가 불러왔다. 꼬마는 코코아를 마시면서 황금빛 찻잔 가장자리 너머로 주인을 유심히 관찰하며, 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정체의 사람일까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코 보통 인물은 아니라는 것까지는 물론 눈치해었지만, 사실 지금껏 그에 관해 이름 말고는 더 이상 근본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하고 모모는 찻잔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거북이를 시켜 저를 데려오게 하셨나요?" 

 "회색 도당들한테서 너를 지켜 주려고." 호라 박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자들이 너를 사방에서 찾고 있는데, 너는 여기 내 집에 있어야만 그들을 피해 안전할 수 있거든."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하나 보지요?" 모모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 얘야." 호라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왜요?"하고 모모는 물었다. 

 "그 자들은 너를 두려워 해."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들 편에서 보면 가장 불리한 일을 네가 했거던." 

 "저는 그 사람들한테 아무 일도 안했어요." 모모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너는 그 도당 중의 한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네 비밀을 털어 놓게 만들었어. 게다가 그 비밀을 네 친구들한테 얘기했어. 너희들은 심지어 모든 사람들한테 회색 도당의 진상을 폭로하려 했었어. 그만하면 그들 편에서 보면 네가 철천지 원수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겠니?" 

 "그렇지만 우리는 도시 한가운데를 누비면서 걸어 왔는데요. 거북이랑 저랑요."하고 모모가 말했다. "그 자들이 사방에서 저를 뒤져 찾았다면 쉽사리 잡아냈을 텐데요. 뿐 아니라 우리는 굉장히 느림보로 걸어 왔어요." 

 호라 박사는, 어느 새 다시 발치에 와 앉은 거북이를 무릎에 앉히고 목을 살살 문질렀다. 

 "어떻게 생각하니, 카시오페이아?" 그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자들이 너희를 쉽게 잡을 수 있었겠니?" 

 거북이의 등판에 "절대로 아니오!"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게다가 그 글자는 너무나 익살맞게 껌뻑거려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역력히 들리는 느낌이었다. 

 "카시오페이아는"하고 호라 박사가 설명했다. "말하자면, 미래를 약간 앞질러 내다 볼 줄 안단다. 아주 멀리는 못보지만, 어쨌든 약 반시간 정도는." 

 "꼭!"이라고 거북이 등에 나타났다. 

 "미안하다"하고 호라 박사는 정정했다. "꼭 반시간. 거북이는 앞으로 반시간 안에 무슨 일이 있을지를 확실히 예견한단다. 그러니까 자연히, 이를테면 회색 도당을 만나게 될지 여부도 미리 알고 있는거야." 

 "아, 그래요." 모모는 신기해하며 말했다. "그것 참 편리하네요! 그러니까 어디 어디에서는 회색 도당과 부딪치리라는 걸 미리 알고, 그냥 딴 길로 가면 되는군요?" 

 "그렇지 않아"하고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일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아. 미리 아는 사건에 대해 거북이 자신이 변경시킬 수는 없어. 거북이는 실제로 일어날 사건만 아니까 말야. 그러니까 거북이는 어디 어디서 회색 도당을 만나게 될 거라고 미리 알게된다면, 결국 피할 수 없이 그들을 만나게 되는거야. 그 사실에 관해선 거북이 자신이 어쩔 수가 없어." 

 "이해할 수가 없네요." 모모는 약간 실망해서 말했다. "그럼 약간 미리 안다는 것이 도대체 아무 소용이 없네요." 

 "그래도 때로는 소용이 있지."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예컨대, 너의 경우에 있어서 거북이는 이러이러한 길로 가면 회색 도당을 안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거던. 그것만 해도 벌써 훨씬 쓸모가 있지 않니?" 

 모모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꼬마의 머리 속은 풀려진 실뭉치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아무튼 너랑 네 친구들에게, 말하자면"하고 호라 박사는 말을 이었다. "치하(致賀)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들의 플래카드와 격문은 참 감동적이었어." 

 "그럼 그걸 읽어 보셨나요?"하고 모모는 신이 나서 물었다. 

 "전부 읽었지." 호라 박사는 말했다. "한 자(字), 한 자!" 

 "참 유감스럽게도"하고 모모는 말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읽은 것 같아요." 

 호라 박사도 유감이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회색 도당이 그렇게 만들었어." 

 "그렇게 전부 잘 아세요?" 모모가 캐물었다. 

 호라 박사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자들을 알고 있고, 그 편에서도 나를 알고 있지." 

 모모는 이 대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벌써 그 자들한테 여러 번 가셨었나요?" 

 "아니, 한번도. 나는 이 초공간의 집을 결코 떠나지 않아." 

 "그렇다면 그 회색 도당편에선, 저……여기를 가끔 방문하나요?" 

 호라 박사는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말아라, 꼬마 모모. 그 자들은 이 안으로 결코 들어올 수 없어. 설령 그 자들이 초시간가(街)로 통하는 거리를 안다손쳐도.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몰라." 

 모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라 박사의 설명에 안심은 되었지만 정작 박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어떻게 그 모든 걸 알고 계시나요?"하고 모모는 입을 떼었다. "우리들의 플래카드며 회색 도당에 관한 일을요." 

 "나는 회색 도당을 쉬지 않고 관찰하고 있고, 그 도당과 연관된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있거든"하고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너랑 너의 친구들도 보게 되었던거야." 

 "그렇지만 절대 집 밖으로 나가시지 않는다면서요?"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단다." 호라 박사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는 눈에 띄게 다시 젊어졌다. "나는 만물투시(萬物透視) 안경을 갖고 있거든." 그러면서 그는 조그만 황금 안경을 벗어 모모한테 건네 주었다. 

 "한번 들여다 보겠니?" 

 모모는 안경을 쓰고 눈을 깜빡이며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도대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네요." 모모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몽롱한 색채와 빛과 그늘의 소용돌이였던 것이다. 모모는 사뭇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 호라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그렇단다. 만물투시경으로 보는 법은 그리 간단치가 않아. 그렇지만 너도 곧 익숙하게 될거야." 

 그는 몸을 일으켜 모모의 의자 뒤로 돌아가 두 손으로 꼬마의 코에 걸쳐진 안경의 테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당장 장면이 선명해졌다. 

 맨먼저 모모는, 야릇한 빛으로 휩싸인 문제의 도시 구역 언저리에서 세 대의 자동차를 타고 앉은 회색 일당을 보았다. 그들은 막 자동차를 되돌릴 참이었다. 

 그리고 더 멀리 내다보자 이번엔 다른 일당이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흥분해서 손짓을 하고 떠들어대면서 무슨 소식을 전하는 것같은 장면이 보였다. 

 "그 자들은 너에 관해 말하고 있어"하고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그들은 네가 자기네 포위망을 빠져나간 걸 이해할 수가 없는 거야." 

 "도대체 저 이들은 왜 저렇게 회색 얼굴을 하고 있나요?" 모모는 계속 안경을 들여다 보면서 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종의 죽음의 요소로 생명이 지탱되기 때문이야"하고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너도 알잖니, 그들은 인간의 삶(生)에서 훔쳐온 시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렇지만 이 시간은 그것의 참된 소유자를 떠나면 문자 그대로 죽은 시간이란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각기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의 시간인 한에서만, 그 시간은 생명을 갖게 되는거야." 

 "그럼 회색 도당은 결코 인간이 아니군요?" 

 "아니지. 그들은 다만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을 뿐이야." 

 "그렇담, 대체 그들은 무엇인가요?" 

 "실제로는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럼 어디서 왔지요?" 

 "그들은, 인간이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에 생성된 존재야. 가능성을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생겨나. 그런데다 이제 인간들은 그들에게 지배할 수 있는 여지(餘地)까지 주고 있어. 그리고 이 여지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은 인간을 지배할 수가 있어." 

 "그럼 그들이 더 이상 시간을 훔칠 수 없게 된다면요?" 

 "그럼 그들은 애당초의 출발점이었던 무(無)로 되돌아 가겠지." 

 호라 박사는 모모한테서 안경을 벗겨 꽂아 넣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한참 뒤 말을 이었다. "그들은 벌써 인간 가운데 퍽 많은 조력자를 갖고 있어. 그것이 불리한 일이야." 

 "저는,"하고 모모는 단호히 말했다. "저 자신의 시간을 누구한테도 뺏기지 않겠어요!" 

 "나도 그러길 바란단다." 호라 박사는 말했다. "이리 오렴, 모모. 내 수집품을 보여주마." 

 이 때 그의 모습은 문득 다시 노인처럼 되었다. 

 그는 모모의 손을 잡고 커다란 홀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이런저런 갖가지 시계들을 가리켜 보이고, 장난감 시계를 돌려 보게하고, 또 천체의(天體儀)를 구경시켜 주었다. 이렇게 자기의 꼬마 손님이 온갖 신기한 물건을 보고 즐거워하는 장면 앞에서 그의 모습도 점점 다시 젊어졌다. 

 "수수께끼 풀기를 좋아하니?" 그는 계속 걸어가며 예사롭게 물었다. 

 "아, 네, 참 좋아해요!"하고 모모가 대답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래." 호라 박사는 웃음 띤 얼굴로 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참 어려운거다. 그걸 풀 수 있는 사람은 퍽 드물단다." 

 "좋아요." 모모가 말했다. "그러면 그것을 외어 두었다가 나중에 친구들한테 풀어 보게 하겠어요." 

 "잔뜩 기대를 하고 있단다"하고 호라 박사가 대꾸했다. "네가 답을 풀어낼 수 있을지. 잘 들어 봐. 


    세 형제가 한 집안에 살고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실제로 제가끔이야. 그런데도 구별을 해서 보려하면 제가끔 다른 둘이랑 같아 보이는 거야. 

 제일 맏형은 거기에 없어. 이제 막 집으로 오고 있어. 

 둘째 형은 거기에 없어. 그는 벌써 나가 버렸어. 

 다만 세째만이 거기에 있어. 셋 중의 막내만이. 

 사실 막내가 없으면 다른 둘도 있을 수가 없어. 

 그런데도 사실 문제가 되고 있는 세째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첫째가 둘째로 변화하는 데 있어. 사실 막내를 보려고 하면 우리는 언제나 다른 둘 중의 하나를 볼 뿐인거야. 

 자, 이제 말해 봐. 이 세 형제는 어쩌면 하나일까? 

 아니면 둘 뿐일까? 또는 결국……아무도 없는 걸까? 

 꼬마야, 이 형제들의 이름을 맞출 수 있다면, 

 너는 셋의 막강한 지배자를 알아 맞추는 셈이야. 

 그들은 같이 한 커다란 왕국을 다스리고 있어. 

 동시에 그들 자신이 왕국인거야! 그 왕국 안에서 그들은 꼭 같애."

 


 호라 박사는 모모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북돋아 주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모는 긴장해서 귀를 기울였다. 탁월한 기억력을 가진 모모는 수수께끼를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반복했다. 

 "어휴!"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려운데요. 뭔지 전혀 짐작조차 안가요. 어떻게 실마리를 잡아야할지 영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봐." 호라 박사는 말했다. 

 모모는 다시 한번 수수께끼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읊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되겠어요." 모모는 손을 들었다. 

 그 새에 거북이가 뒤따라 왔다. 거북이는 호라 박사 옆에 앉아 모모를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카시오페이아,"하고 호라 박사가 말했다. "너는 뭐든 반시간 전에 미리 알 수 있지. 어디 모모가 수수께끼를 풀겠니?" 

 "풀겠어요!"라는 글씨가 카시오페이아의 등판에 나타났다. 

 "이것 봐!" 호라 박사는 모모를 향해 말했다. "네 힘으로 풀게 될 거야. 카시오페이아는 틀림없어." 

 모모는 얼굴을 찡그리고 다시 온 정신을 쏟아 생각을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세 형제가 한 집안에 살고 있을까?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수수께끼에서 형제들이란 늘, 사과씨라든가 이빨이든가, 아무튼 그런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에의 세 형제는 서로 변신(變身)을 하는 것이었다. 서로 변신하는 것이 무엇이람? 모모는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거기, 움직이지 않는 불꽃을 태우고 있는 양초들이 즐비해 있었다. 밀랍이 불꽃을 통해 빛으로 화하고 있었다. 하긴, 그것은 세 형제였다. 하지만 들어 맞지 않는 것이었다. 셋이 모두 한꺼번에 거기 있지 않은가. 그것 중의 둘은 거기에 없어야만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해답은 어쩌면 꽃, 열매, 씨앗같은 것인지도 몰라. 과연 상당히 많은 점이 들어 맞았다. 그 셋 중에서 씨앗은 가장 작지 않은가. 그리고 씨앗이 거기 있을 때 나머지 둘은 거기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씨앗이 없으면 다른 둘도 있을 수 없잖은가. 하지만 이것 역시 해답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씨앗은 어쨌든 얼마든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수수께끼에선 셋 중의 막내를 보려면 으례 다른 형제 중의 하나를 보게 된다 하잖았는가. 

 모모의 생각은 방황했다. 아무래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도저히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카시오페이아는 알아 맞출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모모는 다시 처음부터 수수께끼의 내용을 차근차근 되씹어 읊어 보았다. 

 모모가 "제일 맏형은 거기에 없어, 이제 막 집으로 오고 있어……"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거북이가 모모를 향해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거북이의 등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야!"라는 말이 나타났다 곧 꺼졌다. 

 "가만 있어, 카시오페이아!" 호라 박사는 돌아 보지 않은 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힌트를 주지 말아! 모모는 혼자 힘으로 풀 수 있어." 

 모모는 거북이 등의 암호를 물론 보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곰곰 생각하기 시작했다. 카시오페이아가 아는 것이 대체 뭐람? 거북이는 모모가 수수께끼를 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뜻도 밝혀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거북이는 또 무엇을 아는가? 거북이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거북이가 알고 있는 것은……. 

 "미래!" 모모는 크게 소리쳤다. "맏형은 거기에 없어, 이제 막 집으로 오고 있어. 그것은 미래예요!"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째는,"하고 모모는 계속 이어 말했다. "거기에 없어, 벌써 나가 버렸어. 그럼 이거 과거예요!" 

 다시금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쁨에 찬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하고 모모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지금부터가 어려워요. 대체 세째가 뭘까요? 셋 중의 막내라고 했어요. 막내가 없으면 다른 둘도 없다고 했지요. 그리고 세째는 또 거기에 있는 유일한 존재예요." 

 모모는 곰곰 생각하다가 불쑥 소리쳤다. "그것은 지금이에요! 이 순간이에요! 과거란 지금 막 지나간 순간들이고, 미래란 이제 막 오고 있는 순간들이에요! 그러니까 만약 현재라는 게 없으면 둘 다 없을거예요. 정말 맞았어요!" 

 모모의 뺨은 열이 나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모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 귀절은 무슨 뜻인가요? 


   그런데도 사실 문제가 되고 있는 세째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첫째가 둘째로 변화하는 데 있어…….

 


 그러니까 현재란 미래가 과거로 변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뜻이군요!" 

 모모는 놀라와하며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정말 맞았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순간이란 애당초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과거와 미래만이 있는 셈이지요? 사실 지금 내가, 예를 들면 이 순간에, 순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벌써 어느새 과거가 되어 버린 것이에요! 아, 이제 알겠어요. '사실 막내를 보려고 하면, 언제든지 다른 둘 중의 하나를 볼 뿐인 거야'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뿐만 아니라 이젠 다른 나머지 것도 이해를 하겠어요. 근본적으로 세 형제 중의 하나만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현재만, 아니면 과거나 미래만. 아니면 또 전혀 존재치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다른 형제들 역시 존재하는 경우에만, 각기 존재하니까요! 온통 머리가 뱅뱅 도는 것 같네요!" 

 "그렇지만 수수께끼는 아직 안 끝났어." 호라 박사가 말했다. "같이 다스리고, 동시에 그들 자신이기도 한 커다란 왕국이 대체 뭐겠니?" 

 모모는 어쩔 줄 몰라 호라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무엇일 수 있담? 대체 과거, 현재, 미래를 합한 것이 무엇이람? 

 모모는 거대한 홀 안을 휘둘러 보았다. 꼬마의 시선은 수천 수만가지의 시계 위를 헤맸다. 그러더니 문득 눈에 빛을 발했다. 

 "시간이오!" 모모는 소리치며 손뼉을 쳤다. "그래요, 그건 시간이에요! 시간이 바로 왕국이에요!" 그리고 모모는 기뻐서 몇 차례 깡충깡충 뛰었다. 

 "자, 그럼 세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이 무엇인가 말해 봐라!" 호라 박사가 말했다. 

 "그건 세상이에요." 모모가 대답했다. 

 "브라보!" 호라 박사 역시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정말 용타, 모모! 수수께끼 풀기 선수로구나! 정말 나도 기쁘단다!" 

 "저도 기뻐요!" 모모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자기가 수수께끼를 푼 것을 호라 박사가 왜 그토록 기뻐하는지 약간 의아스러웠다. 

 시계가 진열된 홀을 헤치며 계속 걸어가면서 호라 박사는 다른 진기한 물건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모모의 머리 속은 여전히 수수께끼에 매달려 있었다. 

 "말씀해 주세요." 이윽고 모모는 입을 떼었다. "도대체 시간이라는 게 원래 어떤 존재이지요?" 

 "네가 지금 막 알아 맞추지 않았니?" 호라 박사는 말했다. 

 "아니, 저……"하고 모모는 말했다. "시간 자체, 그것은 어쨌든 무엇인가에 틀림없어요. 시간은 엄연히 존재해요. 대체 시간이란 실제로 무엇일까요?" 

 "네가 그것까지도 대답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호라 박사는 말했다. 

 모모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시간은 존재하고 있어요." 모모는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건 확실해요. 하지만 그것을 잡아 볼 수는 없어요. 또 묶어 놓을 수도 없구요. 어쩌면 시간은 향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시간은 또한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는 그 무엇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에선가 오고 있는 원천을 가진 게 아닐까요? 아니면……, 아니예요 이제 알겠어요! 어쩌면 시간은 항상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종의 음악일 거예요. 사실 저는 벌써 여러 번 그런 음악을 들었던 것 같아요. 아주 나직한." 

 "알고 있다"하고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실 내가 너를 내 집으로 부를 수 있었단다." 

 "그렇지만 거기엔 무엇인가 또 다른 것이 있어요." 모모는 계속 생각에 매달리며 말했다. "그 음악은 사실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내 마음 깊숙히 파고 들면서 울렸어요. 아마 시간은 그런 것일 거예요." 모모는 열적은듯 입을 다물었다가 어쩔 줄 몰라하며 덧붙였다. "저……, 물 위의 파도가 바람으로 인해 생겨나듯이요. 아, 아무래도 제가 바보같은 소리를 지껄인 것 같네요!" 

 "아니," 호라 박사는 말했다. "정말 잘 표현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너한테 비밀을 하나 털어 놓으마. 이곳 초시간의 골목 안, 초공간의 집에서 모든 인간의 시간이 나간단다." 

 모모는 경외(敬畏)의 시선으로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박사님이 직접 시간을 만드세요?" 

 호라 박사는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다, 꼬마야. 나는 그냥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야. 내가 맡은 일은 모든 인간 하나하나한테, 정해진 시간을 나누어 주는 일이란다." 

 "그럼 시간 도둑들이 인간들한테서 시간을 다시는 못 훔쳐가게 박사님께서 간단히 조정하실 수는 없나요?" 모모는 물었다. 

 "아니, 그건 내 힘 밖의 일이야." 호라 박사는 말했다. "인간들이 자기네들의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는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야. 사람들 스스로가 시간을 보호해야 해. 나는 그저 나누어 줄 수 있을 뿐이야." 

 모모는 홀을 휘둘러 보고 나서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시계를 갖고 계시나요? 한사람 몫으로 하나씩, 네?" 

 "아니다, 모모."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이 시계들은 단지 내 취미일 뿐이야. 이것들은 모든 인간이 가슴 속에 갖고 있는 기관의 아주 엉성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단다. 사실 빛을 보기 위해 눈을 갖고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인간은 시간을 감지(感知)하기 위해 심장을 갖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심장으로 감지되지 않은 모든 시간은 잃어 버린 시간이란다. 장님 앞의 무지개 빛깔이나 귀머거리한테의 새의 지저귐처럼.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고동은 치는데도 아무 것도 감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심장이 수두룩하단다." 

 "그럼 저의 심장이 고동치기를 멎어 버리면 어떻게 되지요?" 모모가 물었다. 

 "그럼,"하고 박사는 대답했다. "네 몫의 시간도 정지한단다, 꼬마야. 너 자신이 바로 시간을 타고, 즉 네 몫의 모든 밤과 낮, 달(月)과 해(年)를 타고, 거슬러 돌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 너는 네 삶을 타고 애초에 네가 들어 섰던 커다란 은빛 아아치 성문에 이르기까지 되돌아 가는 거야. 그 문을 너는 다시 나가는거야." 

 "그럼 그 바깥 쪽은 무엇인가요?" 

 "그럼 너는, 네가 종종 아주 은밀히 들었던 음악이 흘러오고 있는 원천에 와 있게 되는 거란다. 그리고 너 자신도 그 원천에 속하게 되는 거야. 너 자신도 그 안에서 하나의 음향을 이루는 거란다." 

 그는 모모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아직도 잘 이해 못하겠니?" 

 "알겠어요." 모모는 나직이 말했다. "알 것 같아요." 

 모모는 온통 거꾸로 된 방향으로 지나왔던 초시간의 거리를 상기하며 물었다. "박사님은 죽음(死)이신가요?" 

 호라 박사는 미소를 머금고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인간들이 죽음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거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면, 아무도 인간에게서 삶의 시간을 훔치지 않을거다." 

 "그렇다면 인간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기만 하면 되겠네요." 모모가 의견을 내 놓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호라 박사는 물었다. "나는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는 매 시간마다 그 사실을 말해 준단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인간들은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 같아. 오히려 두려움을 안겨주는 편의 말을 믿으려고 하는구나. 아무튼 풀 수 없는 수수께끼야." 

 "저는 두렵지 않아요." 모모는 말했다. 

 호라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모를 한참 바라보더니 물었다. "시간이 나오는 원천을 보고 싶니?" 

 "예." 모모는 소근거리듯 말했다. 

 "내가 데려다 주마." 호라 박사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 곳에서는 말을 하면 안돼. 아무 것도 물어서도 안되고 말해서도 안돼. 약속하겠니?" 

 모모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호라 박사는 몸을 굽혀 모모를 덥석 안아 올려 팔에 꽉 껴안았다. 그의 모습은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나이 많은 거인(巨人)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단순한 노인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태고의 고목(古木)처럼, 또는 바위산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모모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것은 모모에게 마치 얼굴에 떨어지는 가볍고 차가운 눈발(雪)처럼 감촉되었다. 

 호라 박사에 안긴 모모는 길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는듯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고 너무나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모모는 자신의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리는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점차, 실제로는 호라 박사의 발자국의 울림같이 느껴졌다. 

 퍽 긴 길이었다. 이윽고 그는 모모를 내려놨다. 그는 바로 모모의 눈 앞에 얼굴을 마주 대고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다 대었다. 이어서 그는 일어서더니 뒤로 물러섰다. 

 황금빛 여명(黎明)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한참만에 모모는 자기가 거대한 원형 지붕 밑에, 그야말로 온 하늘만큼 커 보이는 지붕 밑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이 거대한 지붕은 순전히 황금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 한가운데는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하여 하나의 빛 기둥이 검은 거울처럼 잔잔하고 매끈한, 역시 둥그런 호면(湖面) 위로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호면 바로 위, 빛의 기둥 안쪽에서 무엇인가 밝은 별같은 것이 반짝반짝했다. 그것은 장중하게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모모는 그것이 검은 수면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엄청나게 큰 진자(振子)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두둥실 떠 있을 뿐, 중력(重力)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 별의 진자가 서서히 호수의 가장자리로 점점 가까이 가자, 그곳 깜깜한 물 속에서부터 한송이 거대한 꽃봉오리가 떠올라 왔다. 그리고 진자가 가까와질수록 꽃봉오리는 점점 벌어져서 마침내는 활짝 핀 모습으로 수면 위에 떠 있었다. 

 모모는 일찌기 이토록 찬란한 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온통 광채(光彩)가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같은 꽃이었다. 모모는 그런 색채가 도대체 있다는 것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별의 진자는 한 순간 꽃 위에 머물러 있었다. 모모는 이 광경에 완전히 홀려서 주변의 모든 것을 잊어 버렸다. 다만 꽃의 향기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모모 자신 늘 동경해 왔던 그 무엇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진자는 천천히 흔들리며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진자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 동안, 그 찬란한 꽃이 시들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자, 모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더니 어두운 심연(深淵)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게 아닌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무엇이 영원히 떠나 버린듯, 모모는 크나큰 아픔을 느꼈다. 

 진자가 검은 호수의 한가운데 위에 이르렀을 때, 찬란한 꽃은 완전히 져버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두운 물 속에서 건너편 호면 위로 또 하나의 꽃봉오리가 솟아 올랐다. 그리고 진자가 천천히 이 봉오리에 접근해 가자 한층 더 찬란한 꽃이 활짝 터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모모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관찰하려고 호수를 빙 돌아갔다. 

 이번의 꽃은 앞서 핀 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역시 이 꽃의 빛깔도 모모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꽃이 더욱 풍요하고 진귀해 보이는 것 같았다. 꽃의 향기도 전혀 달랐다. 훨씬 황홀했다. 오래 동안 살펴보면 볼수록 더욱 신비스러운 세세한 부분들이 모모의 눈에 띄었다. 

 하지만 다시금 별의 진자는 방향을 돌렸고, 찬란한 빛은 사라지고 시들어 한 잎 한 잎, 바닥 모를 검은 호수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천천히 진자는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먼젓번과 똑 같은 지점에 이르지 않고 약간 멀리까지 움직여 갔다. 그리고 앞서보다 한 걸음 옆의 지점에서 또 다시 꽃봉오리가 솟아오르더니 서서히 피기 시작했다. 

 이번의 꽃은 모모가 본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꽃 중의 꽃이요, 두 번 있을 수 없는 기적(奇蹟)의 꽃이었다. 

 이 완전한 꽃 역시 시들기 시작하여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보자, 모모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렇지만 호라 박사와 한 약속을 상기하면서 울음을 참았다. 

 역시 또 반대편으로 진자는 한 걸음 더 멀리까지 흔들려 갔고, 새로운 꽃이 어두운 물 속에서 솟아 올라왔다. 

 점차 모모는 새로 피는 꽃은 번번히 앞서 핀 꽃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지금 막 핀 꽃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호수 주변을 돌면서 모모는 꽃이 차례로 솟아올라 피었다가 사라져 가는 광경을 구경했다. 그러면서도 이 광경을 바라보는 일에 조금도 지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차로 모모는 여기서는 자기가 지금껏 깨닫지 못한 일이, 전혀 다른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천장의 한가운데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의 기둥은 그저 눈으로 보이는 광경만이 아니었다―모모는 이제 그것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 그것은 아득히 나무의 수관(樹冠)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살랑거림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살랑거림은 점점 웅장해져서 폭포 소리처럼, 아니면 해안의 바위에 부딪는 바다 물결의 포효(咆哮)처럼 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모는 이 웅장한 울림이 서로 끊임없이 새로이 정렬하고 변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화음(和音)을 이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점점 또렸하게 알아 들었다. 그것은 음악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무엇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모모는 그 소리를 다시금 알아 들었다. 그것은 이미 반짝이는 별 하늘 밑에서 정적에 귀를 기울일 때 종종 들었던, 나직하게 아득히 먼 데서 울려오는것 같았던, 바로 그 음악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 울림들은 점점 더 명징(明澄)해져 갔다. 모모는 이 울리는 빛이야말로 하나하나의 꽃을 여러 꽃들 가운데서 구별되는 모습으로,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모습으로, 어두운 물의 심연에서 솟아 오르게 하여 피게 해 주는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귀 기울여 들으면 들을수록 모모는 낱낱의 소리들을 분명히 구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금과 은, 그리고 온갖 다른 금속들이 화음을 이룬 울림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화음의 배후에서, 전혀 다른 유의 소리들, 상상할 수 없는 심원(深遠)으로부터의,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부터의 소리들이 뒤이어 울려 나왔다. 이 음악은 점점 더 분명해져서 모모는 이제 점차 그것의 말(言語)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지금껏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언어였지만 알아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태양과 달과 유성과 모든 별이 그들의 고유한, 진정한 이름을 계시(啓示)하는 언어였다. 그리고 이 이름 속에야말로 이 천체들이 무엇을 하며, 시간의 꽃을 하나하나 피우고 다시 지게 하기 위해 다 같이 어울려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모모는 이 모든 언어가 자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득한 별들에 이르기까지의 온 세계가, 상상할 수 없이 무한히 큰 단 하나의 얼굴처럼 자기를 향하여 쳐다보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두려움보다도 더 큰 무엇이 모모를 엄습해 왔다. 

 그 순간, 모모는 말없이 손짓하는 호라 박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팔에 안겨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금 그의 손이 눈송이처럼 모모의 눈을 가렸다. 어둠과 정적이 내렸다. 모모는 아늑함을 느꼈다. 호라 박사는 모모를 안고 다시 긴 복도를 되돌아 왔다. 

 다시 시계 틈바구니의 작은 방에 들어 섰을 때 그는 모모를 아담한 소파에 뉘었다. 

 "호라 박사님,"하고 모모는 속삭였다. "저는 전혀 몰랐어요. 모든 인간의 시간이 그렇게……"하고 모모는 적절한 말을 더듬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위대하다는 것을……"하고 모모는 말을 맺었다. 

 "네가 보고 들은 것이, 모모"하고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시간은 아니란다. 그것은 다만 너 자신의 시간이었다. 모든 인간 속에는 방금 네가 가 있었던 그런 장소가 있어. 그렇지만 내 손에 안겨 간 사람만이 그 장소에 갈 수가 있어. 게다가 그냥 보통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가 없단다." 

 "그럼 저는 대체 어디에 가 있었나요?" 

 "너 자신의 마음 속에." 호라 박사는 말하며 모모의 더벅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호라 박사님," 모모는 다시 속삭였다. "내 친구들도 여기 데려올 수 없나요?" 

 "안 돼"하고 그는 대답했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어." 

 "그럼 대체 제가 여기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나요?" 

 "너 자신이 친구들한테 돌아갈 때까지다, 꼬마야." 

 "그럼, 별들이 내게 들려 준 얘기를 친구들한테 하는 건 괜찮나요?" 

 "해도 괜찮아. 그렇지만 네가 할 수가 없을거야." 

 "왜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에 필요한 말이 너 안에서 우선 자라야 할 테니까." 

 "그래도 나는 친구들한테 그 얘기를 하고 싶은걸요. 모두들한테! 친구들한테 그 소리들을 노래로 들려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시 잘 될 텐데요." 

 "정말 그러기를 바란다면, 모모, 너는 기다릴 수 있어야 해." 

 "기다리는 것은 저한텐 쉬워요." 

 "씨앗처럼 기다리는거야, 꼬마야. 움이 돋아나기까지 태양을 한 바퀴 돌도록 땅 속에 묻혀 잠자는 씨앗처럼. 네 안에서 말(言語)이 자라게 되기까지는 그만큼 오래 걸린단다. 그렇게 하겠니?" 

 "예." 모모는 속삭였다. 

 "그럼 자거라." 호라 박사는 모모의 눈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거라." 

 모모는 행복하게 깊은 숨을 쉬고 잠이 들었다. 

 

13  그곳의 하루, 이곳의 한 해(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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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얼마 동안 모모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잔디 뒤덮인 원형극장 옛터의 돌계단 위에 다시 와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라 박사의 집, 초공간(超空間)의 집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어느새 이리로 와 있단 말인가?

 주변은 어둡고 싸늘했다. 동쪽 지평선에서 지금 막 첫 새벽빛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모모는 으시시 떨면서 헐렁한 웃도리를 꼭꼭 여맸다.

 너무나 선명하게 모모는 그 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했다. 거북이를 좇아 대도시를 누비며 밤길을 걸어 갔던 일이며, 신비스러운 빛과 눈부시게 새하얀 집들로 가득 찬 도시 구역이며, 초(超)시간의 거리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계가 있던 홀이며, 초콜렛이랑 꿀빵이며, 호라 박사와 주고 받던 한마디 한마디 얘기며, 수수께끼며를 전부 기억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황금 천장 아래에서의 체험을 너무나 또렷이 기억했다. 두 눈을 감으면, 그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찬란한 꽃들의 광채가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올랐다. 그리고 태양과 달과 별의 음성들이, 지금도 따라서 멜로디를 부를 수 있을 만큼 쟁쟁하게 모모의 귀에서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동안, 모모의 마음 속에는 말(言語)들이 이루어져갔다. 꽃의 향기와 생전 처음 보았던 그 광채를 생생하게 표현해 주는 언어들이! 모모의 기억 속에 있는 음성들은 이 언어를 발음해 주는 소리였다. 뿐 아니라 이렇게 기억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사태가 벌어졌다. 모모는 기억 속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을 눈 앞에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점점 더 많은 것을 보는 것이었다. 마르지 않는 마술의 샘에서처럼 수천 가지의 시간의 꽃이 피어 올랐다. 게다가 꽃 하나하나가 새로운 언어를 울려 주는 것이었다. 모모는 주의깊게 자기 마음 속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써 그 언어를 뒤따라 발음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것은 신비롭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들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 언어를 뒤따라 발음하는 동안에 모모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호라 박사가 말한, 언어가 먼저 자기 안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아니면 결국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 그 모든 것이 현실로 일어난 게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는 모모의 눈에, 저 아래 둥근 광장의 한가운데서 무엇인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거북이가 거기서 아주 유유하게 뜯어 먹을 풀을 찾고 있지 않은가!

 날쎄게 모모는 거북이한테 기어 내려가 그 옆 땅바닥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거북이는 다만 힐끗 머리를 들고 그 태고의 검은 눈으로 꼬마를 유심히 훑어 보더니 다시 유유히 먹는 일을 계속했다.

 "안녕, 거북아." 모모가 말했다.

 거북이의 등에는 아무런 대답도 나타나지 않았다.

 "네가" 하고 모모는 물었다. "어제 밤 나를 호라 박사한테로 안내했었니?"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모모는 실망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참 유감이로구나." 모모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너는 그냥 보통 거북이일 뿐, 그…… 아, 이름을 잊어 버렸어. 참 예쁜 이름이었는데, 퍽 길고 야릇했어. 생전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어."

 "카시오페이아!" 갑자기 거북이의 등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문자가 나타났다. 모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그것을 알아 보았다.

 "맞았어!" 모모는 소리치며 손뼉을 쳤다. "바로 그 이름이야! 그럼 네가 그 거북이니? 네가 호라 박사의 거북이지, 응?"

 "나 말고 누구겠니?"

 "그럼 왜 아까는 대답을 안했니?"

 "아침 식사 중이야." 거북이의 등에 나타난 글자였다.

 "미안해!" 모모는 대답했다. "너를 방해할 생각은 정말 없었어. 나는 내가 어떻게 갑자기 여기 다시 와 있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야."

 "너의 소원이었어!" 대답이 나타났다.

 "이상해라." 모모는 중얼거렸다.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그럼 너는, 카시오페이아? 왜 너는 호라 박사한테 있지 않고 나를 따라왔니?"

 "나의 소원이야!"라고 거북이 등에 쓰여졌다.

 "고마와," 하고 모모는 말했다. "정말 너는 친절하구나."

 "천만에." 이것이 대답이었다. 이로써 거북이는 일단 할 말이 끝난 모양이었다. 중단했던 아침 식사를 계속하러 뒤뚱뒤뚱 기어갔다.

 모모는 돌계단 위에 앉아 베포와 지지, 그리고 어린이들을 만날 기대에 부풀었다. 그리고 자기의 가슴 깊숙이서 그치지 않고 울리고 있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완전히 혼자이고 아무도 들어 주는 이가 없는데도, 모모는 점점 큰 소리로 대담하게 멜로디와 언어를 따라서 불렀다. 지금 막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향하여. 그러는 중에 모모는 새와 귀뚜라미, 나무들, 그리고 이제는 옛 돌멩이들까지도 자기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모는 이제 오랜 시간 동안 자기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또한 자기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온통 헛일이라는 것을, 자기가 떠나가 있던 시간이 퍽 긴 시간이었으며 그 동안 세계가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행안내원 지지와는 회색 도당들도 비교적 쉽게 관련을 맺었다.

 그것은, 일년 전 모모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얼마 뒤, 지지에 관한 꽤 긴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면서 시작되었다. 거기엔 '최후의 진정한 이야기꾼'이라고 실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만날 수 있는 장소와 시간과 아울러, 이 사람이야말로 꼭 만나 볼 만한 매력있는 인물이라고 보도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지지를 보고 이야기를 들으려고 원형극장 옛터로 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물론 지지로서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떠오르는 착상(着想)대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모자를 들고 한 바퀴 돌았다. 그러면 모자는 언제나 동전과 지폐로 하나 가득 채워지곤 했다. 곧 그는 어느 여행사에 취직이 되었고,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관광 대상으로 제공하는 대신 상당한 금액을 덤으로 받았다. 여행자들은 버스에 태워져 안내되어 오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지지는, 돈을 지불하는 여행자들 모두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정규 시간표를 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부터 벌써 지지는 모모가 몹시 아쉬워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그는 아무리 두 배의 돈을 받게 되더라도 똑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하는 일은 애써 피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이야기는 이미 날개를 잃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안 가서 그는 이제 몸소 원형극장 터에 나서서 모자를 들고 돌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방송국에서 그를 끌어갔고, 곧 이어 텔리비젼 방송에도 불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이제 매주일 세번씩 수백만의 시청자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엄청난 돈을 벌어 들이게 되었다. 

 그 동안 그는 이미 원형극장 옛터의 이웃을 떠나 부유한 유명 인사들이 사는 도시의 전혀 딴 구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잘 손질된 정원의 한 복판에 자리잡은 현대식 커다란 주택에 세(貰)들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미 스스로를 지지라고 부르지 않고 지로라모라고 칭했다. 

 물론 그는 옛날처럼 끊임없이 새 이야기를 창안해 내는 일 따위는 오래 전에 집어 치워 버렸다. 도무지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살림을 하듯이 자기의 착상을 다루기 시작했다. 이젠 한가지 착상에서 곧잘 다섯가지 이야기를 조리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점 늘어가는 주문에 응하기에는 이것 역시 여의치 않게 되자, 어느날 그는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저질렀다. 즉 오로지 모모만을 위한 이야기 중의 하나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 역시 다른 모든 이야기들처럼 단숨에 꿀꺽 삼켜졌고, 당장에 잊혀져 버렸다. 사람들은 지지에게 계속 이야기를 요구하였다. 지지는 이제까지와 똑 같은 템포로, 오로지 모모만을 위해서 정해졌던 모든 이야기들을 별 깊은 생각 없이 잇달아 쏟아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이야기를 해 버렸을 때, 그는 불현듯 자신이 빝바닥까지 푹 패여 텅 비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다시는 창작을 할 수 없을 것같은 느낌에 빠졌다. 

 지금까지 이룬 성공이 그를 떠나리라는 불안 속에서, 그는 자기의 모든 이야기를 주인공의 이름만 바꾸고 약간 손질해서 재탕을 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점은 어느 누구도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하여간 그렇다고 해서 그를 향한 주문이 줄어 들지는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나무 판자에 매달리듯이 지지는 이같은 주문에 매달려 있었다. 어쨌든 지금 그는 부(富)와 명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항상 꿈꾸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밤이 되어 비단 누비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면, 그는 곧잘 옛날의 생활, 모모와 베포 노인, 어린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자기 자신 진정으로 이야기할 줄을 알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갈 길은 없었다. 모모가 사라진 채 영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지지도 몇 번 모모를 찾으려고 열심히 시도를 했었지만 나중엔 그럴 시간이 없어져 버렸다. 지금 그는 세 사람의 유능한 여비서를 거느리고, 그들로 하여금 계약을 체결하게 하고, 자기의 이야기를 받아쓰게 하고, 광고며 시간 약속을 맡아 조정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모를 찾기 위한 시간은 이미 한번도 스케줄에 끼어 들어가지 않았다. 

 옛날의 지지의 요소(要素)는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이 얼마 안 남은 옛날의 자기를 끌어 모아서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나는 "수백만이 귀 기울여 듣는, 관록을 가진 음성의 주인이 아닌가"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 아닌 그 누가 인간에게 진리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인간에게 회색 도당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러면서 이것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모모를 찾은 일에 내 모든 청중도 도와 달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옛 친구들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숱한 밤 중의 어느날 밤, 그는 이같은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자 벌써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스케줄의 초안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미처 한 글자도 써 내려가기 전에 전화 벨이 울렸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귀를 기울이다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야릇하게 억양 없는, 말하자면 잿빛 음성이 말을 건네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골수에서부터 배어나오는 듯한 오한을 느꼈다. 

 "그만 둬!" 음성이 말했다. "선의(善意)에서 하는 충고다." 

 "누구요?" 지지는 물었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음성이 대답했다. "우리를 소개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실상 개인적으로는 아직 우리와 어울린 적이 없지만, 너는 벌써 오래 전부터 완전히 우리 편에 가담하고 있어. 그 사실을 몰랐다고는 말 못하겠지!" 

 "너희들이 나한테서 바라는 게 무엇이냐?" 

 "네가 지금 계획한 일이 우리 마음에 안들어. 얌전히 그냥 덮어 놓지 않겠나?" 

 지지는 있는 용기를 다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 수 없다." 그는 말했다. "그냥 덮어놓을 수가 없어. 나는 이제 애숭이가 아니야. 이름없는 여행안내원 지지가 아니란 말이다. 지금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어. 너희들이 나랑 맞서 겨룰 수 있는지 한번 할 테면 해 보렴." 

 음성은 억양 없이 웃었다. 그러자 갑자기 지지의 이빨이 딱딱 마주치기 시작했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음성이 말했다. "우리가 너를 만들었어. 너는 고무 인형에 지나지 않아. 우리가 너를 크게 부풀리게 불었어. 그렇지만 네가 우리의 비위를 건드리면 다시 너한테서 공기를 빼낼 거야. 아니면 너는 지금의 네가, 바로 너 자신의 힘으로, 네 하잘 것 없는 재간의 덕분으로 만들어졌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니?" 

 "그래,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지지는 목이 잠겨 대답했다. 

 "가엾은 애숭이 지지"라고 음성이 울려왔다. "너는 여전히 몽상가(夢想家)로구나. 옛날에 너는 가난한 떠돌이의 허울을 쓴 왕자 지로라모였지. 그럼 지금의 너는 누구냐? 왕자 지로라모의 허울을 쓴 가난한 떠돌이 지지인 거야. 그렇다 해도 너는 우리한테 감사해야 해. 결국는 너의 모든 꿈을 채워 준 것은 어쨌든 우리들이었으니까." 

 "그것은 진실이 아니야!" 지지가 더듬거렸다. "거짓말이야!" 

 "원!" 음성은 대답하며 다시 억양 없이 웃었다. "하필 우리 앞에서 진실을 들먹일 작정이냐? 하기야 옛날에는 진실이냐 진실이 아니냐에 관한 그럴싸한 문투가 흔해 빠졌었지. 아, 어림도 없어, 한심한 지지. 진실을 끌어 들이려고 들면 돈벌이가 안 돼. 네가 허풍선 노릇하는 것을 우리가 도와 주었기 때문에 너는 유명해진거야. 진실은 너한테는 적성(適性)이 아니야. 그러니 그냥 덮어 놔!" 

 "너희들 모모를 어떻게 했니?" 지지는 중얼거렸다. "그런 것 때문에 네 잘난 더벅머리를 썩히지 말아! 너는 이제 그 애를 구해 낼 수가 없어. 더구나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는 어림없는 수작이야. 네가 지금의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네 성공을 그만큼 빨리 몰아내는 결과밖에 안가져 와. 물론 그건 너 자신이 결정할 일이지. 그것이 네게 그토록 중요하다면, 네가 영웅심을 발휘하면서 너를 망치는 것을 우리는 말리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우리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앞으로도 우리의 보호의 손길이 계속 너를 받쳐 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을거다. 부귀와 명성을 누리는 편이 아무튼 훨씬 편안하지 않니?" 

 "그렇긴 해." 지지는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자, 그것 봐! 그럼, 이것으로 얘기는 끝난거야. 알겠지? 사람들한테는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계속 들려 주는 편이 좋아!" 

 "어떻게 그렇게 하지?" 지지는 안간힘을 쓰면서 항의했다. "나 자신 모든 진상을 알아 버린 이 마당에." 

 "내가 근사한 충고를 하나 하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 그것은 사실 너한테 달린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마음을 돌리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잘 해 나갈 수 있어!" 

 "알았어." 지지는 중얼거리며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음을 돌리면……." 

 그리고 나서 수화기 저편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지지도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는 커다란 자기 책상에 엎드려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없는 흐느낌이 그를 뒤흔들었다. 

 이 날부터 지지는 자신에 대한 긍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새로 세웠던 계획을 포기하고 지금까지처럼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깃군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하긴, 사실 그는 사깃군이었다. 이전의 그의 안내자는 그의 환상(幻想)이었고,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환상의 너울치는 길을 따라 걸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중(大衆)의 어릿광대 짓을 했고 꼭둑각시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일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야기들은 점점 천박하거나 신파조(新派調)가 되어갔다. 그런데도 그것이 그의 성공을 깎아 내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칭해지며 숱한 사람들의 흉내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대 유행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지지 자신은 거기서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누구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는가를 알았던 것이다. 그는 결국 아무 것도 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동차를 타고 끊임없는 스케줄에 따라 쫓기었고,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날아 다녔고, 어디를 가거나 끊임없이 여비서로 하여금 그의 옛 이야기들에 새 옷을 입혀 받아쓰게 하였다. 그는―모든 신문에 보도되었듯이―'놀랍게 창작력이 풍부'했다. 

 이렇게 몽상가 지지는 사깃군 지로라모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회색 도당이 도로청소부 베포 노인을 수중에 넣는 데는 훨씬 힘이 들었다. 

 모모가 사라져 버린 그날 밤 이후로 그는 일에서 빠져 나오기만 하면, 원형극장 옛터에 앉아 기다렸다. 걱정과 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지지가 늘어 놓았던 온갖 타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찰한테로 갔다. 

 "어쨌든" 하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경찰이 모모를 다시 창살 있는 고아원에 처넣는 편이, 회색 도당한테 잡혀간 거보다 낫겠어. 아무튼 살아 있기만 한다면. 그런 고아원에서는 모모가 벌써 한번 빠져나온 적이 있으니까 또 그럴 수 있겠지. 아예 모모가 고아원에 들어가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히려 걱정해야 할는지 모르겠어. 어쨌든 우선 가서 찾아 봐야겠어." 

 그는 제일 가까이 있는 도시 변두리 파출소로 갔다. 잠시 그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두 손으로 모자를 돌리며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들어섰다. 

 "무슨 일이오?" 마침 길고 어려운 서식(書式)용지에 뭔가 열심히 기입하고 있던 경찰관이 물었다. 

 베포가 입을 떼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요컨대 어떤 무서운 사태가 벌어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요?" 경찰은 여전히 계속 기록을 하면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그건" 베포가 대답했다. "우리의 모모에 관한 일입니다." 

 "어린애요?" 

 "예, 조그만 소녑니다." 

 "당신의 아이인가요?" 

 "아니오." 베포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니요, 그러니까 네!" 경관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럼 대체 누구의 아이인가요? 부모가 누구요?" 

 "아무도 모릅니다." 베포는 대답했다. 

 "그럼, 그 아이는 어디에 계출(屆出)이 되어 있나요?" 

 "계출이라니요?" 베포가 물었다. "아, 저, 우리들한테 되어 있읍지요. 우리는 모두 그 애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출이 안 되어 있군요." 경찰은 한숨을 쉬면서 잘라 말했다. 그것은 법에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방향을 잡겠소! 어린애는 누구한테 가서 살고 있소?" 

 "자기 집에 삽니다." 베포는 대답했다. "그러니까 원형극장 옛터에 삽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없어요. 없어졌습니다." 

 "잠간" 하고 경관은 말했다. "내가 똑 바로 알아들었다면, 지금까지 저기 변두리 폐허 속에서 떠돌이 꼬마가 살고 있었지요. 뭐라더라…이름이 뭐라고 했소?" 

 "모모" 베포는 대답했다. 

 경관은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모모라는 이름. 모모, 그리고 또? 본명을 말해 보시오!" 

 "모모, 그뿐입니다." 베포가 말했다. 

 경관은 턱 밑을 긁으면서 딱하다는듯이 베포를 바라보았다. 

 "이걸 가지고는 안됩니다, 영감님. 도와 드리고 싶소만, 이걸로는 광고를 낼 수가 없어요. 그럼 일단 영감님 성함부터 말해 보시오." 

 "베포라고 합니다." 베포는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도로청소부 베포입니다." 

 "나는 이름을 묻고 있소, 직업이 아니오!" 

 "그것이 두 가지 다입니다." 베포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빌어먹을!" 그는 부아가 나서 중얼거렸다. "왜 하필 지금이 근무 당번이람." 

 그리고 그는 몸을 똑 바로 일으켜 어깨를 펴고는, 노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듯 미소를 지으면서 병자를 돌보는 사람처럼 상냥하게 말했다. "신원에 관한 건 나중에 조사할 수도 있겠지요. 우선 차근차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든 것이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보시오." 

 "모든 것이라니요?" 베포는 의아스럽게 물었다.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것 말이오." 경관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도대체 시간이 없소. 점심 때까지 이 산더미같은 서류를 전부 채워 넣어야 해요. 피곤해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참이요. 그렇지만 마음 놓고 차근차근히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해 보시오." 

 그는 등을 기대고 분신(焚身) 직전의 순교자의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베포 노인은 그 특유의 괴퍅스럽고 힘든 방식으로 모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모모의 출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애의 아주 유다른 특성, 그리고 자기 자신 엿들은 쓰레기 하치장에서의 회색 도당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하고 그는 말을 맺었다. "모모가 실종되었습니다." 

 경관은 뚱하니 한참 동안 베포를 바라보았다. 

 "바꿔서 말하면," 하고 그는 이윽고 입을 떼었다. "언젠가, 신원을 증명할 수 없는 기막히게 비상한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소녀가 세상에는 알리지지 않은 일종의 유령들에 의해, 어디인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납치되어 갔다 이거군요. 하지만 그것도 확실치는 않구요. 거기에다 대고 경찰이 신경을 써야 한다 이건가요?" 

 "예, 부탁입니다!" 베포는 말한다. 

 경관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험상궂게 소리쳤다.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어 보시오!" 

 베포는 이 요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고는 공손하게 경관의 얼굴에 입김을 내쉬었다. 

 경관은 코를 벌름거리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분명코 취하지는 않으셨군요." 

 "아니오." 베포는 당황해서 새빨개져서 중얼거렸다. "나는 취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 엉터리 없는 넌센스를 이야기했소?" 경관은 물었다. "그런 옛날 이야기에 넘어갈 만큼 경찰이 바보라고 생각하시오?" 

 "그렇습니다." 베포는 악의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드디어 경관의 참을성이 폭발해 버렸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까다롭고 긴 서식 용지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그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소리를 질렀다. "당장 꺼지시오! 안 그러면 관직모욕죄(官職侮辱罪)로 감금하겠소!" 

 "용서하십시오." 베포는 겁에 질려서 우물우물 말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만……." 

 "나가요!" 경관은 고함을 쳤다. 

 베포는 몸을 돌려 나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는 몇 군데 다른 경찰서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연출된 장면들도 첫번째의 장면과 별 차이가 없었다. 어떤 곳에서는 쫓아냈고, 어떤 곳에서는 친절하게 집으로 보냈고, 또는 단지 그를 떼어 버리기 위해 듣기 좋은 말로 위로를 했다. 

 하지만 한번은, 베포는 어떠한 경관들보다도 유모어 감각이 없는 고위 관리한테 걸려들었다.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나더니 차갑게 말했다. "이 영감은 돌았군. 이 영감이 공안(公安)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을 해야겠어. 구치소에 처넣어!" 

 구치소에서 베포는 반나절을 기다린 뒤에 두 경관에 의해 자동차에 실렸다. 그들은 도시를 가로 질러 창살이 있는 크고 흰 건물로 베포를 싣고 갔다. 그러나 그곳은 베포가 처음에 생각했던 감옥이나 그런 비슷한 곳이 아니라, 정신병자를 취급하는 병원이었다. 

 여기서 그는 철저한 검진을 받았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그를 친절히 대했다. 조롱하지도 않았고 욕을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이야기에 상당히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베포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미 한 이야기를 되풀이시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들은 자기한테 대해 한 마디도 반대 의사를 나타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베포는 그들 역시 자기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의 속마음을 석연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들도 역시 베포를 풀어 주지는 않았다. 

 대체 언제쯤 나갈 수 있느냐고 베포가 물어 볼 때마다 대답인 즉 "곧 나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좀더 당신이 필요합니다.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꽤 진전을 보았어요." 

 이 조사가 꼬마 모모의 행방과 상관된 것이라고 믿고 있는 베포는 끈기있게 기다렸다. 

 다른 많은 환자들과 공동으로 쓰는 커다란 침실에 그의 침대가 지정되었다. 어느날 밤, 그는 잠에서 깨어나 희미한 비상등 불빛 속에 웬 사람이 자기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타들어 가는 시가의 빨간 불티만 눈에 뜨이더니, 곧 어둠 속의 인물이 들고 있는 서류 가방과 중산 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이 회색 도당의 일원이라는 것을 베포는 깨달았다. 그리고 심장 속까지 추위를 느끼며 살려 달라고 외치려 했다. 

 "조용히 하시오." 잿빛 음성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당신한테 제안을 전하라는 사명을 맡고 왔소. 내 얘기를 듣고 당신의 대답을 요구할 때 답을 해 주시오! 당신도 필시 우리의 힘이 벌써 얼마나 뻗쳐 있는가를 어느 정도 보았을 거요. 그 점에 관해 더 알게 되는 것은 순전히 당신한테 달려 있소. 당신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보는 사람한테마다 떠든다 해도, 사실 우리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소. 하지만 그건 우리한텐 불쾌한 일이오. 아무튼 당신의 꼬마 친구 모모가 우리한테 잡혀와 있으리라는 당신의 추측은 전적으로 옳소. 그러나 우리한테서 행여 꼬마를 찾아낼 희망은 포기하시오. 그건 어림없는 일이오. 그 아이를 풀어 주려고 당신이 아무리 애쓴다 한들, 그것이 가련한 꼬마의 상황을 편안하게 하지는 못할거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려고 꾀하든, 해보시오, 그 때마다 꼬마가 보상을 치를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는 당신의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시오." 

 회색 사나이는 담배 연기로 몇 개의 동그라미를 내뿜더니, 자기의 말이 베포 노인에게 주는 효력을 눈여겨 바라보며 만족해 했다. 베포는 사실 그 모든 말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시간도 값진 것이니까, 간단하게 딱 잘라 말하겠소." 회색 사나이는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겠소. 당신이 다시는 우리들의 정체와 활동 내용에 대해 한마디도 안한다는 조건부로 꼬마를 내 주겠소. 그뿐 아니라, 말하자면 풀어 주는 몸값으로, 십만 시간의 저축액을 요구하오. 우리가 그 시간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하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그건 우리의 소관 사항이오. 당신은 다만 그만한 시간을 저축할 임무를 갖고 있을 뿐이오.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오. 당신이 여기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며칠 안에 여기서 풀려 나가도록 배려하겠소.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눌러앉아 있게 되고, 모모는 영원히 우리한테 잡혀 있게 되는 거요. 신중히 생각하시오. 이 관대한 제의를 우리는 지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거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소?" 

 베포는 두 번 침을 꿀꺽 삼키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합니다." 

 "아주 현명한 판단이오." 회색 사나이는 기분이 좋아 말했다. "그러면 이 점을 염두에 두시오. 함구무언(緘口無言)할 것과 십만 시간. 그만한 저축액을 우리가 받는 대로 꼬마 모모를 돌려 주겠소. 안녕히 계시오, 선생." 

 그리고 회색 사나이는 침실을 떠났다. 그가 남기고 간 담배 연기의 가닥이 어둠 속에서 도깨비 불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이날 밤 이후로 베포는 자기의 이야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왜 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다만 서글픈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며칠 안 가서 그는 집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베포는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자기와 동료들이 항상 빗자루와 수레를 배급받는 마당이 있는 큰 건물로 갔다. 그는 빗자루를 갖고 대도시로 가서 쓸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옛날처럼 한 발짝마다 한 숨 쉬고, 한 숨마다 한 번 비질을 하는 식으로 쓸지를 않고 성급하게, 일에 애착이 없이, 오로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쓸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 밑바닥의 확신을, 곧 자신의 지금까지의 전 삶을 부정(否定)하는 것이며 배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뼈아프게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혐오감에 싸여 베포는 괴로와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한 사람에 국한된 것이기만 했더라도, 그는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기를 택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모모와 상관된 것이었다. 모모를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시간 절약의 방법이었다. 

 그는 집에조차 가지 않고 밤낮으로 청소를 했다. 견딜 수 없이 피로가 몰려오면 공원의 벤치나, 때로는 그냥 하수구 덮개 위에 앉아 깜박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벌떡 일어나 쓸기를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음식도 그 새에 성급히 후딱 아무거나 꿀꺽 삼켰다. 원형극장 옆에 있는 그의 오두막으로는 그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몇 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록 청소를 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왔다. 베포는 마냥 쓸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왔다. 베포는 계절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는 십만 시간의 몸값을 절약하기 위해 쓸고 또 쓸기만을 계속했다. 

 대도시의 사람들은 이 조그만 노인에게 시선을 돌릴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가 아주 드물게 그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도 그 일에 목숨이 걸린 양 빗자루를 휘두르며 헐레벌떡 서둘러 비질을 하며 휙 지나치는 이 노인을 보고는, 등 뒤에서 조롱하며 이마를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은 베포로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어서, 별로 개의치를 않았다. 다만, 대체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잠간 동안 일을 중단하고, 묻는 사람을 겁먹은 표정으로 슬픔에 가득 차서 바라보며 입에다 손가락을 대었다. 

 회색 도당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모모의 친구인 어린이들을 자기네 계획대로 조종하는 일이었다. 모모가 실종된 뒤에도 어린이들은 틈만 나면 원형극장 옛터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환상적인 세계 여행을 떠나거나, 성곽과 궁전을 짓기 위해 그들에겐 몇 개의 낡은 상자와 궤짝만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열심히 생각해서 계획을 세우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요컨대, 아이들은 모모가 마치 여전히 자기네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실제로 모모가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어린이들은 모모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한 얘기가 화제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었다. 말없는 확신이 어린이들을 서로 굳게 묶어 놓고 있었다. 모모는 그들 안에 있었고, 지금 여기에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이 그들의 내밀(內密)의 중심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고는 회색 도당도 손을 뻗칠 수가 없었다. 

 어린이들을 모모와 떼어 놓기 위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회색 도당들은 결국 간접적인 우회(迂廻) 조처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간접 수단이 바로 어린이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있는 어른들이었다. 물론 모든 어른들이 아니라, 조력자로서 적합한 어른들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어른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어린이 자신이 쓴 무기를 이번엔 회색 도당이 어린이를 향해 적용시킨 것이었다. 

 즉, 몇몇 사람이 불현듯 지난 날의 행진을, 그리고 어린이들의 플래카드와 격문을 상기해 낸 것이었다. 

 "우리는 무슨 조처를 강구해야 합니다." 어떤 어른이 제의했다. "외톨박이가 되는 어린이가 점점 늘고 등한시되는 상태가 그냥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어른들을 탓할 수는 없지요. 현대 생활이라는 것이 어른들로 하여금 아이들한테 충분히 몰두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니까요. 시(市)행정당국에서 이 점을 배려해야 합니다." 

 "이 상태가 계속될 수는 없지요."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떠돌아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원활한 교통 소통이 난관에 부딪치고 있어요. 길거리의 어린애들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의 증가는 점점 많은 금액을 지출시킵니다. 이 금액을 좀더 현명하게 다른 방법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 

 "감독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하고 또 다른 이들이 확언했다. "도덕적으로 퇴폐하고 범죄자로 성장합니다. 시당국은 모든 어린애들을 관리하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쓸모있고 유능한 사회의 성원으로 자랄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도 의견을 말했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인적(人的) 자원입니다. 미래는 제트기와 전자 두뇌의 시대입니다. 이 모든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수많은 전문가와 숙련공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어린이들한테 내일의 세계를 위한 준비를 시키는 대신, 수많은 어린애들이 몇 해 동안의 소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놀이로 허송하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명의 수치요, 미래의 인류에 대한 범죄입니다." 

 이 모든 의견은 시간 절약가들에게 기막힌 공감을 자아냈다. 게다가 이미 이 대도시에는 상당수의 시간 절약가가 있었기 때문에 소홀히 다뤄지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위한 조처의 필요성을 시 행정당국에 납득시키는 데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이어서 도시의 모든 구역마다 이른바 '탁아소'가 설립되었다. 그것은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모든 어린이들이 떠맡겨졌다가 가능한대로 다시 찾아 갈 수 있는 커다란 집이었다. 어린이들이 거리에서나 녹지대(綠地帶), 또는 어디서든 노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어떤 어린이든 일단 그런 데서 놀다가 들키는 날이면, 당장 그것을 본 어른에 의해 가장 가까이 있는 탁아소로 옮겨졌다. 게다가 부모는 그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어야 했다. 

 모모의 친구들도 이 새로운 규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각기 속한 구역에 따라서 서로 갈라져 여러 탁아소에 처박혀졌다. 그들이 여기에서 스스로 놀이를 창안해 놀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놀이는 감독하는 사람들에 의해 처방이 되었고, 그것은 한결같이 어떤 유용한 것을 습득케 하는 놀이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물론 다른 무엇을 잊어 갔다. 그것은 기뻐하고, 열광하며, 꿈을 갖는 일이었다. 

 점점 어린이들도 꼬마 시간 절약가들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하라고 시키는 일을 그들은 억지로, 재미없어 하며, 적의를 갖고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혼자 힘으로 처리하도록 내맡겨지면, 전 같으면 떠올렸을 좋은 생각들을 하나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 중에서 그들이 지금까지 할 수 있는 유일한 장기(長技)는 떠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물론 즐겁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고 화를 내며 떠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회색 도당은 어린이 중의 누구에게도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대도시 위로 쳐 놓은 그물은 이제 틈새 없이 촘촘하고―겉으로 보기에는―찢어 버릴 수 없이 견고했다. 아무리 영악한 어린이들이라 해도 이 그물의 코를 뚫고 빠져 나가지는 못했다. 회색 도당의 계획은 이뤄진 것이었다. 모모가 돌아올 것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것이었다. 

 그 때부터 원형극장 옛터는 텅 비고 버림받은 채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모모는 지금 돌계단에 앉아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온 후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해가 서쪽 지평선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졌고 추워졌다. 

 이윽고 모모는 일어섰다. 배가 고팠다. 모모에게 음식을 갖다 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 지지와 베포까지도 오늘은 모모를 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걸거야, 내일이 되면 밝혀질 무슨 어이없는 우연일거야, 라고 모모는 생각했다. 

 모모는 거북이한테로 내려갔다. 거북이는 벌써 잠을 자려고 껍질 속에 기어 들어가 있었다. 모모는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주저하면서 손마디로 거북이의 등을 톡톡 쳤다. 거북이는 머리를 내밀고 모모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모모는 말했다. "내가 잠을 깨웠다면,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왜 오늘 하루 종일 내 친구들이 한명도 안 왔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거북이의 등에 글자가 나타났다. "아무도 이제 없어." 

 모모는 글자를 읽었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좋아." 모모는 자신있게 말했다. "내일이면 곧 밝혀질거야. 내일은 내 친구들이 꼭 올거야." 

 "다시는 안 와." 이것이 대답이었다. 

 모모는 희미하게 빛나는 글자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니?" 드디어 모모는 불안스럽게 물었다. "대체 내 친구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니?" 

 "모두들 떠나갔어." 모모는 읽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 카시오페이아. 어제만 해도 친구들이 전부 허탕친 대집회에 왔었는걸." 

 "네가 오래 잤어." 카시오페이아의 대답이었다. 

 모모는 자기더러 땅 속의 씨앗처럼 태양을 한바퀴 돌도록 잠을 자야 한다고 한 호라 박사의 말을 상기했다. 그 말에 찬성을 하면서도 모모는 그것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를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렴풋이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모모는 속삭이듯 물었다. 

 "일년과 하루." 

 이 대답을 이해하기까지 모모는 한참이 걸렸다. 

 "그렇지만 베포와 지지는" 하고 드디어 모모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두 친구는 분명코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이제 아무도 없어"라고 거북이 등 위에 씌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모모의 입술이 떨렸다. "그렇게 간단히 모든 것이 떠나버릴 리가 없어. 옛날의 모든 것이……." 

 그러자 서서히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한 단어가 비쳤다. "흘러갔어." 

 생전 처음으로 모모는 온 힘을 다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느꼈다. 가슴이 전에 없이 무거워졌다. 

 "그렇지만 나는" 하고 모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여전히 여기 와 있는데…."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모모는 거북이가 자기의 맨발을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네 곁에 있잖아!" 거북이 등에 쓰여 있었다. 

 "그래." 모모는 용기를 얻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내 곁에 있구나, 카시오페이아. 정말 기뻐. 이리 와, 우리 자러 가자." 

 모모는 거북이를 안고 성벽 구멍을 지나 자기의 방으로 내려갔다. 기울어가는 햇빛 속에서 모든 것이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이 보였다(베포가 그 당시 방을 다시 청소했었다). 다만 사방에 두터운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궤짝 판자로 만든 작은 탁자 위 양철 상자에 편지가 하나 기대어져 있었다. 편지 역시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모모에게"라고 봉투 위에 쓰여 있었다. 

 모모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받는 일이 생전 처음이었던 것이다. 모모는 편지를 손에 들고 사방으로 살펴보고는 봉투를 찢어 쪽지를 꺼내었다. 


    사랑하는 모모! 

 나는 이사를 했어. 돌아오면, 즉시 나한테 연락하기 바란다. 

 네가 걱정스럽기 짝이 없어. 정말 보고 싶어. 너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 배가 고프면 니노한테 가기 바란다. 니노가 나한테 청구서를 보내면 내가 다 계산을 할게. 그러니까 먹고 싶은대로 먹기만 해, 알았지? 자세한 얘기는 니노가 너한테 해 줄거야. 나를 여전히 사랑하길 바란다. 나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 

 

   항상 너의 것인 지지      

 

 분명히 지지가 한껏 애를 써서 보기 좋고 똑똑하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모모가 이 편지 내용을 알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마침내 편지를 다 읽었을 때 마지막 한 줄기 햇빛이 깜박 져버렸다. 

 하지만 모모는 위안을 느꼈다. 

 모모는 거북이를 들어 자기 옆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먼지 투성이의 이불을 덮으면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 카시오페이아, 나는 혼자가 아니잖아." 

 하지만 거북이는 벌써 잠든 모양이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생생하게 지지를 눈 앞에 보았던 모모는, 이 편지가 벌써 거의 일년 동안 여기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다. 

 모모는 편지를 뺨에 대었다. 이제는 이미 춥지가 않았다. 

 

14  너무 많은 음식과 너무 적은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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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모모는 거북이를 옆구리에 끼어 안고 니노의 작은 주막집을 향해 집을 떠났다. 

 "이제 보라고, 카시오페이아." 모모는 말했다. "곧 모든 것이 밝혀질거야. 니노 아저씨는 지지랑 베포 할아버지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어. 그럼 찾아 가서 어린이들을 모아 오면 우리는 다시 모두 한데 모이게 돼. 아마 니노 아저씨랑 아줌마도 같이 올는지 몰라. 또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너도 좋아할거야. 내 친구들 말야. 오늘 저녁 작은 잔치를 벌일까 봐. 나는 꽃들에 관해서, 음악에 대해서, 호라 박사랑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어. 아, 모두들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까 지금부터 기뻐. 하지만 지금 당장은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할 것이 즐거워. 정말 배가 고프단 말이야." 

 이렇게 신이 나서 모모는 재잘거렸다. 그리고 몇 번이고 거듭 웃도리 속에 품고 온 지지의 편지를 더듬었다. 하지만 거북이는 그 태고(太古)의 눈으로 모모를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 

 모모는 걸으면서 흥얼거리다가 나중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제 불렀던 기억 속의 멜로디와 언어가 지금도 똑 같이 생생하게 다시 음성으로 흘러 나왔다. 모모는 이 음성을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모모는 노래를 뚝 그쳤다. 니노의 주막집 앞에 이른 것이었다. 처음에 모모는 길을 잘못 들어 선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비바람에 얼룩진 회벽의 낡은 집과 문 앞의 작은 정자 대신에, 이제는 거리 쪽의 벽면이 온통 커다란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길다란 건물이 콘크리트 상자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도로 자체도 그 새에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고 그 위로 수많은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길 건너편 쪽으로는 대규모의 주유소와 그 옆에 커다란 사무실 건물이 서 있었다. 수많은 차들이 새 주막 앞에 주차를 하고 있었고, 주막집 입구 위로는 대문자로 새겨진 간판이 휘황하게 눈에 띄었다. 

니노의 스피드 식당 


 모모는 들어 서서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창가를 따라서 마치 이상스런 버섯 모양으로 보이는, 높은 막대기 위에 조그만 판이 얹혀진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테이블은 어른들이 선 채로 먹을 수 있게끔 높았다. 의자란 아예 없었다. 

 반대편으로는 번쩍이는 금속 막대로 된 긴 철책이, 일종의 울타리처럼 쳐져 있었다. 그 뒤로 좁은 간격을 두고 유리 상자들이 열지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햄 빵, 치즈 빵, 소시지, 살라드 접시, 푸딩, 케익 등 모모로서는 알 수 없는 온갖 음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모모가 그 모든 것을 알아 보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꽉 차 붐비고 있어서 모모 자신 사람들한테 끊임없이 거치적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들어 서려 해도 옆으로 밀쳐지거나 계속 떠밀려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시랑 병이 얹힌 쟁반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비좁은 테이블의 한 자리를 날쌔게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급하게 먹고 있는 사람들 뒤로는 벌써 다른 사람들이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기다리는 사람과 먹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친절한 말이 오고 갔다. 요컨대 사람들 전부가 상당히 불쾌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금속 울타리와 유리 상자 사이로 사람들의 긴 열이 서서히 밀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들 여기 저기 유리 상자 속에서 접시, 음료수 병, 종이 컵을 집어들었다. 

 모모는 깜짝 놀랐다. 여기서는, 그러니까 누구나 마음대로 다 가질 수 있구나! 그러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최소한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여기 있는 모든 것은 공짜인지 몰라!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 모르지. 

 한참 후 모모는 니노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니노는 수많은 사람들한테 가려진 채 유리 상자의 긴 대열의 맨 끝 계산대 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계산기를 끊임없이 두들겨 대며 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니노한테 사람들은 돈을 내는구나! 그리고 누구든지 금속 울타리를 지나 니노를 거치지 않고는 식탁 쪽으로 갈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니노 아저씨!" 모모는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 틈을 헤집고 빠져 나가려 했다. 그리고 지지의 편지를 들고 신호를 보냈지만 니노는 알아듣지 못했다. 계산기가 요란한 소음을 내는데다가, 그것을 취급하는 데는 극도의 주의력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모모는 마음을 다잡고 울타리를 타고 넘어 사람들의 장사진을 헤치고 니노한테 달려갔다. 니노는 눈을 들었다. 몇 사람인가 큰 소리로 투덜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모모를 보자, 니노의 얼굴에서는 문득 불쾌한 표정이 씻은듯 가셔졌다. 

 "모모!" 그는 소리치며 옛날과 꼭 같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왔구나! 정말 뜻밖이야!" 

 "차례대로 나갑시다!" 줄지어 선 사람들이 소리쳤다. "저 꼬마는 우리처럼 저 뒤에 가서 줄을 서야 해요. 그냥 새치기하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원, 염치없는 계집애라니!" 

 "잠간만 기다리십시오!" 니노는 큰 소리로 말하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는듯 손을 들었다. "잠간만 참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럼 누구나 그렇게 하게!" 기다리고 있는 행렬 중의 한 사람이 욕지거리를 했다. "앞으로 나가요, 앞으로! 어린애는 우리보다 시간이 많아요." 

 "지지가 네 몫을 전부 지불할거야, 모모." 니노는 꼬마에게 성급히 소근거렸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먹어.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저 뒤에 가서 서. 너도 들었잖아!" 

 무슨 말을 더 물을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모모를 떠밀어 버렸다. 결국 모모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 같이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장사진의 끝에 붙어 서서 선반에서 쟁반을 집어 들고, 상자 속에서 나이프와 포크와 숟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서서히 한 발짝씩 떠밀려 갔다. 쟁반을 드는 데 두 손을 다 써야했기 때문에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를 할 수 없이 쟁반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가면서 유리 상자 속에서 이것 저것 끄집어 내어 거북이 주변에 놓았다. 

 그렇게 하긴 했지만 모모는 사실 당황했기 때문에 정말 괴상하게 음식을 주워 모아 왔다. 구운 생선 한 조각, 잼빵 한개, 소시지 한 쪽, 작은 고기만두 한개, 그리고 종이컵에 든 레몬 쥬스였다. 한가운데의 카시오페이아는 껍질 속에 완전히 기어 들어간 채 여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드디어 계산대 앞으로 오게 되자, 모모는 재빨리 물었다. "지지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래,"하고 니노는 말했다. "우리의 지지는 유명해졌어. 우리 모두가 그를 자랑스러워하지. 어쨌든 지지는 우리들 중의 하나니깐! 지지는 텔레비젼에도 자주 나오고 라디오에서도 얘기를 해. 신문에는 언제든지 지지의 기사가 나지. 얼마 전에는 두 사람의 기자가 나한테까지 찾아 와서 옛날의 얘기를 해 달라고 하겠지. 나는 기자들한테 얘기를 해 줬어. 옛날에 지지가 어떻께……." 

 "앞으로 나가시오!" 행렬 중의 몇 음성이 외쳤다. 

 "그렇지만, 왜 지지는 안 오는 거지요?" 모모는 물었다. 

 "아, 저…… 말이야." 어느새 약간 신경질이 된 니노가 소근댔다. "지지는 지금 시간이 없단다. 그는 지금 훨씬 중요한 일을 해야 하고 원형극장에는 어찌 되었든 별 볼 일이 없어졌으니까." 

 "대체 뭘 하고 있는거요?" 뒤에서 여러 사람의 불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서 이렇게 마냥 죽치고 기다리는 게 우리 기분에 맞으리라고 생각하시오?" 

 "대체 지지는 어디 살아요?" 모모는 집요하게 물었다. 

 "초록빛 언덕 위 어딘가 살아." 니노는 대답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지지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근사한 별장을 갖고 있대. 하지만 우선 지금은 그냥 지나가라, 응!" 

 모모는 아직도 너무나, 너무나 물을 것이 많았기 때문에 도저히 물러날 마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별 수 없이 계속 떠밀려졌다. 그래서 쟁반을 든 채 버섯 모양의 식탁 중의 하나에 다가가 잠시 기다린 후 날쌔게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식탁은 바로 모모의 코에 와서 걸리도록 너무 높았다. 

 모모가 쟁반을 식탁 위에다 밀어 올려 놓자,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역겨워하는 얼굴로 거북이를 바라보았다. 

 "저런 건" 하고 어떤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한테 말했다. "이제는 금지해야 해요." 

 그러자 다른 사람이 투덜대었다. "어쩌자는 건지……, 요즈음의 애들이라니!" 

 하지만 그밖에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들도 모모한테 더 이상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먹는 일 역시 모모한테는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쟁반을 들여다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마침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모모는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이제는 배가 불러졌다. 하지만 베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모모는 다시 한 번 줄 뒤에 가서 붙어섰다. 그러면서도 그냥 그 사이에 끼어서 가면 사람들이 혹시 다시 화를 낼까 봐 겁이 나서,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되는대로 유리 상자에서 무엇을 집어 들었다. 

 마침내 또 다시 니노한테 왔을 때 모모는 물었다. "그럼 베포 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그는 너를 참 오래 기다렸어." 니노는 자기의 고객이 또 다시 불쾌해할 것이 겁이 나서 성급하게 설명했다. "그는 너한테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어. 맨날 회색 도당에 관해 무슨 얘기를 했어. 무슨 소리인지 나도 모르겠어. 하긴, 너도 그를 알잖니. 그 노인은 늘 약간 괴짜였잖아." 

 "어이, 저 앞의 두 친구들!" 장사진 중의 누구인가가 외쳤다. "잠을 자는거야?" 

 "곧 끝납니다, 손님!" 니노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는요?" 모모가 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경찰의 반감(反感)을 샀어." 니노는 말을 이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는 경찰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찾아 내놓으라고 했어. 내가 아는 한, 결국 경찰이 그를 무슨 요양원에다 보냈대.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빌어먹을!" 이번에는 저 뒤쪽에서 격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애당초 여기가 스피드 식당이오? 아니면 대합실이오? 거기 무슨 가족끼리 만난 모양인데, 뭐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니노는 사정하듯이 외쳤다. 

 "할아버지가 아직 거기 있나요?" 모모가 물었다. 

 "아닐거야." 니노는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는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다시 풀어 놨대나 봐." 

 "예, 그렇지만 대체 지금은 어디 계세요?" 

 "전혀 몰라. 정말이야, 모모. 지금은 제발 앞으로 가 줘!" 

 다시 한번 모모는 별 수 없이 뒤에서 밀치는 사람들한테서 밀려났다. 또다시 모모는 버섯 식탁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자리를 차지하고 쟁반에 놓인 음식을 먹어 치웠다. 이번에는 벌써 아까보다 훨씬 맛이 덜했다. 음식을 그냥 남긴다는 생각은 당연히 모모한테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옛날에 늘 자기를 찾아 왔던 어린애들이 어떻게 되었나를 알아봐야 했다. 별 도리 없이 모모는 다시 기다리는 사람의 행렬에 붙어 서서 유리 상자 앞을 지나 나아가며 사람들한테 욕을 안 먹기 위해 또 쟁반에 음식을 채웠다. 

 이윽고 다시 계산대 앞의 니노한테까지 왔다. 

 "그럼 어린애들은요?" 모모가 물었다. "대체 애들은 어떻게 됐어요?" 

 "이젠 모든 상황이 딴판이 되어 버렸어." 니노는 모모를 다시 보자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설명했다. "지금은 너한테 그걸 설명할 수가 없어. 여기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도 보잖니!" 

 "그렇지만 왜 그 애들이 다시 안 오나요?" 모모는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했다.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모든 어린애들은 이제는 탁아소에 맡겨지게 되어 있어. 이제 어린애들은 제 멋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게 되었어. 왜냐 하면…… 자, 간단히 말해서 이제 어린애들은 보호 감독을 받게 된거야." 

 "빨리 끝내요, 저 앞의 굼벵이들!" 다시금 행렬 가운데서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쨌든 우리는 먹으러 왔으니 좀 먹어야겠소." 

 "내 친구들도요?" 모모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 애들도 정말 그것을 스스로 원했나요?" 

 "그 애들의 의견같은 건 묻지 않았어." 니노는 대답하면서도 안절부절하며 계산대의 키이를 손으로 더듬었다. "아무튼 어린애들은 그런 것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아. 그건, 어린애들을 길거리에서 못 놀게 하기 위해 마련된거야. 결국은 그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니?" 

 그 말에 모모는 아무 말도 않고, 다만 따지듯 니노를 찬찬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니노는 완전히 난처해졌다. 

 "원, 빌어먹을!" 또 다시 저 뒤쪽에서 잔뜩 화난 음성이 외쳤다. "여기 오늘 어쩌자고 이렇게 늑장인지, 정말 참을 수가 없군. 당신네들의 아기자기한 수다를 하필이면 지금 해야 옳겠소?" 

 "그럼 내 친구들 없이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요?" 모모는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니노는 어깨를 추켜 보이고는 손가락을 비볐다. 

 "모모!" 그는 말하며 애써 마음의 평정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깊은 숨을 들여 쉬었다. "정신 차리고 언제 다시 한번 와. 지금 나는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하고 앉았을 시간이 정말 없어. 너는 언제든지 여기 와서 먹을 수 있어, 알잖니. 그렇지만, 내가 너 같으면 나는 딴 생각 않고 탁아소엘 가겠어. 거기에서 보살핌을 받고 대우도 받고, 심지어는 무엇을 배우기도 할 텐데. 어쨌든 그렇게 혼자 아무데고 싸돌아 다니면 너도 결국은 그리로 보내지게 될 거야." 

 모모는 다시 아무 말 않고 니노를 쳐다볼 뿐이었다. 뒤로 밀어닥치는 사람의 무리가 모모를 앞으로 밀었다. 모모는 자동적으로 식탁 앞으로 밀려가서, 이제는 도저히 삼킬 수도 없고 나무 토막이나 대패밥처럼 아무 맛이 없어져 버린 세번째의 음식을 역시 자동적으로 먹어 치웠다. 그러자 모모는 자신이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를 겨드랑이 밑에 껴안고 소리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어이, 모모!" 마지막 순간의 모모를 놓치지 않은 니노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잠간만! 그 동안 네가 어디 박혀 있었는지는 전혀 얘기를 안했잖니?" 

 하지만 어느새 다음 번 손님들이 들이 닥쳤고, 니노는 계산대에서 탁탁 두들기기를 계속하며 돈을 받고 거스름 돈을 내 주었다. 그의 얼굴의 웃음기는 어느새 다시 씻은듯이 가셔졌다. 


 

 "너무 많은 음식을," 모모는 다시금 원형극장에 와 닿자, 카시오페이아에게 말했다. "사실 너무 많은 음식을 나는 먹어 치웠어. 너무 많은 음식을. 그런데도 전혀 배부른 느낌이 안들어." 그리고 잠시 후에 덧붙였다. "니노한테 꽃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도 없었어."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 내일은 나가서 지지를 찾자. 지지는 분명 네 마음에도 들거야, 카시오페이아. 두고 봐."

 하지만 거북이의 등에는 다만 커다란 의문표가 나타났을 뿐이었다.

15  찾아낸 지지와 잃어버린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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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모모는 지지의 집을 찾기 위해 아침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물론 거북이도 데리고 갔다. 

 초록빛 언덕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모는 알고 있었다. 그곳은 원형극장 옛터가 있는 지역과는 멀리 동떨어진 교외의 별장 지대였다. 즉 닮은 꼴의 주택이 세워지고 있는 구역, 그러니까 대도시의 반대 편에 있는 동네였다. 

 참 먼 길이었다. 맨발로 걷는 데 익숙한 모모였는데도 이윽고 초록빛 언덕에 닿았을 때는 발이 아팠다. 

 모모는 잠시 다리를 쉬기 위해 하수구 돌뚜껑에 앉았다. 

 과연 으리으리한 고급 주택가였다. 근처의 도로는 기막히게 깨끗하고 넓은 데다 거의 사람 기척이 없었다. 높은 돌담과 철책 안쪽의 정원에는 고목(古木)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정원에 둘러 싸인 집들은 대개가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평평한 지붕이 길게 뻗은 건축물이었다. 집 앞의 잔디들은 윤기가 나게 매끈하게 손질되어 있어서 그 위에서 공중 제비라도 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렇지만 아무 데서도 정원을 산책하거나 잔디 위에서 노는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 아마도 집 주인들은 그럴 시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담." 모모는 거북이한테 말했다. "지지의 집이 이 근처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 낼 수 있을까?" 

 "곧 알게 돼."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글자가 나타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모는 희망에 차서 물었다. 

 "야, 꼬맹아!" 별안간 뒤에서 웬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여기서 뭘 찾니?" 

 모모는 돌아다 보았다. 거기 괴상스런 줄무니 조끼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부자집 하인들은 그런 조끼를 입는다는 것을 모모가 알 턱이 없었다. 모모는 일어나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지지의 집을 찾고 있어요. 니노 아저씨가 그러는데, 지지가 지금 이 동네에 산대요." 

 "누구네 집을 찾는다구?" 

 "여행안내원 지지의 집요. 지지는 내 친구거든요." 

 줄무늬 조끼의 남자는 의심쩍다는듯 꼬마를 훑어 봤다. 그의 뒤로 정원 문이 약간 열려 있어서 모모는 안을 슬쩍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널찍한 잔디 위에서 사냥개 몇 마리가 놀고 있었고 분수가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꽃이 만발한 나무 위에 한 쌍의 작은 공작새가 앉아 있었다. "어머나!" 모모는 탄성을 올렸다. "저 새 좀 봐, 예쁘기도 해라!" 

 모모는 가까이서 새를 보려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조끼입은 남자가 모모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여기 있어!" 그는 말했다. "어쩔 셈이니, 더러운 꼬맹아!" 

 그러더니 그는 모모를 다시 놓고 무슨 못 만질 것이라도 만진듯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이게 전부 아저씨 것이에요?" 모모는 대문 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야." 조끼 입은 남자는 한층 더 불친절하게 말했다. "당장 꺼져! 네가 여기서 볼 일은 없어." 

 "있어요." 모모는 힘을 주어 말했다. "여행안내원 지지를 찾아야 해요. 지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저씨는 대체 그를 모르세요?" 

 "여기 여행안내원 같은 사람은 없어." 조끼 입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정원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그려고 하더니,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혹시 너 지로라모를 찾는 게 아니니? 유명한 소설가 말이다." 

 "아, 그래요. 바로 여행안내원 지지요." 모모는 기뻐서 대답했다. "그렇게도 불러요. 지지의 집이 어딘지 아세요?" 

 "그런데 그 이가 정말 너를 기다리니?" 남자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모모는 말했다. "분명해요. 그는 내 친구이고, 내가 니노 아저씨한테서 먹는 음식 값을 전부 지불해요." 

 조끼 입은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술가들이라니!" 그는 입맛 쓰다는 투로 말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기분파들이라니깐! 아무튼 그 사람이 네가 찾아오는 걸 대단하게 여기리라고 정 믿는다면 그 사람 집은 저 꼭대기 길 가 막다른 집이야." 

 그리고 나서 정원문은 잠겼다. 

 "뻔들뻔들한 녀석!" 이라고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나타나더니 곧 사라졌다. 

 꼭대기 길 가 막다른 집은 사람 키보다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리고 정원문도 조끼 입은 남자의 집의 것과 비슷하게 철판으로 되어 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아무 데도 초인종 단추나 문패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정말 지지의 새 집인지 모를 일이야." 모모가 말했다. "도대체 지지의 집 같지가 않아." 

 "그렇지만 맞아"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어쩌자고 이렇게 몽땅 잠겨 있지?" 모모가 물었다. "들어갈 수가 없잖아." 

 "기다려!" 대답이 나타났다. 

 "그래, 할 수 없지." 모모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기다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여기 바깥에 있는 걸 어떻게 지지가 안담? 도대체 저 안에 있다면 말야." 

 "지지는 곧 와"라고 거북이 등의 글자가 말했다. 

 이렇게 모모는 대문 바로 앞에 앉아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모모는 혹시 카시오페이아가 어쩌다가 잘못 판단을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니?" 잠시 후 모모는 물었다. 

 기다리는 대답 대신에 거북이의 등판에는 "잘 있어!"라는 말이 나타났다. 

 모모는 깜짝 놀랐다. "무슨 뜻으로 그러는 거야, 카시오페이아? 그럼 너도 나를 떠날 참이니? 대체 어쩔려구 그래?" 

 "너를 찾으러 가는거야!" 더욱 수수께끼 같은 카시오페이아의 통보(通報)였다. 

 그 순간 갑자기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미끈한 고급 승용차 한대가 쏜살같이 빠져 나왔다. 모모는 뒤로 훌쩍 뛰어서 겨우 피하긴 했지만 훌렁 나자빠졌다. 

 자동차는 몇 바퀴 쾌속으로 굴러 가더니 끼익 바퀴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차문이 훌쩍 열리더니 지지가 뛰쳐 나왔다. 

 "모모!" 그는 소리를 치며 두 팔을 벌렸다. "이거 정말 나의 꼬마 모모로구나!" 

 모모는 벌떡 일어나 지지한테 달려 갔다. 지지는 모모를 후딱 안아 올려 두 뺨에 수백번 키스를 하고 길거리에서 모모와 춤을 추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그는 숨가쁘게 물었다. 하지만 모모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흥분해서 계속 떠들었다. "너를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굉장히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야, 알겠니? 또 지각하게 생겼어. 그 동안 대체 어디 박혀 있었니? 전부 얘기해 줘야 해. 네가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내 편지를 봤니? 그래? 아직도 거기 있었어? 좋아, 그래서 니노한테 먹으러 갔니? 맛이 있었어? 아, 모모. 우리는 얘기할 게 산더미처럼 많아.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었어. 대체 어떻게 지내니? 말 좀 해 봐! 그리고 우리 베포 아저씨는 뭘 하시니? 정말 아저씨를 본지가 너무 오래 되었어. 그리고 아이들은? 아, 저 말야, 모모, 나는 우리가 모두 같이 모여서 내가 너희들한테 이야기를 들려 주던 그 시절을 참 자주 생각한단다. 참 좋은 시절이었지. 그렇지만 이젠 모든 것이 달라졌어. 완전히 딴판으로 달라졌어." 

 모모는 지지의 물음에 대답을 하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었다. 그렇지만 청산유수(靑山流水)같은 그의 얘기가 끊어질 줄을 몰랐기 때문에 별 수 없이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옛날과 다른 모습이었다. 아주 멋지게 몸단장을 하고 있었고 좋은 향내가 났다. 그러나 무엇인지 모르게 지금의 지지는 모모에게 이상스럽게 낯설었다. 

 그 사이에 자동차에서 네 사람의 다른 인물이 내려 서서 다가왔다. 가죽으로 된 운전수 제복을 입은 한 남자와, 굳은 표정의, 하지만 진하게 화장을 한 얼굴의 세 숙녀들이었다. 

 "어린애가 다쳤나요?" 한 여자가 걱정스러워서라기보다는 힐난하는 투로 물었다. 

 "아니요, 아니. 전혀 다친 덴 없어요." 지지가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다. "그냥 놀랐을 뿐이오." 

 "대체 어쩌자고 대문 앞에서 쌀쌀거리고 있담!" 두번째 여자가 말했다. 

 "사실은 이 꼬마가 모모라오!" 지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 옛 친구 모모가 이 꼬마라오!" 

 "아, 이 소녀가 그럼 실제로 있단 말인가요?" 세번째 여자가 놀라와하며 물었다. "저는 그냥 그 소녀가 선생님의 창작이라고만 생각했었어요. 그렇다면 이것 역시 당장 신문에 낼 수 있겠네요! '동화 속의 공주와의 재회(再會)'라든가, 그런게 사람들한테 전설처럼 솔깃할 거예요! 제가 당장 주선하겠어요. 히트를 칠 거예요!" 

 "아니," 지지가 말했다. "근본적으로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아요." 

 "그렇지만 얘, 꼬마야" 하고 첫번째 숙녀가 이번에는 모모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너는 분명히 신문에 나고 싶겠지? 안 그러냐?" 

 "어린애를 가만히 놔 두시오!" 지지는 불쾌하게 말했다. 

 두번째 숙녀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 전 속력을 내서 가지 않으면 코 앞에서 비행기를 놓치게 돼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선생님도 아시겠지요." 

 "원," 지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오랫만에 만났는데 모모랑 조용히 몇 마디 말도 더 나눌 수가 없다니! 하지만 꼬마야, 너도 보다시피 저 사람들이 나를 안 놔 주는구나. 저 노예(奴隸) 몰잇군같은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아!" 

 "어머나!" 두번째 숙녀가 날카롭게 말을 받았다. "우리한테야 아무러나 전혀 상관이 없어요. 우리야 단지 맡은 일을 할 뿐인 걸요. 선생님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일로 우리는 선생님한테서 보수를 받고 있어요, 선생님." 

 "그래, 옳아요, 옳아!" 지지는 양보를 했다. "그럼 떠납시다! 이봐, 모모! 너도 비행장까지 같이 가자. 그럼 가는 도중에 얘기를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나서 운전수가 너를 집에 데려다 주는 걸로, 됐지?" 

 그는 모모가 뭐라고 말할지 기다리지도 않고 꼬마의 팔을 끌어서 자기가 앞장 서서 자동차로 갔다. 세 숙녀는 뒷자리에 앉았다. 지지는 운전수 옆에 앉아 모모를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차는 떠났다. 

 "자," 지지가 말했다. "이제 얘기해 봐, 모모! 차례대로 차근차근. 어떻게 그 때 그렇게 별안간 사라졌니?" 

 모모가 호라 박사와 시간의 꽃들에 관해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숙녀 중의 한사람이 앞으로 몸을 굽혔다. 

 "실례해요." 그녀는 말했다. "막 굉장히 근사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모모를 공공(公共) 영화협회에 데려다 주는 거예요. 다음 번에 영화화될 선생님의 방랑아 이야기 속의 새 어린이 스타로서 모모야말로 틀림없는 적격(適格)일거예요. 그 센세이션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모모가 모모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직도 못 알아 들으셨소?" 지지는 날카롭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꼬마를 거기에 끌어 들이는 걸 나는 바라지 않아요!" 

 "선생님의 속셈을 정말 모르겠어요." 숙녀는 기분이 상해서 대꾸했다. "누구라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침을 흘리면서 달려들 텐데요." 

 "나는 다른 누구가 아니오!" 지지는 갑자기 격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모모를 향해 덧붙였다. "미안해, 모모. 혹시 너는 이해가 잘 안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떼거리들이 너한테까지 손을 뻗는 것을 어쨌든 원치 않아." 

 그러자 세 숙녀 모두가 기분이 상했다. 

 지지는 신음을 하면서 머리를 움켜 쥐더니 조끼 주머니에서 조그만 은빛 상자를 꺼내어 알약을 집어 꿀떡 삼켰다. 

 몇 분 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지지는 뒤의 숙녀들에게 몸을 돌렸다. "용서하시오" 하고 그는 의기소침해서 중얼거렸다. "당신네들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소. 다만 지금 내가 신경이 극도로 피곤해요." 

 "좋아요, 그러시다는 것쯤 알고도 남겠어요." 첫번째 숙녀가 대답했다. 

 "자, 그럼," 지지는 말을 이으며 슬며시 곁눈질로 모모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 모모." 

 "그 전에 한가지만 물어 보겠어요." 이번엔 두번째 숙녀가 끼어 들었다. "이제 곧 도착하게 되는데요. 저한테 잠간만 이 꼬마랑 인터뷰를 허락하시지 않겠어요?" 

 "닥치시오!" 지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고함을 쳤다. "나는 지금 모모랑,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싶소!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오. 몇 번이나 더 그걸 설명해야겠소?" 

 "그렇지만 선생님 자신이 늘상 나를 탓하셨잖아요." 이번엔 숙녀도 똑 같이 화가 나서 대꾸했다. "선생님을 위해 충분히 효과적인 광고를 못한다고요!" 

 "맞았소!" 지지는 신음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안돼요! 지금은 안돼요!" 

 "유감이에요!" 숙녀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한테 눈물이 쏟아지게 감동을 줄 텐데요. 선생님 뜻대로 하세요. 어쩌면 나중에라도 할 수 있겠지요, 만일……." 

 "안돼요!" 지지는 말을 막았다. "지금도 나중에도 언제라도 안돼요. 그리고 이제 제발 입 좀 다물어 주시오. 내가 모모랑 말하는 동안!" 

 "좋아요, 한마디만 더 하겠어요!" 숙녀도 못지않게 과격하게 대꾸했다. "결국 이것은 선생님의 선전에 관계되는 것이지, 저의 선전이 아니예요! 선생님이 지금 이번 기회를 무시할 처지인지 한번 충분히 고려해 보세요!" 

 "아니," 지지는 어쩔줄 몰라하며 소리쳤다. "나는 그것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오! 그렇지만 모모는 여기에 끼어들 수 없소! 그리고 이제―제발 부탁이오―우리들을 오분만 가만 내버려 두시오!" 

 숙녀들은 침묵을 지켰다. 지지는 지친듯 손으로 두 눈을 비볐다. 

 "네가 지금 보다시피, 나는 이 꼴이 되었어." 그는 잠시 소리내어 씁쓸히 웃었다. "내가 원해도 되돌아 갈 수가 없어. '지지는 어디까지 지지야!' 하던 말은 흘러간 얘기야. 아직도 그 말 생각나니? 그런데 이렇게 지지는 지지로 머물러 있지를 못했어. 한가지 얘기를 하지, 모모.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꿈을 꾸던 소망이 채워지는 일이야. 어쨌든, 나의 경우처럼 된다면. 이제 나한텐 꿈 꿀 것이 없어져 버렸어. 너희들한테서 그것을 다시 배울 수도 없을거야. 나는 모든 것을 지겹도록 갖고 있어." 

 그는 우울한 시선으로 차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이제 나한테 남아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아마도…… 입을 다무는 일일거야. 이야기를 더 이상 안하고 침묵하는 일일거야. 아마도 남아 있는 내 평생 동안. 아니면, 적어도 세상이 나를 잊어 버리고, 나 자신 이름 없는 가난한 떠돌이로 되돌아갈 때까지 말이야. 그렇지만 꿈이 없이 가난하다는 것은―그럴 수가 없어, 모모. 그것은 지옥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자리에 머물러 있는 편을 취하고 있는 거야. 이것 역시 사실은 지옥이야. 하지만 적어도 편안한 지옥이야. 아, 내가 뭘 떠들고 있지? 당연히 너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거야." 

 모모는 다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모는 무엇보다도, 지지가 괴로와하고 있다는 것을, 죽도록 괴로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색 도당이 그에게 손길을 뻗쳤다고 짐작이 갔다. 하지만, 지지 자신 전혀 원하지 않는 마당에 어떻게 자기가 지지를 도와 줄 수 있을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내내 내 얘기만 했군." 지지는 말했다. "이제 너도 얘기 좀 해. 그 동안 겪었던 일을, 모모!" 

 그 순간 자동차가 비행장에 닿았다. 모두들 내려서 홀로 서둘러 들어갔다. 벌써 여기엔 제복을 입은 스튜어디스들이 지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신문기자가 그의 사진을 찍고 질문을 했다. 하지만 스튜어디스들이 비행기 출발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다고 그를 재촉했다. 

 지지는 몸을 굽히고 모모를 바라보았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봐, 모모." 그는 주위에 서 있는 사람이 못 알아 듣게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나랑 같이 있어! 이번 여행길이랑, 어디든지 너를 데려 갈게. 아름다운 내 집에서 같이 살면서 진짜 꼬마 공주처럼 빌로드랑 비단 옷을 입고 다니는거야. 너는 그냥 내 옆에 있으면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아마 그 때처럼, 내게 다시금 진정한 이야기들이 떠오르겠지, 응? 그냥 그러겠다고 대답만 해, 모모. 그럼 모든 것이 제대로 되는 거야. 부탁이야, 나를 도와 줘!" 

 모모는 지지를 진심으로 도와 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모모는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지지는 다시 지지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모모 자신이 이미 모모가 아니라면 지지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모모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였다. 모모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그리고 지지는 모모를 이해했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런 일을 하라고 자기가 돈을 지불하는 숙녀들에 의해 끌려갔다. 멀리서 지지는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고, 모모도 답을 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모모는 지지와 만나는 시간 내내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모모 자신도 그에게 할 말이 참으로 많았다. 지지를 다시 찾은 지금, 모모는 이 만남으로 인해 이제야말로 진실로 그를 잃어 버린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모모는 몸을 돌려 대합실 출구를 향했다. 

 그제사 문득 모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카시오페이아 역시 잃어 버린 게 아닌가! 

 

16  과잉(過剩) 속의 궁핍(窮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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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어디로 가지?" 모모가 다시 지지의 미끈한 승용차로 돌아와 옆에 앉자, 운전수가 물었다. 

 소녀는 심란한 듯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한담? 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던가? 카시오페이아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어디서? 언제 어디서 잃어 버렸단 말인가? 지지와 함께 차 안에 있던 시간 내내, 거북이는 이미 없었다. 그것만은 모모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지의 집 앞에서다! 이제사 모모는 거북이의 등 위에 "잘 있어!", 그리고 "너를 찾으러 가는거야"라고 쓰여 있던 일을 떠올렸다. 물론 카시오페이아는 모모가 곧 자기를 잃어 버리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거북이는 모모를 찾으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어디서 카시오페이아를 찾아낸단 말인가? 

 "자, 오래 걸리니?" 운전수는 말하며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들겼다. "너를 드라이브시켜 주는 것 말고도 나는 또 할 일이 있어." 

 "지지의 집으로 가 주세요." 모모가 대답했다. 

 운전수는 좀 놀란듯 돌아보았다. "나는 너를 너의 집으로 데려다 주는 줄 알았어. 아니면 이제 너도 우리 집에 살거니?" 

 "아니요," 모모는 대답했다. "길에서 무엇을 잃어 버렸어요. 그걸 지금 찾아야 해요." 

 운전수한테는 잘된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기는 그리로 가야 했으니까. 

 지지의 별장 앞에 닿자, 모모는 당장 내려서 사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카시오페이아!" 외치는 모모의 음성이 점점 작아졌다. "카시오페이아!" 

 "대체 뭘 찾는 거니?" 운전수가 차창으로 내다보며 물었다. 

 "호라 박사의 거북이에요." 모모는 대답했다. "카시오페이아라는 이름인데 언제든지 반시간 전에 미래를 내다 봐요. 그리고 등판에다가 글자를 써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거북이를 찾아야 해요. 나를 도와 주실래요?" 

 "그런 엉터리같은 장난에 끼어들 시간이 없어!" 그는 투덜대면서 대문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고, 이어서 대문이 닫혔다. 

 그래서 모모는 혼자서 찾았다. 거리를 온통 샅샅이 뒤졌는데도 카시오페이아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면" 모모는 생각했다. "거북이는 벌써 원형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지 몰라." 

 그래서 모모는 아까 왔던 길을 터덜터덜 되돌아 걸었다. 그러면서 담 모퉁이마다 살펴보고, 거리의 개천마다 들여다 보았다. 끊임없이 거북이의 이름을 외치면서. 그러나 헛일이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모모는 원형극장 옛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도, 어둠을 무릅쓰고 찾아 볼 수 있는 한 샅샅이 모든 것을 뒤졌다. 그리고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자기보다 앞서 거북이가 집 안에 돌아와 있다면, 하는 조마조마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느림보 거북이한테서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모는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난생 처음으로 모모는 진정한 외톨이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뒤 이은 몇 주일 동안 모모는 정처없이 대도시 안을 헤메며, 도로청소부 베포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의 행방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모모로서는 돌아다니다 거리에서 부딪칠 우연에다 턱없는 희망을 걸 도리밖에 없었다. 물론 이 엄청난 대도시 안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날 가능성이란, 난파된 배의 선원이 망망대해에서 파도 속에 던진 편지 담긴 병이 멀리 떨어진 해안의 어선에 의해 낚여지는 것만큼이나 극희 희박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어쩌면 아주 가까이 있을는지 모른다고 모모는 생각했다. 베포가 바로 한 시간 전에, 일분 전에, 그야말로 어쩌면 바로 한 순간 전에 있었던 장소를 자기가 막 지나가고 있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거꾸로, 이 장소나 이 길모퉁이를 금방, 또는 잠시 후에 얼마나 자주 베포가 지나가게 될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모모는 여러 번 한 장소에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 그렇지만 결국 언제나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역시 어긋날 확률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시오페이아가 있다면 지금 얼마나 고맙게 써먹었을까! 여기 있다면, 거북이는 "기다려!" 또는 "그냥 가!"라고 알아 맞혀 주었을 텐데. 그렇지만 모모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 때는, 그러느라고 베포와 어긋날 것이 걱정스러웠고, 기다리지 않을 때는 그래서 또 어긋날 것이 걱정스러웠다. 

 모모는 옛날에 늘 찾아 오던 어린이들을 만날세라 찾아 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한명도 만날 수 없었다. 도대체 거리에는 어린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제 어린이들은 보호 감독받고 있다고 하던 니노의 말이 생각났다. 

 모모 자신이 한번도 경관이나 어른한테 잡혀서 탁아소로 인도되지 않은 까닭은, 몰래 숨어서 끊임없이 지키는 회색 도당의 감시 탓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네들이 모모한테 기대했던 계획이 틀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모모가 알턱이 없었다. 

 매일같이 한번씩 모모는 니노한테 먹으러 갔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 이상으로 니노와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니노는 언제나 한결같이 바빴고 시간이 없었다. 

 몇 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흘러갔다. 그런데도 모모는 여전히 외톨이였다. 

 언젠가 딱 한번, 해질녘 어스름한 빛 속에서 어느 다리(橋)의 난간에 앉아 있었을 때, 모모는 멀리 다른 다리 위에서 한 구부정한 형체를 알아 보았다. 그 형체는 무슨 목숨이라도 걸린 일인 양, 성급하게 빗자루를 휘두르고 있었다. 모모는 베포인가보다 생각하고 소리를 치고 손짓을 했지만 그 형체는 쉴새없이 비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모모는 달려 갔지만 그쪽 다리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아마 베포 할아버지가 아니었을거야." 모모는 스스로 위안을 하느라 혼잣말을 하였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베포 할아버지의 비질하는 모습을 알아." 

 또 모모는 원형극장 옛터 안의 집에 머무는 날도 많았다. 왜냐하면 혹시나, 자기가 이미 돌아왔나 살펴보러, 베포가 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불현듯 솟아나기 때문이었다. 마침 베포 할아버지가 왔을 때 하필 자기가 없다면, 자기가 여전히 실종되어 있는것으로 생각할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도, 어쩌면 일 주일 또는 바로 어제 그런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상상이 모모를 괴롭혔다. 그래서 모모는 기다렸다. 물론 기다리는 것은 헛일이었다. 마침내 모모는 대문자로 방의 벽에다 "내가 다시 왔어요"라고 그려 놓았다. 그렇지만 모모 자신 말고 다른 누가 그것을 읽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시간 중에서도 모모가 잃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호라 박사의 집에서의 체험, 꽃들과 음악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자기 안으로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타오르는 듯한 찬란한 빛깔의 꽃들이 눈 앞에 떠올랐고 음악의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이 음악은 끊임없이 새로이 형성되고 한번도 똑 같은 적이 없었지만, 첫날과 똑 같이 모모는 음악의 언어를 따라 말하고 멜로디를 같이 부를 수가 있었다. 

 곧잘 모모는 하루 종일 혼자 돌계단에 앉아 혼자서 말하고 노래를 했다. 나무와 새들, 옛 돌들밖에는 모모의 노래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고독(孤獨)이 있다. 그렇지만 모모가 체험한 고독은 불과 몇 안되는 사람이 알고 있는 고독이요, 더우기 그와 같은 큰 힘을 지닌 고독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었다. 

 모모는 자신이, 꼭 질식할 것처럼 점점 불어나고 있는 무진장의 재산으로 꽉 찬 보물의 동굴 속에 갚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나갈 길이 없지 않은가! 아무도 모모가 있는 곳까지 뚫고 들어올 수 없었고, 모모 자신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알려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광맥 속에 깊이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때로는 차라리 이 음악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이 색채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에 부딪친다면, 모모는 이 기억을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었으리라. 그로 인하여 죽음을 치른다 해도. 왜냐하면 이제 모모는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즉,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지 않으면 그로 인해 스스로가 파멸에 빠지는 재산들이 있다는 것을……. 

 이틀이 멀다 하고, 모모는 지지의 별장으로 가서 정원문 앞에서 한참씩 기다리곤 했다. 지지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모모는 그 동안 무엇이든지 받아 들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지지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었다. 옛날처럼 되돌아 갈 수 있든 없든 간에. 그렇지만 대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은 사실 몇 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이 시간은 일찌기 모모가 겪었던 어느 시간보다도 긴 시간이었다. 사실 실제의 시간이란 시계와 달력으로는 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고독에 관해서는 진실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한가지 사실만 더 얘기하는 것으로 족할는지 모른다. 즉, 호라 박사한테로 가는 길을 찾을 수만 있었더라면―아닌게 아니라 모모는 수없이 거듭 시도했었다―모모는 그에게 가서, 이제는 더 이상 자기에게 시간을 분배해 주지 말도록, 아니면 호라 박사의 초공간의 집에 영원히 머물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으리라. 

 하지만 카시오페이아 없이는 그 길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카시오페이아는 사라진 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거북이는 옛날에 호라 박사한테로 되돌아가 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세상의 어디메선가 길을 잃었는지도. 어쨌든 거북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날 모모는 시내에서, 옛날에 늘 자기한테 오던 세 어린이를 만났던 것이다. 파올로와 프랑코, 그리고 옛날에 늘 꼬마 동생 데데를 데리고 오던 소녀 마리아였다. 세 아이의 모습이 모두 전혀 딴판이었다. 한결같이 회색 제복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이상하게 마비된 듯 생기가 없어 보였다. 모모가 환성을 지르며 인사를 해도, 아이들은 거의 웃음기도 띠지 않았다. 

 "너희들을 열심히 찾았어." 모모가 숨가쁘게 말했다. "지금 다시 나한테 안 갈래?" 

 세 아이들은 눈길을 주고 받더니, 한결같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럼 내일 올래?" 모모는 물었다. "아니면 모레?" 

 다시금 세 아이들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 다시 오려무나." 모모는 졸랐다. "옛날엔 늘 오지 않았었니." 

 "옛날엔 그랬지!" 파올로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어. 우린 이제 우리의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해서는 안돼." 

 "우리는 그러지 않았어." 모모가 말했다. 

 "그래, 그 때가 참 재미었었어." 마리아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아." 

 세 어린이는 성급히 계속 걸었다. 모모는 그들 옆에서 따라 걸었다. 

 "지금 대체 어디 가는거니?" 모모가 물었다. 

 "놀이(遊戱) 시간에." 프랑코가 대답했다. "거기서 놀이를 배워." 

 "무슨 놀이인데?" 모모가 물었다. 

 "오늘은 펀치 카드 놀이를 배울거야." 파올로가 설명했다. "굉장히 유익한 놀이야. 그렇지만 정신을 무섭게 바짝 차려야 해." 

 "어떻게 하는 건데?" 

 "우리 모두가 제가끔 펀치 카드를 제시해. 모든 펀치 카드는 굉장히 여러가지 명세(明細)를 포함하고 있어. 키, 나이, 무게 등. 그렇지만 물론 실제의 자기 것은 절대 아니야. 그러면 너무 쉬우니까 말야. 어떨 땐 그냥 길다란 숫자로 표시하기도 해. 예를 들면 MUX/763/Y처럼 말야. 그리고 나면 우리가 낸 카드들은 뒤섞여져서 카드함 속에 들어가. 그 다음엔 우리들 중의 한 아이가 어떤 특정한 카드를 알아 맞춰야 하는거야. 그 아이는 계속 질문을 해. 그러는 중에 맞지 않는 다른 카드는 전부 빼 버리고 결국 맞는 카드가 한장 남게 되는거야. 이걸 제일 빨리 하는 아이가 이기는거야." 

 "그게 재미있니?" 모모는 의아스럽게 물었다. 

 "그것은 문제가 안돼." 마리아가 겁난다는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돼." 

 "그럼 대체 뭐가 문제가 되니?" 모모는 궁금해했다. 

 "문제는" 하고 파올로가 대답했다. "미래에 유용(有用)한 것이야." 

 그러는 동안 그들은 커다란 회색 건물 정문 앞에 이르렀다. 문 위에 "탁아소"라고 쓰여 있었다. 

 "너희들한테 할 말이 참 많았는데." 모모가 말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마리아가 서글프게 대답했다. 

 그들 주변에는 훨씬 많은 어린이들이 한결같이 그 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한결같이 모모의 세 친구들과 닮은 모습이었다. 

 "너한테서 놀 때가 훨씬 재미있었어." 프랑코가 불쑥 말했다. "그땐 우리들끼리 항상 굉장히 여러가지 근사한 생각을 해 냈지. 그렇지만 그런 데서는 아무 것도 못 배운대." 

 "그럼 그냥 도망쳐 나올 수 없니?" 모모가 제안을 했다. 

 "벌써 몇 번 그래 봤었어, 처음에는." 프랑코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어. 항상 다시 잡혀 오는거야." 

 "그렇게 말하면 안돼." 마리아가 말했다. "결국 지금 우리는 보호 감독을 받고 있는거야." 

 모두들 입을 다물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모모는 마음을 작정하고 물었다. "너희들 나도 같이 데려갈 수 없니? 지금 나는 언제나 혼자야." 

 하지만 이 때 참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치 강력한 자력(磁力)에 끌린듯이 어린이들이 문 안으로 빨려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들 뒤에서 문이 꽝 소리내며 닫혔다. 

 모모는 깜짝 놀라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잠시 후, 초인종을 누르든지 노크를 해 보려고 문쪽으로 다가서려 했다. 어떤 놀이가 되든간에 자기도 같이 놀게 해 달라고 한번 졸라 볼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미처 문께로 한 발짝 떼어 놓기도 전에, 모모는 깜짝 놀라 얼어 붙었다. 문과 자기 사이에 별안간 회색 도당의 한 사나이가 끼어 들어서 있는 게 아닌가. 

 "소용 없어!" 그 사나이는 엷은 미소를 띠며 입가에 시가를 물고 말했다. "이제 그런 짓은 하지 마! 네가 저 안에 들어가는 건 우리한테는 흥미가 없어." 

 "왜요?" 모모가 물었다. 다시금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몸 속에서 올라옴을 모모는 느꼈다. 

 "우리는 너한테 대해 다른 걸 염두에 두고 있거든." 회색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담배연기를 동그랗게 내뿜었다. 그것은 올가미처럼 모모의 목을 감더니 한참만에 날아갔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섭게 서둘러 걷고 있었다. 모모는 회색 사나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구원을 청하려고 했지만 한마디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집어치워!" 회색 사나이는 말하며 기쁨이 증발되어 버린 잿빛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직도 그렇게 우리를 몰라 보니? 우리가 얼마나 막강한가를 여전히 모르니? 우리는 너의 모든 기쁨을 빼앗았어. 너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게다가 너도 이제는 우리 뜻대로 할 수가 있어. 그렇지만 보다시피 우리는 너를 아끼고 있어." 

 "왜요?" 모모는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네가 우리한테 조그만 일을 하나 해 주었으면 하기 때문이야." 회색 사나이는 대답했다. "현명하게만 굴면, 너는 그 일로 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어. 또 너의 친구들도. 그러겠니?" 

 "예." 모모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회색 사나이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오늘 자정에 만나 상담을 하자." 

 모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느새 회색 사나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그의 시가의 연기만이 공중에 걸려 있었다. 

 어디서 만날지는 회색 사나이도 말하지 않았다. 

 

17  큰 공포와 보다 큰 용기(勇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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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원형극장 옛터로 돌아갈 일이 무서워졌다. 자정에 만나자던 회색 사나이가 분명히 그곳으로 올 것 같았다.

 그곳에서 그와 단둘이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까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워졌다. 아니, 모모는 도대체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든, 어디 다른 데서든 간에. 그가 무엇을 제의하든 간에―결국 그것은 진실로는 자기와 친구들을 위해 좋은 일이 될 리 없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디로 가면 그 사나이의 눈에 안 뜨이게 숨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사람의 무리 속에 들어가 있으면 가장 안전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조금 전 자기와 회색 사나이를 거들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실제로 겪었으면서도, 그래도 정말 회색 사나이가 자기한테 무슨 행동을 가해 오는 경우 살려 달라고 외치면, 주위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을 테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뿐 아니라 밀집한 군중 틈에 박혀 있으면 찾아내기가 제일 어려울 거야 하고 모모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그날 오후와 저녁 시간 내내 한밤이 이슥하도록 모모는 빽빽한 행인들의 틈바구니에 묻혀서, 가장 번잡한 거리와 광장을 따라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커다란 원을 그리듯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모모는 두번, 세번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마냥 쫓기듯 서둘러 걸어가는 인간의 무리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기고 걸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뭇 하루 종일을 싸돌아 다니다 보니 견딜 수 없이 다리가 아파왔다. 밤은 점점 이슥해 갔고, 모모는 반쯤 잠이 든 채 걸어 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잠간만 쉬면," 모모는 마침내 생각했다. "단지 한 순간만 쉬면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을 텐데……."

 길 가에 마침 여러 종류의 자루와 상자를 실은 작은 삼륜차(三輪車)가 서 있었다. 모모는 그 위로 기어 올라가 어느 자루에 몸을 기대었다. 기분 좋게 푹신했다. 피곤한 다리를 세우고 치마로 그 위를 덮었다. 아, 살 것 같다! 모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자루에 한껏 기대어 누웠다. 그리고는 피곤에 못 이겨 자신도 모르는 새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다. 모모는 빗자루를 평행봉으로 하고 바닥 모를 심연 위 아득히 높은 데서 줄타기를 하는 베포 노인을 보았다.

 "어디가 다른 편 끝이지?" 끊임없이 외치는 베포의 음성이 들렸다. "다른 끝을 볼 수가 없어!"

 과연 줄은 끝없이 길어 보였다. 어느 쪽으로나 어둠 속에 묻혀 버려서 끝을 볼 수가 없었다.

 모모는 베포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도저히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도리가 없었다. 베포는 너무나 멀리, 너무나 높이 저쪽에 있었다.

 그리고 나서 모모는 지지를 보았다. 지지는 입에서 끝없는 종이 테이프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는 마냥 계속해서 풀어 내고 있었고, 테이프는 끝없이 풀려 나오며 끊어지지도 않았다. 어느새 지지는 종이 테이프의 산더미 위에 서 있었다. 모모의 눈에는 그의 시선이 애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가 도와 주러 가지 않으면 그가 질식할 것처럼 비쳤다.

 모모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종이 테이프에 발목이 걸렸다. 게다가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복잡하게 테이프 속에 얽혀 들어갔다.

 다음 번에 모모는 어린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트럼프처럼 납작한 평면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카드마다 작은 구멍으로 된 진짜 도안들이 뚫려 있었다. 카드들은 뒤섞여졌고, 그것은 새로 정돈이 되어 새 펀치가 뚫리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카드 어린이들은 커다랗게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새 그들은 다시 뒤섞여졌고 차례차례 포개어져 떨어지며, 덜컥덜컥 소리를 내고 있었다.

 "스톱!" 모모는 외치려고 했다. "그만 둬요!" 그러나 덜컥덜컥 하는 소리에 묻혀 모모의 가는 음성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 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드디어 모모는 그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 순간, 모모는 주변이 깜깜해서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화물차 위에 앉았었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사실 지금 이 차가 달리면서 요란한 모터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모모는 아직도 눈물로 축축한 뺨을 닦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모모가 모르는 새에 이 차는 이미 상당히 오래 달려 왔음에 틀림없었다. 차는 지금, 이런 늦은 밤이면 죽음처럼 느껴지는 도시의 한 부분에 와 있는 것이었다. 거리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고 고층 건물엔 불이 꺼져 있었다.

 화물차는 그다지 속력을 내지 않고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모모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훌쩍 뛰어 내렸다. 회색 도당을 피해 안전하리라고 여겨지는 번잡한 거리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때 꿈을 꾼 장면이 떠올라서 우뚝 멈춰 섰다. 

 어두운 거리에서 모터의 소음이 점점 멀어지더니 조용해졌다. 

 모모는 이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모모는 살아나려는 희망에서 도망을 쳤었다. 지금까지 내내 자기 자신만을, 자기 자신의 외로움만을, 자기 자신의 공포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참으로 곤경에 빠져 있는 편은 자기의 친구들이 아닌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칠 그 누구가 아직 있다면, 그것은 모모 자신뿐이었다. 친구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도록 회색 도당을 움직일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하다 해도, 최소한 시도는 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모모는 갑자기 자기 마음 속의 신비스런 변화를 느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공포감이 급격히 뒤집혀 정반대의 감정으로 돌변하지 않는가. 이제 반대의 감정이 더디고 일어섰다. 모모는 세상의 어떠한 힘에도 굴하지 않을 용기와 자신을 느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제는 도대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이제 모모는 회색 도당을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날 생각이었다. 

 "당장 원형극장 옛터로 가야겠다"고 모모는 생각했다. "벌써 너무 늦었는지 몰라. 어쩌면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그렇게 결심은 했지만, 사실 막상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난감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모모는 운(運)을 하늘에 맡기고 발을 떼었다. 

 모모는 어둡고 쥐죽은 듯 조용한 거리를 끊임없이 자꾸자꾸 걸었다. 게다가 맨발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발자국 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새 길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모모는 어떻게 길을 잡아야 할지 알려 주는 무엇이든 눈에 띄기를, 알아 볼 만한 무슨 표지라도 눈에 띄기를 바랐지만 헛일이었다. 물론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도중에 만난 유일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앙상하고 더러운 한마리 개뿐이었다. 개는 웬 쓰레기 더미에서 먹이를 뒤지다가 모모가 가까이 가자 겁에 질려 도망을 쳤다. 

 이윽고 모모는 엄청나게 넓은 텅 빈 광장에 이르렀다. 나무와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광장이 아니라, 그냥 넓기만 하고 황량한 평지였다. 다만 광장의 가장자리로 밤하늘을 배경으로 집들의 실루엣이 컴컴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모모는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바로 광장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아주 가까운 데서 웬 탑 시계 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계 소리는 여러 번 울렸다. 그러니까 어쩌면 벌써 자정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회색 사나이가 원형극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시간에 맞춰 가는 건 벌써 틀렸어, 하고 모모는 생각했다. 그는 공연히 기다리다가 돌아갈거야. 친구들을 도와 줄 가능성을 놓치는 건지 몰라, 어쩌면 영원히! 

 모모는 주먹을 깨물었다. 어떻게 한담? 이제부터라도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람? 모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 여기 있어요!" 모모는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어둠 속을 향해 외쳤다. 그렇지만 실제 회색 사나이가 그 소리를 들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허나 그건 모모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즉, 마지막 종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이 크고 텅 빈 광장 둘레에서 갈라져 나간 사방의 거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솟아오르더니 점점 밝아졌다. 모모는 곧 그것이,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광장을 향해 사방에서 느릿느릿 굴러오고 있는 여러 대의 자동차 헤드라이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려도 사방에서 눈부시게 강한 불빛이 부딪쳐 오기 때문에 모모는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들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잔뜩 동원하여 오리라고는 모모도 계산하지 않았었다. 한 순간 모든 용기가 다시 스러졌다. 하지만 이렇게 포위되어 버려 도망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모모는, 너무나 헐렁한 남자 웃도리 속으로 될 수 있는 한 기어 들어갔다. 

 하지만 곧 모모는 꽃들과 위대한 음악 속의 음성을 생각하였고,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위안을 느끼고 힘을 얻었다. 

 나직이 모터 소리를 붕붕거리면서 자동차들은 점점 가까와져 오고 있었다. 마침내 차들은 나란히 모모를 중심점으로 하여 하나의 원을 그리며 정지했다. 

 그리고 회색 사나이들은 차에서 내렸다. 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헤드라이트 뒤쪽 어둠 속에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시선이 자기를 향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결코 친절함을 머금지 않은 시선들이. 그러자 모모는 추워졌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모모도, 회색 도당 중의 어느 누구도. 

 "이 아이가 그러니까," 이윽고 어느 잿빛 음성이 들려왔다. "한 때 감히 우리랑 맞서 싸울 수 있다고 까분 모모라는 계집애요. 자, 보시요, 저 가련한 몰골을!" 

 이 말에 뒤이어, 멀리서 여러 사나이들의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웅성웅성하는 소음이 있었다. 

 "조심하시오!" 다른 잿빛 음성이 숨을 죽여 말했다. "아시다시피 이 꼬마는 우리한테 굉장히 해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소. 꼬마를 살짝 속이려는 건 소용 없는 짓이오." 

 모모는 잔뜩 귀를 기울였다. 

 "그럼 좋소," 첫번째 음성이 헤드라이트 뒤의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럼 우리 진실을 가지고 시도해 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모든 회색 도당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데 상상할 수 없는 안간힘을 요하는 모양이었다. 여러 목구멍에서 나오는 헐떡거리는 것같은 소리가 울려왔다. 

 이윽고 누구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음성은 다른 방향에서 들렸지만 역시 잿빛이었다. 

 "그럼 우리 터놓고 얘기해 보자. 너는 혼자야, 꼬마야. 네 친구들은 네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너의 시간을 같이 나눌 사람이 이제 아무도 없어.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지. 보다시피 우리의 힘은 이렇게 막강해. 우리한테 맞선다는 것은 소용 없는 짓이야. 수많은 외로운 시간들, 그것이 지금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니? 너를 압박하는 저주(咀呪)요, 너를 질식케 하는 짐이요, 너를 삼키는 바다요, 너를 시들게 하는 고통이야. 너는 모든 인간들한테서 젖혀졌어." 

 모모는 귀를 기울여 들으며 계속 침묵을 지켰다. 

 "언젠가는" 하고 그 음성은 말을 이었다. "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올 거야. 내일이든, 일 주일 후이든, 일 년 후이든. 우리한텐 아무래도 좋아. 그냥 기다리면 되니까. 언젠가는 네가 머리를 숙이고 기어 들어와서 뭐든지 하겠어요, 다만 이 묶여진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럴 생각이니? 그냥 말만 하면 된다." 

 모모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우리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니?" 그 음성은 싸늘하게 말했다. 

 냉기(冷氣)의 파도가 사방에서 모모를 향해 밀어닥쳤다. 하지만 모모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저 꼬마는 시간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소." 어느 딴 음성이 수군거렸다. 

 "그건 저 꼬마가 정말로 이른바 '모(某)'라는 자한테 갔었다는 증거요." 첫번 음성이 역시 수군대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다시 음성을 높여 물었다. "너는 호라 박사를 알고 있니?" 

 모모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네가 실제로 호라 박사한테 갔었니?" 

 모모는 다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넌…… 시간의 꽃을 알겠구나?" 

 모모는 세번째로 고개를 까딱였다. 아, 모모는 그 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 꽤 긴 침묵이 흘렀다. 다시금 다른 방향에서 음성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너는 네 친구들을 사랑하고 있지?" 

 모모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그들을 우리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싶지?" 

 다시금 모모는 고개를 까딱였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할 수가 있어." 

 모모는 웃도리를 한껏 꼭꼭 여몄다. 추워서 사지(四肢)가 덜덜 떨려왔기 때문이었다. 

 "네 친구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데, 너는 정말 아주 조금만 애를 쓰면 돼. 우리가 너를 도와 주고 네가 우리를 도와 주는거야. 아무튼 공평한거야." 

 모모는 지금의 음성이 들려오는 쪽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즉 우리는 이 호라 박사라는 인물을 한번 직접 보고 싶다, 알겠니? 그렇지만 우리는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만 네가 우리를 그의 집으로 안내해 주는 것뿐이야. 그것이 전부야. 잘 들어 봐, 모모. 이만하면 너도 우리가 너와 솔직히 터놓고 얘기를 하고 진심으로 대했음을 확실히 알겠지? 그 대신 너는 네 친구를 다시 갖게 되고 너희들은 옛날처럼 재미있게 지낼 수가 있을거야. 이만하면 아무튼 유리한 제안이지!" 

 그 순간 모모는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말을 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입술이 얼어 붙은 것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라 박사한테 무엇을 원하나요?" 모모는 느린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그를 보고 싶을 뿐이야." 그 음성은 날카롭게 대답했고 주위는 점점 추워왔다. "그것으로 너는 족한거야." 

 모모는 말없이 서서 기다렸다. 회색 도당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하고 회색 음성은 말했다. "너랑 네 친구들이나 생각하렴! 호라 박사에 대해 무슨 걱정을 하니? 그것은 어쨌든 그 자신이 걱정할 문제야. 그는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어. 뿐만 아니라 그가 현명하게 일을 처리하고 우리하고 뜻이 맞으면, 우린 그의 머리카락 하나 안 건드릴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뜻을 꺾을 수단을 갖고 있어." 

 "어떻게 하려고요?" 모모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물었다. 

 대답하는 음성이 더 질질 끌 수 없다는듯이 갑자기 날카롭게 울려왔다. "우리는 인간의 시간을 초, 분, 시간으로 낱낱이 긁어 모으는 데 진력이 났어. 모든 인간의 시간을 몽땅 가지려는 거야. 호라 박사한테 그 시간을 우리한테 떠넘기라고 할거야!" 

 모모는 깜짝 놀라 음성이 들려오는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럼 인간들은?" 모모는 물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나요?" 

 "인간들은" 하고 그 음성은 쇳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벌써 오래 전부터 넘쳐나고 있어. 인간들 자신이 자기네들이 앉을 자리가 없게끔 세상을 이끌어 왔어. 이제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는거야!" 

 냉기가 너무나 무섭게 몰아쳤기 때문에 모모는 입술을 움직이려고 애썼지만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걱정 말아라, 꼬마 모모." 음성은 이번엔 갑자기 다시 억양을 낮추어 사뭇 아첨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너랑 네 친구들은 물론 예외야. 너희들은 뛰어 놀며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거야. 너희들은 우리의 이번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아. 우리는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거야." 

 음성은 말을 마쳤다. 하지만 곧 이어 이번엔 다른 방향에서의 음성이 말을 시작했다. "보다시피 우리는 진실을 털어놨어. 우리는 우리의 약속을 지킬거다. 그러니 너는 우리를 호라 박사한테 안내해." 

 모모는 입을 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추위가 의식(意識)을 거의 앗아가 버렸다. 몇 번이나 애를 쓴 끝에 가까스로 말을 끄집어냈다. "혹시 제가 할 수 있다 해도 그만 두겠어요." 

 어느 방향에선가 위협하는 투로 한 음성이 물었다. "혹시 할 수 있다니, 무슨 뜻이니? 너는 할 수가 있잖아! 어쨌든 너는 호라 박사한테 갔었고, 그러니 길을 알고 있어!" 

 "나는 그 길을 다시 못 찾아요." 모모는 속삭이듯 말했다. "찾으려고 해 봤어요. 카시오페이아만 그걸 알아요." 

 "그게 누군데?" 

 "호라 박사의 거북이예요." 

 "그 거북이는 지금 어디 있니?" 

 모모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거북이는…나랑…같이 왔어요………그런데…내가…거북이를…잃어 버렸어요." 

 흥분한 음성의 수런거림이 까마득히 멀리서처럼 모모의 주변에서 들려왔다. 

 "당장 대 비상경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거북이를 찾아야 한다. 모든 거북이를 수색하라! 이 카시오페이아라는 거북이를 꼭 찾아야 한다! 꼭 찾아야 한다! 꼭!" 

 음성들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모모는 서서히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모모는 다만 차가운 돌풍만이 여전히 불고 있는 커다란 광장에 혼자 서 있었다. 황량한 공허(空虛)로부터 불어오는 듯한, 잿빛 바람이었다. 

 

18  뒤돌아 보지 않고 섣불리 앞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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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탑시계가 이따금 쳤지만 모모는 거의 듣지 못했다. 다만 아주 서서히 얼어 붙은 팔다리로 온기(溫氣)가 되돌아왔다. 모모는 마치 무력하게 마비되어 버린듯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원형극장 옛터로 되돌아가 잠을 자야 할까? 이제는 자기와 친구들을 위한 모든 희망이 결정적으로 사라져 버린걸까? 다시는 좋게 회복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카시오페이아에 대한 불안이 덮쳐왔다. 회색 도당이 진짜로 카시오페이아를 찾아내면 어떻게 한담? 모모는 도대체 거북이에 관해 입에 올린 자기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둘 만큼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정신없이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하고 모모는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카시오페이아는 벌써 오래 전에 다시 호라 박사한테 가 있을는지 몰라. 그래, 차라리 거북이가 나를 다시 찾지 않았으면. 그게 거북이를 위해서는 행운일거야. 나를 위해서도……." 

 그 순간 모모의 맨발을 무엇인가가 살짝 건드렸다. 모모는 깜짝 놀라 살며시 아래로 몸을 굽혔다. 

 그 앞에 거북이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어둠 속에서 서서히 글자가 비쳐 올랐다. "내가 다시 왔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모는 거북이를 덥석 들어 올려 웃도리 밑에다 싸안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주변의 어둠 속을 살펴보고 귀를 기울였다. 회색 도당이 아직도 근처에 있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사방은 여전히 적막했다. 

 카시오페이아는 웃도리 속에서 요란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모모는 거북이를 꼭 껴안은 채 웃도리 속을 들려다 보며 소근거렸다. "제발 가만히 있어." 

 "왜 이렇게 나를 가두니?" 거북이 등이 반짝였다. 

 "네가 눈에 띄면 안 돼!" 모모는 소근댔다. 

 이번에는 거북이의 등에 이런 글자가 나타났다. "조금도 기쁘지가 않니?" 

 "왜 기쁘지 않겠니." 모모는 말하며 사뭇 훌쩍거렸다. "기뻐, 카시오페이아.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리고는 거북이 코에 대고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거북이 등의 글자가 눈에 띄게 홍조를 띠며 대답했다. "이제 그만!" 

 모모는 방긋 웃었다. 

 "그럼 내내 나를 찾은거니?" 

 "물론." 

 "그럼 어떻게 나를 하필 지금, 왜 여기서 찾았니?" 

 "미리 알았어." 

 그렇다면 거북이는 그 이전의 시간에는 모모를 찾아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내내 찾아 다녔다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 경우 도대체 찾아 다닐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시 오랫동안 곰곰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어지는 카시오페이아의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런 문제로 머리를 싸맬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모모는 그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 소근소근 거북이에게 보고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이윽고 모모는 물었다. 

 카시오페이아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들었다. 이번엔 거북이의 등에 글자가 나타났다. "우리는 호라 박사한테 가는거야." 

 "지금?" 모모는 소스라치듯 놀라 외쳤다. "그렇지만 그 자들이 너를 사방에서 찾고 있어! 다만 여기에만 없는거야. 여기 그냥 있는 것이 현명한 게 아닐까?" 

 하지만 거북이의 등에는 다만 "알고 있어. 우리는 가는거야"라고 쓰였다. 

 "그렇게 되면" 하고 모모는 말했다. "우리는 곧장 그 사람들 품 속으로 뛰어드는 셈이야." 

 "우리는 아무도 안 만나." 카시오페이아의 대답이었다. 

 자, 거북이가 이렇게 확신한다면, 물론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를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러자 먼젓번에 걸어갔던 그 길고 힘들었던 길이 떠오르며, 불현듯 다시는 그 길을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혼자서 가렴, 카시오페이아." 모모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나는 못 가겠어. 혼자 가서 호라 박사께 인사 말씀이나 잘 전해 줘." 

 "아주 가까와!"라고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쓰였다. 

 모모는 그것을 읽고, 놀라서 주위를 돌아 보았다. 점차 모모는 여기가 곧 죽음처럼 느껴지던 그 초라한 도시 구역이라는 것을, 이곳을 통해 그 전에 자기가 신비스러운 불빛이 비치는 새하얀 집들이 있는 이역(異域)에 이르렀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여기가 바로 그 곳이라면, 정말 얼마 안 가 초시간의 거리, 초공간의 집에 이를 것이었다. 

 "좋아,"하고 모모는 말했다. "같이 갈께. 그렇지만 더 빨리 가게 내가 너를 안으면 안되겠니?" 

 "미안하지만 안돼."라고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쓰여졌다. 

 "왜 너는 굳이 너 혼자 기어가야 하니?" 모모는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 수수께끼같은 대답이 나타났다. "길은 내 안에 있어." 

 그리고 나서 거북이는 발을 떼었고 모모는 뒤를 좇았다. 천천히 한 발짝씩, 타박타박. 

  

 소녀와 거북이가 한 샛골목으로 사라지자마자 광장 주변의 칠흑같은 건물 그늘마다 술렁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억양 없이 킬킬거리는 소리처럼 수근대는 웅성거림이 광장으로 퍼졌다. 그것은 이 모든 장면을 엿듣고 있던 회색 도당들이었다. 그들 중의 몇몇이 모모를 몰래 지켜 보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퍽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기다림이 이토록 예기치 않은 수확을 가져다 주리라고는 그들 자신도 짐작 못할 일이었다. 

 "저기 가고 있어." 어느 잿빛 음성이 수근거렸다. "붙잡아야 할까?" 

 "물론 안돼요." 다른 자가 수군댔다. "그냥 가게 내버려 두는거요." 

 "어째서요?" 첫 음성이 물었다. "우린 거북이를 잡아야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라고 하잖았소." 

 "맞았소. 한데 무엇 때문에 거북이가 필요하오?" 

 "호라 박사한테로 안내받기 위해서요." 

 "바로 그거요. 지금 거북이는 바로 그리로 가고 있소. 그렇다면 우리는 거북이한테 억지로 시킬 필요가 없는거요. 지금 거북이는 자진해서 가고 있소, 의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다시금 억양 없는 킬킬거림이 광장 주변의 칠흑같은 그늘로 퍼졌다. 

 "당장 도시 안의 전 외무사원에게 알리시오. 추적이 단절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오. 모든 사원이 우리와 합세해야 하오. 그렇지만 절대 조심할 것은, 여러분, 아무도 저 꼬마와 거북이의 길을 방해해서는 안돼오. 어디를 가든 그들의 길을 터 줘야 하오. 어느 누구도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자, 그럼 우리 침착하게 저 아무 것도 모르는 안내자들을 미행합시다!" 

  

 이렇게 하여 과연 모모와 카시오페이아는 그들의 추적자 중의 누구와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왜냐 하면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든 간에 추적자들은 이들을 피해 제때에 몸을 감추어, 소녀와 거북이 뒤의 동료들에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점점 거창하게 불어나는 회색 도당의 행렬이 끊임없이 담벼락과 건물 모퉁이에 몸을 감춘 채 소리없이 두 도망자의 뒤를 좇고 있었다. 

 모모는 일찌기 겪어 보지 못한 극도의 피곤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쓰러지든가 잠들어 버릴 것같은 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채찍질하며 한 발짝을 떼어 놓았고 다시 다음 발짝을 떼어 놓았다. 그러자 한동안 다시 견딜 만해졌다. 

 거북이가 이토록 참을 수 없이 느림보로 기어 가지만 않더라도! 하지만 그 점은 어떻게 바꿀 도리가 없는 것이다. 모모는 이제 양 옆으로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발과 카시오페이아의 뒤꿈치에만 시선을 박고 있었다. 

 모모로서는 영원(永遠)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발 밑의 거리가 별안간 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모모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과연 그들은 마침내 아침빛도 저녁빛도 아닌 여명(黎明)에 휩싸인, 모든 그림자가 여러 갈래의 방향으로 드리워져 있는 바로 그 도시 구역에 이른 것이었다. 새까만 창문이 달린 건물들이 눈부시게 새하얗게, 접근할 수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또 새까만 정방형 돌 위에 커다란 달걀을 묘사한 것에 불과한 듯한, 예의 괴상한 기념비도 여전히 서 있었다. 

 모모는 용기를 얻었다. 이제야말로 호라 박사의 집에까지 과연 얼마 안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탁이야" 하고 모모는 카시오페이아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빨리 갈 수 없겠니?" 

 "천천히 가면 갈수록, 더욱 빨리 닿게 돼." 거북이 등에 나타난 대답이었다. 거북이는 아까보다 더 천천히 계속 기어갔다. 과연 모모는―전에도 그랬듯이―여기에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천천히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그들 발 밑의 길이 점점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천천히 앞으로 내디디면 디딜수록 더욱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또한 급히 서둘면 서둘수록 더욱 디디게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사실 이것이야말로 이 새하얀 도시 구역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세 대의 자동차로 모모를 추적하던 그 당시에 회색 도당들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모모를 놓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그들도 소녀와 거북이를 결코 앞지르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그들도 앞서가는 두 꼬마와 똑 같은 속도로 천천히 뒤좇고 있었다. 이렇든, 그들 역시 이 비밀을 알아낸 것이었다. 새하얀 거리들은 소녀와 거북이에 뒤이은 한 떼의 회색 도당으로 서서히 메워져 갔다. 여기서는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 버린 회색 도당들은 이제 숫제 거북이보다 느린 속도로 뒤따라 갔고, 그러다 보니 결국 점점 따라 붙게 되어 간격이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이야말로 사뭇 거꾸로의 경주(競走)였다. 느림보 경주였던 것이다. 

 길은 환상의 거리를 가로 세로로 누비며 점점 깊숙이 새하얀 도시 구역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자 초시간가(街)에 이르게 되었다. 

 카시오페이아는 벌써 그 골목으로 굽어 들어 초공간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모는 이 거리에서는 뒤돌아 서서 거꾸로 걷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순간, 모모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깜짝 놀랐다. 

 움직이는 회색 담벼락처럼 시간 도둑들이 다가 오고 있지 않은가. 전 도로의 폭을 가득 채우도록 나란히 서서, 눈에 보이는 한은 끝도 없이 열을 지어서. 

 모모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모모는 뒷걸음질로 초시간가로 들어가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따라 오는 엄청난 회색 도당의 부대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추적자들의 제 일진(一陣)이 초시간가로 뚫고 들어오려 하자,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모모의 눈 앞에서 무(無)로 소멸해 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앞으로 내민 두 팔이, 그 다음엔 다리와 몸뚱아리, 그리고 끝으로 경악의 표정을 담은 얼굴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모만이 이 과정을 목격한 게 아니라, 뒤따라 몰려들던 회색 도당들도 당연히 이 장면을 보았다. 바로 그 뒤의 그룹이 이 뒤에서 몰려오는 대부대를 막고 버티어 섰다. 그러자 한 순간 그들 사이에 일종의 격투같은 장면이 벌어졌다. 모모는 그들의 격노한 얼굴과 절박하게 휘두르는 주먹을 보았다. 그렇지만 자기를 따라 오려고 감히 마음먹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 이윽고 모모도 초공간의 집에 이르렀다. 육중한 초록빛 철문이 열렸다. 모모는 허겁지겁 뛰어 들어가, 돌상(像)들이 즐비한 복도를 달려, 막다른 곳의 꼬마문을 열고 미끄러져 들어 갔다. 다시 수많은 시계가 서 있는 홀을 누비며 시계 숲의 한가운데 있는 꼬마방을 향해 달려가서, 아담한 소파에 몸을 던지고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기 위해서. 

 

19  포위된 사람들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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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서서히 모모는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신기하게도 씻은듯이 피곤이 가시고 상쾌한 느낌이었다. 

 "꼬마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너는, 카시오페이아, 어쩌자고 그렇게 했니?" 

 모모는 눈을 반짝 떴다. 소파 앞의 식탁 곁에 호라 박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거북이가 앉아 있는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회색 도당이 좇아오리라는 것을 생각 못했니?" 

 "나는 미리 알 뿐이에요"라고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나타났다. "뒤늦게 반성은 안해요!" 

 호라 박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카시오페이아, 카시오페이아, 어떨 땐 너 역시 나한텐 수수께끼야!" 

 모모는 일어나 앉았다. 

 "아, 우리 꼬마 모모가 깨었구나!" 호라 박사는 다정하게 말했다. "어떠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니?" 

 "아주 좋아요, 고마와요." 모모는 대답했다. "죄송해요. 여기서 무턱대고 잠이 들어 버려서……." 

 "그런 걱정은 말아라."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참 잘한 일이다. 아무런 설명을 안해도 돼. 내가 만물투시 안경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은 전부 카시오페이아가 그 동안에 보고를 해 주었어." 

 "그럼 회색 도당들은 어떻게 됐어요?" 모모가 물었다. 

 호라 박사는 웃도리에서 커다란 푸른 손수건을 꺼냈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 초공간의 집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셈이지. 그 자들이 접근해 올 수만 있다면 말이다." 

 "여기로 들어올 수는 없단 말인가요?" 모모가 물었다. 

 호라 박사는 코를 풀었다. "아니, 그렇게는 못해. 너도 보지 않았니. 그들이 초시간가(街)를 디디기만 하면 속절없이 무(無)로 사라져버리는 광경을." 

 "어떻게 그렇게 되지요?" 모모는 궁금했다. 

 "시간의 역류(逆流)가 그렇게 만드는 거란다."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그 안에서는 일체 거꾸로의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걸 너도 알잖니? 초공간의 집 주변에서는, 말하자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거든. 그밖의 다른 데서는 시간이 너의 내부(內部)를 향해 흘러 들어 가고 있는거야. 그래서 네가 점점 네 안에 시간을 많이 지닐수록, 너는 나이가 들어 가는 거야. 그렇지만 초시간의 거리에서는 시간이 너로부터 밖으로 빠져 나와. 그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에, 너는 나이가 줄어든다고 말할 수 있겠지. 무턱대고 젊어지는 게 아니라, 다만 그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걸린 시간만큼." 

 "그런 걸 저는 전혀 몰랐어요." 모모는 신기해하며 말했다. 

 "자, 이거 봐." 호라 박사는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게 아냐. 인간은 자기 안에 감추어진 시간을 훨씬 능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회색 도당들한텐 문제가 달라. 그들은 온통 훔쳐온 시간으로 이루어진 존재거든. 그래서 그들이 시간의 역류 속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이 그들에게서 빠져 나오는거야. 마치 터진 고무풍선에서 공기가 빠지듯이. 고무풍선의 경우엔 하다못해 껍데기라도 남지만, 그들은 완전히 형체가 없어져 버려." 

 모모는 정신을 바짝 모아 생각을 했다. 

 "그럼 혹시," 잠시 후 모모는 물었다.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거꾸로 흐르게 할 수는 없을가요? 물론 아주 잠간만요. 그럼 모든 인간들은 약간씩 젊어질 테고, 그거야 괜찮은 일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으로 시간 도둑들은 무(無)로 사라질 테니까요." 

 호라 박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면 물론 좋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는 안돼. 양편의 시간의 흐름은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한편의 흐름을 없애 버리면, 동시에 다른 편의 흐름도 사라지는거야. 그리고 나면 애당초 시간이라는 게 없어지는 거야……." 

 그는 말을 멈추고 만물투시 안경을 이마로 추켜올렸다. 

 "그것은 즉…," 그는 중얼거리며 일어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작은 방안을 몇 번 왔다 갔다 서성댔다. 모모는 잔뜩 긴장해서 그를 쳐다 보고 있었고, 카시오페이아의 시선 역시 그를 좇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좋은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성취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나 혼자한테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야." 그는 발치에 있는 거북이를 향했다. "카시오페이아, 내 소중한 친구! 네 생각에는 포위당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이 뭐겠니?" 

 "아침 식사요!" 거북이의 등에 대답이 나타났다. 

 "그래," 호라 박사는 말했다. "역시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바로 그 순간, 어느새 식탁이 차려졌다. 아니면 애당초 그 동안 내내 식탁이 차려져 있었는데, 모모가 여태 몰랐던 것일까? 어쨌든 거기에는 전처럼 작은 황금 찻잔과 그밖의 모든 황금빛 나는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콜렛이 든 주전자랑, 꿀, 버터, 그리고 바삭바삭한 동그란 빵이. 

 그 동안 여러 번, 이 맛나는 음식을 회상하며 먹고 싶어했던 모모는 잔뜩 식욕을 느끼며 당장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난 번보다 한층 더 맛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호라 박사도 맛있게 음식을 들었다. 

 "그 자들은," 잠시 후 모모는 볼이 불룩하게 씹어 먹으며 말했다. "박사님한테서 모든 인간의 시간을 몽땅 인수하려고 그래요. 그렇지만 박사님께서 그러시지는 않겠지요?" 

 "아니, 꼬마야."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거다. 시간은 언젠가 시작되면, 또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야. 그렇지만 인간이 그것을 쓰기를 그칠 때에야 비로소 끝나는거야. 나한테서는 회색 도당이 단 일초도 뺏아갈 수 없을거다." 

 "그렇지만 그 자들은" 하고 모모는 말을 이었다. "박사님을 그렇게 하도록 꺾을 수 있다던데요." 

 "그 점에 대해 계속 얘기하기 전에" 하고 그는 아주 심각하게 말했다. "네 눈에 그 자들을 보여 주고 싶구나." 

 그는 그의 작은 황금빛 안경을 벗어 모모에게 건네 주었다. 모모는 안경을 썼다. 

 처음에는 다시금 빛깔과 형체의 소용돌이만이 나타났고, 모모는 지난 번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지럼증도 금방 지나갔다. 잠시 후 모모의 눈은 만물의 시계(視界)로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자 거기에 나타난 포위하고 있는 엄청난 대군이란! 

 헤아릴 수 없는 회색의 대군이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초시간가(街) 앞에만 있는 게 아니라 더 멀리 광범위하게, 초공간의 집을 중심으로 하여, 눈처럼 새하얀 집들의 도시 구역을 뒤덮는 커다란 원을 긋고 있었다. 포위망은 물샐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어서 모모는 어떤 다른점을, 의아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처음엔 만물투시 안경의 유리면에 혹시 습기가 끼었거나, 자기 자신이 아직 분명히 볼 수 없는 상태인가 보다고만 생각을 했었다. 알 수 없는 안개가 회색 대군의 윤곽을 몽롱하게 알아 볼 수 없게 흐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이 안개는 안경이나 자신의 눈과는 상관 없이 저 바깥의 거리에서 솟아오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벌써 여러 군데에, 꿰뚫어 볼 수 없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다른 지점에서는 이제 막 안개가 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회색 도당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여전히 머리에 중산모자를 쓰고,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입으로는 작은 회색 시가를 뿜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담배 연기는 다른 때 보통의 공기 속에서처럼 분산되지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이곳의 유리알같은 공기 속에서 담배 연기는 거미줄처럼 질긴 베일을 이루며 뻗쳐, 거리 위쪽 새하얀 건물의 전면(前面)으로 기어올라가 길다란 깃발처럼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퍼져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네모의 청록(靑綠)빛 가닥으로 뭉쳐서, 서서히,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포개어져 쌓여 탑을 이루면서 끝없이 높아지는 담벼락으로 초공간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모모는 또한 이따금 새로운 도당들이 도착해서 다른 자들과 자리를 교대해 가면서 열(列)에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 시간 도둑들은 무슨 꿍꿍이 수작을 벌이는 것일까? 

 모모는 안경을 벗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봤니?" 그는 물었다. "그럼 안경을 이리 돌려다오." 

 안경을 다시 쓰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자들이 나를 꺾을 수 있느냐고 물었지. 너도 알다시피 나 자신에게는 그들이 와서 닿을 수가 없어. 그렇지만 인간들에게 해를 줄 수는 있어. 지금까지 그들이 했던 그 어떤 짓보다 더 나쁜 방법으로. 지금 그 방법으로 그들은 나를 협박해서 뜻을 이루려는 거야." 

 "더 나쁜 방법이라구요?" 모모는 깜짝 놀라 물었다. 

 호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 시간을 나누어 주고 있어. 거기 대고는 회색 도당도 손을 쓸 수가 없어. 그들은 또 내가 보내는 시간을 막을 수도 없어. 그렇지만 그것을 중독(中毒)시킬 수는 있어." 

 "시간을 중독시키다니요?" 모모는 의기소침해져서 물었다. 

 "그들의 시가의 연기로 말이다." 호라 박사는 설명했다. "조그만 회색 시가를 물지 않은 회색 인간을 하나라도 본 적이 있니? 없을거다. 시가 없이는 그들은 존재할 수 없거든." 

 "그럼 대체 그게 무슨 종류의 시가인가요?" 모모는 궁금해서 물었다. 

 "시간의 꽃을 너는 기억하고 있겠지." 호라 박사는 말했다. "그 때 내가 말했었지. 모든 인간은 심장을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모두가 그런 시간의 황금 성전(聖殿)을 지니고 있다고. 인간들이 회색 도당을 자기의 성전 안에 받아 들이면, 그들은 점차로 그 성전 안의 꽃들을 꺾어갈 수 있게 돼. 그렇지만 이렇게 인간의 심장에서 꺾여 나간 시간의 꽃들은 죽은 게 아니야. 그것들은 실제로 사라져 버린 게 아니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그 꽃들은 살아 있는 것도 아니야. 실제의 주인한테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지. 그 꽃들은 본질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자기의 주인한테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거야." 

 모모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악(惡)도 그 나름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모모. 이 회색 도당이 탈취해 온 시간의 꽃들을 어디에다 저장하는지를 나는 몰라. 나는 다만 그들이 이 꽃들을 유리잔처럼 딱딱해지도록, 자기네의 냉기(冷氣)로 얼린다는 것만 알고 있어. 그렇게 해서 그 꽃이 되돌아 가는 걸 방해하는거야. 어딘가 땅 속 깊이 얼어 붙은 시간이 몽땅 잠긴 거대한 창고가 있을거야. 하지만 거기서도 역시 시간의 꽃은 여전히 죽은 게 아니야." 모모의 뺨은 분노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저장 창고로 회색 도당은 끊임없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 그들은 시간의 꽃에서 꽃잎을 뜯어 내어, 잿빛으로 딱딱해질 때까지 그것을 말린단다. 그리고 그걸 갖고 그들의 조그만 시가를 말아. 그렇지만 이 순간까지도 생명의 잔재(殘滓)가 꽃잎에 남아 있어. 어쨌든 살아 있는 시간이란 회색 도당한테는 벅찬거야. 그래서 그들은 시가에 불을 붙이고 담패를 피우지. 왜냐하면 그렇게 연기로 화하면서 시간은 진실로 완전히 죽어 버리기 때문이야. 그런 죽어 버린 인간의 시간으로 그들은 자기네 존재를 연명하는 거야." 

 모모는 일어섰다. "아! 그렇게 많은 죽어 버린 시간이라니요…." 모모는 말했다. "그래, 저 바깥, 초공간의 집 주변을 두르고 높이 쌓여가는 연기의 장벽은 죽은 시간으로 이뤄진 것이란다. 아직은 탁 트인 하늘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나도 큰 지장 없이 인간에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어. 그렇지만 침침한 연기의 덮개가 사방으로 우리의 위를 뒤덮게 되는 날이면,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 속에, 회색 도당의 유령같은 죽어 버린 시간이 뒤섞이게 된단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 시간을 받게 되면,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병이 들게 돼. 죽을 병에 걸리게 되는거야." 

 모모는 어쩔 줄 몰라하며 호라 박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무슨 병인데요?" 

 "처음에는 거의 증세를 못 느끼지.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무엇이든 할 의욕을 잃어 버려. 재미있는 일이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게 돼. 게다가 이 불쾌감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버티고서는 점점 서서히 커가는 거야. 날이 가고 주일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돼. 점점 기분이 나쁘게 느껴지고, 점점 내면(內面)이 비어가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점점 불만스럽게 느껴지는거야. 그 다음엔 이런 느낌조차 점점 없어지고 결국 아무 것도 느끼지 않게 돼. 완전히 냉담해지고 회색이 되는거야. 온 세상이 그에겐 낯설게 느껴지고 전혀 상관 없게 돼. 화낼 것도 열광할 것도 없어져. 기뻐할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르게 되고 웃는 것과 우는 것을 잊어 버리는거야. 그리고 나면 그의 내면은 싸늘해지고, 아무 것도,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게 돼. 이 정도까지 증세가 악화되면, 그 병은 불치의 병이야. 회복할 길이 없어. 공허한 회색 얼굴로 성급히 싸돌아 다니는거야. 그 자신이 회색 도당과 꼭 같이 되어 버리는거야. 그래, 그렇게 되면 그도 곧 회색 도당의 일원인거지. 이 병의 이름은 중증 권태감(重症倦怠感)이란다." 

 모모는 온 몸을 무섭게 떨었다. 

 "만일 박사님께서 계속 모든 인간에게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하고 모모는 물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을 자기네처럼 만들겠군요?" 

 "그렇단다."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협박해서 뜻을 이루려는거다." 

 그는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나는 지금껏 인간들 스스로가 이 악귀(惡鬼)들한테서 빠져 나오기를 기다렸어. 인간들은 그럴 수가 있었어. 사실 그 악귀들도 결국은 인간에 의존해서 연명을 하니까. 그렇지만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무슨 조처를 취해야겠어. 하지만 나 혼자서는 할 수가 없구나." 그는 모모를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주겠니?" 

 "예." 모모는 속삭였다. 

 "너는 상상할 수도 없는 위험 속으로 보내지는거야" 하고 호라 박사가 말했다. "그리고 세상이 영원히 정지해 버리느냐, 아니면 새로이 살기를 시작하게 되느냐 하는 건 너한테 달렸어, 모모. 정말로 해 볼 용기가 있니?" 

 "예." 되풀이하는 모모의 음성이 이번엔 단호히 울렸다. 

 "그렇다면" 하고 호라 박사는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아주 주의 깊게 들어라. 이제 너는 완전히 너 혼자의 힘으로 서야 해. 나 역시 너를 더 이상 도와 줄 수 없기 때문이야. 나도, 그 어느 누구도." 

 모모는 고개를 까딱하고 온 주의력을 집중해서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을 자는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고 그는 말을 시작했다. "내가 잠이 들면, 그 순간 모든 시간은 정지할 거야. 세상도 정지해 버리겠지. 시간이라는 것이 없어지면, 회색 도당도 아무한테서도 시간을 훔칠 수가 없게 되지. 하긴 그들은 잔뜩 저장해 놓은 시간을 갖고 있으니까 당분간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이것마저 소비해 버리고 나면 그들은 무(無)로 사라지고 말게 돼." 

 "그렇다면," 모모가 말한다. "어쨌든 참 간단하네요!"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 그렇다면 나는 네 도움도 필요 없겠지, 꼬마야. 요컨대 시간이라는 게 이미 존재하지 않으면, 나 역시 다시는 깨어날 수가 없는거야. 그래서 세상은 정지 된 채로 영원히 머물게 될 거야. 그렇지만 너한테, 모모, 단지 너 혼자한테, 한 송이 시간의 꽃을 주는 것은 내 권한에 속하는 일이야. 물론 단 한 송이뿐이야. 왜냐하면 언제든지 다만 한 송이만이 피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만약 세상의 모두 시간이 정지한다 해도, 너는 한 시간을 더 갖게 될거야." 

 "그렇다면 제가 박사님을 깨울 수 있겠네요!" 모모가 말했다. 

 "그 한 시간만으로는" 하고 호라 박사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간단히 뜻을 이룰 수 없을거다. 왜냐하면 회색 도당의 저장량이 훨씬, 훨씬 많기 때문이야. 단 한 시간 쯤이야, 그들은 그 저장량 중에서 아무 것도 아닌듯이 쓸 수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 이후로도 그들은 여전히 생존할 것이다. 네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훨씬 어려운 것이야! 시간이 정지한다는 것을 깨닫는 즉시―그것을 그들은 당장 깨달을 것이다. 시가의 조달이 중단될 테니까 말이다―회색 도당들은 포위를 풀고 시간의 저장 창고로 달려 갈 것이다. 그 때 너는 그들을 따라가는 거야, 모모. 그들의 비밀 창고를 발견하면, 너는 그들이 저장된 시간을 못 갖도록 막아야한다. 시가를 못 갖게 되면, 그들 역시 끝장이거든. 그렇지만 그 다음에 할 일이 또 있어. 아마 이것이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마지막 시간 도둑이 사라지고 나면, 너는 훔쳐온 모든 시간을 풀어 줘야 하는 것이야. 왜냐하면 이 시간들이 인간에게 되돌아가는 경우에만 세상은 정지 상태를 끝내고, 나 자신도 다시 깨어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 너한테는 단지 한 시간이 있을 뿐이야." 

 모모는 어쩔 줄 몰라 호라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엄청나게 어렵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해 보겠니?" 호라 박사는 물었다. "이것이 유일한 마지막 가능성이야!" 

 모모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기로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같이 가겠어!" 라고 갑자기 카시오페이아의 등에 나타났다. 

 이 모든 일에 거북이가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담! 그래도 그것은 모모한테 한 줄기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완전히 단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모모는 용기를 얻었다. 이렇다 할 분별있는 근거를 가진 용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용기로 인해 모모는 불쑥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해 보겠어요." 모모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호라 박사는 한동안 모모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많은 점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결 쉬울 것이다. 별(星)의 음성을 들었잖니. 겁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거북이를 향해 물었다. "그래, 카시오페이아, 너도 같이 가겠니?" 

 "물론!" 이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그리고 이 말이 사라지며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타났다. "그래도 누구인가 모모를 지켜야지요!" 

 호라 박사와 모모는 웃음을 머금고 마주 보았다. 

 "카시오페이아도 시간의 꽃을 하나 갖는가요?" 모모는 물었다. 

 "카시오페이아는 그것이 필요 없단다." 호라 박사는 거북이의 목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설명했다. "거북이는 시간 바깥의 존재이거든. 거북이는 자기의 작은 시간을 자신의 내부에 갖고 있어. 모든 것이 영원히 정지한다 해도, 거북이는 여전히 세상 위를 기어다닐 수 있을 거야." 

 "됐어요." 갑자기 사명에 대한 어떤 충동을 느낀듯 모모가 입을 뗐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지금,"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우리는 작별을 하는거야." 

 모모는 훌쩍거리면서 나직이 물었다. "그럼 다시는 못 만나게 되나요?" 

 "다시 만나게 돼, 모모" 호라 박사는 대답했다. "그 때까지, 네 인생의 한 시간 한 시간이 내 인사를 전해 줄거다. 우리는 친구이잖니?" 

 "예." 모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이제 가겠다." 호라 박사가 말을 이었다. "따라 와서는 안돼. 또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말아라. 나의 잠은 보통의 잠이 아니란다. 네가 옆에 없는 게 좋아.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다. 내가 떠나자마자 두 개의 문을 열어라. 내 문패가 달려 있는 꼬마문과, 초시간가(街)로 나가는 초록빛 철문을. 시간이 멈춰 버리는 즉시 만물이 정지해 버리게 되고, 그러면 이 문들 역시 세상의 어떠한 힘으로도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말이다. 전부 알아 듣고 기억하겠니? 꼬마야." 

 "예" 하고 모모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멎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채지요?" 

 "걱정 말아라. 그냥 알게 된단다." 

 호라 박사는 일어섰다. 모모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모모의 더벅머리를 정답게 쓰다듬었다. 

 "잘 있거라, 꼬마 모모." 그는 말했다.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커다란 기쁨이었단다." 

 "모든 사람들한테 박사님 얘기를 하겠어요." 모모는 대답했다. "훗날에요." 

 그러자 호라 박사는 갑자기 알 수 없이 다시 늙어 보였다. 그 당시 황금빛 성전에서 보던 모습과 똑 같이 바위산처럼, 태고의 고목처럼. 

 그는 몸을 돌려 시계 상자로 이뤄진 작은 방을 재빨리 빠져 나갔다. 모모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발자국 소리는 수많은 시계의 똑딱거림과 구별할 수 없이 잦아들었다. 어쩌면 그는 이 똑딱거림 속으로 들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를 들어 올려 꼭 껴안았다. 모모의 위대한 모험은 이제 되돌릴 여지없이 시작된 것이었다. 

 

20  추적자(追跡者)의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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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처음으로 모모는 호라 박사의 이름이 붙어 있는 안 쪽의 꼬마문으로 가서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잽싸게 커다란 돌상이 서 있는 복도를 지나 바깥 쪽 초록빛 철문을 열었다. 커다란 문짝이 너무나 육중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야 겨우 열렸다. 

 이 일이 끝나자 모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계가 있는 홀로 되돌아와 카시오페이아를 팔에 안고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일종의 진동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흔드는 진동이 아닌, 시간을 흔드는, 이른바 시진(時震)이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의 것인가를 설명할 적절한 말은 없다. 지금껏 단 한 인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하나의 울림과 함께 이 일은 벌어졌다. 그것은 수백년의 깊이에서 울려 나오는 것같은, 일종의 한숨과 같은 울림이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일은 지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계의 똑딱똑딱, 재깍재깍, 땡땡 하는 합창도 씻은듯 순간적으로 딱 멎었다. 흔들거리던 추(錘)들도 그 순간에 있던 지점에서 멎어 버렸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완전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정적(靜寂)이 퍼졌다. 지금까지 세상을 한번도 지배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정적이었다. 시간이 멎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모모는 자기의 손에 신비로운, 커다란 시간의 꽃이 한 송이 쥐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 꽃이 자기의 손 안에 들어 왔는지 전혀 느끼지를 못했었다. 그 꽃은, 항상 당연히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순간적으로 거기에 나타난 것이었다. 

 조심조심 모모는 한 발짝을 떼어 놓았다. 과연, 언제나와 다름없이 쉽게 그냥 움직여졌다. 꼬마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아침 식사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모모는 안락의자에 앉아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쿠션이 대리석처럼 딱딱해져서 푹신하니 들어가지 않았다. 모모가 먹던 찻잔에는 아직도 한 모금의 초콜렛이 남아 있었지만, 찻잔 역시 놓인 자리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모모는 초콜렛 속에 손가락을 담가 보았다. 그것 역시 유리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꿀도 마찬가지였다. 쟁반에 놓인 빵 부스러기조차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진 마당에서는 아무 것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미 결코 변동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카시오페이아가 바둥거렸다. 모모는 거북이를 쳐다 보았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 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정말, 그래! 모모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홀을 지나 꼬마문을 빠져나가 거침없이 복도를 달려 커다란 문의 모퉁이에서 바깥을 엿보는 순간 흠칫 뒤로 물러섰다. 모모의 심장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시간 도둑들은 도망을 치는 게 아니었다! 반대로, 이제는 역류하는 시간이 멎어 버린 초시간의 거리를 따라 초공간의 집을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계획에서는 예기치 못한 일이 아닌가! 

 모모는 커다란 홀로 되돌아와 카시오페이아를 팔에 안고 커다란 장롱시계 뒤에 몸을 숨겼다. 

 "이제 시작이로구나." 모모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바깥 복도에서 회색 도당의 발자국 소리가 쿵쿵 울리는 게 들렸다. 차례차례로 그들은 억지로 꼬마문을 기어 들어 와서는 일당이 몽땅 홀 안에 섰다. 그들은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감개무량하군!" 그 중 한 사나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새 집이로군." 

 "모모라는 꼬마가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소." 다른 잿빛 음성이 말했다. "내 눈으로 똑똑이 보았소. 참 똑똑한 아이요! 그 늙은이의 마음을 되돌려 놓느라 이 꼬마가 무슨 수를 썼는지 참 궁금하오." 

 그러자 세번째의, 아주 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그 모(某)라는 자가 스스로 패를 내던진 것 같소. 왜냐하면 초시간가(街)에서 시간의 역류가 그쳤다는 것은 곧 그가 시간의 역류를 차단시켰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오. 그러니까 그 자도 우리한테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오. 이제 우리 그를 간단히 처리해 버립시다. 대체 그 자가 어디 처박혀 있는거요?" 

 회색 도당은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한 사나이가 말을 했다. 그의 음성은 한층 더 잿빛으로 울렸다. "저게 맞지 않아요, 여러분! 시계들 말이오. 저기 시계들 좀 보시오! 몽땅 멎어 있어요. 여기 모래시계까지." 

 "그 자가 지금 막 시계를 세운 모양이오." 다른 사나이가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모래시계는 정지시킬 수가 없소!" 먼저 사나이가 말했다. "게다가 이것 좀 보시오, 여러분. 흘러내리는 모래가 떨어지는 중간에서 멎어 버렸소! 시계를 움직일 수도 없소! 이게 무엇을 뜻하겠소?" 

 그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서 뛰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또 다른 회색 사나이가 흥분해서 손짓을 하며 꼬마문을 억지로 빠져 들어와 소리쳤다. "방금 시내의 우리 외무사원의 보고가 들어왔소. 자동차들이 정지했다는거요. 모든 것이 서 버렸소. 세계가 정지해 버렸소. 인간에게서 단 한 순간도 탈취해 오는 일이 불가능해진 것이오. 우리의 보급원(補給源)이 몽땅 끊어져 버린 것이오! 이제 시간이 없어졌소! 호라가 시간을 멈추어 버렸소!" 

 한 순간 죽음 같은 정적이 지배했다. 그러자 한 사나이가 물었다. "뭐라고 했소? 우리의 보급원이 끊어졌다고? 그렇다면, 휴대하고 온 시가를 다 피워 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당신도 알지 않소!" 다른 사나이가 소리쳤다. 

 "무서운 재앙이요, 여러분!" 

 그러자 갑자기 모두들 혼란을 일으키며 아우성쳤다. "호라가 우리를 근절시키려는 거요! ―당장 포위를 풀어 버려야겠소!―우리의 시간 창고로 가도록 해야겠소! 차가 없는데! 시간에 맞춰갈 수가 없소! 내 시가는 이십 칠분밖에 지탱을 못하는데! ―내 시가는 사십이분! ―그럼 나 좀 주시오! ―당신 돌았소? ―누구 나 좀 살려 주시오!――" 

 모두들 꼬마문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서 한꺼번에 비비적거리며 몰려 나가고 있었다. 모모는 몸을 감춘 채, 이 공황(恐慌) 속에서 그들이 서로 주먹질을 하며 밀치고 닥치고, 점점 격렬하게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관찰했다. 너나없이 자기가 앞장서 나가려 들며 자기의 회색 생명을 연명하려고 허우적대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머리의 모자를 치고 뒤얽혀 격투를 벌이며 각기 남의 입에서 조그만 시가를 낚아채었다. 그래서 빼앗긴 쪽은 그 순간 갑자기 모든 힘을 잃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허우적대며 겁에 질려 울상을 하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는 어느새 점점 투명하게 엷어져서 결국은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의 흔적은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었다. 모자조차도 간 곳이 없었다. 

 이윽고 홀 안에는 오로지 세명의 회색 사나이만이 남게 되었고, 그들은 어쨌든 꼬마문을 빠져나가 도망칠 수가 있었다. 

 겨드랑이엔 거북이를 끼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간의 꽃을 든 채, 모모는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제 모든 것은 회색 사나이들을 놓치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다. 

 큰 문을 나섰을 때, 시간 도둑들은 벌써 초시간가(街)의 어귀에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담배 연기 속에 다른 한 떼의 회색 도당이 서서 흥분해서 손짓을 하며 서로 뭐라고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들은 초공간의 집에서 달려나오는 사람을 보더니, 역시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잇달아 다른 떼들도 도망자의 행렬에 합류했고, 얼마 안 있어 전 부대가 허겁지겁 퇴각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끝도 없는 회색 도당의 행렬이, 사방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새하얀 건물의 신비스러운 꿈의 지역을 누비며 시내 쪽을 향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시간이 사라짐과 동시에, 물론 여기서는 빠른 것과 느린 것이 거꾸로 진행되던 신비스러운 속도의 전환(轉換)도 멎어 버렸다. 회색 도당의 행렬은 커다란 달걀 모양의 돌상을 지나서 비로소 보통의 집들이 시작되는 지점, 바로 시간의 접점(接點)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거주지인, 퇴락한 회색 아파트가 서 있는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어느새 모든 것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행렬의 후진(後陳)과 적당한 간격을 취하며 모모는 뒤좇았다. 이렇게 해서 이번에는 대도시를 누비는 거꾸로의 추적이 시작된 셈이었다. 엄청난 무리의 회색 인간들이 도망을 치는데, 한 손에는 꽃 한 송이를 들고, 다른 팔에는 거북이를 껴안은 작은 꼬마가 뒤쫓는 추적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의 모습은 얼마나 야릇해졌는가! 차도(車道)에는 종횡으로 자동차들이 줄지어 있었고, 핸들 뒤에는 스위치에 손을 대고 있거나, 크락션에 손을 얹은 자세로 움직임을 잃은 운전수들이 앉아 있었다(어떤 운전수는 마침 손가락으로 이마를 치며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옆 좌석의 사람을 건너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커브를 돌겠다는 표시로 팔을 내뻗은 채 굳어 버린 자전거를 타고 앉은 사람, 그리고 도보 위의 수많은 행인들, 남자, 여자, 어린이,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하다 못해 배기관(排氣管)에서 나오는 연기까지도 완전히 움직임을 잃고 굳어 있었다. 

 네거리마다에는 교통순경들이 호각을 입에 문 채, 교통 정리를 하는 동작으로 멈춰 서 있었다. 한 떼의 비둘기들이 꼼짝 않고 어느 광장 위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비행기 한 대가 그림처럼 하늘에 걸쳐 있었다. 분수의 물줄기는 얼음처럼 보였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새들이 꼼짝 않고 공중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 한 쪽 다리를 가로 등에 올려 놓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박제(剝製)처럼 서 있었다. 

 사진처럼 생명을 잃은 이 도시의 한복판으로 회색 도당은 질주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시간 도둑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조심하면서 모모가 뒤쫓고 있었다. 그렇지만 회색 도당들은 다른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도망길이 점점 더 어렵고 힘들어져 갔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그들은 이렇게 긴 거리를 걸어서 헤쳐 나가는 데 익숙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하려고 고심(苦心)했다. 게다가 그들은, 생명선인 조그만 회색 시가를 무슨 일이 있어도 입에서 떼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 중의 적지 않은 수는 달리는 도중에 시가를 놓쳤고 그것을 미처 바닥에서 주워 올리기도 전에 벌써 무(無)로 화해 버렸다. 

 그렇지만 그들의 도망길을 점점 더 어렸게 만든 것은 이런 외부적인 사정만이 아니었다. 같이 곤경의 길을 가는 동료들 편에서 오는 위험이 이제는 점점 더 심각하게 불어났다. 즉 자기가 가진 시가를 다 태워 버린 자들이 절망한 나머지 무턱대고 다른 동료들의 입에서 시가를 낚아채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수효는 서서히,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줄어들어 갔다. 

 아직도 약간의 예비 시가를 서류 가방 속에 휴대하고 있는 자들은, 다른 동료가 눈치를 못 채게 잔뜩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잖으면 자기 것이 바닥이 난 자들이, 저장자(貯藏者)들한테 달려들어 재산을 탈취하려 들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격투가 수없이 벌어졌다. 저장품을 얼마큼이라도 움켜 잡으려고 그들은 몽땅 한덩어리가 되어 아귀다툼을 벌였다. 그러는 가운데 시가는 길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고 소동 가운데서 짓밟혔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는 공포감이 회색 도당을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시내 쪽으로 점점 다가가면서, 또 다른 문제가 이들의 어려움을 가중(加重)시켰다. 대도시의 도처에는 수없이 많은 인간의 군상이 빽빽히 밀집해 서 있어서, 회색 도당들은, 마치 우거진 숲 속의 나무들을 헤쳐 나가듯이, 이 인간의 숲을 비집고 돌파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라깽이 꼬마인 모모로서야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다 못해 공중에 걸려 있는 작은 솜털까지도 꼼짝 않고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색 도당들은 잘못 보고 달려가다가는 거기에다 머리를 호되게 부딪게 되는 것이었다. 

 퍽이나 긴 길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걸릴지 모모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모모는 조심스럽게 시간의 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동안에 비로소 활짝 피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모모로 하여금 한 순간 모든 일을 잊어 버리게 만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어느 뒷골목에 도로청소부 베포가서 있지 않은가! 

 "베포 할아버지!" 모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소리치고 그에게 달려갔다. 

 "베포 할아버지, 사방으로 찾아 다녔어요! 그 동안 내내 어디 계셨어요? 왜 한번도 안 왔어요? 아아, 베포 할아버지!" 

 모모는 그의 목을 얼싸안으려 한다. 그렇지만 베포는 마치 강철로 된 형상처럼 모모를 퉁겨 물리쳤다. 모모는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폭포처럼 꼬마의 눈에서 쏟아졌다. 흐느끼면서 모모는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포의 조그만 몸집은 전보다 더 구부정해 보였다. 다정한 얼굴은 바짝 시들고 마르고 몹시 창백해졌다. 턱에는 까칠한 흰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면도를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너무나 많이 비질을 해서 거의 닳아 빠진 낡은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베포는 그렇게 서 있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잃고. 그리고는 작은 안경 너머로 거리의 오물(汚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자기의 존재를 깨닫게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지금에 와서야, 모모는 드디어 그를 찾아낸 것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이것이 그를 마지막 보는 것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일이 어떻게 되어 갈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일이 잘못 되어 간다면 베포 노인은 영원히 이렇게 여기에 서 있어야 할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거북이가 모모의 팔에서 바둥거렸다. 

 "계속해서 가!"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모모는 큰 거리로 되돌아 달려가 보고 깜짝 놀랐다. 시간 도둑이 하나도 안 보이지 않는가! 앞서 회색 도당이 도망치던 방향으로 잠간 뛰어 가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모는 그들의 자취를 잃어 버린 것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모모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한담! 물어 보는 시선으로 카시오페이아를 바라보았다. 

 "찾을 수 있어. 계속해서 가!"라고 거북이 등의 글자가 지시했다. 

 자, 카시오페이아가 미리 알고 있다면, 모모가 어떤 방향으로 굽어들든 간에 시간 도둑을 찾아내리라는 것은, 어찌 되었든 맞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모모는 무턱대고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계속 걸었다. 때로는 왼편으로, 때로는 오른편으로, 때로는 똑바로. 

 그러는 동안 모모는 똑 같은 주택들이 열지어 있고 일직선의 도로들이 지평까지 뻗어 있는, 신축지구(新築地區)가 확장되어 나가는 곳, 대도시의 북쪽 변두리에까지 이르렀다. 모모는 계속해서 달렸다. 하지만 모든 집과 거리가 서로 완전히 똑 같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같은 장소를 뱅뱅 도는 것같은 느낌이 곧 들었다. 그것은 진실로 미로(迷路)였다. 하지만 규칙과 획일이 지배하는 미로였다. 

 모모가, 용기를 잃어 가려는 찰나 갑자기 한 모퉁이로 마지막 회색 사나이가 돌아 가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절뚝거리고 있었다. 바지는 찢어지고 모자와 서류 가방도 없었다. 다만 심술궂게 꾹 다문 그의 입에서는 작은 회색 시가의 꽁초가 연기를 뿜고 있었다. 

 모모는, 끝도 없는 똑 같은 주택의 열(列) 중에서 별안간 단 하나의 예외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를 쫓아갔다. 그곳에는 집 대신에 널찍한 네모 난 땅을 둘러싸고 있는 거친 판자 울타리가 높게 세워져 있었다. 이 울타리에는 대문이 빼꼼이 열려 있었고, 마지막 회색 사나이가 그 안으로 후딱 미끄러져 들어갔다. 

 문 위에는 간판이 하나 붙어 있었다. 모모는 그것을 해독하느라 멈춰 섰다.


! 경고 !

극히 생명이 위험함

무자격자 출입엄금

 

21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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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는 경고판을 읽느라 잠시 지체했다. 그리고 문 안으로 살짝 들어갔을 때 마지막 회색 사나이는 이미 눈에 띄지 않았다. 

 앞에는 이십, 또는 삼십 미터의 깊이는 실히 됨직한 어마어마한 건축 공사장이 패여 있었다. 준설기(浚渫機)며 다른 건축용 기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공사장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경사진 찻길에는 몇 대의 화물차가 달리던 상태로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도처에 공사장의 노동자들이, 저마다의 자세로 움직임을 잃고 굳어져 있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간담? 모모는 마지막 회색 사나이가 들어 갔음 직한 입구는 아무래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시오페이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북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거북이 등에는 아무런 글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모는 공사장 밑바닥으로 기어 내려가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문득 다시 한번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 니콜라가 서 있었다. 그 당시 자기의 방 벽에 아름다운 꽃을 그려 주었던 미장이 니콜라가 서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잃고 있었지만 그의 자세는 참으로 기묘했다. 누구인가를 향해 뭐라고 외치려는듯 손을 입에 대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공사장 바닥에 솟아있는 자기 옆의 커다란 파이프 구멍을 가리키고 서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눈길은 지금 마침 모모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모모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그것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 들여 파이프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들어서기가 무섭게 모모는 미끄러 떨어졌다. 파이프는 가파른 내리막이었던 것이다. 이 파이프는 사방으로 꼬불꼬불 돌아 내려가고 있어서, 모모는 마치 미끄럼틀에 앉은듯, 이리저리 부딪치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너무나 무서운 속력으로 아래로 깊이깊이 떨어지는 바람에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어떨 때는 거꾸로 굴러서 머리를 앞으로 꽝 받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거북이와 꽃은 꼭 붙들고 놓치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추워졌다. 

 문득 모모는 대체 어떻게 여기를 다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처 생각을 제대로 펴기도 전에, 갑자기 파이프가 끝나고 지하의 복도가 나타났다. 여기는 이미 어둡지가 않았다. 사방의 벽에서 반사되는 듯한 어스름한 잿빛이 지배하고 있었다. 

 모모는 일어서서 계속 달렸다. 맨발이었기 때문에 모모의 발걸음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아까 회색 사나이의 발자국 소리가 다시금 앞쪽에서 들려왔다. 모모는 발자국의 울림을 뒤쫓았다. 

 이 복도로부터 사방으로 다른 통로가 갈라져 나가 있었다. 그것은 신축지구의 땅 밑으로 뻗어 있는 이른바 지하총맥락(地下叢脈絡)인 모양이었다. 

 이제는 웅성거리는 음성들이 들려왔다. 모모는 웅성거리는 쪽을 향해 걸어가 한쪽 구석에서 조심조심 안을 엿보았다. 

 모모의 눈 앞에는 그야말로 끝없이 긴 회의용 탁자가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홀이 전개되었다. 그 탁자를 가운데 두고 회색 도당이―엄밀히 말해서 남아 있는 회색 도당이 몽땅―두 줄로 길게 앉아 있었다. 지금의 이들 시간 도둑 잔당(殘黨)의 몰골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양복은 모두 찢겨져 있었고, 회색 대머리는 생채기와 혹 투성인데다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만 그들의 시가만은 여전히 불붙어 있었다. 

 모모는 맨 뒤쪽 홀의 뒷벽에 있는 거대한 철판문이 약간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홀 안에서부터 얼음처럼 싸늘한 기운이 불어 나왔다. 그래야 소용 없다는 것을 겪었으면서도 모모는 웅크리고 주저앉아 맨발을 치마로 감쌌다. 

 "우리는," 탁자의 맨 머리쪽 철판문 앞에 앉은 한 회색 사나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재고(在庫)를 절약해서 취급해야겠소. 그것으로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오. 우리는 우리의 수를 제한해야겠소." 

 "어차피 우리는 몇 남아 있지 않소!" 다른 자가 고함쳤다. "재고는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오!" 

 "일찍 절약을 시작할 수록," 연사는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더욱 오랜 시간을 버티게 되오. 절약한다는 내 말의 의미를 여러분은 아실 것이오. 이 재앙을 견디고 남아야 할 우리의 인원은 몇이면 충분하오. 우리는 이 상황을 냉정하게 보아야 하오! 자, 여러분, 여기 앉아 있는 우리의 수는 너무 많소. 우리는 우리의 수를 대폭 감축해야겠소. 이것은 이성(理性)의 명령이오. 여러분, 지금 번호를 불러 주시겠소?" 

 회색 도당은 번호를 불렀다. 그러자 의장은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설명을 했다. "제비를 뽑겠소. 숫자가 새겨진 면이 나오면 짝수를 가진 자가 남는 것이고, 머리 면이 나오면 홀수를 가진 자가 남는 거요." 

 그는 동전을 높이 던지고는 주워 들었다. 

 "숫자 면이오!" 그는 소리쳤다. "짝수의 사람들은 남고 홀수 사람들은 즉석에서 해체하도록 하시오!" 

 억양 없는 신음이 패배자의 열(列)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짝수를 가진 시간 도둑들은 다른 이들의 시가를 인수했고, 선고받은 자들은 무(無)로 해체됐다. 

 "자, 그럼" 하고 의장은 말없는 좌중을 향해 말했다. "똑같이 또 한 번 할까요." 

 똑 같은 소름 끼치는 과정이 두번, 세번, 결국 네번까지 진행되었다. 끝에 가서는 겨우 여섯명의 회색 도당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세명씩 끝없이 긴 탁자의 머리쪽 끝에 마주 앉아 싸느랗게 쳐다보고 있었다. 

 모모는 몸서리를 치면서 이 과정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 회색 도당의 숫자가 줄어들어 갈 때마다 무시무시한 추위가 현저하게 덜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전에 비하면 지금은 어느새 한결 견딜 만해졌다. 

 "여섯이란," 그들 중 한 회색 사나이가 말했다. "불쾌한 숫자요." 

 "이제는 됐소." 탁자의 다른 편에 있는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의 수를 더 줄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소. 여기 여섯으로 이 재앙을 버텨 이겨내지 못한다면, 셋으로도 역시 안되는 것이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오." 앞서 말한 자가 설명했다. "그렇지만 필요한 경우엔, 언제라도 또 그것을 얘기할 수 있소. 나중에 말이오."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어떤 자가 말했다. "재앙이 시작될 때 저장 창고가 열려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그 결정적 순간에 잠겨 있었더라면, 지금은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열 수가 없었을 것이오. 우리는 완전히 패배했을 것이오." 

 "미안하지만 당신 의견이 완전히 옳지는 않소, 동지." 다른 자가 대답했다.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냉동실의 냉기(冷氣)가 새어 나오고 있소. 시간이 가면서 시간의 꽃들은 녹아 버릴 것이오. 그렇게 되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꽃들이 원천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을 우리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오." 

 "당신 생각으로는" 하고 세번째 사나이가 물었다. "우리의 냉기가 재고량을 충분히 냉동시킬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인가요?"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여섯 뿐이오." 두번째 사나이가 대꾸했다. "우리가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는 당신 자신도 헤아릴 수 있을 것이오. 우리의 수를 그렇게 사정없이 줄인 것은 굉장히 경솔했던 것 같소. 이래 가지고는 우리는 이길 수가 없소." 

 "두 가지의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택해 우리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오." 첫번째 사나이가 소리쳤다. "어차피 결단은 내려진 것이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우리는 몇 년이고 여기에 앉아 서로를 감시나 하고 있을 것 같군요." 한 사나이가 입을 떼었다. "솔직히 말하면, 암담한 전망입니다." 

 모모는 깊이 생각했다. 여기 마냥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의미 없는 일이야. 회색 인간들이 완전히 없어졌다면야, 시간의 꽃들이 저절로 녹아 버리겠지. 하지만 우선은 그들이 엄연히 남아 있지 않은가. 내가 손을 쓰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그냥 존재할거야. 그렇지만 저장 창고가 저렇게 열려 있어서 시간 도둑들이 마음대로 조달을 받을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담?" 

 카시오페이아가 바둥거렸다. 모모는 거북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저 문을 닫아!" 라고 거북이 등에 쓰여 있었다. 

 "그렇게 안돼!" 모모가 속삭였다. 

 "문도 움직여지지 않잖아." 

 "꽃으로 건드리면 돼!" 이것이 대답이었다. 

 "시간의 꽃으로 건드리면 문을 움직일 수 있니?" 모모가 소근거렸다. 

 "너는 그렇게 하게 돼" 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카시오페이아가 그렇게 미리 알고 있다면, 필시 맞는 얘기일 것이다. 모모는 거북이를 살그머니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그동안 벌써 상당히 시들어 꽃잎이 몇 잎 남지 않은 시간의 꽃을 웃도리 밑에 감추었다. 

 그 다음 모모는, 여섯 회색 도당의 눈에 띄지 않고 긴 회의용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거기서부터는 네 발로 기어서 회의석 저쪽 끝에 이르렀다. 이제 모모는 바로 시간 도둑들의 발 사이에 앉게 되었다. 가슴이 터질듯이 고동쳤다. 

 살금살금 소리 없이 모모는 시간의 꽃을 꺼내어 이빨 새에 물고는, 회색 도당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의자의 틈새를 빠져 나갔다. 

 이윽고 열려 있는 철문에 이르러 모모는 꽃으로 문을 건드림과 동시에 손으로 밀었다. 고정되었던 문의 돌쩌귀가 움직였다. 과연 문이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꽝 소리를 내며 잠겼다. 꽝 하는 울림은 홀 안과 수천 갈래의 지하의 통로로, 겹겹의 메아리를 지며 퍼져갔다. 

 모모는 발딱 일어났다. 자기들 외에 이 완벽한 정지(停止)의 상태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어떤 다른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계산하지 못했던 회색 도당들은, 놀란 나머지 얼이 빠진듯 의자에 앉은 채 모모를 노려보았다. 

 정신없이 모모는 그들을 지나 홀의 출구를 향해 달렸다. 그러자 회색 도당도 벌떡 일어나서 모모를 뒤쫓았다. 

 "맹랑한 꼬마 모모요!" 

 어떤 자의 고함이 들렸다. "모모야!" 

 "그럴 리가 없소!" 다른 자가 소리쳤다. "어떻게 그 애가 움직일 수가 있소?" 

 "그 애는 시간의 꽃을 갖고 있소!" 세번째 사나이가 고함쳤다. 

 "그 꽃으로" 네번째 사나이가 물었다. "문을 움직였단 말이오?" 

 다섯번째 사나이가 날뛰며 이마를 쳤다. "그렇다면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었소! 우리도 꽃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소!" 

 "가졌었소! 가졌었어." 여섯번째 사나이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렇지만 이젠 문이 잠겼소! 구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소. 꼬마의 시간의 꽃을 빼앗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만사가 끝장이오!" 

 그러는 새에 모모는 수없이 갈라져 나간 통로의 어디멘가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는 회색 도당이 훨씬 지리에 밝았다. 모모는 이리저리 닥치는대로 도망을 쳤고, 어떤 때는 추적자가 손에 잡힐듯이 접근을 해 왔지만 번번이 용케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카시오페이아 역시 자기의 방식으로 이 추격전에 참여를 했다. 거북이는 아닌게 아니라 느림보로 길 줄 밖에 몰랐지만, 추적자들이 어디로 좇아갈 지를 항상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맞춰 제 때 그 자리에 다달아 도중에 엎드려 있어서, 회색 인간들이 걸려 비트적거리거나 바닥에 딩굴도록 만들었다. 뒤 따라 오는 사람은 넘어진 사람 위로 엎어졌다. 이런 식으로 거북이는 거의 틀림없이 붙잡히게 될 뻔한 모모를 여러 차례 구해 주었다. 물론 그러는 가운데 거북이 자신은 발걸음에 채여서 날려가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도 거북이는 계속해서 그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렇게 하게 되리라는 것을 거북이 자신은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추격전에서 몇 사람의 회색 도당은―시간의 꽃을 탐(貪)하는 나머지 정신이 빠져서―시가를 잃어 버리고는 하나씩 하나씩 무(無)로 화해버렸다. 그래서 결국은 그들 중의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모모는 긴 회의용 탁자가 있는 큰 홀로 되돌아 도망을 쳤다. 두 사나이는 탁자를 뱅뱅 돌며 모모를 추적했지만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갈라져서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이제 모모로서는 빠져 나갈 길이 없어졌다. 모모는 큰 홀의 한 구석에 몰려 선 채 두 추격자를 겁에 질려 쳐다보고 있었다. 꽃을 꼭 감싸 안은 채. 꽃에는 이제 가물가물 시들어가는 세개의 꽃 잎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첫번째 추적자가 꽃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라 두번째 추적자가 그를 밀쳐냈다. 

 "안돼," 그는 소리쳤다. "꽃은 내 것이오! 내 것이야!" 

 두 회색 사나이는 서로 밀쳐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통에 첫 추적자가 둘째의 입에서 시가를 쳐냈다. 그러자 둘째 추적자는 유령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빙 돌더니 투명하게 무(無)로 화하며 사라졌다. 그리고나서 최후의 회색 사나이가 모모에게 다가왔다. 그의 입 가에서는 아직도 작은 시가 꽁초가 연기를 뿜고 있었다. 

 "자, 꽃을 내놔!" 헐떡이며 말하는 중에 작은 꽁초가 그의 입에서 떨어져 굴러갔다. 회색 사나이가 바닥에 몸을 던져 꽁초를 향해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거기까지 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잿빛 얼굴을 모모에게 돌리고 가까스로 반쯤 몸을 일으켜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었다. 

 "부탁이다." 그는 중얼거렸다. "제발, 아가야, 꽃을 다오!" 

 모모는 여전히 구석에 박혀 선 채 꽃을 꼭 껴안고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정말 한 마디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최후의 회색 인간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된거야"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잘 된거야. ……이제……모든 것이……지나가……버린 것은……." 

 그리고 나서 그도 사라져 버렸다. 

 모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가 누워 있던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는 "문을 열어" 라는 글자를 등에 쓴 채 카시오페이아가 꾸물대고 있었다. 

 모모는 문으로 가서, 단 하나의 마지막 꽃잎이 달려 있는 시간의 꽃으로 다시 문을 건드려서 활짝 열었다. 

 최후의 시간 도둑이 사람짐과 동시에 추위도 사라졌다. 모모는 놀라서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어마어마하게 큰 저장 창고로 들어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의 꽃들이 끝없는 선반에 유리잔처럼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그 중의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찬란해 보였다. 요컨대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수십만, 수백만의 인생의 시간이었다. 온실 안처럼 점점 따스해졌다. 

 모모 자신의 시간의 꽃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짐과 동시에 갑자기 일종의 폭풍이 몰아쳤다. 시간의 꽃들이 구름처럼 모모의 꽃 주위로 몰려와 소용돌이치며 지나갔다. 그것은 흡사 따스한 봄날의 폭풍 같았다. 하지만 실은 온통 자유로와진 시간으로 뭉쳐진 폭풍이었다. 모모는 꿈꾸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바로 앞 바닥에 있는 카시오페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북이 등에는 빛나는 글자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집으로 빨리가, 꼬마 모모. 집으로 가!" 

 그리고 이것이 모모가 카시오페이아를 본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곧 꽃들의 폭풍이 그야말로 설명할 수 없이 세차게 몰아쳐 와서 모모는, 자기 자신도 바로 꽃이 된듯이 떠 받쳐져 그 폭풍에 실려 어두운 통로를 지나 땅 위로, 대도시 위로 밀려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모는 점점 크게, 크게 뭉쳐지는 거대한 꽃구름에 묻혀 지붕과 담 위를 날았다. 그것이야말로 찬란한 음악에 맞춘 일종의 흥겨운 무도(舞蹈)였다. 모모는 그 속에 떠서 아래 위로 흔들리며 선회(旋廻)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 꽃구름은 서서히 살그머니 가라앉았다. 꽃들은 경직된 세계 위로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눈송이처럼 살며시 녹아들어 다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꽃들이 속했던 원천으로, 인간의 마음 속으로 되돌아 가기 위해서. 

 이 순간, 시간은 다시 시작되었다. 만물은 새로이 활기를 띠고 생동하기 시작하였다. 자동차가 달리고 교통순경들은 호각을 불었다. 비둘기가 날고 강아지는 가로등에 오줌을 갈겼다. 세계가 한시간 동안 정지해 있었더는 사실에 관해서 인간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정지와 새로운 시각 사이에는 사실상 전혀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간들한테는 눈 깜짝할 찰나처럼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들은 갑자기 끝없이 많은 시간을 갖게 된 것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것을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신비스럽게 되돌아온 자기 자신이 절약한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 왔을 때, 모모는 어느 거리에 서 있었다. 그곳은 지난 번 베포를 보았던 뒷골목이었다. 그런데 과연, 거기 베포가 여전히 있지 않은가! 등을 보인 모습으로, 빗자루로 몸을 가눈 채, 지난 번과 똑 같이 깊은 생각에 잠겨 앞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갑자기 조금도 서둘 필요가 없어졌고, 어째서 이렇게 별안간 위안과 충만한 희망을 느끼게 되었는지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마도"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사 나는 십만 시간을 절약했고 모모가 풀려 나왔는지 몰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누구인가 웃도리를 잡아 당기는 바람에 몸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 앞에 꼬마 모모가 서 있지 않은가! 

 이 다시 만남의 기쁨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마 세상에 없으리라. 두 사람은 웃음과 울음을 뒤바꿔가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것은 물론 기쁨에 겨워 취했을 때 늘 그렇듯이 온통 실없는 소리를.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얼싸안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멈춰서서 즐거워하며 같이 웃고 울었다. 이제야말로 그들도 모두 그럴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베포는 빗자루를 어깨에 메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날은 청소를 하러갈 생각조차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시내를 지나 원형극장 옛터로 향해 걸었다. 서로가 끝도 없이 할 얘기가 많았다. 

 한편 대도시 안에서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광경이 벌어졌다. 어린이들은 거리 한복판에서 놀이를 하고,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운전수들은 미소를 머금고 구경을 했다. 그 중의 어떤 이는 차에서 내려 무턱대고 같이 놀았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서서 정답게 말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자세히 묻고 있었다.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도 창가의 꽃들에 감탄하거나 새에게 모이를 줄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의사들도 이제는 모든 환자한테 친절하게 봉사할 시간이 있었다. 노동자들도 맘 놓고 애착을 갖고 맡은 바 일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최소의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가져 오는 일이 이제는 문제시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누구나가 어떠한 일에든지 자기가 필요한 만큼, 원하는 만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부터야말로 다시 충분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누구의 덕분인지, 그리고 그들에겐 눈 깜짝할 찰나였던 그 순간 동안 참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채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믿지 않았으리라. 이 진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모모의 친구들뿐이었다. 

 사실, 꼬마 모모와 베포 노인이 그날 원형극장 옛터로 되돌아 왔을 때, 모든 친구들이 이미 거기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여행안내원 지지, 파올로, 마시모, 프랑코, 꼬마 동생 데데를 데리고 온 마리아, 클라우디오, 그리고 그밖의 어린이들, 주막집 주인 니노, 그의 뚱뚱보 마누라 릴리아나, 그리고 그들의 갓난애, 미장이 니콜라, 그리고 그 전에 항상 모모를 찾아 왔었고 모모를 지니고 있었던 이웃의 모든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이어서 축제가 벌어졌다. 오로지 모모의 친구들만이 누릴 줄 아는 즐거운 축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옛 별들이 뜰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 환성과 포옹, 악수와 웃음, 그리고 뒤섞인 소음이 잦아들고나자 모두가 잔디로 뒤덮인 돌계단 위에 둥글게 앉았다. 완전히 조용해 졌다. 

 모모가 한가운데 텅 빈 둥근 터에 섰다. 모모는 별의 음성과 시간의 꽃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맑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초공간의 집에서는, 되돌아간 시간에 의해 처음이자 유일한 잠으로부터 깨어난 호라 박사가 아담한 꼬마 식탁 앞 의자에 앉아서 만물투시 안경을 통해 모모와 그의 친구들을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중병에서 갓 회복된듯이 여전히 퍽 창백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의 눈만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발에 무엇이 건드려지는 감촉을 느꼈다. 안경을 벗고 내려다 보았다. 그 앞에 거북이가 앉아 있었다. 

 "카시오페이아." 그는 정답게 말하며 거북이의 목을 어루만졌다. "너희들, 참 잘 해 주었다. 나한테 전부 얘기를 해 줘야겠어. 이번에만은 나도 너희들을 볼 수 없었거든." 

 "나중에요!" 라고 거북이의 등에 쓰였다. 그러더니 카시오페이아는 재채기를 했다.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니니?" 호라 박사는 걱정스레 물었다. 

 "왜 아니겠어요!" 카시오페이아의 대답이었다. 

 "회색 도당의 냉기 때문에 걸린 것이로구나." 호라 박사는 말했다. "네가 정말 굉장히 피곤하고, 드디어 근본적으로 한번 쉬고 싶어하리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럼 가서 쉬렴." 

 "고마와요!"라고 거북이 등에 쓰였다. 

 그리고 카시오페이아는 절뚝거리며 조용하고 어두운 구석을 찾았다. 그리고는 머리와 네 발을 웅크려 넣었다. 거북이의 등에는 이 이야기를 읽은 독자만이 알아 볼 수 있는 글자가 서서히 나타났다. * 


                                     - ENDE -

 

작가의 짧은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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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지 않은 나의 독자들은 지금 마음 속에 숱한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도와 줄 수 없을 것 같아 염려스럽다. 사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대로 기억에 따라 썼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나는 꼬마 모모도, 그들의 친구 중의 아무도 본 적이 없다. 그 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오늘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모른다. 또한 대도시에 관해서도 오로지 나의 추측에 의존했을 뿐이다.

 한가지, 내가 아직 밝혀 두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그 당시 나는 마침 긴 여행을 하고 있었다(나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그 때 나는 내가 탄 기찻간에서 어떤 묘한 승객을 만났다. 묘하다는 것은 나로서는 그의 나이를 도저히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왠 노인이 내 앞에 앉아 있거니 생각했었는데 곧 나는 내가 착각을 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행자는 갑자기 아주 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인상 역시 곧 어느 새 틀린 것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긴 밤 여행 동안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우리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자 이 수수께끼같은 승객은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을 나는 독자 앞에 털어놔야 할 것 같다.

 "나는 당신에게 이 모든 것을 이미 있었던 일처럼 얘기했습니다." 즉 그 말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얘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것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 역에서 내렸음에 틀림없다. 한참 후 내가 그 칸에 나 혼자 있는 것을 깨달았던 걸 보면.

 유감스럽게도 그 이후 나는 그 이야기꾼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히 그를 다시 한번 만나는 경우에는, 나도 그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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